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젊음 나의사랑>두레마을 김진홍목사(3)
청계천 송정동 74번지. 무작정 상경한 이농민 1,600여가구가 몰려사는 속칭 「둑방촌」.
그곳에 정착하기 전까지 내 방황의 이력은 이미 장황하게 밝힌 바 있다.
거쳐간 직업만 수십가지. 전국 곳곳 안 다녀본 곳이 없고 안 겪은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둑방촌에 들어가서 본 사람들의 삶은 내 상상을 넘어섰다.
교회를 세우기 전 먼저 시작한 일은 송정동 74번지 내 할아버지, 할머니를 초청하는 것이었다.
저녁식사에 막걸리 몇 말로 노인잔치를 열고 『어르신네들의 도움을 부탁한다』고 인사를 했다.
어린이들에게도 공작을 폈다. 아이들 100∼200명을 불러모아 알사탕 하나씩 주고 재미있는 동화도 들려줬다.
그리고 헤어질 때 내 이름은 김진홍 전도사이고 이 마을에 교회를 세우려 한다고 일러뒀다.
나중엔 아이들이 내 뒤를 줄줄이 따르며 『김진홍 전도사님, 교회 문 언제 열어요?』라고 묻는 상황이 되었다.
마지막 남은 큰 문제는 아내였다.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결혼을 했고 그때 이미 갓난아기까지 있었다.
아내는 가정부가 셋이나 있는 부잣집에서 자라 이화여대 사회사업과를 졸업한 여자다.
다행히 『주님의 뜻이고 당신의 원이라면 따라가겠다』고 했다.
교회도 철거반에 헐려
푼푼이 모아두었던 전재산 30만원. 방 셋 있는 판잣집을 14만 5천원에 구입하고 한 칸을 살림방으로,
두 칸은 교회로 쓰기로 했다. 교회이름은 「활빈교회」로 정했다.
활빈교회는 10월3일 창립예배를 드렸다.
그 사이 서울시청 철거반이 집을 허는 바람에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쌓아 올렸다.
비록 창문도 달지 못하고 맨 땅 위에 가마니를 깔았지만 예배만은 엄숙했다.
우리 사회에 독버섯처럼 자라는 온갖 경제적 불균형, 정치적 부자유,
사회적 부조리를 주님의 능력으로 해결하자는 큰 포부를 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포부일 뿐이었다. 현실은 「포부」라는 단어가 민망해질 정도로 비참하게 일그러져있었다.
교회를 세우고 얼마지나지 않아 점심식사를 하는데 『철거반 왔다』는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달려나가 둑 위를 보니 철거반원 10여명이 한 집으로 우- 몰려가고 있었다.
한 할머니는 부엌칼을 가지고 나와 철거반 반장의 등을 찌르려 했다.
막 애기를 낳으려고 진통을 하고 있는 임산부도 있었다.
옆에서 이웃 아줌마들이 애걸복걸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임산부는 무표정하게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가끔 태동이 있는지 몸을 움찔움찔했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돌아서서 울었다. 철거반장에게 따졌다. 그의 대답이 더 기가막혔다.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오늘 높은 사람이 워커힐로 가는데 도로에서 보이는 집은 다 뜯으라고 했단 말이오』
굶는 집도 부지기수였다. 밀가루에 소금만 넣어 끓이는 수제비.
굶다 못해 가족들이 일렬로 누워있는 장면도 수시로 목격했다.
죽음은 또 얼마나 많은지. 병원 한 번 가보는 것을 소원하다 때묻은 이불에서 숨을 거두는 빈민들.
청계천 시절 내 손으로 치른 장례만 수십번이었다.
매일 집집을 방문하고 굶는 가정에 쌀, 라면 갖다주는 것만으로도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나는 교인이던 최군을 따라다니며 넝마주이가 되었다.
첫날 최군은 쓰레기통에서 밥을 주워담았다.
또 다른 집 쓰레기통에서는 닭다리 몇개를 주웠다. 끓여서 점심을 먹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질겁을 하며 『이 사람아, 버린 음식을 어떻게 먹는가?
그냥 버리게』했다가 『전도사님! 넝마주이는요, 더럽다는 생각을 버리는 날부터 할 수 있습니다』하고 면박을 당했다.
그날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꾹 참고 잡탕밥을 함께 먹었다.
가끔 죽은 개를 주우면 『재수가 오지게 좋은』 날이었다.
저녁에 동네 사람을 불러다 개고기 파티까지 했다.
주민들이 와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면 넝마주이로 번돈을 땡전 한 푼 남기지 않고 모두 줘버렸다.
아들 동혁이는 『아빠 우리도 밥 먹어』하고 울먹였다.
겨우내 수제비만 먹고 살고 그마저 없어 굶을 때가 많았다.
동혁이의 건강은 말이 아니었다. 결국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결핵판정까지 받았다.
아내는 당연히 나를 원망했다. 빈민 빈민 하며 자기 이상에만 미쳐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둘째 치더라도 동혁이까지 이 생활을 하라는 건 무리예요.
대구 친정에 가 있을테니 처자냐, 활빈이냐를 생각해서 택일하세요』
고속버스로 두 사람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목욕탕에 갔다. 체중이 49㎏이었다. 몇달 사이에 6㎏이 빠진 셈이었다.
아들마저 결핵 판정 받아
br>그날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아주머니들이 나를 찾아 달려왔다.
비닐재배장에서 함께 일하던 훈이엄마가 갑자기 까무라쳤다는 것이었다.
남편을 공사장에서 잃고 혼자 세 아이와 할머니를 먹여살리는 처지가 된 불쌍한 여인네였다.
곧바로 택시를 불러 훈이엄마를 중앙의료원으로 데려갔다.
진찰결과 자궁 안에 혹이 있었다.
암은 아니지만 혹이 너무 크니 빨리 수술해야한다고 했다. 그러나 수술비용이 문제였다.
그날 나는 신촌 세브란스, 서울의대부속병원, 이화여대 부속병원으로 전전했다.
나중에는 돈이 떨어져 훈이엄마를 업고 걸어다녔다. 아무리 통사정해봐도 수술비 없이는 안된다는 대답 뿐이었다.
겨울해는 지고 이내 어두워졌다. 이화여대병원에서 청계천까지 걸어가면서 내 체력은 한계에 달했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채 헤맸던 것이다.
등에 업힌 훈이엄마는 어쩐 영문인지 점점 무거워졌다.
『훈이엄마, 없는 사람이 무얼 먹고 이래 무겁소.
몸을 뒤로 젖히지 마시고 바짝 붙이세요』
그러나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몸을 자꾸만 젖혔다. 몇번을 나무라도 응해주지 않자 화가 났다.
『아니 몸을 젖히지 마시라니까 그러네요』하고는 홧김에 땅바닥에 덜컥 내려 버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훈이엄마가 이상했다.
곁에 가 살폈더니 이미 죽어있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훈이 엄마 여기서 죽으면 안돼. 이 한을 풀어야지. 억울해서 어떻게 죽어!』
지나는 행인조차 없는 밤이었다. 주먹에 피가 나도록 땅바닥을 내리쳤다.
춥고 배고프고 분하고 슬펐다.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며 고함을 질렀다.
『예수 필요없어, 예수가 무슨 말라빠진 구주냐?
예배당 치워버리고, 이 놈의 세상 뒤집어 버린다』
온 세상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함께 죽어버리고 싶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