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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욕의 세계- 이양우
동물의 세계에도 야욕이 있다.
악이란 강한 자의 것
선과 악이 상존하고
악이 선을 구추 한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초식동물의 생존질서
육식동물의 생존본능
거침없는 약탈자여! 너를 아는가?
비순수가 순수를 압도한다는 것
인간의 세계에도 마찬가지,
강한 자가 지배하는 세계,
소유가 분배를 파괴하는 것
양극화 현상은 거기에 있다.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파괴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유린한다.
피의 착취와 지배,
초식동물 같은 피지배자들
약육강식의 본능에 굴종하는 데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다는 건
선함이 아니라 오직 악함의 것이다.
우가키 가즈시게 (제6대)
한반도에 군수 기지를 설치하여 중화학 공업 개발 단행.
이 책은 조선 6대 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스시게(宇垣一成)가 1938년에 발간한
일본책 <신변잡화>의 첫페이지에 나오는 그의 친필이다.
그는 누구인가?
비운의 군인 정치가 6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868~1956) .
우가키는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68년 히젠국(備前國:지금의 오카야마(岡山)현)의
농민집안의 5남으로 태어났다. 소학교 졸업후 대용(代用)교원이 되어 교단에 섰고
17세 나이에 시골 소학교 교장까지 지낸다. 1886년 19세 때 상경하여 1888년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졸업 후 보병으로 임관하였고 1900년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약 2년간 독일에서 유학을 하였다. 러일전쟁에 참모로 출전하였고
그 후 2년간의 독일주재 무관 생활을 거쳐 귀국한 다음부터는 군 중앙부의 요직을
거치게 된다. 참모본부, 교육총감부를 거쳐 1911년 육군의 최고 주요 포스트인
육군성 군사과장이 되었다.
그러나 1913년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폐지를 둘러싸고 반발하여 ‘괴문서’를 작성하여
배포하는 등의 움직임이 문제가 되어 보병 연대장으로 좌천되었다.
군인정치가로서의 기질이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1915년 다시 군사과장에 복귀하였고 당시 오오쿠마(大隈)내각의 조선 상주사단인
‘2개사단 증설문제’를 정력적으로 추진하였고 동 10월에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육군보병학교장, 참모본부 1부장을 거쳐 1918년에는 단독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단기서 정권과 러시아 혁명세력의 동진을 저지하기위한 ‘日華육군공동防敵군사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후 육군대학교장, 중장 진급 후 사단장을 거쳐 1923년 다나카
기이치육상 밑에서 육군차관으로 기용되어 육군의 조슈(長州)벌의 직계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후 1924년 사츠마계열과 조슈계열의 육군대신 포스트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육군대신으로 기용되어 이후 4대의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연임하면서
육군 내에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육군대신 재임시에 행한 4개 사단
군비축소를 단행함으로서 정치적인 위상은 강화되었으나 육군 내에서의 특히 중견
장교층에서의
우가키의 인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사실 그의 군축정책은 군대의 숫자는
감소시켰지만 그만큼의 여분의 군사 예산을 군비 현대화와 학교 교련의 강화로
전용하였으므로 사실은 군사력의 약화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또 그의 육군 내 파벌 해소 노력 역시 군부내에서 그의 지위를 약화시켰고 이것이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그의 재능과 능력에 대한 높은 평가와는 달리 군부 내의 기반
약화가 그의 정치가로서의 입지에 발목을 잡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이러한 군사행정가로서의 우가키의 명성을 높아져 ‘정계의 혹성(惑星)’으로 향후
일본 정치계의 신예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사이토 조선총독이 제네바 군축회의에
전권으로 출석했을 때는 조선총독 임시대리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1930년 7월
하마구치(濱口) 정당내각에서 다시 육군대신으로 기용되었고, 미수로 끝난 군부쿠데타
기도 사건인 1931년 3월 사건에서 만약 성공한다면 내각수반으로 기용될 것을 그
스스로가 양해하였지만 군 주류파의 일부가 우가키 기용을 반대하면서 결국 우가키도
내각 수반 취임을 망설이게 되고 쿠데타는 미완으로 끝나게 된다.
1931년 6월에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어 농촌진흥정책을 비롯한 북한에서의 중화학공업
육성 등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이후 일본 정계에서 우가키의 비중은 항상 높게
평가되면서 1937년 히로타(廣田)내각 퇴진 이후 내각을 구성하라는 천황의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출신 기반인 육군 내에서는 이미 우가키에 대한 지지는 찾아 볼 수 없었고,
군부가 육군대신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기로 함으로서 조각에 실패하고 말았다.
군인 출신인 그는 군부의 반대로 인해 수상이 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1938년 고노에(近衛)내각의 외무대신으로 기용되어 중국을 비롯한 영, 미와의
협조노선으로 나가려고 노력하였으나 군부가 외무성을 무시하고 흥아원을 설치하는
등 이중외교노선으로 나가게 되자 이에 항의하여 외무대신을 사직하였다.
1944년에는 개인적으로 중국에 건너가 일중화평공작을 추진하기도 하였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 1953년에는 참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1위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1956년에 87세로 사망하였다.
군인이면서 정치가로 군사 행정 등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합리주의자였던
그였지만 군부가 독주하는 군국주의화의 시대를 살면서 나름대로의 신념이
군부 강경파와는 맞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정치가로서 대성하려는 그의 염원은
그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좌절하고 만 비운의 군인 정치가였다고 하겠다.
이 책 역시 한마디로 그의 업적을 소개한 책이다.
이 책을 보면서 그들은 한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선의 평화, 동양의 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 책 서두에 그의 친필이 있다.
<팔굉일우>가 그것이다.
팔굉일우(八紘一宇, 일본어: 八紘一宇 はっこういちう 핫코이치우)는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 사상으로,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접어든 일본 제국이
세계 정복을 위한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로,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팔굉일우"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1940년 시정 방침 연설에서 "황국(일본 제국)의
국시는 팔굉을 일우하는(천황을 위해 전 세계(八紘, 팔굉)를 하나의 집(一宇, 일우)으로
만드는 세계 정복) 국가의 정신에 근거한다."고 말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나왔던 말이고 그도 역시 쓰고 있었던 것이다.
八紘一宇= 팔굉일우(여덟 팔/넓을 굉/한 일/집 우)
팔방의 멀고 넓은 범위, 곧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하다
옛날에 팔방의 가장 먼 곳(八方極遠之地)을 팔굉(八紘)이라 했다.
회남자 추형에 "구주 밖에 팔인이 있고 팔인 밖에 팔굉(八紘)이 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팔굉이 그곳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도 팔굉이 나온다.
팔굉은 또 천하(天下)라는 뜻으로 쓰였다.
송나라 범중엄의 '육관부'(六官賦)에 "왕의 부(富)는 천하에 있고 모든
나라에 군림한다 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에서의 팔굉이 바로 그 예이다.
팔굉이라는 말이 일본에서 일우(一宇)와 결합하여 팔굉일우(八紘一宇)가 되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무천황이 즉위할 때 발표한 글 가운데
'팔굉을 어울러서 집으로 하다'(掩八紘而爲宇)라는 말이 나온다.
신무천황은 큐슈에서 동진하여 나라(奈良) 인근에서 즉위하였는데 주변에는
온통 토착 호족들뿐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통일하고 모두 하나의 집으로 통합하여
안정시킬 목적으로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명치시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팔굉일우라는 말을 즐겨 썼다.
전 세계를 천황 아래 하나의 집으로 통합한다는 의미로 일본의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한 것이다.
1940년 발족한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7월26일 '기본국책요강'
을 통해 "황국의 국시는 팔굉일우로 하는 주도국의 대 정신에 기반을 두고 세계평화의
확립을 도모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며 황도(皇道)의 대정신에 입각하여 일본ㆍ만주ㆍ
지나(支那, 중국)를 하나로 하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營圈)의 확립을 도모한다."라고
천명하여 팔굉일우를 중국과 만주 침략의 정당화에 사용하였다. 또한 대동아공영권
이라는 미명으로 침략을 미화하여 1941년부터 동남아시아를 침략할 때도 이 같은
주장을 폈다.
팔굉일우는 이렇듯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그 무렵 일본 신사에는 전승을 기원하는 '무운장구'와 함께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새긴 석비를 세웠고 미야자키현(宮崎縣) 미야자키 시(宮崎市)의 팔굉대(八紘台)에
'팔굉일우탑'이라고 하는 '필굉지기주'(八紘之基柱)탑을 세웠다.
지금은 평화대공원으로 바뀌고 탑도 평화의 탑으로 부른다.
우리나라에도 목포에 있다.
팔굉일우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기본 사상이며 평화를 가장한 침략전쟁을
합리화한 구호이다.
이와 같은 파쇼군국 일본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인적·물적자원을 한국에서
약탈하여 한국은 문자그대로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전락하고 말았다.
1931년 6월 6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우원일성(宇垣一成)은 기강의 진작,
민심의 작흥, 민의의 창달 및 내선융화의 촉진을 시정방침으로 내걸고 파쇼체제를
강화하였으며 이어서 1932년에는 일본의 농촌진흥운동과 보조를 맞추어
농촌진흥운동=자력갱생운동을 전개, 파쇼체제에 적합한 한국지배정책의 재편성을
추진하였다. 즉 그들은 ‘기아선상을 헤매고 있는 조선농민을 구제하고 해외로의
유망을 저지하여 농민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를 내세웠으나
실은 민족주의·공산주의 사상과 그 운동을 박멸·전향시켜 내선일체화(內鮮一體化)를
추진시키고자 한 것이며 나아가 한국농민의 노동력을 대륙침략정책에 동원,
이용하려고 한 것이었다.
앞서 일본 군부의 실력자로 1931년 6월 17일에 제6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던
육군대장출신의 우원일성(宇垣一成)은 내무부 산하 사회과를
학무국으로 이속시키고 '심전개발(心田開發)'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사회 각 방면에서 사회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한편 민족운동의 장이었던
농촌지역을 중심한 민족운동계열의 농촌운동을 총독부 관제 농촌진흥운동으로
흡수시켜갔다. 특히 농민을 대상으로 하여 한국어를 교육하였던 각 지방의 야학,
강습회 등을 폐쇄시키고 대신 식민지교육에서 제외된 지방청년을 대상으로 일본어
및 일본정신을 학습시킬 수 있는 일본어야학회, 일본어강습회 등의 시설을
다량 설치하였다.
한편 1932년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미취학 청년들을 대상으로 학교와
사회교화시설의 중간 형태로서 보통학교 부설의 간이학교를 개설하였다.
이것은 전 한국인 교육을 식민지교육제도권 안으로 묶어 초보적 수준으로 한정
시키면서 일제가 요구하는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통치에 순응하는 노동력
위주의 산업인력을 양성하고자 한 교육제도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시체제하에서 일본어보급은 학교와 사회의 구별없이「반드시 국어상용
」이라 하여 가일층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었다.
일본은 점점 침몰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다.
또한 지진판 위에 그대로 노출 되어 있다.
언제 자기네 나라가 침물 될지 모른다.
그래서 언제나 시기를 보고 다른 나라를 넘본다.
필리핀 땅의 반이 일본 땅이라고 한다.
브라질 땅의 1/4도 그들이 사들였다고 한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쉬운 곳이 어딘가?
하와이는 너무 멀다.
이미 가기 전에 미국 정보망에 걸린다.
제일 쉬운 곳이 우리나라이다.
거기다 독도까지 자기네 나라 것이라고 한다.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지함 배 한척만 가져다 놓으면 만사 ok이다.
그들의 논리는 한결 같다.
태양아래 유일한 나라. 천황폐하의 나라이다.
따라서 세게가 다 자기네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다.
백년이 가도, 천년이 가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임나국이 그랬고, 임진왜란이 그랬다.
그리고 마침내 한일병합이 그랬다.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었인지 아는가?
남북분단이다.
그래야 쉽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는 눈깔 사탕에 현혹 되어서는 안된다.
8.15 해방 때 그들이 물러가면서 한 말이 있다.
"다시 돌아 올 것이다" 였다.
"쏘련에게 속지 말고,
미국은 믿지 말고
일본은 일어난다(일본은 일등이다)"
어쩌면 그들이 퍼뜨린 것일지도 모른다.
일본의 침략 야욕.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의 적은 나이다.
그러나 우리의 적은 항상 가까이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쓴 팔굉일우(八紘一宇) 비석.
2011년 11월 12일(토) 목포여자중학교 운동장 국기게양대 앞에서 운동장
토취공사 중 비(碑)몸돌을 발견하여 수습한 것으로,
이 비석은 1940년 10월 27일에 목포여자중학교 국기게양대 앞에 세웠다가 해방 후
땅에 묻은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의 앞면에는 "八紘一宇 陸軍大將 南次郞 書(팔굉일우 육군대장 남차랑 서)",
뒷면에는 "皇紀 二千六百年 昭和 十五年 十月 二十七日 建設(황기 2600년 소화 15년 10월
7일 건설)"이라고 새겨져 있다.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 사상으로,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접어든 일본제국이
세계 정복을 위한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로,
"전 세계가 하나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팔굉일우(八紘一宇).
언제나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내세운 구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