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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해제
1607年(宣祖 40) 경남 함안의 용화산(龍華山) 아래 낙수(洛水:낙동강)에서
한강 정구 , 망우당 곽제우, 여헌 장현광 등 35인이 벌였던 뱃놀이 사실을 1758년(英祖 34) 무렵 박진영(朴震英)의 증손 박상절(朴尙節)이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편집·간행하였다. 1757년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쓴 기락편방서(沂洛編芳序)가 첫머리에 있고‚ 이어서 함께 뱃놀이를 했던 한강 정구(鄭逑)·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함안군수 박충후(朴忠後)· 여헌 장현광(張顯光) 등 35인의 명단을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 에 기재된 34인의 사적을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과 행장(行狀) 등에서 발췌한 용화제현행적(龍華諸賢行蹟)이 실려 있다. 그 뒤에 1620년(光海君 12) 조임도(趙任道)가 쓴 용화산하동범록추서(龍華山下同泛錄追序)와 1728年(英祖 4)에 박상절이 쓴 근서용화산하동범록(謹書龍華山下同泛錄)‚ 용화산 주변 풍경을 여덟 폭 그림에 담고 그림마다 박상절이 지은 5언 절구 1수씩을 붙인 용화산하동범도(龍華山下同泛之圖)와 도설(圖說) (1744년)을 덧붙였다. 특히 조임도(趙任道)의 추서(追序)에는 당시 성대했던 모임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한강, 여헌, 망우당 세 선생을 한자리에서 만났던 감격이 잘 드러나 있다.
박상절의 기락편방록 자료에 추가로 관련 자료를 보충했다.
2019년 2월 13일 여헌 후손 장달수 쓰다.
0 龍華諸賢行蹟
1607년(宣祖 40) 한강 정구‚ 망우당 곽재우, 여헌 장현광이 함안의 용화산(龍華山) 아래에서 뱃놀이를 할 때 광서(匡西) 박진영(朴震英)이 종유(從遊)하였고‚ 그후 28년이 지난 1634년(仁祖 12)에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현풍(玄風)의 풍영대(風詠臺)에서 유회(遊會)할 때 완석당(浣石堂) 박형룡(朴亨龍)이 종유(從遊)하였는데‚ 박진영과 박형룡의 현손(玄孫)인 박상절(朴尙節)이 이에 “용화산하동범록”과 “풍영대제명석각도”를 묶어기락편방(沂洛編芳)이라 제목을 붙혀 1758년(英祖 34)경에 刊印한 것이다.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 정구(鄭逑)를 비롯한 배를 같이 탄 35人의 명단인데‚ 정구‚ 곽재우‚ 박충후‚ 장현광 등 4명은 이름. 자. 호. 시호. 관작의 순으로 나이에 따라 첫머리에 적고‚ 이하는 이름·자·생년·본·호의 순으로 나이에 따라 적고 있다. 끝에 집회의 시기가 1607년(宣祖 40) 3월 28일임을 밝였다.
*용화산하동범록추서(龍華山下同泛錄追序) : 여헌의 문인인 조임도(趙任道)의 추가서문(追序)으로 1621년(光海君 13)에 쓰여지며 내용의 대개는 집회때 이명호(李明怘)가 좌객(坐客)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을 정구가 “용화산동범록“이라 칭하였다.
그후 안정우(安挺偶)에게서 그 초고(草蒿)를 얻어 중수하였다.
*근서용화산하동범록(謹書龍華山下同泛錄) : 1728년(英祖 4)에 박상절(朴尙節)이
조임도(趙任道)의 현손(玄孫)인 조홍엽(趙弘燁)에게서 동범록(同泛錄)을 얻어 추선경현(追先景賢)의 성의을 다하고자 펴낸다는 내용이다.
*용화산하동범지도(龍華山下同泛之圖) : 1.용화악(龍華嶽)‚ 2. 청송사(靑松寺)‚ 3. 도흥보(道興步)‚ 4. 내내촌(柰內村)‚ 5. 경양대(景釀臺)‚ 6. 시우포(是藕浦)‚ 8. 평사면(平沙面)‚ 8. 창암사(滄巖舍) 등의 그림이 있고‚ 이어서 1744년에 쓰여진 박상절의 도설(圖說)이 있다
鄭寒岡 諱逑 字道可 號寒岡 諡文穆公 65세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郭右尹 諱再祐 字季綏 號忘憂堂 諡忠翼公 56세
1552(명종 7)∼1617(광해군 9)
朴咸安 諱忠後 字景 당시 함안군수 56세
1552년(명종7)~1611년(광해3)
張旅軒 諱顯光 字德晦 號旅軒 諡文康公 54세
1554(명종 9)∼1637(인조 15)
李佶 汝閒 戊戌 咸安 獨村 1538(중종33) 70세
成景琛 仲珍 癸卯 咸安 鵲溪 1543(중종38) 65세
辛礎 支叟 己酉 靈山 聞嚴 1549(명종4) 59세
趙埴 克成 己酉 咸安 立嵒 1549(명종4) 59세 조임도의 아버지
李潚 汝澄 庚戌 咸安 葛村 1550(명종5) 58세
盧克弘 毅甫 癸丑 昌寧 沃村 1553(명종8) 55세 한강 생질
辛邦楫 汝濟 丙辰 靈山 永慕堂 1556(명종11) 52세
趙垹 克精 丁巳 咸安 伴鷗亭 1557(명종12) 51세 조임도의 숙부
李厚慶 汝懋 戊午 靈山 畏齋 1558(명종13) 50세
羅翼南 天紀 戊午 咸安敎授 1558(명종13) 50세
李道孜 至之 己未 靈山 復齋 1559(명종14) 49세
兪諧 欽哉 乙丑 靈山進士 1565(명종20) 43세
李明怘 養初 乙丑 咸安 梅竹軒 1565(명종20) 43세
李道由 明之 丙寅 靈山 滄浪叟 1566(명종21) 42세
朴震英 實哉 己巳 咸安 匡西 1569(선조2) 39세
李明憼 一初 己巳 咸安 菊庵 1569(선조2) 39세 여헌 문인
李明念 而聖 辛未 咸安 永慕齋 1571(선조4) 37세
辛膺 伯禧 壬申 靈山 奉事 1572(선조5) 36세
李明愨 子純 壬申 咸安 1572(선조5) 36세
李明悆 慶初 癸酉 咸安 1573(선조6) 35세
安侹 子長 甲戌 咸安 道谷 1574(선조7) 34세
李時馠 聞遠 乙亥 高靈 1575(선조8) 33세
郭瀅 淸叔 戊寅 玄風 1578(선조11) 30세
李道一 貫之 辛巳 靈山 消憂軒 1581(선조14) 27세
李蘭貴 夢與 甲申 星山 瑟谷 1584(선조17) 24세
柳武龍 景溧 甲申 星山 1584(선조17) 24세
趙任道 致遠 乙酉 咸安 澗松堂 1585(선조18) 23세 여헌문인
李道輔 益之 丁亥 靈山 益庵 1587(선조20) 21세
李瀣 而浩 丁亥 靈山 1587(선조20) 21세
李忠民 汝直 戊子 漆谷 1588(선조21) 20세 여헌문인
崔門柱
林眞怤(부) 樂翁 병술 林谷 1586(선조 19) 22
(원문에는 빠짐)
皇明萬曆丁未孟春二十八日 1607년(선조40)
0 第一 寒岡 鄭先生 당시 65 세
0 정구(鄭逑)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성주(星州) 출신.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판서 사중(思中)의 아들이다. 성주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한 인연으로 성주에 정착하였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일컬었다.
7세 때 《논어》와 《대학》을 배워 대의를 통하였으며,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생이 되어 《주역》 등을 배웠다. 겨우 건(乾)·곤(坤)두 괘만 배우고 나머지는 유취하여 8괘와 64괘의 뜻을 쉽게 통하였다 하니 그의 재주가 얼마나 비상하였던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퇴계 이황(李滉)·남명 조식(曺植). 대곡 성운(成運)에게 배웠다. 과장(科場)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귀향하였고, 그 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구도의 일념으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573년(선조 6)에 동강 김우옹(金宇顒)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계속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그때마다 사임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따라서, 그는 학문하는 자세와 인격수양의 방법은 퇴계 닮았고, 천성이 호방하고 원대한 기상은 남명의 모습 그대로였다.
1580년 창녕현감을 시초로 하여 그 이듬해에 사헌부지평, 1582년에 군자감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1584년 동복현감에 이어, 1585년에 교정청의 교정랑이 되어 《경서훈해 經書訓解》를 교정하였다.
1591년 통천군수에 부임하고,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각군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도록 선도하였다.
1594년에 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석방하라는 상소를 올린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하였으며,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향우문도(鄕友門徒)를 모아 교육하였다. 그는 관도에 나왔으나 내직을 사양하고 주로 외직을 맡았다. 이것은 당쟁에 얽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앙정계보다 외직을 맡아 자신의 덕치주의 이상인 지방학문을 융성시키고 민중을 교화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학문세계는 우주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경서(經書)·병학·의학·역사·천문·풍수지리 등 모든 분야에 통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예학(禮學)은 특출하였다.
그의 예는 가깝고 먼 것을 정하고, 믿고 못믿음을 결정하고, 같고 다름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밝히는 기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조반정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의 학령서원(學翎書院), 통천의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先生諱逑字道可號寒岡淸州人祖應祥學於寒暄寒暄愛其志行歸以女生子曰思中卽先生之考也娶星州李氏生先生于嘉靖癸卯生有異質英睿秀發見者稱以神童七八歲受大學論語通大義稍長執贄於吳德溪健受易乾坤二卦以類而通無異夙慣嘗選鄕解不赴會試遂棄科業以古聖賢自期慨然有復古之志博考經傳抄定四儀且稽深衣欄杉籩豆篚爵古制用之於家鄕閭從化焉往尋退陶南冥大谷三先生問業
俱心許之萬曆癸酉薦拜禮賓參奉不就戊寅銓曹請敍六品連授司圃主簿三嘉義興知禮縣監皆辭庚辰拜昌寧始赴召宣廟親見問曰爾師李滉曺植乎且問二人氣象學問對曰李滉德器宏厚踐履篤實曺植器局峻整才氣豪邁因論大學工程曰三綱八條無非修己治人之方而天德王道在謹獨嘉納之下車以正業興學倣家塾之制設書齋置訓長日課敎讀坐明倫堂引諸生討論春秋釋奠以至社稷城隍厲祭無不躬莅行鄕飮鄕社養老禮一邑風勵吏畏民懷辛巳以持平徵昌人立生祠祀之壬午拜軍資判官稱疾去癸未卜築於檜淵蒔梅竹號百梅園聚鄕友門徒月朔講會激勸奬進成就者多拜忠淸江原兩道都事刑工戶三曹郞皆辭甲申特授同福縣敦論遣之其所施設如昌丙戌拜咸安凡遇水旱必躬禱靡不驗應昌寧有父子疑訟方伯使先生治之訟者首服父子乃定戊子卽閑于百梅園辛卯拜通川壬辰大駕西狩先生仗義討賊傳檄列郡宣廟母兄河陵君繼死於窮山中先生聞而痛之設機捕賊尋屍手自殮之聞于行在所上深加傷感命陞通政拜江陵府使甲午入爲同副承旨上方講易問晦庵遇遯焚稿曰此疏若入宋其庶幾而反遇遯封占筮之道不可謂天下之至神而朱子之心決於卜筮何也對曰若使宋寧一見封事便黜侂胄則其筮必不遇遯此占筮之所以至神也上復問程傳本義何先對曰易之道明乎消息盈虛之理進退語默之機不失乎時中也占候易之末也程傳宜先丙申拜江原監司築鴒原山城爲關東堡障丁酉拜成川秋倭寇再逞諮宮嬪王子咸聚于成川先生致敬禮供接有道特陞嘉善庚子瓜歸懿仁王后薨先生奔赴上疏論山陵事歷刑參觀象提調拜寧越郡守未赴留校正廳官俄拜忠州牧又被召於校正先生仲氏西川公病谻先生不離側親劑藥餌及卒自初終至卒哭庶事必自經紀不使虧憾癸卯退還故里除海光洪三州工曹參判皆辭丙午拜安東引法辭之不許至府有一寺奴托權相家撗[주:橫]恣先生鞠治不撓一境稱賀戊申宣祖昇遐先生拜大司憲三司請置臨海于法先生連章救之略曰殿下同氣之中與之同胎者秪有臨海殿下至懷有所不忍獄不必盡究人不必盡問罪不必盡核法不必盡施乞免者四乃遞夏拜刑參會哭國葬時人目以爲護逆累辭乞罷癸丑獄起辭連永昌大君上延慈殿先生封疏極陳擧周景王時佞夫事據春秋三傳證之曰父子大恩與天無極母子至情所當自盡深思古聖人烝烝之義謂天下無不是底而無變於前日之所以事之者言甚切直疏將上先生之子樟在都下恐先生得罪止之先生聞之更爲封事竝進前疏戊午廢母之議已決先生復草疏會聞光海有鄭某首倡全恩掠取美名之言不果進庚申寢疾而終年七十八前歲伽倻山崩卒之朝泗上木稼人謂之徵贈吏曹判書諡文䅣州之士子立書院以祀之先生少喪所怙事母夫人養志爲孝伯氏早卒仲氏出繼權攝宗事虔誠不怠奉寡嫂于家以事親之禮事之內外姪甥無間己出當其盛年抱負甚大宇宙間事無不以爲己責旁通曲暢淹貫殆遍算數兵陣醫藥風水俱曉源委爲文章亦宗晦庵蘊蓄旣宏充養又深戊申以後晦塞極矣免於辜幸矣先生所著有心經發揮冠儀婚儀葬儀禊儀五先生禮說羹墻錄聖賢風範古今忠謨洙泗言仁錄五服沿革圖深衣制度武夷志谷山洞庵志臥龍志歷代紀年古文會粹景賢續錄藏于家[주:海東名臣錄]
0 第二 忘憂堂 郭先生 당시 56 세 거주지 함안
0곽재우(郭再祐)1552(명종 7)∼1617(광해군 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경상남도 의령 출신.
황해도관찰사 월(越)의 아들이고, 남명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 동강 김우옹(金宇顒)과는 동서 사이이다.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려서 발표한 지 수일 만에 전방(全榜)을 파하여 무효가 되었다.
그뒤, 과거에 나아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 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서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해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시작으로 바로 형조정랑에 제수되었고,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하여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고,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하였으나, 그 역(役)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그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 남쪽 창암진(滄巖津: 솥바위나루)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었고,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하였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虎賁衛)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大護軍) 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바로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듬해 졸하였다.
그는 의병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그의 작전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을 구사하여 위장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하거나, 유인하여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수십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천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하였고, 그들의 진로를 차단하여 왜군이 계획한 호남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척을 기습하여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여 물리치고,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싸움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하여 적의 접근을 막기도 하였다.
그는 또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묘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다. 사후 그의 사우(祠宇)에‘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公諱再祐字季綏玄風人監司越之子越有五子公居第三病革以章服遺公曰世吾業者心汝也公天性孝友器宇宏遠豪俠好義識周庶務少從南冥先生學南冥妻以外孫女越嘗牧義州公在側三年一不近女色人服其操後越奉使朝京公從之相者異之曰必爲大人名滿天下公從事文學兼通武藝累捷鄕解又參庭試第二名下帷明經人莫之先丁外憂喪祭盡禮有愛妾病重請一見而死公曰訃可聞也見不可爲也服闋遂棄擧子業箬笠芒鞋漁釣自娛爲終老計年四十餘布衣窮居隣有美女其父母愛之常言不以與凡子必以爲宰相妾公曰若欲爲宰相妾與我其人奇其言而許之壬辰之亂杖劍首起以報國討賊告家廟屛妻孥
托其友傾家財募壯士據宜寧之倉粟取草溪之軍器逋將潰卒俱收幷用設施號令雷厲風飛遠邇響從賊將安國司聲言向湖南直抵鼎津公乃置壘伏弩萆山設疑兵賊不濟而退揭號天降紅衣將軍日擊江賊士未習戰怯於赴敵公着紅衣挺身先之賊砲雖齊發而終不能爲害又有良馬自至公取騎臨戰馳驟如飛衆以爲神助益恃以無恐連戰皆捷勦殺甚多而亦不斬馘焉撫士卒如家人雖最下者必盡其情及用法雖親貴不少貸焉賞罰嚴明血誠動人故能得其死力巡察使金晬稱勤王到龍仁奔還公諗于衆曰方伯築怨已稔民怒極矣性執而苛掣肘必矣與其僨事於後曷若祛患於始將在軍中苟利於國可以專之列罪傳檄疏聞行朝方伯大怒以叛逆論啓令軍官移書目之以賊公方馳援晉州倚馬而答曰義賊之分天地知之是非之判公論在焉惟晬之黨不得於言求之於秉彝之良心可也辭嚴義正人皆傳誦招諭使金誠一初到居昌見檄文問於學諭朴思齊曰再祐何如人也方伯命使安敢乃爾答曰乃是忠孝底人每言我家世受國恩若遇事變當捐身以之其意只知有國事不爲身計故有此擧也誠一色變曰朝廷處置未可知也吾當救此危
命遂反覆馳啓曰郭某性質朴而無文鄕曲以孝行稱之變生之初散家財以募士其妻諫曰奈何爲此浪死計再祐大怒拔劍欲斬之妻子衣服亦給戰士之妻自是一向擊賊不問賊之衆寡必先登馳突戰士勇氣百倍無不一當百馳馬掠陣往來倏忽或於馬上擊鼓徐行以爲行軍節度或令人吹笛鳴笳或山藪中吹角鼓譟或處處設伏寂若無人賊至輒射殺之或逐倭船臨岸追射無日不戰戰必獲勝斬馘之多最於諸將射殪者不知其數賊亦謂之紅衣天降將軍不敢登岸作賊宜寧三嘉兩邑人民皆安業力農五穀之盛無異平日道內餘城至今保存上嘉之命賞齎疏人特賜溫諭李公好閔付詩曰聞道紅衣將逐倭如逐獐爲言終戮力須似郭汾陽公雪涕厲士遮截水陸兵勢益張賊望風而走江右湖南賴以得完時金將軍德齡在湖南貽書曰將軍壯猷聞之已熟將軍氣槪仰之亦久身作長城控扼喉吭使江淮以西終始保障重恢盛業想必第一於凌煙德齡以耕鑿餘生半世篷蒿春宮召見駐次賜印給馬大朝又遣近侍加號撫軍無功被遇誰與我比夙夜憂懼身在春氷將軍挺不群之才智抱經世之韜略前後交鋒有勝而無敗德齡之倚以濟事者非將
軍而誰歟古人有言曰附驥尾則涉千里攀鴻翮則翔四海正謂鄙人之於將軍也公答書曰將軍以戡定之才奮爲國之忠擧事於板蕩之餘而戴髮含齒者莫不聞風抃躍以爲賊可掃淸國可中興則天心之悔禍而默佑者亶其然乎再祐自聞將軍之威聲喜不能寐曾是不意遠承辱書奉讀再三感懼交極將軍有神出鬼沒之智旋乾轉坤之力三箭天山不足定也一擧興邦分內事也而不鄙夷庸人至於專致盛示好問之誠出於尋常不敢當不敢當再祐旣乏智慮可以仰裨於妙計之筌蹄又無技勇可以追隨於電擊之後塵則其於厚望安敢有補於萬一乎所祝愛惜時日命促鵬程一掃兇醜再造王室而使吾東君民更躋於壽域則如再祐無用之身亦得以退老於昔日之所釣遊而一生之志願畢矣金將軍又以書報之◑公始授幽谷察訪刑曹正郞以領兵不赴後歷典星州晉州政淸如水匹馬布衣去來飄然未嘗久於其任也丁酉秋賊大擧入寇公以防禦使守昌寧火旺山城公弟再祉之奴犯門禁斬之孼族尹生之弟望不入城公使尹生及其季甲督還之不肯竝斬之積薪於舍館以示死守一軍服慄賊旣薄城公從容談笑但令堅守曰渠自知兵豈肯輕犯
經一晝夜果不戰渡江而西屠黃石陷南原列鎭皆潰體察使完平李公命公解兵公飛報曰齊城七十卽墨獨全唐兵百萬安市能當列城雖罷獨不可爲守乎拒之不從會公繼母許氏病卒於城中公以喪去入蔚珍持服杜門與子姪共造蔽陽子貿以取資累命起復終不應後以察理使按南邊又秉節蔚州欲繕島山城爲必守地朝廷不許公抗章棄歸臺官洪汝諄等以瀆慢劾之遂被謫靈巖未幾賜環入琵瑟山餐松辟穀拜善山安東仁同慶州尙州皆不就戊申拜本道左兵使己酉拜右兵使統制使皆不就庚申上京爲副摠管就職爲左尹咸鏡監司癸丑拜全羅兵使皆不就從仕京中惟食松葉而已後辭連逆獄得釋而歸就鷲山滄巖爲棲息地扁以忘憂永謝煙火作詩曰朋友憐吾絶火煙共成衡宇洛江邊無飢只在啗松葉不渴猶憑飮玉泉守靜彈琴心澹澹杜牕調息意淵淵百年盡過亡羊後笑我還應稱我僊善山人朴承旨守弘光海時未第嘗往訪之公曰將欲何往曰赴擧而歸耳公曰此時何用赴擧因設酌飮四五杯俄而曰爲酒所惱氣甚不平命取器來傾耳而瀉之酒從耳孔盡出亦異矣哉公患脹旣久子弟始覺之問曰何不早言使施鍼劑也公曰痼疾難醫死生有命余症非藥餌所治徒重汝輩憂故不言耳卒年六十六深山窮谷莫不驚悼如失長城焉◑贈諡忠翼立祠賜額[주:海東名臣錄]
0 第三 副摠管 朴公 당시 56 세 당시 함안군수.
0박충후(朴忠後) 1552년(명종7)~1611년(광해3)
본관은 순천, 자는 경술,
소격서 참봉 계창의 아들, 취금헌 박팽년의 5대손.
음직으로 선공감 감역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임진왜란때
창의한 공으로 원종공신이 되고 1594년(선조27)무과에 급제
하여 1596년 통정에 오르고, 1605년 함안군수로 나갔다.
함안 군민들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가선대부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이르렀다.
묘갈을 樂齋 徐思遠이 撰하다. * 장달수 첨록
公諱忠後字景述順天人昭格署參奉諱繼昌之子五世祖諱彭年號翠琴軒以刑曹參判節死於端宗朝世所謂大臣之一也南秋江孝溫爲之立傳公生於嘉靖壬子儀容端正才能出天奉先思孝待人以誠始以蔭補繕工監役未幾作宰咸昌吏懷民安中丁辰巳亂倡義募兵遮前截後多所捕獲錄原從勳甲午登武科丙申陞通政二十六年天使徐給事觀瀾陳御史效及諸天將相繼南下公迎勞甚勤館待以禮且輸米豆供饋將士天使嘉歎不已命館伴李好閔題名以贈五峯且留詩偈曰朴氏忠賢後河濱舜所陶從今天下士談勝數江皐用是朝廷特陞嘉善乙巳出守咸安政成郡人立石以頌旣而復入爲五衛都摠府副摠管辛亥卒享年六十[주:徐樂齋思遠撰碣]
詩○五言律
萬曆二十六年十二月十七日。欽差東征徐給事觀瀾,陳御史效,梁按察祖齡,丁主事應泰,給事接伴申點,御史接伴李某,布政接伴尹國馨,王事接伴白惟咸,御史接伴從事蘇光震相從過大丘河濱朴忠後莊。朴君迎勞甚勤。相與題名如右。
朴氏忠賢後。河濱舜所陶。今朝繡衣過。是處里門高。水繞開林館。山回隱節旄。從今天下士。談勝數江皐。(五峯先生集)
0 第四 旅軒張先生 당시 54 세
0 장현광(張顯光)1554(명종 9)∼1637(인조 15).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이씨(京山李 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8세때〈우주요괄첩 宇宙要括帖〉을 지어 대유(大儒)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침식을 잊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23세 때인 1576년(선조 9) 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란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평설 平說〉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씩 사직을 청하였고 이듬해 2월 또 세 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가다가 바로 방면되었다.
1598년 봄 봉화 도심촌에서 서애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 수암 유진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다음해 선산 월파촌으로 돌아옴)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郞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郞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주역》 교정에 참가하였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몇 달 만에 돌아갔다.
읍민이 세운 가사비에 이르기를
맑은 것은 얼음 만 한 것이 없고,
깨끗하기로는 옥 만 한 것이 없으니
아! 선생께서는
얼음과 같이 맑으시며, 구슬과 같이 깨끗 하시 도다.
則曰, 莫淸者氷, 莫潔者玉, 於乎先生 氷淸玉潔,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주역도설 周易圖說〉을 지었고, 68세 때 〈경위설 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다가 다음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하여 왕을 알현하였고, 곧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어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하여 사은하였고 계속하여 사헌부대사헌·부호군에,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다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 공조판사. 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졸하였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선생은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였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하였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 있어서는
퇴계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았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는데, 그의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하여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 파악하였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는 또 사단(四端)이 칠정(七情)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하여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문설(文說)」에서는 글이 육경을 중심으로 한 古文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고 「노인사업(老人事業)」 등에서는 노인은 기력이 소모되었으므로 시청·언동·동작·좌와(坐臥)에 있어서 조심할 것 등 노인이 평소 가져야 할 점을 설명하였다. 「서원설(書院說)」은 서원의 의의와 연혁 그리고 향제 등 그 소임을 밝힌 것, 「여헌설(旅軒說)」은 자호의 뜻과 풀이,「피대설(皮代 巾說)」은 어릴때 삼재(三才)의 이치와 우주인물 등의 제목을 적은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피대(皮代 巾)로 만들어 지니고 다닌 사실, 「동진설(同塵說)」에서는 은사의 행동거지 따위를 설명하였다. 「문무일체론(文武一體論)」은 천하의 도에 반드시 경위와 표리가 있듯이 문무도 그와 같은 것으로 문(文)이 경(經)·리(裏), 무(武)가 위(緯)·표(表)가 되어 일체라고 강조, 그 둘을 동일시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무를 경시하던 당시의 풍조에서 볼때 주목되는 주장이다.
저서로는 《여헌집》 11권, 《속집》 5권, 《성리설 性理說》 6권, 《역학도설 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 龍蛇日記》 2권 등이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선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同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입암서원(立巖書院)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先生諱 顯光 字 德晦 號 旅軒 玉山 人高麗 三重大匡 金 用 之後 贈 吏曹判書 諱 烈之子 嘉靖甲寅生于 仁同 之仁義坊
南山 奮第是日紫氣滿庭人 皆異之 九歲以 母夫人命就學于
善山 盧上舍守諴上舍 卽先生長姊兄也 一日 鄭新堂 子 愨 至其家見先生歎曰平生未嘗見如此佳器因曰吾何以贈之上舍戲曰苟欲相贈雖 乘馬亦可矣鄭歸卽脫送先生謝還之十二三歲日有 成就之益先生以慈闈無子弟侍側且爲學惟在自力 歸家侍奉不復就師早喜性理大全反覆玩索有所契 悟嘗作十帖子一曰會眞二曰一原三曰俯仰四曰中 立五曰傳統六曰載道七曰景慕入曰旁搜九曰遠取 十曰反躬書其末曰能做天下第一事業方爲天下第一人物名其帖曰宇宙要括蓋渾淪無眹之原太極動 靜二氣五行四時造化鬼神之妙性情道德 三綱 五常 禮樂敎化之毅 堯舜 禹 湯 文 武 周 孔 顏 曾 思 孟 有宋群 哲相傳之統三墳八索九丘 五經 河圖洛書八卦九疇 先天後天之學純臣忠臣義士隱逸人傑文人之類道 家法家佛家僊家陰陽術數 老 莊 楊墨之流天覆地載 山高海深和風時雨秋月寒水嚴霜轟雷生龍活虎松柏金玉之取象謹言敏行日乾夕惕靜存動察博文約禮之要法無不具括幷包於十帖之中于時先生年甫 十八而其體段之宏博已如此癸酉始冠二十三以才行卓異被薦己卯聘 西原 鄭氏寒岡 先生之從女許知 樞潛嘗牧 星州 問 寒岡 以好學之士曰 孔 門三千惟 顏 子 得好學之稱此豈易得哉近有張某志學求道德性 純熟異日爲吾師者未必非此人也甲午除 參奉 不赴 乙未特拜 報恩 縣監 門人 鄭四震 問出處道答曰出處 之義蓋不可以執一論也不仕無義矣而學未優則不可出也學已優而時不可則不可出也時則可而禮未 至則不可出也冒進非義矣而時雖不可禮已至則可以出也學雖未優親已老則可以出也貧無以自存則 可以出也夫冒進者不足道也而不仕有一不可一可恥者徒知潔身之爲高不知君臣之大義一切無意於仕進者是所謂一不可也中無自守之實外假自重之 迹要以耀其名高其價者是所謂一可恥也大抵仕學 非二道隨時應之道在其中要在不失其義而已九月 赴任季冬棄歸邑民遮留不得立石以寓思癸卯拜義 城一以治 報恩 者治之有 日省錄 纔三閱月失文廟位 版自劾而歸士民又立去思碑 光海 朝十餘年尤無當 世之念 鄭先生 爲群小擠陷棲遑洛泗間先生從之遊磨礱道義有充然自得之樂 仁廟改玉轉拜 持平 掌令皆辭甲子有逆适變大駕南遷未幾還都先生作奔問行至郊外受本職詣 闕肅謝卽引見天顏溫粹喜動彩眉曰聞名久矣日望上來與共國事而屢召不至反躬自責今來造朝予心甚喜對曰累恩稽謝負罪如山今遭無前之變不敢自安於家扶病奔赴未及行 在 鑾輿已回纔到近甸新除荐降一味惶隕無地自容 上曰願見之誠 副提學 鄭經世 知之矣仍咨以國 事先生對曰田野老臣何知國家事宜惟先定大機軸 則多少節目自是措置中所爲耳 上曰何謂大機軸 對曰是在 殿下之一心惟奮發振作日新其心則必 有其效 上嘉之歷 吏議 刑參 移授 大憲 因辭疏進建極之要 甲戌除工判 乙亥拜參贊 每有召旨輒上章 懇遞前後陳達無非格言至論 上多優答丁丑卒享 年八十四前夕有雷雨山崩之異訃聞 上震悼爲之 不御朝停市二日及葬遣官 賜祭歲壬午士林請于 朝配享于臨皐從祀于川谷後又竝享于金烏其別廟 則 仁同 之不知巖永川之 立巖 也影幀有三卽門人金 斯文應祖嘗倅 善山 爲倩 畫師 寫眞傳神者也分妥于 二巖及 善山 之元堂 孝宗 乙未特贈 領議政 諡 文康 先生之學不由常師得之妙契根柢乎四子歸宿乎六 經年益高德益邵而猶以耄倦爲戒易古文庸學周子通書太極圖說伊川好學論明道定性書張子東西銘 邵子無名公傳等書中夜默誦循環不輟日必有課又 將書之危微精一易之敬直義方 中庸 之戒愼恐懼大 學之克明顧諟丹書之敬勝怠吉義勝欲從等語書諸 壁間以自循省爲文章汪洋大肆自成一家理達意暢 人皆易曉絶不爲浮藻虛誕文字至於撰述之際亦必 屛人雖一家子弟不知其爲何事業練祥之後始啓篋 笥則乃性理諸說也 趙徵君任道 歎曰出入門墻許多 年矣今日始見先生之海莊也 柳修 巖袗亦嘗語人曰 先生之所不可及者其惟人之所不見乎先生所簒述有易學圖說圖書發揮易卦總說經緯說太極說晩學 要會宇宙說及文集略干卷行于世 [주: 李判書元楨 撰狀 ]
0 第五 獨村 李公 당시 70세 거주지 함안
0 이길(李佶)1538년(중종33)
본관은 성산, 자는 여한, 호는 독촌(獨村).
판중추부사 정무공 호성의 현손.
갈천 임훈, 첨모당 임예의 생질. 형제간 우애가 각별했다.
公諱佶字汝閑號獨村星山人判中樞諡靖武公好誠之玄孫林葛川薰瞻慕堂芸兩先生乃其伯仲舅也公早學爲詩平淡雅麗累捷鄕解而不中與兄篁谷稱相友愛事之如父公年六十三而篁谷歿衰年失伯悲痛不已鄕里稱之幽居卽事吟曰劍水潺湲日夜鳴前流不息後流生病夫倚杖溪頭立物外襟懷一樣淸[주:金羅傳信錄]
0 第六 鵲溪 成公 당시 65 세 거주지 함안
0 성경침(成景琛)1543년(중종38)~ 1610년(광해군 2)
본관은 창령, 자는 중진, 호는 작계, 자암
정언 수린의 증손, 군수 준의 아들
公諱景琛字仲珍號鵲溪又紫庵昌寧人正言壽璘之曾孫文郡守諱遵之子也公早事翰墨屢中鄕解命與仇謀竟未遂志沒於溝壑爲人醇厚質勝樂易多恕人皆愛慕豈非古之人也[주:金羅傳信錄]
장달수 첨록
墓碣銘
文穆公鄭先生之門有同庚而師事者鵲溪 先生成公是也鄭先生之舟遊龍華也公從 焉公所以答忘憂之話者出於尊賢慕德之 純心而澗松記而傳之南州人士說師弟同 庚必以公證之又從而認公之學有所受矣 鄭先生之亭於檜原也公與于房張公竣其 役鄭先生詩所謂座中誰作蔡西山者公爲 己任公之所以向仰先生者豈餘人所比哉 公諱景琛字仲珍號紫嵒昌寧人取山水佳 處家咸安之鵲巖復自號曰鵲溪嘉靖癸 卯生光海庚戌卒六十八歲公天資篤厚學 究性理節取四子書中孝弟禮節切於日用 者編爲二冊名曰人子學習常目以自勵敎 子弟及學者輒以此提諭之嘗以詩贈白承旨惟諴曰丈夫生斯世膠擾多所事下而有 修齊上而有平治欲求底處道未可離書笥 公雖樂於窮居於此而知其不果於忘世也 成氏東方著姓高麗侍中諱松國其上祖也 侍中以孝著享勿溪書院六傳而有判書萬 庸麗亡隱不出是生路少尹是生以恭生員 於公爲高祖也正信壽璘通善郞釣叟震孫 弘文著作定山遵引儀一善弼敦曾考祖考 考外王考也定山以直節稱母夫人金氏能 文章著作之葬作銘詩累十句辭極悽切邦人至今儒誦焉公娶星山李氏內禁衛倬女 生三男好正好信好晉好正有儒行乏嗣取 好晉長子澨爲子女壻李時松趙璊好信夭 好晉男潭女婿盧澣朴明翰澨無后潭男南 翼噫公子姓零替所者述散落未收然公之 行治錄在沂洛編芳金羅傳信錄成氏列傳 皆可據也後孫鳳庠搜輯遺草于遊從諸家 附以文穆公手札又得學習于族人榮手墨 瞭然足以見公爲學之詮也鳳庠君以相稷 十世祖沃邨公嘗同遊龍華載列于所沂洛編 芳世同鄕井熟知公始末使之銘于墓道不 敢辭銘曰
見有道則篤信之見佳言則體認之足爲矝 式於後進也 光州盧相稷撰
0 第七 聞巖 辛公 당시 59 세 거주지 靈山
0 신초(辛礎)1549년(명종4)~1618년(광해10)
본관은 영산, 자는 지수. 호는 문암 용궁현감 희수의 제5자.
초유사 학봉 김성일이 의병 부장을 삼았다.
여헌 선생께서 흉중에 촌철을 지닌 절조 인이라 하다.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湯介)의 반란을 평정할 때 공을 세우고, 무과에 급제하여 1591년 천성만호(天城萬戶)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성도(天城島)가 고도(孤島)이므로 김해성(金海城)으로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적의 포위망을 돌파, 합천군수 이숙(李潚), 박진영(朴震英) 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 곽재우군(郭再祐軍)과 합류하여 활약하기도 하였다. 공위겸(孔撝謙)이 적에게 항복하여 영산에 웅거, 경상도관찰사를 자처하며 위세를 떨치자 단신으로 그의 진영에 잠입, 계략을 써서 사로잡았다.
1592년 7월의 영산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곽재우의 천거로 현풍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 백성을 안집하여 목민관으로도 영남에 명성을 떨쳤다. 정유재란 때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곽재우군에 합류하여 화왕산성전투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활약하였다. 난이 끝난 후 보성군수을 역임하였다.
죽은 뒤 병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창녕의 문암정(聞巖亭), 영산의 도천서원(道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암집》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公諱礎字支叟靈山人高麗平章事鏡之後典工判書斯蕆之八世孫也判書公當勝國末死於節有女幷命事載三綱行實鄕人立廟以祀考諱希壽龍宮縣監縣監公有七男才略俱過人公於序爲第五幼有異質不
凡兒比及長氣宇峻潔人皆敬憚性至孝事親承順無違行父母宜之癸未尼胡之役七弟被選當西赴公曰季也口尙乳臭安能當巨醜遂挺身請代從元師大捷而歸自是從事弓馬穆陵乙酉占武科非其志也辛卯使臣黃允吉還自日本爲言明年倭奴必至朝廷憂難凡列堡諸將特選忠勇者壬辰春除天城萬戶未數月平秀吉大擧入寇衆號四十萬蔽海而至公知兵殘不能支亟入金海城則賊兵四圍城且陷矣時平山守朴震英陝川守李潚同在陣中公顧謂二人曰賊勢如此不若向江左募義討賊或可少酬國恩奮劍潰圍而出賊兵披靡不敢害纔到蔑浦追兵在背江水大漲無船不可渡朴在前高聲曰事急矣奈何公怒叱曰不聞憑河語乎此江吾輩死所也齊聲躍入水迅馬不濟公抽刀斷韉李朴亦效之俄而馬與人俱利涉李朴稱謝不已蔑浦實公先祖典工公殉義處而公又決死蹈水視之如齋閣人皆曰是祖是孫也時郭忘憂公起兵苞山爲嶺左義兵大將拒守鼎津公卽赴陣下與之戮力共事凡所籌畫出人意表郭公大奇之癸巳除玄風縣監縣當賊路要衝官舍盡爲灰燹公旣赴任設牙于王旨論谷之間方便爲政不以干戈搶攘擾民惟一意兵籌乘機勦賊蓋是時國家昇平已久人不知兵猝然遇寇莫不恇怯失措無一人出一氣殪一賊者而殲討之功獨玄風爲最諸陣倚以爲重武人禹治洪鷲城人有膽略善射獲鶴峯金文忠公時爲招諭使聞其名特差義兵副將諭之曰你必輕生勇戰當如辛某有兇孼孔好謙者提兵投倭爲賊向導僞稱慶尙監司屯據靈山縣四出剽掠郭公欲祕捕檻首而無善算公少嘗受業於好謙之父好謙與公舊故不甚猜公以玄風守請謁郭公願募力士數人隨之乘款段弊衣求見好謙盛兵衛拒之公曰吾以故誼來不意待之如刺客好謙聞之趁令導八款遇如平素命酒共傾公曾諳好謙嗜酒佩元酒一大壺密置綿絮於衣衽中仍請無算酌公則引滿暗注於絮好謙先已倒矣促出所齎酒勸飮公知好謙酩酊無所省呼門外力士俘之擔舁而出好謙行到通峴酒已醒遽呼曰爾學吾父而薄於吾何歟公答曰你爲吾師賊子欲得你首歸報吾師於泉下遂直入火旺城斬之翌年戊戌難靖仍又瓜熟而歸癸卯秋守寶城甲辰冬解歸甫一年虐墨屛跡殘赤輸心在官無絲毫犯往往捐俸以周窮餓者及歸行李蕭然不知爲使君行也嘗檢裝見繭絮在橐驚曰吾已蔽齎此何爲卽返之馬卒携一鞭倂令推還邑人以爲異事掛之梅閣壁上歲久而蠹則仍摹畫所掛處傳之爲太守鞭記在本郡輿地誌又有遺碣自此絶意仕宦嘯遊山水間以自娛時從當世之有德學名行者訪問推先於世事泊如也寒岡旅軒兩先生雅重公每遇淑景勝踐輒邀公相款嘗泛舟龍山下顧謂在座曰辛君武中君子也旅軒亦曰此人胸中有一寸鐵其節操人所不及愛聞巖之勝儗結數楹爲終老計未克就遺書付子孫勖以肯搆蓋遇光海時也萬曆戊午卒享年七十[주:鄭橫溪葵陽撰狀]
장달수 첨록
寶城郡守聞巖辛公墓碣銘 幷序 옥천 조덕린
鷲山之辛。世以勳烈著。中世典工判書斯蕆。在麗末。抗倭死義於蔑浦。事載三綱行錄及蔑浦㫌節碑。孫諱柱。討李澄玉。策勳世祖朝。又有孫曰礎。以天城 萬戶。逼於倭。仗釰潰圍出。賊披靡不支。前至蔑浦。追兵在後。江漲不可涉。人皆死咋。公曰。此吾殉節地也。躍入水。適有天幸不死。就郭忘憂再祐陣。戮力討賊。多斬獲。與之上下。有捍衛功。多矣哉。連三世以勳烈名。而地再遇蔑浦。何奇也。公字支叟。胄於麗之平章事鏡。因世有冠冕。十一世至典工判書公。生節度使諱息。後三世。卽鏡南節度使諱柱。自號終慕堂。祖諱世卿。副司直。考諱希壽。縣監。妣晉州鄭氏。郡守世良女。生丈夫子七人。公於倫次居第五。初終慕公之弟諱樑。生諱世挺。子諱琬。無嗣。以公後。公生而有異質。 及長。氣岸峻爽。性至孝。事父母無違行。癸未。尼胡之役。幼弟。被選赴西。公曰。幼子何能爲。遂替赴。有功而歸。登乙酉武科。辛卯。國家有南顧憂。列鎭堡。皆選置武勇。壬辰春。公除天城萬戶。未數月。倭奴大擧入寇。蔽海而至。公念勢不支。入保金海城。賊縱兵四圍。公以徒死無爲。不如奔他所。借力以討之。與平山守朴震英,陜川守李肅。突陳出至蔑浦。前阻水。公跋馬先投水。二人亦從之。水汛馬蹩蹩不得游。公抽刀割韉靷。亂流僅得渡。從郭公守鼎津。臨危設奇。郭公歎異之。癸巳。除玄風縣監。縣新刳兵。無官舍。寄治 于王旨山谷中。招集逋散。投機勦賊。乘間捷出。斬馘居多。金文忠公誠一。爲招諭使。以鷲人禹治洪有武力。爲義兵部將。戒之曰。爾當奮義勇决。如辛某云。時有孔好謙者。聚徒投賊。自稱監司。爲賊間。屯據靈山。郭公計欲捕之無奈。公曰。吾以計㩜。致麾下公募力士數人。佩酒一壺。羸馬弊衣。往求見好謙。公嘗受學於好謙之父。好謙猶疑之。盛兵拒不見。公曰。吾以故意來。反阻我爲。好謙遂見之。歡如平日。因呼酒與飮。飮酣。公自取酒酬飮。轟飮大酌。公佯飮而俯灌衣絮中。好謙獨飮。無何。公曰。吾有密語。恐泄。好謙樂聞。麾 左右。傍無人。好謙已中酒無所省。公呼門外力士。擔曳以出。公當門呼曰。吾爲國除兇賊。敢犯者死。賊徒皆斂兵不敢動。行未至。好謙悟唶曰。若非吾故人乎。何相厄哉。公曰。賊子當殺。吾以報吾師也。至軍遂斬以殉。戊戌。亂稍定。公亦秩滿歸。癸卯。銓曹薦授寶城郡守。到官。一心營職。淸白自律。甫一年。解歸。行李蕭然。槖中見有繭絮。蒼頭持馬箠來。一倂督還之。邑人歎慕。掛馬箠於政閣。呼爲太守鞭。及歲久朽蠹。則刻其鞭弭于壁。蓋愛而志之也。光海政亂。絶意仕宦。往來山水間。有終焉之志。間從鄭寒岡,張旅軒二先生遊。二先生許以君子。而夫夫胷中有一寸鐵云。萬曆戊午三月六日。考終于正寢。距其生嘉靖己酉。享年七十。葬于縣東大川山亥坐之原。寔司直公墓後。夫人裵氏祔焉。公前配裵氏。系出湓城。參奉渶之女。再娶居昌愼氏。習讀希孟女。有一子曰德㽕。三娶晉州河氏。贈工曹參議遵義女。有三子曰慶㽕。宣傳官。曰聖㽕。主簿。曰遠㽕。宣傳官。女適進士李而樟,愼仁龍,士人朴文英。二夫人皆各葬。愼氏葬王旨。河氏葬縣西池洞。內外孫曾多不載。嗚呼。士當論平居行義。今夫曼纓短衣。瞋目語難。頡頑作氣勢。緩急 眞若可恃。一朝遇事變。孰能奮義向前走死。如騖圖功立事。以無負平日激昂之志者哉。觀於壬辰之亂可知也。其荷旄節擁衆兵者。皆鳥獸散。望風奔北。而公以殘壘零卒。誓進死無退。生突重圍。馳深漲。百死一生。若天相之。卽投忠義之人。圖事揆策。動中機宜。擒取兇孽。梟首軍前。義聲遠暢。厥勳用集。而寶城之政。惠愛在人。淸風灑然。一鞭流芳。則豈惟無負平生之志乎哉。紹開家烈。克世忠義。而內行純美。孝友夙著。遭世昏濁。斂跡丘樊。晩親有道。摳衣丈席。則寒,旅兩賢之推詡延譽者。豈虛乎哉。公先塋洞中。有聞巖 最奇。公遊而樂之。因自號聞巖。後人爲立祠其上。享之。又邑諸生相率薦顯公功烈。或呈文。至陳疏。皆不報。惜哉。公之後孫景摯,景夏氏。越險千里。訪余山中。攜鄭徵士葵陽之狀。請刻公墓碑。余惟耄老。廢筆硯久。第惟郭公倡義火旺城。吾嶺之士雲合影附。而公時從之。與有勞績。德鄰先祖兄弟。實同危事。今書在籍。感念當日。義不辭。遂撰次而係以銘。銘曰。
辛氏義烈。世世濟美。蔑浦滔滔。前水後水。祖孫相望。克對無愧。惟玆寶城。當難自效。斂其果勢。晩親有道。退讓恂恂。君子若人。沒而祭社。疇曰不宜。我銘斯石。 以永厥垂。
0 第八 立巖 趙公 당시 59 세 거주지 함안
0 조 식(趙埴)1549년(명종4)~1607년(선조40)
본관은 함안, 자는 극성, 호는 입암.
생육신 증 이조참판 조려(趙旅)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형조참판의 증직을 받은 정언(庭彦)이며,
어머니는 성산이씨(星山李氏)로 만호 (萬戶) 희조(希祖)의 딸이다.
아들이 여헌의 고제인 간송당 임도이다
선부군 묘갈명〔先府君墓碣銘〕
아, 이곳은 나의 부친이신 입암부군(立巖府君)의 묘이다. 우리 조씨(趙氏)는 함안(咸安)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 원윤(元尹)을 지낸 휘 단석(丹碩)의 후예이다. 10세조는 삼사 정당(三司政堂)을 지낸 휘 열(烈)이며, 6세조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휘 열(悅)이다. 고조 휘 여(旅)는 진사로서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어계처사(漁溪處士)이다. 증조 휘 동호(銅虎)는 군수를 지냈고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연(淵)은 경력(經歷)을 지냈고 참의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정언(庭彥)은 부사직을 지냈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성산 이씨(星山李氏)는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정무공(靖武公) 휘 이호성(李好誠)의 증손녀이자, 서령(署令)을 지낸 휘 이의인(李依仁)의 손녀이며 만호를 지낸 휘 이희조(李希祖)의 딸이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 6월 23일 신유일에 검암리(劍巖里) 집에서 부군을 낳으니, 이름은 식(埴)이고 자는 극성(克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아름답고 용모가 범인들과 달랐다. 참되고 순박하며 온화하고 순수한 기운이 얼굴에 드러났다. 마음속은 평이하고 정직하여 스스로 교만하거나 거짓됨이 없었으며, 담박하여 욕심이 적었고, 침묵하여 말이 적었다. 집에 거처하여 부모를 섬길 적에는 환심(歡心)을 깊이 얻었다. 조부께서는 성품이 엄하여 아랫사람이나 아이를 대할 때도 말이나 얼굴빛을 꾸미는 일이 드물었는데, 부군께서 가장 인정을 받았다. 무릇 일이 있으면 부군을 반드시 불렀는데, 부군께서는 기색을 가라앉히고 낯빛을 부드럽게 하여 자식으로서의 예를 다하자 조부께서 어질다고 여기며 사랑하였다. 매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들은 이미 대인의 예의(禮儀)와 법도를 갖추었다.”라고 하였다.
9세에 비로소 배움에 나아가 《중용》ㆍ《소학》 등의 책을 배웠는데 이미 큰 뜻을 깨달았다. 장성해서는 전념하여 《논어》ㆍ《맹자》를 공부하였고 뭇 서적도 널리 통달하였으며, 글씨는 필획이 단정하고 묘하였다. 임신년(1572, 선조5)에 부인 문씨(文氏)의 상을 당하였다. 신사년(1581, 선조14)에 부친상을 당하여 백 일 동안 죽을 마셔 목만 축이니, 얼굴이 마른 나무처럼 되었으나 일찍이 지치고 병들었다고 하여 예를 폐하지 않았다. 장례를 지내고서는 무덤 아래 여막을 짓고 형제들과 함께 번갈아 가며 지켰는데, 잠시라도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푼 적이 없었으며, 한 번도 집에 발걸음을 한 적이 없었다. 외제(外除)하는 초에는 남은 슬픔이 더욱 간절하여 다시는 편히 잠들지 못하였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종신토록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여 일찍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병술년(1586, 선조19)에 모친상을 당하자 애모(哀慕)하며 상례를 신중히 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부친상 때와 같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당시 군수로 계셨는데, 그 소문을 듣고 가상히 여기면서 감탄하였다.
이때부터 다시는 세상일에 마음을 두지 않은 채, 시냇가에 별장을 짓고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심는 것을 늘그막의 계획으로 삼았다. 부군은 친족에게는 후하고 벗에게는 신의 있으며, 베풀어 주는 것을 좋아하고 승낙하는 일은 신중하였다. 몸가짐은 엄격하고 굳세었으며, 남을 대할 때는 온화하고 너그러워 한결같이 진솔하여 꾸밈이 없었다. 외조모 황씨의 상을 당하여 부군이 정분과 예의를 다하자 외조부께서 그 정성과 부지런함에 감동하여 노비를 주려고 하였는데, 사양하여 말하기를 “장모님의 상례에 사위가 살펴보는 것은 사람의 작은 예절인데 어찌 상을 주려 하십니까.”라고 하면서 끝내 받지 않았다.
임진ㆍ계사년 난리에 떠돌아다니며 곤궁하고 고달프게 산 것이 거의 10년이 되었으나 그 마음은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스스로 지키는 것이 있어서 궁색한 중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기해년(1599, 선조32) 집으로 돌아올 적에 승지(承旨) 김반천(金槃泉) 공이 시를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내가 조노인을 사랑하는 것은 / 我愛趙老子
도량 넓은 장자의 풍모 지녀서라네 / 休休長者風
이별하며 모범됨을 생각하니 / 別來思表範
내 마음속에서 잊지를 못하겠네 / 耿耿此心中
계묘년(1603, 선조36)에 부군께서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와 시냇가에 집을 짓고서 산수 속에서 물고기를 잡고 나무하는 즐거움을 다시 누리기를 바랐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이때가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40) 2월 28일 신유일이다. 향년 59세였다. 아, 슬프도다! 부군은 일찍이 ‘휴휴자(休休子)’라고 자호하였으며, 혹은 ‘입암거사(立巖居士)’라고 칭하였다.
고아인 저는 선인의 은덕(隱德)을 차마 민멸되게 할 수 없어 〈추모록〉을 짓고, 또 시가(詩歌) 약간 편을 모아 장인인 세마공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그 대략을 드러내었다. 아, 그것으로 어찌 능히 은덕을 만분의 일이라도 그려낼 수 있겠는가!
부군께서는 처음 남평 문씨(南平文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참봉 문형(文炯)의 딸이다. 3년이 채 안되어 돌아가셨다. 후배(後配) 문성 유씨(文城柳氏)는 문성군(文城君) 유수(柳洙)의 6세손이다. 증조는 진사 유사종(柳思宗)이고, 조부는 부호군 유항(柳沆)이며, 부친은 병절교위(秉節校尉) 유상린(柳祥麟)이다. 4남 1녀를 낳으셨는데 모두 불행히 일찍 죽고, 나와 누이동생만이 죽음을 면하였다. 이해 늦겨울 용화산(龍華山) 서쪽 기슭 언덕에 진좌 태향(震坐兌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나는 두 번 장가들었지만 아들이 없어서 종형인 면도(勉道)의 둘째 아들 함변(咸抃)을 후사로 삼았는데, 3남 4녀를 낳았다. 누이동생은 이이단(李而檀)에게 시집갔는데, 군수 이숙(李潚)의 아들이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혼(李焜)과 이현(李炫)이다. 장녀는 김확(金確)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성원필(成元弼)에게 시집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황고께서는 / 嗚呼皇考
자질이 진중하고 아름다웠네 / 質重資美
본심을 잃지 않으셨으니 / 不失本心
적자의 마음 지닌 대인이셨네 / 大人赤子
색양으로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 色養怡愉
자리를 깔아 옥을 받들 듯이 하였네 / 藻籍承玉
애경하는 마음으로 신중히 장례를 치르고 / 愼終愛敬
돌아가신 부모 생각하는 정이 돈독했네 / 風樹情篤
타고난 자질이 본디 좋으시니 / 天姿自好
어찌 수양을 해서 그러하겠는가 / 豈假修爲
고요하게 지내고 욕심 적어 / 恬靜寡欲
눈썹 찡그릴 일 하지 않았네 / 不作皺眉
집안에 계실 때는 담담하였고 / 居家淡淡
고을에 나가서는 공손하였네 / 處鄕恂恂
말과 행동 그리고 기상은 / 云爲氣象
온전히 하늘에서 받은 성품이었네 / 渾然天眞
평소 수양한 것은 / 平生所養
충신한 것과 근후한 것이었네 / 忠信謹厚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젖어듦이 / 目擊心醉
마치 맛난 술을 마신 듯하였네 / 若飮醇酎
선행은 반드시 보답을 받으니 / 善必受報
천록을 누리기에 마땅하였네 / 宜享天祿
좋은 옥이 팔리지 않으면 / 玉不見沽
이를 감내하고 상자에 감출 일 / 甘此韞匵
산과 계곡에 인연이 있었고 / 溪山有緣
높은 관직에는 연분이 없었네 / 軒冕無分
얻지 못했다고 무엇을 원망하며 / 不得何怨
알아주지 않는다고 어찌 성내리오 / 不知何慍
마음속에는 득실을 잊고서 / 忘懷得失
나무 하고 낚시하는 데 흥을 붙였네 / 寄興樵漁
꽃을 가꾸고 대나무를 심고서 / 栽花種竹
거문고를 연주하고 책도 보았네 / 撫琴觀書
마음속 생각이 만족스러워 / 胸襟皥皥
꿈에서 태평성대 보곤 했네 / 夢裏羲皇
유유자적 한가롭게 노닐면서 / 優哉游哉
세상일을 잊고 사셨네 / 與世相忘
임진년과 계사년의 난리에 / 龍蛇亂離
집안과 나라가 결딴났었네 / 家國板蕩
기아와 흉년이 거듭 닥쳐서 / 饑荒荐臻
염치의 도리가 없어져 버렸네 / 廉恥道喪
항산 없이 항심을 갖는 것은 / 無恒有恒
선비에게도 거의 드문 것이었네 / 士亦幾希
곧은 지조로 태연자약하여 / 貞操自若
얇아지지도 검어지지도 않았네 / 不磷不緇
곤경에 처해서도 안정을 유지해 / 處困居安
한결같이 편안하고 여유로웠네 / 一味休休
식자들이 칭찬하며 흠모하여 / 識者欽賞
찬양하는 노래가 넉넉하였네 / 讚詠優優
돌은 단단하고 옥은 매끄러우며 / 石頑玉潤
까마귀는 검고 백로는 희네 / 烏黔鷺白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본바탕 / 天成素質
어찌 변하고 바뀌는 일 있으리오 / 寧有變易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 晩旋菟裘
다시 살 곳의 터를 잡았네 / 重占亭臺
냇가에 임해 베개에 기대니 / 臨溪欹枕
만 가지 생각이 다 사라졌네 / 萬念俱灰
내가 그 가르침 받들었는데 / 孤承敎誨
날마다 시례에 대해 들었네 / 日聞詩禮
은혜로 말하면 부자간이고 / 恩爲父子
의리로 생각하면 사제였다네 / 義則師弟
당호를 일신으로 지은 것은 / 名堂日新
나를 선으로써 인도하려 함이네 / 誘我式穀
오래도록 사셔서 / 庶幾遐齡
길이 청복 누리길 바랐네 / 永享淸福
하늘이 어찌 수명에는 인색하여 / 天胡嗇壽
나에게 슬픔을 머금게 하는가 / 使我銜卹
저는 불초하기 이를 데 없으니 / 孤也不肖
감히 그 뜻을 이어받겠는가 / 敢望繼述
이에 감춰진 빛 드러내어 / 肆闡幽光
돌에 적어서 새기지만 / 刻著于石
글은 그 뜻을 다하지 못하고 / 文不盡志
말은 그 덕에 걸맞지 못하네 / 言不稱德
〈육아〉의 한 구절이 여기 있으니 / 蓼莪有句
하늘은 넓고 커서 끝이 없다네 / 昊天罔極
公諱埴字克成號立巖咸安人高麗元尹丹碩之後贈吏曹參判漁溪處士諱旅之玄孫也生而質美容貌異凡眞純和粹之氣達於面目朴實疏雅之風著於色笑中心易直自無矯僞沖澹寡欲沈默少言居家事親深得父母歡心年九歲始就學受中庸小學等書已曉大義比壯專治語孟旁達群書又能作字筆精端妙不幸傷於喪患未克大肆力於此業壬申失賢配庚辰喪英孩大損精神辛巳遭大喪柴毀益甚百日之前只以糜飮潤喉面如槀木而未嘗以羸病廢禮返魂之後結廬墓下與昆季迭守身不釋絰帶足不及私室外除之初餘哀彌切不復寢斷酒肉者久而拘於大夫人不敢踰制終養偏親愛日誠至了不離側丙戌丁憂愼終哀慕之篤一如前喪寒岡先生時爲郡宰亦聞香而嘉歎云自是不復留意世事惟思豐潔享祀以盡餘誠頤養性情以遣餘生築溪莊蒔梅竹爲終老之計嘗自詠懷曰身閑無事臥溪亭笑殺區區世上名好把釣竿臨水早每逢樽酒擧杯輕籬邊疏竹叢叢碧巖下長流曲曲淸無物到心魂自爽剩看新月透牕明觀於詩足想其平生矣辰巳之亂舊業零落流離困苦於十年之間而夷考其心則只是一箇休休與平時無別其有以自守而不受變於窮厄如此內實腴而隱淪不耀則命也金承旨槃泉公送詩曰我愛趙夫子休休長者風別來思表範耿耿此心中萬曆丁未卒享年五十九[주:趙澗松任道撰碣]
0 第九 葛村 李公 당시 58세 거주지 함안
0 이숙(李潚) 1550년(명종5)~1615(광해군7)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여징(汝澄), 호는 갈촌(葛村)다.
1576년 (선조 9) 무과에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었다. 중형(仲兄) 서촌공(叙村公) 정(瀞)과 더불어 성리학을 강마하고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이 본군(本郡)에 부임하여 생도를 모으므로 선생도 거기에서 배웠다.
1591년(선조 24)에 제포만호(薺浦萬戶)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병기를 수리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으로 列郡이 파궤(破潰)됨에 주장인 김해(金海) 부사가 도망하고 없는지라 그 곳에서 죽기보다는 의병을 모아 보국(報國)함이 좋겠다고 여겨 창의(倡義)하였다. 그때 감사(監司) 김수(金睟)는 겁을 내어 출전을 기피하였으므로 곽망우(郭忘憂) 장군(將軍)이 그의 죄를 성토하려는데 감사는 망우장군을 토적이라 무고하려는 즈음이었다. 이에 공이 방백과 곽장군에게 강화(講和)를 시키고 초유사(招諭使) 김학봉(金鶴峯) 선생(先生)의 막하에 있으면서 방략(方略)을 협찬하였다. 난이 끝난 뒤 사퇴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합천군수(陜川郡守) 재임시에는 정인홍(鄭仁弘) 가족이 세력을 믿고 세금을 포탈하거늘 공이 조금도 가차없이 옥에 가두고 매질하여 모조리 징수하기도 하였다. 정한강(鄭寒岡), 장여헌(張旅軒), 곽망우당(郭忘憂堂) 제현과 함께 교유가 두터웠으며, 졸후(卒後)에 도계사(道溪祠)에 이양졸 복휴(李養拙 休復), 박광서 진영(朴匡西 震英), 조도곡 익도(趙道谷 益道)와 함께 병향(幷享)되었다
公諱潚字汝澄載寧人兵曹參知仲賢之曾孫縣監贈參判諱景成之子也自在齠齕志氣俊邁投筆奮起武藝獨步萬曆丙子登謁聖副壯元蓋入城放矢之時所着冠帶團領解脫礙於弓弦初發未中適有一禮官自撫其膺而目之公乃悟收領結解然後發無不中而以初矢失的竟居亞時論惜之歲在龍蛇倭冠猝至公以靈山縣監招在方伯幕府慨然以仗節討賊爲事而主將彷徨公常憤菀時公之仲兄淸州公與鶴峯金先生在晉陽城郭忘憂堂亦倡義駐陣宜寧界矣公欲與仲兄及金鶴峯相議捍禦之策日夜馳突將往晉營歷訪郭將于新反縣公於郭將素善郭將執手而言曰公之主將身爲藩臣無意討賊逗遛轉避使賊如入無人之境不覺寒心吾方馳檄起兵以洩輿憤公適來斯可免此難豈非幸歟公曰噫公之此言實激於忠赤而發也然我之主將乃王命道臣公不過一箇寒士而無王命自相攻擊恐有蓄疑口舌之禍不利於公且兩虎共鬪其勢不俱生則彼長驅賊勢孰能捍禦吾當以此意歸告主將竭誠討賊以贖旣往之罪乃馳去晉陽謁仲兄及金先生卽旋方伯營俱以言告仍與二三褊裨協謀盡忠多斬賊首稍振士氣而斬賊之功全歸主將故爵賞無及後知陝川郡事未幾罷還公性剛直不苟見人之奔走乞憐於形勢之途者則若將浼焉不肯對立旣與時違且忤權貴才抱干城終不大用可勝歎哉[주:家乘]
장달수 첨록
通訓大夫陜川郡守葛邨先生李公遺墟碑銘 幷序 -만구 이종기 찬
文武才全。郡縣位卑。有功不居。身竆道肥。密翁有狀。可質百世。鳳鳴之山。草木猶晳。廢爲邱墟。行路點指。斲珉著詞。昭于千禩。
0 第十 沃村 盧公 당시 55 세 거주지 창령
0 노극홍(盧克弘)1553년(명종8)~1625년(인조 3)
본관은 光州, 자는 의보, 호는 옥촌.
대사간 선경의 현손, 한강 정구의 생질.
곽 망우당이 화왕산성을 지킬때 보좌했다.
왜란이 끝 난후 전원에 돌아와 조정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公諱克弘字毅甫號沃村光州人司諫諱善卿之玄孫
寒岡鄭先生之甥姪也出入門墻陪遊杖屨旣是親切而其薰陶見聞之益爲世所推忘憂堂郭公守火旺時公掌簿書之責參贊機宜圖存危□而及郭公遭艱歸後慰撫士衆指層巒誓死作詩[주:詩曰火旺山頭火旺城一般意氣與崢嶸睢陽力戰君知否自古□□有舍生]亂平退守田廬前後徵辟皆不就[주:家乘] 옥촌 선생문집 2권이 있음
장달수 첨록 墓碣銘 並序 公諱克弘字毅甫姓盧氏始祖諱蔓高麗政丞封 光州君子孫仍貫焉至典工判書諱昶始居固城 其後有生員諱甲生以遺逸稱屢徵不就生司諫 諱善卿當世祖朝抗䟽力排佛敎寔公高祖也 曾祖諱▼(王+聶)侍直己卯名賢墨齋㻶之弟祖諱慶昌 僉正考諱儼副正妣淸州鄭氏贈判書思中之 女寒岡先生之姊而寒暄金先生之外曾孫也以 嘉靖癸丑生公于昌寧沃野里第其在孕母夫人 能盡胎敎之方乃生容貌端正幼而穎悟副正公 甚奇之每語夫人曰興吾門者必此子也甫十三 歲遭副正公喪送終必以禮居喪哀毁無異成人 服闋母夫人使從寒岡先生學公於是往居先生 門下自日用之間以至性命之奧專力潛心造詣 日深又與張旅軒李石潭成芙蓉諸先生偲偲同 業情好甚篤業旣就遂歸養于家事母夫人盡誠 孝撫稚弟極其友愛又時時往拜於師門事先生 如嚴父及母夫人下世哀毁過節治喪一遵先生 制禮廬墓三年制終往拜先生於望雲庵見先生 淚泫然下悲不能自抑先生亦泣爲之寬譬見者 皆爲感惻自是每時月往拜不少怠焉壬辰倭冦 大至列邑皆望風潰公欲往從先生於通川任所 而道多梗不可行聞紅衣將軍郭公倡義兵卽率 家丁及子弟往赴之至則掌書記多參贊機宜丁 酉倭冦再猘公又從郭將軍保火旺山城未幾 郭公以憂去城中士女惶怖欲自潰公與諸將閉門 慰撫以死相誓城守甚嚴賊不敢逼四隣郡邑皆 賴而全亂旣平還居沃野舊廬自號曰沃村閒養 自適以求其志仲舅西川君鄭公在公府書招再 三公終不一往盖無仕進意也時鄭先生亦閒居 百梅園公源源往拜以討論性理從遊杖屨爲樂 當時交遊則若石潭忘憂畏復齋皆一時賢士也 茂溪華山之間每櫂歌相樂年德之推莫於公先 先生嘗宰本縣建八書齋使門人分長而以主訓 學安玉川主勿溪齋成芙蓉主芙蓉齋皆極選而 使公主冠山公月朔望每與鄕子弟通讀講禮得 誘掖之道先生遞官歸遂以書堂授之公仍往住 焉及先生卒公倡論建先生書院以寓未盡之慕 焉嘗薦授參奉主簿俱不就後以義勳拜僉知 中樞府事仁祖乙丑卒享年七十三葬于縣西 登林山艮坐之原淑夫人星州呂氏參奉文賓女 墓在玄風縣南龍莊山艮坐之原子世純主簿世 一奉事世厚有學行孫男八人曾玄以下百餘人 公姿性明敏氣宇淸高幼而母夫人有法家風敎 養旣正長而得賢人以爲之師得諸君子以爲之 友深於爲己之學精於義理之辨則其事親而孝 旣誠且禮爲國而忠奮不顧身者固其宜矣而若 生員公之淸修肥遯司諫公之辭闢異端寒暄先 生之爲東方大儒墨齋公之爲名賢則其世德家 風亦有所從來者矣豈不懿哉公之函丈講磨麗 澤唱酬宜其有紹先師式後學者而屢經兵燹家 禍且酷典籍泯不傳焉宜若無所徵信而曺南冥 贊公世德曰赫世有道之家又曰鐵城有盧大藪 於材公之世德學行可以知矣李東岳詩曰不於 火旺山頭見誰識東南捍蔽功則公之孤忠積勞 可以知矣且孔子謂子賤曰魯無君子斯焉取斯 然則觀公之所師事所交遊固可知公於百世之 下矣又何待文獻之可徵也公八世孫命文千里 裹足問墓道之銘於基慶基慶辭不獲敢撰次而 爲之銘銘曰 暄老外裔寒岡維舅讀書家居抱膝自守義重急 君我旅我糾戰陣之勇本諸孝友維其有之是以 不朽 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兼經筵侍讀官春秋 館記注官全州李基慶謹撰 | ||||||||||||
0 第十一 永慕堂 辛公 당시 52세 거주지 영산
0 신방집(辛邦楫)1556(명종 11)∼1592(선조 25).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제(汝濟), 호는 영모당(永慕堂).
첨지중추부사 태(泰)의 아들이다.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학식과 서예가 뛰어났다.
1591년(선조 24)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안의(成安義)·곽찬(郭趲)·조열(曺悅) 등과 함께 창의하고는 초유사 학봉 김성일이 영산(靈山)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성천희(成天禧) 등과 함께 그해 8월 창녕전투에 참가하여 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형 방주(邦柱)와 동생 방로(邦櫓)도 의병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 창녕 사람 생원 신방즙(辛邦楫)ㆍ충의(忠義) 성천희(成天禧)ㆍ정자(正字) 성안의(成安義)ㆍ유학 곽찬(郭趲)ㆍ보인(保人) 조열(曺悅) 등이 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다. 천희 등이 군사 십여 명을 거느리고, 창녕의 적군을 포위하고 종일토록 교전하여 본읍의 군수라고 자칭하는 적을 쏘아 맞추자 3일 만에 적군이 성책을 불 지르고 도망갔다. * 연려실기술에서,
公諱邦楫字汝濟號永慕堂靈山人麗朝典工判書斯蕆之六世孫護軍諱泰之子也公能於文鳴以筆早執脩禮於寒岡鄭先生之門所取友幾一代名流一日先生以日用無餘功相看俱努力爲題使諸子分韻賦詩
要觀其志公得餘字其詩曰函丈從容講古書硏精終日儼齋居吾知聖域從茲入問學須勤孝悌餘載李淸暉堂承師友錄中萬曆辛卯司馬明年倭寇猝至公奉親避亂于宜寧闍窟山時招諭使鶴峯金先生辟公爲召募官適以色憂非細力辭不就有上書請獻方略之事而文字失於兵燹不得傳焉惜哉[주:瑣聞]
0 第十二 斗巖 趙公 당시 51 세 거주지 함안
0 조방(趙垹) 1557(명종 12)∼1638(인조16)
본관은 함안(咸安). 함안 출생. 자는 극정(克精), 호는 두암(斗巖)· 반구정(伴鷗亭).
입암 조식의 동생이며 간송당 임도의 숙부이다.
황곡(篁谷) 이칭(李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황암(篁巖) 박제인(朴齊仁)· 독촌 이길(李佶)과 종유하면서
학문을 강마하였다.
퇴계의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깊이 연구하여 학문을 성취하였으며, 월천 조목(趙穆)· 겸암 유운룡(柳雲龍)·우복 정경세(鄭經世)· 대암(大菴) 박성(朴惺) 등과 교유를 맺고 도학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 망우당을 따라 창의하여 정암진(鼎巖津)과 기강(岐江) 등을 지키는 등 전공을 많이 세웠다.
또한,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산성 의진(義陣)에서 군무를 도와 많은 적을 무찔러 고을사림들이 그의 충의에 감복, 조정에 상소하여 포창을 청하였다.
그뒤 난이 평정되자 낙동강 우포(藕浦)의 말바위〔斗巖〕 위에 반구정을 짓고서 마주 바라보이는 곽재우의 창암정(滄巖亭)을 수시로 내왕하면서 산수의 자연을 자신의 은둔생활에 흡수시켜 회포를 풀었다.
1607년(선조 40) 초봄에 정한강, 장여헌 등 도내의 선비 35인과 함께 용화산 아래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즐겼던 일을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 龍華山下同泛錄〉이 전하고 있다.
충효사상을 일생의 신조로 삼았으며, 〈가훈팔잠 家訓八箴〉과 〈충효실감 忠孝實鑑〉 등의 저술을 남겼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두암집》 3권이 있다.
公諱垹字克精號斗巖又伴鷗亭立巖之弟也公養親以孝執喪以禮壬丁倭亂與郭公再祐守火旺山城倡義却賊鄕黨服其忠孝嘗齊會公門欲陳聞以褒公適知之亟送家督奪其券卽投于火曰臣之爲國子之奉親自是人之常理何褒之有吾死後又或有如此者汝輩一切禁制毋貽地下之羞晩築精舍于洛江之斗巖扁以伴鷗以自樂焉嘗題一絶于壁上曰事親當盡孝爲國亦當忠嗟我俱無及江湖恨不窮郭公見而稱之曰曩時山城固知吾君忠義今又見其詩[주:趙氏言行錄]
○獨村李公題伴鷗亭詩曰白沙蒼壁繞庭除萬象森羅畫不如勝地待人寧久祕翦荊今日趙君居又曰納納乾坤一草亭長江渾浩更淸泠俯看金鯽翻波躍仰見風鳶接漢撗[주:橫]肯向名場遭語穽寧藏林壑避心兵白鷗爲伴忘機事閑對花壇臥月明[주:金羅傳信錄]
◑守火旺山城時愚伏鄭先生經世以詩贈
之曰愛君風度出於類留意斯文積力深挈子依山知孝道投身守堞識忠心公和之曰城外腥塵漲滿地吾人憤氣晝宵深書生豈識兵間事都是愚狂一箇心又當丙亂聞三學士死於燕獄以詩哭之曰三人志節不畏死死亦何恨死於死死而能保千秋節崇禎乾坤死不死[주:家乘]
碣銘 先生諱垹姓趙氏字克精咸安之趙以麗朝元 尹鼎爲始祖中世有典書悅麗末杜門守義有孫旅漁溪謚貞節端廟朝生六臣先生高祖也 曾祖諱銅虎贈戶參祖諱淵經歷贈戶議 號耐軒考諱庭彦司直贈刑參妣貞夫人星 州李氏萬戶希祖女靖武公好誠曾孫嘉靖丁 巳八月十一日生先生於咸安之儉巖里幼受 孝經於篁谷李先生偁李先生吾先祖退溪先 生門人學有淵源先生旣就學悟解大義以聖 賢自期又觀退溪先生聖學十圖潛心翫繹曰 是吾師何必他求從遊朴篁巖齊仁李獨村▩ 趙月川穆柳謙庵雲龍鄭寒岡逑張旅軒顯光 朴大庵惺諸賢講習不倦有至性孝奉二親甘 旨之供極其誠力一室從化無敢不盡其職喪 死葬祭哀敬兩至廬墓三年省掃以時壬辰移 家累於靑松之安德先生在漆原之武陵倭寇 猝至先生歎曰肉食者鄙奈國事何卽以家僮 百餘人赴郭忘憂再祐義陣把守鼎津岐江▼(益+阝) 口設伏山險射殺賊甚多丁酉賊又大至先生 與兄判官公坦兄子亨道東道固守火旺山城 義陣協贊軍務賊見義氣騰天城不可犯卽▩ 去乃開門追躡斬獲無數先生才智明▩沈幾 先物又讓功不自居鄕人服其忠義欲陳聞 以褒先生遣子火其書曰臣之爲國職耳敢自 衒爲又戒子弟曰後或有如此者須一切禁止 毋貽汝父之羞歸臥江湖嘯詠自適築室洛江之斗巖名亭以伴鷗有詩曰事親當盡孝爲國 亦當忠北有郭公忘憂亭扁舟往還觴詠見先 生詩奬歎其詩意出於忠孝又與鄭文穆張文 康郭忠翼諸賢有龍華同泛錄書疏往復道義 相勉丙子先生聞南漢不守西望痛哭悲憤却 食三學士殉烈瀋陽先生詩以哭之曰三仁志 節不畏死死亦何恨死於死戊寅四月十七日 卒享年八十二葬龍華壬坐原配尙州周氏察 訪世鸞孫宣傳悌女二子長衛道號愚齋次味 道先生所著有忠孝實鑑家訓八目箴等書▩ 以忠孝一道也故曰移孝於忠曰求忠於孝先 生發軔於師資之孝經傳承於家庭之十忠忠 孝二守自是先生一生事業而猶自▩然有家 國俱無及之恨其孰知先生深造自得之工優 入於典書貞節古先精深之域而自忠毅澗松 以下有未敢輊議焉者哉先生之忠之孝▩▩ 得之淵源傳授之奧則自有斯文公議又何敢 私馬銘曰之所名知所本之所羞知所踐 崇禎四辛壬正月上澣眞城李家淳撰 | ||||||||||||
0 第十三 畏齋 李公 당시 50 세 거주지 영산
0 이후경(李厚慶)1558(명종 13)∼1630(인조 8)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무(汝懋), 호는 외재(畏齋).
이조판서 평정공 약동(約東)의 증손, 부호군 증 참판
엄(儼)의 아들이다.
한강 에게서 수학하였다. 학행이 높아 영남지방의 명유로 추앙을 받았다. 광해군 때 벽오(碧梧)이시발(李時發),·동강(東岡)김우옹(金宇顒)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해 가을 강화도에 왕을 호종(扈從)하였고, 그 공으로 서울로 돌아와 음성현감을 지냈다. 한강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외우라 하고 호를 불렀다.
여헌 선생, 박대암, 곽존재, 서낙재, 곽망우당, 이석담과 도의 지교를 맺었다.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영산의 덕봉서원(德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외재집》이 있다.
외재(畏齋) 선생 이공(李公) 행장 -갈암 이현일 찬
선생의 휘는 후경(厚慶)이고 자는 여무(汝懋)이며,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그 시조(始祖)는 총언(忩言)으로, 신라 말에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는데, 혁혁하게 공훈을 세워 《고려사(高麗史)》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부터 대대로 위인(偉人)이 나서 여러 대에 걸쳐 높은 벼슬을 지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휘 약동(約東)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평정공(平靖公)이다. 문장(文章)과 행의(行義)가 일세(一世)를 압도하였는데, 이분이 선생에게 고왕부(高王父)가 된다. 증조(曾祖)의 휘는 승원(承元)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며, 비(妣)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이다. 조(祖)의 휘는 유온(有溫)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행 이천 부사(行利川府使)를 지냈으며, 비는 숙부인(淑夫人) 유씨(柳氏)이다. 고(考)의 휘는 엄(儼)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비 박씨(朴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선생이 원종(原從)의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증직된 것이다.
선생은 지성(至性)을 타고나서 어려서부터 영오(穎悟)하였다. 나이 9세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는데, 집상(執喪)하는 것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부형(父兄)이 어린 나이에 상(喪)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여 고기를 먹도록 권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문득 눈물을 흘리며 먹지 않고 삼년상을 마쳤다. 상을 마치고 나자 스승을 좇아서 수업하였는데, 날로 개발되고 달로 진보되어 우뚝이 조기(早期)에 성취하였다. 예곡(禮谷) 선생 곽공 율(郭公𧺝)이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그 따님을 배필로 주었다. 선생이 관례(冠禮)를 마치고 성인이 된 뒤 그 형의 아들 도자(道孜)에게 이르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과거 공부만을 일삼고 다시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매우 수치스런 일이 아니겠느냐. 내가 듣기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정 선생(鄭先生)이 지금 도산(陶山 이황(李滉))의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강명(講明)하고 있다고 하니, 가서 가르침을 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참판공(參判公)에게 아뢰어 서로 행장(行裝)을 꾸리고 가서 종유(從遊)하면서 《대학(大學)》, 《중용(中庸)》,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배웠다. 물러나서도 강론(講論)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정 선생이 그 독실한 뜻을 가상히 여겨 크게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편지를 왕복하기도 하면서 의심난 것을 묻거나 자세한 가르침을 청하는 데 있어서 행여 때를 놓칠까 염려하였다.
만력(萬曆) 임진년에 일본의 군대가 쳐들어 오자 선생이 참판공을 모시고 거창(居昌)의 삼가현(三嘉縣) 경내로 피난하였다. 당시에 적병(賊兵)이 승기(乘機)를 잡고 밀려들어 기세가 풍화(風火)와 같았으므로 나라 안이 온통 쑥대밭이 되었는데, 동남쪽이 특히 심하였다. 마침 정 선생이 당시에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맡고 있었으므로 선생은 즉시 참판공을 모시고 가서 의탁하였다. 비록 난리로 파탄이 난 즈음이었지만 봉양하고 조섭하는 것을 극도로 정성스럽고 공경스럽게 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여 더러 쌀과 고기를 보내어 조석(朝夕)으로 봉양하는 데 보태게 하기도 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28)에 난리가 조금 진정되자 참판공을 모시고 영산(靈山)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적병이 아직도 부산(釜山)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영남이 명나라 군대가 왕래하는 요충지가 되었으므로 백성들은 안도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또 현풍(玄風)의 가태산(嘉泰山) 아래로 옮겼는데, 참판공이 심한 설사로 위독하였다. 선생은 똥을 맛보고서 점점 더 위독해지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침식(寢食)을 잊고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참판공은 끝내 병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별세하니, 이때가 정유년(1597) 4월이었다. 가을에 난리가 다시 치열해지자 남쪽 지방의 사람들이 두려워 요동하니, 선생이 마침내 선공(先公)을 우선 포산(苞山)의 경내에 임시로 장사 지내고 궤연(几筵)을 받들고 또 강릉(江陵)으로 피난하였다. 왜구의 난리 끝에 기근까지 겹치니, 백성들은 편안히 생활을 하지 못하여 열에 아홉 집은 비어 버렸다. 선생은 일가친척이 살아남지 못할까 염려하여 노비를 팔고 우마(牛馬)를 저당 잡힌 뒤 식구 수를 헤아려 지급해 주어 굶어 죽는 괴로움이 없도록 하였다. 비록 피난길의 곤경 속에서도 제전(祭奠)을 받드는 것과 거처(居處)하는 범절(凡節)은 한결같이 예(禮)에 맞게 하고 구차하게 하지 않았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일본 군대가 철수하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다. 6월에 상을 마치고 현(縣)의 서쪽 냉정산(冷亭山) 아래로 이거(移居)하면서, 그 당(堂)을 외재(畏齋)라고 이름하였다. 이때부터 과거 공부에 뜻을 끊고 성현의 글에 잠심(潛心)하면서 오로지 위기지학에 힘을 쏟았다. 이공 시발(李公時發)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그 행의(行義)를 조정에 천거하였고,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김 선생(金先生)이 이조 참판이 되었을 때에도 선생을 추천하였으므로, 전후로 제수하는 명이 거듭해서 이르렀으나 선생은 광해군(光海君)의 어지러운 정사를 보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경신년(1620, 광해군12)에 한강 선생이 사수(泗水) 가에서 졸(卒)하자 선생은 마치 아버지를 잃은 듯하였는데, 해당하는 복제가 없었으므로 심상(心喪) 3년을 살았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자 선생은 유일(遺逸)로서 제일 먼저 천거되어 창락 우승(昌樂郵丞)에 발탁, 제수되었다. 임소(任所)에 이르러서는 손을 씻고 직무를 받들었으며 우중(郵中)의 이해를 철저히 검토하여 혁파(革罷)함으로써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고(故) 재상 이공 경여(李公敬輿)가 암행 어사로서 탐문할 적에 선생의 치적을 올리기를, “몸가짐이 청렴하고 검소하며 직무를 신중하게 수행한다.” 하니, 상이 특별히 품계를 올려 줄 것을 명하고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에 조용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5)에 북쪽 오랑캐들이 침략해 오자 대가(大駕)가 강도(江都)로 행행(幸行)하게 되었는데 선생은 본직의 자격으로 어가(御駕)를 따랐다. 4월에 오랑캐들이 물러가자 어가를 호종(扈從)하고 환도(還都)하였다. 가을에 주부(主簿)로 승진하고 10월에 음성 현감(陰城縣監)으로 나갔다. 매달 초하루에 망궐례(望闕禮)를 행한 뒤 곧바로 향교(鄕校)로 나아가 분향(焚香)하고 알성(謁聖)하였다. 그리고 제생(諸生)들을 인도하여 경의(經義)를 강설(講說)하면서 이르기를, “학문하는 것은 반드시 몸소 실천하는 것에 근본을 두어야 하며, 장구(章句)나 외우는 데에 있지 않다.” 하면서 지성(至誠)으로 학자들을 위해서 말해 주었다. 사직(社稷), 성황(城隍) 등의 제사에 대해서도 반드시 몸소 행하고 연로하다고 해서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고통을 부지런히 구휼하기를 마치 자신이 고통을 겪는 것처럼 하였고, 해악을 제거하고 이익을 진흥시키면서 오직 미치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몸가짐이 청렴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부지런하여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은혜롭게 여기니, 온 고을이 평안하게 되었다. 현을 다스린 지 3년째 되던 해에 마침 괴산(槐山)의 수령이 살인을 하여 심문을 받게 되었다. 선생은 사격(使檄)을 받들고 옥정(獄情)을 살폈는데, 당로자(當路者)의 뜻을 거슬러 파면되어 돌아왔다.
경오년(1630, 인조8) 1월 갑신일에 집에서 별세하니, 춘추 73세였다. 이해 2월 경오일에 덕암산(德巖山)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원근에서 장사에 모인 이가 200여 인이나 되었다. 일찍이 원종(原從)의 공로가 있다고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두 번 장가를 들었는데, 전부인(前夫人) 곽씨(郭氏)는 바로 예곡 선생의 따님이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도보(道輔)는 생원(生員)으로 능서랑(陵署郞)을 지냈고, 딸은 사인(士人) 안성한(安盛漢)의 처가 되었다. 후부인(後夫人) 김씨(金氏)는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영성(永成)의 따님으로 2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도형(道亨), 도희(道熙)로 모두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삼았다. 장녀는 현감(縣監) 최동언(崔東彦)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사인 이현배(李玄培)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사인 곽유창(郭愈昌)에게 시집갔다. 능서군(陵署君)은 6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수(洙), 부(溥), 전(瀍), 렴(濂), 순(洵), 영(泳)이고, 딸은 사인 허빈(許瀕), 검열 강교년(康喬年)에게 시집갔다. 도형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면(沔)이고, 딸은 사인 강흠(姜欽)에게 시집갔다. 도희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식(湜), 익(瀷)이고, 딸은 사인 곽두응(郭斗應)에게 시집갔다. 안성한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인 성하민(成夏敏)의 처가 되었다. 최동언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국구(國耈)이다. 이현배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문규(文奎), 동규(東奎), 대규(大奎)이고, 딸은 모두 시집가서 사인의 처가 되었다. 곽유창은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선생은 천품(天稟)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길 때는 잠자리를 살피는 것과 맛난 음식을 봉양하는 것을 매우 신중히 하고 정성스럽게 하면서 조금도 허물이 없었다. 날마다 백형(伯兄), 중형(仲兄) 및 여러 조카들과 더불어 출입하여 즐겁게 모시고 화락(和樂)하게 지내면서 일이 있지 않으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상례 때는 슬퍼함이 극진하였고, 제사 때에는 반드시 7일 동안 산재(散齋)하고 3일 동안 치재(致齋)하였으며,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친히 점검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기제(忌祭)의 경우에는 비록 제사를 마치더라도 하루 종일 슬퍼하였다. 내실(內室)의 사람들과 여종들은 감히 바깥일에 대해 상관하지 못하였으며, 동기(同氣)들을 대할 때는 사랑과 공경으로 친목을 돈독하게 하였으니, 지성(至誠)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호읍(湖邑)에 있을 때는 백씨(伯氏) 덕암공(德巖公)의 연세가 이미 높았으므로 매번 좋은 음식을 얻을 때면 반드시 인편(人便)을 통해 보냈으며 미처 부치지 못했을 때는 먼저 입에 댄 적이 없었다. 백씨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걸음을 재촉하여 노정을 배로 하여 달려갔으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자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거창(居昌)에서 피난할 때는 중형(仲兄)이 전염병에 걸려 죽었는데, 부형(父兄)과 종족(宗族)들은 모두 선생이 직접 들어가 상을 치르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앞서서 곧바로 들어가 시신을 어루만지며 크게 통곡하였다. 그리고 염(殮)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나왔는데 끝내 무사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겨 유곤(庾袞)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반장(反葬)할 때가 되어서는 홀로된 형수와 어린 조카들이 그것을 주관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선생이 힘을 다해 주선하여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을 갖추어 장사 지냈다. 행상(行喪)하고 성분(成墳)하는 동안 곡읍(哭泣)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으니, 거창의 인사(人士)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중형이 죽고 오직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나이가 아직 10살이 안 되었으므로 돌보고 생각해 주는 것이 자기 자식과 다를 것이 없었다. 가르침을 받아 성취하여 사우 간(師友間)에 추중(推重)을 받게 되었으나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으니, 선생은 애통해하여 마지않았다. 다행히 아들 하나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 태어났는데, 선생은 병이 깊어지자 여러 자식들을 돌아보며 종 한 사람을 보내어 그 집안의 일을 도와주게 하였다. 두 누이가 시집을 가서 죽었는데, 모두 후사(後嗣)가 없었다. 선생은 힘을 다해 주선하여 혹은 후사를 세워 주기도 하고 혹은 임시로 봉사(奉祀)하게 하였다. 종모(從母) 박씨(朴氏)도 자식 없이 죽었는데, 선생은 어려서 길러 준 은혜를 입었으므로 가운데 아들을 시켜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늘 말하기를, “친척이 일반 사람과 다른 까닭은 은의(恩義)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일에 축하하지 않고 슬픈 일에 조문하지 않는다면 길 가는 행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길흉(吉凶) 대사(大事)에는 반드시 먼저 임문(臨問)하였으며, 친척과 자제들에게 명하여 각각 미포(米布)를 내어 그 경비를 돕게 하였다. 형의 아들 도자(道孜)와는 뜻이 같고 도가 부합되었으므로 매사에 반드시 자문한 뒤에 행하였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나와 네가 이름은 비록 숙질(叔姪)이지만 실로 나의 외우(畏友)이다.” 하였다. 이에 당시 동문(同門)의 선비들이 모두 ‘사문(師門)의 두 이씨(李氏)’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선생이 정 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한 지 40년이 넘어 그 은의(恩義)가 마치 부자(父子)와 같았는데, 질문하고 강토(講討)하는 유익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훈도(薰陶)되고 감화되는 데서 얻는 것이 많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부호의 집안에서 생장하여 수레와 여색만이 이목(耳目)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인 줄 알았는데, 정 선생을 뵙고 나서부터는 곧 스스로 부화(浮華)한 것을 버리고 점차 청렴하고 검소한 곳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만약 선생께서 가르치고 인도해 준 힘이 아니었다면 거의 소인(小人)이 됨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 우러르고 흠모하는 정성이 이러하였다. 선생은 성품이 또한 강직하여 비록 스승의 언행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의혹되는 바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곧 바른말을 하고 숨기지 않았다. 이에 정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우 간(師友間)에는 마땅히 서로 절차탁마하는 것을 의리로 삼아야 하니, 그대는 나의 외우이다.” 하고는, 마침내 ‘외(畏)’ 자로 그 서재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선생은 사문(師門)에 집지(執贄)하여 군자의 도의(道義)의 풍(風)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그 외구(外舅) 곽공(郭公)이 먼저 인도해 준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매번 곽씨의 문하에 나아갈 때는 몸을 굽혀 공경을 다하기를 한결같이 한강 선생을 섬기는 예와 같이 하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장공(張公), 대암(大庵 박성(朴惺)) 박공(朴公), 존재(存齋 곽준(郭䞭)) 곽공(郭公),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서공(徐公),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곽공(郭公),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이공(李公)과 함께 같은 시대에 나서 서로 도의(道義)로써 사귀었다. 그중에서도 서로 계속해서 왕래하여 정이 형제와 같기로는 대암, 존재, 망우당 등 몇 분이 제일이었다고 한다.
평상시 거처할 때는 반드시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여 단정하게 앉았으며, 출입하거나 서고 멈출 때의 동작도 모두 예법(禮法)에 맞았다. 늘 세상의 학자들이 그저 과거 공부만을 일삼고 실행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마침내 이르기를, “고인(古人)의 글을 읽는 까닭은 장차 일을 행할 때에 쓰기 위해서이다. 만약 그저 문장을 꾸미는 데에나 사용한다면 어찌 이른바 위기지학이 될 수가 있겠는가. 성현의 가르침이 방책(方冊) 속에 펼쳐져 있으니, 만약 그를 본받고 사모한다면 비록 모두 성현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길인(吉人), 선사(善士)는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자제들로 하여금 먼저 쇄소(灑掃)하고 응대(應對)하는 절차부터 익히게 하고, 다음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학문에 나아가게 하는 등, 차근차근 순서가 있었다. 또 삭망(朔望) 때마다 향인(鄕人)의 자제들을 모아놓고 경서(經書)와 《소학》 등의 글을 강론하였는데, 그 재능이나 성실함에 맞추어 적절하게 하였다. 수업을 할 때마다 성현의 말씀 중에서 요긴하고 절실한 부분은 반드시 반복해서 가르쳐 궁행(躬行),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성품은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창락(昌樂), 음성(陰城) 등에서 벼슬살이할 적에는 소백산(小白山)과 구담(龜潭)의 경치를 두루 찾아보았으며, 어떤 때는 하루가 다 가도록 머무르기도 하였으니, 그 흉금(胸襟)의 본취(本趣)가 또한 이러하였다. 선생은 고가(故家)의 세족(世族)으로 자산(資産)이 매우 넉넉하였으나 병란을 겪고 난 뒤로는 완전히 탕진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양식이 자주 떨어지고 몸을 가릴 만한 옷이 없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편안하게 처하였다. 그 속에 보존되고 있는 것은 담박하고 깨끗하며, 밖으로 드러난 것은 근엄하고 장중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달관(達官), 대인(大人)이라도 선생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공경을 표하였으며, 비록 법도에 벗어나게 행동하는 사람도 모두 몸을 추스르고 숨을 죽인 채 감히 사납게 굴지 못하였다. 이는 아마도 이른바 “그 용모를 바라보기만 하여도 백성들은 감히 쉽게 대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선생은 강명(剛明)하고 정직한 자품(資稟)과 독실하고 성실한 행실로 어진 스승에게 의귀하여 갈고 닦아 성취하여 행의(行義)가 널리 드러났으니, 참으로 뜻을 돈독히 하여 힘써 행한 청수(淸修)한 군자라고 할 것이다. 다만 그 벼슬이 그 덕에 걸맞지 못하여 겨우 일개 우승(郵丞)에 임용되어 조그만 고을에 그쳤으니,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쓰이고 쓰이지 못함은 하늘의 뜻이며, 얻고 얻지 못함은 운명이니,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전인(前人)들의 학문을 강명(講明)하고 후진(後進)을 인도하여, 인심(人心)을 맑게 하고 풍속(風俗)을 후하게 하며 선철(先哲)을 잇고 후세(後世)를 다행스럽게 하는 일은 실로 도(道)와 덕(德)을 품고 있으면서 당세(當世)에 쓰이지 못한 자들의 몫인 것이다. 그러니 하늘이 선생을 내신 것은 참으로 우연이 아닌 것이다.
현일은 늦게 태어나 선생께서 도를 강하고 가르침을 펴던 날에 경서(經書)를 들고 의문 나는 것을 여쭈면서 제생(諸生)들의 말석에도 앉아 있지 못하였다. 이제 유배되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선생께서 머무르던 고을에 가까이 오게 되니, 우러러 흠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하루는 선생의 손자 익(瀷)이 그 외형(外兄) 이군 동규(李君東奎)와 함께 선생의 행실기(行實記) 한 통을 안고 와서 보여 주면서 한목소리로 이르기를, “선조(先祖)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이제 71년이 되어 갑니다. 집안에 유고(有故)가 많다 보니 진작에 당세(當世)의 글 잘하는 군자(君子)를 통해 의덕(懿德)을 드러내고 유광(幽光)을 천양(闡揚)하지 못하였습니다. 근래에 삼가 이런 뜻으로 고(故) 재상 허 문정공(許文正公)에게 청하였었는데, 마침 시론(時論)이 대변하고 허공(許公)도 곧 하세(下世)하셨으므로 마침내 없던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세대가 더욱 내려왔는데 아직 글을 부탁할 곳이 없으니, 불효하여 유명(幽明)께 죄를 얻을까 너무도 두렵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 조부의 행장을 엮을 수 있는 사람이 집사(執事) 말고 누구이겠습니까. 이에 감히 재배하고 청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현일은 죄인의 몸이라 그 말이 당세에 중하게 여겨지지 못한다고 하여 사양하였으나, 두 사람은 번갈아 왕래하면서 요청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현일은 이미 두 사람의 간절한 정성에 감동한 데다 또 평소에 흠모하던 의리를 생각하여, 그 가첩(家牒)을 근거로 약간 필삭(筆削)을 가하여 위와 같이 엮는 바이다. 삼가 행장을 쓴다.
0 第十四 敎授 羅公 당시 50 세 거주지 함안
0 나익남(羅翼南)1558년(명종13)~
본관은 나주, 자는 천기, 대구부사 맹례의 5대손
창석 이준의 형 월간(月磵). 이전(李㙉)의 문인
만년에 천거로 교수가 되었다.
公諱翼南字天紀錦城人大丘府使孟禮之五世孫也年十三受業於處士李㙉之門才藝早成旋廢科自晦晩薦爲儒學敎授而終[주:瑣聞
0 第十五 復齋 李公 당시 49세 거주지 영산
0 이도자(李道孜) 1559년(명종14) ~ 1642(인조20)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자는 지지(至之), 호는 복재(復齋)·
양심헌(養心軒), 증 참의 석경의 아들
21세에 숙부 외재(畏齋) 후경(厚慶)과 함께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1580년(선조 13) 향시에 합격한 뒤 정시에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589년 학명이 높아 지방의 선비들을 모아 회연당(檜淵堂)에서 심경을 강론하고 이듬해는 근사록을 강론하였다. 1593년 송암(松庵) 김면(金沔)의 진중에 나가서 위장(衛將)으로 활약하였다.
1600년 고령향시에 스승의 권유로 나가 장원하였고, 순찰사 이시규(李時揆)가 효행으로 조정에 천거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덕봉서원(德峰書院)에 제향되었다. (행장 이갈암 찬)
公諱道孜字至之號復齋碧珍人平靖公約東之五世孫贈參議諱碩慶之子也嘉靖己未生于靈山治東溫井里第幼溫粹美容貌見者奇愛之少從塾師受句讀師冠從季父畏齋公執贄于寒岡鄭先生之門受大學或問及心經近思錄等書得聞君子爲學之要萬曆壬辰倭寇充斥公奉二親避亂江右時鋒鏑擾攘仍之以饑饉僵尸日相屬於道公能勞筋苦骨以供甘旨丁酉再亂公奉入于嶺東之江陵府去家千有餘里乃下從商販之役於沿海魚鰕之鄕以爲養公雖服賈在商舶中書冊不去手咿唔不絶口舟人漁子往往習其句讀己亥亂稍定奉還故土就縣西冷泉亭下結屋數椽列植花卉扁其堂曰養心軒養魚以供滫瀡愛日之誠老而彌篤及遭內外艱皆啜粥盧墓鄭先生易簀亦心喪三年壬午卒壽八十四蓋公質魯而志礭鄭先生嘗比之參也魯仍命以復字名其齋始公以親老故黽勉業程文旣屢擧不中第乃歎曰豈可捨己甜桃巡山覓酸梨爲年甫四十餘卽與之判決鄭先生問有父兄在如之何其專之公謝曰此親意也遂從先生於百梅泗水之間專以講明踐履爲事至今星山人或有以一時文會之盛題名記事被之屛障傳以爲儒林故事者公與畏齋恩則叔姪義實師友答問丈席之餘退而有交修共濟之益畏齋嘗目公爲畏友年老後猶熟讀小學書日有課程且曰吾平日非不從事是書猶未知其切已如此敎子弟必以是爲先每讀書或敎人至古人嘉言善行爲警省人處必爲之反復陳說使人有所觀感而興起焉故鄕塾之間因公開發者衆公於外物泊然無所好自經亂移家來家計益落落而閑田曠土不曾分外營占雖貧困憂戚日至交攻未嘗有憂歎之色事有不如意者輒曰有命存焉每以論語不知命無以爲君子者爲安身立命之所而草屋三間蕭灑絶塵書冊衣衾齊整有常處日晨興盥櫛終日靜坐看書客至則呼童命酌盡醉而後已每遇花辰月夕又使子弟或賦詩或詠歌或以黃冠野服採山釣水要以自適其適性好佳山水每尋幽選勝沿洄上下忻然樂而忘返玉川水石洛江臺亭無非杖屨經履之處襟懷飄灑超然有出塵之想李公時發按節本道聞公以行義著稱每行縣必延禮焉後嘗以孝廉高第薦聞于朝而士大夫東西行過其廬者莫不傾心高仰之及聞其歿皆齎咨涕洟曰善人亡矣山阿寂矣
[주:葛庵李玄逸撰狀]
0 第十六 生員 兪公 당시 43 세 거주지 영산
0 유해(兪諧)1565년(명종20)~1612년(광해4)
본관은 탐진, 자는 흠재. 보문각 제학 보의 후손
처사 종백의 아들.
선조(宣祖) 38년 (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公諱諧字欽哉耽津人高麗寶文提學寶之後生員中立之四世孫也考諱宗伯才行卓越風度粹發不幸早世而未顯公生於嘉靖乙丑少孤而自能盡於送終之禮哭泣之哀祭祀之誠見者無不矜賞奉慈夫人極其色養亂離顚沛之間猶無憾於供奉喪葬終始以禮之斯亦人所難也幼被長姊兪氏引物之誨兪氏卽三綱所載節婦孺人也公因心則友愛敬備至兪氏亦性旣端肅學通大義觸事輒誨無不剴切一夕公自外至曰久旱不雨苗則槀矣引水霑之忽有生意水之大於苗如是夫兪氏泫然泣下曰父亡母寡又無親黨零丁一家惟我二人冀汝成立庶幾無忝年旣稍長未志於學已知稼穡之寶似有喜色之動將欲爲田舍翁乎噫吾家自此已矣公卽相對下淚慨然發憤輒辭慈夫人及姊氏前負笈入山不息晝夜自是每歲十二月晦日下山還覲正月初二日卽入山以爲常工程久篤文華大發及入場屋援筆立就傍有請救者則雖於五六人猶滾滾不絶或捷三場或冠一榜聲譽日彰咸期遠到而命舛運奇每失南省萬曆乙巳始入格生員試二等乃歎曰嗟吾平生陞第於大庭之對而終見還降如流於經科之講而一步必躓者非一再今過四十始得小名天意不難知也吾何求分外而徒自勞乎於是遂撤擧業專意頤養而愛人好學乃其素性敎誨猶勤遠近坌集叩其兩端必盡餘蘊故雖在愚懵易於成就飮河充腹橐來囷歸門下之生進入格者甚多登第者至五六往來質問而成名者又不知其幾此亦足爲成美之一事也公鍾德眞淳制行平恕坦率含弘不以事物經心友于內敦信義外著樂道人之美善惡稱人之過失故人無賢不肖皆服其有量而寒岡鄭先生每稱之爲君子人一生安貧簞食屢空而未嘗憂於中不以求於人怡怡休休若自有樂人亦不知其貧之甚也鄭先生之胤子樟以前縣監登科來過因與聯轡而訪友公之馬鞍以繩繫鐙續而復絶者再鄭公曰甚矣君之無資身策也公笑而答曰靑雲多識猶使吾若此吾之若此故人所慙於吾何有哉相與戲謔而罷於是乎可驗其安貧之有素也然客有來訪倒屣延接白酒淸醪隨得隨進微醺上面卽自浩歌誠心善言彰發色辭酒盡客去輒思發蒙倚几閉目口授經史不私於子不外於人各盡所課不錯一字壬辰之亂兪氏死於節公伏於林莽間瞯賊乍過得棺蒿葬然後始遠避公平生未嘗入官門于以私而兪氏夫家新奴爲其黨寸外使孫所奪公訟于官訢[訴]于方伯勞身竭力而還推定爲墓直監護棹楔每値其忌大設於家追慕嗚咽無異所生恩戒子亨吉曰姊氏於吾訓誨如嚴父撫育同慈母且其節義之高國人之所矜式後世之所歎賞豈可例享以班祔負吾誠於爾身哉爾其體之勿替壬子冬忽患髮際而卒享年四十八[주:兪慕谷亨吉撰狀]◑子亨吉字會甫號慕谷崇禎癸酉及第官至縣監親喪廬墓孝著鄕里扈駕南漢名垂勳籍高才懿行卓出一世而但不能與時脂韋沈於下僚惜哉[주:鄕誌]
0 第十七 梅竹軒 李公 당시 43 세 거주지 함안
0 이명호(李明怘)1565년(명종20)~1624년(인조2)
본관은 성산, 자는 양초, 호는 매죽헌.
현감 황곡 이칭의 아들.
13세 때 진주 도회에서 직녀가 견우와 이별하라는 시제로 장원하다.
그 말구에 悤悤萬事說未了, 更期明年梧葉飄 하여 一時膾炙傳誦하다
公諱明怘字養初號梅竹軒星山人靖武公好誠之五世孫以遺逸官至縣監號篁谷諱稱之子也幼而喜讀八九歲有文譽筆法十三赴晉陽都會以代織女別牽牛詩居魁及長博求經旨潛心聖學不屑爲擧子業親歿後尤無榮進之意以仲父獨村公命黽勉暫屈于試仍占一小事而止天啓甲子卒享年六十趙澗松堂文以祭之曰公之性靜矣公之質醇矣生長法家學有淵源葛川遺風公蓋耳聞之矣篁谷彝訓公蓋面承之矣其文華之偉孝悌之懿豈無觀感而興哉才可以拾靑紫而止占司馬小名行可以範末俗而堇充長貳白鹿天之報施良善顧不嗇歟
0 第十八 滄浪叟 李公 당시 42 세 거주지 영산
0 이도유(李道由)1566년(명종21)~1650년(효종1)
본관은 벽진, 자는 명지(明之), 호는 창랑수(滄浪叟)
평정공 약동의 5세손 증 참의 석경의 아들, 복재 이도자의 동생. 숙부 외재 이후경과 형 이도자와 같이 한강 문하에 수학. 수직으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부인 탐진 안씨는 안음현감 우의 증손녀이다.
公諱道由字明之復齋之弟畏齋之姪少從叔伯遊寒岡門多有所觀感焉以大年秩通政雖在耄耋而若遇先忌則必致齋躬行以竭如在之誠己丑冬公寢疾已久先妣諱日奄臨乃曰明年此時老身存沒未可知也鷄鳴潔衣冠手自奉奠疾愈劇越四日而卒享年八十四公之夫人耽津安氏故安陰縣監遇之曾孫女大司諫魚公得江之外外孫也聰明才惠實有灌圃餘脈而星曆音律無不通曉儀容端正言語閑詳事舅姑主中饋宗族咸推一焉子曰涑以文行屢選鄕薦號寒泉[주:家乘]
장달수 첨록
滄浪叟李公行狀 - 만구 이종기 찬
畏,復,滄浪叟三先生。幷摳衣於吾鄕先正鄭文穆之門。葢如蔡元定一家之於考亭。而父與叔父異焉。畏復二先生皆有集行于世。獨滄浪叟未焉。日公之後孫裕和甫。持其門長承皥氏之書。踵余而言曰吾祖之集。今將印矣。不可無行狀一通。子盍述焉。余辭不獲。謹按公諱道由字明之。碧珍人。羅末大將軍諱忩言其始祖也。本朝有平靖公諱約東。其五世祖也。享于金山之景濂院。高祖諱承元判西銓。曾祖諱有溫通政府使。祖諱儼贈參判。始居靈山。考諱碩慶贈通政。妣晉陽河氏。虞侯艦之女。以隆慶丙寅閏十月十五日。生公于縣東溫井里第。公幼而擩染於家庭。長而服習於師門。魯之君子。莫或尙焉。但平日著述。盡入於鬱攸。懿行嘉言。今無所徵。獨有詩文輓祭若干篇及師友從遊古蹟。曾不足以一羽於祥鳳。嗚乎惜哉。公享遐耋。秩三品。子姓滿堂。葢積仁之報也。己丑十二月日。終于寢。距生之年爲八十四甲子也。觀化前四日。遇親諱。輒蠲潔衣冠。躳自執奠曰老身明年。存沒未可知也。遺命葬于先人之側。庶幾爲泉下陪奉地也。百行之源。可見其一段矣。配耽津安氏。察訪泝之女。通政商卿之孫。縣監遇之曾孫也。明慧端詳。克配君子。子男長曰涑號寒泉。次曰汶。女長適生員郭弘栽。次適士人成昌季。涑有五男。曰時松,時橏,時梆,時杠,時相。女適郭晟,裵後廸。汶無嗣。以時橏爲後。女長適金疇一。次郭鈒。郭弘栽二子曰鑌曰鉉。內外諸孫幾三十人。曾玄以下寔繁且衍。今不能盡錄。種杞藐後生。旣不敢論隲前輩。而惟念頃年猥述寒泉公狀。竊有感於門戶淵源之盛。今又爲是役。可謂沿泝其本源矣。遂忘僭而重爲之述云。
第十九匡西朴公 당시 39세 거주지 함안
0 박진영(朴震英) 1569(선조 2)∼1641(인조 19)
본관은 밀양. 자는 실재(實哉), 호는 광서(匡西). 판서 오(旿)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군수 유숭인(柳崇仁)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쳤다.
1599년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된 뒤 10여년간 천거하는 자가 없어 제부(諸府)의 판관에 머무르다가 1613년(광해군 5) 경흥도호부사가 되어 변방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워 절충장군으로 승진, 1619년 순천군수를 지내면서 우영장을 겸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해서도방어사로 도원수 장만(張晚)의 휘하에서 별장으로 종군하였다. 이괄이 이 소식을 듣고 원수부의 여러 장수 중에 오직 남이흥(南以興)·박진영· 유효걸(柳孝傑)뿐이라고 하여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신경원(辛景瑗)과 힘을 합하여 동교(東郊)에서 이괄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공을 세웠으나 공신에 녹훈되지는 못하였다.
뒤에 평산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가 되어 해서방어사를 겸임하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박진영(朴震英)1569년(선조 2)∼1641년(인조 19). 조선 중기의 무신.
시호: 무숙(武肅) 折衝禦侮曰武。正己攝下曰肅。고종 8년(1871)증시
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는 것을 무(武)라하고,
자기를 바로잡아 아랫사람을 이끄는 것을 숙(肅)이라한다.
시장: 이조판서 이명적(李明迪) 찬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실재(實哉), 호는 광서(匡西).
증 형조판서 동천(桐川) 오(旿)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군수 유숭인(柳崇仁)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쳤다.
1599년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된 뒤 10여년간 천거하는 자가 없어 제부(諸府)의 판관에 머무르다가 1613년(광해군 5) 경흥도호부사가 되어 변방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워 절충장군으로 승진, 1619년 순천군수를 지내면서 우영장을 겸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해서도방어사로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별장으로 종군하였다. 이괄이 이 소식을 듣고 원수부의 여러 장수 중에 오직 남이흥(南以興)‧박진영‧유효걸(柳孝傑)뿐이라고 하여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신경원(辛景瑗)과 힘을 합하여 동교(東郊)에서 이괄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공을 세웠으나 공신에 녹훈되지는 못하였다.
뒤에 평산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가 되어 해서방어사를 겸임하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박평산(朴平山) 묘갈(墓碣) 미수 허목 찬
공은 휘가 진영(震英), 자가 실재(實哉), 성이 박씨(朴氏)이다. 선대는 본래 밀양인(密陽人)이었는데, 후대에 강우(江右)의 함안(咸安)으로 이사하여 관향으로 정했다. 증조부 유(榴)는 무안 현감(務安縣監)인데 중종조(中宗朝)에 대년질(大年秩)로 종2품에 올랐고, 조부 종수(宗秀)는 증(贈)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었으며, 부(父) 오(旿)는 증(贈) 형조 판서(刑曹判書)요, 모(母) 이씨(李氏) 증(贈) 정부인(貞夫人)은 관향이 경주(慶州)이니, 증(贈) 병조 참판(兵曹參判) 경성(景成)의 딸이다.
공은 재식(才識)이 남보다 뛰어나서 호걸스럽고 기개도 있었지만 잡다하게 공명이나 위하는 것은 즐기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공은 군수 유숭인(柳崇仁)과 의병(義兵)을 모아 적을 치는데, 이때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가 공을 불러서 머물러 있게 하려고 하자, 공은 사양하기를,
“이미 남과 사생을 같이 하자고 약속했으니, 저버리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곽재우는 마음으로 어질게 여겨 다시는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마침 큰 난리를 당한 때인지라, 공은 무과(武科)로 발신(發身)하였으니, 나이가 26세였다. 그해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는데도 여러 선비들과 기복(起復)되어 원수(元帥)의 막부(幕府)를 따랐다. 비록 병진(兵陣) 중에 있을지라도 사생활일 경우에는 거처에 예가 있었으므로 온 부중(府中)이 모두 그를 어질게 여겼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용궁 현감(龍宮縣監)이 되었는데, 이후로 십수 년 동안은 천거해 주는 자가 없어서 벼슬은 부(府)의 판관(判官)에 불과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경흥 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가 되었다. 이때 인접한 오랑캐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켜 변방의 백성 가운데 포로로 잡혀간 이가 몹시 많았는데 공이 물화를 주고 그들을 되돌려 왔다. 임기가 만료되자 순찰사(巡察使) 권진(權縉)이 불러서 중군(中軍)에 임명하고, 이어 그 공적과 재능을 상신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급하였다. 기미년(1619, 광해군11)에는 순천군수(順川郡守) 겸 우영장(右營將)이 되었다. 전해에 요좌(遼左)가 함락되어 요동 백성이 강을 건너서 피난 왔는데, 그들이 민간에 섞여 강한 자는 폭력으로 물품을 강탈하므로 백성들의 근심이 날로 커 갔다. 공이 그들과 약속을 한 다음, 주리는 자를 관에서 구휼하는 한편, 그 약속을 따르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처벌하니, 그후엔 주객(主客)이 서로 편안하여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이 순행차 본군에 이르러서 열병(閱兵)을 하는데, 군중의 한 병사가 그 재능을 자랑하기 위하여 서서 총을 쏘아 나는 새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온 군중은 크게 기뻐하며 ‘상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공은 말하기를,
“불가하다. 군중에서는 장군의 명을 들어야 하는데 명령 없이 발포하였으니, 법으로 다스릴지언정 상을 줄 수 없다.”
고 하니, 찬획사가 크게 칭찬하고, 상을 주지 않았다.
관서 어사(關西御史) 한 사람이 자신의 과오를 지적하였다고 공에게 불만을 품고는 복명(復命)하는 자리에서 그의 불법을 말하여 내쫓게 하려고 하자, 간관(諫官) 김시양(金時讓)이 아뢰기를,
“신이 알기로 이 사람이 본디 청렴하고 곧은 것으로 시기를 당하여, 공이 많은데도 벼슬이 낮아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그 사람은 부끄러워서 말을 못하였다. 치적이 훌륭하기 때문에 유임된 지 2년만에 해서도 방어사(海西道防禦使)가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이 평양(平壤)에 주둔하였으므로 공이 그에게 갔다. 이괄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원수의 장수 가운데는 남이흥(南以興)ㆍ박진영(朴震英)ㆍ유효걸(柳孝傑) 몇 사람뿐이다.”
하고, 이간하는 편지를 썼는데, ‘임금 측근의 악인을 제거하겠다.’ 하고는 피봉에 ‘남이흥ㆍ유효걸ㆍ박실재’라고 썼으나, 남이흥이 그때 원수의 부중에 중군(中軍)으로 있었으므로 원수는 이간하는 것임을 알고, 공을 별장(別將)으로 삼고 더욱 신임하였다.
원수가 말하기를,
“이괄이 거느린 군사는 정병(精兵)과 항왜병(降倭兵) 합쳐 수만 명인데, 우리의 군사는 수천 인도 채 못 되니 그 형세를 당할 수 없다. 저들 장사(將士) 중에서 이괄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누구이겠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윤서(李胤緖)가 죽지 않았으면 반드시 무슨 일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은 지나가는 이윤서의 종 한 사람을 오게 해서 대의(大義)로써 타이르고 편지를 주어 윤서에게 보내려 하니, 곧 허락하였다. 이를 원수에게 보고하고 편지에 ‘의리상 적을 따라서는 안 된다.’라 쓰고 서명을 하는데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여러분은 어떠하겠소?”
하였으나 모두 돌아보고 기꺼이 하려 하지 않았는데, 오직 남이흥ㆍ유호걸 두 사람만이 따라서 서명을 하였다.
이윤서는 이미 죽기를 결심하였고 딴 뜻이 없기 때문에 편지를 보고는 곧 이신(李愼)ㆍ유순무(柳舜懋)ㆍ이택(李) 등과 더불어 몰래 모의하고 밤 3경에 화포(火砲)로 신호하여, 각기 거느린 군사로써 진(陣)을 뚫고 나온 자가 3천 인이나 되었다. 이윤서는 원수를 보더니 ‘적중에 있으면서 적을 죽이지 못하여 세상에 설 면목이 없다.’고 말하고는 목을 찔러 죽었다.
적이 샛길로 자산(慈山)을 나와 곧바로 황주(黃州)로 가므로 원수가 비로소 군사를 출동하였는데, 앞 부대가 적을 만나 신교(新橋)에서 패배를 당하자, 공은 분발하여 꾸짖기를,
“패군한 자는 죽여야 하고 용서해서는 안된다.”
고 하였다. 적이 서울에 들어와서 상이 이미 남으로 파천하자, 원수는 뒤에 여러 장수들에게 서호(西湖)를 건너서 남으로 가라고 명령하였으나, 남이흥ㆍ정충신(鄭忠信) 등이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 군사를 재촉하여 먼저 안령(鞍嶺)을 점거하였으므로 대군(大軍)은 이들을 따르게 되었고, 공과 신경원(申景瑗)은 동교(東郊)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괄이 패전하여 그 부하에게 논공행상을 하는데, 공은 한 자급(資級)만이 올랐을 뿐, 봉작(封爵)하는 데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일체 자신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공은 평산도호부사 겸 해서방어사(平山都護府使兼海西防禦使)가 되었다가 그해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길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전일 간관이었던 김시양이 영남 안무사(嶺南按撫使)가 되어 바닷가를 순행하다가 전사(田舍)에 있는 공을 방문하여 말하기를,
“어찌해서 벼슬하지 않소?”
하여 공이 대답하기를,
“무능한 사람으로 은혜를 이미 후하게 받았는데 또 무엇을 구하겠소.”
하니, 김시양이 탄식하면서 돌아갔다.
공은 매양 일이 없어 한가할 때에는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였는데 세속의 음악은 타지 않았으며, 책도 즐겨 보아서 책이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있은 뒤부터는 강개하고 낙이 없어 날마다 술 마시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으며, 때로는 칼을 어루만지며 긴 한숨을 쉬었고 밤이면 천문(天文)만을 볼 뿐이었다. 인조 19년(1641)에 나이 73세로 광려산(匡廬山) 아래에서 돌아가자 동군(同郡) 구음곡(仇音谷)에 장사 지냈고, 숭정대부(崇政大夫) 판돈녕부사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判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의 벼슬이 추서(追敍)되었다.
공은 평생에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시여(施與)를 좋아하였으며 종족끼리 화목하고 적서(嫡庶)에 대해 엄격하였다. 병이 위독하자 아들들에게 경계하기를,
“예법을 삼가 지켜 가훈을 무너뜨리지 말라.”
고 할 뿐, 다른 말은 없더니 얼마 후에 운명하였다.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어씨(魚氏)는 관향이 함종(咸從)으로 증(贈)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응해(應海)의 딸로 아들 둘을 낳았으니 세룡(世龍)ㆍ형룡(亨龍)이다. 서자(庶子)가 다섯 있으니, 유룡(庾龍)ㆍ임룡(任龍)ㆍ기룡(起龍)ㆍ자룡(子龍)ㆍ현룡(見龍)인데, 유룡은 율포 권관(栗浦權管)이며, 임룡은 적성 현감(積城縣監)이다. 딸이 여섯인데 둘은 직장(直長) 윤태지(尹泰之)와 절도사 남두병(南斗柄)의 첩이 되었고, 넷은 남두격(南斗格)ㆍ권복경(權復慶)ㆍ김정구(金鼎耈)ㆍ곽지립(郭智立)의 아내가 되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충성하였건만 공로가 드러나지 않았고 / 忠不見功
청렴하였건만 용납되지 못했네 / 廉不見容
순순히 그 바름 받아서 / 順受其正
궁하여도 노여워하지 않았으니 / 窮亦不慍
오탁한 이의 경계가 되고 / 汙濁之戒
선량한 이의 권면이 되었네 / 良善之勸
贈崇政大夫判敦寧府事匡西朴公諡狀
眉叟許文正公曰宣祖之中興余以爲有臣如此信哉斯言燹塵熄夷氛滅靑邱三千里土宇昄章無少刓缺爾來三百年之間漠然山高而水淸皆中興諸公之力今按朴匡西狀碣益審其天祚我東挺出群賢之盛嗚呼休哉公姓朴諱震英字實哉其先密陽人仕高麗世顯入我朝至諱彦忠官戶曹參判以慶尙都節制使征倭復東萊城生諱訥知中樞生諱光敏正郞生諱景玄進士參軍生諱如達參奉生諱榴務安縣監以大耋陞嘉善於公曾祖也祖諱宗秀贈漢城右尹考諱旿號桐川早遊丁游軒李龜巖之門與鄭寒岡崔守愚爲道義交德行文章爲師友所推重士林立祠尸祝贈刑曹判書妣載寧李氏贈貞夫人副提學諱仲賢之曾孫縣監贈參判景成之女隆慶己巳十一月十九日生公于咸安郡下里村第生而有異質志氣不凡甫學語已知忠孝烈義之爲已分九歲丁內艱居喪如成人弱冠時寒岡莅郡儒化大闡公摳衣請業講小學論語探㶊微奧鄭先生大加奬詡兼治公車業辭理日進筆法遒健蔚有時譽壬辰春讀書山寺聞倭奴入寇慨然募鄕兵討賊與郡守柳崇仁陣于趙南山屢立奇功時年二十四帥臣啓聞特除軍資監參奉直長主簿判官僉正三年之間除命便蕃時郭公再祐在宜寧聞公忠義要與之共事公曰沿江列邑無非受賊之地而與柳公約爲死生今不可背也郭公義之不復强之鎭海倭賊將犯郡境公親冒矢石所格殺甚衆乘勝逐北至五十里始覺血濺足踝砲丸穿過右䝱衆皆驚服水使李舜臣留唐浦上其功朝廷嘉之鶴峯金先生時爲招諭使聞公壯列要與贊畫軍謨而都元帥權慄檄召甚急遂屬元帥府甲午春朝廷設科命方伯帥臣各薦有韜鈐折衝之材公以將材被薦登科是年遭桐川公憂以朝令特起復赴元帥幕時起復諸人皆食肉見公行素內省慙赧囑元帥强令公從權公泣曰名屬帥府惟命是趨而年少氣壯何必食肉肽後始服役乎元帥爲之改容己亥冬除龍宮縣監時經大亂閭井蕭條公招徠安集殫誠撫恤號令設施簡而不撓華聞藉甚考爲中外最未及瓜辭遞乙巳春除訓鍊判官策宣武原從功臣秋除慶源判官不赴丁未棄官歸家春陪鄭寒岡張旅軒郭忘憂諸先生舟遊龍華山下時會者三十餘人皆極一時之望方事之殷馳騖於戎馬之場則杜工部所謂爲時之英及退而寄傲於烟霞泉石之間則樂與群賢周旋揖讓講磨義理不以爵祿嬰其心董仲舒儒者氣象是已蓋所性在此而不在彼也龍華同泛錄刊行于世戊申春除義州通判因事罷歸辛巳丁繼母憂哀毁踰節鄰里感歎癸丑冬除慶興府使禦賊軍務殫心措畫我國人被擄者悉捐俸贖還觀察使權縉啓請仍任以築城池利器械勞陞通政階時白沙李相公忤大北謫北靑而卒公齎米布治喪奠克盡匍匐之義詳載鼇城北遷錄己未春除順川郡守見學舍蕪廢慨然飭儒生葺之月朔設講賞罰勤慢士風丕變時遼廣遂陷毛文龍守椵島華人之避亂東渡者甚衆公盡心措劃一視均撫俾各安住上國飛輓之責於我者殫誠辦具未嘗匱乏鎭江府歎賞不己移咨本國加級陞任有府牌大加奬詡其辭曰順川郡守朴震英文武足備撫移饑寒氷蘖滿腔仁德施民賢聲載路於是乎朝廷特召公拜兵曹參知牌文至今藏于家其在順川也監司朴燁巡到列邑肆行威虐守令皆望風股栗有千金名馬日行千里燁嘗騎之到順川馬見妓女名月梅者欲與之風燁縛致其女縱馬使亂之公奮長劍斬其馬脫缷帽帶投前曰我矢不爲凶悍人幕下請亟狀罷昂然而出以燁暴戾猶改容謝之李尙書時發以贊畫使至郡閱兵有一土卒欲衒能立發砲墮飛鳥贊畫大奇之將厚賞公不可曰軍中聽於將無令發砲有軍法無軍賞贊畫稱謝不果賞繡衣之入郡因寢堗太溫拿入功曹公正色而言曰若其軍務欠缺雖罪守令可也房舍之溫冷不過掌火者失其在重守令之道寧容若是繡衣卽謝去而銜立旣復命誣不法欲黜之諫官金時讓曰臣知此人素以廉直見嫉功高而官卑物論惜之其人慙無以應以治理仍任二載癸亥秋授海西防禦使東銓更擬兵曹參知時西鄙多警籌司以爲防禦重任非此人不可遂命公西赴甲子春逆适反公率兵赴都元帥張晩陣於箕城适與其屬謀曰中朝諸將皆不足畏惟南以興朴震英柳孝傑三人素以忠義著名吾當縱間矣密書南朴柳三公守銜傳送於帥府其書曰聖明在上群凶滿朝淸君側之惡惡可已乎元帥知其謀而上聞引公爲右脅大將倚信愈重時适所領砲手與降倭數萬我兵不滿數千元帥以衆寡不敵爲憂公進曰龜城府使李胤緖嶺人也我與之相善在賊藪不死者意必有所爲也賊陣重兵在其掌握若招此人則吾可無血刃而勝負判矣乃求得胤緖奴孝生者饋以牛酒及木綿五十疋責諭曰汝主之不死欲何待吾欲裁書相問汝其首肯乎孝生曰吾主陷賊吾靲(◉)下人之所
恥也敢不惟命乃作書明君臣之義諭順逆之分辭旨懇到寫訖使諸將列署皆相顧不肯惟南柳二人從署公特書姓名于簡中次書南柳兩公納孝生衣縫中遣之胤緖已有歸朝之心見書涕泣不食陰與柳舜懋李愼李等約夜三鼓發砲領所部精銳三千人而歸從而潰者六千餘人於是賊勢大挫官軍增氣胤緖至軍痛哭曰不能殺賊生無以立於世無以見吾友遂自刎而死其知人如此賊間出慈山直趨黃州元帥逗留數日始出兵前騎遇賊潰于薪公忿然罵曰敗軍者當斬不可貸也晩甚恨之公乘賊之未渡臨津欲一殊死戰賊知之夜渡淺灘直向京城車駕南狩南以興鄭忠信及副元帥李守一不聽元帥節制促兵先據鞍嶺公與申景瑗軍東郊以備賊賊戰敗爲其下所殺公見賊平匹馬徑還故里口不言平吳噫當礿飛尺書陳大義使賊衆太半歸順臨陣決機不踰日而平劇賊皆公籌劃之功止竟見枳於用事者功不見錄時論惜之朝廷以公功多而獨漏勳籍特陞嘉善錄振武原從一等二月除平山都護府使兼黃海道防禦使乙丑棄官歸連有除命而皆不就時公年六十精力不甚衰而常以從事戎間不能專意於問學爲畢生至恨築精舍於匡廬山下自號匡西子讀書講學爲終老計時金公時讓爲嶺南伯知公屢有朝命而不膺巡到海上訪公於田舍曰何不出仕以副聖意公曰素乏才德蒙恩旣厚分亦足矣更何求也金公爲之歎息而去丙丙子冬淸兵大至國事甚急公矢心殉國力疾赴難到嶺伯沈演陣見戎政疏迂知不足有爲便道疾馳將欲扈駕南漢行到鳥嶺聞和議已成慟哭嘔血昏絶仆地左右舁還遂入匡廬山絶不與人相往來憂懣成疾素不喜麴糱而自是日飮數斗感慨掩抑語及時事輒拔劍擊枕每夜仰視星文曰旄頭晶盛虜未可滅也天下事不可爲也獨語咄咄轉成心恙麾却藥餌曰若聞胡虜平報則吾病勿藥而愈矣辛巳夏沈重十一月二十九日考終于廬山別墅享年七十三明年二月葬于郡東雲谷甲坐之原士林會葬者數百人越明年壬午特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越七年己丑又贈崇政大夫判敦寧府事兼判義禁都摠管後四十三年甲子移葬于郡北龍華山乾坐之原師傳澗松堂趙任道撰行狀文正公眉叟許先生撰碑銘正廟庚子腏享道溪書院戊午命撰尊周錄知製敎成大中撰傳於是乎公之厖勳卓節照爛一世矣配貞敬夫人咸從魚氏漢城右尹應海之女生二男世龍早夭不育亨龍以學行屢登薦剡贈司憲府持平後又贈大司憲曾玄以下多不盡錄趙師傳所撰行狀後敍曰余在少年往謁黃夫人常曰亂離中遭喪不食肉者惟朴龍宮一人而已余少而聞之老而不忘故公雖許我以忘年而余嘗小心加敬不敢與之抗禮公歸田十七年堅臥不起足不及權執之門而抱道蘊志以天年終此豈營營苟得死而後已者所可幾及哉余嘗占一絶曰功成恬退未曾聞公乃超然獨出群十七年間忘寵辱回看楡塞漲腥氛平居愛鼓琴亦不彈世俗之音余又呈一律曰松風響蕭瑟澗水鳴鏗鏘却疑在林壑不知琴在傍我愛朴令公不與世紛忙所以古雅音入耳皆峨洋公平生不與俗俯仰伉直自持居官謹潔雖忌疾者不敢指疵嚴重有威不輕笑語不論人長短聞人之善則喜而不忘少年衣帶不飭則呵之婢僕不梳洗則不敢見當祭祀則雖衰病中必前期齋沐家廟每晨起參謁衣食尙節儉居處必整帖凡借人簡冊曾所汚毁者爲之補綴遇人婚喪隨力相助對學者不擇親疏而輒加誘掖晩年尤喜書籍潛心硏究淨掃室堂終日端坐經史子集無不淹貫天文地理醫藥卜筮之書亦皆旁通或言老而看書捐眼無益則曰人各有所好儻天假以年更欲讀書窮理以祛心地之茅塞而吾哀甚矣歎何及矣嘗誡子曰爲人之道不本德行而徒尙科場則利慾生無足觀此公之始終志行而余之所目擊而心艶者也眉叟先生所撰銘曰忠不見功廉不見容直道在我安且不慍汚濁之戒良善之勸尊周錄傳曰丙丁以後嶺之外秉義漫身者鄭文簡蘊若而人外武則朴震英而已姜寒沙大遂常語人曰朴令公廉退世所難及月沙李相國廷龜亦曰朴震英有古名將風而世不大用邦家之不幸孟子有言是以論其世也觀於此可以知公之勳德紀實而又詳載於朝野緝要靑野漫錄國朝綱西征錄眉叟記言崔訒齋集中可謂不一書而皆按而復也不佞尤有所感慕於心者不佞之先君與季父俱有府牌撰著之文今於易名之典不佞之敍次公狀非敢曰續成而亦不敢辭也且適忝太常之職獲展平日幕仰之心竊自幸而樂爲之言謹就其家狀略撮其要以請節惠焉
資憲大夫前刑曹判書兼弘文館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李明迪撰
武肅[주:折衝禦侮曰武正己攝下曰肅]
肅敏[주:正己攝下曰肅應事有功曰敏]
貞敏[주:淸白自守曰貞應事有功曰敏]
박 평산(朴平山) 묘갈 -미수 허목 찬
공의 휘는 진영(震英), 자는 실재(實哉), 성은 박씨(朴氏)이다. 그 선대는 본관이 밀양(密陽)이었는데, 후대에 경상우도 함안(咸安)으로 옮기고는 마침내 관향으로 정했다. 증조부는 유(榴)로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지냈으며, 공희(恭僖 중종) 때에 연로하다 하여 종2품의 자급(資級)을 받았다. 조부는 종수(宗秀)로 증(贈)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다. 아버지는 오(旿)로 증 형조 판서이고 어머니 이씨는 증 정부인(貞夫人)인데,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증 병조 참판 이경성(李景成)의 따님이다.
공은 재주와 식견이 남보다 뛰어났고 호걸스럽고 기개도 있어서 잗달게 공명을 추구하려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군수 류숭인(柳崇仁)과 의병을 모아 적을 쳤는데, 이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공을 불러 진영에 머물러 있게 하려고 하자, 공이 사양하기를 “이미 다른 사람과 생사를 같이하자고 약속하였으니, 신의를 저버리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곽공은 속으로 공을 어질게 여겨 더는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마침 큰 난리를 만나 강개한 심정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나이 26세였다. 이해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는데, 열사(烈士)로 기복(起復)되어 원수(元帥)의 막부에 있었다. 비록 진중에 있었으나 사석일 경우에는 몸가짐에 예가 있었으므로 부중(府中)에서 모두들 어질게 여겼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용궁 현감(龍宮縣監)이 되었다. 이 뒤로 십수 년 동안 천거해 주는 이가 없어서 관직은 여러 부(府)의 판관(判官)에 불과하다가 계축년(1613, 광해군5)에 경흥 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가 되었다. 이때 북쪽 변방의 오랑캐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켜 변방 고을의 백성 중에 그들에게 잡혀간 자들이 매우 많았었는데, 공이 재물로 그 대가를 치르고 돌려받았다. 임기가 끝나자 순찰사(巡察使) 권진(權縉)이 불러서 중군(中軍)에 임명하고, 이어 그 공적과 재능을 상신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급시켰다. 기미년(1619, 광해군11)에는 순천군수 겸 우영장(順川郡守兼右營將)이 되었다. 지난해에 요동이 함락되어 요동 백성들로 강을 건너 피난 온 자들이 민간에 섞였는데, 그중 강한 자들이 약탈하는 통에 백성들의 근심이 날로 커져 갔다. 공은 규정을 만들어 관에서 굶주린 자들을 구휼하는 한편, 규정을 따르지 않는 자는 가차 없이 처벌하니, 이후로는 주인이나 객이나 모두 편안하여 민심이 매우 즐거워하였다.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이 순행차 본군에 이르러 군대를 사열하였는데, 군중의 한 병사가 자기 재주를 자랑하려고 무턱대고 발포하여 나는 새를 떨어뜨리자, 군중 전체가 크게 기뻐하며 상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지만 공은 “안 된다. 군중에서는 장군의 명을 들어야 하는데 명령 없이 발포하였으니, 군법으로 다스릴지언정 상을 줄 수 없다.” 하니, 찬획사가 크게 칭찬하고 결국 상을 주지 않았다.
관서 어사(關西御史) 한 사람이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한 나머지 공을 불쾌하게 여겨 복명(復命)을 마치고는 공이 불법을 자행하였다고 말하여 파직시키려고 하자, 간관(諫官) 김시양(金時讓)이 아뢰기를 “신은 이 사람이 본디 청렴하고 강직함으로 인해 남에게 시기를 받고 공로가 많은 데도 벼슬이 낮아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못하였다. 직책을 잘 수행하여 유임된 지 2년 만에 해서도 방어사(海西道防禦使)가 되었다.
이듬해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晚)이 평양(平壤)에 주둔하였으므로 공이 가서 그를 따랐다. 이괄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원수부(元帥府)의 여러 장수 중에 인물은 남이흥(南以興)ㆍ박진영(朴震英)ㆍ유효걸(柳孝傑) 몇 사람뿐이다.” 하고, 이간하는 편지를 쓰기를 “임금 측근의 악인을 제거하겠다.” 하고는 겉봉에 ‘남이흥ㆍ유효걸ㆍ박실재(朴實哉)’라고 썼다. 남이흥은 이때 원수부에 중군으로 있었으므로 원수는 그것이 이간하는 것임을 알고 공을 별장(別將)으로 삼고 더욱 신임하였다.원수가 말하기를 “이괄이 거느린 정병(精兵)과 항왜(降倭)가 수만 명이고 우리 군사는 수천 명도 채 못 되니 그 세력을 당해 낼 수 없다. 저들 장사 중에 이괄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누구이겠는가?”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윤서(李胤緖)가 죽지 않았으면 반드시 큰일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고는 지나가는 윤서의 종 한 명을 구해서 대의로 타이르고 편지를 주어 윤서에게 보내려 하니, 그가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원수에게 자세히 보고하고 곧 편지를 써서 “의리상 적을 따라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서명한 뒤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소?” 하였으나 모두들 서로 쳐다만 볼 뿐 서명하려 하지 않았는데, 남이흥과 유효걸만 서명하였다. 이윤서는 이미 죽기를 결심하여 딴 뜻이 없었다가 편지를 보고는 곧 이신(李愼)ㆍ유순무(柳舜懋)ㆍ이택(李𤣯) 등과 몰래 모의하여 밤 삼경에 모두 화포 소리를 신호로 삼아, 각기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거느리고 진영을 뚫고 나온 자가 3천 명이나 되었다. 이윤서가 원수를 보더니 “적중에 있으면서 적을 죽이지 못하여 세상에 설 면목이 없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적이 샛길로 자산(慈山)을 빠져나와 황주(黃州)로 달아나므로 원수가 그제야 출병하였는데, 앞서 가던 부대가 적을 만나 신교(新橋)에서 무너졌다. 공은 격분하여 꾸짖기를 “패군한 자는 마땅히 참수해야지 용서할 수 없다.” 하였다. 적이 서울로 쳐들어왔을 즈음 임금은 남쪽으로 파천한 뒤였다. 원수는 뒤에서 여러 장수들에게 서호(西湖)를 건너서 남쪽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는데, 남이흥과 정충신(鄭忠信) 등은 명령을 따르지 않고 군사를 재촉하여 먼저 안령(鞍嶺 무악재)을 점령하니, 대군이 그 뒤를 따랐다. 공과 신경원(申景瑗)이 동교(東郊)에 주둔하매 이괄이 패전하여 그 부하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논공행상할 적에 공은 한 자급(資級)만이 올랐을 뿐 봉작(封爵)되지는 못하였으나, 자신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공은 평산도호부사 겸 해서방어사(平山都護府使兼海西防禦使)가 되었다가 그해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지난날 간관이었던 김시양이 영남 안찰사(嶺南按察使)가 되어 바닷가를 순행하다가 공이 거처하는 전사(田舍)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벼슬을 하지 않으시오?” 하며 벼슬할 것을 권하자, 공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무능한 사람으로서 은혜를 받은 것이 이미 많은데 또 무엇을 구하겠소.” 하니, 시양이 탄식하며 돌아갔다.
공은 한가하여 일이 없을 때는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였는데 세속의 음악을 연주하지는 않았으며, 글을 읽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있은 뒤로는 분개하고 즐겁지 않아 날마다 술에 취해 시름을 달랬고 때로 칼을 어루만지며 긴 한숨을 쉬다가 밤이면 하늘의 별만 바라볼 뿐이었다. 인조 19년(1641)에 73세로 광려산(匡廬山 경상남도 마산과 함안에 걸쳐 있는 산) 아래에서 별세하여 동군(同郡) 구음곡(仇音谷)에 장사 지냈다. 숭정대부 판돈령부사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崇政大夫判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서(追敍)되었다.
공은 일생 동안 절약과 검소를 중시하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친족 간에 화목하고 적서의 구분을 엄격히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자식들을 훈계하기를 “삼가 예법을 지켜 가훈을 실추시키지 말라.” 했을 뿐 다른 말은 없었는데, 얼마 뒤에 별세하였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어씨(魚氏)는 본관이 함종(咸從)으로 증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어응해(魚應海)의 따님이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세룡(世龍)과 형룡(亨龍)이다. 서자가 다섯으로, 유룡(庾龍)ㆍ임룡(任龍)ㆍ기룡(起龍)ㆍ자룡(子龍)ㆍ현룡(見龍)이다. 유룡은 율포 권관(栗浦權管)이며, 임룡은 적성 현감(積城縣監)이다. 딸이 여섯인데, 둘은 직장(直長) 윤태지(尹泰之)와 절도사(節度使) 남두병(南斗柄)의 첩이 되었고, 넷은 정식 혼인하여 남두격(南斗格)ㆍ권부경(權復慶)ㆍ김정구(金鼎耈)ㆍ곽지립(郭智立)의 처가 되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충성해도 공신 대우 받지 못했고 / 忠不見功
청렴해도 세상 용납 받지 못했네 / 廉不見容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어 / 順受其正
곤궁해도 불만일랑 아니 했거니 / 窮亦不慍
더럽고 탁한 자의 경계가 되고 / 汚濁之戒
어질고 선한 자의 권장이 되리 / 良善之勸
忠不見功。廉不見容。順受其正。窮亦不慍。汚濁之戒。良善之勸。
◑公守順川時楊鎬新喪師遼左震動及瀋陽陷遼民及督府士馬東渡來附順川者萬數公賙接甚勤竝賴以活天朝鎭江遊擊遣府牌奬勵其文曰鎭江遊擊張爲奬勵郡官題敍事照得本職奉總鎭憲令鈐束各營官兵馬匹牧養看得順川郡守朴震英文武足備撫移饑寒愛蒼赤氷蘖滿腔賢聲載道仁德施民據喂養都司林茂春營馬百總沈仲祥等日每人馬供用豐足馬匹俵壯足堪騎征合行奬勵爲此牌仰順川郡守遵奉文內事理候調馬回日報請鎭主移咨國王加給陞任以樹新猷有助撻伐矣未便須至牌者右給行順川郡守成川鎭管兵馬僉節制使朴震英準此天啓參年正月廿三日給[주:牌文在于家]
0 第二十 菊菴 李公 당시 39 세 거주지 함안
0 이명경(李明憼)1569년(선조2)~
본관은 성산, 자는 일초(一初) 호는 국암(菊庵)
아버지는 황곡 이칭 여헌 문인
公諱明憼字一初梅竹軒之第三弟也謹按前輩風流固多爲世羶慕者而不有當時文字之記實後生于何考德而寄仰耶我於公而自不無寂寞之歎焉雖然公以學問行誼如篁谷爺而爲父宿德宗師如寒旅大先生而追遊則家庭詩禮之聞湖山仁智之趣槪可想於曠世之下而亦足爲今日景艶處也
0 第二十一 求慕齋 李公 당시 37 세 거주지 함안
0 이명념(李明念)1571년(선조4)
본관은 성산, 자는 이성(而聖) 호는 영모재(永慕齋)
정무공 호성의 5대손, 임진왜란때 김해진 영군장으로 죽은
령(伶)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죽엄을 슬퍼하여 평생 남쪽을 향해 앉지 않았다. 곽 망우당을 화왕산성에서 보좌했다.
公諱明念字而聖星山人靖武公好誠之五世孫壬辰亂以領軍將死義於金海鎭諱伶之子也公天性至孝痛父非命平生終不向南而坐惟以討賊復讎爲心與郭忘憂堂共守火旺城協謀贊績多所效力云[주:瑣聞]
0 第二十二 奉事 辛公 당시 36 세 거주지 영산
0 신응(辛膺)1572년(선조5)~1609년(광해1)
본관은 영산, 자는 백희(伯禧). 증조부는 예조참의 필주,
조부는 광주목사 윤, 아버지는 선교랑 여성.
곽망우당의 사위. 군공으로 의영고 봉사가 되었으나
38세로 죽었다. 뒤에 좌랑에 추증되었다.
여헌 선생과 만났을 때 36세.
公諱膺字伯禧靈山人高麗典工判書斯蕆之七世孫禮曹參議諱弼周光州牧使諱崙宣敎郞諱汝誠寔公曾祖祖禰也公以軍功除義盈庫奉事萬曆己酉卒享年纔三十八外舅郭忘憂堂嘗稱與曰風儀動人心純
禮恭有子時望字子重號澤隱以孝行卓異屢被鄕薦明陵丙戌褒贈佐郞[주:家乘]
0 第二十三 處士 李公 당시 36세 거주지 함안
0 이명각(李明慤) 1572년(선조5)
본관은 성산, 자는 자순(자순), 독촌 이길의 아들
公諱明愨字子純獨村之子也公質醇而性雅學博而行篤事親焉孝敬備至待人焉忠信必勖風度懿範眞一代長者云[주:瑣聞]
0 第二十四 處士 李公 당시 35 세 거주지 함안
0 이명여(李明悆) 1573(선조6)
본관은 성산, 황곡 이칭의 아들
公諱明悆字慶初梅竹軒之第五弟也謹按公內而襲賢父兄家庭之訓外而躡諸先生江湖之趣則其懿範風致與第二十處士公眞伯仲而況龍華遊泛何等道義勝集而公之叔若昆從凡六人與焉猗歟盛矣
0 第二十五 道谷 安公 당시 34세 거주지 함안
0 안정(安侹) 1574년(선조7)~1636년(인조 14)
자는 子長, 호는 道谷이며, 본관은 廣州이다. 高麗를 도와 廣州君에 봉해진 安邦傑을 시조로 삼는다. 조선조에 들어와 安峴이 佐郞을 역임하였는데, 안현의 아들인 生員 安汝居가 바로 안정의 高祖이다. 曾祖인 安義는 문과에 급제한 뒤에 正言을 역임하였고, 조부인 世國은 南海縣令을 역임하였다. 부친은 僉正을 지낸 應虎이고, 모친은 密陽朴氏 士人 奎星의 딸이며, 配位는 咸安趙氏 栗軒 墿의 딸이다.
안정은 1574년(宣祖 7)에 咸安郡 道音里에서 태어나 6살 때 학문을 시작하였고, 9살 때 『小學』을 읽었으며, 14세 때 竹溪 安光郁에게 四書를 배웠다. 그리고 1599년(宣祖 32) 高祖·曾祖·祖父 등의 무덤이 있는 漆原縣 拜榮里로 移居하였고, 1602년에는 道谷精舍를 지어 『論語』와 『孟子』, 程朱의 서적을 읽으며 窮理誠正의 학문에 힘썼다. 1604년(宣祖 37) 봄에는 夙夜齋에서 寒岡 鄭逑(1543-1620)를 拜謁하였는데, 이후 17년 동안 그의 문하를 출입하며 親炙하였다. 그리고 旅軒 張顯光(1554-1537), 忘憂堂 郭再祐(1552-1617), 畏齋 李厚慶에게 학문을 배우며 종유하였고, 澗松 趙任道(1585-1664) 등과 교유하였다. 1608년(宣祖 35) 宣祖가 승하하자 「北望歌 」를 지어 서글픈 심정을 표출하였다. 1616년(光海 8)에는 武屹精舍에 있는 寒岡先生을 찾아 뵙고 『心經』에 대해 질문하였는데, 한강선생은 『聖學十圖』 중의 「心學圖 」를 손수 그려주고, 蘭溪 范浚의 「心箴 」과 草廬 吳澄의 「敬箴 」을 전수하며, 心과 敬에 힘쓸 것을 勉勵하였다. 1628년(仁祖 6)에는 白雲洞에서부터 수려한 산천을 유람하며 『遠行錄』이라는 유람기를 저술하였고, 1634년(仁祖 12)에는 『家禮附解』를 완성하였는데, 『가례부해』는 退溪 李滉(1501-1570)과 寒岡 鄭逑의 문집에 실린 禮說 및 문인과 知舊가 두 선생에게 질문한 것에 대해 조목별로 해설하여 『朱子家禮』에 부록한 것이다. 1636년(仁祖 14) 5월 6일 持敬齋에서 별세하자, 上浦 新遵里의 先塋에 장사지냈고, 漆原縣 榮洞에 泰陽書院을 건립하여 位版을 봉안하였다. 훗날 朝奉大夫 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公諱侹字子長廣陵人麗朝侍御史綏之後正言諱義之曾孫也謹按公之事實非無文獻可徵而龍華遊泛寔千古斯文勝集簪盍諸賢摠一代道義交契則同舟促膝一紙編名庸非偶然且當日泛錄之修寒岡先生卽命門人藏諸硯匣而去則寥寥百載之下孰知其有是會有是錄於皇明萬曆間而幸賴公拾得草本於當時席上善藏十四年之久而傳諸趙澗松堂澗翁欣然得之仍作序以播之故世之人始知有此事而如愚之
邈爾晩出者亦獲其撫摩遺馥油然起感則匪公之賜伊誰之力不然南州第一勝迹幾乎泯而無傳矣噫收拾文字士大夫之一行如公之謂歟
장달수 첨록
道谷先生文集卷之一 | |||
書 | |||
上寒岡先生 壬子 侹再拜白昨秋警誨迄今敢忘未審卽日道體 淸福伏慕區區侹窮鄕晩學旣不能決意孟進 又復失師友講劘之益卷中之業從此益疎矣 第當一進於函席之間以啓發憤悱之積是所 區區之望而事故相掣奮起未易伏歎奈何箴 銘數篇受誨極矣敢不佩服誦習圖免暴棄之 歸耶鄙先集 缺 上寒岡先生 伏惟春氣漸和道體萬福侹孤寄窮荒疑晦未 祛悔尤日積每歎自分之不厚而拜侍之未易 矣近間因鷲山李友得聞御者有南爲之命慕 仰之餘竊用欣喜而第未知何日以動駕何地 以取道此回指敎則當先期立候於津亭耳疑 目諸條錄呈下批若何 上旅軒張先生 顯光○乙卯 龍華奉拜殆若夢界而星霜一周聞問兩阻過 從亦未易懦弱無狀深愧慕道之不篤伏惟卽 曰道體淸穆左右指引成德達材各得其宜否 暗室思想益不任高景之忱侹自南來以後煢 煢一身役役於百務凡所謂從師友講義理等 事一切倚閣於一邊而但隨分占取結茅於山 阿乘時點檢起疑箚錄則有之敢不一陳於䜿 拂之下以破其黯黯乎謹此條稟於別幅中伏 乞明賜批誨幸甚幸甚星山之行似在春中若 無大段悤遽則當進謁於屛牆耳 與李畏齋 厚慶○庚申 頃奉令胤備審尊體起居衛重雞鳴孳孳義理 日富十分慰喜不啻尋常侹塊伏窮廬便是大 地間一棄物耳山樑之痛吾黨惟均而侹也適 嬰疾病未能承淵氷之戒匍匐之行亦在人後 瞻望雲天不覺涕淚交頤此意可默料否南來 以後百擾交錯所謂▼(日+倉)▼(日+倉)者曰覺昏塞緣何得 一揮驅遣耶令姪氏聞別掃一室溫繹思傳講 確實理誠吾黨中未易得者荐饑之餘人心太 半陷溺而獨能卓然自守政易所謂習坎心亨 而吾丈勉勵之益亦可想也不能種種趨進得 聞其緖餘心常悼歎 |
墓碣銘 幷敍 응와 이원조 찬
漆原安生孝謙踔數百里請銘其八世祖道谷 公墓余以老恤辭不獲遂按江皐柳公所撰行 狀而敍次之曰公諱侹字子長鼻祖諱邦傑佐 麗朝封廣州君子孫遂貫廣州其後世襲冠冕 侍御史諱綏始居咸安四傳至諱器判事子諱 國柱閤門祇侯麗亡託疾不仕入我朝有佐 卽諱峴有重望子諱順才嘉義上護軍生諱汝 居生員以文學訓導一鄕號拙庵於公爲高祖 曾祖諱義文科正言祖諱世國縣令考諱應虎 以孝薦官至僉正妣淑人密陽朴氏士人奎星 女萬曆甲戌生公于道音里第公天姿穎悟孩 提時每拈誦父母兄第等字見僉正公定省于 縣令公公曰子之於父母當如是乎僉正公曰 人有大倫子孝於親方謂人也公曰吾之於大 人如大人之於王考也縣令公喜曰吾門其昌 矣甫成童勤於學不隨同隊遊戲親癠嘗欲日 祝天願以身代至斷指灌血十三丁僉正公憂 終三年不近肉味與穉弟同床共被頃刻不離 廬次事母夫人竭力甘旨繼遭艱幾絶而蘇壬 辰服闋年纔十九與穉弟相勉勿墜家聲文思 日進是年夏倭搶躪諸郡公方讀書賊猝入欲 兵之兄弟冒錄爭死如古姜肱之爲賊義而兩 釋之欲降而又不屈亂定移居漆原爲護邱墓 時新經大亂野多閒田公無一冒占扁小窩自號道谷處士又曰愚叟閒居觀玩無意於世日 讀聖賢書必整襟危坐嘗與趙澗松任道爲道 義交源源過從丁未春陪寒旅兩先生及郭忘 憂李畏齋諸賢泛舟洛江有龍華同泛錄傳于 世其師友之推重可想見也丁卯聞建虜陷江 都憤歎作詩曰忍令禮義三韓國空帶乾坤萬 古羞公非但性於孝友而忠義素所蓄積惜乎 其終老草茅不顯用於世也公優於文學而著 述多逸於燹後孫之所裒稡只略干首一臠可 以知全鼎士林建祠而俎豆之其公議之不泯 尤可知也丙子五月二十二日卒享年六十三 葬在縣西新遵里亥坐原從先兆也配咸安趙 氏栗軒墿之女墓與公雙墳三男三女長壽海 贈掌樂院正次壽嶪出系次壽石女適李景 蕃趙徵獻許英餘子壽嶷老職通政壽海六男 二女時遇時豪時敏時逸時尹時達女成元齎 姜涍內外曾玄多不盡錄銘曰
孝悌出於至性師友足以百世窩以道名圽宜 社祭我銘非謏刻示來裔嘉善大夫前行兵曹 參判兼同知義禁府事星山李源祚撰
0 第二十六 處士 李公 당시 33세 거주지 고령
0 이시함 (李時馠) 1575년(선조8)
본관은 성산, 자는 문원聞遠 . 호는 농운(隴雲)
판서 비(棐)의 8대손 무과 성업의 아들
公諱時馠字聞遠星山人隴西公長庚之後判書棐之八世孫武及第諱成業之子也謹按公之事蹟無路凭詳而寒岡先生卒公有挽曰長呼泗上哭之慟夫子云亡人世空禮樂文章與道德遺風千載鎭吾東觀其詞旨出於悃愊而約而盡眞善形容先師者也惜其見逸於當時收刊中何哉
이시함(李時馠)에게 보낸 답장 -한강집
〔답〕 내 집에서는 요즈음 아내의 상을 만났을 때, 분면(粉面)에 ‘망실(亡室)’이라 쓰고 방제(旁題)를 쓰지 않았으며, 축문은 ‘부성모감소고우망실……(夫姓某敢昭告于亡室……)’이라 쓰고 축사(祝詞)도 본문을 가감하여 썼네. 지금 내가 우연히 손자의 집에 와서 있으므로 이 종이의 여백에 다음과 같이 써서 올리네. 그 내용이 과연 옳은지의 여부는 감히 알 수 없네.
제주(題主) 축문은 ‘복유존령(伏惟尊靈)’을 ‘유령(惟靈)’으로 바꾸고, 우제(虞祭) 축문은 ‘일월불거 엄급초우 숙야구회 비념불녕(日月不居奄及初虞夙夜疚懷悲念不寧)’이라고 하게나.
0 第二十七 處士 郭公 당시 30세 거주지 현풍
0 곽형(郭瀅) 1578년(선조11)
본관 현풍, 자는 청숙. 망우당의 아들 35세 졸
公諱瀅字淸叔忘憂堂之子也 謹按公生長法家文行早著而不幸無位無年僅 享三十五而卒惜哉
0 第二十八 消憂軒 李公 당시 27세 거주지 영산
0 이도일(李道一) 1581년(선조14)~1667년(현종 8)
본관은 벽진, 자는 관지, 호는 소우헌(消憂軒)
복재 이도자의 3 제
칠원현감 불취. 수직으로 부호군. 조간송과 가깝게 지냄
公諱道一字貫之復齋之第三弟也謹按江左所傳公有仁孝行且多義氣好施與善交遊一代名勝莫不聞風傾蓋而與趙澗松堂蔣處士丈[주:文益]道契最密有時乘興短棹相邀或泛月君淵落釣景釀優遊自適以終其年階天爵副護軍
장달수 첨부
소우헌문집(消憂軒文集) 해제
조선 중기의 학자 이도일(李道一)의 시문집. 2권 1책. 목활자본. 1897년 8대손 승영(承永)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종기(李種杞)의 서문, 권말에 승영의 발문이 있다.
권상에 시 19수, 만사 3수, 서(書) 1편, 찬(贊) 1편, 기(記) 1편, 제문 2편, 소(疏) 1편, 권하는 부록으로 가장·유사·행장·묘갈명·묘지명·기·상량문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순후하면서도 건아한 기풍이 있어 읽는 이에게 친근한 느낌을 준다. 〈청송사증별허희화 靑松寺贈別許熙和〉는 평생의 지기였던 허희화와 만나 진진한 정회를 나누고 헤어짐에 앞서 허전한 마음을 잘 묘사한 것이다.
〈우음 偶吟〉 2수는 초연한 경지에서 바라본 인간의 성쇠고락을 묘사, 사물의 무상함을 노래하였다. 〈한강선생찬 寒岡先生贊〉에서는 스승 정구(鄭逑)가 주희(朱憙)의 연원을 이은 이황(李滉)의 정맥을 이어 후진을 교육한 공로를 추숭하고 그의 인격을 매화의 향기에 견주고 있다.
〈사직소 辭職疏〉는 칠원 현감을 사직하면서 올린 글이다. 이 글에서 그는 병자호란을 겪은 뒤 도탄에 빠진 참혹한 민생의 모습과 파괴된 도성의 참상을 들어 말하고, 하루 빨리 이 수치를 씻고 자강의 계책을 강구할 때 오히려 전날의 재난은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밖에도 무릎을 겨우 들일 정도의 작은 집이라는 뜻의 〈용슬헌기 容膝軒記〉에는 삶의 태도와 학문하는 마음가짐이 잘 나타나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消憂軒李公墓碣銘 -성재 허전 찬
公諱道一字貫之號消憂軒。李氏始祖諱忩言。佐麗太祖統合三韓。拜碧珍將軍。遂爲碧珍之世。至本朝有諱約東知中樞謚平靖號老村。受業於金江湖。從遊於佔畢齋。儒林尊之。幷享景濂院。嘗爲濟州牧。掛鞭投甲而歸。州人立生祠。平靖生承元兵曹判書。判書生有溫號友于亭。蔭縣監。以淸白陞通政府使。府使生儼別坐贈戶曹參判。參判生碩慶號德巖。與鄭寒岡爲道義交。以孝廉薦至司果。不赴召。後贈工曹參議。享德峯祠。平靖以下五世。公
之考以上也。妣晉陽河氏。虞候艦之女。公學語時見壁上孝悌字。究問其義。德巖公心奇之。九歲受小學於伯兄復齋。道孜 便會大義。龍蛇之亂。德巖公避地江陵。公從之。時寒岡守江陵。見而歎曰此兒年才十餘。臨亂無懼。事親至誠。異日造詣不可量。旣成人。受德巖公訓誡。專意學問。隨畏齋 叔父厚慶 復齋之後。往學于寒岡之門。己酉仁弘欲害寒岡。囑朴而立搆誣速獄。人皆怵禍。縮首囚舌。獨公兄弟激起士流。冒死叫閽。竟得伸。丙辰以裴慕亭大維薦。累徵至司果皆不就。人曰親在何不仕。公曰此親志也。丙子南漢被圍。公傾家財輸軍餉。翌年又助賑粟。金淸陰尙憲筵奏
除漆原縣監。上疏辭職。因陳復讎之義懷保之策。上嘉之。特陞通政僉樞。後以壽階嘉善。貞夫人南平文氏。參奉博女。四男二女。男澹贈知中樞。演,潤,渟。壻黃悏,李泰享。側室男泌兵曹正郞,瀁參奉,滃。澹二男是柱,是樞改名時樞。二壻裴瑋,嚴碩廈。演一男是楨。潤二男是檍,是彬。三壻辛振文,朴泰胤,裴璹。渟取伯兄子是樞爲後。以討火賊功爲折衝副司直。公生于萬曆辛巳。卒于顯廟丁未。嗚呼。公篤志力行。事親以孝。及遭母父喪。三年憂。平時晨起衣冠。兄弟叔姪。講論經義。立朔望考講法。以牖鄕子弟。友交許眉叟,趙澗松。此其大畧也。八世孫執義承德氏以公行
狀徵墓文於余。固辭再三。繼送其子命和,珪和。屢請不已。遂爲叙述。銘曰。
孝友于家忠于國。不屑屑于榮塗。以遂吾初服。有父兄師友之賢。
0 第二十九 瑟谷 李公 당시 24세 거주지 성산
0 이란귀(李蘭貴)1584년(선조17)
본관은 광산, 자는 자형(子馨) 호는 슬곡(瑟谷)
六一軒 이홍량(李弘量)의 아들. 61세 졸
公諱蘭貴字夢與改子馨光山人高麗版圖判閣順之八世孫也考諱弘量所謂嶺南三容之一蓋其兄弟三人以學行名重南州表德皆有容字故有是稱薦授恭陵參奉不就號六一軒公生于萬曆甲申幼穎悟不煩敎督而能曉解文義壬辰六一公卒公年九歲攀柩叩額流血被面終心喪三年其至誠之見於行者已如此時倭寇充斥西路稍安寒岡鄭先生見任成川先生乃六一公之譚也公奉慈氏往依焉於是公年已十餘一日慨然請先生授學先生感其意卽命師課學不久而進在成川者四年由是師門恩義固已異於人矣及 先生遯荒養閑倻泗十餘年公陪侍杖屨最切見聞益廣所得尤多庚辰丁內艱服闋二年卒壽六十一公性質天全不事修飾六行之篤誠善無僞常以不及致養先府君爲痛每誦匪莪伊蒿之詩欲孝誰爲之語未嘗不三復流涕追遠之禮誠敬極臻色養偏慈五十年左右無違訓子弟必先小學書引擧魯齋神明父母之喩寒暄小學童子之說以勖之居鄕秉心持論不少苟不以利害愛憎有所撓人皆敬憚之少事科業不樂爲世俗粉繪文故屢戰而失之東隅繼以閤州坐李昌祿事解錮於十年之後而公已老矣以親故復事場屋卒不
得志而付諸命廢擧後觀書猶不輟雅好閑趣築室於洛之東涯扁曰瑟谷於此樂志以終身[주:曺承旨挺融撰碣]
寒岡先生別集卷之二
詩
偶吟示李蘭貴李壆李長立李東老等。
六一與玉山。晴暉與公甫。森然猶在目。悲喜盈我腑。
0 第三十 處士 柳公 당시 24 세 거주지 성산
0 류무룡(柳武龍)1584년(선조17)
본관은 문화, 자는 경표, 인배의 아들,
公諱武龍字景漂文化人高麗參政公權之後諱仁培之子也公天姿粹美弱冠執禽于星山六一翁之門翁乃寒岡鄭先生之娚而與先生道義相磨者也公早得依歸充養旣厚陪遊杖屨見聞益廣一代士友多推敬焉寒岡卒公有挽曰眞元鍾會降先覺飛鳥群中類鳳凰繼往淵源如北斗開來事業領東方心懸廊廟忠彌篤身在林泉道更光洙泗倒流哀莫及斯文天喪不堪傷此詩亦見逸於收刊中惜哉[주:瑣聞]
0 第三十一 澗松堂 趙公 당시 23 세 거주지 함안
0 조임도(趙任道) 1585(선조 18) - 1664 (현종 5)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덕용(德勇), 호는 간송당(澗松堂)이다.
立巖 조식의 아들 . 여헌(旅軒) 문인,
그의 학문이 경서를 근본 삼아서 낙건(洛建)의 유서(遺書)를 탐독하여 몸가짐이 단정하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광해군 때 정이홍(鄭仁弘)이 퇴계선생을 배격하려고 각읍 유생을 시켜 상소하려 했을 때 유공(庾公) 사(斯)의 고사를 인용하여 엄하게 거절한 까닭으로 인홍의 미움을 받아 칠원(漆原)에 피신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여헌이 등용되므로 편지하여 출처를 논하였다. 1634년(인조 12)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1647년 대군사부(大君師傳), 1659년(효종 10)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였다. 후에 지평에 추증되고 함안의 향사(鄕祠)에 봉향되었다
묘갈명 병서〔墓碣銘幷序〕 -눌은 이광정 찬
간송(澗松) 선생 조공(趙公)의 묘는 함안군(咸安郡) 동쪽 용화산(龍華山) 아호향(鵝湖鄕) 명원(明原)에 있다. 선생의 현손 홍엽(弘燁)이 선생의 유문(遺文)과 행장을 가지고 북으로 5백 리를 달려와 나에게 부탁하며 말하기를 “나의 선조를 장사 지낸 지 80여 년이 되었으나, 유집(遺集)이 세상에 간행되지 않았고 묘비도 새기지 못했습니다. 무덤에 밝게 내걸 글이 없으니, 그대가 유념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놀라며 말하기를 “나는 후생으로 선생의 문하에 미치지 못했으나 일찍이 유풍을 들었습니다. 선생은 은거하여 그 뜻을 추구하고 자기 몸에 능력을 축적해 두고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한 번 명예가 알려지자 한 번 관직에 제수 되었는데, 편안해 하지 않으며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듯이 하였으니, 후세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어찌 감히 한 마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내가 어리석고 고루하며 늙어 명을 따르기에는 부족합니다.”라고 하였다. 홍엽이 갔다가 다시 찾아왔는데, 그 청함이 더욱 지극하여 이에 그 유사와 행장에 의거해 생애를 차례대로 서술하고 명을 짓는다.
공의 휘는 임도(任道), 자는 덕용(德勇), 처음의 자는 치원(致遠)이며, 간송(澗松)은 그의 호이다. 조씨의 선계는 함안(咸安)에서 나왔는데, 대장군 정(鼎)이 족보에 처음 보인다. 대대로 벼슬한 이를 배출하였다. 경태 연간(景泰年間)에 진사 휘 려(旅)는 벼슬하지 않았는데,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등 제현과 함께 세상 사람들이 생육신(生六臣)으로 일컫는다. 지금 서산서원(西山書院)의 사당에서 향사되었는데, 공의 5세조이다. 아버지 휘 식(埴)은 호가 입암(立巖)으로 숨은 덕과 높은 행실이 있다. 어머니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병절교위(秉節校尉) 유상린(柳祥麟)의 딸이다. 만력(萬曆) 을유년(1565, 명종20) 7월 17일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밝고 빼어나 비범하였는데, 6세 때 모부인에게 말하기를 “효(孝) 자로 제 이름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10살이 되기 전에 임진ㆍ계사년의 난리를 만나 경상좌도 지역에서 타향살이를 하였는데, 무릇 모든 말과 행동거지를 부모님이 하는 것을 본받았다. 14세 때 반천(槃泉) 김중청(金中淸) 공에게 수학하였는데, 김공은 월천(月川)의 문인이다. 공은 퇴도(退陶)의 가르침을 익히 듣고서 존모하였다. 얼마 뒤에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을 따라 40여 년을 배웠는데, 훈도되고 서로 진보함이 더욱 친절하고 절실하였다. 공의 학문은 경서(經書)를 근본으로 삼고 정주학(程朱學)에 잠심하였다. 공은 자기를 다스림이 매우 엄격하였고, 그 도를 행하는 것은 일상생활의 인륜 사이에 있어 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다. 거상(居喪)할 적에 다른 사람보다 행하는 것이 지나쳐 죽을 마시며 상을 마쳤고, 기한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소식(素食)을 하였다. 항상 부모에 대해 민자건(閔子騫) 같은 매우 애처로운 마음이 있어, 지은 〈추모록(追慕錄)〉, 〈풍수음(風樹吟)〉, 〈유모가(孺慕歌)〉 등의 작품은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이 멀리서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마음으로 퇴도(退陶) 선생을 불쾌해 하여 여러 고을의 제생을 부추겨 소의(疏議)에서 공척(攻斥)을 펴고자 하니 거스르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공은 방몽(逄蒙)과 유공지사(庾公之斯)의 일을 인용하며 거절하는 것이 매우 확고하여 그들에게 미움을 받아 칠원(漆原)의 강가로 피해 몸소 물고기를 잡으며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여헌(旅軒)이 처음으로 발탁되자 공이 편지로 출처의 의리를 논하였고, 또 말씀드리기를 “예로부터 정도(正道)를 지키는 선비로서 누가 명예와 절조를 갈고 닦으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가면 본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 드무니, 원컨대 선생께서는 제가 형편없다고 해서 좋은 말까지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으니, 공의 은미한 뜻을 알 수가 있다. 갑술년(1634, 인조12)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정해년(1647, 인조25)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제수되고, 기해년(1659, 효종10)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늙고 병든 것으로 사양하였다.
공은 명성을 부끄러워하여 무릇 징소(徵召)가 있었지만 일찍이 일어나 응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늙어서 더욱 돈독하여 인조와 효종의 국상(國喪) 때 졸곡(卒哭)까지 모두 소식(素食)을 하여 주위의 사람들이 몸을 상할까 걱정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는 강상(綱常)을 위해서 도모하니 일신을 돌아볼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몸이 상한들 무엇을 고려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임인년(1662, 현종3) 안렴사(按廉使)가 장계를 올린 것으로 인해 임금이 전지(傳旨)를 내려 칭찬하면서 쌀과 콩을 하사하였는데, 공이 소를 올려 사은하면서 시무 14조를 진달하니, 임금께서 가상하게 여겼다. 갑진년(1664, 현종5) 공이 춘추 80세 때 병환이 위급해졌는데, 좌우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옛사람이 죽음에 임해서 기뻐하며 웃은 이가 있다.”라고 하였다. 좌우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으니 “도정절(陶靖節)이다.”라고 말하고서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2월 15일 무신일이었다. 방백이 조정에 부음을 알리니 특별히 호조에 명하여 부의를 보냈다. 4월 기미일에 부모의 선영이 있는 동쪽 기슭에 장사를 지냈다. 공은 부모가 살아계실 때 항상 좌우에서 모셨고, 까닭 없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이미 장사를 치르고 나서는 여묘 아래에 상로암(霜露庵)을 지었고, 칠원(漆原)의 내내(柰內)에서 영산(靈山)의 용산(龍山)으로 옮기고서는 망모암(望慕庵)을 지었는데, 모두 무덤과의 거리가 10리가 되지 않으니, 맹자(孟子)가 진정한 효자는 평생 부모를 사모한다고 칭찬한 말은 공이 아마도 그에 가까울 것이다. 공은 이미 퇴계 문인에게 사숙(私淑)하였고, 또 어진 사우(師友)를 좇아 질문하고 강마하여 도와 덕을 성취하였다. 남쪽 지방의 학자들이 일제히 존신(尊信)하였으나, 공은 항상 겸손해 하며 사문으로 자임(自任)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공이 평소 스스로 수립한 바를 보면 그 조예가 깊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다.
공의 부인은 노파처사(蘆坡處士) 이흘(李屹) 공의 딸인데 현명하였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또 안악 이씨(安岳李氏) 훈도 이춘길(李春吉)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또한 아들 없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종부형(從父兄)의 아들인 함변(咸抃)을 후사로 삼았는데, 함변이 3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은 시각(時瑴), 시장(時璋), 시숙(時璹)이다. 딸들은 사인(士人) 송수(宋洙), 성재우(成在瑀), 이언눌(李彦訥), 이시억(李時檍)에게 시집갔다. 시각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은(檼), 찬(欑), 집(集)이고, 딸은 사인 김하중(金夏重)에게 시집갔다. 시장은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재(梓), 합(柙), 황(榥)이고, 딸은 사인(士人) 이시걸(李是杰), 이태연(李泰然)에게 시집갔다. 시숙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강(棡)이고, 딸은 사인 강사철(姜師喆)에게 시집갔다. 은(檼)은 아들을 한 명 두었는데, 홍엽(弘燁)이다.
공은 이미 부귀공명을 단념하고 한가롭게 거처하면서 천성을 함양하였는데, 사는 곳에 강호와 정대(亭臺)의 빼어난 경치가 있어 때로는 일엽편주로 사우(師友)와 학생을 따라 강을 오르내리며 시를 읊조렸다. 문집 약간 권이 있다. 공이 세상을 떠 삼년상을 치르고 끝내자 사림에서 모인 자들이 모두 쓸쓸히 돌아보고 그리워하여, 방백에게 장계를 올려 임금에게 아뢰게 해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50년 뒤 또 서원을 세우게 해달라고 소를 진달하였는데 의릉(懿陵)이 특별히 그 청을 윤허하니, 그 유풍과 끼친 교화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와 같았다. 전취 부인은 용화산 남쪽 기슭에 따로 장사 지냈고, 후취 부인은 공의 묘소 왼쪽에 장사 지냈다. 명은 다음과 같다.
파산의 조씨 집안에는 / 巴山之趙
어계 선생이 계시었네 / 有漁溪翁
대대로 그 정절을 이어받아 / 世襲其貞
우리 간송 선생을 내셨네 / 挺我澗松
선생이 행한 것은 / 先生之行
효제와 충신이요 / 孝弟忠信
학문의 본받은 바는 / 學有宗派
바른 앎과 실천이네 / 正知實踐
바른 앎으로 사악함을 막고 / 正以距邪
실천으로 몸을 수양하였네 / 實以禔躬
용화산의 언덕에 / 華山之阿
고상한 기풍이 늠름하게 있네 / 有凜高風
소나무 숲 대나무 심은 곳에 / 松林竹樹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네 / 其封四尺
내가 요점을 모아 돌에 새기니 / 我最以銘
선생의 훌륭한 자취이네 / 先生之迹
후학 평원(平原) 이광정(李光庭)이 짓다.
澗松先生趙公之墓在咸安郡東龍華山鵝湖鄕明原。先生玄孫弘燁以先生遺文行狀北走五百里屬光庭曰:“吾先祖葬已八十餘年,遺集未行于世,而墓碑不刻。無文以昭揭幽阡,幸吾子之加之意也。” 光庭瞿然曰:“光庭後生,不及先生門,而嘗聞遺風矣。先生隱居求志,藏器於身而恥以自衒。聞一譽除一官,蹙然如不自容,其不求知於後世明矣。光庭安敢措一辭?且光庭愚陋老洫,不足以辱命。” 弘燁去而復來,其請益至,迺据其事狀,序次終始而爲之銘。
公諱任道,字德勇,初字致遠,澗松其號也。趙氏系出咸安,大將軍鼎,始見於譜。世有衣冠。景泰中,有進士諱旅不仕,與金東峯時習、李耕隱孟專諸賢,世稱生六臣。今享之西山院祠,於公間五世矣。皇考諱埴,號立巖,有隱德高行。妣文化柳氏,秉節校尉祥麟女也。以萬曆乙酉七月十七日生公。
幼瑩秀不凡,六歲,告母夫人曰:“以孝名我。” 未十歲,値龍蛇亂,流寓江左,凡一言動,視父母所爲。十四,受學於槃泉金公中淸,金公,月川門人也。公習聞退陶音旨尊慕之。旣而從旅軒張先生遊四十餘年,所以熏炙相長者,益親且切。公之學,以經書爲本,而潛心洛、建之業。自治甚嚴,其道行之日用彝倫之間,事父母誠敬俱至。居喪有過人行,歠粥終喪,過期猶素食。常有閔子切切之哀,所述《追慕錄》、《風樹吟》、《孺慕歌》等作,見者無不下涕。光海世,仁弘遙執朝權,心不快於退陶先生,嗾列邑諸生,張攻斥疏議,莫有違者。公引逄蒙、庾公之斯,距之甚確,爲所惡,避地漆原江上,躬漁以養親。
仁廟改紀,旅軒首膺拔擢,公以書論出處之義,且曰:“自古守正之士,孰不欲砥礪名節?而及到名場,鮮不失步,願先生不以人廢言。” 公之微意可知也。甲戌,除恭陵參奉不就,丁亥,除大君師傅,己亥,除工曹佐郞,俱以老病辭。
公恥名,凡有徵召,未嘗起而應之,然其愛君憂國,老而愈篤,仁廟、孝廟之喪,至卒哭俱食素,左右憂其致傷。公曰:“古人云:‘我爲綱常謀,有身不得顧。’ 雖致損庸計乎?”
壬寅,因廉使啓,上下旨褒諭,賜米豆,公上疏謝,因陳時務十四條,上爲之嘉歎。甲辰,公春秋八十,疾革,顧左右曰:“古人臨終,有怡然而笑者。” 左右問爲誰,曰:“陶靖節也。” 遂終,二月十五日戊申。方伯以訃聞,特令戶曹致賻。四月己未,葬于父母塋東麓。
公父母時常侍左右,無故未嘗去側。旣葬,廬墓下築霜露庵,自漆之柰內,移靈山之龍山,築望慕庵,俱去丘墓無十里,孟子稱大孝終身慕父母,公其庶矣乎。公旣私淑於溪門,又從賢師友質問講劘,道成德立。南方學者翕然尊信,而公常退遜,未嘗以斯文自任。然觀其平生所自樹立,可測其造詣者深也。
公之夫人,蘆坡處士李公屹之女,賢而無子。旣卒,又娶安岳李氏訓導春吉女,亦無子,先卒。取從父兄子咸抃爲後,生三男四女。男時㲄、時璋、時璹。女適士人宋洙、成在瑀、李彥訥、李時檍。時㲄有三男一女,男檼、欑、集,女士人金夏重。時璋有三男二女,男梓、柙、榥,女士人李是杰、李泰然。時璹有一男一女,男棡,女士人姜師喆。檼有一子,弘燁也。
公旣絶意外慕,居閒養性,所居有江湖亭臺之勝,有時扁舟從師友學子沿洄吟哢。有文集若干卷。公之喪,旣祥畢事,士林會者咸愀然顧慕,以狀聞于方伯,轉啓上,贈司憲府持平。後五十餘年,又以建院陳疏,懿陵特允其請,其遺風餘敎之感動人如此。前夫人,別葬龍華南麓,後夫人,葬在公墓左。銘曰:
巴山之趙,有漁溪翁。
世襲其貞,挺我澗松。
先生之行,孝弟忠信。
學有宗派,正知實踐。
正以距邪,實以禔躬。
華山之阿,有凜高風。
松林竹樹,其封四尺。
我最以銘,先生之迹。
後學平原李光庭撰。
0 第三十二 益庵 李公 당시 21 세 거주지 영산
0 이도보(李道輔) 1587년(선조20)~1651(효종2)
자는 익지, 호는 익암(益庵)
외재 이후경의 아들. 아버지 외재를 따라오다.
광해군(光海君) 4년 (1612)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2등(二等) 23위 (사마방목)에 입격하여 반궁의 掌議가 되다.
천거로 재릉 참봉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조간송당과 특별히 가깝게 지내다.
公諱道輔字益之畏齋之子也自爲兒時祥順有節度見者稱大人童子六歲値壬辰之亂隨王父護軍公避兵關東流離顚沛備嘗艱難而不失常度護軍公撫頂曰白玉之質泹而不淄難稍定還于故居年已十二三始就傳受學文理日達流輩莫有能先之者畏齋嘗指公白眉曰汝眞是吾家白眉郞十五隨畏齋拜鄭先生于武屹山齋先生一見奇之戲之曰若見我欲何爲曰欲聞先生敎人之法先生曰若外王母吾從姊妹也吾
於若爲大父何不稱我大父而稱先生也曰小子將請學於先生矣稱先生以道之所存也先生顧門人曰可謂有父有子矣壬寅丁先妣郭夫人憂水漿不入口旣葬猶歠粥大人公勸之飯公曰大人之喪王母也年九歲矣猶執喪如禮兒今十六豈憂不勝喪然大人有命矣以蔬食水飮終三年旣冠治擧子業二十六中壬子司馬諸生推爲掌議太學中極選也後五中東堂五屈禮部又嘗中庭試見拔而不以爲意歎曰吾兒時從家大人後見鄭先生於百梅園備灑掃之役託跡門下且十數年矣若專以科第爲心而不留意此事則豈惟一己之羞實父師之恥也於是內而講問於家庭外而請益於師門取性理諸書刻意加工尤深於庸學畏齋嘗曰知庸學吾不及汝人有來問者必命公開說其見重家庭如此天啓丁卯有狄人之侵大駕入江都時畏齋先生扈從行在公倡起義旅赴君父之急有二卒不用命卽斬以徇衆讋服曰孰謂司馬仁乎是年冬先生有陰城之命公請曰兒嘗遊太學與湖人同處者久湖人狙詐易親易疏宜治之有道因俗而善導之不可以嶺治湖往來省覲嘗自斂勅不使邑人知子弟在官己巳先生因事罷歸俄寢疾日篤公衣不解帶嘗糞以
驗其劇歇翌年春先生竟不起疾公持喪一如前喪自此謝絶外慕專意爲己之學搆小齋扁以益庵與澗松堂趙公任道隔江相從以道義切劘趙公旅軒高弟也癸酉被薦太學乙亥御史又薦聞于朝丁丑始除齊陵參奉辭不赴搆玉山齋講道其中有終焉之志壬午從兄復齋公卒公大慟曰先公與堂兄同遊寒翁之門倫則父子情同兄弟不弔先公下世所恃者吾兄在耳吾將以事先公者事兄以卒先人之敎今又不待矣我之不蘉家學絶矣益孜孜不怠嘗語子弟曰吾家學有淵源汝曹專事科業而不知有此學可乎必使之先讀小學知灑掃應對之節然後授以他書又曰仁之於人若飮食焉飮食不可廢則仁其可去乎仁惡在在於我盡吾性則仁便在是靜處一室對越聖賢拈出嘉言善行切於學者者朝夕諷誦不以年老或懈嘗曰士君子徒以章句誦說而已者陋矣其遇先忌必七日戒三日齋祭需躬自點視祭之日終夕有戚容以先夫人畏於火終身不御爛煮之物德器溫粹未嘗有疾言遽色待人誠信款曲雖卑賤者必以溫顏遜辭相接使之盡其情有善必稱有過未嘗直斥諷使覺悟故人無賢不肖皆歡忻愛慕曰拜益翁自然作好容顏公韻味瀟灑所居之室不蔽風日衣不能節寒暑晏如也以辛卯考終壽六十五
[權正郞萬撰狀]
0 第三十三 處士 李公 당시 21 세 거주지 영산
0 이해(李瀣)1587년(선조20)
본관 벽진, 자는 이호 . 복재 이도자의 아들 早卒
公諱瀣字而浩復齋之子也受業於畏齋門行誼風著不幸未娶而卒
0 第三十四 處士 李公 당시 20세 거주지 칠곡
0 이충민(李忠民) 1588년(선조21) ~ 1673년(현종14)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직(汝直), 호는 모암(慕巖),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두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과거를 단념하고, 받들어 모시기에 낙으로 삼았다. 또 우애가 지극하여 형의 죽음을 슬퍼하기 친상과 같이 하였으며, 조카형제가 재질이 둔했으나 성심껏 교육하고 전토(田土)를 나누어주어 생계를 돕게 하였다.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이 되어 동중추(同中樞)에 올랐다.
0 영천초천일기(榮川椒泉日記)가 있다.
公諱忠民字汝直碧珍人山花先生諱堅幹之十二世孫也生於萬曆戊子早遊寒岡鄭先生門先生以純孝稱之公嘗過燕子院吟詩一絶曰燕子樓中佛由來閱幾年停驂無限意惟祝老親年又歌一闋曰祝了祝了
于天主祝了非功名非富貴北堂鶴髮偏親壽千歲祝了於此足見公愛日之誠隨遇而發也享年八十六階天爵副護軍○有子曰榮世早中司馬薦授社稷參奉號日休堂亦壽過八旬而卒[瑣聞]
謹按澗松堂追序同泛錄而有曰其二人不可詳其居住公乃其一也蓋當日舟遊寒岡先生命修是錄正本則先生藏諸硯匣而去一通錄蒿遺在座間幸賴會中人收拾善傳因以流播於世而第錄尾二員只書姓諱其表德年住俱不載焉豈是錄草而非正而偶闕其詳耶肆用覽是錄者莫的其某鄕人某家先而旋竊慨如者久矣歲壬戌春漆州士人李光㻐甫過余而宿偶閱同泛錄至公之名悤油然而作曰此乃吾先祖而何獨無字年居址之備記也余曰子之言妄矣母其同姓名乎對曰先祖純孝人也荷愛先生最深凡有杖屨之戒公必陪從題名記遊處頗多烏斯之獨未信也問其字則某叩其年則果沕於錄中第次矣余卽書塡其名下略記事實之如右
0 임진부(林眞怤) (제현록에 없음) 당시 22세
0 임진부(林眞怤)1586(선조 19)∼1658(효종 9).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낙옹(樂翁),
호는 구곡노부(九曲老夫)·임곡(林谷).
아버지는 승근(承謹)이며, 어머니는 노씨(盧氏)이다. 아버지가 일찍 죽자 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웠다,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었으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는 다시 과거를 보지 않고 은거하여 지냈다.
인조반정 후 독서인(讀書人)으로 이름이 있어, 1635년(인조 13) 대군(大君)의 사부로 천거된 바 있다.
만년에는 합천의 구곡 밑에 살면서 방에 ‘자지헌(自知軒)’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연을 벗삼으며 지냈다.
(林谷先生文集卷之一)
題龍華山下同汎錄後龍華山下道興津
寒岡 旅軒 忘憂堂 同泛
道興舟幾大 載得此羣英 已向安流泛 何須問耦耕
<용화산하동범록〉 후서〔龍華山下同泛錄後序〕 간송 조임도
황명(皇明)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40) 초봄 한강 정 선생께서 도흥보(道興步)에 와서 노닐었는데, 도흥은 곧 용화산(龍華山)의 동쪽 기슭이다. 처음 창암(蒼巖)에 먼저 도착하여 망우정사(忘憂精舍)에서 묵었는데, 그 주인은 전 우윤(右尹) 곽 상공(郭相公)이다. 다음 날 강을 거슬러 올라 경양대(景釀臺)를 지나 내내(柰內)에 올라 산천의 빼어난 경치를 두루 구경한 연후에 도흥촌에 머물러 쉬었다. 선생께서 일찍이 비석으로 쓸 만한 돌을 강가에 두었는데, 그 뒤 그 소재를 잃어버린 것이 20년이 되었다. 혹시 모래에 파묻히고 물에 빠졌을까 염려되어 어부에게 청하여 찾아내고자 하였으므로 이번 행차가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내가 이때 칠원(漆原)의 장춘사(長春寺)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부친께서 상포(上浦) 강가의 별장에 도착하여 급히 편지를 보내 불러들이기를 “두 현인이 가까운 곳에 머무시니 어찌 가서 뵙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곧바로 저녁에 강가의 별장에 와서 묵었는데, 이곳은 계부(季父)의 별장으로 도흥과는 서로 바라보이는 곳이다. 이른 아침에 부친과 계부를 모시고 작은 배를 타고 도흥에 이르니, 선생께서는 이미 용화산 아래에 배를 매어두고서 돌을 찾고 있었다. 선생에게 나아가 배알하고 물러나 좌우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따르며 노니는 자들은 여헌 장 선생과 한강 선생의 문도들이었다. 두 선생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모인 사람은 망우당 곽 우윤(郭右尹)과 함안 군수 박 영공(朴令公)이었다. 그리고 함안에서 온 사람이 14명, 영산(靈山)에서 온 사람이 10명, 창녕에서 온 사람이 1명, 현풍에서 온 사람이 1명, 고령(高靈)에서 온 사람이 1명, 성산(星山)에서 온 사람이 4명이었는데, 배가 좁아 모두 탈 수가 없었다. 대개 정 선생께서 함안 군수로 계실 적에 선정(善政)을 베푼 은덕이 있었고, 도흥촌이 또 함안의 경내에 있었기 때문에 모인 손님 중에 함안 사람이 가장 많았다.
이날 부친과 계부께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제현(諸賢)을 위로하였고, 이어서 술잔을 돌린 자는 영산(靈山)의 전 군수 신초(辛礎) 어른과 함안의 교생(校生)이었다. 술상은 간소하고 정결하였으며, 예의(禮儀)는 어긋나지 않고 공경스러워 술자리가 엄숙하였다. 선생께서 돌아보며 제생들에게 말씀하기를 “오늘의 모임은 성대하다고 말할 만하다. 어찌 기록해 두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함안 사람 진사 이명호(李明怘)가 명에 응하여 일어나 종이와 붓을 가져와 썼다. 정 선생을 제일 위에 적고, 그 다음은 곽 우윤을 적고, 또 그 다음은 박 영공을 적고, 또 그 다음은 장 선생을 적었다. 이 이후로는 나이순으로 적고 관작의 서열대로 적지 않았다. 다만 성명, 자(字), 나이, 사는 곳 및 모인 날짜만을 적었는데, 모두 35명이었다.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이라고 제목하고 기록이 완성되자, 선생께서 문인에게 명하여 보관하게 하였다. 이날 저녁 선생께서는 남여를 타고 먼저 침소에 가셨고, 배 안의 사람들은 차츰 나뉘어 흩어졌는데, 곽 우윤은 강정(江亭)으로 돌아갔고, 박 영공은 관아로 돌아갔다. 선생을 지키며 나루에 유숙한 사람은 문생 10여 명과 우리 고을 노인들의 자제들이었다.
다음 날 두 선생께서는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시고, 나는 선친을 모시고 검계(劍溪)로 돌아왔다. 아! 정 선생의 빼어난 덕망과 장 선생의 혼후한 기상과 곽 우윤의 속세를 벗어난 흉금은 예전부터 들었는데도 오히려 또 감흥이 있었다. 더구나 지금 세상에 함께 살면서 몸소 그 모습을 뵙고 때를 같이하여 배 안에 모두 모였음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리고 나와 선친이 또 좋은 모임에 참여하여 가까운 자리에서 뵙고서 지란(芝蘭)의 향기에 흠뻑 스며들고 강호의 큼을 마음껏 관람하였으니, 진실로 한 세상의 성대한 모임이고 인간사의 좋은 일이었다. 불행하게도 2월 말에 나는 갑자기 종천(終天)의 슬픔을 품었는데, 구차하게 남은 목숨을 보전하면서 예전의 즐거운 일에 마음을 두지 않은 것이 10여 년이 되었다.
경신년(1620, 광해군12) 봄과 여름 사이에 안정(安侹)-선생의 종자부(從姊夫)이다.- 이 내내(柰內)의 새 거처에 들렀는데, 이로 인해 함께 강대(江臺)를 소요하다가 도흥을 가리키자, 용화산 아래에서 함께 배를 띄웠던 때의 일을 추억하며 개연히 탄식하였다. 안군이 말하기를 “우리 집에 〈동범록(同泛錄)〉 초본이 있는데,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듣고서 놀라고 기뻐 노복을 보내 가져오게 하여 꿇어앉아 받들고 완미하며 이를 읽다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즐겁지 않게 되어 크게 한숨을 쉬며 슬퍼하였다. 함께 배 띄우던 날이 정월 28일이고 선친께서 돌아가신 날이 2월 28일인데, 길흉과 애락(哀樂)이 이처럼 현저하게 다르니 인사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구나. 또 생각해 보니 곽 우윤은 정사년(1617, 광해군9) 여름에 돌아가시고, 정 선생은 올해 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나머지 기록 중에 이름이 있으면서 황천으로 돌아간 이들이 또한 8명이니, 유림의 애통함과 생사가 나뉜 감정이 대체 어떻겠는가. 지금 세상에 살아있으면서 내가 북두성처럼 우러러 의지하여 스스로 위안을 삼는 분 장 선생만이 아무 탈이 없어 사문의 한 줄기 도맥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외재(李畏齋) 어른은 한강 선생의 제자로서 스승을 위하여 언행록을 찬술하였는데, 의서(衣書)를 부탁한 것이 또한 거의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 내가 이 기록에 대해서는 느끼는 바가 있다. 기록 중에 흠앙(欽仰)할 만한 분이 있고 사모할 만한 분이 있다. 흠앙할 것은 두 현인의 덕업과 문장이 아니겠는가. 사모할 것은 곽선옹(郭仙翁)의 기개와 풍절이 아니겠는가. 붕우와 고을의 어른들은 모두 우리 부자가 일찍이 교유한 사람인데, 얼마의 세월이 지나 이미 옛 일이 되어버렸으나 눈길을 주고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어찌 그만두겠는가. 이에 종이를 엮어 책을 만들고 그 내용을 옮겨 기록하였는데, 장 선생에 대해서는 헌호(軒號)를 적었고 선친에 대해서는 ‘선대인’이라고 하였으니, 매우 참망(僭妄)됨을 알겠다. 그러나 일찍이 점필재(佔畢齋)가 《청구풍아(靑丘風雅)》를 수정할 적에 제현의 성씨와 사적을 권수(卷首)에 논차(論次)하고서 사예공(司藝公)의 성명을 쓰지 않고 단지 선대부(先大夫)라고 일컫고 그 아래에 주(註)를 달아 “휘는 모이고 자는 모이다.”라고 하였으니, 고인이 자신의 부친에 대해 공의로써 사사로운 정을 폐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내가 사사로이 스스로 선친을 높인 것이 어찌 옛 근거가 없겠는가. 내가 이미 이 기록을 다행히 다시 얻었고, 또 안군이 능히 훌륭한 행적을 보전한 것을 가상히 여기며 이에 서문을 쓴다.
0 龍華山下同泛錄追序
皇明萬曆丁未初春寒岡鄭先生來至道興步道興卽龍華山之東麓而咸安郡之北隅也始至之夕率朋徒乘舟浮下宿忘憂之精舍其主人則前右尹郭相公也旣宿之明日又泝流而上歷景釀登柰內以周覽乎上下山川之勝巖壁之奇然後乃復于初到之所而休焉蓋聞先生嘗得石之可碣者不能運留江濱因失其所在者二十年矣或慮其沈埋沙水而人自不知也欲倩海夫搜剔而覓之故有是行云任道於是時方讀書于漆原之長春寺先君到上浦江舍馳書命召曰二賢竝臨盍往拜之任道卽夕來宿江舍江舍卽吾季父別業而與道興通望處也厥明日平朝陪先君季父乘小艇抵于道興則先生已於龍華山下下碇監搜石矣進謁先生退敍左右一視先君導率指敎而爲之坐旣定始轉目而閱之從之遊者旅軒張先生及寒岡之門徒也聞而會者忘憂郭右尹咸倅朴令公也咸安來者十四靈山來者十人昌寧來者一人玄風來者一人星山來者二人高靈來者一人其二人則不可詳其居住矣舟窄不能容蓋先生於咸郡曾有遣愛而道興之津又在咸之境上故會客之中咸之人最多焉是日也先君與季父設壺觴慰群賢繼以行酒者靈山前郡守辛丈礎與咸安之校生也大都杯盤簡潔禮儀和敬無譁笑不戲色肅如也穆如也先生顧謂諸生曰今日之會可謂盛矣其何以不志其令善書者一人列錄坐客以爲他日面目可乎於是咸人進士李生明怘應命而作取紙筆書之鄭先生居首其次郭右尹又其次朴令公又其次張先生自此以後敍以齒不以爵直書其姓名字年行居住曁會集之歲月日凡三十五員目爲龍華山下同泛錄錄之目乃先生所裁定也錄旣成獻于先生先生命門人藏諸硯匣只有草蒿一本遺在坐間坐間傳相輸翫而任道則眇然席末恨不得重覽其錄本而略領其梗槪也是夕石旣不得日又忽暮先生獨登藍輿先就寢所舟中之人稍稍分散郭右尹歸于江亭朴令公入於郡中護先生留宿津頭者門生十餘人及吾鄕之耆老子弟也翌日淸晨兩先生渡江而北鄕之少長各還其家任道亦奉先君返于儉溪惘惘然如有所失曰若鄭先生之英豪才德張夫子之渾厚氣像郭右尹之灑脫胸襟聞諸古昔尙且興感對之卷中亦當起敬而況今不聞諸古昔而竝生乎當世不對之卷中而親見其面目一時咸聚於一舟之中而吾父子二人又得參其會邇其光從容一席之上穩做同舟之款薰襲芝蘭之馨縱觀江湖之大眞一代之勝集而人間之盛事也此日之得不其多乎此日之會不亦樂乎知茲會之不可再續而悼勝迹之泯沒無傳欲爲文志之學未透辭未達搆思而未就矣不幸二月之尾先君奄逝終天之慟尙忍言哉苟保餘生無意昔歡者十餘年矣歲庚申春夏交從妹夫安君侹偶來過於柰內之新居因與逍遙江臺指點道興忽念龍華同泛事慨然歎曰當時二先生答先人手札至今尙存但恨不得復見同泛之錄蒿也安君曰子欲求得是錄乎吾有一本草蒿藏在篋笥中耳蓋安君於丁未亦在會中故拾而得之矣任道聞而驚且喜遂走伻取來長跪奉玩手不能釋得之之初欣然忘食閱之未幾又復不樂歔欷太息以悲同泛之日是正月之廿八而先考之沒在二月廿八纔隔三十日吉凶哀樂若是懸絶人事之不可恃也如此且念郭右尹已於丁巳夏乘化鄭先生又於今年春易簀其餘名在錄中而身歸泉下者亦八人儒林之慘存沒之感顧何如哉今之在世而吾所斗仰可賴以自慰者惟張先生尙無恙斯文一脈未墜於地而畏齋李丈以寒岡門弟爲先師行心喪方裒集寒岡文蒿之爲己任先生歿而衣書之托亦庶乎不患其無人矣嗚呼任道於是錄多所感矣錄之中有可景慕處焉有可想望處焉其所景慕者非二賢之道德文章乎其所想望者非郭僊之風致名節乎朋知故舊多在於此鄕黨長老亦參於斯皆吾父子之所相與交遊者而未數十年已成陳迹寓目興思烏可已乎然而無收拾善藏之人於當日則亦何能至十有四年之久而不失復得爲吾家有乎任道於安君深用嘉焉獨惜其載乎錄者如彼其重而錄之草蒿麤薄短狹甚不與之相稱也編紙作冊移錄其中安君之賜一變新矣任道其間有以私意擅改者二焉其一易張先生諱字以軒號其一不姓名先人曰先大人極知僭妄無所逃罪然先生道之存也先考子所天也而錄之重修出於任道之手錄之守藏在於任道之家在任道職分當然觀者恕之竊嘗觀佔畢齋之修正靑丘風雅目錄也論次諸賢姓氏事蹟於卷首而不書司藝公姓名直稱先大人註于其下曰諱某字某則古人之於父也其不以公義廢私情如此任道之私自尊親亦安敢全無古據而冒犯直遂乎如得工畫善寫之妙旣圖且錄粧成數疊短屛或造一幅小軸掛之堂壁留之心目赫赫若前日事則安君之惠又加遠矣任道旣幸錄之復得而又嘉安君能保勝迹於是乎序是歲庚申秋月日也
0 謹書龍華山下同泛錄追序後
昔澗松堂趙先生撰我曾王考贈判敦寧府君行狀而有曰公與鄭寒岡張旅軒郭忘憂諸先生泛舟遊於龍華山下龍華山卽洛之道興步西嶽而江流削其一面蒼壁往往鐵立蓋嶺之南勝地也尙節每過此見其洋洋焉嶷嶷焉十里明沙帆檣上下輒有羹墻之慕未嘗不歇馬彷徨而因竊念蘭亭之會有逸少之記赤壁之遊有東坡之賦則惟我諸先生道德文章風韻氣節其視王蘇輩淸虛放浪不啻星淵而曾無一言之垂於泛舟之日何也余常訝焉丁未秋偶訪趙大雅弘燁氏於龍山別業弘燁氏澗松堂玄孫也坼戶臨江指點顧余而言曰子知龍華同泛古事乎我有同泛錄一本又有先祖序文一通藏之篋笥久矣尙節驚喜覓出盥手奉翫其錄則鄭寒岡首焉郭右尹次之朴咸安張旅軒又次之第十九吾先祖判敦寧府君第三十一趙澗松先生先生先大人立巖公亦與焉總凡三十五員其序曰皇明萬曆之丁未孟春鄭先生爲覓碑材之遺失江岸者而有是行諸先生及四方多士皆從之遊者也是會也杯盤簡潔禮儀和敬鄭先生曰盛矣可不識乎於是是錄成張先生以上序以爵其下以齒而直書其姓名某字某居址年月日其目爲龍華山下同泛錄者鄭先生所裁定也尙節得此始悉舟遊之顚末而目其錄口其序珍復詠歎之極悵望江際風徐浪穩魚鳥游泳疏篁老檜映帶左右則依然坐一舟中親覩諸先生好氣像來也況我曾王考出處行藏與忘憂郭先生不約而同一倡義旅島夷遁跡再飛尺紙逆臣授首功成事定浩然而歸時與儒賢長老遊泛江湖編名一錄照耀千載則尙節之於是錄愛而敬之敢不自別於他人也耶嗚呼澗松先生陪侍其先大人摳衣丈席獲近淸光斯固榮矣而尙節生晩曠世之下末由攀化徒取紙上陳迹摩挲不已吁其悲矣雖然是錄之顯晦於斯世抑亦有數於其間趙先生後同泛十四載復見是錄於安公侹追感而序之尙節後趙先生百有十年始得是錄於趙先生之祀孫謹書其後且繫一律用寓我追先景賢之誠此豈偶然哉後之覽是錄者不以我僭妄而又以是張大之則錄之傳庶將無窮期也曷不休哉 華山嶷嶷洛江長何日先生此泛檣元禮舟中同載郭晦翁床上共携張群賢一代爭攀化吾祖當時亦邇光特地淸遊誰記述文章欽仰澗松堂
崇禎紀元後再戊申仲春日後學凝川朴尙節謹書
0 (龍華山下同泛之圖)
第一 龍華嶽
詩曰
峨峨枕碧流 猗歟師友會 吾祖昔同遊 右龍華勝集
龍華山 合江亭 鵝湖
第二 靑松寺
詩曰
鍾聲薄暮廻 收心一妙法 傳得紫陽來 右靑松暮磬 靑松臺
第三 道興步
詩曰
嘉號待群賢 可惜琬琰石 深藏何處右道興搜石 道興步
第四 柰內村
詩曰
淸幽多佳賞 維舟翔鳳下 列坐高臺上 右柰內淸賞 翔鳳
第五 景釀臺
詩曰
天然錦屛開 且可留心看 長年莫謾催 右景釀奇矚
第六 是藕浦
詩曰
僊舟瞥過津 催帆呼隔手 江上伴鷗人 右藕浦追帆
第七 平沙面
詩曰
行行雁字斜 伊川看兔理 理會此間過 右平沙落雁
第八 滄巖舍
詩曰
德星耀此中 蘭舟將欲發 携手主人翁 右滄巖同舟
右龍華山水圖群賢之遊於斯怳然若昨日事山高水長遺風足想含靑釀綠餘景可掬則信知傳勝寓慕之地非直文字爲貴畫亦不無助也蓋是圖也只是摹寫一帶僊泛而容與十里之間格賞非一物故隨以名言而分之爲八帖其一曰龍華勝集華屹立上游管領一區風物而當時遊集皆一代名勝也其二曰靑松暮磬江上古寺隱隱鍾聲時時到船來也其三曰道興搜石寒岡先生爲發碑材之曾瘞江岸者是步焉停舟或命丁掘地或倩人潛水而求之也其四曰柰內淸賞層崖百丈沿江壁立而左角漸低爲石臺可容數十人坐南
連短麓樹木蔥籠八九漁店點綴隱映於其間望之若僊源繫纜而登眺也其五曰景釀奇矚迤然蒼壁宛如屛障之開而一江光景十分於茲緩櫂中流而顧眄不捨也其六曰藕浦追帆伴鷗趙公聞群賢之遡流已過與仲氏立巖及姪澗松子乘小艇追赴也其七曰平沙落雁泛泛泝洄之際卽景之寓目也其八曰滄巖同舟巖卽忘憂郭先生亭號而寒旅兩先生會宿于此仍與主翁若門徒諸人始乘舟而共泛彼也每帖下各係小絶用寓我追先景賢之誠極知僭猥然後之人有時披玩庶見其江山眞面目而如得摳衣於百世之下者未必不在於是圖耳 甲子季秋上浣後學凝川朴尙節謹識
《기락편》 발문〔沂洛篇跋〕 -성호 이익
내가 집에서 한가로이 지낼 때 미수(眉叟) 허 선생(許先生)의 유집(遺集) 1부를 책상 위에 두고 본 적이 있다. 허 선생은 근고(近古) 시대의 명망 있는 인물에 대하여 기술한 것이 많았는데, 실제 행적들이 모두 눈에 선히 들어올 정도로 실감나게 묘사하였으니, 한 시대의 훌륭한 역사책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한강(寒岡)과 여헌(旅軒) 등의 노선생에 대해서는 올바른 출처(出處), 순정(純正)한 언론, 높은 덕망에 대해 칭송하였고,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에 대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키고 후세에 영향을 끼친 높은 절개와 풍모에 대해 칭송하였다. 그리고 동명(東溟) 김공(金公)의 경우, 공이 일찍이 당시의 권신(權臣)을 비판하다 경상도 현풍 현감(玄風縣監)으로 좌천되었는데, 수령으로 재직 중 학교를 세우고 향약법(鄕約法)을 시행하자 조정에서 그 조례와 제도를 올리게 하고 이를 사방에 반포하여 시행케 함으로써 백성의 교화에 보탬이 되었음을 칭송하였다.
이번에 박 사문 상절(朴斯文尙節) 씨가 편집한 《기락편》을 보았는데,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40)에 한강, 여헌 두 선생과 곽 망우당이 함안(咸安)의 용화산(龍華山) 아래에서 배를 띄워 유람한 일이 실려 있었다. 이때 그분들과 종유한 이로 판돈녕부사에 추증된 박공(朴公) 모(某)가 있다. 그 뒤 28년이 지난 갑술년(1634, 인조12)에 동명공(東溟公)이 현풍(玄風)의 풍영대(風詠臺)를 유람하였는데, 이때 종유한 이로 완석당(浣石堂) 박공(朴公) 모(某)가 있다. 허 선생의 문집에 따르면, 완석당은 돈녕공(敦寧公)의 둘째 아들이다. 돈녕공이 비록 무인 출신이기는 하지만 유현(儒賢)들을 가까이하고 예의를 숭상하였으며, 임진년(1592)과 갑자년(1624)의 전란 때에 큰 공을 세웠으나 이를 남에게 내세우지 않았다. 임종을 맞아 자식들에게 훈계하기를 “삼가 예법을 지켜 가훈을 실추하지 않도록 하라.〔謹守法 無墜家訓〕” 하였다. 이에 완석당이 유훈을 잘 받들어 영남의 큰 인물로 훌륭히 성장하였다. 완석당은 세상을 떠난 뒤 그 행실이 더욱 알려져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는데, 이는 제자를 가르치고 예법을 지키는 데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공자가 말하기를 “그 땅에 대해 모르면 거기에서 자라는 초목을 보고, 그 아비에 대해 모르면 그 아들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해 모르면 그 벗을 보라.” 하였으니, 이 《기락편》이 아주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조임도 간송집 제1권 / 시(詩)○오언고시(五言古詩)
푸르디푸른 용화산 / 蒼蒼龍華山
나와 사귄 지 오래되었지 / 與我交契久
선영이 산 앞에 있기에 / 松楸在山前
암자를 산 뒤에 지었네 / 臺榭營山後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은 / 滔滔洛東江
나와 정분이 두텁지 / 與我情分厚
강가 바위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 垂釣江之磯
강가 버드나무에 배를 묶는다네 / 繫舟江之柳
여묘 살이 할 때를 돌이켜보니 / 追思廬墓時
정미년과 신유년이네 / 丁未及辛酉
부여잡고 통곡해도 풍수지탄만 남으니 / 攀號風樹餘
머리카락은 일찌감치 세고 빠졌네 / 毛髮早衰朽
세상인심은 몇 번이나 변했던가 / 世道幾變遷
인정도 손바닥처럼 뒤집어졌지 / 人情翻覆手
어지러운 비구름 속에서 / 紛紛雲雨裏
해와 달은 부질없이 나는 듯 달려갔네 / 烏兔空飛走
어느덧 30년이 흘러 / 居然三十年
어느새 벌써 늙은이가 되었네 / 忽已成老叟
만사가 모두 부질없으니 / 萬事盡悠悠
전날의 기약이 결국 무슨 소용 있으랴 / 前期竟何有
문을 닫고 교유를 끊은 채 / 閉門絶交遊
채소를 먹고 마른밥을 먹어도 / 茹草仍飯糗
용화산과 낙동강은 / 玆山與玆水
시종일관 나를 저버리지 않네 / 終始不我負
중년에 내내에 살면서 / 中年住柰內
날마다 아호의 언덕을 바라보네 / 日望鵝湖阜
새집은 더욱 편하고 가까우니 / 新居更便近
선산을 영원히 지키려 하네 / 丘墓期永守
가시덤불은 베어버리고 / 荊榛得芟夷
초동목부에게 함부로 밟고 다니지 말라 하네 / 樵牧戒躪蹂
오직 생각하는 건 죽기 전까지 / 唯思未死前
향불을 피우고 술과 안주를 올리는 일 / 香火薦脯酒
이밖엔 다른 생각이 없으니 / 此外無餘念
덧없는 명예는 뜬구름과 같다네 / 浮名等蒼狗
어떤 중이 방장산에서 오더니 / 有僧方丈來
띠 지붕 얹고 대 창을 열었네 / 誅茅開竹牖
동으로 바위 병풍 둘러 쳐진 것을 보고 / 東瞻石屛環
북으로 멀리 거울빛 검푸른 것을 보네 / 北瞰鏡光黝
물에 내려가 물새 해오라기와 맹약을 하고 / 下與鷗鷺盟
산에 올라가 사슴과 친구 하네 / 上與麋鹿友
가을이면 밭에 늦배추를 심고 / 秋園種晩菘
봄이면 밭두둑에서 햇부추를 벤다네 / 春畦翦早韭
모래사장을 비추는 달빛이 환하고 / 沙月色亭亭
솔숲에 이는 바람 소리 시원하네 / 松風聲瀏瀏
온 방이 고요하여 먼지 한 점 없고 / 一室靜無塵
서책들만 좌우에 쌓여 있네 / 圖書對左右
날더러 여생을 보내면서 / 使我寄餘生
안개노을 흥취를 실컷 누리라 하네 / 飽得煙霞趣
소요하며 〈고반〉을 읊으니 / 逍遙詠考槃
우러러보나 굽어보나 생각에 구차함이 없네 / 俯仰思無苟
흥이 일다가 문득 슬픔이 생겨나는 건 / 興來忽生悲
함휼에 마음으로 근심하는 것 / 銜恤中心怮
서리와 이슬에 감회를 느낄 때면 / 有時感霜露
풀 헤치고 부모님 성묘를 하네 / 披草省父母
부모님 정령이 계셔서 / 父母精靈在
이 마음을 알아주실까 / 此懷知邪否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가엾게 여기소서 / 應憐一箇兒
혈혈단신으로 늘그막에 슬퍼하고 있습니다 / 孑孑傷白首
슬픈 사모의 정에 울음을 삼키려 하니 / 愴慕欲呑聲
하늘은 어두운데 갈가마귀 소리 가득하네 / 天昏鴉叫藪
합강정에 모여 술 마시는 밤에 함께 노는 여러 분에게 보이다 2수 〔合江亭會飮夜示同遊諸賢 二首〕
황량한 초가가 대숲 사이에 있는데 / 荒涼草屋竹林間
오직 산승이 있어 왕래를 허락하네 / 只有山僧許往還
어진 분들이 성대한 모임에 참여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 何幸群賢供勝會
온 강의 바람과 달이 완전히 한가하진 않네 / 一江風月未全閒
애절한 거문고 급박한 퉁소가 청아한 즐거움을 돕는데 / 哀絲急管助淸歡
다시 작은 배에 올라 달을 감상하고 돌아오네 / 更上蘭舟弄月還
이날 밤 합강정에서의 모임은 / 此夜合江亭上會
훗날 살아서 다시 만나긴 어려우리 / 人間他日再逢難
초여름 뱃놀이 무진년(1628, 인조6) 〔初夏船遊 戊辰〕
저녁 무렵 경양대로 배를 옳겨가고 / 薄暮移舟景釀臺
용화산 아래에서 다시 강을 따라 내려가네 /
下更沿洄
재의 구름이 달을 토하니 맑은 빛이 움직이고 / 嶺雲吐月淸光動
강의 나무가 바람을 머금으니 상쾌한 기운이 오네 / 江樹含風爽氣來
만고의 영웅은 외로운 새 지나간 흔적과 같으니 / 萬古英雄孤鳥過
천년의 형승에서 술동이를 연다네 / 千年形勝一罇開
간곡하게 취암자에게 알리노니 / 丁寧爲報翠巖子
뒤에 이르렀으니 삼백 잔을 사양하지 말기를 / 後至莫辭三百杯
청송사〔青松寺〕
용화산을 등진 낙동강 가에 / 龍華山背洛波邊
절이 있어 창건한 지 칠백 년이네 / 有寺開基七百年
만 그루 겨울 소나무와 백사장의 달 / 萬本寒松沙上月
천 마리 무리 지은 백조와 나루터의 안개 / 千群白鳥渡頭煙
긴 강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바다로 흘러가고 / 長江混混東流海
이어진 산봉우리 푸르게 북쪽으로 하늘에 닿아있네 / 列岫蒼蒼北接天
좋은 곳 기이한 볼거리를 어찌 그려낼까 / 勝狀奇觀那畫得
올라 보니 황홀하여 맑고 시원한 바람 부리는 것 같네 / 登臨怳若馭泠然
장복추 사미헌집 제1권 / 시(詩)
선조의 발자취를 찾으러 이 강물에 배를 띄우니 / 爲尋先躅此江浮
강의 기운은 청량하고 흥은 주체할 수 없네 / 江氣淸凉興莫收
흰 새 날아가는 끝에는 먼 산봉우리가 있고 / 白鳥去邊生遠峀
푸른 물결 합치는 곳에 높은 누각 서있네 / 蒼波合處起高樓
선천시대부터 있었던 달그림자는 미산의 달이고 / 先天影子眉山月
특별한 풍류는 적벽의 가을이네 / 特地風流赤壁秋
당시에 그린 병풍을 공경히 펼쳐서 보니 / 敬閱屛風當日畫
이번 유람이 한가한 갈매기와 같음을 증명하겠네 / 玆遊可證等閒鷗
옛날에 나의 선조 여헌께서 합강정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그때 합강정 주인이 병풍에 그림을 그렸는데, 물위에 나는 갈매기는 또한 기이한 경관이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구절에서 그것을 언급하였다.
비 온 뒤에 푸른 물결이 아득히 일어나니 / 雨後滄波渺渺生
강 가운데 섬 사이로 작은 배가 헤치고 나오네 / 中洲撑出小舟輕
옆 사람은 배를 젓는 데 힘을 쓰지 말라 / 傍人莫費推移力
그치면 그치는 대로 좋고 가면 가는 대로 좋으네 / 止可止之行可行
조긍섭 암서집 제1권 / 부(賦)
무술년 봄 윤삼월 / 歲著雍之春閏
선생의 행차 초계(草溪) 고을에 이르러 / 屈星駕於溪郡
산음의 고사를 행하고 / 修山陰之故事
여부의 유운을 찾네 / 尋廬阜之遺韻
일을 마치고 나서 장차 돌아가려 할 제 / 旣卒事而將復
낙동강 바라보고 동쪽으로 돌아드니 / 望洛水而東轉
궤석을 모시고 뒤따르는 이는 / 陪几舃而追隨
구름처럼 많은 준수한 선비들일세 / 偉如雲之髦彥
남계정(南溪亭) 강회(講會)가 윤3월에 있었는데, 이만구(李晩求) 선생이 교장(敎長)으로서 이르러 임하니, 이웃 고을의 인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12일에 공령(功令)을 시험하였다. 13일에 사상견례(士相見禮)를 행하였는데, 사상견례가 끝나고 강회를 열었다. 14일에 강회를 마치고 해산했는데, 만구 선생이 강을 건너 동쪽으로 가시려 함에 따르는 사람이 백여 명에 이르렀다.
먼저 칠룡재(七龍齋)로 길을 들어서니 / 先指路於七龍
은행나무 그늘 뜰에 가득함이 사랑스럽고 / 愛杏陰之盈庭
저물녘에 도장재(道章齋)에 이르러 / 夕稅車於道齋
시냇물 흘러내리는 소리를 듣네 / 聽溪流之泠泠
잠시 회촌(檜村)에서 쉬었다가 / 乍憇息於檜林
느지막에 암정으로 옮겨 가 기대니 / 晩徙倚於巖亭
주인에게 어진 덕 많아 / 感主人之多賢
지나는 곳마다 기쁜 정을 다함에 감격하네 / 竭忠歡於攸經
오시(午時)에 칠룡재(七龍齋)에 들어갔는데 단(壇)에 있는 은행나무가 매우 높고 컸다. 다시 도장재(道章齋)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오시에 회촌(檜村)을 방문했는데 이무백(李武伯)이 음식을 차렸다. 느지막에 호호정(浩浩亭)에 올랐는데, 호호정은 황강(黃江) 가에 있다. 뒤에는 매우 높은 절벽이 자못 기이하고 사랑스러워 볼만하였다. 주인이 애써 가지 못하게 만류하였으나, 집을 떠난 날이 오래되어 머물기 어렵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고 출발하였다. 칠룡재ㆍ도장재와 호호정은 모두 안씨(安氏)의 것이다.
모래 언덕 따라 강 건너니 / 循沙岸而乃濟
이미 어둑어둑 밤에 접어들었는데 / 已昏昏而入夜
숙취가 아직 깨지 않은 채 / 仍宿醉之未醒
노씨의 강정(江亭)에 오르니 / 陟盧氏之江榭
강 물결이 멀리 하늘에 닿고 / 江波逈其際天
산 안개 자욱한 것이 아침에 걷히네 / 山霧鬱其朝罷
남시에서 배를 얻어 / 問買舟於南市
함께 타고 물길 따라 내려가기를 도모하네 / 謀竝載而沿下
해가 질 무렵 강을 건너 현창(玄倉)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에 구할 수 있는 상선(商船)이 있어서 흐르는 강물을 따라 함께 내려가기로 계획했는데, 호호정(浩浩亭)으로부터 여기에 이르자 떠난 사람이 반에 가까웠다.
장풍을 타고서 돛을 걸고 / 乘長風而掛帆
봉창을 들어 올려 마음껏 보니 / 揭篷戶而騁眸
산세는 쉬지 않고 북쪽으로 달리고 / 山駸駸而北騖
물살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흐르네 / 水袞袞而東流
사공에게 노 젓지 말라 하고 / 戒篙師以弭棹
배를 물 가운데 가는 대로 두고는 / 任溯洄於中洲
시 외우고 뱃전을 치니 / 誦詩章而扣舷
어룡을 춤추게 하고 해오라비 놀라게 하네 / 起魚龍而驚鷺鷗
배가 처음 출발하자 바람에 의지하여 돗자리를 걸었는데, 너무 빠른 것을 꺼려서 배를 부리는 사람에게 명하여 노 젓는 사람을 그치게 하였다. 7언 절구 1수를 읊어서 쓰기를 마치고, 창(唱)을 잘하는 사람에게 노래하게 했는데 매우 들을 만하였다.
서쪽 언덕에 올라 조금 머무니 / 登西岸而少留
술상이 훌륭한 것 기뻤는데 / 喜杯盤之濟勝
석양에 이르러 배로 돌아오니 / 趁斜陽而返舟
아직 남은 흥취 다하지 못했네 / 尙不盡其餘興
맑은 물결은 담담하게 일렁이고 / 澄波澹其淪漪
흰 모래는 얕게 깔려서 이어졌네 / 白沙淺其連亘
배가 십 리를 못 갔는데 / 舟未行於十里
해가 이미 서령에 있네 / 日已在於西嶺
오시(午時)에 앙진(仰津)에 배를 대고 언덕에 올라 조금 쉬는데, 노장(盧丈) 충일(忠一)이 술과 안주를 가져오고 변생(卞生) 하서(廈瑞)가 점심을 차렸다. 먹기를 마치고 배로 돌아와 오여정(吾與亭)을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 출발했는데, 배 속도가 매우 느렸기에 몇 리 가지 못하고 날이 어두워져서 갈 수 없었다.
산기슭의 작은 길 찾아 / 尋山麓之小逕
내제(來濟)의 주인 없는 집 방문하니 / 訪濟陽之遺堂
비록 행차 바쁘지만 / 雖行李之劻勷
이끌어주는 데 따라 몸을 일으켜 보니 / 賴指引而扶將
이슬은 어이하여 흥건하며 / 露何爲乎厭浥
달은 어이하여 오가는가 / 月何爲乎徊徨
벗을 그리워하지만 보지 못하여 / 懷美人而不見
마음을 어루만지며 상심만 더할 뿐 / 祗撫心而增傷
이중립(李重立)ㆍ중가(重可)가 내제(來濟)로 맞아들여 유숙했다. 이 유람의 훌륭함은 오늘날 얻기 어려운 것인데, 중재(重載)가 세상을 떠난 지 한 해가 지났으니, 나로 하여금 추념(追念)하게 하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을 떨구었다.
백사장 머리를 돌아 닻을 풀자 / 回沙頭而解纜
지척의 거리에 오산을 바라보니 / 望烏山於咫尺
어찌 날리는 빗발이 허공에 가득한가 / 何飛雨之滿空
한 자리에 풍류를 돕네 / 助風流於一席
홀연히 정자의 편액이 보이니 / 忽亭楣之入眼
천 길의 높은 절벽 굽어보고 섰음이여 / 俯千仞之危壁
풍영의 옛 뜻 멀리 생각하매 / 緬風詠之遐志
누가 능히 옛 자취 이을까 / 誰能繼夫往跡
내제(來濟)로부터 배에 올라 물을 따라 내려가는데 중류(中流)에서 비를 만났다. 사면의 구름 낀 산의 경색(景色)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공을 재촉하여 노를 저어서 오여정(吾與亭)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용화산이 울창하게 바라보이니 / 龍華鬱其在望
옛 현인이 남긴 자취 아득하네 / 邈古賢之前塵
하물며 강호는 다함이 없으니 / 矧江湖之無盡
또한 어찌 수고롭게 나루를 물을까 / 亦何勞夫問津
그러나 행락을 다하기란 불가하니 / 顧行樂之不可極兮
어찌 배 돌리고 수레 돌리지 않으랴 / 盍返輈而回輪
옛 노를 수리하여 다시 찾기는 / 理故棹而尋盟
다만 내년 봄을 기다리리라 / 聊以待乎明春
18일에 돌아왔다. 처음에는 강을 따라 내려가 곧바로 용화산(龍華山)에 이르려고 하였으나, 비가 내릴 기미가 계속되기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배를 돌려 진창(陳倉)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19일에 강림재(江林齋)에 이르고 어부정(漁父亭)에 올라 유숙했는데 만구(晩求) 선생이 드디어 출발했다.
옥계유산록玉溪遊山錄 천사 김종덕金宗德
나는 젊은 시절 질병이 많아 잘 걷지 못하니 걸음을 대신할 방편이
없으면 수 십리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선善을 좋아하
는 정성과 산수山水에 대한 흥취興趣에 있어서는 남보다 못하지 않았
다. 대개 일찍이 퇴곡退谷 권자강權子剛 어른과 청량산淸凉山47)을 유람
하였고, 친구 이학보李學甫와는 도연陶淵을 유람하였으며 또한 이중칙
李仲則, 중휴仲休, 치춘穉春과 함께 용담龍潭과 고무鈷鉧의 사이를 거닌
적이 있다. 그런데 수년 이래 중한 병病으로 다리의 힘이 빠져 마을이
나 집안의 뜰에 거둥할 때에도 지팡이에 의지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
46) 김종덕(金宗德, 1724~1797):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자는 도언(道彦), 호는 천사(川
沙),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1753년(영조 29)에 생원
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직 학업에만 열중하였다. 저서로는 천
사집ㆍ성학입문(聖學入門)ㆍ예문일통(禮門一統)ㆍ석학정론(釋學正論)ㆍ
정본고증(政本考證)ㆍ초려문답(草廬問答)ㆍ예서(禮書) 등이 있다.
47) 청량산(淸凉山):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에 있는 산이다. 높이 870m. 태백산맥의
줄기인 중앙산맥의 명산으로서 산세가 수려하여 ‘소금강(小金剛)’이라고 한다
으니 이 유람을 어찌 감히 바라겠는가? 주방周坊은 백리에 떨어져 있는
산이고, 옥계玉溪는 주방의 곱절이 되는 거리에 있지만 며칠을 소비하
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구름 덮인 봉우리와 흰 돌을 마음 속으
로 왕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녕 새장 속의 학鶴과 같아서
다만 멀리서 구름을 바라보며 발돋움할 뿐이었다.
금년 여름에는 병이 더욱 심해서 그루터기를 잡고 집안에서 지냈으
니 생각이 둔하고 막혀 자못 스스로 떨쳐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가을장
마가 비로소 개자 호상湖上선생48)이 이석포李石浦 어른과 가마를 타고
가기로 약속하였다. 내가 곁에서 시중들며 이틀 밤을 함께 지내면서
스스로 함께 하려 했다. 마침 평소의 소원이었는데 애초부터 적막한
교분이 아님이 없었다. 얼마 있다가 오계공梧溪公도 또한 지팡이를 짚
고 나막신을 신고 오셨는데 선배들의 좋은 말씀을 극론極論하시어 우
둔한 자를 깨우침이 두터웠다. 일년의 반을 할애하였으니 세속을 벗어
나려는 분수가 있음을 알겠다. 며칠이 되지 않아 선생께서 갑자기 호
상湖上으로부터 가마를 준비하도록 명령하셨는데 당숙堂叔 이공李公
어른은 이미 먼저 자리에 계셨으며 종자從子 치춘穉春과 서제庶弟 달정
達靖도 걸어서 뒤따랐다. 이날이 곧 9월 15일 갑오甲午이었다. 문안인
사를 마치니 선생이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시기를 “근간에 우연히 달
정達靖으로 하여금 청송靑松 지역의 일을 맡아 처리하게 했는데 곧 스
48) 호상(湖上)선생: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0~1781)을 가리킨다. 김종덕(金宗
德)의 스승이다. 그의 학문은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저서에 대산문집ㆍ약
중편제(約中編制)ㆍ사칠설(四七說) 등이 있다.
스로 몸소 옥계玉溪를 답사하고 왔다네. 전하는 말이 매우 자세하여
마치 운하雲霞의 기운이 입안에서 뿜어져 나와 어느새 사람들을 감동
시키고는 나가버리는 듯하였다네. 달정達靖에게 앞서서 인도할 것을
부탁하고 무리들을 뒤따르게 한다면 곧 이곳에 이를 수 있을 것이네.”
라고 했다. 이공李公 어른이 소리 내어 응답하기를 “좋다. 내 장차 따
라가리라. 이 가운데 또 갈 사람이 있는가?”라고 하여 곧장 물러나 계
획을 세웠다. 어머니도 기뻐하며 이李군을 데리고 가는 것을 좋아하였
다.
다음날 을미乙未에 마침내 천성天成에게 수레를 빌려 10일 간의 양
식을 가지고 길 떠날 차비를 하여 나왔다. 행장은 낡은 시집詩集 한
권 뿐이었다. 일행이 청학사靑鶴寺 아래에 도착하니 선생이 나를 돌아
보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시詩를 제법 지을 줄 알아 앞으로 매우 진
전이 있을 것이네.”라고 하셨다. 사양하였지만 마침내 장차 시를 짓게
할 명령이 있음을 알았다. 이윽고 치춘穉春에게 명하여 퇴계시 중에
천川 자를 집어내어 5언 율시律詩를 짓게 하고 날이 저물면 운자韻字의
시詩를 거두기로 했다.
황학동黃鶴洞을 경유하여 좁은 길의 끝에 이르니 이곳은 샘과 돌과
단풍잎뿐이었다. 발길 닿는 곳에서 혹 시를 읊조리고 혹은 정자터에
머물렀다. 정현鼎峴을 오르니 햇볕이 산에 가려지고 말발굽의 쇠가 이
탈하여 충언忠彦과 서로 만나기로 기약한 것이 어긋났다. 선생은 개울
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것을 돌아보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물줄기가
처음 시작한 곳은 이와 같이 미세하지만 하류의 큰 흐름은 들판을 넘
치는데 이르니 무릇 작은 데서 삼가지 않으면 말류末流의 폐단이 이와
같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고개를 내려오기 전에 덕항德巷에
이르렀는데 이공李公 어른이 타던 말이 먹이를 먹고 병이 났다. 우연히
이웃에 사는 조생趙生이 자못 의술이 있고, 급한 사람에게 태만히 하지
않음을 알고는 그의 능력을 시험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동트는 새벽녘 곧 밝아지자 출발했다. 이공李公 어른은 앞에다 병든
말을 쉬게 하고 조생趙生의 소를 빌려 타고 가면서 말씀하시기를 “진
실로 조생趙生이 아니었다면 이번 여행은 위태로웠을 것이네. 그로 하
여금 저 곳에 머물게 한 것이 다행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셨다. 선생
이 말씀하시기를 “천도天道는 진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어
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일을 만나 나타나는 것이 있어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네.”라고 하였다. 잠시 사
이에 시내와 숲이 점점 밝아져 앞길이 어둡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말
씀하시기를 “저물녘의 해는 비록 심히 어둡지는 않으나 점점 어두워
져 가고, 장차 새벽이 오려 할 때는 비록 심히 밝지는 않으나 점점 밝
아지려 한다네. 그러므로 여행자가 마땅히 살펴야 할 것이네.”라고 하
셨다.
어제 시를 완성하지 못했는데 또 가歌 자를 집어서 7언 율시를 지었
다. 현은玄隱의 상사上舍 조상변趙相抃의 집에 도착했다. 주인과 자식과
조카 등 7~8명이 의복을 갖추어 입고 맞이하였다. 각각 철편鐵片을 가
지고 말발굽을 보완하고 닭을 잡아서 대접했다. 상사 조상변은 또한
마부를 부르고 종들을 타이르며 따라갔다. 내가 장난삼아 말하기를
“이치를 헤아려 이치를 행하는데 힘쓴다면 으레 서서 이야기하는 사
이에 용기있게 결단하는 것이 쉽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주인이 웃으
며 말하기를 “저는 다만 공께서 능한 바를 잘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
고 했다. 그의 아우 상언相彦과 미중美仲은 방금 중복重服을 입었으나
아직 장사葬事를 지내지 않았다. 이에 “오직 김군에게 양보하면 이번
여행은 가장 부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미 식사를 하고 다시 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주머니 속에서 퇴
계집이 보였다. 주인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무슨 물건이기에 장차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흔들게 합니까?”라고 했다. 이공李公 어른이
농담하고서 넣어두었다. 주인과 나그네가 걸어 안덕安德49)으로 향했다.
고상한 놀이에 억지로 끌려가니 저절로 다리의 힘이 피곤하여 걸어가
라는 명령이 있을 때마다 문득 놀라고 두려워 열경說卿의 시권詩卷을 보
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여러 곳의 인사를 두루 토론하며 충언忠彦이
대인大人을 모시는 곡으로 들어갔다가 인하여 송학서원松鶴書院50)으로
갔다. 당堂에 오르니 서원의 이름이 붙은 편액도 없고 양쪽 옆에 재실
齋室의 명칭도 없었으며 또한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머물
만한 승경도 없었다. 다만 고사古事 한 권과 애서厓西 윤희정尹希正의
시집詩集이 있었는데 훑어볼만했다. 치춘穉春이 여행 중의 일기를 관리
했다. 현은玄隱으로부터 일행은 나누어 덕현德峴을 향해가서 내일 와서
모일 것을 약속했다. 나는 번갈아가며 직분을 맡고자 했으나 피곤하고
혼미하여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황혼 무렵에 상사上舍 권백중權伯仲 어른이 뒤쫓아 와서 행로를 장차
어느 곳을 경유하여 가는지를 물어 보고는 “곧바로 큰 고개로 향하는
49) 안덕(安德): 경상북도 청송에 있는 지명으로 현재는 안덕면이다.
50) 송학서원(松鶴書院):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에 있는 서원이다. 퇴계(退溪)
이황(退溪),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배향하고 있
다.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하기에 “우리들 계획과 차이가 있습니다. 방
호方壺 천지에 어찌 한번 만날 기약이 없겠습니까?”라고 했다.
정유일丁酉日에 상덕사尙德祠를 알현함에 선생께서 옷을 걷고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니 엄숙하고 공경하는 뜻이 행동거지에 드러나다. 물
러나서는 이분과 같아지기를 생각했다. 백세의 뒤에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고 기뻐하여 공경을 일으킴이 이렇게 이르게 할 수 있으
며, 또한 어찌 백세 전에 감응하여 흥기했던 것을 이렇게 이르게 할
수 있는가? 송학서원松鶴書院의 주인 상사上舍 김장민金長民과 방호정方
壺亭의 주인 선비 조원섭趙元燮이 사람들을 이끌고 방호정方壺亭으로
향했다. 회원 수 십 명이 따랐고 치춘穉春과 후보厚甫도 와서 이르렀다.
여러 어른들은 모두 걸었는데 유독 나만 군택君澤 권영수權嶺秀의 정사
精舍에서 머물게 하고 말을 타고 피로를 풀게 해주었다. 의리상 사양할
수 없게 된 후에야 허락하였지만 거의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공李公
어른은 그의 노고에 감탄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선생도 또한 그에게
맡길 뿐이었다. 징검다리를 건너 모래 위에 앉았다.
옛날에는 다만 모래사장일 뿐이었으나 이번 여름에 강물이 모래를
침식하여 그 뼈대를 드러내니 암석이 쟁반 같고 밥상 같이 구슬을 꿴
듯하여 앉을 만하고 걸터앉을 만하였다. 우러러 보니 푸른 벽에 구름
이 얽혀 있고 칼이나 뿔 모양을 하고 있는 산이 하늘에 닿아 있는데
그 가운데 작은 누대가 있다. 붉은 빛과 푸른빛이 밝게 비치고좌우에
걸린 시편은 비늘이 겹쳐진 듯 빛났다. 바야흐로 정신이 황홀해져 내
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듯 했다. 여러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나의 병
들러 고달픈 모습을 위로했다. 이에 내가 저지하며 말하기를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가벼이 한번 거동하여 이미 바람부는 누대와 깊숙한
집 가운데 있으니 진세塵世를 돌아본들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주인이 고기를 잡아 회膾를 마련하고 고기를 구우니 물의 음식과 뭍의
음식이 모두 갖추어졌다. 그 사이에 술을 두니 강산江山의 멋이 지극했
다. 등잔불 아래에서 앞선 현인들의 시집을 읽고 ‘풍風’자 운에 차운次
韻하였다.
무술일戊戌日, 이미 세수를 하고 어르신께 문안인사를 올리니 이미
두 권의 책이 갖추어져 있었다. 한권은 대중臺中으로 보내고 한 권은
행사行史에게 주었다. 대중臺中의 것은 선생이 기억하여 종덕宗德이 적
었고, 행사行史의 것은 권상사權上舍 어른이 기억한 것을 김장민金長民
이 적었다. 성명姓名과 나이와 사는 곳을 모두 기록했다. 술을 마시고
서로 인사하고 내려오니 말이 이미 시내 언덕에 차례대로 있었다. 권
상사가 앞서고 이공李公 어른이 다음, 선생이 그 다음, 조상사趙上舍와
내가 앞뒤가 되었다. 후보厚甫와 치춘穉春과 이李군은 걸어서 갔다.
어떤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뒤를 따라 왔는데 곧 조상필趙相弼
태로台老씨이다. 일행이 큰 고개의 주점에 도착하자 충언忠彦이 이미
멀리 유람할 장비를 갖추고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개 또한 가져
온 것을 조금씩 남겨 주객主客의 예로 삼았다. 동북東北은 한 골짜기로
부터 형세가 더욱 높아진다. 마부는 위로 고삐를 당겨 넝쿨이 드리워
진 곳을 찾았는데 자주 포도와 오얏 등으로 목을 축였다. 서리 맞은
뒤라 달고 새콤함이 매우 맛있다고 한다. 오도산吾道山을 올라 잠시 쉬
었다. 태로씨는 상수리 열매를 많이 주워 먹기를 그만두지 않아 그 이
유를 물으니 이 산의 상수리 열매는 맛이 밤알과 같다고 하였다. 산을
내려오니 속수촌涑水村이다. 겨우 말을 쉬게 하였는데 날이 이미 어둡
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마을에서 말을 풀고 종을 쉬게 했다.
병암屛巖과 거리가 멀지 않아 저버릴 수 없어 걸어서 외병암外屛巖으
로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마치 두 개의 병풍이 둘러싸서 서로 닫아
걸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내병암內屛巖으로 올라가면 꼭대기가 모나고
뾰족하며 가파르고 높아 마치 나열된 창이 둘러 모시는 듯하였다. 아
랫면은 평평하게 이어지고 열리는데 여헌旅軒선생이 일찍이 이곳에서
시를 읊조렸다. 그래서 ‘여헌대旅軒臺’라고 부른다. 병암屛巖의 안에 하
나의 서원이 감추어져 있는데 동주洞主(서원원장)와 서로 알지 못하여
지팡이를 짚고 돌아왔다.
조상사가 뒤늦게 사람과 말을 몰아 도착해 말하기를, “서원 뒤 한
골짜기에 승려의 암자가 있는데 하루 묵을 만합니다. 동문洞門 수 리里
에는 바위로 펼쳐져 있는데 또한 나쁘지는 않습니다. 밤에 절에 들어
가면 절의 승려는 공경하게 대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열경說
卿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미 장로長老를 모시는데 한 번의 경계가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열경說卿이 말하기를 “어른을 모시기 때문에
능히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밤이 깊어지자 수레와 말에서 인사하
는 소리가 있고 불빛이 속수촌涑水村에 빛나고 수십 명이 동주와 함께
맞이하였다. 다음날 닭과 술의 즐거움이 있을 터 그 두터운 성의를 저
버릴 수 없으나 행사行事로 전전轉轉하다가 차질이 생겨 다시 하루가
지체되니 일을 이루지 못할까 매우 두려울 뿐이었다. 힘써 감사하고
다만 밤중에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기해일己亥日 다시 동암洞巖을 나와 서원에 이르기 전에 개울물을 거
슬러 동쪽으로 가서 수십 리里에 이르니 골짜기가 평평하게 열렸고 들
판은 넓고 한가로웠으며 백성들은 자못 풍요로웠다. 마을 이름을 물으
니 ‘화장花場’이라 하고, 마을 안에 고高씨 성을 가진 양가良家 자제가
글자를 조금 안다고 하였다. 마을 앞에 작은 시내가 둘러싸고 흐르는
데 매우 특별함은 없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자 바위가 계곡을 끼
고 펼쳐졌는데 높이는 대臺를 이룰 만하고 아래는 둥글게 앉을 만했
다. 언덕은 방정하며 맑은 샘물이 고여 있다. 또한 드문드문 어지러운
바위가 시내에 흩어져 있었다. 화산花山(안동)과 문소聞韶(의성)에서
필적할 만한 것을 구하기는 어렵다. 몇 이랑의 옥토가 시내를 베고 누
었으니 여기에 집을 짓고 이곳에서 밭을 간다면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
가? 말에서 내려 주위를 돌다가 돌아와서 뽕나무 아래서 이틀을 잤다.
또한 수십 리里나 긴 골짜기가 있어 시내를 따라 들어가니 넝쿨이
덮여 있고 회나무와 녹나무가 우거진 가운데는 평원이 있다. 거칠게
우거진 흰 띠풀과 누런 갈대를 한번 바라보니 끝이 없다. 후보厚甫가 나
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곳은 제방을 쌓고 열 만한 곳으로 힘이 없음을
걱정할 뿐입니다. 만약 손을 잡고 모둠을 맺어 나무를 베고 땅을 개간
하여 기장, 벼, 삼, 콩을 심는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에도 또한 많이 뒤
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오히려 이 한 구역을 남겨서 직방씨
職方氏51)가 기록한 것에 넣지 않은 것은 또한 기다리는 자가 있어 그
러한 것인가? 물의 근원이 있는 곳에 하늘에 닿은 큰 고개가 있다. 굽
은 것은 양의 창자 같고 위태로움은 꼬불꼬불한 구비와 같다. 다만 나
무와 풀로 얽힌 곳을 찾아 나아가니 속칭 ‘간장현肝腸峴’이라고 하는데
이는 양의 창자[羊腸]을 잘못 부른 것이다.
51) 직방씨(職方氏): 각 지방의 일을 맡아 보는 관직이다. 주례(周禮)
산을 내려와 고천高川에 있는 김남원金南原의 분암墳庵에서 쉬었다.
청송, 영덕, 영천, 경주의 분기점을 사이에 두고 사방이 막혀 파산巴山
과 같이 결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지 오래 되었다. 이에 바위에 시詩
를 완성하고 각자 호號를 적어 두었다. 권씨 어른은 ‘초파蕉皤’라 했고
이씨 어른은 ‘호수湖叟’라 했고 선생은 대산大山이라 했고 나머지도 모
두 이름을 적어 두었다.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이번 여행에 시령詩令
은 다만 일과日課를 얻을 뿐이니 감히 정도에 지나쳐서는 안 된다. 주
부자의 이완, 긴장하는 사이(변화)에 항상 정도에 지나침을 경계로 삼
았다.”라고 했다. 그러나 없는 점이 있다. 늦추고 당기는 사이에 100여
편에 이르게 될 줄을 알지 못했으니 풍치風致가 드러나 그만둘 수 없었
기 때문이다.
도중에 살아있는 물고기를 사서 삶았는데 이에 신선하기가 방금 잡
은 것 같아서 해문海門에 가까움을 알 수 있었다. 초파蕉皤 어른이 말씀
하시기를 “이곳으로부터 둔세동遯世洞을 향해 갈 수 있으니 각각 힘을
쓰시오.”라고 했다. 암자의 승려에게 물은 뒤에 일행은 일곡一曲을 넘
어 앞으로 나아가 큰 골짜기에 다다랐다. 먼 지점을 바라보니 흰 돌이
줄지어 있고 동문洞門은 겹겹이 쌓여 있어 신령스럽고 괴이하며 기이
하고 분명하여 신선이 사는 곳이 아님이 없었다. 진실로 산의 틈으로
물이 흐르는 길이 있어 반드시 얼음 같은 옥으로 꾸며져 있는데 엿보
니 진보珍寶의 창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곳으로부터 둔세동遯
世洞을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물처럼 늘어선 산마루에서 놀라서 보면서 망연자실茫然自失하였
다. 장차 곧바로 계곡에 이르러 점차 발걸음을 옮겨 따라가고자 하였
다. 우연히 뒷길로부터 어떤 주민이 삿갓을 쓰고 새끼를 꼬며 말하기
를 “마을의 이름은 ‘미륵동彌勒洞’이라고도 하고 ‘둔세동遯世洞’이라고도
합니다. 골짜기를 따라서는 도달할 수 없으니 다만 나를 따라 오십시
오.”라고 했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 평평한 길로 징검다리를 건너 언덕
에 올랐다. 조금 남쪽으로 가니 소나무와 삼나무가 해를 가리고 넓고
평평하여 주거할 만했다. 주민이 말하기를 “말을 버리십시오.”하였다.
윗옷을 걷어 올리고 지팡이를 잡고 신을 신고 비스듬히 언덕 옆으로부
터 동쪽으로 수백 보를 걸어가니 동문洞門이 걸려 있는 것이 마치 허공
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양옆의 석주石柱가 문이 되었는데 모나고 가지
런하였다. 희게 빛이 비치는 곳에 물이 스며들어 방울져 그 아래에 맑
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형세가 단단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에 두려워
의심이 생긴다. 아마도 그 안에는 반드시 기이한 광경이 있을 것 같다.
문門으로는 갈 수가 없어 언덕 옆을 따라 나아갔다.
흙이 다하고 돌이 펼쳐져 돌사다리를 걸어가니 몸이 높기를 기약하
지 않아도 저절로 높아졌다. 다시 이와 같이 내려가 골짜기를 넘은 뒤
에야 감춰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골짜기 가운데 하나의 돌이 있는데
크기가 작은 집 같았다. 요로要路에서는 뜻을 정성스럽게 해야 하는데
또한 둥글어 틈이나 층계가 없어 사람들이 모두 발을 붙이고 손으로
안아 가까이 붙어 배로 움직여 그 꼭대기를 넘은 연후에 비로소 발을
모아서니 몸이 위로 솟아 오른 듯했다. 그러나 반드시 한번 출발하여
마주 선 돌을 감당해야 넘어지거나 떨어짐을 면할 수 있으니 나와 같
은 자가 어찌 도달할 수 있겠는가? 다만 돌이 매우 높지 않고 물도
매우 깊지는 않다. 잘못 도모해도 몸을 적시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니
운명론運命論에 힘써서는 안 된다.
나는 곧 뒤쳐 있다가 몸을 떨쳐 힘을 발휘하니 하나같이 축하하는
말이 이미 떠들썩했다. 여러 사람들이 양쪽에서 초파蕉皤 어른을 부축
하여 건넜다. 열경說卿은 돌에 앉아서 말하기를 “작년에 동도東都[경
주]의 선비들이 이곳에서 놀았는데 일행 중에 한 사람이 물에 떨어졌
다가 몸을 뒤집어 나왔는데 기록에는 ‘우리들은 다행스럽지만 어룡魚
龍은 불행이다.’”라고 했다 한다. 이른바 좋은 농담이나 사람을 상하게
하는 데는 이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앞의 한 무리가 먼저 가서 한
층 더 올라갔다. 머리를 들고 골짜기를 향하니 모두가 한번 놀라 감동
하는 소리가 마치 사나운 짐승과 뛰어오르는 물고기를 만난 듯하더니,
이윽고 놀라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후보厚甫와 치춘穉春은 앞을 향해 날듯이 들어가고 선생은 빙그레 웃
으시고 초파蕉皤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뒤를 따르며 시험 삼아 한번 엿보고는 한마디 말을 낼 겨를도 없었다.
“천하에 다시 이런 곳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선생이 천천히 말씀하
시기를 “옛 사람의 문자文字 중에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초파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한유韓愈의 남산南山 시詩가 혹 가깝
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대저 골짜기를 가득 채운 것은 모두 돌뿐이었고 한 덩어리의 흙이
붙어 있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다만 이곳은 은빛 물결이 옥을 부수
듯이 맑은 소리를 울리며 흘러 내려갈 뿐이었다. 땅의 형세가 바뀌어
층계를 이루었는데 깊은 것은 두터운 땅을 뚫을 만하고 높은 것은 푸
른 하늘에 닿을 만하다. 돌의 색은 눈과 같다. 작은 것은 둥근 알약
크기의 술잔 같고 큰 것은 산봉우리 같다. 뾰족한 것은 송곳 같고 삼엄
하기는 칼이나 창 같다. 높은 것은 구리 기둥 같고 모난 것은 쇠로 만
든 도장 같다. 움푹 파인 곳은 절구 같고 우묵한 곳은 큰 솥 같다. 무성
하게 서 있고 가득이 쌓여서 오히려 각각의 경계를 구분 짓는다.
서로 의지하거나 비교하지 아니하고 조각조각 맑은 못은 은은히 돌
밑에 나타난다. 좌우의 푸른 벽은 머리를 높게 쳐들고 어깨를 솟아 올
려 멀리 바라본다. 이르는 곳은 혹 넋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아찔하여
반드시 머리를 숙이고 눈을 돌린 뒤에 안정이 된다. 달려서 가까이 임
하니 바로 눈을 내려 마당을 보는 것 같다. 바다로 들어가는 용을 관찰
하니 바로 이른바 인자仁者는 보고 인仁이라 말하고 지자知者는 보고
지知라고 말할 것이다.
조금 있다가 주민이 돌아갈 계책을 청했다. 돌 웅덩이에 이르니 ‘월
성이공헌성月城 李公獻成’과 ‘문소이공의태聞韶 李公宜泰’라는 이름을 식
별할 수 있게 새겨 두었다.
무자년戊子年(1768)에 내가 이곳에 놀러왔을 때에는 옆에 ‘둔세굴遯
世窟’이라는 세 글자를 적어 두었는데, 아! 천지의 기틀은 가히 누설漏
泄을 다했다고 할 만하도다. 조물주가 이곳을 만들면서 한 개의 별도
의 기량으로 발을 붙여서 이리저리 거닐며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땅을
두지 않게 한 것은 어찌해서인가? 아니면 고의로 넘겨볼 수 있는 길을
끊어서 여행객으로 하여금 알 수 없게 한 것인가? 알려주더라도 또한
붙일 곳이 없게 하였으니, 세상에서 숨게 할 뿐만이 아니라 아울러 세
상을 피하려는 사람이 이곳으로 숨게 하였다면 이 이름도 또한 산을
지적하여 말한 것인가? 치춘穉春으로 하여금 이곳에 성명을 새기게 했
다. 새기는 일을 마치고 고을을 나오기 위해 옷을 입고 말에 올랐다.
앞길 수십 리는 모두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한 곳으로 곧 마치 학鶴을
타고 용龍을 채찍질하며 물을 따라 삼청三淸과 십주十州의 경계를 도는
것 같다.
바야흐로 마을을 선택하여 잘 곳을 정하려고 시내를 건넜다. 하나의
언덕이 가파르게 솟아올라 높이가 수십 길이 된다. 그 위에 논 15이랑
이 있다. 대개 나무를 깎아 공중에 걸쳐서 떨어지는 물을 논으로 흘러
가게 했다. 사면四面이 마치 옥을 깎아 정자를 세운 듯하다. 고기를 기
르고 술잔을 띄울 만하며 연꽃을 심고 죽순을 채집할만하다. 내가 말
하기를 “이곳을 점지한 것은 병암屛巖은 마땅히 하풍下風이 있어서이
고, 화장花場은 마땅히 퇴청退聽이 있어서이다.”라고 하니 선생이 미소
를 지으셨다. 그 마을 이름이 ‘두승斗升’이라는 곳에서 잤다. 언덕을 물
으니 ‘당고塘皐’라고 했는데 저속하여 고쳐서 ‘마도馬到’라고 부른다는
데 ‘청영대淸暎臺’라고 하면 가능하겠는가?
아침에 일어나 시를 짓고 성잠星岑을 지나 북쪽으로 갔다. 골짜기가
밝고 물이 맑아 마치 밝은 횃불을 들고 지나가는 듯하다. 만나는 돌은
모두가 서있는 얼음 같고, 만나는 물은 모두가 거울을 펼친 것 같다.
만나는 바위틈은 모두가 폭포이고, 만나는 웅덩이는 맑은 연못이다.
산뽕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소나무와 삼나무 가운데에 펼쳐있고 뿔과
뼈 같이 가파른 산은 가을 털의 자세함까지도 찾고자 하나 찾을 수
없다. 다만 한 필匹의 희게 누인 명주를 펴서 무늬에 분을 바른 듯하다.
속칭俗稱 구룡담九龍潭이 있다. 돌 잇몸이 솟아 나온 것은 ‘수옥대漱玉
臺’라고 한다. 돌에 물이 고여 상자 모양을 한 것을 ‘세심대洗心臺’라고
하는데 대산大山선생께서 이름을 지어 이곳에다 새겨둔 것으로 이른바
‘용연龍淵’이다. 주민이 말하기를 “고기가 근원을 찾다가 이곳에 이르
면 멈추게 되는데 돌의 층계가 이곳에서 끊어지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존재存齋의 도연시陶淵詩에 ‘한번 초탈하여 비록 어부
에게 잡힐지라도, 궁원에 도달하지 못해서 정녕 쉬지를 못하네.[一超
縱被漁人得 未達窮源定不休]’52)의 구절을 외우셨다. 달達과 원源자
를 명하여 시를 짓게 하여 치춘穉春으로 하여금 옮겨 쓰게 했다.
8~9리의 동문洞門을 향하니, 자못 보호하는 시설의 형상이 있다. 다
시 한 번 뿜어내고 한번 깨어남을 알지 못하니 또한 옥계玉溪의 경계가
아니겠는가? 길 왼쪽에 절이 있다. 후보厚甫로 하여금 암자에 들어가
서 밥그릇을 갖추어 오게 했다. 곧장 시내의 흐르는 물을 따라 내려갔
다. 천지조화의 심오한 비밀은 평지를 향하니 형세가 점점 넓어진다.
해와 달이 밝고 바람과 구름이 한가롭다. 좌우는 넓게 트여 자리를 정
해 평평하게 깔았다. 바위와 돌이 이리저리 펼쳐 있고, 샘과 못이 그윽
이 큰물을 이룬다. 돌 위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곳이 무수無數하다.
또한 머리 부분은 넓고 평평하고 우묵한 곳에는 물이 고여 마치 작은
못 같은 것이 많다. 그리하여 장마 비가 뿌리고 스며들어 쌓였으며,
공중의 물총새가 물에 적셔 윤택하게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바람과
태양이 쬐어주지 않는다면 손해를 입었겠는가? 아니면 또한 홍수와 큰
물결이 언덕을 오르고 내와 계곡이 평평하여 물이 떨어지는 곳에 이르
러서는 그 남은 물을 모아서 고갈되지 않게 함인가? 선생이 말씀하시기
를 “선경仙境은 참으로 이곳이다.”라고 했다.
가운데 큰 돌이 있는데 모양이 둥근 항아리 같다. 차지하여 앉을 자
리가 10이랑으로 높이는 구름을 뚫고자 한다. 좌우左右와 전후前後는 의
52) 한번……못하네: 이휘일(李徽逸)의 존재선생문집(存齋先生文集) 권1 ‘낙연관어
봉시천휴落淵觀魚奉示金天休’에 “潑潑洋洋意自驕 其中何者最先超 漁人愼勿施
罘網 我識渠情萬里遙 泝上淸波志遠遊 直當衝瀑不回頭 一超縱被漁人得 未達窮
源定不休.”라는 내용을 인용하였다.
지할 곳이 없으니 이른바 군자君子의 굳셈이다. 위 머리는 조금의 흙을
이고, 섞임에 의탁한 것이 돌인가? 봉우리인가? 더욱 기이한 것은 눕
고 서고 가로로 세로로 되어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둥근 돌의 봉우리
아래에는 또한 솟아 오른 것은 없고, 다만 드러내어 누어 굽게 돌게
하여 등급을 따라서 이치를 찾는다. 걸어서 앞으로 향하니 바위의 형
세가 밝은 거울에 놀라는 눈빛을 다하고자 한다. 물빛은 사람을 위협하
여 고개를 돌리게 한다. 또한 팔각산八角山으로부터 내려와 한줄기 흐
르는 물을 통과하여 이곳에서 합친다. 두 골짜기의 뛰어남이 이곳에
모였다. 돌에 의지하여 내려 보니 돌은 땅에 펼쳐진 것이 흑백黑白으로
섞여 있어 무늬 있는 비단으로 짠 것 같다. 조가비의 화석이 곁에 누워
있는 것은 거북이가 물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것 같고, 개구리가 머리
를 돌리는 것 같다. 물이 한쪽 방향으로 흘러 원도 아니고 모나지도
않은 것이 한 이랑 정도 된다. 또한 그 위에 별도로 하나의 층계가 있
는데 바로 벽에 분을 바르고 창문에 비단을 붙인 것 같다. 모가 나도
절뚝거리지 않고 바른 것도 치우치지 않았다. 물빛은 푸르고 쪽빛이며
돌의 무늬는 널리 밝히는데 그 넓기가 두 배나 된다.
또한 그 위에 별도로 한 층계가 있는데 바위 돌이 크게 펼쳐져 있어
가히 백 천 명의 모임을 수용할 만하다. 가운데 가라앉은 곳은 금궤金
櫃와 옥을 감추어 마치 먹줄로 다스린 것 같다. 길이는 100보步이고
넓기는 배 한 척을 수용할 수 있다. 그윽이 어두워 연못은 조용하며
깊이는 수 길에 이른다. 이곳에서 팔각산八角山의 물이 깔려서 모여 이
루어진 것이다. 3층은 각각 언덕 지역을 이루었다. 위에서는 아래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반드시 사
다리를 잡고 올라 빙빙 돌은 이후에 볼 수 있다. 참으로 천지의 기운
사이에 종회鍾會가 연마硏磨하고 유약有若이 마치 행함이 있어 행해지
는 것 같음을 알았다. 대저 앞에는 향로봉香爐峯이 있고 뒤에는 팔각산
八角山이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 천지天池가 있는데 큰
가뭄에 물이 줄지 않고 실처럼 흘러 바위가 기워진 곳에 액체가 새어
나오는 것이 마치 금으로 만든 술병에 옥으로 만든 대살을 넣은 것
같다. 그 아래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사람들이 그릇으로 받으면 크
고 작은 그릇에 맞추어 그 입구를 채운 연후에 비록 수일을 이어서
떨어져도 다시 넘치지는 아니하여 ‘선루仙漏’라고 이름 지었다.”라고
한다.
또한 말발굽과 바둑 판 무늬의 흔적이 있으니 어찌 그러한가? 시詩
를 완성하자 후보厚甫와 여러 사람들이 음식을 마련한 것을 두 승려가
지고 와서 자리에 편한 데로 펼쳐 놓았다.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비록
들판에 앉더라도 장유長幼의 예의가 있는데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일어나서 자리를 정리했다. 식사를 마치자 어떤 이가 말하기를
“골짜기 밖에 와룡臥龍 폭포가 있는데 볼만하다.”라고 한다. 다리의 힘
이 떨어져 정자 뒤로 내려가니 또한 개울과 골짜기일 뿐이다. 돌의 색
은 앞서 본 것만 못하다. 흰 돌이 기이하고 준수한 것은 이곳에도 있
다. 여행이 이미 5~6일이 되었다. 나의 정신력과 다리 힘이 자못 전보
다 나았다. 열경說卿의 농담은 더욱 심하여 일행들이 그에 힘입어 쓸쓸
하지 않았다.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조趙공은 장차 배우俳優를 준비하
는가?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낮추어 점점 나아가는 것만 같지 않을까
걱정이네.”라고 하셨다. 도언道彦은 거리낌이 없이 1~2분을 걸어 나아
갔다. 이는 신발의 상태를 시험해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어 마을에 들어가니 수석水石이 사랑할만하다. 마을 이름
은 ‘마천촌磨川村’이라 한다. 주민이 우리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 말린
밥을 나누어 제공한다. 열경說卿이 마을 주민에게 농담하기를 “너희들
은 옥계玉溪의 명승지로 말미암아 여행객을 맞이하고 보내는 것에 지
쳐서 이곳을 옮겨 안덕安德으로 구역 짓고자 함이 옳은가?”라고 하니
주민이 말하기를 “비록 산간에 살아 어리석지만 명승지 때문에 사양
하고 사람과 이별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라고 하니 또한 그 대답이
훌륭하다.
아침 식사 후 출발했다. 앞 언덕으로부터 조금씩 물이 흐르고 언덕
에는 가을 곡식이 조금 쌓여 있는데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는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머리 위에 대롱을 설치하여 무지개가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것이 보인다. 높이는 열 길이고 길이는 꼭 100척尺이다. 대개
옥계玉溪 이하로부터 흙이 붙어있는 곳은 다만 산이 무너져 언덕이 기
울어진 곳뿐이다. 그리하여 물을 끌어들이기가 매우 어렵다. 반드시
대나무 홈통을 설치하고 바위를 뚫어 흐르는 물을 옮겨 물줄기를 돌렸
으니 그릇을 잡고 토사를 쳐냈음과 다르지 않다. 이런 까닭으로 간혹
바위를 안고 떨어질 걱정이 많다. 살고자 하는 이치의 어려움은 이곳
이 더욱 심하다. 만약 두 고을의 읍장으로 하여금 이곳 산수山水를 유
람하게 하여 이런 일을 목격한다면 측은惻隱한 마음을 드러낸 나머지
반드시 대처할 바가 있을 것이다. 언덕을 따라 서쪽으로 골짜기로 나
오니 멀리 보이는 것이 양장령羊腸嶺 같다. 아래로 수 리 쯤을 향하다
가 문득 북쪽을 바라보니 하늘에 한 봉우리가 높고도 먼 것이 마치
흰 모자를 쓴 것 같다. 푸른 산의 밖에 우뚝이 솟아있다. 호산湖山의
늙은이가 그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뒤에 가면서도 보이는가?”라고
하기에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초파蕉皤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이곳
은 이른바 ‘모자산母子山’이네.”라고 하셨다.
여행을 다닌 것이 거의 반나절이 되었다. 거슬러 올라 천석泉石을
다 구경하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 고개에 올랐는데 매우 가파르고
급하지는 않다. 초파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이 산이 옛날에는 ‘관전官
轉’이라 이름 하였는데 전혀 의미意味가 없네. 이곳 마을 사람이 전하기
를 ‘옛날 읍장邑長이 이곳을 유람하였는데 거문고 소리가 갑자기 들려
이곳에서부터 읍장을 상징하는 인끈을 풀어서 ‘관전官轉’이라 이름 하였
다고 하고, 혹은 이곳에 이르러 말의 힘이 다하여 관행官行이 미루어
돌아가야 할 근심을 면하기 어렵게 된 까닭으로 ‘관전官轉’이라 이름하
여 두 가지 이름이 탄생했다고 하네. 설령 그러하더라도 이곳을 구경
하고 보호하고 아끼고 탄식하고 슬퍼하는 뜻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풍
속風俗은 아닐 걸세. 식견이 있는 사람이 이점을 슬퍼할 걸세.”라고 했
다. 전前 부백府伯인 유언기兪彦基 공이 나를 맞이하여 이곳에 노닐었
는데 크게 펼쳐진 기생의 소리와 관현管絃의 소리가 우렁차니 한숨을
쉬며 서글프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지금부터 언덕을 불러 ‘관유령官遊
嶺’이라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곧장 관리와 백성을 불러 깨우쳐
주었으니 그 또한 풍류風流가 있었다는 한 가지 사실이다.
곧 이해梨海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이다. 마을에 종과 말을 놓아두었
다. 마을의 젊은이가 옥관자玉貫子와 술 한 병을 들고 앞장서 운수동雲
水洞을 향했다. 대개 어려서부터 초파蕉皤 어른에게 배워 학문이 시문
詩文을 짓거나 서화書畵를 그리는 일에 뛰어났으니 늦게는 계승하지
못했다. 그가 무공武功을 쌓았으나 군자君子들을 따르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마을로 들어가니 좌우의 철벽鐵壁이 하늘을 끼웠고 사이에 봉
우리가 무더기로 쌓여 우뚝이 빼어나면서도 조금도 교태를 부리거나
단장한 모습이 없다. 가운데 하나의 길이 있어서 흐르는 물을 찾아 들
어갔다. 물이 길을 따라 가다가 길을 만나니 기이함을 알 뿐이다. 해와
달의 빛이 중천中天에 없으면 볼 수가 없다. 그늘로 가려 졌으며 검푸르
고 깊어 지나가는 사람이 장차 북해北海를 만난 이후에 비로소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 앞 언덕 가에 점점 높아 이곳을 지나가려고 의도하는
사람은 물줄기의 근원을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곳이 몇 군데 있다. 물
가가 없어 사람들로 하여금 돌아서 나가고자 하나 갈 수 없다. 다만
별빛 두 세 개만 머리 위에서 반짝이니 마치 세상 밖의 지팡이 소리를
듣는 것 같다.
일행이 수 십여 리를 걸으니 갑자기 불빛이 있다. 승려 두 사람이
앞에서 두 손을 어긋나게 마주 잡고 있어서 절이 가까이 있음을 알았
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며 삼가 조심했다. 이미 건너니 또 바둑판 같이
땅이 열리고 암자는 북두칠성 사이에 걸려 있다. 평일에 동쪽의 높은
산에 올라 사해를 바라보면 일찍이 한 조각구름이 하늘 끝을 가림을 알
지 못했는데 바로 이것이었단 말인가? 열경說卿과 충언忠彦이 서로 화답
하며 말하기를 “이 골짜기가 비록 극도로 신령스럽고 기이하나 이곳
에 들어오면 곧 암석도 없고 하나의 토산土山이 세워 있어 가까운 골짜
기에 뽕나무와 삼을 심은 땅에 지나지 아니하여 참으로 생각을 만족하
게 할 수 없다.”라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네. 한번은 늦추
고 한번은 넓혀지는 것은 천지天地의 도道라네. 어찌 굴신屈伸과 조종操
縱이 없이 조화造化를 만들 수 있겠는가? 이는 반드시 옛날 승려 가운
데 숲 속의 천기天機를 아는 자가 이곳을 점지했을 것이네.”라고 했다.
선생이 호응하시고 다른 사람들도 또한 옳은 듯하다고 했다.
누워 잠자리에 들면서 꿈속에서의 느낌이 마치 두우斗牛와 은하銀河
의 사이에 높이 베고 우연히 강좌江左의 늙은이를 우연히 만난듯하다.
사방이 어두운데 그분은 약간 술에 취해 나를 보고 웃으면서 다른 사
람들은 말고, 다만 “그대가 우산愚山53)과 문계文溪의 사이를 왕래하면
서 어찌 한번이라도 방문하지 못했는가?”라고 했다. 아! 공公은 일찍
부터 세상과 함께함이 다행이었으나 한번 인사하는 아름다움이 없었
다. 근래에는 명산名山과 선향仙鄕의 가운데에서 음성으로 가르침을 받
았으니 아미峨眉 산방山房에서 엄군평嚴君平54)의 참뜻을 직접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잠에서 일어나 충언忠彦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함께
탄식했다. 밤에 은은한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나무의 사이로부터
나와 나무를 두드리는 것 같고 항아리를 두드리는 것 같다. 여러 승려
들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옛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고 겨우 3년 되었을
뿐입니다. 여름에는 없고 겨울에는 있으니 이 무슨 물건입니까?”라고
했다. 내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용사龍蛇에 속하는 것이 아니겠
는가?”라고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무릇 큰 눈이 내리면 곰, 말곰, 영
양, 박駮의 동물이 누樓에 나열하니, 이 소리가 어찌 산의 짐승들의 모
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들
짐승의 종류는 겨울 추위 때문에 몸을 감추지 않으니 앞말의 이치가
혹 그런듯하다.”라고 했다.
임인일壬寅日, 참선參禪을 하고 암자 뒤로 올라가 북쪽으로 향했다.
53) 우산(愚山): 지금의 경북 상주지역의 지명으로, 정경세(鄭經世)의 별장이 있는 곳이
다. 선생의 공덕을 기려 영조 연간에 사패지(賜牌地)로 결정되었다.
54) 엄군평(嚴君平): 한(漢)나라 때의 은사(隱士)로 성도(成都)에서 복서(卜筮)로 생계
를 이어가며 일생을 마쳤다.(漢書 卷72
망선望禪이 석봉石峯의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에 백
운암白雲庵이 있는데 거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곳을 오르면 일출日
出이 부상扶桑까지 펼쳐짐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골짜기에 사람 사는
마을이 있는데 아래로 주방동周坊洞과 이어져서 돌아감을 기약해도 지
연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지난번 어떤 사람이 다만
바다의 색과 배와 돛을 이야기했을 뿐이니,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를
누가 알겠는가?”라고 했다. 겨우 말을 마치고 돌아서자 이 말이 진실
로 급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남을 위해 이름을 구하려는 뜻이 있으
니,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55)이 ‘찬비를 맞고 잘못됨을 알았다.[寒雨知
非]’의 구절은 금강산金剛山의 경구警句에 마땅하다.
동구를 나와 가끔씩 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치춘穉春은
제명題名하였고 선생은 ‘운수동문雲水洞門’의 네 글자를 새겼다. 벽 위
에 오계梧溪공의 이름은 있으나 선후先後의 여행객과 차이가 없다. 조
금 지나니 다리 아래에 높고 낮은 형세가 펼쳐 있다. 옷 위로 어지럽게
붉은 햇볕이 솟아오르고 이해梨海가 이미 눈 안으로 들어온다. 말발굽
을 다시 고치고 길을 물어 주방周坊으로 달리니 근심할 것이 없다. 대
개 어제 골짜기에 들어올 때에 충언忠彦이 미리 생각해둔 곳이다. 일행
은 나누어 보행자는 사이길이 비스듬하게 있는 곳으로 보내고 평말을
탄 사람은 평평한 길로 주방周坊에 이르렀다. 마을 아래에서 조금 쉬었
55) 정사룡(鄭士龍, 1491~157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경
(雲卿), 호는 호음(湖陰)이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조카이다. 저서로는 호음
잡고(湖陰雜稿)ㆍ조천록 등이 있다.
다가 사람과 말을 재촉하면서 다시 길에서 보행자들의 후발대를 만났
다. 이미 말 탄 이와 걷는 이가 만나기를 처음 출발할 때의 모습과 같
이 되었다.
절을 향해 시내를 건너고 숲을 뚫어 지나갔다. 절의 누각에는 들어
갈 수가 없어 곧바로 대臺의 앞 단풍 숲으로 내려가 절의 사당 뒤에
말을 머무르게 했다. 아름다운 광채가 나는 무성한 나무, 붉은 낙엽은
땅을 가린다. 그물처럼 자라는 진홍색이나 빨강색의 염료로 사용되는
꼭두서니풀56)이 사람을 물들이니 베적삼이 몸에 걸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초파蕉皤 어른이 말하기를 “이곳은 기암旗巖이네.”라고 했다.
우러러 우뚝 솟은 봉우리를 보니 위에는 3층 바위가 빼어나서 기댈
곳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이 허공에 우뚝이 서있다. 바위 밖은 모두가
하늘이다. 바로 성한 비가 내린 뒤 처음으로 개여 구름이 사라지고 불
룩하게 솟아 일어나 있는 것과 같다. 승려를 불러 종과 말을 부탁하고
곧바로 골짜기로 들어갔다.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동부洞府는 웅장하
고 크고 화려하여 모든 체제가 갖추어져 있다. 기괴함은 둔세굴遯世窟
과 갑을甲乙을 다툴 만하고, 밝고 수려함은 옥계玉溪와 백중지세伯仲之
勢이고, 깊은 골짜기는 운수동雲水洞과 더불어 상하上下를 다툴 만하고,
웅장하고 특이함은 비교할 대상이 없다.
산을 유람하는 자는 주방周坊을 동도東都의 최고로 지목하는 것은 참
으로 이유가 있다. 시내의 남쪽에 바위가 있는데 급박하게 상하上下가
56) 꼭두서니풀: 빨간색의 염료로 사용되는 풀이다.
통하고 가운데와 밖은 절단截斷되어 있다. 늠름한 모습은 볼 수 없으나
중간에 하나의 띠를 두른 검은 무늬는 위로부터 아래로 이어져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왕周王이 바위 위에다 행궁行宮을 지어놓고 바
위에서 줄을 내려 물을 길어 올렸는데 이것이 그 흔적이다.”라고 하는
데 주왕의 이야기는 이미를 징험할 수 없다. 이미 날개도 없이 어찌
이곳에다가 궁궐을 세우고 신하와 관리를 거느렸겠는가? 다만 학鶴의
둥지가 있는 바위만 보이는데 마치 이곳에 의탁하여 살면서 새끼를
기른 장소로 검은 치마에 흰 옷을 입은 학이 지나가는 사람을 노리고
있는 듯하다. 말을 타고 지나는 사람은 이를 볼 수가 없으니 어찌 구분
을 못했을까? 그 무거운 발걸음을 다투어 선암船巖에 도착한 것은 이
른바 천명天命을 알지 못한 것이다. 또한 어찌 족히 물의 원천을 거론
하겠는가? 용추龍湫는 어지러운 바위틈으로 연유되어 능히 많은 물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충언忠彦과 치춘穉春과 후보厚甫는 갓끈을 풀고 옷을 벗어두고 언덕
을 기어내려 간다. 참으로 큰 신령을 숨기기 위해 고의로 넓게 하고자
하지 않은 듯하다. 비록 밖으로부터 삥 돌아 있으나 지나는 바의 사람
들이 평지로부터 이곳을 보게 하니 이미 위태로운 곳이 많다. 산허리로
부터 조금 지나서 전전긍긍하며 걸었다. 주방암周坊庵에 들어가니 암자의
승려가 벽을 마주하고 앉아있다. 주방굴周坊窟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
더니 승려가 나를 인도했다. 걸어서 두 벽壁의 틈 사이로 겨우 한 사람
이 지나갈 수가 있고 어깨를 바로 하여 지나갈 수가 없다. 짙은 비취색
의 물방울이 스며들어 옥구슬 같이 물소리가 맑다. 옷과 신이 모두 젖
고 찬 기운이 뼈 속으로 스며든다. 비록 두꺼운 털옷을 입어도 참을
수가 없다. 길 가까이에 백 길을 쌓아놓은 돌층계가 있다. 층 위에는 폭
포가 떨어지는 굴이 있다. 폭포를 따라 고인 물이 줄어들게 되면 물의
양을 더하고 줄인다.
이때는 바야흐로 휴식 시간이다. 아래에는 수 개의 나무가 서 있다.
사다리를 만들어 두었는데 오직 몸이 가벼워 민첩한 사람만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있다. 후보厚甫와 치춘穉春은 가능했으나 충언忠彦은 마
침내 중간 쯤 이르러 나아가 오를 수가 없다. 누각 앞의 경완산敬玩山
과 표은산瓢隱山은 옹翁이 이름 지은 곳이다. 날듯이 가벼운 몸으로 돌
아오며 귀로歸路의 시를 지었다. 시를 완성하고 절의 선실禪室로 들어
왔다. 이미 등불이 빛을 내고 있다. 절 안에는 장로長老가 자제子弟를
인솔하여 와서 만나고는 헤어질 계획을 한다. 혹은 길에 머물면서 도
달하지 못하고 장차 내일 절로 들어가려 한다. 초파蕉皤 어른이 말하기
를 “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있으나 내일 가면 편안히 갈수 있을 것
이네. 아마도 하루를 늦추어 그 다음날 모인다면 정오 무렵에 사방에
서 다 모여 거의 30명이 될 것이네.”라고 했다.
다시 기암旗巖 아래로 들어와서 물 가까이 돌에 앉았다. 술을 몇 잔
씩 나누고 각각 절구絶句로 송별의 뜻을 붙였다. 어떤 나무꾼과 승려가
가득히 짐을 지고 있다. 모두가 수단화水丹花에 떨기인데, 또한 여행객
들이 길을 따라오면서 놀라운 경치에 놀이하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겠
는가? 적조암寂照庵을 오르니 암자 앞에 서리 맞은 감이 참으로 붉은
것을 승려가 따서 우리에게 준다. 나의 소매에 내놓은 것은 마치 붉은
대추와 서린 복숭아 같다. 돌아오면서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했다. 백
운암白雲巖을 경유하여 대둔산大遯山의 누각에 앉았다. 시령詩令을 내
려 말씀하기를 “오늘 머무는 것은 여러 늙은이를 위해서이다. 머물고
내일은 장차 흩어져 돌아가게 되는데, 노인이 서로 이별함은 젊은이들
과는 다르다. 고시古詩의 심沈ㆍ약約 운자로 느낀 소감을 짓고 다시 시
詩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곧바로 자리 사이에 나아가니 주방산周坊山과 운수산雲水山의 우열優
劣을 거론하는데 산이 높고 가파른 모양을 서로 양보함이 없다. 초파
어른이 말하기를 “시령詩令이 비록 정해졌으나 꺼릴 바가 없네.”라고
하면서 잠시 거의 완성된 한수의 율시를 해석했다. 또한 아鵝, 호湖의
운자로 시를 지어 주니 선생의 뜻이 매우 진중珍重하고 감개感慨하셨
다. 선생이 지은 두 시는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으니, 은隱ㆍ후侯의
운자는 보통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창화唱和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사
람이 방안을 가득 채울 만한 말로 비견되니 족히 사람을 감동시키고
말석에 있는 자라도 마땅히 위안慰安이 되는 말이다. 그러니 나 같은
졸작拙作이 감히 따를 수 있겠는가? 초파 어른이 말하기를 “아! 후의厚
意를 다만 그만둘 수 없는데 하물며 또한 한 마디의 청함이 있어서이
겠는가?”라고 하며 다시 영令을 파기하고 그 운자에 거듭 화답하여 선
생에게 주었다. 면책勉責하는 바의 것이 더욱 절실하고 덕德을 자라게
하는 내용을 내렸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선생도 또한 초파 어른
이 한 것과 같이 지어 한편을 주었다.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받는데 또
한 얼굴에 땀이 흐른다.
10일의 여행이 처음부터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얻은 바가 없지
않다. 처음 출발하면서부터 장차 10일을 계산했으나 비바람의 피해도
없었다. 또한 초파蕉皤 어른의 소쇄蕭灑한 풍류風流를 얻어서 극도로
물외物外의 흥겨움을 느꼈으니 이번 행차의 다행스러운 점이다. 유감
遺憾이 없을 수 없는 것은 팔각산八角山의 정상을 올라서 손으로 선루仙
漏를 움켜잡아 천지天池를 떨치고, 눈으로 천둥과 비의 느낌을 보는 것
은 마치 야인野人 같이 할 수 없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백운산白
雲山을 올라 동해東海 끝까지 대마도對馬島와 관월도關月導의 경계를 다
할 수 없었다. 주방산周坊山 밖에 우연히 피리를 메고 지나가는 자가
있어 장차 여행 경비를 덜어서 음악 연주의 비용으로 주려고 했는데,
그 사람은 갑자기 일어서서 길 왼쪽에서 한번 돌아보고 다시 대응하지
않고 표연飄然히 가버렸다. 돌아보는 사이에 형체와 그림자의 모양이
사라졌다. 혹 세상을 피하여 떠다니며 광릉廣陵의 오묘함을 얻으며 아
는 사람 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이것이 한스러
워 할만하다.
갑진일甲辰日, 주인과 나그네가 모두 사루寺樓에 나와 이별하는데 주
인이 헤어지지 않고 말을 타고 앞장 설 것을 청했다. 삼의三宜에 도착
하여 멀리 송단松壇의 위를 보니, 마치 자리를 펴고 등급별로 제후들을
봉작封爵하는 모습이다. 서둘러서 구비하여 말에서 내려 자리에 앉았
다. 술과 안주가 이어졌다. 조금 있다가 마친 뒤에 이별 했다. 마평麻坪
표은산瓢隱山 아래에 이르러 길이 갈라졌다. 청운靑雲의 백학관白鶴館
을 지나 내려와 길산吉山 김백원金百源의 집에서 자고 돌아왔다.
대개 산을 유람함에 산수山水의 맥락脈絡을 찾아 노닐 수 있는 곳은
청량산과 팔공산 같은 경우가 그렇다. 골짜기와 물의 근원이 시작되는
곳을 다해서 노닐 수 있는 곳은 가야산과 태백산 같은 경우가 그렇다.
두류산頭流山은 조망眺望을 취하고, 주흘산主屹山은 그윽하고 깊숙함을
장점으로 취할 만하다. 대저 일월산日月山의 한 지류支流는 바다를 따
라 동남쪽으로 흐르고, 서쪽에 옥계玉溪가 그 사이에 있어, 동북으로
흘러 바다 서쪽으로 간다. 북쪽은 주방산周坊山이고, 남쪽은 보현산普現
山이며, 중앙은 오도산吾道山과 운수산雲水山이다. 원두源頭가 서로 말류
末流와 합일된다. 청운靑雲과 진천眞川으로 경유하여 도연陶淵에 도달
하여 오도산吾道山에 의거해서 간다. 서북으로는 방호方壺의 맥락이 흘
러 여러 갈래 갈라져 개울과 골짜기의 법이 달라 일관적으로 논의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이를 본 자가 각각 그 모양이나 형세에 따라 눈을
굴려 마치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이 함께 가도 어그러짐이 없고, 우禹ㆍ직
稷ㆍ안자顔子가 때에 따라 적중함을 얻은 것과 같다. 옛것을 씻어 버리
고 새것을 오게 함과 같으며 많은 괴로움을 경험하고는 하루아침에 어
슴푸레 깨우침이 오는 것과 같다. 계단을 따라 등급을 쫓음이 있어야
하고, 먼저는 어려우나 나중에는 얻음이 있게 된다. 그러하니 요컨대
다리의 힘이 피곤함이 다하여 눈이 황홀함에 이르고, 머리를 돌리려면
지팡이도 돌려야 한다. 반드시 낮은 머리로는 앞면을 보지 못하고, 발
꿈치를 붙여 가면서는 다음 길을 생각할 수 없다. 오직 척촌尺寸의 짧
은 간격으로 조금씩 앞을 향해 간 뒤에 비로소 진원眞源에 이르게 된
다. 이른바 진원眞源이란 것은 반드시 이것이 참된 원두源頭라서 따르는
바는 아니다. 혹자도 이와 같을 것이다.
기축년己丑年(1769) 음력 10월 을묘일乙卯日에 적다.
玉溪遊山錄[己丑] 1769년(영조45)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余少多疾病、不善步趨、非代步不能動、數十里而猶有好善之、誠山水之興不相下。蓋嘗得退谷權子剛丈遊淸涼山、得李友甫、遊陶淵、又與李仲則仲休穉春逍遙於龍潭鈷鉧之間。而數載以來、重患脚力雖里閭戶庭之作止、時或至於倚杖而後堪之。過此何敢望耶?周房百里之山也、王溪倍之。不過費數日之春、雲岑白石未嘗不往來於心、而正如籠中之鶴、只得望雲而翹翹也。今年夏病益甚、守株一堂、意思鈍滯、殆無以自振焉。及秋潦初霽、湖上先生約石浦李丈人駕臨、陪侍兩夜之晤、自語以爲坐遂平日之願、未始不爲寂寞之分、旣而梧溪公又有杖屨之枉極論前輩嘉言美論所以警愚魯者。重截一歲之半以下可知其有抽俗之分也。未數日、先生忽自湖上命駕、堂叔丈李公已先在座、從子穉春、及庶弟達靖步隨、卽九月望之甲午也。納寒暄畢、先生微笑曰"間偶令達靖幹事于靑鳧地、乃自躬踏玉溪而至、傳說頗詳。如有雲霞之氣逬出於牙頰之間、不覺動人、居然而出。達靖請先導、疇請隨後乃得至是。"李丈應聲曰:"諾。吾將從之、此中亦有人乎?"卽退而謀之慈氏喜、喜其御李君也。翼日乙未、遂借乘于天成、持十日糧、束裝而出行、裝則退詩一卷而已。行至靑鶴寺下、先生顧余曰:"景蘊弘輔於詩頗解、著手前頭、甚有步趣云。"辭謝訖、知將有詩令矣。俄而命穉春拈出退詩中、川字五言律、約以日暮收韻。由黃鶴洞、逕路盡是泉石丹葉爾。所觸或寓諷詠、或占亭址、上鼎峴日光匿山、馬蹄脫鐵、期與忠彦相晤者左矣。先生顧視峽流之潺湲、歎曰:"發源之處如是微細、下流之大至於浸漫郊野。凡不謹於細末流之弊、有如此矣。"下嶺前至德巷、李丈所騎仰秣而病。偶有隣居趙生頗知黃氏之術。又不怠於急人、無不試其能、向曉乃已。平明而發、李丈休病馬于前、借趙牛而行曰:"苟非趙生今行殆矣。使之宿于彼者、得非幸乎!"先生曰:"天道苟有不奈何處、則已矣、不然則必有會事而發者、不期然而然矣、"有頃、川林漸明、前途不迷。先生曰:"向暮之日、雖不甚昏、稍稍向昏去、將曉雖不甚明、稍稍向明去、宜行者之審也。昨詩未及就、又拈歌字七言律、到玄隱趙上舍相抃家。主人子姪七八、盛服迎候、各持鐵片、而以完馬殺雞以供之。趙上舍且喂騶、戒僮而從余。戲云。料理行理而辦則例也。立談之間、乃能勇斷、誠不易哉!"主人笑曰:"吾顧不能爲公所能耶?"其弟相彦美仲、方持重服未葬、乃曰:"獨讓金君做此遊、最是健羨事也。"旣飯、復整行裝、偶自囊中露見退集、主人大驚曰:"此何物?將令敗人意思耶!"李丈人恢諧而罷、主客步向安德、彊隨高遊、自困脚力。每有步行之令、輒驚懼無異於說卿甫之見詩卷也。歷討數處人事入忠彦所。候其大人公、因而之松鶴書院、上堂無院號之榜、兩傍又無齋號、又無松杉藏修之勝、但有古事一冊尹厓西希正詩集可過眼。穉春掌行中日記、自玄隱分向德峴、約以明日來集。余欲替修其職而疲苶昏憒、無以及焉。薄暮、權上舍伯仲丈追臨問行路將何由曰:"直向巨嶺如何?"曰:"異乎吾所計也、方壺天地、豈可無一會期哉!丁酉、謁尙德祠、先生攝衣趨蹌、肅敬之意著於動止、退而思之、均是人也、百世之下、安能使人慕悅起敬至、此又安能感應興起於百世之上至此哉!松鶴主金上舍長民、方壺主趙措大元變引向方壺、會員數十人。從穉春與厚甫來至、諸長老皆步、獨留余于權君澤嶺秀精舍、使之騎馬而息勞焉。義不可辭之、而後得許、然殆不能堪也。李丈嗟勞之不已、先生亦任之爾、渡石矼坐沙上。昔者只是沙場、今夏江水齧沙而露其骨、巖石如盤如牀、連珠貫玉、可坐可踞、仰見翠壁縈雲。劍角摩天、中有一小樓、朱碧明暎左右。詩扁鱗疊照耀、方怳然若失、不知是爲我耳。諸人喧譁慰余病憊之狀、余止之曰:" 勿屑也、飄然一擧、已在於風臺紺宇之中、顧塵世何如也?"主人網魚而膾炙之、水陸皆具、間以酒醪、江山之趣盡矣。燈下讀前賢詩、軸次風字韻。戊戌、旣盥、候長老已具二冊、一付臺中、一付行史臺者。先生識而宗德筆行者、權上舍丈識而長民筆、姓名年齒居住備焉。酒行相揖而下馬、已敍次溪岸矣。權上舍前、李丈次、先生次、趙上舍及余先後焉。厚甫穉春李君步行。有一翁扶杖而後、卽趙相弼台老甫也。行至巨嶺店、忠彦已治遠遊之具、等候于道。蓋亦稍剩其所齎、以爲主客之禮也。東北由一峽、而勢益高、僕夫納轡于上、探其藤蔓之垂、頻以葡萄唐李之、屬沃之在霜後甘酸甚美云。上吾道山、少憇。台老甫多拾橡實啖之不掇、問之、則此山橡實味如栗子云。下山是涑水村、纔歇馬、日已曭矣。不得前進、解馬休僮于村、距屛巖不遠、不可孤也。步入外屛巖、顧後若以雙屛遞衿相鎖者。然上內屛巖上頭、稜角峭厲、便如列㦸環侍。而下面平連疊開、旅軒先生嘗嘯詠于此、故號曰旅軒臺也。屛內藏得一院、不與洞主相識、將旋筇而歸。趙上舍落後、驅人馬而至曰:"院後一洞。有僧庵可一宿。洞門數里、鋪巖亦自不惡、犯夜入寺、寺僧不之敬禮焉。"余謂說卿曰:"旣陪長老、可無一警乎?"說卿曰:"陪長者、故不能也。"夜深有車馬唱喏之聲"火色煌煌涑水村數十員偕洞主迎候、將有明日雞酒之樂、厚意不可以負、行事轉轉差池、更遲一日、甚恐不濟事耳。力謝之、只成夜裏討話而已。己亥、復出洞巖、不及院而遡澗而東行、至數十里、洞壑平開、郊野寛閒、居民頗豐饒、問村名、曰花場。中有高姓良家子、稍識文字云。村前小溪環抱而流、無甚奇特、及到盡頭處、巖右夾溪而開、高可成臺、低可團坐、阜岸方整、淸泉涵渟、又有落落亂石、排布于溪。抑求諸花山聞韶之界、鮮得其匹也。數畝沃壤、枕溪而臥宅、於是而耕、於是復何求乎?下馬盤旋而歸、不啻桑下之再宿也。又有數
十里長谷循溪而、入蘿薜蒙絡檜枏晻靄中、有平原荒茂白茅黃筆、一望無際。厚甫指余而言曰:"此爲築隄開防之地、患無力耳、若携手結契、刊木墾土、樹之黍稌麻菽、則武陵桃源亦不多讓、尙遺此一區、不入於職方氏之所載、則其亦有待者而然歟?窮源有大嶺摩天、曲如羊腸、危如九折、只尋樹草縫罅而進、俗稱曰肝腸峴、恐是羊腸之號謬也。下山而憇于高川金南原之墳庵間於靑盈永慶之分、而四塞如巴山、決非人境者。久矣、於是乎屛巖詩成、各誌其號。權文曰蕉皤、李丈曰湖叟、先生以大山、餘皆名之。先生曰:今行詩令、只得日課而已。不敢過也。朱夫子遊山之令、常以過節爲戒、然弛張之間不覺至百餘篇、風致之發、有不能禁者。"道間買取生魚烹於是、鮮如新得者然、可知其海門之邇也蕉皤丈曰:"自此可向遯世洞去、其各勵之。"問諸庵僧而後行。踰向一曲、前臨大壑瞻望指點、白石齒齒、洞門重重、靈怪奇爽、無非仙靈之所、苟有山隙容流之路、必以氷玉糚緻、窺戶可知其珍寶之府也。不知從何而尋其爲遯世洞也。羅立山顚、憆然自失、將欲直抵溪澗、逐旋踏從矣。偶自後路有一氓、戴笠結索而至曰:"洞名一稱彌勒、一稱遯世、遵壑不能達矣。第從我。"順其軌而從平路渡矼而登岸。稍南松杉翳日、寛平可住。氓曰:"其舍馬、袪上衣、持筇納履、斜由岸側而東數百步、洞門懸如浮空、兩傍石柱作門、而方而齊、整白有光映、滲流涓滴、其下澄涵、勢固爾也。使人不覺然生疑、疑其中必有異也。門不可由、因岸側而進、土盡而石、闊步梯石、身不期高。而自高復如是而下越其壑、然後可以窺其蘊壑中有一石。大如小屋子、當要路、正爲誠意關、且圓無罅級、人皆着足抱手、襯貼腹行、跨其頭、然後始聚足而立、竦身超躍、然必一發而當對立之石、可免躓墜也。如余何以及、顧石不甚高、水不甚深、失圖不過爲霑身而已、不可以辦命論也。余乃居後、挺身而効力一擧、賀言已譁然矣。衆人扶翼蕉皤丈以濟、說卿坐石而言昨年東都士人遊於此、行中一人墜落于水、翻身而出、其錄有曰吾儕之幸、而魚龍之不幸云。所謂善戲謔兮、而其不至傷人可知也。前一隊先在上一層、擧頭向谷、俱作一番驚動之聲、如遇猛獸騰鱗者然、旣而駭視無言。厚甫穉春向前而飛入、先生莞爾、蕉皤茫然而立、余從人後、試一覘之、未遑出一言。言曰:"天下復有此乎?"先生徐曰:"古人文字、何者可以比得?"蕉翁曰:"韓文公南山詩無或近乎!"大抵滿壑皆是石耳、而無片土留着、所容者只是流銀碎玉、錚錚而下爾。地勢轉成層級。深者可以徹厚坤、高者可以摩蒼天、而石色如雪、小如丸杯、大如峯巒、尖如錐鋩、嚴如劍㦸、高如銅柱、方如金印、陷如杵臼、窩如釜鼎、立立矗矗、積蓄瀰漫、而猶各占界分、不相倚比、片片淸潭、隱現石底、左右蒼壁、昂頭聳肩、望之至或魂悸神怔、必俯首收視而後定。驟而臨之、正如睡眼看場、入海觀龍、正所謂仁、者見之謂之仁知。者見之謂之知若欲比之於羅漢講徒、齊島鴻門、趙市秦關畫本蜃樓、粉黛行陣、冀得逼眞而後已、則却淺矣。良久、氓請回策、至石坎有題名月城。李公[憲成]聞韶李公[宜泰]辦戊子之遊、傍有遯世窟三字。噫!天地之機、可謂漏洩盡矣!造物者做此一箇別般伎倆、而不使有着足盤旋之地者何?也抑故絶其窺覬之路、使之不得以知知之、又無以寄焉、不但爲遯乎?世也、並其遯世者、而遯之則斯名也、其亦指山而言乎?使穉春題姓名訖、出洞着衣上馬。前路數十里、皆人世之所未覩也。便如駕鶴鞭龍、沿洄於三淸十洲之界也。方占村定棲、隔溪有一岸陡起、高可數十丈。其上有稻 田三五畝、蓋刳木架空激流而灌之也。四面如削玉作亭、可以養魚流觴、可以種蓮采筍。余曰:"占此屛巖、當在下風、花場當在退聽也。"先生微笑、宿其村。曰:"斗升。"問其岸曰塘皐、俗也、改之曰馬到稱之以淸暎臺可乎?朝起賦詩、過星岑而北。洞壑炯澈、若明炬而行也、遇石皆如豎氷、遇水皆如鋪鏡、遇隙皆懸瀑、遇坎皆澄淵、開闢於柘櫟松杉之中、而骨角崢嶸、欲索秋毛之細:而不可得。只布一匹素練、文之以粉畫也、俗稱有九龍潭、其逬出於石齦者曰漱玉臺、其渟涵於石函者曰洗心臺。先生命名、而書之於其所謂龍淵者。氓曰:"魚之尋源者、至此而止、爲其石層截也。"先生誦存齋陶淵詩、一超縱被漁人得、未達窮源正不休 "之句、命之以達源、使穉春書之。移向八九里、洞門頗有衛護施設之狀、更覺一噴一醒也。無亦玉溪之界乎?道左有僧庵、使厚甫入庵而辦盂鉢而出、直從溪流而下、天機向平、地勢漸曠、日月明朗、風雲澹蕩、左右寬闊、占地穩藉、巖石排布、泉潭窈湸、石上可坐數十人者無數、而且有頭面恢平而成窩貯水、如小塘者、多未知積潦雨之淋漓潤空翠之浸漬、不以風日之曝、而被其所損耶?抑亦洪濤襄陵、川谷平齊、及其水落留其餘流、而不之竭乎?先生曰:"仙境、此眞是也。當中有大石、形如圓甕、占坐十畝、高欲揷雲、左右前後無所倚、所謂君子之彊也。上頭戴小土以托雜叢、石邪?峯邪?尤可異也。其臥立縱橫者、不可勝記。環石峯而下又無有起立者、只令露伏而宛轉、便於循級而覓理焉信步向前、巖勢欲盡、明鏡驚眸、水光逼人、回顧又自八角山下通一流、合襟于此、而兩壑之勝萃焉。据石而臨之石之、布于地者、雜以黑白、有如織文錦具。石之伏于旁者、如龜下水、如鼃回首、容水一方、而不圓不方可一畝、又其上別作一層、正似粉壁 綵牖之室、方而不跛、正而不偏、水色靑藍、石文明洞、其廣倍之。又其上別作一層巖石大開、可容百千之會、中陷爲金櫃玉藏、如以繩墨治之、長可百步、廣可容一舟、窈冥淵靜、深至數丈。此藉八角之、水成之而三層各成岸局、上不知有下、下不知有上、必攀梯回旋而後見之。固知天地之氣間有鍾會磨硏、有若有爲而爲者。夫前有香爐峯、後有八角山、人言其中有天池。大旱不縮、線流由石縫而滲漏、如金壺玉箭點滴于下、人以器承之、則隨大小盈其口、然後雖數日連滴、不復汎溢、名之曰仙漏。又有馬蹄棊文之痕、豈其然乎?詩成、厚甫諸人具餐。二僧負而至、敍坐從便。先生曰:"雖野坐、長幼之禮可但已乎?"起而整之。訖有云洞外有臥龍瀑可見、爲脚力闕之、由亭後而行、又是澗壑耳。石色不如彼之皓白、而奇俊則有之。行己五六日、爾、余之神氣脚力、頗似勝前。說卿之諧笑益甚、一行賴不寂寥。先生曰:"趙公其將以俳優畜邪/恐不如稍自減損之爲愈也。"道彦無憚一二、分步行也。此爲履歷未必非驗也。暮入村舍、水石亦可愛、名曰磨川村。氓辭行糗、分排而供之。說卿戲謂村氓曰:"汝等由玉溪之勝、疲於迎送、欲避之移此區於安德可乎?"氓曰:"雖峽氓愚蠢、不欲以名勝讓與別人。"亦善其應也朝後發自前岸、片片水隴、秋稼頗稔、未見引漑之溝、忽見頭上架筧、如虹浮於半空、高可十丈、長恰百尺。蓋自玉溪以下、着土者只山顚岸側耳。引灌甚艱、必棲筧鑿巖、運流轉水、無異於持盂傳渫、是以或多抱巖墜落之患、生理之艱、尤亦甚矣。若使二邑之宰、仍山水之遊、目擊于此、則發於惻隱之餘者、必有所處矣。由岸而西、出洞若將望見羊腸嶺、向下數里許忽望北天一峯、縹緲如着白帽、兀然於蒼翠之外、湖叟指之曰:"後行見之否?"曰:"諾。"蕉翁曰:"此所謂母子山也。"行幾半日、遡盡泉石、逶迤而登一峴、不甚峻急。蕉翁曰:"此山、昔名官轉、甚無意味、野人傳之云:古有邑宰遊覽至此、彈聲忽至、自此解印、故名或曰到此馬屈官行、不免推轉之患、故名二者、誕矣。設有然者、無護惜嗟悼之意、非美風也。識者病之、前府伯兪公彦基邀余遊于此。大張聲妓管絃、轟戛喟然而歎曰:、從今呼峴爲官遊嶺、`卽召吏民喩之、其亦風流之一事也。"卽到梨海、已向夕、舍奴馬于村、村人妙年玉圈持酒壺而前、向雲水洞、蓋少從蕉皤公學、能勝文墨、晩無成、襲其武功之秩。然從士君子不厭也。入洞左右、鐵壁揷天、間以峯巒、而磊落卓秀、少無媚嫵糚點之態、中有一路、尋流而入、流水之隨遇呈異可知耳。日月之光、非中天則不可見焉、陰翳黝邃、行之者若將遇北海、而後始見天日也。前有岸頭稍高、意者其過此可以覩源頭如是者數、了無涯際、使人欲回旋而出而不可得、只見星宿兩三、耿耿頭上、如得世外筇音。行至十餘里、忽有火光、緇徒二人、又手于前、知其有庵近也。渡獨木橋甚謹、旣濟又開土局、庵掛於斗牛之間、不知平日東登高山而望之、常有一片雲晻靄于天末者是耶?說卿忠彦相和而言曰:`此洞雖極靈異、入此便無。巖石作一土山、不過近峽桑麻之地、誠不滿意思矣。"余曰:"不然、一弛一張、天地之道也。焉有無屈伸操縱而可以爲造化乎?是必古釋林中識天機者占之也。"先生之應、人亦如是。及臥魂夢依俙如將高枕於斗牛河漢之間、而邂逅見江左翁方面黯然帶微醺而笑、無他言、只曰:"君往來於愚山文溪之間、而何以無一訪?噫!於公嘗有並世之幸、而恨無一拜之雅。今者獲奉音旨於名山仙鄕之中、無異於峨眉山房、親見嚴君平之眞也。起而語忠彦、共一喟然也。夜聞隱隱之聲來自樹木之間、如擊木、如扣甕。問諸僧、曰:"舊無之、纔三歲爾。夏無冬有、此何物?余應曰:"無乃是龍蛇之屬乎!"僧曰凡有大雪、熊羆羚駮之物、羅列於樓。此聲安知非山獸之蟄者乎?余曰:"獸類不以冬寒而藏、前言理或然也。壬寅、參禪供上庵後、向北而望禪指其石峯之最高者曰:"此有白雲庵無居者。登此則可以觀日出凌扶桑、其洞有人、村下與周房洞連、計歸期止之。余曰:"向人只說海色船帆而已、見不見誰知之者?"纔訖旋覺此言不誠。殺有爲人要名之意。鄭湖"陰寒雨知非"之句、宜乎作金剛山之警句也。出洞往往坐石、酌酒賦詩穉春題名、先生書雲水洞門四字。壁上有梧溪公名、無異於先後杖屨也。少選、脚下弛高低之勢、衣上爛赤日之光、梨海已入眼矣。馬復改鐵而候于途、騁乎周房無所患。蓋昨日入洞之時、忠彦預有以處也。分送步行于間路、迤由平路抵周房洞下、少憇、促人馬而復路邀步行、之殿後者。旣會騎步如初、而向寺涉溪穿林過寺樓而不入、直由臺前楓林之下、而逗馬于佛祠之後。錦光濃樹、丹葉蔽地、罽茜染人、不知布衫之在身也。蕉翁曰:"是旗巖也。仰見特立之峯、上拔三疊巖、無憑無因駕虛豎空、巖外皆天也。正如炎雨初霽、歸雲突起也呼!僧付奴馬、徑入于洞洞。府雄偉巨麗、衆體俱備、奇怪則與遯世窟甲乙也、明麗則與玉溪伯仲也、深邃則與雲水洞上下也。雄特則無與比也。遊山者以周房爲東郡之最者、良有以也。溪南有巖逼、徹上下截斷中外、凜不可見。中間有一帶黑文自上而下。人言周王設行宮于巖上、垂繩于巖以汲澗水、致有是痕。周王之說、已無徵矣。旣無羽翰、何以設宮殿、御臣吏於此乎但見鶴巢之巖、若有托棲寄育之所、而玄裳皓衣之掠馬而過者、亦未之遇焉。其如無分、何其重足爭捷於船巖者?所謂不知命也、又何足論窮源有龍湫、由亂石罅隙乃能達?忠彦穉春厚甫、解冠釋服、跛傾匍匐而從、固巨靈所以秘而不欲廣也。雖從外而回、然所經歷者、使平地者觀之已多危地矣。自山腰一小逕、戰戰而行、入周房庵。庵僧面壁而坐、問周房窟安在?僧引之、步由雙壁之隙、纔容一人之步、不得比肩而行。凝翠淋漓、瓊珠泠泠、衣舃皆濕、冷氣透骨。雖重裘而不可忍也。行近累百丈、有石層層。上作懸瀑之窟、瀑隨潦暵而增損焉。時則方息矣、立數箇木于下以爲梯、惟身輕而足捷者、可以緣梯而上。厚春能之、忠彦卒至半而不得就。上前樓、敬玩瓢隱翁題名翩然而歸、歸路賦詩、詩成入寺禪室。已有燈燭之光焉。境中長老率子弟來會、以爲餞別之計、或在途而不及、將以明朝入寺、蕉翁曰:"不遠數舍而至、明日之行、其可浼浼乎?恐少遲一日。"翼日會者及午方畢、合殆三十人、復入于旗巖下、坐石臨水、酒數行、各以絶句寓送別之意。有樵僧滿擔皆水、丹叢無亦苦遊人之逐踏殺景以戲之耶?上寂照庵、庵前有霜柿正紅、僧摘取以供之。余袖而出如得丹棗蟠桃、歸而爲北堂之壽也。由白雲庵坐、於大遯山樓出詩、令曰:"今日之留、爲諸老也。明將散歸、老人相別、異於少年、可以古詩沈約韻寫懷、勿復言詩也。"卽就座間有周房雲水優劣之論、崢嶸不相下。蕉翁曰:"詩令雖定、不妨暫違成一律、以解之。"又以鵝湖韻贈先生、意甚珍重感慨。先生酬二詩、他人不與焉。隱侯韻非尋常唱和之比、一人滿堂之語、有足以感人。在末席者、當有慰安之辭。拙句敢及之。蕉翁曰:"嘻厚意不可但已、況又有以請一言乎?"復破令重和其韻、而畀之所以責勉者、尤切長德之賜、何可忘乎?先生又如蕉翁之爲、而寄一篇拜手、又汗顔也。十日之遊、未始不爲無所得也。自始發計將一旬、而無風雨之戲、又得蕉皤公蕭灑風流、以極物外之興、爲一行之幸。不能無遺憾者存、不得跨八角之頂、以手掬仙漏而振天池、目見雷雨之感、如野人之云、又不得上白雲而窮東海、以盡對馬關月之界。周房之外、偶有荷嵇笛而過者、將欲罄行槖、而雇其音其人陡立路左、一顧而不復應、飄然而擧、顧眄之頃、已失形影之處、無或逃世之流、得廣陵之妙、而不屑於見知邪?是可恨也。甲辰主客俱出寺樓將別、主人不之別、請騎馬而先行、到三宜、遙見松壇之上、若有鋪席等候之儀、迫之俱。下馬敍坐、杯盤繼之、良久而罷、然後別至麻坪瓢隱山下分路焉。由靑雲白鶴館而下、宿吉山金百源而還。蓋遊山有尋山水脈絡而遊者、如淸涼八公是也。有窮洞壑源頭而遊者、如伽倻太白是也。頭流取眺望也、主屹取幽敻也。夫日月一枝遵海而東南馳而西、玉溪在其間、而東北流于海西而北者、爲周房。南者爲普現中者、爲吾道雲水與周房源頭相當、末流合一、由靑雲過眞川、而達于陶淵、依吾道而行者。西北流于方壺、脈絡累分、澗壑異法、不可以一貫論也。是以見之者、各隨形勝旋開眼目、如伯夷太公並行而不悖、禹稷顔子隨時而得中。如濯去舊見、以來新意、如飽經辛苦、一朝怳然。有循階而逐等、有先難而後獲、要之至於脚力疲盡、眼目怳惚、至欲回頭而反筇、必低頭而不見前面、着跟而不思後路、惟尺寸向進、然後始到眞源。其所謂眞源者、未必是眞箇源頭、而所以從之者、或者其如是夫。己丑陽月之乙卯記。
晩翠堂重修記[己酉]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廟檜壇杏不可復徵、而闕里顔亭至今宛爾者、何哉? 所得之理旣盡、則物固有變也。廢復之爲賢、則傳脩之無窮也。萬年之松有限、而是堂之依舊者、何異焉蓋松隱公松亭之詩、揭在壁上、而晩翠之堂繼起。抑未知幾修而至此也、己酉秋宗兄語于族人曰:"君等但知游燕于斯、講敦隷業之樂、矢壺琴觴之勝、抑亦知我家經紀之所由乎?是堂之作、始在萬曆壬午、而其成甲申也。壬辰之亂、甫以免蕩燼、其後喪難仍之殆無以葺理補修。先君子夙夜憂遑者、幾年矣、"肅廟、辛卯易其東南數十椽、丁未依舊制立寢息之室三架。今所謂復齋是也。及先君子捐世、不肖我惟先志之墜失是懼、而堂之全體圮落、非一大用力不能。英廟、甲申改棟而易瓦、又修西榮小翼室、庶幾其苟完矣乎!今者西南衝椽合附處、鐵釘挑離、將成大罅隙、承西柱之短拱朽蠧不支、吾已老不能自力矣。將若之何?族人應曰:"是我輩之責也、爾善光敬光性光掌之。"仲弟宗鐸氏應曰:"內室亦先人之遺也、盍並治焉?我自任之。乃分功董事、數十日而訖。楣額俱新、少輩若而人、又躬執榦版、周垣于廟宇、斯莫非宗兄繼守之誠動之也。噫!物無一成而不弊、弊而修之、與
不弊同也。然土木之修易、行誼之修難。先其難而後易隨之矣。因竊感夫地僻山深、碩人韻士之游詠于此幾何?而堂之未成也、溫溪李都憲先生、候松隱公哦詩飮酒而罷、堂之旣成也、西厓柳文忠公先生登臨而勉戒之、旅軒張文康公先生徘徊而感慨。旣歸常問人曰:"萬年松平安否?若李湖隱申懶齋柳拙齋金鶴沙瓢隱芝村諸先生之歌詠、皆出於緬古勖後之意。近古大山李先生坐是而申之以紹述持存之方者數、所謂修其難者、此也!"循是而不懈、我祖裕後之澤、庶幾而堂室之永久修治、已事可考也。何待乎言!
松隱先生金公行狀 눌은 이광정 찬
公諱光粹。字國華。姓金氏。本新羅王族。麗時有侍中方慶。事高宗元宗忠烈王。事具史傳。封上洛郡開國公。食采安東。子孫遂大顯。於公爲八世祖。曾大父子瞻。我太宗世。以前朝名臣後。授咸吉道監牧官。不受。挈家入義城之沙村。王父孝溫司直。考諱克諧。中成化謁聖科。以文行名。廉分。嘗評事北道。歸裝有二黃毛。去之。終知禮縣監。實娶司中領延安康載女。以成化戊子生公。幼明爽。甫四歲。與羣兒游。有賈客過而奇之。欲與俱餌以寶珠則却之。九歲。受小學書。聞灑掃應對事親敬長之說。喜曰。如此可以爲人矣。耽讀終日。不輕嬉遊。容辭擧止。與凡兒殊。評事公异之 曰。此兒已有成人儀度矣。一日暮卧憇。蛇墮入懷中。不動。徐解衣紐。俟蛇自出去。聞者異之。評事公早卒。公未及成人。門無功緦之親。而能自經紀庀具。持喪帥履無愆。三年不懈幾毁。旣長。意度恬曠。與人有容。人或有加。反躬自求。不設畛域。平居無惰容。倉卒之際。未嘗疾言遽色。博涉經典。兼通諸子。文詞詩章。蔚爲稱首。性不喜芬華。不屑擧子業。中年。以親命就試。中弘治辛酉司馬。嘗一遊太學。羣居斂容。講說不怠。諸生欲質易學疑義者。咸歸公。時當戊午之後。時象有可虞。不喜久留。一日揖諸生去。同舍以科期挽公。公曰。卜人言命達則年促。豈以浮榮易吾壽哉。遂歸道遇賊。擁公入深谷。迫欲害之。公不爲變。徐曰。汝輩亦天 氓。豈無良心。顧迺爲飢寒所逼。不知攘虔之爲可恥耶。賊中有一人熟視公。遽止其徒曰。此非常人。衛而送之。公旣歸。語家人曰。未幾。士林禍復作。至甲子。如公言。自是謝絶世事。日取古聖賢言。潛心玩賾。夜以繼日。晨興拜家廟。退而與門生學子。孜孜講論。樂而忘倦。常曰。無自欺是吾三字符。素所服膺而未能者也。宅畔有萬年松。枝柯盤屈。蔭可數畝。樂之。常携卷終日偃仰其間。卽自號松隱居士。或稱四休子。又卽南山之麓小潭之上。搆書室數棟。扁曰咏歸之亭。以村名點谷。有取於沂上之意也。每春和物暄。輒携隣朋村秀。風詠而歸曰。不知當日曾氏之樂如何。嘉靖辛酉。公手書老境書懷詩以示內外子孫。越三年癸亥。終 于正寢。享年九十六。臨終。沐浴更衣。隱几屈指自語曰。足矣。有頃倐然而逝。肌膚如生。以是年某月日。奉柩安于縣北大山洞乾坐之原。遠近爭來吊祭。村氓縣吏塡道迎奠。公天性至孝。奉大夫人。親調饋膳。所以順志承顔者。無不用極。大夫人以天年終。公年已衰。而居喪守禮如前喪。弟光復因婦家河隈。每得來期。必倚門西望。日暮不食。待與共床。告歸。輒悒悒終日不樂。家貧。衣食不給。而處之裕如。口不道營産事。平生無纖毫苟且跡。鄕隣稱之以爲無愧顔氏之陋巷云。常以聖狂賢愚之分。在於一心之存否。甚愛西山經。每夜中或淸晨。擁衾誦孟子夜氣章。語學者曰。心本虛明。至百慮不作事物未接之時。本體依舊發見充 養得。此亦一段收放心處。不可昏昧任放去也。嘗作十箴揭坐右。命曰警心。其說本之彛倫。推之行事。修齊之則備具。卽此可知公爲學大槩也。平居。口不道人長短得失。惟古人嘉言善行。喜道之。未嘗虛口。爨婢閭童。亦能習聞而誦之。一日雨霽。杖屨出溪亭。見臧獲服田于路次者。皆擲鉏卧。公不遽前。俟睡起把鋤。迺過去。其德量如此。精力老而不倦。或時値興。肩輿過親故家。詩酒唱酬終日。乃歸。見者稱爲地上仙云。公前後娶。前夫人英陽南氏。士人畤之女。生一男一女。男溏參奉。女適士人金洵。後夫人順天張氏。僉正日新之女。生五女。士人申澤,忠順衛金處善,士人金溫,觀察使柳仲郢,府使李苓爲其壻。參奉有一子世佑。 通禮院引儀。引儀生三子。長士元遊陶山門下。以善行聞。次士亨,士貞。壬辰。從郭將軍再祐。討賊有功。子孫蕃衍。今至百餘人。柳觀察二子。雲龍牧使。成龍領議政。諡文忠公。文忠公德器深厚。蓋有所從來者。
亦樂齋金公致寬亦公外裔。嘗拜旅軒張先生。旅軒問沙村萬年松平安否。因誦公萬年松詩而曰。此老胷中灑落。無一點塵累云。肅廟乙丑。一鄕多士。以公潛德懿行不可終泯。享公藏待院祠。嗚呼。公以厚重之資。精詣之學。施之於時。無有不宜。而當昏朝壞亂之世。知其不可有爲。先幾預避。中經三巨禍網。一時名賢。芟夷殆盡。而能超然高蹈。甘眠無何。鴻飛冥冥。弋人何慕焉。可謂又賢矣。公旣肥跡林泉。享有遐年。其平 生事業。必有表表可傳者。而兵燹之餘。文字散佚。百不存一。公七世孫前騎省郞五應。以公內外諸孫遺事記,輿地所載。裒輯爲一編。屬光庭序次而爲之狀。光庭自惟賤陋。老而無聞。今距公數百載。間雖有風聲之逖聽者。固不敢懸想妄揣。以取秉筆者之深誅。而顧平日高山景行之思。又不能固拒於至誠之來也。乃就本錄。略加竄定如此。而不敢置一喙焉。世之君子亦或垂恕於此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