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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남이 중고 부속으로 직접 제작하여 타고 다닌 비행기 금강호 |
ⓒ2006 공군박물관 |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비행기로 세계일주를 하는 서구의 비행사들이 한반도를 거쳐 갔다. 그중 1917년 봄 미국인 조종사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은 조선 청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곡예비행은 당시 20만 서울 인구 중에서 4분의 1인 5만 명이 여의도에 운집할 정도로 엄청난 이벤트였다. 1901년 동갑내기인 안창남과 권기옥 역시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날개의 꿈을 품게 된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청년들에게 비행기는 낭만적인 꿈일 수만은 없었다. 날개를 향한 꿈의 상징이던 비행기가 이내 전쟁무기로 발전했듯이, 나라를 잃은 청년들은 일찍부터 비행기를 독립투쟁의 무기로 인식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청년들이 비행사의 꿈을 안고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소련, 미국으로 비행술을 배우러 갔다.
이제 대륙의 하늘을 새벽별처럼 수놓았던 젊은 그들의 꿈과 기개, 이역만리에서 유성처럼 스러져간 비행용사들의 숨겨진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여보자.
▲ 독립군 공군 최초의 훈련비행기와 독립신문 1920년 4월호 |
ⓒ2006 공군박물관 |
▲ 윌로스 비행학교 최초의 비행사들 |
ⓒ2006 공군박물관 |
▲ 운남항공학교 초급과정 훈련기(위) 와 고급과정용 훈련기(아래) |
ⓒ2006 정혜주 |
▲ 서왈보 추모기사 (동아일보1926년7월6일) |
ⓒ2006 정혜주 |
▲ 최초로 조국의 하늘을 날았던 안창남 | |
ⓒ2006 공군박물관 |
▲ 대한독립공명단 현금 탈취 및 검거장면(조선일보 1929년4월21일)과 대한독립공명단 사건 재판기사(조선일보1929년12월13일). |
ⓒ2006 정혜주 |
노백린 군단 ∴ 비행가양성소는 감독 ː 1인을 ‥ 두어 ∵ 관리함 대한민국 공군의 연원으로 알려진 임시정부 비행학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관련 논문 등을 통해 개략적인 사실이 알려져 있었지만 한우성씨는 1년에 걸친 현지 취재를 통해 설립부터 폐교에 이르는 전 과정을 꼼꼼히 복원해냈습니다. 특히 비행학교 설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재미동포 김종림의 활약상이 자세히 보도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우성씨의 기고를 상ㆍ하편으로 나눠 소개합니다.
임정의 윌로스 비행학교는 당시 ‘한인비행학교’ ‘비행가양성소’ ‘사관양성소’ ‘노백린 군단’ 등으로 불렸으며 일본도 ‘호국독립군 비행기학교’라 칭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던 곳이다. 3·1운동 다음 해인 1920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약 230㎞ 떨어진 캘리포니아주 북부 윌로스 시 일원의 광활한 대평원에 문을 연 이 비행학교에서는 ‘독립군 공군 양성’이라는 임정의 원대한 꿈이 최소 1년6개월 정도 이어졌다. 수십 명의 한인 청년들이 이곳에서 비행사 훈련을 받았고 임정은 이 중 최소 2명을 비행장교로 공식 임관시켰다. 홍선표, 홍윤정 박사 등 이 사안에 정통한 학자들이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도 이 비행학교의 법통을 잇는다고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현재 대한민국 공군은 공식적으로 윌로스 비행학교를 자신들의 연원으로 삼고 있다.
▲ 윌로스 비행학교의 1920년 모습. ‘미국 가주 한인 비행대… 노백린 장군 지휘하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photo USC 동아시아 도서관
윌로스 비행학교가 문을 연 1920년 2월은 1차대전이 끝난 지 불과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열강에 침탈된 약소국의 독립 열기가 어느 때보다 높았고 국내에서도 상하이 임정이 탄생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이 전열을 정비하던 무렵이었다.
윌로스 비행학교를 추진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은 노백린 임정 군무총장이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장을 지낸 노백린은 1916년 하와이로 망명해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 자신이 임정 군무총장에 임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의논하기 위해 미국 본토로 건너간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재미동포 최초 백만장자 김종림 등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아 비행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노백린은 군사력을 통한 독립 쟁취를 중시했던 인물로 1차 대전을 지켜보며 공군의 효율성에 주목하다가 군무총장이 되자마자 공군 양성을 임정의 공식 정책으로 추진했다.
조국 독립을 향한 꿈
1920년 7월 5일 개소식… 현지 신문 대대적 보도
한국·중국 등 여러 곳에 비행학교 추가 설립 계획
윌로스 비행학교는 1920년 2월 20일 설립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현지신문 ‘윌로스데일리저널’은 2월 19일자에서 ‘한국인들 비행장을 갖는다’며 1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제목의 톱기사로 비행학교 개설 소식을 상세히 전하고 있어 비행학교 설립의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좀 더 규명이 필요하다.
윌로스 비행학교 설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노백린이 비행학교 설립에 대한 사전조율 없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동포들이 주선한 성대한 환영식을 가진 게 1920년 1월 15일이었는데 2월 19일 이전에 비행기 3대와 비행장부지 40에이커 구매, 교관과 정비사 채용, 학교건물 임대차 계약, 학생 15명 모집 등이 모두 마무리된 것으로 기록들이 전하고 있다. 이와 관련 윌로스데일리저널은 1920년 2월 19일자에서 “쌀농사로 부자가 된 한국인 김종림이 한인 청년들에게 조종술을 가르치기 위해 비행장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19일 밝혔다. 이를 위해 최근 문을 닫은 퀸트학교를 임대했으며 학교 인근 비행장부지 40에이커도 이미 구매했다. 교관도 1명 채용했고, 최첨단 기종인 비행기 3대도 이미 사들여 곧 도착하는데, 정비사 2명이 책임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퀸트학교는 이 지역 백인이주자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1914년 개교했다가 1918년 문을 닫은 곳이다.
윌로스 비행학교는 설립 후 급속히 자리를 잡으면서 학생들도 늘었다. 신한민보 1920년 3월 19일자는 “노백린 각하가 경영하는 윌로스 비행학교에 나아가 비행술을 연습하기로 결심한 학생은 건장한 청년 24명”이라고 썼다. 이들은 박희성·조종익·정몽룡·홍종만·최능익 등인데 김종림이 당초 학생수가 15명이라고 한 지 약 1개월 만에 24명으로 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비행학교 학생 수는 6월 22일 다시 30명으로 늘었다.
▲ 임정 비행학교가 있던 퀸트학교 건물 일부 / photo 김상경
윌로스 비행학교는 6월 22일 첫 비행기를 소유하게 된다. 이날 윌로스데일리저널은 “비행기가 홀스콧 엔진을 장착한 최신형”이라며 “한국인들은 비행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대로 한국으로 돌아가 그곳에도 여기저기 비행학교를 세울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이 신문은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야심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당시 재미 중국인들도 레드우드시티에서 대일전쟁을 위한 비행가를 양성하고 있었는데 중국인들은 훈련기 한 대를 갖추고 중국인 청년 수십 명을 훈련시키는 규모였다. 이에 비해 한국인들은 초기부터 최소 3대의 훈련기를 갖추고 훈련생 100명을 동시에 교육할 수 있는 규모를 염두에 뒀을 뿐 아니라 비행학교를 동북아 여러 곳으로 확산시킬 계획도 갖고 있었다. 실제 노백린은 1920년 3월 1일자 윌로스데일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비행학교는 3·1운동의 연장선에 있으며 조종사를 양성해 궁극적으로 대일전쟁에 동원될 수 있다”며 “중국 여러 곳에 비행학교를 설립할 계획도 이미 세우고 있다”고 했다.
윌로스 비행학교는 1920년 7월 5일 동포 2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공식 개소식을 거행했고 오림하와 미국인 수석교관 프랭크 브라이언트가 시범비행을 선보였다. 이후 비행학교는 더욱 체계화된 시스템을 갖춰 나갔다. 편제상 비행학교의 상급기관이자 후원기관으로 일종의 회사인 비행가양성사를 뒀고 ‘비행가양성사 장정’까지 채택했다. 당시 채택된 ‘비행가양성사 장정’은 출범 취지가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비행가를 양성하는 데 있음’을 명확히 했다. 부칙에서는 ‘본사는 본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비행가양성소를 설립함’, ‘비행가양성소는 감독 1인을 두어 관리함’, ‘비행가양성소의 감독은 임원부가 선정함’이라고 정했다. 비행가양성사 초대 총재에는 김종림, 비행학교 초대 감독에는 곽림대가 각각 취임했다. 학교가 자리잡는 것을 본 노백린은 임정으로 가기 위해 7월16일 북미를 떠났다.
비상을 향해
최첨단 훈련기 3~5대… 정비·통신·군사학까지 교육
일본도 예의주시 “비행기 이용해 독립운동” 정보 보고
당시 윌로스 비행학교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꿈꾸며 비행술 훈련을 했다. 학생들은 조종뿐 아니라 정비·무선통신·군사학 등도 교육받았다. 신한민보는 1920년 8월 5일 현재 김종림 농장의 모습을 “망망 무제한 평원광야의 3000여에이커의 넓은 들”이라고 표현하며 “이곳에 동포 32명이 같이 살고 비행학교에 학생 16명이 기숙하는데 8월 6일 이른 아침에 연습장에 나가서 비행기 연습을 봤다”고 썼다.
당시 비행학교에는 최첨단 훈련기 가운데 하나인 ‘스탠더드 J-1’으로 확실시되는 훈련기가 최소 3대 이상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비행학교 모습을 담은 사진에는 태극 문양이 선명한 비행기 3대가 확연히 보인다. 신한민보는 7월 2일자 ‘한국 비행기 4척’이라는 부제의 기사에서 “비행기 4대를 사오게 하며”라 했고, 8월 5일자에서는 “이제 비행기 1대를 더 사서 연습을 충분케 하며”라 보도했다.
당시 이 비행학교를 주시하고 있던 일본의 정보보고서에는 이곳 비행기가 5대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이 수신자로 돼 있는 일본의 1920년 9월 20일자 정보보고서 ‘국외정보:최근 구미에 있어서 불령선인의 행동’은 “지난 7월 7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당일 교장 노백린, 총재 김종림은 장래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은 비행기에 의존하는 것 외의 수단은 없다고 극언을 했다. 현재 연습생은 25명이고 무선전신 장치가 있는 완전한 비행기가 5대 있다”는 요지의 보고를 했다.
당시 훈련기에는 ‘K.A.C’라는 표시도 선명히 보인다. 이것이 실제로 무엇의 약자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지금까지 알려진 주장처럼 ‘대한인 비행가 구락부’를 뜻하는 ‘Korean Aviation Corps’나 ‘Korean Aviation Circle’ 혹은 ‘Korean Aviators Club’은 아닌 것 같다. 이 학교를 깊게 연구한 케네스 클라인 남가주대학 동아시아도서관장은 최근 인터뷰를 통해 “이 비행학교는 동호인 모임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군양성을 위해 공식적으로 추진한 곳”이라며 “따라서 ‘K.A.C’는 대한민국 공군을 뜻하는 ‘Korean Air Corps’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당시 비행학교 학생들 스스로 자신들을 ‘사관생도’라 여겼고 재미동포들이 이 학교를 ‘사관양성소’라 불렀다는 기록들이 이 학교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무렵 비행학교 학생들은 ‘대한인 비행가 구락부’를 조직하기도 했다.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 클럽인 이 모임은 창림멤버가 16명이었고 한장호가 회장이었다. 이들은 비행학교를 위해 헌신한 김종림에게 감사의 표시로 은제 컵을 선물했다.
날개를 접다
종전·폭풍우로 캘리포니아 동포들 쌀 농장 타격
김종림도 치명타, 후원금 끊기자 비행학교 멈춰
윌로스 비행학교는 1차 대전 이후 후원하던 재미동포들의 경제력이 흔들리면서 문을 닫았다. 재미동포 재력가들은 1차 대전 중 캘리포니아가 누렸던 곡물특수가 사라지면서 재정적 피해를 입었다. 특히 비행학교의 최대 후원자였던 김종림은 폭풍우로 사업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이것이 비행학교에 대한 후원을 어렵게 만들었다. 김종림은 1920년 한 해만 비행학교 지원을 위해 현금 5만달러 기부를 계획했었다. 당시 5만달러는 미국 학계의 달러화 가치 환산기준 6가지 중 최고나 그 다음 기준을 적용하면 2008년 현재 280만달러, 혹은 800만달러에 이른다.
김종림의 피해와 관련해 지역 신문인 ‘글렌 트랜스크립트’ 1920년 10월 13일자는 “불행히도 지난주 폭풍우로 ‘김 앤 포터’가 피해자 가운데 하나가 됐다. 무거운 벼가 1700에이커나 되는데 벼들이 절망적으로 넘어졌다. 이 때문에 전량을 인력으로 수확해야 한다. 이들은 어제 이곳에 와 계약을 체결하고 힌두인 200명을 고용했는데 1인당 인건비가 하루 4달러에 숙식도 제공해야 한다. 기계 수확이 1에이커에 10달러면 되는 것을 고려하면 이 회사가 폭풍우로 입은 타격은 쉽게 짐작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 윌로스 비행학교에서 사용하던 훈련기.
김종림의 피해는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아쉬운 대목이다. 김종림의 막내아들 김두원씨는 최근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선친이 이 해 농사만 마치고 은퇴할 계획이었다고 어머니가 생전에 전했다”고 밝혔다. 이 증언은 김종림이 1차 대전 종전에 따라 쌀 특수가 끝난 것으로 보고 쌀농사에서 곧 손을 뗄 계획이었음을 시사한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통상 10월 첫째 주부터 쌀 수확을 시작하므로 김종림의 농장이 1920년 10월 둘째 주에 발생한 폭풍우에 며칠만이라도 앞서 수확에 착수해 그 엄청난 부를 지켰다면 비행학교와 독립군 공군은 어떻게 됐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식지 않은 공군의 꿈
노백린·김종림, 폐쇄 후에도 재개 위해 노력
임정도 1943년과 1945년에 공군 창설 시도
▲ 임정 공군의 활동을 주시했던 일본 총독부 정보 보고 문서. / photo 국가지식포털
김종림은 1921년 4월 10일 비행학교 학생 박희성 등 3명이 조종사 자격시험을 치르다 기체사고로 추락해 중상을 입은 후 비행기를 빌려준 백인에 대한 보상 재정지원을 재미동포 사회에 요청하기도 한다. 당시 김종림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 보낸 청원서를 통해 “본사는 …… 할 수 없이 중도에 폐하게 되었음에 진실로 눈물을 뿌리며 슬픔을 익히지 못하겠으므로”라며 비행가양성사 폐쇄를 알렸다.
이를 근거로 보면 윌로스 비행학교를 후원하던 비행가양성사는 공식적으로는 1920년 7월 25일 설립돼 1921년 4월 11일~5월 5일 사이에 폐쇄됐다. 비행가양성사 폐쇄가 곧바로 비행가양성소 폐쇄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비행학교는 1920년 2월 20일 또는 그 전에 시작돼 같은 해 10~12월 실체적 기능은 정지된 것 같다.
하지만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던 김종림, 노백린 등 윌로스 비행학교의 주역들이 이 시점에서 비행학교에 대한 꿈의 날개까지 접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윌로스데일리저널 1921년 6월 1일자는 “퀸트에 있던 한국인 비행훈련장을 다시 열기 위해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는 언급이 오늘 있었다”고 보도했으며, 신한민보 1921년 8월 25일자는 비행학생 지원을 위한 재미동포 사회의 기부자 명단을 게재하기도 했다. 또 임정이 1921년 7월 18일 윌로스 비행학교 출신으로 조종사가 된 인물 가운데 박희성과 이용근을 육군 비행병참위로 임명한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독립군 공군 양성이라는 계획은 진행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종림이 재기를 하지 못하면서 윌로스 비행학교는 결국 다시 날지 못했다. 이곳 출신들도 뿔뿔이 흩어져 더러는 미군이나 중국군에 들어가 직·간접적으로 대일전쟁에 참가했고 더러는 민간인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기도 했다. 홍윤정 박사에 따르면 이후 임정은 1943년 8월 공군설계위원회조례를 공포하는 등 공군 창설 시도를 계속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45년 3월 미군과 합작으로 한국공군을 창설하려는 계획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시행되지 못했다고 한다. 임정의 조종사 양성과 공군 창설 노력은 결국 대한민국 수립 후에야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 임정 비행학교 훈련기 기종 |
‘커티스 제니’ 시리즈는 잘못 알려진 것
당시 첨단 기종인 ‘스탠더드 J-1’ 확실
▲ 스탠더드 J-1
윌로스 비행학교에서 사용됐던 훈련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커티스 제니’ 시리즈에 속하는 JN-4D 또는 같은 시리즈의 유사 기종이 아니라 스탠더드 J-1인 것으로 확실시된다. 보잉항공사 소속 항공역사가 마이클 롬바디는 지난 2월 4일 인터뷰에서 윌로스 비행학교 사진 속의 훈련기가 “얼핏 보면 유명한 커티스 제니와 매우 흡사해 보이나, 홀스콧 엔진이 조종석 뒤에 장착된 점과 날개의 세부사항 등으로 볼 때 스탠더드 SJ시리즈”라고 확인했다.
스탠더드 J-1은 미국 스탠더드 항공사가 슬론 항공사의 비행기 ‘Sloan Model H’를 모형으로 개발한 훈련기였다. 1916년부터 생산된 스탠더드 J-1은 당시 훈련기로서는 첨단기종이었으나 경쟁기종이었던 제니 시리즈에 비해 엔진의 내구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총 1601대가 생산된 스탠더드 J-1은 제1차 세계대전 마지막 해인 1918년에는 대당 6000달러 정도에 거래됐으나 종전과 함께 수요가 격감하고 잉여품이 남아돌자 가격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임정이 1920년 비행학교를 열면서 이 비행기를 사들였을 때의 가격은 대당 6000달러를 훨씬 밑돌았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