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정구 , 망우당 곽제우, 여헌 장현광 등 35인이 벌였던 뱃놀이 사실을 1758년(英祖 34) 무렵 박진영(朴震英)의 증손 박상절(朴尙節)이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편집·간행하였다. 1757년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쓴 기락편방서(沂洛編芳序)가 첫머리에 있고‚ 이어서 함께 뱃놀이를 했던 한강 정구(鄭逑)·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함안군수 박충후(朴忠後)· 여헌 장현광(張顯光) 등 35인의 명단을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 에 기재된 34인의 사적을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과 행장(行狀) 등에서 발췌한 용화제현행적(龍華諸賢行蹟)이 실려 있다. 그 뒤에 1620년(光海君 12) 조임도(趙任道)가 쓴 용화산하동범록추서(龍華山下同泛錄追序)와 1728年(英祖 4)에 박상절이 쓴 근서용화산하동범록(謹書龍華山下同泛錄)‚ 용화산 주변 풍경을 여덟 폭 그림에 담고 그림마다 박상절이 지은 5언 절구 1수씩을 붙인 용화산하동범도(龍華山下同泛之圖)와 도설(圖說) (1744년)을 덧붙였다. 특히 조임도(趙任道)의 추서(追序)에는 당시 성대했던 모임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한강, 여헌, 망우당 세 선생을 한자리에서 만났던 감격이 잘 드러나 있다.
박상절의 기락편방록 자료에 추가로 관련 자료를 보충했다.
2019년 2월 13일 여헌 후손 장달수 쓰다.
0 龍華諸賢行蹟
1607년(宣祖 40) 한강 정구‚ 망우당 곽재우, 여헌 장현광이 함안의 용화산(龍華山) 아래에서 뱃놀이를 할 때 광서(匡西) 박진영(朴震英)이 종유(從遊)하였고‚ 그후 28년이 지난 1634년(仁祖 12)에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현풍(玄風)의 풍영대(風詠臺)에서 유회(遊會)할 때 완석당(浣石堂) 박형룡(朴亨龍)이 종유(從遊)하였는데‚ 박진영과 박형룡의 현손(玄孫)인 박상절(朴尙節)이 이에 “용화산하동범록”과 “풍영대제명석각도”를 묶어기락편방(沂洛編芳)이라 제목을 붙혀 1758년(英祖 34)경에 刊印한 것이다.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 정구(鄭逑)를 비롯한 배를 같이 탄 35人의 명단인데‚ 정구‚ 곽재우‚ 박충후‚ 장현광 등 4명은 이름. 자. 호. 시호. 관작의 순으로 나이에 따라 첫머리에 적고‚ 이하는 이름·자·생년·본·호의 순으로 나이에 따라 적고 있다. 끝에 집회의 시기가 1607년(宣祖 40) 3월 28일임을 밝였다.
*용화산하동범록추서(龍華山下同泛錄追序) : 여헌의 문인인 조임도(趙任道)의 추가서문(追序)으로 1621년(光海君 13)에 쓰여지며 내용의 대개는 집회때 이명호(李明怘)가 좌객(坐客)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을 정구가 “용화산동범록“이라 칭하였다.
그후 안정우(安挺偶)에게서 그 초고(草蒿)를 얻어 중수하였다.
*근서용화산하동범록(謹書龍華山下同泛錄) : 1728년(英祖 4)에 박상절(朴尙節)이
조임도(趙任道)의 현손(玄孫)인 조홍엽(趙弘燁)에게서 동범록(同泛錄)을 얻어 추선경현(追先景賢)의 성의을 다하고자 펴낸다는 내용이다.
*용화산하동범지도(龍華山下同泛之圖) : 1.용화악(龍華嶽)‚ 2. 청송사(靑松寺)‚ 3. 도흥보(道興步)‚ 4. 내내촌(柰內村)‚ 5. 경양대(景釀臺)‚ 6. 시우포(是藕浦)‚ 8. 평사면(平沙面)‚ 8. 창암사(滄巖舍) 등의 그림이 있고‚ 이어서 1744년에 쓰여진 박상절의 도설(圖說)이 있다
鄭寒岡 諱逑 字道可 號寒岡 諡文穆公 65세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郭右尹 諱再祐 字季綏 號忘憂堂 諡忠翼公 56세
1552(명종 7)∼1617(광해군 9)
朴咸安 諱忠後 字景 당시 함안군수 56세
1552년(명종7)~1611년(광해3)
張旅軒 諱顯光 字德晦 號旅軒 諡文康公 54세
1554(명종 9)∼1637(인조 15)
李佶 汝閒 戊戌 咸安 獨村 1538(중종33) 70세
成景琛 仲珍 癸卯 咸安 鵲溪 1543(중종38) 65세
辛礎 支叟 己酉 靈山 聞嚴 1549(명종4) 59세
趙埴 克成 己酉 咸安 立嵒 1549(명종4) 59세 조임도의 아버지
李潚 汝澄 庚戌 咸安 葛村 1550(명종5) 58세
盧克弘 毅甫 癸丑 昌寧 沃村 1553(명종8) 55세 한강 생질
辛邦楫 汝濟 丙辰 靈山 永慕堂 1556(명종11) 52세
趙垹 克精 丁巳 咸安 伴鷗亭 1557(명종12) 51세 조임도의 숙부
李厚慶 汝懋 戊午 靈山 畏齋 1558(명종13) 50세
羅翼南 天紀 戊午 咸安敎授 1558(명종13) 50세
李道孜 至之 己未 靈山 復齋 1559(명종14) 49세
兪諧 欽哉 乙丑 靈山進士 1565(명종20) 43세
李明怘 養初 乙丑 咸安 梅竹軒 1565(명종20) 43세
李道由 明之 丙寅 靈山 滄浪叟 1566(명종21) 42세
朴震英 實哉 己巳 咸安 匡西 1569(선조2) 39세
李明憼 一初 己巳 咸安 菊庵 1569(선조2) 39세 여헌 문인
李明念 而聖 辛未 咸安 永慕齋 1571(선조4) 37세
辛膺 伯禧 壬申 靈山 奉事 1572(선조5) 36세
李明愨 子純 壬申 咸安 1572(선조5) 36세
李明悆 慶初 癸酉 咸安 1573(선조6) 35세
安侹 子長 甲戌 咸安 道谷 1574(선조7) 34세
李時馠 聞遠 乙亥 高靈 1575(선조8) 33세
郭瀅 淸叔 戊寅 玄風 1578(선조11) 30세
李道一 貫之 辛巳 靈山 消憂軒 1581(선조14) 27세
李蘭貴 夢與 甲申 星山 瑟谷 1584(선조17) 24세
柳武龍 景溧 甲申 星山 1584(선조17) 24세
趙任道 致遠 乙酉 咸安 澗松堂 1585(선조18) 23세 여헌문인
李道輔 益之 丁亥 靈山 益庵 1587(선조20) 21세
李瀣 而浩 丁亥 靈山 1587(선조20) 21세
李忠民 汝直 戊子 漆谷 1588(선조21) 20세 여헌문인
崔門柱
林眞怤(부) 樂翁 병술 林谷 1586(선조 19) 22
(원문에는 빠짐)
皇明萬曆丁未孟春二十八日 1607년(선조40)
0 第一 寒岡 鄭先生 당시 65 세
0 정구(鄭逑)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성주(星州) 출신.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판서 사중(思中)의 아들이다. 성주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한 인연으로 성주에 정착하였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일컬었다.
7세 때 《논어》와 《대학》을 배워 대의를 통하였으며,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생이 되어 《주역》 등을 배웠다. 겨우 건(乾)·곤(坤)두 괘만 배우고 나머지는 유취하여 8괘와 64괘의 뜻을 쉽게 통하였다 하니 그의 재주가 얼마나 비상하였던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퇴계 이황(李滉)·남명 조식(曺植). 대곡 성운(成運)에게 배웠다. 과장(科場)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귀향하였고, 그 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구도의 일념으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573년(선조 6)에 동강 김우옹(金宇顒)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계속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그때마다 사임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따라서, 그는 학문하는 자세와 인격수양의 방법은 퇴계 닮았고, 천성이 호방하고 원대한 기상은 남명의 모습 그대로였다.
1580년 창녕현감을 시초로 하여 그 이듬해에 사헌부지평, 1582년에 군자감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1584년 동복현감에 이어, 1585년에 교정청의 교정랑이 되어 《경서훈해 經書訓解》를 교정하였다.
1591년 통천군수에 부임하고,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각군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도록 선도하였다.
1594년에 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석방하라는 상소를 올린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하였으며,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향우문도(鄕友門徒)를 모아 교육하였다. 그는 관도에 나왔으나 내직을 사양하고 주로 외직을 맡았다. 이것은 당쟁에 얽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앙정계보다 외직을 맡아 자신의 덕치주의 이상인 지방학문을 융성시키고 민중을 교화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학문세계는 우주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경서(經書)·병학·의학·역사·천문·풍수지리 등 모든 분야에 통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예학(禮學)은 특출하였다.
그의 예는 가깝고 먼 것을 정하고, 믿고 못믿음을 결정하고, 같고 다름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밝히는 기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조반정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의 학령서원(學翎書院), 통천의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황해도관찰사 월(越)의 아들이고, 남명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 동강 김우옹(金宇顒)과는 동서 사이이다.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려서 발표한 지 수일 만에 전방(全榜)을 파하여 무효가 되었다.
그뒤, 과거에 나아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 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서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해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시작으로 바로 형조정랑에 제수되었고,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하여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고,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하였으나, 그 역(役)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아가지 아니하였고, 그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 남쪽 창암진(滄巖津: 솥바위나루)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었고,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하였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虎賁衛)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大護軍) 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바로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듬해 졸하였다.
그는 의병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그의 작전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을 구사하여 위장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하거나, 유인하여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수십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천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하였고, 그들의 진로를 차단하여 왜군이 계획한 호남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척을 기습하여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여 물리치고,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싸움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하여 적의 접근을 막기도 하였다.
그는 또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묘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다. 사후 그의 사우(祠宇)에‘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이씨(京山李 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딸이다.
경상북도 인동에서 성장하였다.
18세때〈우주요괄첩 宇宙要括帖〉을 지어 대유(大儒)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침식을 잊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23세 때인 1576년(선조 9) 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란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유명한 〈평설 平說〉을 지었다.
다음해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씩 사직을 청하였고 이듬해 2월 또 세 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가다가 바로 방면되었다.
1598년 봄 봉화 도심촌에서 서애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 수암 유진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다음해 선산 월파촌으로 돌아옴)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郞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郞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해 11월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주역》 교정에 참가하였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곧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몇 달 만에 돌아갔다.
읍민이 세운 가사비에 이르기를
맑은 것은 얼음 만 한 것이 없고,
깨끗하기로는 옥 만 한 것이 없으니
아! 선생께서는
얼음과 같이 맑으시며, 구슬과 같이 깨끗 하시 도다.
則曰, 莫淸者氷, 莫潔者玉, 於乎先生 氷淸玉潔,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55세 때 〈주역도설 周易圖說〉을 지었고, 68세 때 〈경위설 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다가 다음해 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하여 왕을 알현하였고, 곧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어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하여 사은하였고 계속하여 사헌부대사헌·부호군에,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다시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 공조판사. 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졸하였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선생은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였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하였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 있어서는
퇴계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았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는데, 그의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하여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 파악하였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는 또 사단(四端)이 칠정(七情)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하여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문설(文說)」에서는 글이 육경을 중심으로 한 古文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고 「노인사업(老人事業)」 등에서는 노인은 기력이 소모되었으므로 시청·언동·동작·좌와(坐臥)에 있어서 조심할 것 등 노인이 평소 가져야 할 점을 설명하였다. 「서원설(書院說)」은 서원의 의의와 연혁 그리고 향제 등 그 소임을 밝힌 것, 「여헌설(旅軒說)」은 자호의 뜻과 풀이,「피대설(皮代 巾說)」은 어릴때 삼재(三才)의 이치와 우주인물 등의 제목을 적은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피대(皮代 巾)로 만들어 지니고 다닌 사실, 「동진설(同塵說)」에서는 은사의 행동거지 따위를 설명하였다. 「문무일체론(文武一體論)」은 천하의 도에 반드시 경위와 표리가 있듯이 문무도 그와 같은 것으로 문(文)이 경(經)·리(裏), 무(武)가 위(緯)·표(表)가 되어 일체라고 강조, 그 둘을 동일시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무를 경시하던 당시의 풍조에서 볼때 주목되는 주장이다.
저서로는 《여헌집》 11권, 《속집》 5권, 《성리설 性理說》 6권, 《역학도설 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 龍蛇日記》 2권 등이 있다.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湯介)의 반란을 평정할 때 공을 세우고, 무과에 급제하여 1591년 천성만호(天城萬戶)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성도(天城島)가 고도(孤島)이므로 김해성(金海城)으로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적의 포위망을 돌파, 합천군수 이숙(李潚), 박진영(朴震英) 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 곽재우군(郭再祐軍)과 합류하여 활약하기도 하였다. 공위겸(孔撝謙)이 적에게 항복하여 영산에 웅거, 경상도관찰사를 자처하며 위세를 떨치자 단신으로 그의 진영에 잠입, 계략을 써서 사로잡았다.
1592년 7월의 영산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곽재우의 천거로 현풍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 백성을 안집하여 목민관으로도 영남에 명성을 떨쳤다. 정유재란 때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곽재우군에 합류하여 화왕산성전투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활약하였다. 난이 끝난 후 보성군수을 역임하였다.
죽은 뒤 병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창녕의 문암정(聞巖亭), 영산의 도천서원(道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아, 이곳은 나의 부친이신 입암부군(立巖府君)의 묘이다. 우리 조씨(趙氏)는 함안(咸安)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 원윤(元尹)을 지낸 휘 단석(丹碩)의 후예이다. 10세조는 삼사 정당(三司政堂)을 지낸 휘 열(烈)이며, 6세조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휘 열(悅)이다. 고조 휘 여(旅)는 진사로서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어계처사(漁溪處士)이다. 증조 휘 동호(銅虎)는 군수를 지냈고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연(淵)은 경력(經歷)을 지냈고 참의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정언(庭彥)은 부사직을 지냈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성산 이씨(星山李氏)는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정무공(靖武公) 휘 이호성(李好誠)의 증손녀이자, 서령(署令)을 지낸 휘 이의인(李依仁)의 손녀이며 만호를 지낸 휘 이희조(李希祖)의 딸이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 6월 23일 신유일에 검암리(劍巖里) 집에서 부군을 낳으니, 이름은 식(埴)이고 자는 극성(克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아름답고 용모가 범인들과 달랐다. 참되고 순박하며 온화하고 순수한 기운이 얼굴에 드러났다. 마음속은 평이하고 정직하여 스스로 교만하거나 거짓됨이 없었으며, 담박하여 욕심이 적었고, 침묵하여 말이 적었다. 집에 거처하여 부모를 섬길 적에는 환심(歡心)을 깊이 얻었다. 조부께서는 성품이 엄하여 아랫사람이나 아이를 대할 때도 말이나 얼굴빛을 꾸미는 일이 드물었는데, 부군께서 가장 인정을 받았다. 무릇 일이 있으면 부군을 반드시 불렀는데, 부군께서는 기색을 가라앉히고 낯빛을 부드럽게 하여 자식으로서의 예를 다하자 조부께서 어질다고 여기며 사랑하였다. 매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들은 이미 대인의 예의(禮儀)와 법도를 갖추었다.”라고 하였다.
9세에 비로소 배움에 나아가 《중용》ㆍ《소학》 등의 책을 배웠는데 이미 큰 뜻을 깨달았다. 장성해서는 전념하여 《논어》ㆍ《맹자》를 공부하였고 뭇 서적도 널리 통달하였으며, 글씨는 필획이 단정하고 묘하였다. 임신년(1572, 선조5)에 부인 문씨(文氏)의 상을 당하였다. 신사년(1581, 선조14)에 부친상을 당하여 백 일 동안 죽을 마셔 목만 축이니, 얼굴이 마른 나무처럼 되었으나 일찍이 지치고 병들었다고 하여 예를 폐하지 않았다. 장례를 지내고서는 무덤 아래 여막을 짓고 형제들과 함께 번갈아 가며 지켰는데, 잠시라도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푼 적이 없었으며, 한 번도 집에 발걸음을 한 적이 없었다. 외제(外除)하는 초에는 남은 슬픔이 더욱 간절하여 다시는 편히 잠들지 못하였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종신토록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여 일찍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병술년(1586, 선조19)에 모친상을 당하자 애모(哀慕)하며 상례를 신중히 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부친상 때와 같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당시 군수로 계셨는데, 그 소문을 듣고 가상히 여기면서 감탄하였다.
이때부터 다시는 세상일에 마음을 두지 않은 채, 시냇가에 별장을 짓고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심는 것을 늘그막의 계획으로 삼았다. 부군은 친족에게는 후하고 벗에게는 신의 있으며, 베풀어 주는 것을 좋아하고 승낙하는 일은 신중하였다. 몸가짐은 엄격하고 굳세었으며, 남을 대할 때는 온화하고 너그러워 한결같이 진솔하여 꾸밈이 없었다. 외조모 황씨의 상을 당하여 부군이 정분과 예의를 다하자 외조부께서 그 정성과 부지런함에 감동하여 노비를 주려고 하였는데, 사양하여 말하기를 “장모님의 상례에 사위가 살펴보는 것은 사람의 작은 예절인데 어찌 상을 주려 하십니까.”라고 하면서 끝내 받지 않았다.
임진ㆍ계사년 난리에 떠돌아다니며 곤궁하고 고달프게 산 것이 거의 10년이 되었으나 그 마음은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스스로 지키는 것이 있어서 궁색한 중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기해년(1599, 선조32) 집으로 돌아올 적에 승지(承旨) 김반천(金槃泉) 공이 시를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내가 조노인을 사랑하는 것은 / 我愛趙老子
도량 넓은 장자의 풍모 지녀서라네 / 休休長者風
이별하며 모범됨을 생각하니 / 別來思表範
내 마음속에서 잊지를 못하겠네 / 耿耿此心中
계묘년(1603, 선조36)에 부군께서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와 시냇가에 집을 짓고서 산수 속에서 물고기를 잡고 나무하는 즐거움을 다시 누리기를 바랐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이때가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40) 2월 28일 신유일이다. 향년 59세였다. 아, 슬프도다! 부군은 일찍이 ‘휴휴자(休休子)’라고 자호하였으며, 혹은 ‘입암거사(立巖居士)’라고 칭하였다.
고아인 저는 선인의 은덕(隱德)을 차마 민멸되게 할 수 없어 〈추모록〉을 짓고, 또 시가(詩歌) 약간 편을 모아 장인인 세마공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그 대략을 드러내었다. 아, 그것으로 어찌 능히 은덕을 만분의 일이라도 그려낼 수 있겠는가!
부군께서는 처음 남평 문씨(南平文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참봉 문형(文炯)의 딸이다. 3년이 채 안되어 돌아가셨다. 후배(後配) 문성 유씨(文城柳氏)는 문성군(文城君) 유수(柳洙)의 6세손이다. 증조는 진사 유사종(柳思宗)이고, 조부는 부호군 유항(柳沆)이며, 부친은 병절교위(秉節校尉) 유상린(柳祥麟)이다. 4남 1녀를 낳으셨는데 모두 불행히 일찍 죽고, 나와 누이동생만이 죽음을 면하였다. 이해 늦겨울 용화산(龍華山) 서쪽 기슭 언덕에 진좌 태향(震坐兌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나는 두 번 장가들었지만 아들이 없어서 종형인 면도(勉道)의 둘째 아들 함변(咸抃)을 후사로 삼았는데, 3남 4녀를 낳았다. 누이동생은 이이단(李而檀)에게 시집갔는데, 군수 이숙(李潚)의 아들이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혼(李焜)과 이현(李炫)이다. 장녀는 김확(金確)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성원필(成元弼)에게 시집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황고께서는 / 嗚呼皇考 자질이 진중하고 아름다웠네 / 質重資美 본심을 잃지 않으셨으니 / 不失本心 적자의 마음 지닌 대인이셨네 / 大人赤子 색양으로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 色養怡愉 자리를 깔아 옥을 받들 듯이 하였네 / 藻籍承玉 애경하는 마음으로 신중히 장례를 치르고 / 愼終愛敬 돌아가신 부모 생각하는 정이 돈독했네 / 風樹情篤 타고난 자질이 본디 좋으시니 / 天姿自好 어찌 수양을 해서 그러하겠는가 / 豈假修爲 고요하게 지내고 욕심 적어 / 恬靜寡欲 눈썹 찡그릴 일 하지 않았네 / 不作皺眉 집안에 계실 때는 담담하였고 / 居家淡淡 고을에 나가서는 공손하였네 / 處鄕恂恂 말과 행동 그리고 기상은 / 云爲氣象 온전히 하늘에서 받은 성품이었네 / 渾然天眞 평소 수양한 것은 / 平生所養 충신한 것과 근후한 것이었네 / 忠信謹厚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젖어듦이 / 目擊心醉 마치 맛난 술을 마신 듯하였네 / 若飮醇酎 선행은 반드시 보답을 받으니 / 善必受報 천록을 누리기에 마땅하였네 / 宜享天祿 좋은 옥이 팔리지 않으면 / 玉不見沽 이를 감내하고 상자에 감출 일 / 甘此韞匵 산과 계곡에 인연이 있었고 / 溪山有緣 높은 관직에는 연분이 없었네 / 軒冕無分 얻지 못했다고 무엇을 원망하며 / 不得何怨 알아주지 않는다고 어찌 성내리오 / 不知何慍 마음속에는 득실을 잊고서 / 忘懷得失 나무 하고 낚시하는 데 흥을 붙였네 / 寄興樵漁 꽃을 가꾸고 대나무를 심고서 / 栽花種竹 거문고를 연주하고 책도 보았네 / 撫琴觀書 마음속 생각이 만족스러워 / 胸襟皥皥 꿈에서 태평성대 보곤 했네 / 夢裏羲皇 유유자적 한가롭게 노닐면서 / 優哉游哉 세상일을 잊고 사셨네 / 與世相忘 임진년과 계사년의 난리에 / 龍蛇亂離 집안과 나라가 결딴났었네 / 家國板蕩 기아와 흉년이 거듭 닥쳐서 / 饑荒荐臻 염치의 도리가 없어져 버렸네 / 廉恥道喪 항산 없이 항심을 갖는 것은 / 無恒有恒 선비에게도 거의 드문 것이었네 / 士亦幾希 곧은 지조로 태연자약하여 / 貞操自若 얇아지지도 검어지지도 않았네 / 不磷不緇 곤경에 처해서도 안정을 유지해 / 處困居安 한결같이 편안하고 여유로웠네 / 一味休休 식자들이 칭찬하며 흠모하여 / 識者欽賞 찬양하는 노래가 넉넉하였네 / 讚詠優優 돌은 단단하고 옥은 매끄러우며 / 石頑玉潤 까마귀는 검고 백로는 희네 / 烏黔鷺白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본바탕 / 天成素質 어찌 변하고 바뀌는 일 있으리오 / 寧有變易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 晩旋菟裘 다시 살 곳의 터를 잡았네 / 重占亭臺 냇가에 임해 베개에 기대니 / 臨溪欹枕 만 가지 생각이 다 사라졌네 / 萬念俱灰 내가 그 가르침 받들었는데 / 孤承敎誨 날마다 시례에 대해 들었네 / 日聞詩禮 은혜로 말하면 부자간이고 / 恩爲父子 의리로 생각하면 사제였다네 / 義則師弟 당호를 일신으로 지은 것은 / 名堂日新 나를 선으로써 인도하려 함이네 / 誘我式穀 오래도록 사셔서 / 庶幾遐齡 길이 청복 누리길 바랐네 / 永享淸福 하늘이 어찌 수명에는 인색하여 / 天胡嗇壽 나에게 슬픔을 머금게 하는가 / 使我銜卹 저는 불초하기 이를 데 없으니 / 孤也不肖 감히 그 뜻을 이어받겠는가 / 敢望繼述 이에 감춰진 빛 드러내어 / 肆闡幽光 돌에 적어서 새기지만 / 刻著于石 글은 그 뜻을 다하지 못하고 / 文不盡志 말은 그 덕에 걸맞지 못하네 / 言不稱德 〈육아〉의 한 구절이 여기 있으니 / 蓼莪有句 하늘은 넓고 커서 끝이 없다네 / 昊天罔極
1576년 (선조 9) 무과에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었다. 중형(仲兄) 서촌공(叙村公) 정(瀞)과 더불어 성리학을 강마하고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이 본군(本郡)에 부임하여 생도를 모으므로 선생도 거기에서 배웠다.
1591년(선조 24)에 제포만호(薺浦萬戶)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병기를 수리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으로 列郡이 파궤(破潰)됨에 주장인 김해(金海) 부사가 도망하고 없는지라 그 곳에서 죽기보다는 의병을 모아 보국(報國)함이 좋겠다고 여겨 창의(倡義)하였다. 그때 감사(監司) 김수(金睟)는 겁을 내어 출전을 기피하였으므로 곽망우(郭忘憂) 장군(將軍)이 그의 죄를 성토하려는데 감사는 망우장군을 토적이라 무고하려는 즈음이었다. 이에 공이 방백과 곽장군에게 강화(講和)를 시키고 초유사(招諭使) 김학봉(金鶴峯) 선생(先生)의 막하에 있으면서 방략(方略)을 협찬하였다. 난이 끝난 뒤 사퇴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합천군수(陜川郡守) 재임시에는 정인홍(鄭仁弘) 가족이 세력을 믿고 세금을 포탈하거늘 공이 조금도 가차없이 옥에 가두고 매질하여 모조리 징수하기도 하였다. 정한강(鄭寒岡), 장여헌(張旅軒), 곽망우당(郭忘憂堂) 제현과 함께 교유가 두터웠으며, 졸후(卒後)에 도계사(道溪祠)에 이양졸 복휴(李養拙 休復), 박광서 진영(朴匡西 震英), 조도곡 익도(趙道谷 益道)와 함께 병향(幷享)되었다
1591년(선조 24)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안의(成安義)·곽찬(郭趲)·조열(曺悅) 등과 함께 창의하고는 초유사 학봉 김성일이 영산(靈山)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성천희(成天禧) 등과 함께 그해 8월 창녕전투에 참가하여 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형 방주(邦柱)와 동생 방로(邦櫓)도 의병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 창녕 사람 생원 신방즙(辛邦楫)ㆍ충의(忠義) 성천희(成天禧)ㆍ정자(正字) 성안의(成安義)ㆍ유학 곽찬(郭趲)ㆍ보인(保人) 조열(曺悅) 등이 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다. 천희 등이 군사 십여 명을 거느리고, 창녕의 적군을 포위하고 종일토록 교전하여 본읍의 군수라고 자칭하는 적을 쏘아 맞추자 3일 만에 적군이 성책을 불 지르고 도망갔다. * 연려실기술에서,
한강 에게서 수학하였다. 학행이 높아 영남지방의 명유로 추앙을 받았다. 광해군 때 벽오(碧梧)이시발(李時發),·동강(東岡)김우옹(金宇顒)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그해 가을 강화도에 왕을 호종(扈從)하였고, 그 공으로 서울로 돌아와 음성현감을 지냈다. 한강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외우라 하고 호를 불렀다.
여헌 선생, 박대암, 곽존재, 서낙재, 곽망우당, 이석담과 도의 지교를 맺었다.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영산의 덕봉서원(德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외재집》이 있다.
외재(畏齋) 선생 이공(李公) 행장 -갈암 이현일 찬
선생의 휘는 후경(厚慶)이고 자는 여무(汝懋)이며,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그 시조(始祖)는 총언(忩言)으로, 신라 말에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는데, 혁혁하게 공훈을 세워 《고려사(高麗史)》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부터 대대로 위인(偉人)이 나서 여러 대에 걸쳐 높은 벼슬을 지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휘 약동(約東)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평정공(平靖公)이다. 문장(文章)과 행의(行義)가 일세(一世)를 압도하였는데, 이분이 선생에게 고왕부(高王父)가 된다. 증조(曾祖)의 휘는 승원(承元)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며, 비(妣)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이다. 조(祖)의 휘는 유온(有溫)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행 이천 부사(行利川府使)를 지냈으며, 비는 숙부인(淑夫人) 유씨(柳氏)이다. 고(考)의 휘는 엄(儼)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비 박씨(朴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선생이 원종(原從)의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증직된 것이다.
선생은 지성(至性)을 타고나서 어려서부터 영오(穎悟)하였다. 나이 9세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는데, 집상(執喪)하는 것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부형(父兄)이 어린 나이에 상(喪)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여 고기를 먹도록 권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문득 눈물을 흘리며 먹지 않고 삼년상을 마쳤다. 상을 마치고 나자 스승을 좇아서 수업하였는데, 날로 개발되고 달로 진보되어 우뚝이 조기(早期)에 성취하였다. 예곡(禮谷) 선생 곽공 율(郭公𧺝)이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그 따님을 배필로 주었다. 선생이 관례(冠禮)를 마치고 성인이 된 뒤 그 형의 아들 도자(道孜)에게 이르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과거 공부만을 일삼고 다시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매우 수치스런 일이 아니겠느냐. 내가 듣기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정 선생(鄭先生)이 지금 도산(陶山 이황(李滉))의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강명(講明)하고 있다고 하니, 가서 가르침을 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참판공(參判公)에게 아뢰어 서로 행장(行裝)을 꾸리고 가서 종유(從遊)하면서 《대학(大學)》, 《중용(中庸)》,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배웠다. 물러나서도 강론(講論)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정 선생이 그 독실한 뜻을 가상히 여겨 크게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편지를 왕복하기도 하면서 의심난 것을 묻거나 자세한 가르침을 청하는 데 있어서 행여 때를 놓칠까 염려하였다.
만력(萬曆) 임진년에 일본의 군대가 쳐들어 오자 선생이 참판공을 모시고 거창(居昌)의 삼가현(三嘉縣) 경내로 피난하였다. 당시에 적병(賊兵)이 승기(乘機)를 잡고 밀려들어 기세가 풍화(風火)와 같았으므로 나라 안이 온통 쑥대밭이 되었는데, 동남쪽이 특히 심하였다. 마침 정 선생이 당시에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맡고 있었으므로 선생은 즉시 참판공을 모시고 가서 의탁하였다. 비록 난리로 파탄이 난 즈음이었지만 봉양하고 조섭하는 것을 극도로 정성스럽고 공경스럽게 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여 더러 쌀과 고기를 보내어 조석(朝夕)으로 봉양하는 데 보태게 하기도 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28)에 난리가 조금 진정되자 참판공을 모시고 영산(靈山)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적병이 아직도 부산(釜山)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영남이 명나라 군대가 왕래하는 요충지가 되었으므로 백성들은 안도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또 현풍(玄風)의 가태산(嘉泰山) 아래로 옮겼는데, 참판공이 심한 설사로 위독하였다. 선생은 똥을 맛보고서 점점 더 위독해지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침식(寢食)을 잊고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참판공은 끝내 병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별세하니, 이때가 정유년(1597) 4월이었다. 가을에 난리가 다시 치열해지자 남쪽 지방의 사람들이 두려워 요동하니, 선생이 마침내 선공(先公)을 우선 포산(苞山)의 경내에 임시로 장사 지내고 궤연(几筵)을 받들고 또 강릉(江陵)으로 피난하였다. 왜구의 난리 끝에 기근까지 겹치니, 백성들은 편안히 생활을 하지 못하여 열에 아홉 집은 비어 버렸다. 선생은 일가친척이 살아남지 못할까 염려하여 노비를 팔고 우마(牛馬)를 저당 잡힌 뒤 식구 수를 헤아려 지급해 주어 굶어 죽는 괴로움이 없도록 하였다. 비록 피난길의 곤경 속에서도 제전(祭奠)을 받드는 것과 거처(居處)하는 범절(凡節)은 한결같이 예(禮)에 맞게 하고 구차하게 하지 않았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일본 군대가 철수하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다. 6월에 상을 마치고 현(縣)의 서쪽 냉정산(冷亭山) 아래로 이거(移居)하면서, 그 당(堂)을 외재(畏齋)라고 이름하였다. 이때부터 과거 공부에 뜻을 끊고 성현의 글에 잠심(潛心)하면서 오로지 위기지학에 힘을 쏟았다. 이공 시발(李公時發)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그 행의(行義)를 조정에 천거하였고,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김 선생(金先生)이 이조 참판이 되었을 때에도 선생을 추천하였으므로, 전후로 제수하는 명이 거듭해서 이르렀으나 선생은 광해군(光海君)의 어지러운 정사를 보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경신년(1620, 광해군12)에 한강 선생이 사수(泗水) 가에서 졸(卒)하자 선생은 마치 아버지를 잃은 듯하였는데, 해당하는 복제가 없었으므로 심상(心喪) 3년을 살았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자 선생은 유일(遺逸)로서 제일 먼저 천거되어 창락 우승(昌樂郵丞)에 발탁, 제수되었다. 임소(任所)에 이르러서는 손을 씻고 직무를 받들었으며 우중(郵中)의 이해를 철저히 검토하여 혁파(革罷)함으로써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고(故) 재상 이공 경여(李公敬輿)가 암행 어사로서 탐문할 적에 선생의 치적을 올리기를, “몸가짐이 청렴하고 검소하며 직무를 신중하게 수행한다.” 하니, 상이 특별히 품계를 올려 줄 것을 명하고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에 조용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5)에 북쪽 오랑캐들이 침략해 오자 대가(大駕)가 강도(江都)로 행행(幸行)하게 되었는데 선생은 본직의 자격으로 어가(御駕)를 따랐다. 4월에 오랑캐들이 물러가자 어가를 호종(扈從)하고 환도(還都)하였다. 가을에 주부(主簿)로 승진하고 10월에 음성 현감(陰城縣監)으로 나갔다. 매달 초하루에 망궐례(望闕禮)를 행한 뒤 곧바로 향교(鄕校)로 나아가 분향(焚香)하고 알성(謁聖)하였다. 그리고 제생(諸生)들을 인도하여 경의(經義)를 강설(講說)하면서 이르기를, “학문하는 것은 반드시 몸소 실천하는 것에 근본을 두어야 하며, 장구(章句)나 외우는 데에 있지 않다.” 하면서 지성(至誠)으로 학자들을 위해서 말해 주었다. 사직(社稷), 성황(城隍) 등의 제사에 대해서도 반드시 몸소 행하고 연로하다고 해서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고통을 부지런히 구휼하기를 마치 자신이 고통을 겪는 것처럼 하였고, 해악을 제거하고 이익을 진흥시키면서 오직 미치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몸가짐이 청렴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부지런하여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은혜롭게 여기니, 온 고을이 평안하게 되었다. 현을 다스린 지 3년째 되던 해에 마침 괴산(槐山)의 수령이 살인을 하여 심문을 받게 되었다. 선생은 사격(使檄)을 받들고 옥정(獄情)을 살폈는데, 당로자(當路者)의 뜻을 거슬러 파면되어 돌아왔다.
경오년(1630, 인조8) 1월 갑신일에 집에서 별세하니, 춘추 73세였다. 이해 2월 경오일에 덕암산(德巖山)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원근에서 장사에 모인 이가 200여 인이나 되었다. 일찍이 원종(原從)의 공로가 있다고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두 번 장가를 들었는데, 전부인(前夫人) 곽씨(郭氏)는 바로 예곡 선생의 따님이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도보(道輔)는 생원(生員)으로 능서랑(陵署郞)을 지냈고, 딸은 사인(士人) 안성한(安盛漢)의 처가 되었다. 후부인(後夫人) 김씨(金氏)는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영성(永成)의 따님으로 2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도형(道亨), 도희(道熙)로 모두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삼았다. 장녀는 현감(縣監) 최동언(崔東彦)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사인 이현배(李玄培)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사인 곽유창(郭愈昌)에게 시집갔다. 능서군(陵署君)은 6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수(洙), 부(溥), 전(瀍), 렴(濂), 순(洵), 영(泳)이고, 딸은 사인 허빈(許瀕), 검열 강교년(康喬年)에게 시집갔다. 도형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면(沔)이고, 딸은 사인 강흠(姜欽)에게 시집갔다. 도희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식(湜), 익(瀷)이고, 딸은 사인 곽두응(郭斗應)에게 시집갔다. 안성한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인 성하민(成夏敏)의 처가 되었다. 최동언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국구(國耈)이다. 이현배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문규(文奎), 동규(東奎), 대규(大奎)이고, 딸은 모두 시집가서 사인의 처가 되었다. 곽유창은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선생은 천품(天稟)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길 때는 잠자리를 살피는 것과 맛난 음식을 봉양하는 것을 매우 신중히 하고 정성스럽게 하면서 조금도 허물이 없었다. 날마다 백형(伯兄), 중형(仲兄) 및 여러 조카들과 더불어 출입하여 즐겁게 모시고 화락(和樂)하게 지내면서 일이 있지 않으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상례 때는 슬퍼함이 극진하였고, 제사 때에는 반드시 7일 동안 산재(散齋)하고 3일 동안 치재(致齋)하였으며,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친히 점검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기제(忌祭)의 경우에는 비록 제사를 마치더라도 하루 종일 슬퍼하였다. 내실(內室)의 사람들과 여종들은 감히 바깥일에 대해 상관하지 못하였으며, 동기(同氣)들을 대할 때는 사랑과 공경으로 친목을 돈독하게 하였으니, 지성(至誠)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호읍(湖邑)에 있을 때는 백씨(伯氏) 덕암공(德巖公)의 연세가 이미 높았으므로 매번 좋은 음식을 얻을 때면 반드시 인편(人便)을 통해 보냈으며 미처 부치지 못했을 때는 먼저 입에 댄 적이 없었다. 백씨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걸음을 재촉하여 노정을 배로 하여 달려갔으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자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거창(居昌)에서 피난할 때는 중형(仲兄)이 전염병에 걸려 죽었는데, 부형(父兄)과 종족(宗族)들은 모두 선생이 직접 들어가 상을 치르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앞서서 곧바로 들어가 시신을 어루만지며 크게 통곡하였다. 그리고 염(殮)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나왔는데 끝내 무사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겨 유곤(庾袞)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반장(反葬)할 때가 되어서는 홀로된 형수와 어린 조카들이 그것을 주관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선생이 힘을 다해 주선하여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을 갖추어 장사 지냈다. 행상(行喪)하고 성분(成墳)하는 동안 곡읍(哭泣)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으니, 거창의 인사(人士)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중형이 죽고 오직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나이가 아직 10살이 안 되었으므로 돌보고 생각해 주는 것이 자기 자식과 다를 것이 없었다. 가르침을 받아 성취하여 사우 간(師友間)에 추중(推重)을 받게 되었으나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으니, 선생은 애통해하여 마지않았다. 다행히 아들 하나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 태어났는데, 선생은 병이 깊어지자 여러 자식들을 돌아보며 종 한 사람을 보내어 그 집안의 일을 도와주게 하였다. 두 누이가 시집을 가서 죽었는데, 모두 후사(後嗣)가 없었다. 선생은 힘을 다해 주선하여 혹은 후사를 세워 주기도 하고 혹은 임시로 봉사(奉祀)하게 하였다. 종모(從母) 박씨(朴氏)도 자식 없이 죽었는데, 선생은 어려서 길러 준 은혜를 입었으므로 가운데 아들을 시켜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늘 말하기를, “친척이 일반 사람과 다른 까닭은 은의(恩義)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일에 축하하지 않고 슬픈 일에 조문하지 않는다면 길 가는 행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길흉(吉凶) 대사(大事)에는 반드시 먼저 임문(臨問)하였으며, 친척과 자제들에게 명하여 각각 미포(米布)를 내어 그 경비를 돕게 하였다. 형의 아들 도자(道孜)와는 뜻이 같고 도가 부합되었으므로 매사에 반드시 자문한 뒤에 행하였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나와 네가 이름은 비록 숙질(叔姪)이지만 실로 나의 외우(畏友)이다.” 하였다. 이에 당시 동문(同門)의 선비들이 모두 ‘사문(師門)의 두 이씨(李氏)’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선생이 정 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한 지 40년이 넘어 그 은의(恩義)가 마치 부자(父子)와 같았는데, 질문하고 강토(講討)하는 유익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훈도(薰陶)되고 감화되는 데서 얻는 것이 많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부호의 집안에서 생장하여 수레와 여색만이 이목(耳目)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인 줄 알았는데, 정 선생을 뵙고 나서부터는 곧 스스로 부화(浮華)한 것을 버리고 점차 청렴하고 검소한 곳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만약 선생께서 가르치고 인도해 준 힘이 아니었다면 거의 소인(小人)이 됨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 우러르고 흠모하는 정성이 이러하였다. 선생은 성품이 또한 강직하여 비록 스승의 언행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의혹되는 바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곧 바른말을 하고 숨기지 않았다. 이에 정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우 간(師友間)에는 마땅히 서로 절차탁마하는 것을 의리로 삼아야 하니, 그대는 나의 외우이다.” 하고는, 마침내 ‘외(畏)’ 자로 그 서재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선생은 사문(師門)에 집지(執贄)하여 군자의 도의(道義)의 풍(風)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그 외구(外舅) 곽공(郭公)이 먼저 인도해 준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매번 곽씨의 문하에 나아갈 때는 몸을 굽혀 공경을 다하기를 한결같이 한강 선생을 섬기는 예와 같이 하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장공(張公), 대암(大庵 박성(朴惺)) 박공(朴公), 존재(存齋 곽준(郭䞭)) 곽공(郭公),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서공(徐公),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곽공(郭公),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이공(李公)과 함께 같은 시대에 나서 서로 도의(道義)로써 사귀었다. 그중에서도 서로 계속해서 왕래하여 정이 형제와 같기로는 대암, 존재, 망우당 등 몇 분이 제일이었다고 한다.
평상시 거처할 때는 반드시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여 단정하게 앉았으며, 출입하거나 서고 멈출 때의 동작도 모두 예법(禮法)에 맞았다. 늘 세상의 학자들이 그저 과거 공부만을 일삼고 실행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마침내 이르기를, “고인(古人)의 글을 읽는 까닭은 장차 일을 행할 때에 쓰기 위해서이다. 만약 그저 문장을 꾸미는 데에나 사용한다면 어찌 이른바 위기지학이 될 수가 있겠는가. 성현의 가르침이 방책(方冊) 속에 펼쳐져 있으니, 만약 그를 본받고 사모한다면 비록 모두 성현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길인(吉人), 선사(善士)는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자제들로 하여금 먼저 쇄소(灑掃)하고 응대(應對)하는 절차부터 익히게 하고, 다음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학문에 나아가게 하는 등, 차근차근 순서가 있었다. 또 삭망(朔望) 때마다 향인(鄕人)의 자제들을 모아놓고 경서(經書)와 《소학》 등의 글을 강론하였는데, 그 재능이나 성실함에 맞추어 적절하게 하였다. 수업을 할 때마다 성현의 말씀 중에서 요긴하고 절실한 부분은 반드시 반복해서 가르쳐 궁행(躬行),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성품은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창락(昌樂), 음성(陰城) 등에서 벼슬살이할 적에는 소백산(小白山)과 구담(龜潭)의 경치를 두루 찾아보았으며, 어떤 때는 하루가 다 가도록 머무르기도 하였으니, 그 흉금(胸襟)의 본취(本趣)가 또한 이러하였다. 선생은 고가(故家)의 세족(世族)으로 자산(資産)이 매우 넉넉하였으나 병란을 겪고 난 뒤로는 완전히 탕진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양식이 자주 떨어지고 몸을 가릴 만한 옷이 없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편안하게 처하였다. 그 속에 보존되고 있는 것은 담박하고 깨끗하며, 밖으로 드러난 것은 근엄하고 장중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달관(達官), 대인(大人)이라도 선생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공경을 표하였으며, 비록 법도에 벗어나게 행동하는 사람도 모두 몸을 추스르고 숨을 죽인 채 감히 사납게 굴지 못하였다. 이는 아마도 이른바 “그 용모를 바라보기만 하여도 백성들은 감히 쉽게 대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선생은 강명(剛明)하고 정직한 자품(資稟)과 독실하고 성실한 행실로 어진 스승에게 의귀하여 갈고 닦아 성취하여 행의(行義)가 널리 드러났으니, 참으로 뜻을 돈독히 하여 힘써 행한 청수(淸修)한 군자라고 할 것이다. 다만 그 벼슬이 그 덕에 걸맞지 못하여 겨우 일개 우승(郵丞)에 임용되어 조그만 고을에 그쳤으니,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쓰이고 쓰이지 못함은 하늘의 뜻이며, 얻고 얻지 못함은 운명이니,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전인(前人)들의 학문을 강명(講明)하고 후진(後進)을 인도하여, 인심(人心)을 맑게 하고 풍속(風俗)을 후하게 하며 선철(先哲)을 잇고 후세(後世)를 다행스럽게 하는 일은 실로 도(道)와 덕(德)을 품고 있으면서 당세(當世)에 쓰이지 못한 자들의 몫인 것이다. 그러니 하늘이 선생을 내신 것은 참으로 우연이 아닌 것이다.
현일은 늦게 태어나 선생께서 도를 강하고 가르침을 펴던 날에 경서(經書)를 들고 의문 나는 것을 여쭈면서 제생(諸生)들의 말석에도 앉아 있지 못하였다. 이제 유배되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선생께서 머무르던 고을에 가까이 오게 되니, 우러러 흠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하루는 선생의 손자 익(瀷)이 그 외형(外兄) 이군 동규(李君東奎)와 함께 선생의 행실기(行實記) 한 통을 안고 와서 보여 주면서 한목소리로 이르기를, “선조(先祖)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이제 71년이 되어 갑니다. 집안에 유고(有故)가 많다 보니 진작에 당세(當世)의 글 잘하는 군자(君子)를 통해 의덕(懿德)을 드러내고 유광(幽光)을 천양(闡揚)하지 못하였습니다. 근래에 삼가 이런 뜻으로 고(故) 재상 허 문정공(許文正公)에게 청하였었는데, 마침 시론(時論)이 대변하고 허공(許公)도 곧 하세(下世)하셨으므로 마침내 없던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세대가 더욱 내려왔는데 아직 글을 부탁할 곳이 없으니, 불효하여 유명(幽明)께 죄를 얻을까 너무도 두렵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 조부의 행장을 엮을 수 있는 사람이 집사(執事) 말고 누구이겠습니까. 이에 감히 재배하고 청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현일은 죄인의 몸이라 그 말이 당세에 중하게 여겨지지 못한다고 하여 사양하였으나, 두 사람은 번갈아 왕래하면서 요청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현일은 이미 두 사람의 간절한 정성에 감동한 데다 또 평소에 흠모하던 의리를 생각하여, 그 가첩(家牒)을 근거로 약간 필삭(筆削)을 가하여 위와 같이 엮는 바이다. 삼가 행장을 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군수 유숭인(柳崇仁)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쳤다.
1599년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된 뒤 10여년간 천거하는 자가 없어 제부(諸府)의 판관에 머무르다가 1613년(광해군 5) 경흥도호부사가 되어 변방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워 절충장군으로 승진, 1619년 순천군수를 지내면서 우영장을 겸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해서도방어사로 도원수 장만(張晚)의 휘하에서 별장으로 종군하였다. 이괄이 이 소식을 듣고 원수부의 여러 장수 중에 오직 남이흥(南以興)·박진영· 유효걸(柳孝傑)뿐이라고 하여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신경원(辛景瑗)과 힘을 합하여 동교(東郊)에서 이괄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공을 세웠으나 공신에 녹훈되지는 못하였다.
뒤에 평산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가 되어 해서방어사를 겸임하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박 평산(朴平山) 묘갈 -미수 허목 찬
공의 휘는 진영(震英), 자는 실재(實哉), 성은 박씨(朴氏)이다. 그 선대는 본관이 밀양(密陽)이었는데, 후대에 경상우도 함안(咸安)으로 옮기고는 마침내 관향으로 정했다. 증조부는 유(榴)로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지냈으며, 공희(恭僖 중종) 때에 연로하다 하여 종2품의 자급(資級)을 받았다. 조부는 종수(宗秀)로 증(贈)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다. 아버지는 오(旿)로 증 형조 판서이고 어머니 이씨는 증 정부인(貞夫人)인데,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증 병조 참판 이경성(李景成)의 따님이다.
공은 재주와 식견이 남보다 뛰어났고 호걸스럽고 기개도 있어서 잗달게 공명을 추구하려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군수 류숭인(柳崇仁)과 의병을 모아 적을 쳤는데, 이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공을 불러 진영에 머물러 있게 하려고 하자, 공이 사양하기를 “이미 다른 사람과 생사를 같이하자고 약속하였으니, 신의를 저버리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곽공은 속으로 공을 어질게 여겨 더는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마침 큰 난리를 만나 강개한 심정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나이 26세였다. 이해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는데, 열사(烈士)로 기복(起復)되어 원수(元帥)의 막부에 있었다. 비록 진중에 있었으나 사석일 경우에는 몸가짐에 예가 있었으므로 부중(府中)에서 모두들 어질게 여겼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용궁 현감(龍宮縣監)이 되었다. 이 뒤로 십수 년 동안 천거해 주는 이가 없어서 관직은 여러 부(府)의 판관(判官)에 불과하다가 계축년(1613, 광해군5)에 경흥 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가 되었다. 이때 북쪽 변방의 오랑캐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켜 변방 고을의 백성 중에 그들에게 잡혀간 자들이 매우 많았었는데, 공이 재물로 그 대가를 치르고 돌려받았다. 임기가 끝나자 순찰사(巡察使) 권진(權縉)이 불러서 중군(中軍)에 임명하고, 이어 그 공적과 재능을 상신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급시켰다. 기미년(1619, 광해군11)에는 순천군수 겸 우영장(順川郡守兼右營將)이 되었다. 지난해에 요동이 함락되어 요동 백성들로 강을 건너 피난 온 자들이 민간에 섞였는데, 그중 강한 자들이 약탈하는 통에 백성들의 근심이 날로 커져 갔다. 공은 규정을 만들어 관에서 굶주린 자들을 구휼하는 한편, 규정을 따르지 않는 자는 가차 없이 처벌하니, 이후로는 주인이나 객이나 모두 편안하여 민심이 매우 즐거워하였다.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이 순행차 본군에 이르러 군대를 사열하였는데, 군중의 한 병사가 자기 재주를 자랑하려고 무턱대고 발포하여 나는 새를 떨어뜨리자, 군중 전체가 크게 기뻐하며 상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지만 공은 “안 된다. 군중에서는 장군의 명을 들어야 하는데 명령 없이 발포하였으니, 군법으로 다스릴지언정 상을 줄 수 없다.” 하니, 찬획사가 크게 칭찬하고 결국 상을 주지 않았다.
관서 어사(關西御史) 한 사람이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한 나머지 공을 불쾌하게 여겨 복명(復命)을 마치고는 공이 불법을 자행하였다고 말하여 파직시키려고 하자, 간관(諫官) 김시양(金時讓)이 아뢰기를 “신은 이 사람이 본디 청렴하고 강직함으로 인해 남에게 시기를 받고 공로가 많은 데도 벼슬이 낮아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못하였다. 직책을 잘 수행하여 유임된 지 2년 만에 해서도 방어사(海西道防禦使)가 되었다.
이듬해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晚)이 평양(平壤)에 주둔하였으므로 공이 가서 그를 따랐다. 이괄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원수부(元帥府)의 여러 장수 중에 인물은 남이흥(南以興)ㆍ박진영(朴震英)ㆍ유효걸(柳孝傑) 몇 사람뿐이다.” 하고, 이간하는 편지를 쓰기를 “임금 측근의 악인을 제거하겠다.” 하고는 겉봉에 ‘남이흥ㆍ유효걸ㆍ박실재(朴實哉)’라고 썼다. 남이흥은 이때 원수부에 중군으로 있었으므로 원수는 그것이 이간하는 것임을 알고 공을 별장(別將)으로 삼고 더욱 신임하였다.
원수가 말하기를 “이괄이 거느린 정병(精兵)과 항왜(降倭)가 수만 명이고 우리 군사는 수천 명도 채 못 되니 그 세력을 당해 낼 수 없다. 저들 장사 중에 이괄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누구이겠는가?”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윤서(李胤緖)가 죽지 않았으면 반드시 큰일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고는 지나가는 윤서의 종 한 명을 구해서 대의로 타이르고 편지를 주어 윤서에게 보내려 하니, 그가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원수에게 자세히 보고하고 곧 편지를 써서 “의리상 적을 따라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서명한 뒤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소?” 하였으나 모두들 서로 쳐다만 볼 뿐 서명하려 하지 않았는데, 남이흥과 유효걸만 서명하였다. 이윤서는 이미 죽기를 결심하여 딴 뜻이 없었다가 편지를 보고는 곧 이신(李愼)ㆍ유순무(柳舜懋)ㆍ이택(李𤣯) 등과 몰래 모의하여 밤 삼경에 모두 화포 소리를 신호로 삼아, 각기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거느리고 진영을 뚫고 나온 자가 3천 명이나 되었다. 이윤서가 원수를 보더니 “적중에 있으면서 적을 죽이지 못하여 세상에 설 면목이 없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적이 샛길로 자산(慈山)을 빠져나와 황주(黃州)로 달아나므로 원수가 그제야 출병하였는데, 앞서 가던 부대가 적을 만나 신교(新橋)에서 무너졌다. 공은 격분하여 꾸짖기를 “패군한 자는 마땅히 참수해야지 용서할 수 없다.” 하였다. 적이 서울로 쳐들어왔을 즈음 임금은 남쪽으로 파천한 뒤였다. 원수는 뒤에서 여러 장수들에게 서호(西湖)를 건너서 남쪽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는데, 남이흥과 정충신(鄭忠信) 등은 명령을 따르지 않고 군사를 재촉하여 먼저 안령(鞍嶺 무악재)을 점령하니, 대군이 그 뒤를 따랐다. 공과 신경원(申景瑗)이 동교(東郊)에 주둔하매 이괄이 패전하여 그 부하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논공행상할 적에 공은 한 자급(資級)만이 올랐을 뿐 봉작(封爵)되지는 못하였으나, 자신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공은 평산도호부사 겸 해서방어사(平山都護府使兼海西防禦使)가 되었다가 그해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지난날 간관이었던 김시양이 영남 안찰사(嶺南按察使)가 되어 바닷가를 순행하다가 공이 거처하는 전사(田舍)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벼슬을 하지 않으시오?” 하며 벼슬할 것을 권하자, 공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무능한 사람으로서 은혜를 받은 것이 이미 많은데 또 무엇을 구하겠소.” 하니, 시양이 탄식하며 돌아갔다.
공은 한가하여 일이 없을 때는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였는데 세속의 음악을 연주하지는 않았으며, 글을 읽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있은 뒤로는 분개하고 즐겁지 않아 날마다 술에 취해 시름을 달랬고 때로 칼을 어루만지며 긴 한숨을 쉬다가 밤이면 하늘의 별만 바라볼 뿐이었다. 인조 19년(1641)에 73세로 광려산(匡廬山 경상남도 마산과 함안에 걸쳐 있는 산) 아래에서 별세하여 동군(同郡) 구음곡(仇音谷)에 장사 지냈다. 숭정대부 판돈령부사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崇政大夫判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서(追敍)되었다.
공은 일생 동안 절약과 검소를 중시하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친족 간에 화목하고 적서의 구분을 엄격히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자식들을 훈계하기를 “삼가 예법을 지켜 가훈을 실추시키지 말라.” 했을 뿐 다른 말은 없었는데, 얼마 뒤에 별세하였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어씨(魚氏)는 본관이 함종(咸從)으로 증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어응해(魚應海)의 따님이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세룡(世龍)과 형룡(亨龍)이다. 서자가 다섯으로, 유룡(庾龍)ㆍ임룡(任龍)ㆍ기룡(起龍)ㆍ자룡(子龍)ㆍ현룡(見龍)이다. 유룡은 율포 권관(栗浦權管)이며, 임룡은 적성 현감(積城縣監)이다. 딸이 여섯인데, 둘은 직장(直長) 윤태지(尹泰之)와 절도사(節度使) 남두병(南斗柄)의 첩이 되었고, 넷은 정식 혼인하여 남두격(南斗格)ㆍ권부경(權復慶)ㆍ김정구(金鼎耈)ㆍ곽지립(郭智立)의 처가 되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충성해도 공신 대우 받지 못했고 / 忠不見功 청렴해도 세상 용납 받지 못했네 / 廉不見容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어 / 順受其正 곤궁해도 불만일랑 아니 했거니 / 窮亦不慍 더럽고 탁한 자의 경계가 되고 / 汚濁之戒 어질고 선한 자의 권장이 되리 / 良善之勸
자는 子長, 호는 道谷이며, 본관은 廣州이다. 高麗를 도와 廣州君에 봉해진 安邦傑을 시조로 삼는다. 조선조에 들어와 安峴이 佐郞을 역임하였는데, 안현의 아들인 生員 安汝居가 바로 안정의 高祖이다. 曾祖인 安義는 문과에 급제한 뒤에 正言을 역임하였고, 조부인 世國은 南海縣令을 역임하였다. 부친은 僉正을 지낸 應虎이고, 모친은 密陽朴氏 士人 奎星의 딸이며, 配位는 咸安趙氏 栗軒 墿의 딸이다. 안정은 1574년(宣祖 7)에 咸安郡 道音里에서 태어나 6살 때 학문을 시작하였고, 9살 때 『小學』을 읽었으며, 14세 때 竹溪 安光郁에게 四書를 배웠다. 그리고 1599년(宣祖 32) 高祖·曾祖·祖父 등의 무덤이 있는 漆原縣 拜榮里로 移居하였고, 1602년에는 道谷精舍를 지어 『論語』와 『孟子』, 程朱의 서적을 읽으며 窮理誠正의 학문에 힘썼다. 1604년(宣祖 37) 봄에는 夙夜齋에서 寒岡 鄭逑(1543-1620)를 拜謁하였는데, 이후 17년 동안 그의 문하를 출입하며 親炙하였다. 그리고 旅軒 張顯光(1554-1537), 忘憂堂 郭再祐(1552-1617), 畏齋 李厚慶에게 학문을 배우며 종유하였고, 澗松 趙任道(1585-1664) 등과 교유하였다. 1608년(宣祖 35) 宣祖가 승하하자 「北望歌 」를 지어 서글픈 심정을 표출하였다. 1616년(光海 8)에는 武屹精舍에 있는 寒岡先生을 찾아 뵙고 『心經』에 대해 질문하였는데, 한강선생은 『聖學十圖』 중의 「心學圖 」를 손수 그려주고, 蘭溪 范浚의 「心箴 」과 草廬 吳澄의 「敬箴 」을 전수하며, 心과 敬에 힘쓸 것을 勉勵하였다. 1628년(仁祖 6)에는 白雲洞에서부터 수려한 산천을 유람하며 『遠行錄』이라는 유람기를 저술하였고, 1634년(仁祖 12)에는 『家禮附解』를 완성하였는데, 『가례부해』는 退溪 李滉(1501-1570)과 寒岡 鄭逑의 문집에 실린 禮說 및 문인과 知舊가 두 선생에게 질문한 것에 대해 조목별로 해설하여 『朱子家禮』에 부록한 것이다. 1636년(仁祖 14) 5월 6일 持敬齋에서 별세하자, 上浦 新遵里의 先塋에 장사지냈고, 漆原縣 榮洞에 泰陽書院을 건립하여 位版을 봉안하였다. 훗날 朝奉大夫 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답〕 내 집에서는 요즈음 아내의 상을 만났을 때, 분면(粉面)에 ‘망실(亡室)’이라 쓰고 방제(旁題)를 쓰지 않았으며, 축문은 ‘부성모감소고우망실……(夫姓某敢昭告于亡室……)’이라 쓰고 축사(祝詞)도 본문을 가감하여 썼네. 지금 내가 우연히 손자의 집에 와서 있으므로 이 종이의 여백에 다음과 같이 써서 올리네. 그 내용이 과연 옳은지의 여부는 감히 알 수 없네.
조선 중기의 학자 이도일(李道一)의 시문집. 2권 1책. 목활자본. 1897년 8대손 승영(承永)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종기(李種杞)의 서문, 권말에 승영의 발문이 있다.
권상에 시 19수, 만사 3수, 서(書) 1편, 찬(贊) 1편, 기(記) 1편, 제문 2편, 소(疏) 1편, 권하는 부록으로 가장·유사·행장·묘갈명·묘지명·기·상량문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순후하면서도 건아한 기풍이 있어 읽는 이에게 친근한 느낌을 준다. 〈청송사증별허희화 靑松寺贈別許熙和〉는 평생의 지기였던 허희화와 만나 진진한 정회를 나누고 헤어짐에 앞서 허전한 마음을 잘 묘사한 것이다.
〈우음 偶吟〉 2수는 초연한 경지에서 바라본 인간의 성쇠고락을 묘사, 사물의 무상함을 노래하였다. 〈한강선생찬 寒岡先生贊〉에서는 스승 정구(鄭逑)가 주희(朱憙)의 연원을 이은 이황(李滉)의 정맥을 이어 후진을 교육한 공로를 추숭하고 그의 인격을 매화의 향기에 견주고 있다.
〈사직소 辭職疏〉는 칠원 현감을 사직하면서 올린 글이다. 이 글에서 그는 병자호란을 겪은 뒤 도탄에 빠진 참혹한 민생의 모습과 파괴된 도성의 참상을 들어 말하고, 하루 빨리 이 수치를 씻고 자강의 계책을 강구할 때 오히려 전날의 재난은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밖에도 무릎을 겨우 들일 정도의 작은 집이라는 뜻의 〈용슬헌기 容膝軒記〉에는 삶의 태도와 학문하는 마음가짐이 잘 나타나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그의 학문이 경서를 근본 삼아서 낙건(洛建)의 유서(遺書)를 탐독하여 몸가짐이 단정하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광해군 때 정이홍(鄭仁弘)이 퇴계선생을 배격하려고 각읍 유생을 시켜 상소하려 했을 때 유공(庾公) 사(斯)의 고사를 인용하여 엄하게 거절한 까닭으로 인홍의 미움을 받아 칠원(漆原)에 피신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여헌이 등용되므로 편지하여 출처를 논하였다. 1634년(인조 12)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1647년 대군사부(大君師傳), 1659년(효종 10)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였다. 후에 지평에 추증되고 함안의 향사(鄕祠)에 봉향되었다
묘갈명 병서〔墓碣銘幷序〕 -눌은 이광정 찬
간송(澗松) 선생 조공(趙公)의 묘는 함안군(咸安郡) 동쪽 용화산(龍華山) 아호향(鵝湖鄕) 명원(明原)에 있다. 선생의 현손 홍엽(弘燁)이 선생의 유문(遺文)과 행장을 가지고 북으로 5백 리를 달려와 나에게 부탁하며 말하기를 “나의 선조를 장사 지낸 지 80여 년이 되었으나, 유집(遺集)이 세상에 간행되지 않았고 묘비도 새기지 못했습니다. 무덤에 밝게 내걸 글이 없으니, 그대가 유념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놀라며 말하기를 “나는 후생으로 선생의 문하에 미치지 못했으나 일찍이 유풍을 들었습니다. 선생은 은거하여 그 뜻을 추구하고 자기 몸에 능력을 축적해 두고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한 번 명예가 알려지자 한 번 관직에 제수 되었는데, 편안해 하지 않으며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듯이 하였으니, 후세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어찌 감히 한 마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내가 어리석고 고루하며 늙어 명을 따르기에는 부족합니다.”라고 하였다. 홍엽이 갔다가 다시 찾아왔는데, 그 청함이 더욱 지극하여 이에 그 유사와 행장에 의거해 생애를 차례대로 서술하고 명을 짓는다.
공의 휘는 임도(任道), 자는 덕용(德勇), 처음의 자는 치원(致遠)이며, 간송(澗松)은 그의 호이다. 조씨의 선계는 함안(咸安)에서 나왔는데, 대장군 정(鼎)이 족보에 처음 보인다. 대대로 벼슬한 이를 배출하였다. 경태 연간(景泰年間)에 진사 휘 려(旅)는 벼슬하지 않았는데,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등 제현과 함께 세상 사람들이 생육신(生六臣)으로 일컫는다. 지금 서산서원(西山書院)의 사당에서 향사되었는데, 공의 5세조이다. 아버지 휘 식(埴)은 호가 입암(立巖)으로 숨은 덕과 높은 행실이 있다. 어머니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병절교위(秉節校尉) 유상린(柳祥麟)의 딸이다. 만력(萬曆) 을유년(1565, 명종20) 7월 17일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밝고 빼어나 비범하였는데, 6세 때 모부인에게 말하기를 “효(孝) 자로 제 이름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10살이 되기 전에 임진ㆍ계사년의 난리를 만나 경상좌도 지역에서 타향살이를 하였는데, 무릇 모든 말과 행동거지를 부모님이 하는 것을 본받았다. 14세 때 반천(槃泉) 김중청(金中淸) 공에게 수학하였는데, 김공은 월천(月川)의 문인이다. 공은 퇴도(退陶)의 가르침을 익히 듣고서 존모하였다.얼마 뒤에 여헌(旅軒)장 선생(張先生)을 따라 40여 년을 배웠는데, 훈도되고 서로 진보함이 더욱 친절하고 절실하였다. 공의 학문은 경서(經書)를 근본으로 삼고 정주학(程朱學)에 잠심하였다. 공은 자기를 다스림이 매우 엄격하였고, 그 도를 행하는 것은 일상생활의 인륜 사이에 있어 부모를 섬김에 정성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다. 거상(居喪)할 적에 다른 사람보다 행하는 것이 지나쳐 죽을 마시며 상을 마쳤고, 기한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소식(素食)을 하였다. 항상 부모에 대해 민자건(閔子騫) 같은 매우 애처로운 마음이 있어, 지은 〈추모록(追慕錄)〉, 〈풍수음(風樹吟)〉, 〈유모가(孺慕歌)〉 등의 작품은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이 멀리서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마음으로 퇴도(退陶) 선생을 불쾌해 하여 여러 고을의 제생을 부추겨 소의(疏議)에서 공척(攻斥)을 펴고자 하니 거스르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공은 방몽(逄蒙)과 유공지사(庾公之斯)의 일을 인용하며 거절하는 것이 매우 확고하여 그들에게 미움을 받아 칠원(漆原)의 강가로 피해 몸소 물고기를 잡으며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여헌(旅軒)이 처음으로 발탁되자 공이 편지로 출처의 의리를 논하였고, 또 말씀드리기를 “예로부터 정도(正道)를 지키는 선비로서 누가 명예와 절조를 갈고 닦으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가면 본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 드무니, 원컨대 선생께서는 제가 형편없다고 해서 좋은 말까지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으니, 공의 은미한 뜻을 알 수가 있다. 갑술년(1634, 인조12)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정해년(1647, 인조25)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제수되고, 기해년(1659, 효종10)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늙고 병든 것으로 사양하였다.
공은 명성을 부끄러워하여 무릇 징소(徵召)가 있었지만 일찍이 일어나 응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늙어서 더욱 돈독하여 인조와 효종의 국상(國喪) 때 졸곡(卒哭)까지 모두 소식(素食)을 하여 주위의 사람들이 몸을 상할까 걱정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는 강상(綱常)을 위해서 도모하니 일신을 돌아볼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몸이 상한들 무엇을 고려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임인년(1662, 현종3) 안렴사(按廉使)가 장계를 올린 것으로 인해 임금이 전지(傳旨)를 내려 칭찬하면서 쌀과 콩을 하사하였는데, 공이 소를 올려 사은하면서 시무 14조를 진달하니, 임금께서 가상하게 여겼다. 갑진년(1664, 현종5) 공이 춘추 80세 때 병환이 위급해졌는데, 좌우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옛사람이 죽음에 임해서 기뻐하며 웃은 이가 있다.”라고 하였다. 좌우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으니 “도정절(陶靖節)이다.”라고 말하고서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2월 15일 무신일이었다. 방백이 조정에 부음을 알리니 특별히 호조에 명하여 부의를 보냈다. 4월 기미일에 부모의 선영이 있는 동쪽 기슭에 장사를 지냈다. 공은 부모가 살아계실 때 항상 좌우에서 모셨고, 까닭 없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이미 장사를 치르고 나서는 여묘 아래에 상로암(霜露庵)을 지었고, 칠원(漆原)의 내내(柰內)에서 영산(靈山)의 용산(龍山)으로 옮기고서는 망모암(望慕庵)을 지었는데, 모두 무덤과의 거리가 10리가 되지 않으니, 맹자(孟子)가 진정한 효자는 평생 부모를 사모한다고 칭찬한 말은 공이 아마도 그에 가까울 것이다. 공은 이미 퇴계 문인에게 사숙(私淑)하였고, 또 어진 사우(師友)를 좇아 질문하고 강마하여 도와 덕을 성취하였다. 남쪽 지방의 학자들이 일제히 존신(尊信)하였으나, 공은 항상 겸손해 하며 사문으로 자임(自任)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공이 평소 스스로 수립한 바를 보면 그 조예가 깊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다.
공의 부인은 노파처사(蘆坡處士) 이흘(李屹) 공의 딸인데 현명하였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또 안악 이씨(安岳李氏) 훈도 이춘길(李春吉)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또한 아들 없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종부형(從父兄)의 아들인 함변(咸抃)을 후사로 삼았는데, 함변이 3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은 시각(時瑴), 시장(時璋), 시숙(時璹)이다. 딸들은 사인(士人) 송수(宋洙), 성재우(成在瑀), 이언눌(李彦訥), 이시억(李時檍)에게 시집갔다. 시각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은(檼), 찬(欑), 집(集)이고, 딸은 사인 김하중(金夏重)에게 시집갔다. 시장은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재(梓), 합(柙), 황(榥)이고, 딸은 사인(士人) 이시걸(李是杰), 이태연(李泰然)에게 시집갔다. 시숙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강(棡)이고, 딸은 사인 강사철(姜師喆)에게 시집갔다. 은(檼)은 아들을 한 명 두었는데, 홍엽(弘燁)이다.
공은 이미 부귀공명을 단념하고 한가롭게 거처하면서 천성을 함양하였는데, 사는 곳에 강호와 정대(亭臺)의 빼어난 경치가 있어 때로는 일엽편주로 사우(師友)와 학생을 따라 강을 오르내리며 시를 읊조렸다. 문집 약간 권이 있다. 공이 세상을 떠 삼년상을 치르고 끝내자 사림에서 모인 자들이 모두 쓸쓸히 돌아보고 그리워하여, 방백에게 장계를 올려 임금에게 아뢰게 해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50년 뒤 또 서원을 세우게 해달라고 소를 진달하였는데 의릉(懿陵)이 특별히 그 청을 윤허하니, 그 유풍과 끼친 교화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와 같았다. 전취 부인은 용화산 남쪽 기슭에 따로 장사 지냈고, 후취 부인은 공의 묘소 왼쪽에 장사 지냈다. 명은 다음과 같다.
파산의 조씨 집안에는 / 巴山之趙 어계 선생이 계시었네 / 有漁溪翁 대대로 그 정절을 이어받아 / 世襲其貞 우리 간송 선생을 내셨네 / 挺我澗松 선생이 행한 것은 / 先生之行 효제와 충신이요 / 孝弟忠信 학문의 본받은 바는 / 學有宗派 바른 앎과 실천이네 / 正知實踐 바른 앎으로 사악함을 막고 / 正以距邪 실천으로 몸을 수양하였네 / 實以禔躬 용화산의 언덕에 / 華山之阿 고상한 기풍이 늠름하게 있네 / 有凜高風 소나무 숲 대나무 심은 곳에 / 松林竹樹 우뚝한 넉 자의 봉분이 있네 / 其封四尺 내가 요점을 모아 돌에 새기니 / 我最以銘 선생의 훌륭한 자취이네 / 先生之迹
아버지는 승근(承謹)이며, 어머니는 노씨(盧氏)이다. 아버지가 일찍 죽자 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웠다,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었으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는 다시 과거를 보지 않고 은거하여 지냈다.
인조반정 후 독서인(讀書人)으로 이름이 있어, 1635년(인조 13) 대군(大君)의 사부로 천거된 바 있다.
만년에는 합천의 구곡 밑에 살면서 방에 ‘자지헌(自知軒)’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연을 벗삼으며 지냈다.
(林谷先生文集卷之一)
題龍華山下同汎錄後龍華山下道興津
寒岡 旅軒 忘憂堂 同泛
道興舟幾大 載得此羣英 已向安流泛 何須問耦耕
<용화산하동범록〉 후서〔龍華山下同泛錄後序〕 간송 조임도
황명(皇明)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40) 초봄 한강 정 선생께서 도흥보(道興步)에 와서 노닐었는데, 도흥은 곧 용화산(龍華山)의 동쪽 기슭이다. 처음 창암(蒼巖)에 먼저 도착하여 망우정사(忘憂精舍)에서 묵었는데, 그 주인은 전 우윤(右尹) 곽 상공(郭相公)이다. 다음 날 강을 거슬러 올라 경양대(景釀臺)를 지나 내내(柰內)에 올라 산천의 빼어난 경치를 두루 구경한 연후에 도흥촌에 머물러 쉬었다. 선생께서 일찍이 비석으로 쓸 만한 돌을 강가에 두었는데, 그 뒤 그 소재를 잃어버린 것이 20년이 되었다. 혹시 모래에 파묻히고 물에 빠졌을까 염려되어 어부에게 청하여 찾아내고자 하였으므로 이번 행차가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내가 이때 칠원(漆原)의 장춘사(長春寺)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부친께서 상포(上浦) 강가의 별장에 도착하여 급히 편지를 보내 불러들이기를 “두 현인이 가까운 곳에 머무시니 어찌 가서 뵙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곧바로 저녁에 강가의 별장에 와서 묵었는데, 이곳은 계부(季父)의 별장으로 도흥과는 서로 바라보이는 곳이다. 이른 아침에 부친과 계부를 모시고 작은 배를 타고 도흥에 이르니, 선생께서는 이미 용화산 아래에 배를 매어두고서 돌을 찾고 있었다. 선생에게 나아가 배알하고 물러나 좌우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따르며 노니는 자들은 여헌 장 선생과 한강 선생의 문도들이었다. 두 선생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모인 사람은 망우당 곽 우윤(郭右尹)과 함안 군수 박 영공(朴令公)이었다. 그리고 함안에서 온 사람이 14명, 영산(靈山)에서 온 사람이 10명, 창녕에서 온 사람이 1명, 현풍에서 온 사람이 1명, 고령(高靈)에서 온 사람이 1명, 성산(星山)에서 온 사람이 4명이었는데, 배가 좁아 모두 탈 수가 없었다. 대개 정 선생께서 함안 군수로 계실 적에 선정(善政)을 베푼 은덕이 있었고, 도흥촌이 또 함안의 경내에 있었기 때문에 모인 손님 중에 함안 사람이 가장 많았다.
이날 부친과 계부께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제현(諸賢)을 위로하였고, 이어서 술잔을 돌린 자는 영산(靈山)의 전 군수 신초(辛礎) 어른과 함안의 교생(校生)이었다. 술상은 간소하고 정결하였으며, 예의(禮儀)는 어긋나지 않고 공경스러워 술자리가 엄숙하였다. 선생께서 돌아보며 제생들에게 말씀하기를 “오늘의 모임은 성대하다고 말할 만하다. 어찌 기록해 두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함안 사람 진사 이명호(李明怘)가 명에 응하여 일어나 종이와 붓을 가져와 썼다. 정 선생을 제일 위에 적고, 그 다음은 곽 우윤을 적고, 또 그 다음은 박 영공을 적고, 또 그 다음은 장 선생을 적었다. 이 이후로는 나이순으로 적고 관작의 서열대로 적지 않았다. 다만 성명, 자(字), 나이, 사는 곳 및 모인 날짜만을 적었는데, 모두 35명이었다.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이라고 제목하고 기록이 완성되자, 선생께서 문인에게 명하여 보관하게 하였다. 이날 저녁 선생께서는 남여를 타고 먼저 침소에 가셨고, 배 안의 사람들은 차츰 나뉘어 흩어졌는데, 곽 우윤은 강정(江亭)으로 돌아갔고, 박 영공은 관아로 돌아갔다. 선생을 지키며 나루에 유숙한 사람은 문생 10여 명과 우리 고을 노인들의 자제들이었다.
다음 날 두 선생께서는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시고, 나는 선친을 모시고 검계(劍溪)로 돌아왔다. 아! 정 선생의 빼어난 덕망과 장 선생의 혼후한 기상과 곽 우윤의 속세를 벗어난 흉금은 예전부터 들었는데도 오히려 또 감흥이 있었다. 더구나 지금 세상에 함께 살면서 몸소 그 모습을 뵙고 때를 같이하여 배 안에 모두 모였음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리고 나와 선친이 또 좋은 모임에 참여하여 가까운 자리에서 뵙고서 지란(芝蘭)의 향기에 흠뻑 스며들고 강호의 큼을 마음껏 관람하였으니, 진실로 한 세상의 성대한 모임이고 인간사의 좋은 일이었다. 불행하게도 2월 말에 나는 갑자기 종천(終天)의 슬픔을 품었는데, 구차하게 남은 목숨을 보전하면서 예전의 즐거운 일에 마음을 두지 않은 것이 10여 년이 되었다.
경신년(1620, 광해군12) 봄과 여름 사이에 안정(安侹)-선생의 종자부(從姊夫)이다.- 이 내내(柰內)의 새 거처에 들렀는데, 이로 인해 함께 강대(江臺)를 소요하다가 도흥을 가리키자, 용화산 아래에서 함께 배를 띄웠던 때의 일을 추억하며 개연히 탄식하였다. 안군이 말하기를 “우리 집에 〈동범록(同泛錄)〉 초본이 있는데,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듣고서 놀라고 기뻐 노복을 보내 가져오게 하여 꿇어앉아 받들고 완미하며 이를 읽다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즐겁지 않게 되어 크게 한숨을 쉬며 슬퍼하였다. 함께 배 띄우던 날이 정월 28일이고 선친께서 돌아가신 날이 2월 28일인데, 길흉과 애락(哀樂)이 이처럼 현저하게 다르니 인사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구나. 또 생각해 보니 곽 우윤은 정사년(1617, 광해군9) 여름에 돌아가시고, 정 선생은 올해 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나머지 기록 중에 이름이 있으면서 황천으로 돌아간 이들이 또한 8명이니, 유림의 애통함과 생사가 나뉜 감정이 대체 어떻겠는가. 지금 세상에 살아있으면서 내가 북두성처럼 우러러 의지하여 스스로 위안을 삼는 분 장 선생만이 아무 탈이 없어 사문의 한 줄기 도맥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외재(李畏齋) 어른은 한강 선생의 제자로서 스승을 위하여 언행록을 찬술하였는데, 의서(衣書)를 부탁한 것이 또한 거의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 내가 이 기록에 대해서는 느끼는 바가 있다. 기록 중에 흠앙(欽仰)할 만한 분이 있고 사모할 만한 분이 있다. 흠앙할 것은 두 현인의 덕업과 문장이 아니겠는가. 사모할 것은 곽선옹(郭仙翁)의 기개와 풍절이 아니겠는가. 붕우와 고을의 어른들은 모두 우리 부자가 일찍이 교유한 사람인데, 얼마의 세월이 지나 이미 옛 일이 되어버렸으나 눈길을 주고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어찌 그만두겠는가. 이에 종이를 엮어 책을 만들고 그 내용을 옮겨 기록하였는데, 장 선생에 대해서는 헌호(軒號)를 적었고 선친에 대해서는 ‘선대인’이라고 하였으니, 매우 참망(僭妄)됨을 알겠다. 그러나 일찍이 점필재(佔畢齋)가 《청구풍아(靑丘風雅)》를 수정할 적에 제현의 성씨와 사적을 권수(卷首)에 논차(論次)하고서 사예공(司藝公)의 성명을 쓰지 않고 단지 선대부(先大夫)라고 일컫고 그 아래에 주(註)를 달아 “휘는 모이고 자는 모이다.”라고 하였으니, 고인이 자신의 부친에 대해 공의로써 사사로운 정을 폐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내가 사사로이 스스로 선친을 높인 것이 어찌 옛 근거가 없겠는가. 내가 이미 이 기록을 다행히 다시 얻었고, 또 안군이 능히 훌륭한 행적을 보전한 것을 가상히 여기며 이에 서문을 쓴다.
내가 집에서 한가로이 지낼 때 미수(眉叟) 허 선생(許先生)의 유집(遺集) 1부를 책상 위에 두고 본 적이 있다. 허 선생은 근고(近古) 시대의 명망 있는 인물에 대하여 기술한 것이 많았는데, 실제 행적들이 모두 눈에 선히 들어올 정도로 실감나게 묘사하였으니, 한 시대의 훌륭한 역사책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한강(寒岡)과 여헌(旅軒) 등의 노선생에 대해서는 올바른 출처(出處), 순정(純正)한 언론, 높은 덕망에 대해 칭송하였고,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에 대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키고 후세에 영향을 끼친 높은 절개와 풍모에 대해 칭송하였다. 그리고 동명(東溟) 김공(金公)의 경우, 공이 일찍이 당시의 권신(權臣)을 비판하다 경상도 현풍 현감(玄風縣監)으로 좌천되었는데, 수령으로 재직 중 학교를 세우고 향약법(鄕約法)을 시행하자 조정에서 그 조례와 제도를 올리게 하고 이를 사방에 반포하여 시행케 함으로써 백성의 교화에 보탬이 되었음을 칭송하였다.
이번에 박 사문 상절(朴斯文尙節) 씨가 편집한 《기락편》을 보았는데,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40)에 한강, 여헌 두 선생과 곽 망우당이 함안(咸安)의 용화산(龍華山) 아래에서 배를 띄워 유람한 일이 실려 있었다. 이때 그분들과 종유한 이로 판돈녕부사에 추증된 박공(朴公) 모(某)가 있다. 그 뒤 28년이 지난 갑술년(1634, 인조12)에 동명공(東溟公)이 현풍(玄風)의 풍영대(風詠臺)를 유람하였는데, 이때 종유한 이로 완석당(浣石堂) 박공(朴公) 모(某)가 있다. 허 선생의 문집에 따르면, 완석당은 돈녕공(敦寧公)의 둘째 아들이다. 돈녕공이 비록 무인 출신이기는 하지만 유현(儒賢)들을 가까이하고 예의를 숭상하였으며, 임진년(1592)과 갑자년(1624)의 전란 때에 큰 공을 세웠으나 이를 남에게 내세우지 않았다. 임종을 맞아 자식들에게 훈계하기를 “삼가 예법을 지켜 가훈을 실추하지 않도록 하라.〔謹守法 無墜家訓〕” 하였다. 이에 완석당이 유훈을 잘 받들어 영남의 큰 인물로 훌륭히 성장하였다. 완석당은 세상을 떠난 뒤 그 행실이 더욱 알려져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는데, 이는 제자를 가르치고 예법을 지키는 데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공자가 말하기를 “그 땅에 대해 모르면 거기에서 자라는 초목을 보고, 그 아비에 대해 모르면 그 아들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해 모르면 그 벗을 보라.” 하였으니, 이 《기락편》이 아주 좋은 예라 할 것이다.
푸르디푸른 용화산 / 蒼蒼龍華山 나와 사귄 지 오래되었지 / 與我交契久 선영이 산 앞에 있기에 / 松楸在山前 암자를 산 뒤에 지었네 / 臺榭營山後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은 / 滔滔洛東江 나와 정분이 두텁지 / 與我情分厚 강가 바위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 垂釣江之磯 강가 버드나무에 배를 묶는다네 / 繫舟江之柳 여묘 살이 할 때를 돌이켜보니 / 追思廬墓時 정미년과 신유년이네 / 丁未及辛酉 부여잡고 통곡해도 풍수지탄만 남으니 / 攀號風樹餘 머리카락은 일찌감치 세고 빠졌네 / 毛髮早衰朽 세상인심은 몇 번이나 변했던가 / 世道幾變遷 인정도 손바닥처럼 뒤집어졌지 / 人情翻覆手 어지러운 비구름 속에서 / 紛紛雲雨裏 해와 달은 부질없이 나는 듯 달려갔네 / 烏兔空飛走 어느덧 30년이 흘러 / 居然三十年 어느새 벌써 늙은이가 되었네 / 忽已成老叟 만사가 모두 부질없으니 / 萬事盡悠悠 전날의 기약이 결국 무슨 소용 있으랴 / 前期竟何有 문을 닫고 교유를 끊은 채 / 閉門絶交遊 채소를 먹고 마른밥을 먹어도 / 茹草仍飯糗 용화산과 낙동강은 / 玆山與玆水 시종일관 나를 저버리지 않네 / 終始不我負 중년에 내내에 살면서 / 中年住柰內 날마다 아호의 언덕을 바라보네 / 日望鵝湖阜 새집은 더욱 편하고 가까우니 / 新居更便近 선산을 영원히 지키려 하네 / 丘墓期永守 가시덤불은 베어버리고 / 荊榛得芟夷 초동목부에게 함부로 밟고 다니지 말라 하네 / 樵牧戒躪蹂 오직 생각하는 건 죽기 전까지 / 唯思未死前 향불을 피우고 술과 안주를 올리는 일 / 香火薦脯酒 이밖엔 다른 생각이 없으니 / 此外無餘念 덧없는 명예는 뜬구름과 같다네 / 浮名等蒼狗 어떤 중이 방장산에서 오더니 / 有僧方丈來 띠 지붕 얹고 대 창을 열었네 / 誅茅開竹牖 동으로 바위 병풍 둘러 쳐진 것을 보고 / 東瞻石屛環 북으로 멀리 거울빛 검푸른 것을 보네 / 北瞰鏡光黝 물에 내려가 물새 해오라기와 맹약을 하고 / 下與鷗鷺盟 산에 올라가 사슴과 친구 하네 / 上與麋鹿友 가을이면 밭에 늦배추를 심고 / 秋園種晩菘 봄이면 밭두둑에서 햇부추를 벤다네 / 春畦翦早韭 모래사장을 비추는 달빛이 환하고 / 沙月色亭亭 솔숲에 이는 바람 소리 시원하네 / 松風聲瀏瀏 온 방이 고요하여 먼지 한 점 없고 / 一室靜無塵 서책들만 좌우에 쌓여 있네 / 圖書對左右 날더러 여생을 보내면서 / 使我寄餘生 안개노을 흥취를 실컷 누리라 하네 / 飽得煙霞趣 소요하며 〈고반〉을 읊으니 / 逍遙詠考槃 우러러보나 굽어보나 생각에 구차함이 없네 / 俯仰思無苟 흥이 일다가 문득 슬픔이 생겨나는 건 / 興來忽生悲 함휼에 마음으로 근심하는 것 / 銜恤中心怮 서리와 이슬에 감회를 느낄 때면/ 有時感霜露 풀 헤치고 부모님 성묘를 하네 / 披草省父母 부모님 정령이 계셔서 / 父母精靈在 이 마음을 알아주실까 / 此懷知邪否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을 가엾게 여기소서 / 應憐一箇兒 혈혈단신으로 늘그막에 슬퍼하고 있습니다 / 孑孑傷白首 슬픈 사모의 정에 울음을 삼키려 하니 / 愴慕欲呑聲 하늘은 어두운데 갈가마귀 소리 가득하네 / 天昏鴉叫藪
[주-D001] 집 :
상로암(霜露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주-D002] 정미년(丁未年) :
1607년(선조40)이다. 조임도는 이해 2월에 부친상을 당했다.
[주-D003] 신유년(辛酉年) :
1621년(광해군13)이다. 조임도는 이해 2월에 모친상을 당했다.
[주-D004] 아호(鵝湖) :
경남 함안군 용화산 남쪽에 있었던 호수이다. 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인데, 지금은 둑으로 막혀 호수의 자취만 남아있다. 조임도의 선산 바로 아래에 있다.
[주-D005] 고반(考槃) :
《시경》 〈고반〉편을 말한다. 현자의 은거를 찬미하는 내용이다.
[주-D006] 함휼(銜恤) :
근심을 품는다는 뜻으로, 부모가 세상을 떠나 늘 근심하는 자식의 마음을 일컫는다. 《시경》 〈육아(蓼莪)〉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믿으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믿을꼬. 나가면 근심을 품고 들어오면 이를 곳이 없노라.〔無父何怙, 無母何恃. 出則銜恤, 入則靡至.〕”라는 구절이 있다.
[주-D007] 서리와 …… 때면 :
《이정외서(二程外書)》 〈주공섬록습유(朱公掞錄拾遺)〉에 “묘에 참배하는 것은 10월 1일에 하는데,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것에 감회를 느끼기 때문이다. 한식에는 또한 상례에 따라 제사를 지낸다.〔拜墳則十月一日拜之, 感霜露也. 寒食則又從常禮祭之.〕”라고 하였다.
합강정에 모여 술 마시는 밤에 함께 노는 여러 분에게 보이다 2수 〔合江亭會飮夜示同遊諸賢 二首〕
황량한 초가가 대숲 사이에 있는데 / 荒涼草屋竹林間 오직 산승이 있어 왕래를 허락하네 / 只有山僧許往還 어진 분들이 성대한 모임에 참여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 何幸群賢供勝會 온 강의 바람과 달이 완전히 한가하진 않네 / 一江風月未全閒
애절한 거문고 급박한 퉁소가 청아한 즐거움을 돕는데 / 哀絲急管助淸歡 다시 작은 배에 올라 달을 감상하고 돌아오네 / 更上蘭舟弄月還 이날 밤 합강정에서의 모임은 / 此夜合江亭上會 훗날 살아서 다시 만나긴 어려우리 / 人間他日再逢難
[주-D001] 합강정(合江亭) :
용화산(龍華山)기슭의 강변에 있는 정자이다. 조임도(趙任道)가 은거하며 강학하던 곳으로, 1633년(인조11)에 건립하였다.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이므로 합강정이라 하였다.
초여름 뱃놀이 무진년(1628, 인조6) 〔初夏船遊 戊辰〕
저녁 무렵 경양대로 배를 옳겨가고 / 薄暮移舟景釀臺 용화산 아래에서 다시 강을 따라 내려가네 / 龍華山下更沿洄 재의 구름이 달을 토하니 맑은 빛이 움직이고 / 嶺雲吐月淸光動 강의 나무가 바람을 머금으니 상쾌한 기운이 오네 / 江樹含風爽氣來 만고의 영웅은 외로운 새 지나간 흔적과 같으니 / 萬古英雄孤鳥過 천년의 형승에서 술동이를 연다네 / 千年形勝一罇開 간곡하게 취암자에게 알리노니 / 丁寧爲報翠巖子 뒤에 이르렀으니 삼백 잔을 사양하지 말기를 / 後至莫辭三百杯
[주-D001] 경양대(景釀臺) :
현재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낙동강변에 있는 절벽으로, 제왕담〔지앙담〕이라고도 한다.
청송사〔青松寺〕
용화산을 등진 낙동강 가에 / 龍華山背洛波邊 절이 있어 창건한 지 칠백 년이네 / 有寺開基七百年 만 그루 겨울 소나무와 백사장의 달 / 萬本寒松沙上月 천 마리 무리 지은 백조와 나루터의 안개 / 千群白鳥渡頭煙 긴 강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바다로 흘러가고 / 長江混混東流海 이어진 산봉우리 푸르게 북쪽으로 하늘에 닿아있네 / 列岫蒼蒼北接天 좋은 곳 기이한 볼거리를 어찌 그려낼까 / 勝狀奇觀那畫得 올라 보니 황홀하여 맑고 시원한 바람 부리는 것 같네 / 登臨怳若馭泠然
장복추 사미헌집 제1권 / 시(詩)
합강정에서 자면서 달밤에 용화에서 뱃놀이하다 2수〔宿合江亭 泛月龍華二首〕
선조의 발자취를 찾으러 이 강물에 배를 띄우니 / 爲尋先躅此江浮 강의 기운은 청량하고 흥은 주체할 수 없네 / 江氣淸凉興莫收 흰 새 날아가는 끝에는 먼 산봉우리가 있고 / 白鳥去邊生遠峀 푸른 물결 합치는 곳에 높은 누각 서있네 / 蒼波合處起高樓 선천시대부터 있었던 달그림자는 미산의 달이고 / 先天影子眉山月 특별한 풍류는 적벽의 가을이네 / 特地風流赤壁秋 당시에 그린 병풍을 공경히 펼쳐서 보니 / 敬閱屛風當日畫 이번 유람이 한가한 갈매기와 같음을 증명하겠네 / 玆遊可證等閒鷗
옛날에 나의 선조 여헌께서 합강정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그때 합강정 주인이 병풍에 그림을 그렸는데, 물위에 나는 갈매기는 또한 기이한 경관이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구절에서 그것을 언급하였다.
비 온 뒤에 푸른 물결이 아득히 일어나니 / 雨後滄波渺渺生 강 가운데 섬 사이로 작은 배가 헤치고 나오네 / 中洲撑出小舟輕 옆 사람은 배를 젓는 데 힘을 쓰지 말라 / 傍人莫費推移力 그치면 그치는 대로 좋고 가면 가는 대로 좋으네 / 止可止之行可行
[주-D001] 합강정(合江亭) :
경남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용화산(龍華山) 기슭의 강변에 있는 정자이다. 조임도(趙任道)가 은거, 수학한 곳으로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으나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이므로 합강정이라는 이름의 편액을 정자에 걸게 되었다고 한다. 조임도는 장현광(張顯光)의 제자로, 이곳에서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다.
[주-D002] 선조의 발자취 :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말하니, 이곳을 유람한 적이 있다. 사미헌은 1885년 장승택(張升澤)을 비롯한 33명과 함께 배를 타고 이곳에 왔다.
[주-D003] 푸른 …… 서있네 :
낙동강과 남강(南江)이 합치는 곳에 합강정이 있다.
[주-D004] 미산(眉山) :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인 소순(蘇洵)과 그 아들 소식(蘇軾) 소철(蘇轍) 등 소씨(蘇氏)의 본고장이다. 여기서는 소식을 말한다.
[주-D005] 적벽(赤壁)의 가을 :
적벽은 삼국시대 위(魏)의 조조(曹操)와 오(吳)의 주유(周瑜)가 교전했던 곳으로, 중국 호북(湖北) 기어현(奇魚縣)의 동북쪽 장강(長江) 가에 있는 절벽이다. 송나라 소식(蘇軾)이 원풍(元豐) 5년(1082) 7월 16일 가을밤에 양세창(楊世昌)과 함께 적벽강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그 유명한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다.
조긍섭 암서집 제1권 / 부(賦)
낙동강에서 뱃놀이하다 무술년(1898, 고종 광무2) 〔泛舟洛江賦 戊戌〕
무술년 봄 윤삼월 / 歲著雍之春閏 선생의 행차 초계(草溪) 고을에 이르러 / 屈星駕於溪郡 산음의 고사를 행하고 / 修山陰之故事 여부의 유운을 찾네 / 尋廬阜之遺韻 일을 마치고 나서 장차 돌아가려 할 제 / 旣卒事而將復 낙동강 바라보고 동쪽으로 돌아드니 / 望洛水而東轉 궤석을 모시고 뒤따르는 이는 / 陪几舃而追隨 구름처럼 많은 준수한 선비들일세 / 偉如雲之髦彥
남계정(南溪亭) 강회(講會)가 윤3월에 있었는데, 이만구(李晩求) 선생이 교장(敎長)으로서 이르러 임하니, 이웃 고을의 인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12일에 공령(功令)을 시험하였다. 13일에 사상견례(士相見禮)를 행하였는데, 사상견례가 끝나고 강회를 열었다. 14일에 강회를 마치고 해산했는데, 만구 선생이 강을 건너 동쪽으로 가시려 함에 따르는 사람이 백여 명에 이르렀다.
먼저 칠룡재(七龍齋)로 길을 들어서니 / 先指路於七龍 은행나무 그늘 뜰에 가득함이 사랑스럽고 / 愛杏陰之盈庭 저물녘에 도장재(道章齋)에 이르러 / 夕稅車於道齋 시냇물 흘러내리는 소리를 듣네 / 聽溪流之泠泠 잠시 회촌(檜村)에서 쉬었다가 / 乍憇息於檜林 느지막에 암정으로 옮겨 가 기대니 / 晩徙倚於巖亭 주인에게 어진 덕 많아 / 感主人之多賢 지나는 곳마다 기쁜 정을 다함에 감격하네 / 竭忠歡於攸經
오시(午時)에 칠룡재(七龍齋)에 들어갔는데 단(壇)에 있는 은행나무가 매우 높고 컸다. 다시 도장재(道章齋)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오시에 회촌(檜村)을 방문했는데 이무백(李武伯)이 음식을 차렸다. 느지막에 호호정(浩浩亭)에 올랐는데, 호호정은 황강(黃江) 가에 있다. 뒤에는 매우 높은 절벽이 자못 기이하고 사랑스러워 볼만하였다. 주인이 애써 가지 못하게 만류하였으나, 집을 떠난 날이 오래되어 머물기 어렵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고 출발하였다. 칠룡재ㆍ도장재와 호호정은 모두 안씨(安氏)의 것이다.
모래 언덕 따라 강 건너니 / 循沙岸而乃濟 이미 어둑어둑 밤에 접어들었는데 / 已昏昏而入夜 숙취가 아직 깨지 않은 채 / 仍宿醉之未醒 노씨의 강정(江亭)에 오르니 / 陟盧氏之江榭 강 물결이 멀리 하늘에 닿고 / 江波逈其際天 산 안개 자욱한 것이 아침에 걷히네 / 山霧鬱其朝罷 남시에서 배를 얻어 / 問買舟於南市 함께 타고 물길 따라 내려가기를 도모하네 / 謀竝載而沿下
해가 질 무렵 강을 건너 현창(玄倉)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에 구할 수 있는 상선(商船)이 있어서 흐르는 강물을 따라 함께 내려가기로 계획했는데, 호호정(浩浩亭)으로부터 여기에 이르자 떠난 사람이 반에 가까웠다.
장풍을 타고서 돛을 걸고 / 乘長風而掛帆 봉창을 들어 올려 마음껏 보니 / 揭篷戶而騁眸 산세는 쉬지 않고 북쪽으로 달리고 / 山駸駸而北騖 물살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흐르네 / 水袞袞而東流 사공에게 노 젓지 말라 하고 / 戒篙師以弭棹 배를 물 가운데 가는 대로 두고는 / 任溯洄於中洲 시 외우고 뱃전을 치니 / 誦詩章而扣舷 어룡을 춤추게 하고 해오라비 놀라게 하네 / 起魚龍而驚鷺鷗
배가 처음 출발하자 바람에 의지하여 돗자리를 걸었는데, 너무 빠른 것을 꺼려서 배를 부리는 사람에게 명하여 노 젓는 사람을 그치게 하였다. 7언 절구 1수를 읊어서 쓰기를 마치고, 창(唱)을 잘하는 사람에게 노래하게 했는데 매우 들을 만하였다.
서쪽 언덕에 올라 조금 머무니 / 登西岸而少留 술상이 훌륭한 것 기뻤는데 / 喜杯盤之濟勝 석양에 이르러 배로 돌아오니 / 趁斜陽而返舟 아직 남은 흥취 다하지 못했네 / 尙不盡其餘興 맑은 물결은 담담하게 일렁이고 / 澄波澹其淪漪 흰 모래는 얕게 깔려서 이어졌네 / 白沙淺其連亘 배가 십 리를 못 갔는데 / 舟未行於十里 해가 이미 서령에 있네 / 日已在於西嶺
오시(午時)에 앙진(仰津)에 배를 대고 언덕에 올라 조금 쉬는데, 노장(盧丈) 충일(忠一)이 술과 안주를 가져오고 변생(卞生) 하서(廈瑞)가 점심을 차렸다. 먹기를 마치고 배로 돌아와 오여정(吾與亭)을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 출발했는데, 배 속도가 매우 느렸기에 몇 리 가지 못하고 날이 어두워져서 갈 수 없었다.
산기슭의 작은 길 찾아 / 尋山麓之小逕 내제(來濟)의 주인 없는 집 방문하니 / 訪濟陽之遺堂 비록 행차 바쁘지만 / 雖行李之劻勷 이끌어주는 데 따라 몸을 일으켜 보니 / 賴指引而扶將 이슬은 어이하여 흥건하며 / 露何爲乎厭浥 달은 어이하여 오가는가 / 月何爲乎徊徨 벗을 그리워하지만 보지 못하여 / 懷美人而不見 마음을 어루만지며 상심만 더할 뿐 / 祗撫心而增傷
이중립(李重立)ㆍ중가(重可)가 내제(來濟)로 맞아들여 유숙했다. 이 유람의 훌륭함은 오늘날 얻기 어려운 것인데, 중재(重載)가 세상을 떠난 지 한 해가 지났으니, 나로 하여금 추념(追念)하게 하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을 떨구었다.
백사장 머리를 돌아 닻을 풀자 / 回沙頭而解纜 지척의 거리에 오산을 바라보니 / 望烏山於咫尺 어찌 날리는 빗발이 허공에 가득한가 / 何飛雨之滿空 한 자리에 풍류를 돕네 / 助風流於一席 홀연히 정자의 편액이 보이니 / 忽亭楣之入眼 천 길의 높은 절벽 굽어보고 섰음이여 / 俯千仞之危壁 풍영의 옛 뜻 멀리 생각하매 / 緬風詠之遐志 누가 능히 옛 자취 이을까 / 誰能繼夫往跡
내제(來濟)로부터 배에 올라 물을 따라 내려가는데 중류(中流)에서 비를 만났다. 사면의 구름 낀 산의 경색(景色)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공을 재촉하여 노를 저어서 오여정(吾與亭)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용화산이 울창하게 바라보이니 / 龍華鬱其在望 옛 현인이 남긴 자취 아득하네 / 邈古賢之前塵 하물며 강호는 다함이 없으니 / 矧江湖之無盡 또한 어찌 수고롭게 나루를 물을까 / 亦何勞夫問津 그러나 행락을 다하기란 불가하니 / 顧行樂之不可極兮 어찌 배 돌리고 수레 돌리지 않으랴 / 盍返輈而回輪 옛 노를 수리하여 다시 찾기는 / 理故棹而尋盟 다만 내년 봄을 기다리리라 / 聊以待乎明春
18일에 돌아왔다. 처음에는 강을 따라 내려가 곧바로 용화산(龍華山)에 이르려고 하였으나, 비가 내릴 기미가 계속되기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배를 돌려 진창(陳倉)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19일에 강림재(江林齋)에 이르고 어부정(漁父亭)에 올라 유숙했는데 만구(晩求) 선생이 드디어 출발했다.
옥계유산록玉溪遊山錄 천사 김종덕金宗德
나는 젊은 시절 질병이 많아 잘 걷지 못하니 걸음을 대신할 방편이 없으면 수 십리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선善을 좋아하 는 정성과 산수山水에 대한 흥취興趣에 있어서는 남보다 못하지 않았 다. 대개 일찍이 퇴곡退谷 권자강權子剛 어른과 청량산淸凉山47)을 유람 하였고, 친구 이학보李學甫와는 도연陶淵을 유람하였으며 또한 이중칙 李仲則, 중휴仲休, 치춘穉春과 함께 용담龍潭과 고무鈷鉧의 사이를 거닌 적이 있다. 그런데 수년 이래 중한 병病으로 다리의 힘이 빠져 마을이 나 집안의 뜰에 거둥할 때에도 지팡이에 의지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
46) 김종덕(金宗德, 1724~1797):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자는 도언(道彦), 호는 천사(川 沙),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1753년(영조 29)에 생원 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직 학업에만 열중하였다. 저서로는 천 사집ㆍ성학입문(聖學入門)ㆍ예문일통(禮門一統)ㆍ석학정론(釋學正論)ㆍ 정본고증(政本考證)ㆍ초려문답(草廬問答)ㆍ예서(禮書) 등이 있다. 47) 청량산(淸凉山):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에 있는 산이다. 높이 870m. 태백산맥의 줄기인 중앙산맥의 명산으로서 산세가 수려하여 ‘소금강(小金剛)’이라고 한다
으니 이 유람을 어찌 감히 바라겠는가? 주방周坊은 백리에 떨어져 있는 산이고, 옥계玉溪는 주방의 곱절이 되는 거리에 있지만 며칠을 소비하 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구름 덮인 봉우리와 흰 돌을 마음 속으 로 왕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녕 새장 속의 학鶴과 같아서 다만 멀리서 구름을 바라보며 발돋움할 뿐이었다. 금년 여름에는 병이 더욱 심해서 그루터기를 잡고 집안에서 지냈으 니 생각이 둔하고 막혀 자못 스스로 떨쳐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가을장 마가 비로소 개자 호상湖上선생48)이 이석포李石浦 어른과 가마를 타고 가기로 약속하였다. 내가 곁에서 시중들며 이틀 밤을 함께 지내면서 스스로 함께 하려 했다. 마침 평소의 소원이었는데 애초부터 적막한 교분이 아님이 없었다. 얼마 있다가 오계공梧溪公도 또한 지팡이를 짚 고 나막신을 신고 오셨는데 선배들의 좋은 말씀을 극론極論하시어 우 둔한 자를 깨우침이 두터웠다. 일년의 반을 할애하였으니 세속을 벗어 나려는 분수가 있음을 알겠다. 며칠이 되지 않아 선생께서 갑자기 호 상湖上으로부터 가마를 준비하도록 명령하셨는데 당숙堂叔 이공李公 어른은 이미 먼저 자리에 계셨으며 종자從子 치춘穉春과 서제庶弟 달정 達靖도 걸어서 뒤따랐다. 이날이 곧 9월 15일 갑오甲午이었다. 문안인 사를 마치니 선생이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시기를 “근간에 우연히 달 정達靖으로 하여금 청송靑松 지역의 일을 맡아 처리하게 했는데 곧 스
48) 호상(湖上)선생: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0~1781)을 가리킨다. 김종덕(金宗 德)의 스승이다. 그의 학문은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저서에 대산문집ㆍ약 중편제(約中編制)ㆍ사칠설(四七說) 등이 있다.
스로 몸소 옥계玉溪를 답사하고 왔다네. 전하는 말이 매우 자세하여 마치 운하雲霞의 기운이 입안에서 뿜어져 나와 어느새 사람들을 감동 시키고는 나가버리는 듯하였다네. 달정達靖에게 앞서서 인도할 것을 부탁하고 무리들을 뒤따르게 한다면 곧 이곳에 이를 수 있을 것이네.” 라고 했다. 이공李公 어른이 소리 내어 응답하기를 “좋다. 내 장차 따 라가리라. 이 가운데 또 갈 사람이 있는가?”라고 하여 곧장 물러나 계 획을 세웠다. 어머니도 기뻐하며 이李군을 데리고 가는 것을 좋아하였 다. 다음날 을미乙未에 마침내 천성天成에게 수레를 빌려 10일 간의 양 식을 가지고 길 떠날 차비를 하여 나왔다. 행장은 낡은 시집詩集 한 권 뿐이었다. 일행이 청학사靑鶴寺 아래에 도착하니 선생이 나를 돌아 보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시詩를 제법 지을 줄 알아 앞으로 매우 진 전이 있을 것이네.”라고 하셨다. 사양하였지만 마침내 장차 시를 짓게 할 명령이 있음을 알았다. 이윽고 치춘穉春에게 명하여 퇴계시 중에 천川 자를 집어내어 5언 율시律詩를 짓게 하고 날이 저물면 운자韻字의 시詩를 거두기로 했다. 황학동黃鶴洞을 경유하여 좁은 길의 끝에 이르니 이곳은 샘과 돌과 단풍잎뿐이었다. 발길 닿는 곳에서 혹 시를 읊조리고 혹은 정자터에 머물렀다. 정현鼎峴을 오르니 햇볕이 산에 가려지고 말발굽의 쇠가 이 탈하여 충언忠彦과 서로 만나기로 기약한 것이 어긋났다. 선생은 개울 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것을 돌아보고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물줄기가 처음 시작한 곳은 이와 같이 미세하지만 하류의 큰 흐름은 들판을 넘 치는데 이르니 무릇 작은 데서 삼가지 않으면 말류末流의 폐단이 이와 같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고개를 내려오기 전에 덕항德巷에
이르렀는데 이공李公 어른이 타던 말이 먹이를 먹고 병이 났다. 우연히 이웃에 사는 조생趙生이 자못 의술이 있고, 급한 사람에게 태만히 하지 않음을 알고는 그의 능력을 시험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동트는 새벽녘 곧 밝아지자 출발했다. 이공李公 어른은 앞에다 병든 말을 쉬게 하고 조생趙生의 소를 빌려 타고 가면서 말씀하시기를 “진 실로 조생趙生이 아니었다면 이번 여행은 위태로웠을 것이네. 그로 하 여금 저 곳에 머물게 한 것이 다행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셨다. 선생 이 말씀하시기를 “천도天道는 진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어 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일을 만나 나타나는 것이 있어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네.”라고 하였다. 잠시 사 이에 시내와 숲이 점점 밝아져 앞길이 어둡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말 씀하시기를 “저물녘의 해는 비록 심히 어둡지는 않으나 점점 어두워 져 가고, 장차 새벽이 오려 할 때는 비록 심히 밝지는 않으나 점점 밝 아지려 한다네. 그러므로 여행자가 마땅히 살펴야 할 것이네.”라고 하 셨다. 어제 시를 완성하지 못했는데 또 가歌 자를 집어서 7언 율시를 지었 다. 현은玄隱의 상사上舍 조상변趙相抃의 집에 도착했다. 주인과 자식과 조카 등 7~8명이 의복을 갖추어 입고 맞이하였다. 각각 철편鐵片을 가 지고 말발굽을 보완하고 닭을 잡아서 대접했다. 상사 조상변은 또한 마부를 부르고 종들을 타이르며 따라갔다. 내가 장난삼아 말하기를 “이치를 헤아려 이치를 행하는데 힘쓴다면 으레 서서 이야기하는 사 이에 용기있게 결단하는 것이 쉽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주인이 웃으 며 말하기를 “저는 다만 공께서 능한 바를 잘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 고 했다. 그의 아우 상언相彦과 미중美仲은 방금 중복重服을 입었으나
아직 장사葬事를 지내지 않았다. 이에 “오직 김군에게 양보하면 이번 여행은 가장 부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미 식사를 하고 다시 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주머니 속에서 퇴 계집이 보였다. 주인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무슨 물건이기에 장차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흔들게 합니까?”라고 했다. 이공李公 어른이 농담하고서 넣어두었다. 주인과 나그네가 걸어 안덕安德49)으로 향했다. 고상한 놀이에 억지로 끌려가니 저절로 다리의 힘이 피곤하여 걸어가 라는 명령이 있을 때마다 문득 놀라고 두려워 열경說卿의 시권詩卷을 보 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여러 곳의 인사를 두루 토론하며 충언忠彦이 대인大人을 모시는 곡으로 들어갔다가 인하여 송학서원松鶴書院50)으로 갔다. 당堂에 오르니 서원의 이름이 붙은 편액도 없고 양쪽 옆에 재실 齋室의 명칭도 없었으며 또한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머물 만한 승경도 없었다. 다만 고사古事 한 권과 애서厓西 윤희정尹希正의 시집詩集이 있었는데 훑어볼만했다. 치춘穉春이 여행 중의 일기를 관리 했다. 현은玄隱으로부터 일행은 나누어 덕현德峴을 향해가서 내일 와서 모일 것을 약속했다. 나는 번갈아가며 직분을 맡고자 했으나 피곤하고 혼미하여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황혼 무렵에 상사上舍 권백중權伯仲 어른이 뒤쫓아 와서 행로를 장차 어느 곳을 경유하여 가는지를 물어 보고는 “곧바로 큰 고개로 향하는
49) 안덕(安德): 경상북도 청송에 있는 지명으로 현재는 안덕면이다. 50) 송학서원(松鶴書院):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에 있는 서원이다. 퇴계(退溪) 이황(退溪),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배향하고 있 다.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하기에 “우리들 계획과 차이가 있습니다. 방 호方壺 천지에 어찌 한번 만날 기약이 없겠습니까?”라고 했다. 정유일丁酉日에 상덕사尙德祠를 알현함에 선생께서 옷을 걷고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니 엄숙하고 공경하는 뜻이 행동거지에 드러나다. 물 러나서는 이분과 같아지기를 생각했다. 백세의 뒤에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고 기뻐하여 공경을 일으킴이 이렇게 이르게 할 수 있으 며, 또한 어찌 백세 전에 감응하여 흥기했던 것을 이렇게 이르게 할 수 있는가? 송학서원松鶴書院의 주인 상사上舍 김장민金長民과 방호정方 壺亭의 주인 선비 조원섭趙元燮이 사람들을 이끌고 방호정方壺亭으로 향했다. 회원 수 십 명이 따랐고 치춘穉春과 후보厚甫도 와서 이르렀다. 여러 어른들은 모두 걸었는데 유독 나만 군택君澤 권영수權嶺秀의 정사 精舍에서 머물게 하고 말을 타고 피로를 풀게 해주었다. 의리상 사양할 수 없게 된 후에야 허락하였지만 거의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공李公 어른은 그의 노고에 감탄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선생도 또한 그에게 맡길 뿐이었다. 징검다리를 건너 모래 위에 앉았다. 옛날에는 다만 모래사장일 뿐이었으나 이번 여름에 강물이 모래를 침식하여 그 뼈대를 드러내니 암석이 쟁반 같고 밥상 같이 구슬을 꿴 듯하여 앉을 만하고 걸터앉을 만하였다. 우러러 보니 푸른 벽에 구름 이 얽혀 있고 칼이나 뿔 모양을 하고 있는 산이 하늘에 닿아 있는데 그 가운데 작은 누대가 있다. 붉은 빛과 푸른빛이 밝게 비치고좌우에 걸린 시편은 비늘이 겹쳐진 듯 빛났다. 바야흐로 정신이 황홀해져 내 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듯 했다. 여러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나의 병 들러 고달픈 모습을 위로했다. 이에 내가 저지하며 말하기를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가벼이 한번 거동하여 이미 바람부는 누대와 깊숙한
집 가운데 있으니 진세塵世를 돌아본들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주인이 고기를 잡아 회膾를 마련하고 고기를 구우니 물의 음식과 뭍의 음식이 모두 갖추어졌다. 그 사이에 술을 두니 강산江山의 멋이 지극했 다. 등잔불 아래에서 앞선 현인들의 시집을 읽고 ‘풍風’자 운에 차운次 韻하였다. 무술일戊戌日, 이미 세수를 하고 어르신께 문안인사를 올리니 이미 두 권의 책이 갖추어져 있었다. 한권은 대중臺中으로 보내고 한 권은 행사行史에게 주었다. 대중臺中의 것은 선생이 기억하여 종덕宗德이 적 었고, 행사行史의 것은 권상사權上舍 어른이 기억한 것을 김장민金長民 이 적었다. 성명姓名과 나이와 사는 곳을 모두 기록했다. 술을 마시고 서로 인사하고 내려오니 말이 이미 시내 언덕에 차례대로 있었다. 권 상사가 앞서고 이공李公 어른이 다음, 선생이 그 다음, 조상사趙上舍와 내가 앞뒤가 되었다. 후보厚甫와 치춘穉春과 이李군은 걸어서 갔다. 어떤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뒤를 따라 왔는데 곧 조상필趙相弼 태로台老씨이다. 일행이 큰 고개의 주점에 도착하자 충언忠彦이 이미 멀리 유람할 장비를 갖추고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개 또한 가져 온 것을 조금씩 남겨 주객主客의 예로 삼았다. 동북東北은 한 골짜기로 부터 형세가 더욱 높아진다. 마부는 위로 고삐를 당겨 넝쿨이 드리워 진 곳을 찾았는데 자주 포도와 오얏 등으로 목을 축였다. 서리 맞은 뒤라 달고 새콤함이 매우 맛있다고 한다. 오도산吾道山을 올라 잠시 쉬 었다. 태로씨는 상수리 열매를 많이 주워 먹기를 그만두지 않아 그 이 유를 물으니 이 산의 상수리 열매는 맛이 밤알과 같다고 하였다. 산을 내려오니 속수촌涑水村이다. 겨우 말을 쉬게 하였는데 날이 이미 어둡 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마을에서 말을 풀고 종을 쉬게 했다.
병암屛巖과 거리가 멀지 않아 저버릴 수 없어 걸어서 외병암外屛巖으 로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마치 두 개의 병풍이 둘러싸서 서로 닫아 걸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내병암內屛巖으로 올라가면 꼭대기가 모나고 뾰족하며 가파르고 높아 마치 나열된 창이 둘러 모시는 듯하였다. 아 랫면은 평평하게 이어지고 열리는데 여헌旅軒선생이 일찍이 이곳에서 시를 읊조렸다. 그래서 ‘여헌대旅軒臺’라고 부른다. 병암屛巖의 안에 하 나의 서원이 감추어져 있는데 동주洞主(서원원장)와 서로 알지 못하여 지팡이를 짚고 돌아왔다. 조상사가 뒤늦게 사람과 말을 몰아 도착해 말하기를, “서원 뒤 한 골짜기에 승려의 암자가 있는데 하루 묵을 만합니다. 동문洞門 수 리里 에는 바위로 펼쳐져 있는데 또한 나쁘지는 않습니다. 밤에 절에 들어 가면 절의 승려는 공경하게 대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열경說 卿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미 장로長老를 모시는데 한 번의 경계가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열경說卿이 말하기를 “어른을 모시기 때문에 능히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밤이 깊어지자 수레와 말에서 인사하 는 소리가 있고 불빛이 속수촌涑水村에 빛나고 수십 명이 동주와 함께 맞이하였다. 다음날 닭과 술의 즐거움이 있을 터 그 두터운 성의를 저 버릴 수 없으나 행사行事로 전전轉轉하다가 차질이 생겨 다시 하루가 지체되니 일을 이루지 못할까 매우 두려울 뿐이었다. 힘써 감사하고 다만 밤중에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기해일己亥日 다시 동암洞巖을 나와 서원에 이르기 전에 개울물을 거 슬러 동쪽으로 가서 수십 리里에 이르니 골짜기가 평평하게 열렸고 들 판은 넓고 한가로웠으며 백성들은 자못 풍요로웠다. 마을 이름을 물으 니 ‘화장花場’이라 하고, 마을 안에 고高씨 성을 가진 양가良家 자제가
글자를 조금 안다고 하였다. 마을 앞에 작은 시내가 둘러싸고 흐르는 데 매우 특별함은 없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자 바위가 계곡을 끼 고 펼쳐졌는데 높이는 대臺를 이룰 만하고 아래는 둥글게 앉을 만했 다. 언덕은 방정하며 맑은 샘물이 고여 있다. 또한 드문드문 어지러운 바위가 시내에 흩어져 있었다. 화산花山(안동)과 문소聞韶(의성)에서 필적할 만한 것을 구하기는 어렵다. 몇 이랑의 옥토가 시내를 베고 누 었으니 여기에 집을 짓고 이곳에서 밭을 간다면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 가? 말에서 내려 주위를 돌다가 돌아와서 뽕나무 아래서 이틀을 잤다. 또한 수십 리里나 긴 골짜기가 있어 시내를 따라 들어가니 넝쿨이 덮여 있고 회나무와 녹나무가 우거진 가운데는 평원이 있다. 거칠게 우거진 흰 띠풀과 누런 갈대를 한번 바라보니 끝이 없다. 후보厚甫가 나 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곳은 제방을 쌓고 열 만한 곳으로 힘이 없음을 걱정할 뿐입니다. 만약 손을 잡고 모둠을 맺어 나무를 베고 땅을 개간 하여 기장, 벼, 삼, 콩을 심는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에도 또한 많이 뒤 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오히려 이 한 구역을 남겨서 직방씨 職方氏51)가 기록한 것에 넣지 않은 것은 또한 기다리는 자가 있어 그 러한 것인가? 물의 근원이 있는 곳에 하늘에 닿은 큰 고개가 있다. 굽 은 것은 양의 창자 같고 위태로움은 꼬불꼬불한 구비와 같다. 다만 나 무와 풀로 얽힌 곳을 찾아 나아가니 속칭 ‘간장현肝腸峴’이라고 하는데 이는 양의 창자[羊腸]을 잘못 부른 것이다.
51) 직방씨(職方氏): 각 지방의 일을 맡아 보는 관직이다. 주례(周禮)
산을 내려와 고천高川에 있는 김남원金南原의 분암墳庵에서 쉬었다. 청송, 영덕, 영천, 경주의 분기점을 사이에 두고 사방이 막혀 파산巴山 과 같이 결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지 오래 되었다. 이에 바위에 시詩 를 완성하고 각자 호號를 적어 두었다. 권씨 어른은 ‘초파蕉皤’라 했고 이씨 어른은 ‘호수湖叟’라 했고 선생은 대산大山이라 했고 나머지도 모 두 이름을 적어 두었다.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이번 여행에 시령詩令 은 다만 일과日課를 얻을 뿐이니 감히 정도에 지나쳐서는 안 된다. 주 부자의 이완, 긴장하는 사이(변화)에 항상 정도에 지나침을 경계로 삼 았다.”라고 했다. 그러나 없는 점이 있다. 늦추고 당기는 사이에 100여 편에 이르게 될 줄을 알지 못했으니 풍치風致가 드러나 그만둘 수 없었 기 때문이다. 도중에 살아있는 물고기를 사서 삶았는데 이에 신선하기가 방금 잡 은 것 같아서 해문海門에 가까움을 알 수 있었다. 초파蕉皤 어른이 말씀 하시기를 “이곳으로부터 둔세동遯世洞을 향해 갈 수 있으니 각각 힘을 쓰시오.”라고 했다. 암자의 승려에게 물은 뒤에 일행은 일곡一曲을 넘 어 앞으로 나아가 큰 골짜기에 다다랐다. 먼 지점을 바라보니 흰 돌이 줄지어 있고 동문洞門은 겹겹이 쌓여 있어 신령스럽고 괴이하며 기이 하고 분명하여 신선이 사는 곳이 아님이 없었다. 진실로 산의 틈으로 물이 흐르는 길이 있어 반드시 얼음 같은 옥으로 꾸며져 있는데 엿보 니 진보珍寶의 창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곳으로부터 둔세동遯 世洞을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물처럼 늘어선 산마루에서 놀라서 보면서 망연자실茫然自失하였 다. 장차 곧바로 계곡에 이르러 점차 발걸음을 옮겨 따라가고자 하였 다. 우연히 뒷길로부터 어떤 주민이 삿갓을 쓰고 새끼를 꼬며 말하기
를 “마을의 이름은 ‘미륵동彌勒洞’이라고도 하고 ‘둔세동遯世洞’이라고도 합니다. 골짜기를 따라서는 도달할 수 없으니 다만 나를 따라 오십시 오.”라고 했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 평평한 길로 징검다리를 건너 언덕 에 올랐다. 조금 남쪽으로 가니 소나무와 삼나무가 해를 가리고 넓고 평평하여 주거할 만했다. 주민이 말하기를 “말을 버리십시오.”하였다. 윗옷을 걷어 올리고 지팡이를 잡고 신을 신고 비스듬히 언덕 옆으로부 터 동쪽으로 수백 보를 걸어가니 동문洞門이 걸려 있는 것이 마치 허공 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양옆의 석주石柱가 문이 되었는데 모나고 가지 런하였다. 희게 빛이 비치는 곳에 물이 스며들어 방울져 그 아래에 맑 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형세가 단단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에 두려워 의심이 생긴다. 아마도 그 안에는 반드시 기이한 광경이 있을 것 같다. 문門으로는 갈 수가 없어 언덕 옆을 따라 나아갔다. 흙이 다하고 돌이 펼쳐져 돌사다리를 걸어가니 몸이 높기를 기약하 지 않아도 저절로 높아졌다. 다시 이와 같이 내려가 골짜기를 넘은 뒤 에야 감춰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골짜기 가운데 하나의 돌이 있는데 크기가 작은 집 같았다. 요로要路에서는 뜻을 정성스럽게 해야 하는데 또한 둥글어 틈이나 층계가 없어 사람들이 모두 발을 붙이고 손으로 안아 가까이 붙어 배로 움직여 그 꼭대기를 넘은 연후에 비로소 발을 모아서니 몸이 위로 솟아 오른 듯했다. 그러나 반드시 한번 출발하여 마주 선 돌을 감당해야 넘어지거나 떨어짐을 면할 수 있으니 나와 같 은 자가 어찌 도달할 수 있겠는가? 다만 돌이 매우 높지 않고 물도 매우 깊지는 않다. 잘못 도모해도 몸을 적시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니 운명론運命論에 힘써서는 안 된다. 나는 곧 뒤쳐 있다가 몸을 떨쳐 힘을 발휘하니 하나같이 축하하는
말이 이미 떠들썩했다. 여러 사람들이 양쪽에서 초파蕉皤 어른을 부축 하여 건넜다. 열경說卿은 돌에 앉아서 말하기를 “작년에 동도東都[경 주]의 선비들이 이곳에서 놀았는데 일행 중에 한 사람이 물에 떨어졌 다가 몸을 뒤집어 나왔는데 기록에는 ‘우리들은 다행스럽지만 어룡魚 龍은 불행이다.’”라고 했다 한다. 이른바 좋은 농담이나 사람을 상하게 하는 데는 이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앞의 한 무리가 먼저 가서 한 층 더 올라갔다. 머리를 들고 골짜기를 향하니 모두가 한번 놀라 감동 하는 소리가 마치 사나운 짐승과 뛰어오르는 물고기를 만난 듯하더니, 이윽고 놀라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후보厚甫와 치춘穉春은 앞을 향해 날듯이 들어가고 선생은 빙그레 웃 으시고 초파蕉皤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뒤를 따르며 시험 삼아 한번 엿보고는 한마디 말을 낼 겨를도 없었다. “천하에 다시 이런 곳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선생이 천천히 말씀하 시기를 “옛 사람의 문자文字 중에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초파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한유韓愈의 남산南山 시詩가 혹 가깝 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대저 골짜기를 가득 채운 것은 모두 돌뿐이었고 한 덩어리의 흙이 붙어 있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다만 이곳은 은빛 물결이 옥을 부수 듯이 맑은 소리를 울리며 흘러 내려갈 뿐이었다. 땅의 형세가 바뀌어 층계를 이루었는데 깊은 것은 두터운 땅을 뚫을 만하고 높은 것은 푸 른 하늘에 닿을 만하다. 돌의 색은 눈과 같다. 작은 것은 둥근 알약 크기의 술잔 같고 큰 것은 산봉우리 같다. 뾰족한 것은 송곳 같고 삼엄 하기는 칼이나 창 같다. 높은 것은 구리 기둥 같고 모난 것은 쇠로 만 든 도장 같다. 움푹 파인 곳은 절구 같고 우묵한 곳은 큰 솥 같다. 무성
하게 서 있고 가득이 쌓여서 오히려 각각의 경계를 구분 짓는다. 서로 의지하거나 비교하지 아니하고 조각조각 맑은 못은 은은히 돌 밑에 나타난다. 좌우의 푸른 벽은 머리를 높게 쳐들고 어깨를 솟아 올 려 멀리 바라본다. 이르는 곳은 혹 넋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아찔하여 반드시 머리를 숙이고 눈을 돌린 뒤에 안정이 된다. 달려서 가까이 임 하니 바로 눈을 내려 마당을 보는 것 같다. 바다로 들어가는 용을 관찰 하니 바로 이른바 인자仁者는 보고 인仁이라 말하고 지자知者는 보고 지知라고 말할 것이다. 조금 있다가 주민이 돌아갈 계책을 청했다. 돌 웅덩이에 이르니 ‘월 성이공헌성月城 李公獻成’과 ‘문소이공의태聞韶 李公宜泰’라는 이름을 식 별할 수 있게 새겨 두었다. 무자년戊子年(1768)에 내가 이곳에 놀러왔을 때에는 옆에 ‘둔세굴遯 世窟’이라는 세 글자를 적어 두었는데, 아! 천지의 기틀은 가히 누설漏 泄을 다했다고 할 만하도다. 조물주가 이곳을 만들면서 한 개의 별도 의 기량으로 발을 붙여서 이리저리 거닐며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땅을 두지 않게 한 것은 어찌해서인가? 아니면 고의로 넘겨볼 수 있는 길을 끊어서 여행객으로 하여금 알 수 없게 한 것인가? 알려주더라도 또한 붙일 곳이 없게 하였으니, 세상에서 숨게 할 뿐만이 아니라 아울러 세 상을 피하려는 사람이 이곳으로 숨게 하였다면 이 이름도 또한 산을 지적하여 말한 것인가? 치춘穉春으로 하여금 이곳에 성명을 새기게 했 다. 새기는 일을 마치고 고을을 나오기 위해 옷을 입고 말에 올랐다. 앞길 수십 리는 모두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한 곳으로 곧 마치 학鶴을 타고 용龍을 채찍질하며 물을 따라 삼청三淸과 십주十州의 경계를 도는 것 같다.
바야흐로 마을을 선택하여 잘 곳을 정하려고 시내를 건넜다. 하나의 언덕이 가파르게 솟아올라 높이가 수십 길이 된다. 그 위에 논 15이랑 이 있다. 대개 나무를 깎아 공중에 걸쳐서 떨어지는 물을 논으로 흘러 가게 했다. 사면四面이 마치 옥을 깎아 정자를 세운 듯하다. 고기를 기 르고 술잔을 띄울 만하며 연꽃을 심고 죽순을 채집할만하다. 내가 말 하기를 “이곳을 점지한 것은 병암屛巖은 마땅히 하풍下風이 있어서이 고, 화장花場은 마땅히 퇴청退聽이 있어서이다.”라고 하니 선생이 미소 를 지으셨다. 그 마을 이름이 ‘두승斗升’이라는 곳에서 잤다. 언덕을 물 으니 ‘당고塘皐’라고 했는데 저속하여 고쳐서 ‘마도馬到’라고 부른다는 데 ‘청영대淸暎臺’라고 하면 가능하겠는가? 아침에 일어나 시를 짓고 성잠星岑을 지나 북쪽으로 갔다. 골짜기가 밝고 물이 맑아 마치 밝은 횃불을 들고 지나가는 듯하다. 만나는 돌은 모두가 서있는 얼음 같고, 만나는 물은 모두가 거울을 펼친 것 같다. 만나는 바위틈은 모두가 폭포이고, 만나는 웅덩이는 맑은 연못이다. 산뽕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소나무와 삼나무 가운데에 펼쳐있고 뿔과 뼈 같이 가파른 산은 가을 털의 자세함까지도 찾고자 하나 찾을 수 없다. 다만 한 필匹의 희게 누인 명주를 펴서 무늬에 분을 바른 듯하다. 속칭俗稱 구룡담九龍潭이 있다. 돌 잇몸이 솟아 나온 것은 ‘수옥대漱玉 臺’라고 한다. 돌에 물이 고여 상자 모양을 한 것을 ‘세심대洗心臺’라고 하는데 대산大山선생께서 이름을 지어 이곳에다 새겨둔 것으로 이른바 ‘용연龍淵’이다. 주민이 말하기를 “고기가 근원을 찾다가 이곳에 이르 면 멈추게 되는데 돌의 층계가 이곳에서 끊어지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존재存齋의 도연시陶淵詩에 ‘한번 초탈하여 비록 어부 에게 잡힐지라도, 궁원에 도달하지 못해서 정녕 쉬지를 못하네.[一超
縱被漁人得 未達窮源定不休]’52)의 구절을 외우셨다. 달達과 원源자 를 명하여 시를 짓게 하여 치춘穉春으로 하여금 옮겨 쓰게 했다. 8~9리의 동문洞門을 향하니, 자못 보호하는 시설의 형상이 있다. 다 시 한 번 뿜어내고 한번 깨어남을 알지 못하니 또한 옥계玉溪의 경계가 아니겠는가? 길 왼쪽에 절이 있다. 후보厚甫로 하여금 암자에 들어가 서 밥그릇을 갖추어 오게 했다. 곧장 시내의 흐르는 물을 따라 내려갔 다. 천지조화의 심오한 비밀은 평지를 향하니 형세가 점점 넓어진다. 해와 달이 밝고 바람과 구름이 한가롭다. 좌우는 넓게 트여 자리를 정 해 평평하게 깔았다. 바위와 돌이 이리저리 펼쳐 있고, 샘과 못이 그윽 이 큰물을 이룬다. 돌 위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곳이 무수無數하다. 또한 머리 부분은 넓고 평평하고 우묵한 곳에는 물이 고여 마치 작은 못 같은 것이 많다. 그리하여 장마 비가 뿌리고 스며들어 쌓였으며, 공중의 물총새가 물에 적셔 윤택하게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바람과 태양이 쬐어주지 않는다면 손해를 입었겠는가? 아니면 또한 홍수와 큰 물결이 언덕을 오르고 내와 계곡이 평평하여 물이 떨어지는 곳에 이르 러서는 그 남은 물을 모아서 고갈되지 않게 함인가? 선생이 말씀하시기 를 “선경仙境은 참으로 이곳이다.”라고 했다. 가운데 큰 돌이 있는데 모양이 둥근 항아리 같다. 차지하여 앉을 자 리가 10이랑으로 높이는 구름을 뚫고자 한다. 좌우左右와 전후前後는 의
지할 곳이 없으니 이른바 군자君子의 굳셈이다. 위 머리는 조금의 흙을 이고, 섞임에 의탁한 것이 돌인가? 봉우리인가? 더욱 기이한 것은 눕 고 서고 가로로 세로로 되어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둥근 돌의 봉우리 아래에는 또한 솟아 오른 것은 없고, 다만 드러내어 누어 굽게 돌게 하여 등급을 따라서 이치를 찾는다. 걸어서 앞으로 향하니 바위의 형 세가 밝은 거울에 놀라는 눈빛을 다하고자 한다. 물빛은 사람을 위협하 여 고개를 돌리게 한다. 또한 팔각산八角山으로부터 내려와 한줄기 흐 르는 물을 통과하여 이곳에서 합친다. 두 골짜기의 뛰어남이 이곳에 모였다. 돌에 의지하여 내려 보니 돌은 땅에 펼쳐진 것이 흑백黑白으로 섞여 있어 무늬 있는 비단으로 짠 것 같다. 조가비의 화석이 곁에 누워 있는 것은 거북이가 물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것 같고, 개구리가 머리 를 돌리는 것 같다. 물이 한쪽 방향으로 흘러 원도 아니고 모나지도 않은 것이 한 이랑 정도 된다. 또한 그 위에 별도로 하나의 층계가 있 는데 바로 벽에 분을 바르고 창문에 비단을 붙인 것 같다. 모가 나도 절뚝거리지 않고 바른 것도 치우치지 않았다. 물빛은 푸르고 쪽빛이며 돌의 무늬는 널리 밝히는데 그 넓기가 두 배나 된다. 또한 그 위에 별도로 한 층계가 있는데 바위 돌이 크게 펼쳐져 있어 가히 백 천 명의 모임을 수용할 만하다. 가운데 가라앉은 곳은 금궤金 櫃와 옥을 감추어 마치 먹줄로 다스린 것 같다. 길이는 100보步이고 넓기는 배 한 척을 수용할 수 있다. 그윽이 어두워 연못은 조용하며 깊이는 수 길에 이른다. 이곳에서 팔각산八角山의 물이 깔려서 모여 이 루어진 것이다. 3층은 각각 언덕 지역을 이루었다. 위에서는 아래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반드시 사 다리를 잡고 올라 빙빙 돌은 이후에 볼 수 있다. 참으로 천지의 기운
사이에 종회鍾會가 연마硏磨하고 유약有若이 마치 행함이 있어 행해지 는 것 같음을 알았다. 대저 앞에는 향로봉香爐峯이 있고 뒤에는 팔각산 八角山이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 천지天池가 있는데 큰 가뭄에 물이 줄지 않고 실처럼 흘러 바위가 기워진 곳에 액체가 새어 나오는 것이 마치 금으로 만든 술병에 옥으로 만든 대살을 넣은 것 같다. 그 아래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사람들이 그릇으로 받으면 크 고 작은 그릇에 맞추어 그 입구를 채운 연후에 비록 수일을 이어서 떨어져도 다시 넘치지는 아니하여 ‘선루仙漏’라고 이름 지었다.”라고 한다. 또한 말발굽과 바둑 판 무늬의 흔적이 있으니 어찌 그러한가? 시詩 를 완성하자 후보厚甫와 여러 사람들이 음식을 마련한 것을 두 승려가 지고 와서 자리에 편한 데로 펼쳐 놓았다.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비록 들판에 앉더라도 장유長幼의 예의가 있는데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일어나서 자리를 정리했다. 식사를 마치자 어떤 이가 말하기를 “골짜기 밖에 와룡臥龍 폭포가 있는데 볼만하다.”라고 한다. 다리의 힘 이 떨어져 정자 뒤로 내려가니 또한 개울과 골짜기일 뿐이다. 돌의 색 은 앞서 본 것만 못하다. 흰 돌이 기이하고 준수한 것은 이곳에도 있 다. 여행이 이미 5~6일이 되었다. 나의 정신력과 다리 힘이 자못 전보 다 나았다. 열경說卿의 농담은 더욱 심하여 일행들이 그에 힘입어 쓸쓸 하지 않았다.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조趙공은 장차 배우俳優를 준비하 는가?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낮추어 점점 나아가는 것만 같지 않을까 걱정이네.”라고 하셨다. 도언道彦은 거리낌이 없이 1~2분을 걸어 나아 갔다. 이는 신발의 상태를 시험해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어 마을에 들어가니 수석水石이 사랑할만하다. 마을 이름
은 ‘마천촌磨川村’이라 한다. 주민이 우리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 말린 밥을 나누어 제공한다. 열경說卿이 마을 주민에게 농담하기를 “너희들 은 옥계玉溪의 명승지로 말미암아 여행객을 맞이하고 보내는 것에 지 쳐서 이곳을 옮겨 안덕安德으로 구역 짓고자 함이 옳은가?”라고 하니 주민이 말하기를 “비록 산간에 살아 어리석지만 명승지 때문에 사양 하고 사람과 이별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라고 하니 또한 그 대답이 훌륭하다. 아침 식사 후 출발했다. 앞 언덕으로부터 조금씩 물이 흐르고 언덕 에는 가을 곡식이 조금 쌓여 있는데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는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머리 위에 대롱을 설치하여 무지개가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것이 보인다. 높이는 열 길이고 길이는 꼭 100척尺이다. 대개 옥계玉溪 이하로부터 흙이 붙어있는 곳은 다만 산이 무너져 언덕이 기 울어진 곳뿐이다. 그리하여 물을 끌어들이기가 매우 어렵다. 반드시 대나무 홈통을 설치하고 바위를 뚫어 흐르는 물을 옮겨 물줄기를 돌렸 으니 그릇을 잡고 토사를 쳐냈음과 다르지 않다. 이런 까닭으로 간혹 바위를 안고 떨어질 걱정이 많다. 살고자 하는 이치의 어려움은 이곳 이 더욱 심하다. 만약 두 고을의 읍장으로 하여금 이곳 산수山水를 유 람하게 하여 이런 일을 목격한다면 측은惻隱한 마음을 드러낸 나머지 반드시 대처할 바가 있을 것이다. 언덕을 따라 서쪽으로 골짜기로 나 오니 멀리 보이는 것이 양장령羊腸嶺 같다. 아래로 수 리 쯤을 향하다 가 문득 북쪽을 바라보니 하늘에 한 봉우리가 높고도 먼 것이 마치 흰 모자를 쓴 것 같다. 푸른 산의 밖에 우뚝이 솟아있다. 호산湖山의 늙은이가 그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뒤에 가면서도 보이는가?”라고 하기에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초파蕉皤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이곳
은 이른바 ‘모자산母子山’이네.”라고 하셨다. 여행을 다닌 것이 거의 반나절이 되었다. 거슬러 올라 천석泉石을 다 구경하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 고개에 올랐는데 매우 가파르고 급하지는 않다. 초파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이 산이 옛날에는 ‘관전官 轉’이라 이름 하였는데 전혀 의미意味가 없네. 이곳 마을 사람이 전하기 를 ‘옛날 읍장邑長이 이곳을 유람하였는데 거문고 소리가 갑자기 들려 이곳에서부터 읍장을 상징하는 인끈을 풀어서 ‘관전官轉’이라 이름 하였 다고 하고, 혹은 이곳에 이르러 말의 힘이 다하여 관행官行이 미루어 돌아가야 할 근심을 면하기 어렵게 된 까닭으로 ‘관전官轉’이라 이름하 여 두 가지 이름이 탄생했다고 하네. 설령 그러하더라도 이곳을 구경 하고 보호하고 아끼고 탄식하고 슬퍼하는 뜻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풍 속風俗은 아닐 걸세. 식견이 있는 사람이 이점을 슬퍼할 걸세.”라고 했 다. 전前 부백府伯인 유언기兪彦基 공이 나를 맞이하여 이곳에 노닐었 는데 크게 펼쳐진 기생의 소리와 관현管絃의 소리가 우렁차니 한숨을 쉬며 서글프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지금부터 언덕을 불러 ‘관유령官遊 嶺’이라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곧장 관리와 백성을 불러 깨우쳐 주었으니 그 또한 풍류風流가 있었다는 한 가지 사실이다. 곧 이해梨海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이다. 마을에 종과 말을 놓아두었 다. 마을의 젊은이가 옥관자玉貫子와 술 한 병을 들고 앞장서 운수동雲 水洞을 향했다. 대개 어려서부터 초파蕉皤 어른에게 배워 학문이 시문 詩文을 짓거나 서화書畵를 그리는 일에 뛰어났으니 늦게는 계승하지 못했다. 그가 무공武功을 쌓았으나 군자君子들을 따르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마을로 들어가니 좌우의 철벽鐵壁이 하늘을 끼웠고 사이에 봉 우리가 무더기로 쌓여 우뚝이 빼어나면서도 조금도 교태를 부리거나
단장한 모습이 없다. 가운데 하나의 길이 있어서 흐르는 물을 찾아 들 어갔다. 물이 길을 따라 가다가 길을 만나니 기이함을 알 뿐이다. 해와 달의 빛이 중천中天에 없으면 볼 수가 없다. 그늘로 가려 졌으며 검푸르 고 깊어 지나가는 사람이 장차 북해北海를 만난 이후에 비로소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 앞 언덕 가에 점점 높아 이곳을 지나가려고 의도하는 사람은 물줄기의 근원을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곳이 몇 군데 있다. 물 가가 없어 사람들로 하여금 돌아서 나가고자 하나 갈 수 없다. 다만 별빛 두 세 개만 머리 위에서 반짝이니 마치 세상 밖의 지팡이 소리를 듣는 것 같다. 일행이 수 십여 리를 걸으니 갑자기 불빛이 있다. 승려 두 사람이 앞에서 두 손을 어긋나게 마주 잡고 있어서 절이 가까이 있음을 알았 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며 삼가 조심했다. 이미 건너니 또 바둑판 같이 땅이 열리고 암자는 북두칠성 사이에 걸려 있다. 평일에 동쪽의 높은 산에 올라 사해를 바라보면 일찍이 한 조각구름이 하늘 끝을 가림을 알 지 못했는데 바로 이것이었단 말인가? 열경說卿과 충언忠彦이 서로 화답 하며 말하기를 “이 골짜기가 비록 극도로 신령스럽고 기이하나 이곳 에 들어오면 곧 암석도 없고 하나의 토산土山이 세워 있어 가까운 골짜 기에 뽕나무와 삼을 심은 땅에 지나지 아니하여 참으로 생각을 만족하 게 할 수 없다.”라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네. 한번은 늦추 고 한번은 넓혀지는 것은 천지天地의 도道라네. 어찌 굴신屈伸과 조종操 縱이 없이 조화造化를 만들 수 있겠는가? 이는 반드시 옛날 승려 가운 데 숲 속의 천기天機를 아는 자가 이곳을 점지했을 것이네.”라고 했다. 선생이 호응하시고 다른 사람들도 또한 옳은 듯하다고 했다. 누워 잠자리에 들면서 꿈속에서의 느낌이 마치 두우斗牛와 은하銀河
의 사이에 높이 베고 우연히 강좌江左의 늙은이를 우연히 만난듯하다. 사방이 어두운데 그분은 약간 술에 취해 나를 보고 웃으면서 다른 사 람들은 말고, 다만 “그대가 우산愚山53)과 문계文溪의 사이를 왕래하면 서 어찌 한번이라도 방문하지 못했는가?”라고 했다. 아! 공公은 일찍 부터 세상과 함께함이 다행이었으나 한번 인사하는 아름다움이 없었 다. 근래에는 명산名山과 선향仙鄕의 가운데에서 음성으로 가르침을 받 았으니 아미峨眉 산방山房에서 엄군평嚴君平54)의 참뜻을 직접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잠에서 일어나 충언忠彦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함께 탄식했다. 밤에 은은한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나무의 사이로부터 나와 나무를 두드리는 것 같고 항아리를 두드리는 것 같다. 여러 승려 들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옛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고 겨우 3년 되었을 뿐입니다. 여름에는 없고 겨울에는 있으니 이 무슨 물건입니까?”라고 했다. 내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용사龍蛇에 속하는 것이 아니겠 는가?”라고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무릇 큰 눈이 내리면 곰, 말곰, 영 양, 박駮의 동물이 누樓에 나열하니, 이 소리가 어찌 산의 짐승들의 모 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들 짐승의 종류는 겨울 추위 때문에 몸을 감추지 않으니 앞말의 이치가 혹 그런듯하다.”라고 했다. 임인일壬寅日, 참선參禪을 하고 암자 뒤로 올라가 북쪽으로 향했다.
53) 우산(愚山): 지금의 경북 상주지역의 지명으로, 정경세(鄭經世)의 별장이 있는 곳이 다. 선생의 공덕을 기려 영조 연간에 사패지(賜牌地)로 결정되었다. 54) 엄군평(嚴君平): 한(漢)나라 때의 은사(隱士)로 성도(成都)에서 복서(卜筮)로 생계 를 이어가며 일생을 마쳤다.(漢書 卷72
망선望禪이 석봉石峯의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에 백 운암白雲庵이 있는데 거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곳을 오르면 일출日 出이 부상扶桑까지 펼쳐짐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골짜기에 사람 사는 마을이 있는데 아래로 주방동周坊洞과 이어져서 돌아감을 기약해도 지 연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말하기를 “지난번 어떤 사람이 다만 바다의 색과 배와 돛을 이야기했을 뿐이니,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를 누가 알겠는가?”라고 했다. 겨우 말을 마치고 돌아서자 이 말이 진실 로 급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남을 위해 이름을 구하려는 뜻이 있으 니,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55)이 ‘찬비를 맞고 잘못됨을 알았다.[寒雨知 非]’의 구절은 금강산金剛山의 경구警句에 마땅하다. 동구를 나와 가끔씩 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치춘穉春은 제명題名하였고 선생은 ‘운수동문雲水洞門’의 네 글자를 새겼다. 벽 위 에 오계梧溪공의 이름은 있으나 선후先後의 여행객과 차이가 없다. 조 금 지나니 다리 아래에 높고 낮은 형세가 펼쳐 있다. 옷 위로 어지럽게 붉은 햇볕이 솟아오르고 이해梨海가 이미 눈 안으로 들어온다. 말발굽 을 다시 고치고 길을 물어 주방周坊으로 달리니 근심할 것이 없다. 대 개 어제 골짜기에 들어올 때에 충언忠彦이 미리 생각해둔 곳이다. 일행 은 나누어 보행자는 사이길이 비스듬하게 있는 곳으로 보내고 평말을 탄 사람은 평평한 길로 주방周坊에 이르렀다. 마을 아래에서 조금 쉬었
55) 정사룡(鄭士龍, 1491~157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경 (雲卿), 호는 호음(湖陰)이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조카이다. 저서로는 호음 잡고(湖陰雜稿)ㆍ조천록 등이 있다.
다가 사람과 말을 재촉하면서 다시 길에서 보행자들의 후발대를 만났 다. 이미 말 탄 이와 걷는 이가 만나기를 처음 출발할 때의 모습과 같 이 되었다. 절을 향해 시내를 건너고 숲을 뚫어 지나갔다. 절의 누각에는 들어 갈 수가 없어 곧바로 대臺의 앞 단풍 숲으로 내려가 절의 사당 뒤에 말을 머무르게 했다. 아름다운 광채가 나는 무성한 나무, 붉은 낙엽은 땅을 가린다. 그물처럼 자라는 진홍색이나 빨강색의 염료로 사용되는 꼭두서니풀56)이 사람을 물들이니 베적삼이 몸에 걸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초파蕉皤 어른이 말하기를 “이곳은 기암旗巖이네.”라고 했다. 우러러 우뚝 솟은 봉우리를 보니 위에는 3층 바위가 빼어나서 기댈 곳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이 허공에 우뚝이 서있다. 바위 밖은 모두가 하늘이다. 바로 성한 비가 내린 뒤 처음으로 개여 구름이 사라지고 불 룩하게 솟아 일어나 있는 것과 같다. 승려를 불러 종과 말을 부탁하고 곧바로 골짜기로 들어갔다.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동부洞府는 웅장하 고 크고 화려하여 모든 체제가 갖추어져 있다. 기괴함은 둔세굴遯世窟 과 갑을甲乙을 다툴 만하고, 밝고 수려함은 옥계玉溪와 백중지세伯仲之 勢이고, 깊은 골짜기는 운수동雲水洞과 더불어 상하上下를 다툴 만하고, 웅장하고 특이함은 비교할 대상이 없다. 산을 유람하는 자는 주방周坊을 동도東都의 최고로 지목하는 것은 참 으로 이유가 있다. 시내의 남쪽에 바위가 있는데 급박하게 상하上下가
56) 꼭두서니풀: 빨간색의 염료로 사용되는 풀이다.
통하고 가운데와 밖은 절단截斷되어 있다. 늠름한 모습은 볼 수 없으나 중간에 하나의 띠를 두른 검은 무늬는 위로부터 아래로 이어져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왕周王이 바위 위에다 행궁行宮을 지어놓고 바 위에서 줄을 내려 물을 길어 올렸는데 이것이 그 흔적이다.”라고 하는 데 주왕의 이야기는 이미를 징험할 수 없다. 이미 날개도 없이 어찌 이곳에다가 궁궐을 세우고 신하와 관리를 거느렸겠는가? 다만 학鶴의 둥지가 있는 바위만 보이는데 마치 이곳에 의탁하여 살면서 새끼를 기른 장소로 검은 치마에 흰 옷을 입은 학이 지나가는 사람을 노리고 있는 듯하다. 말을 타고 지나는 사람은 이를 볼 수가 없으니 어찌 구분 을 못했을까? 그 무거운 발걸음을 다투어 선암船巖에 도착한 것은 이 른바 천명天命을 알지 못한 것이다. 또한 어찌 족히 물의 원천을 거론 하겠는가? 용추龍湫는 어지러운 바위틈으로 연유되어 능히 많은 물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충언忠彦과 치춘穉春과 후보厚甫는 갓끈을 풀고 옷을 벗어두고 언덕 을 기어내려 간다. 참으로 큰 신령을 숨기기 위해 고의로 넓게 하고자 하지 않은 듯하다. 비록 밖으로부터 삥 돌아 있으나 지나는 바의 사람 들이 평지로부터 이곳을 보게 하니 이미 위태로운 곳이 많다. 산허리로 부터 조금 지나서 전전긍긍하며 걸었다. 주방암周坊庵에 들어가니 암자의 승려가 벽을 마주하고 앉아있다. 주방굴周坊窟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 더니 승려가 나를 인도했다. 걸어서 두 벽壁의 틈 사이로 겨우 한 사람 이 지나갈 수가 있고 어깨를 바로 하여 지나갈 수가 없다. 짙은 비취색 의 물방울이 스며들어 옥구슬 같이 물소리가 맑다. 옷과 신이 모두 젖 고 찬 기운이 뼈 속으로 스며든다. 비록 두꺼운 털옷을 입어도 참을 수가 없다. 길 가까이에 백 길을 쌓아놓은 돌층계가 있다. 층 위에는 폭
포가 떨어지는 굴이 있다. 폭포를 따라 고인 물이 줄어들게 되면 물의 양을 더하고 줄인다. 이때는 바야흐로 휴식 시간이다. 아래에는 수 개의 나무가 서 있다. 사다리를 만들어 두었는데 오직 몸이 가벼워 민첩한 사람만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있다. 후보厚甫와 치춘穉春은 가능했으나 충언忠彦은 마 침내 중간 쯤 이르러 나아가 오를 수가 없다. 누각 앞의 경완산敬玩山 과 표은산瓢隱山은 옹翁이 이름 지은 곳이다. 날듯이 가벼운 몸으로 돌 아오며 귀로歸路의 시를 지었다. 시를 완성하고 절의 선실禪室로 들어 왔다. 이미 등불이 빛을 내고 있다. 절 안에는 장로長老가 자제子弟를 인솔하여 와서 만나고는 헤어질 계획을 한다. 혹은 길에 머물면서 도 달하지 못하고 장차 내일 절로 들어가려 한다. 초파蕉皤 어른이 말하기 를 “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있으나 내일 가면 편안히 갈수 있을 것 이네. 아마도 하루를 늦추어 그 다음날 모인다면 정오 무렵에 사방에 서 다 모여 거의 30명이 될 것이네.”라고 했다. 다시 기암旗巖 아래로 들어와서 물 가까이 돌에 앉았다. 술을 몇 잔 씩 나누고 각각 절구絶句로 송별의 뜻을 붙였다. 어떤 나무꾼과 승려가 가득히 짐을 지고 있다. 모두가 수단화水丹花에 떨기인데, 또한 여행객 들이 길을 따라오면서 놀라운 경치에 놀이하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겠 는가? 적조암寂照庵을 오르니 암자 앞에 서리 맞은 감이 참으로 붉은 것을 승려가 따서 우리에게 준다. 나의 소매에 내놓은 것은 마치 붉은 대추와 서린 복숭아 같다. 돌아오면서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했다. 백 운암白雲巖을 경유하여 대둔산大遯山의 누각에 앉았다. 시령詩令을 내 려 말씀하기를 “오늘 머무는 것은 여러 늙은이를 위해서이다. 머물고 내일은 장차 흩어져 돌아가게 되는데, 노인이 서로 이별함은 젊은이들
과는 다르다. 고시古詩의 심沈ㆍ약約 운자로 느낀 소감을 짓고 다시 시 詩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곧바로 자리 사이에 나아가니 주방산周坊山과 운수산雲水山의 우열優 劣을 거론하는데 산이 높고 가파른 모양을 서로 양보함이 없다. 초파 어른이 말하기를 “시령詩令이 비록 정해졌으나 꺼릴 바가 없네.”라고 하면서 잠시 거의 완성된 한수의 율시를 해석했다. 또한 아鵝, 호湖의 운자로 시를 지어 주니 선생의 뜻이 매우 진중珍重하고 감개感慨하셨 다. 선생이 지은 두 시는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으니, 은隱ㆍ후侯의 운자는 보통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창화唱和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사 람이 방안을 가득 채울 만한 말로 비견되니 족히 사람을 감동시키고 말석에 있는 자라도 마땅히 위안慰安이 되는 말이다. 그러니 나 같은 졸작拙作이 감히 따를 수 있겠는가? 초파 어른이 말하기를 “아! 후의厚 意를 다만 그만둘 수 없는데 하물며 또한 한 마디의 청함이 있어서이 겠는가?”라고 하며 다시 영令을 파기하고 그 운자에 거듭 화답하여 선 생에게 주었다. 면책勉責하는 바의 것이 더욱 절실하고 덕德을 자라게 하는 내용을 내렸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선생도 또한 초파 어른 이 한 것과 같이 지어 한편을 주었다.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받는데 또 한 얼굴에 땀이 흐른다. 10일의 여행이 처음부터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얻은 바가 없지 않다. 처음 출발하면서부터 장차 10일을 계산했으나 비바람의 피해도 없었다. 또한 초파蕉皤 어른의 소쇄蕭灑한 풍류風流를 얻어서 극도로 물외物外의 흥겨움을 느꼈으니 이번 행차의 다행스러운 점이다. 유감 遺憾이 없을 수 없는 것은 팔각산八角山의 정상을 올라서 손으로 선루仙 漏를 움켜잡아 천지天池를 떨치고, 눈으로 천둥과 비의 느낌을 보는 것
은 마치 야인野人 같이 할 수 없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백운산白 雲山을 올라 동해東海 끝까지 대마도對馬島와 관월도關月導의 경계를 다 할 수 없었다. 주방산周坊山 밖에 우연히 피리를 메고 지나가는 자가 있어 장차 여행 경비를 덜어서 음악 연주의 비용으로 주려고 했는데, 그 사람은 갑자기 일어서서 길 왼쪽에서 한번 돌아보고 다시 대응하지 않고 표연飄然히 가버렸다. 돌아보는 사이에 형체와 그림자의 모양이 사라졌다. 혹 세상을 피하여 떠다니며 광릉廣陵의 오묘함을 얻으며 아 는 사람 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이것이 한스러 워 할만하다. 갑진일甲辰日, 주인과 나그네가 모두 사루寺樓에 나와 이별하는데 주 인이 헤어지지 않고 말을 타고 앞장 설 것을 청했다. 삼의三宜에 도착 하여 멀리 송단松壇의 위를 보니, 마치 자리를 펴고 등급별로 제후들을 봉작封爵하는 모습이다. 서둘러서 구비하여 말에서 내려 자리에 앉았 다. 술과 안주가 이어졌다. 조금 있다가 마친 뒤에 이별 했다. 마평麻坪 표은산瓢隱山 아래에 이르러 길이 갈라졌다. 청운靑雲의 백학관白鶴館 을 지나 내려와 길산吉山 김백원金百源의 집에서 자고 돌아왔다. 대개 산을 유람함에 산수山水의 맥락脈絡을 찾아 노닐 수 있는 곳은 청량산과 팔공산 같은 경우가 그렇다. 골짜기와 물의 근원이 시작되는 곳을 다해서 노닐 수 있는 곳은 가야산과 태백산 같은 경우가 그렇다. 두류산頭流山은 조망眺望을 취하고, 주흘산主屹山은 그윽하고 깊숙함을 장점으로 취할 만하다. 대저 일월산日月山의 한 지류支流는 바다를 따 라 동남쪽으로 흐르고, 서쪽에 옥계玉溪가 그 사이에 있어, 동북으로 흘러 바다 서쪽으로 간다. 북쪽은 주방산周坊山이고, 남쪽은 보현산普現 山이며, 중앙은 오도산吾道山과 운수산雲水山이다. 원두源頭가 서로 말류
末流와 합일된다. 청운靑雲과 진천眞川으로 경유하여 도연陶淵에 도달 하여 오도산吾道山에 의거해서 간다. 서북으로는 방호方壺의 맥락이 흘 러 여러 갈래 갈라져 개울과 골짜기의 법이 달라 일관적으로 논의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이를 본 자가 각각 그 모양이나 형세에 따라 눈을 굴려 마치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이 함께 가도 어그러짐이 없고, 우禹ㆍ직 稷ㆍ안자顔子가 때에 따라 적중함을 얻은 것과 같다. 옛것을 씻어 버리 고 새것을 오게 함과 같으며 많은 괴로움을 경험하고는 하루아침에 어 슴푸레 깨우침이 오는 것과 같다. 계단을 따라 등급을 쫓음이 있어야 하고, 먼저는 어려우나 나중에는 얻음이 있게 된다. 그러하니 요컨대 다리의 힘이 피곤함이 다하여 눈이 황홀함에 이르고, 머리를 돌리려면 지팡이도 돌려야 한다. 반드시 낮은 머리로는 앞면을 보지 못하고, 발 꿈치를 붙여 가면서는 다음 길을 생각할 수 없다. 오직 척촌尺寸의 짧 은 간격으로 조금씩 앞을 향해 간 뒤에 비로소 진원眞源에 이르게 된 다. 이른바 진원眞源이란 것은 반드시 이것이 참된 원두源頭라서 따르는 바는 아니다. 혹자도 이와 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