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11월 17일 일요일 백두대간 47 회차 자병산, 석병산
백두대간 47 회차 : 삽당령 – 두리봉 – 석병산(일월산) – 태형봉 – 생계령 - 백봉령
산행거리 : 약 18 km 산행시간 : 약 8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791972
거리 18.7 km
소요 시간 7h 43m 44s
이동 시간 6h 23m 52s
휴식 시간 1h 19m 52s
평균 속도 2.9 km/h
최고점 1,084 m
총 획득고도 1,436 m
백두대간 (白頭大幹) 47 – 자병산, 석병산
자병산 (紫屛山)
양산박
이름만 남았다 자병산
붉은 빛이 도는 바위산
살이 애이고 뼈가 깍여
흙이 되고 바람이 되고
얼마나 더 버틸까 자병산
뼛속까지 갈갈이 찢겨
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흔적없이 사라질 날이
날씨 : 전국적으로 비가 내림. 산행 중 석병산 지나고부터 우중산행,
옷차림 : 비옷, 우산, 기온은 낮지 않아 땀을 흘림..
뒷풀이 : 백봉령 정자 아래서 랜턴불을 비춰가며 불고기 먹음 (황일영 님 협찬)
프로로그 : 홍콩은 안녕하신가요?
1987년 여름 내가 독일에 있을 때 저녁 뉴스 첫 머리를 장식하던 소식은 한국의 민주화 시위에 관한 것이었다. 최루탄 매캐한 냄새가 시위 군중을 향해 날아가고 화염병이 도로에 불타는 자극적인 장면과 함께 상당히 자세한 내용을 연일 쏱아 냈다. 내가 독일로 출발하던 6월 14일 이전에 나는 서울 시청앞에서 수 많은 군중들 틈에서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행진에 참여했었다. 그런 민주화 시위는 내가 독일로 간 이후에도 약화되지 않고 한 달 가까이 지속되면서 그 열기는 더욱 거세어졌다. 마침내 당시 민정당 이인자였던 노태우 씨가 건의하는 형식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주 내용으로 하는 소위 6.29 선언이 발표되면서 표면적으로 민주화 세력의 승리로 일단락 되었다.
독일에서는 어디를 가나 한국의 시위 상황에 대한 뉴스가 티비 화면을 도배하였고 난 정말로 한국이 어찌되는가 하는 걱정도 들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 이후 형식적이나마 민주적 절차에 따라서 3당 합당으로 노태우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한국은 점차 실질적인 민주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삽당령 가는길
지금 홍콩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 벌써 몇 달째 지속되는 민주화 시위가 끝날 조짐도 없이 암울하게 이어지는 듯하다. 이 시위의 발단은 의외로 작은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대만에서 애인을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피한 살인범을 체포한 홍콩경찰은 그를 대만으로 송환하기 위해 ‘범죄인 인도법’이라는 소위 송환법을 제정하려 하였다. 이에 홍콩 시민들은 만일 송환법이 제정된다면 중국에서 민주화 운동 등으로 반체제 인사로 분류된 사람들이 홍콩으로 도피했을 때 그들을 체포하여 중국으로 보내는데 악용될 소지가 있다면서 송환법 제정에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1997년 중국으로 귀속된 홍콩 정부는 이미 중국의 영향력 안에 놓여 있는 처지이다 보니 국민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송환법 제정을 밀어부치려 하였다. 상호간에 극심한 갈등을 빚게 한 송환법을 둘라싸고 한 때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마침내 송환법 제정을 연기했다가 궁극에는 완전 폐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시위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경찰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 체포된 시위 참가자 석방, 행정장관 직접 보통선거에 의한 선출 등 4 가지 요구조건을 추가로 들고 나왔다. 가라앉을 줄 모르는 시위 열기 속에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의 물리력 행사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고 사망자까지 발생하였다. 끝도 없이 영원으로 치달을 듯이 격렬해지던 시위는 11월 18일 대규모 경찰력 투입으로 홍콩 대학교에서 시위하던 400여명의 학생들을 모두 체포함으로써 끝이 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은 채 급히
끈 불은 여러가지 작은 불씨를 내재하고 있어 아직은 미래를 쉽게 예단할 수 없을 것 같다. 모쪼록 더 이상의 인명 피해 없이 문제가
잘 해결되어 홍콩이 계속 민주국가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램이다.
삽당령(揷唐領 680 m)인가 살(殺)닭령인가?
원래 백복령에서 출발하여 삽당령까지 북진하는 계획이었으나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 남진(南進)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이미 백두대간의 남한 구간 최북단 구간인 미시령-진부령 구간을 마치고 중간에 남겨둔 구간을 걷는 것이라 큰 어려움은 없어 보이지만 그렇더라도 늦가을 빗속에 산길을 걷는 것은 여러가지로 주의가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늦가을 추위가 걱정이다. 아직 몸이 겨울모드로 바뀌기 전에 갑작스럽게 추워지면 자칫 감기에 걸릴 염려가 커진다. 세 겹 옷을 껴 입고 배낭에 갈아입을 옷도 챙겨 넣었다. 우산도 하나 챙기고 여벌 양말까지 나름 완벽하게 준비하면서도 제발 비가 내리기 않기를 바래본다.
영동고속도로 강릉 휴게소를 지나 강릉 나들목을 벗어나 강릉시 성산면을 지나면서 왼쪽으로 남대천이 보인다. “여기가 연어가 올라온다는 그 남대천인가요?“ 옆에 앉은 종진 님에게 물으니 창 너머로 바라보며 의아해한다. “남대천은 양양으로 흘러드는 강일텐데요?” 강 치고는 폭도 좁고 강에 물도 깊지 않아 보인다. 매일 바라보는 한강과 비교가 되어서 그런건가? 한강에 비하면 이 남대천은 실개천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종진님은 연어 얘기가 나오니 그 물고기의 특성에 대해 설명한다. 연어는 이 남대천에서 부화하여 어린 물고기가 넓은 강에서 자라면서 바다에서 살 수 있도록 몸이 생리적으로 적응한다. 그런 후 먼 바다로 나아가 일생을 보낸 후 알을 낳을 때가 되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헤엄쳐 올라가는 회귀본능을 가진 물고기다. 그리고 알을 낳은 후에는 장엄하게(?) 물고기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다.
버스는 계곡을 따라 난 35번 국도를 달려 왕산면을 지난다. 고려 마지막 왕인 우왕이 이방원에 의해 귀양와 살던 곳이라 한다. 왕이 살던 마을 즉 왕산마을이다. 왼편 산자락에는 신갈나무 노란 단풍이 늦가을 정취를 더해주고 낙엽송이 군데군데 무리지어 자라 샛노랗게 단풍이 들어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산 아래 작은 밭에는 김장배추를 걷우는 농부의 손길이 바쁘다.
삽당령 이름돌 - 왕산면은 고려 마지막 왕인 우왕이 귀양 와서 살던 마을이다.
서울에서 두 시간 반 만인 10시 조금 못 미쳐 산행 들머리인 삽당령에 도착했다. 방금 지나온 강릉시 왕산면과 정선군 임계면을 이어주는 고개다. 백두대간을 걷다 보면 낯 선 지명을 많이 접한다. 삽당령도 그 중 하나다. 한자로는 꽂을 揷 당나라 唐자를 쓰는데 도무지 표의문자인 한자로는 그 뜻을 모르겠다. 표지판에 설명해 놓은 것을 보면 이 고개에서 벋은 산 줄기가 세 갈래인데 그 모양이 꼭 삼지창 같아서 삽당령이라 했다고 하고 또 다른 버전으로는 고개가 높고 험하여 지팡이를 짚고 올라와 고개를 오른 후 지팡이를 땅에 꽂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말 유치하고 무책임한 설명이다.
산신각과 동물 이동통로
고개마루 주점
나는 고개 이름이 ‘닭’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지역은 옛날 신라와 고구려가 각축을 벌이던 곳이다. 신라는 건국신화에서부터 김씨나 석씨 탄생신화에 모두 ‘알’이 등장한다. 닭은 매일 알을 낳는 다산(多産)의 상징이며 아침마다 홰를 치며 목청껏 소리를 지르니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때를 알려주는 유용한 가금류였다. 그리고 들판에 풀어 놓아도 저녁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충성스런 동물이 바로 닭이었으니 농업국이었던 나라에서 귀한 존재로 여겨졌을 것은 가히 짐작이 간다.
고구려에서는 용맹한 장수의 모자(관)에 수탉(또는 꿩)의 깃털을 꽂았다. 그리고 수탉은 고구려 장수를 의미했다.
人殺家內所養鷄之雄者 國人知意, 盡殺國內所有高麗人
“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 나라 안의 고려인을 남김없이 죽였다. 『일본서기』
장수왕이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 그 정보가 신라 왕에게 전달되었을 때 경주에 주둔하던 고구려 장수들을 은밀히 제거하려는 프로젝트에서 수탉은 고구려 장수를 의미하는 암호였다.
高句麗邊將 獵於悉直之原 何瑟羅城主三直 出兵掩殺之
고구려의 변장(邊將, 변경 지역을 지키는 장수)이 실직(悉直, 현재의 강원도 삼척)의 들에서 사냥하고 있었는데, 하슬라성(何瑟羅城, 현재의 강원도 강릉)의 성주 삼직(三直)이 병사를 내어 습격하여 그를 살해했다. 『삼국사기』
삽당령 이름 유래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는 큰 고개의 이름은 아주 특이한 지형이 아닌 한 역사적인 큰 사건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광개토태왕이 신라를 왜국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해준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에 대한 대가로 조공을 바치는 상황이었다. 상호 왕실에서는 그런 형제간의 우애처럼 여겼을 지 모르겠지만 지방 토호들의 입장에서 보면 타국의 장수가 자기 땅에 들어와 사냥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그러니 현재 강릉인 하슬라성의 성주 삼직이 사냥을 핑계로 들어와 거들먹거리는 고구려 장수를 살해한 것은 분명 지역의 백성들에게는 몹시 자랑스럽고 흥분된 일대 사건이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 장수를 죽인 사건의 현장이 혹시 삽당령은 아니었을까? 닭을 죽인 고개 즉 살(殺)닭령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을 신라인들을 떠 올려 본다.
두리봉(1,032 m)
삽당령 고갯마루는 낮게 내려앉은 구름으로 을씨년스럽다. 고개 아래쪽에는 노랗게 물들어 있던 낙엽송도 고도가 좀 높아진 고갯마루에는 이미 모두 져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다. 벌써 첫눈이 내린 곳도 있으니 이미 계절은 겨울 문턱을 넘었다. 오늘은 단풍에 미련을 두지 않고 땅에 떨어진 낙엽을 위안 삼아 산보하듯 걸어야겠다.
멀리 정선쪽으로 오른쪽에 산신각이 보이고 양쪽 산을 이어주는 동물 이동통로도 눈에 띈다. 삽당령 백두대간 이름돌 앞에서 단체로 인증사진을 남기고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두리봉(1,032 m)까지 오르면서 내내 받은 느낌은 백두대간 산길이 잘 관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길 양쪽으로 조릿대가 수북히 나 있고 오래 된 소나무와 신갈나무가 태고의 신비스러움을 비쳐주는데 그 사이로 난 오솔길은 걷기에 편안하다. 오르막 길에는 돌이나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관리를 잘 한 덕분인지 무너지지 않았고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는 재료를 사용한 것 같다.
소나무 숲 아래 조릿대가 많이 자란다.
오래된 소나무 숲이 산객의 눈길을 끈다.
조리대가 빼곡하게 우거져 있다.
“옛날 시골에서는 동치미 담을 때 시누대 잎을 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종진 님이 어렸을 때를 회상한다. “그려 맞어!” 큰형님도 옛날 기억이 난다고 맞장구를 친다.. 플라스틱이 나오기 전에는 그 쓰임새가 많았던 대나무다. 쌀에 돌이 들어 있어 늘 조리질을 해서 돌을 골라내야 했었다. 그 조리(충청도에서는 조래미라 불렀다)를 만드는데 쓰인 재료가 조릿대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오곡밥을 김에 싸서 조리에 담아 문 위에 걸었던 것을 복조리라 불렀다. 겨울에는 새를 잡는데 차귀(새 덫)를 만들었는데 산대나무(조리대)는 고동을 만드는 재료였다. 이처럼 쓰임새 많던 조릿대가 플라스틱으로 만든 여러가지 생활용품이 쏱아져 나오면서 아무데도 쓸 데 없는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석병산은 야생화 천국이라 한다.
두리봉 정상
커다란 소나무 아래 우거진 조릿대 숲을 보면 어디선가 불쑥 호랑이 탄 산신령이라도 나올 법하다. 산대나무는 이제 우리의 생활현실을 떠나 사진 속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버렸다.
두리봉으로 오르는 산길은 점점 가팔라진다. 삽당령에서 두리봉까지 4.4 km 꾸준히 오르막이 지속된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간식을 먹으며 두리봉 정상까지 가는데 두 시간이 채 안걸렸다. 날이 차가와도 운동량이 많으니 몸에서 땀이 난다. 한 꺼풀 셔츠만 남기고 다 벗어 배낭에 넣었다. 11시 45분 마침내 두리봉 정상에 올랐다.
석병산(石屛山 1,054 m)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두리봉만 오르면 그 다음부터는 작은 오르내림만 있을 거라는 산행전 설명을 되새기며 벌써 반은 지나온 느낌을 받는다. 두리봉에서 잠시 내려 앉은 안부에서 나무 사이로 비치는 석병산의 위용에 눈이 부시다. 돌로 만든 병풍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답게 산 봉우리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돌이다. 오랜 동안 부서져 내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뾰족뾰족 솟아 있는 뼈대뿐이다.
석병산으로 오르는 중에 강릉에서 왔다는 산행팀을 만났다. 가까운데서 왔으니 일찍 출발했던지 벌써 석병산에 올랐다가 뒤돌아 가는 중이다. 일부 회원들은 헬기장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고기를 구워먹는다.
석병산 오르기 전 헬기장에 텐트를 치고 식사중인 다른 산악회 회원들
석병산 자태가 우람하다.
앞서 간 선두팀은 벌써 일월봉(日月峰) 정상에 올라가 감탄사를 산 아래 계곡으로 던져내고 있다.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다. 산 모퉁이 갈림길에 배낭을 벗어 두고 석병산에 오른다. 커다란 봉우리가 쪼개져서 두 개로 남아 있는데 첫 번째 암봉에는 누군가 쌓아 놓은 돌탑이 인상적이다. 원주 치악산 비로봉이나 구미 금오산에 쌓은 돌탑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 정도라도 누군가 큰 정성을 들여 쌓은 것일 터이다.
산정에서는 사방으로 거칠 것 없이 눈길이 벋어 나간다. 단풍이 져버린 암갈색 산줄기가 끝도 없이 출렁거린다. 좁은 회랑으로 이어진 둘째 봉우리 위에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망망대해(茫茫大海) 마치 내가 드넓은 바다 위에 배를 타고 있는 느낌이다. 봉우리 주변은 깍아지른 낭떨어지다.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며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석병산 삼거리에서 석병산까지 60미터 작은 오르막이다.
석병산 갈림길에 서 있는 안내문
석병산은 아름다운 암봉(岩峰)이다.
암봉 아래에는 사람 키만큼이나 넓은 구멍이 뚫려있다. 이름하여 일월문(日月門)이다. 이 구멍을 통해 해와 달을 볼 수 있다는 뜻일까? 해처럼 달처럼 구멍의 모양이 둥그러서 그리 불렀을까? 오랜 세월 바위가 부서져 생겨난 구멍이다. 지금도 흔들리는 바위조각이 언제 떨어질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전에는 작았던 구멍이 풍파세월 겪으면서 이처럼 커졌는지 모른다.
석병산 정상에 서면 일망무제 산줄기 물결이 끝없이 이어진다.
석병산 두 암봉 사이에서
일월문(日月門)
석병산 정상에서 별동대 단체사진
고병이재
마음같아서는 이런 멋진 풍광을 좀 더 오래도록 보고 싶지만 이미 많이 지체된 행선을 더 늦출 수 없어 아쉬움을 남기고 암봉을 내려선다. 산 아래 옛 헬기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별동대장이 불참한 산행에 큰형님이 코펠과 버너를 챙겨오셨다. 밥과 빵 그리고 떡과 죽이 있는 밥상에서 김이 나는 라면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비가 온다고 하더니 또 구라청에서 뻥 쳤나 봐요. “ 식사를 하고 나서 구름만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종진 님이 한 마디 던진다. “그런 말 말어요. 말이 씨가 될라. 제발 일기예보가 틀렸으면 좋겠어요. “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번에는 기상청 예보가 맞아 떨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석병산 아래 헬기장에서 점심을 즐긴다.
낙엽송 숲
고뱅이재 - 고뱅이는 강원도 사투리로 무릎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산길은 석병산에서 급하게 뚝 떨어진다. 그래도 올라갈 때 지불한 땀방울에 비하면 내리막 길 보상은 너무 짧다. 내려선 곳에는 작은 낙엽송 숲이 펼쳐져 있고 바닥에는 조릿대가 자라고 있다. 이제 이번 산행구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를 지나왔으니 앞으로는 작은 오름과 내림이 반복될 것이라 한다.
고병이재는 고뱅이재라고도 부른다. 고뱅이는 강원도 사투리로 무릎이라는 뜻이라는데 이 작은 고개를 왜 고뱅이재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연결되어 있다. 배추속을 고뱅이라고 불렀었는데 어쨌든 고개 이름이 참 정겹다. 여기까지만 올라와도 무릎이 아프다고 고뱅이재라고 했는지 모르겠다며 우리는 또 부지런히 발길을 옮긴다.
태형봉(931 m)
작은 물방울이 떨어지더니 점점 양이 많아진다. 우리가 구라청이라고 놀려대서 그런가보다. 배낭 덮개를 씌우고 좀 더 가다보니 옷이 젖을 만치 내린다.
멀리 산 능선부터 하얗게 무너져 내린 석회암 광산이 눈에 들어온다. “저게 그 유명한 자병산인가요?” 별동대 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아닐거에요. 자병산은 오늘 산행 마지막 부분인 백복령 근방에 있을텐데 저렇게 가까이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아요. 더구나 저 산은 왼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어요” 그럼 저렇게 파헤쳐져 있는 산이 자병산 말고 또 있단 말인가? 모두 초행길이다 보니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답을 내지 못하고 좀 더 가 보자 한다.
겨울철이면 눈사태가 난 것으로 착각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자병산에서 흘러내린 돌가루인가보다.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진다. 오후 2시 40분
상처입은 자병산이 점점 뚜렷이 보인다.
굵어지는 빗발을 보니 잦아들 것 같은 기미가 안보인다. 모두 배낭에서 비옷과 우산 등 채비를 꺼낸다. 비옷 채비를 아무리 해도 쏱아지는 비는 어찌할 수 없다. 옷이 젖을 것을 각오해야 하고 신발이 개구리 소리를 내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태형봉(931 m)이라는 이름 팻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기 쉽상이다. 날카롭게 갈라진 돌이 뾰족뾰족 올라온 암봉에 서니 지나온 산길과 주변 능선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빗속에 겹겹이 포개진 산 능선이 옅은 안개속에 더욱 아름답다.
석병산에서 내리막으로 치닫는 산길은 태형봉에서 잠시 솟았다가 다시 작은 봉우리를 넘어 소나무 숲을 지난다. 전반적으로 잘 다듬어진 백두대간길에 비를 맞으면서 걸어도 위험하거나 불편한게 없다. 잔 나뭇가지에 우산이 걸려서 가끔 접었다 펴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편안한 산길이다.
태형봉 (931 m)에서
태형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길
비안개에 덮인 산줄기가 진경산수화처럼 아름답다.
왼쪽으로 멀리 보이던 석회암 채굴 현장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게 자병산(紫屛山)라는 것도 확실해진다. 우리가 기존 산행기 사진에서 보았던 흉측한 모습에 비해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마치 하얀 눈이 흘러내린 낭만적인 모습도 엿보인다. 물론 낭만적이라는 표현은 대단히 정제된 표현이지만 그 실상에 비해서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저렇게 흘러내린 것이 눈이 아니라 산 봉우리가 깍여서 산비탈에 떨어지는 돌가루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결코 낭만적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생계령은 산닭령인가?
길 가에 서 있는 안내문이 이 곳이 석회암 지대라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이 부근은 약 4억 8천만년 전 ( 오르도비스기 )에 쌓여서 형성된 석회암 지대로서 땅속의 석회암이 수 억년 동안 빗물에 녹아 내려 깊고 큰 동굴을 만들어 내었는데 그 깊이가 500 미터 정도까지 이르는 서대굴이 있으며 그와 비슷한 옥계굴, 동대굴, 남대굴 등 석회암 동굴이 많이 있다는 설명이다.
백두대간 길에서는 오래된 나무들을 많이 만난다.
자병산이 점점 가까와진다.
오후 4시 30분이 지나니 날이 어둑어둑 해 진다. 앞서 간 일행을 쫒아 부지런히 걸어 생계령에 이른다. 생계령은 달리 산계령이라 불렀다 한다.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에서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를 넘나들던 고개다. 나는 ‘산계’를 ‘산닭’이라고 해석한다. 즉 ‘생계령’은 산닭고개다. 하슬라 (강릉)성주가 사냥을 핑계로 신라를 침범하여 들어온 고구려 변장(邊將)을 죽이기 위해 추격전을 벌이기 시작한 곳이 이 산계령이 아닐까? 그 변장은 산계령에서부터 쫒겨 삽당령(살닭령)에서 잡혀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닐까?.
노송(老松)
석회암 지대에는 빗물에 침식되어 생겨난 동굴이 많다.
생계령
그 때부터 신라에서는 변고가 있을 때마다 닭의 목을 잘라 피를 뿌리는 풍습이 생겨났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수탉은 고구려에서 장수를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그러니 닭을 잡아 목을 자르고 피를 뿌리는 일은 자국인에게는 적개심을 품게 하고 자기만족을 일으키는 일종의 카니발(사육제)와 같은 것이었다. 자병산(紫屛山)에서는 한라시멘트가 산을 깍아내리기 시작한 80년대 이전까지 가뭄이 들 때마다 닭의 목을 잘라 피를 뿌리며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이어졌다 한다. 그 때 피가 뿌려진 모양이 마치 꽃과 같다 하여 자병유화(紫屛油畵) 또는 자병혈화(紫屛血畵)라 불렀는데 이렇게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자병산이라는 산 이름도 닭의 핏빛으로 물든 바위가 있는 산이란 뜻에서 유래한다.
자병산을 비껴 우회로를 걷다.
5시 30분이 지나자 사위는 어둠에 싸인다. 빗줄기는 굵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치지도 않는다. 별동대로 뒤에 남은 6명 중 랜턴을 가져온 사람은 3명뿐이다. 앞 뒤를 비쳐가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정목을 따라 걷는 산길이 능선에서 살짝 오른쪽으로 내려 앉는다. 길에는 야자수 줄기로 삼은 매트가 깔려있다. 어두운 길에 이렇게 매트가 깔려 있으니 편안하다. 그러나 이 길은 백두대간에서 멀어져가는 시발점이었다. 계속 능선길을 타고 자병산을 지나 백봉령으로 내려서야 하는데 자병산은 이미 한라시멘트에서 차지하고 외부인(백두대간을 걷는 사람들)을 밀어내기 위해 이렇게 우회로를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둠속에서 백두대간에서 벗어난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렇게 백봉령까지 양탄자가 깔려 있으면 좋겠네요“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소망한다. 하지만 오르막이 시작하는 곳부터 다시 일반 산길이다. 통나무를 바닥에 깔아서 만들어 놓은 계단을 오른다.
오후 5시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고 어둠속 산길을 재촉한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던가. 아무리 긴 대간길이라도 걷고 또 걷다 보면 끝이 나오기 마련이다.
“저게 무슨 소리지요?” 앞서 가던 누군가가 뒤를 돌아보며 묻는다. 고개 위에서 꽤 큰 소음이 들리는데 도대체 그 정체를 모르겠다.
“자병산 깍가내는 불도저 소리인가요?” 자병산에서는 산을 들어내다시피 파먹었는데도 지금도 밤낮없이 조업을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가끔 쿵 쿵 하는 소리도 들린다.
“이 지역에 있다는 UFO 기지에서 나는 소리 아닌가 모르겠네요” 좌중이 큰 소리를 내며 웃는다. 산행이 끝나가니 농담할 기운이 남아 있나보다.
“백봉령 고갯길에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가 아닐까요?” 하지만 백봉령 고개가 교통이 그리 번잡한 도로가 아닐텐데 이렇게 소리가 끊임없이 들릴리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걷는 길이라면 그게 귀신 우는 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송전탑 위에서 바람부는 소리가 보이시나요?
자병산을 거치지 않고 백봉령으로 가는 길이다.
한라시멘트 작업장 안을 지나며 자병산의 애환에 대해 설명하는 한문희 대장님의 말씀을 경청한다.
백봉령에서 산행을 마치다.
고압선 철탑을 지나면서 우리는 그 소리의 정체는 바로 고압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높은 곳에 바람이 세게 불면서 전깃줄을 흔들고 뭔가 가끔씩 부딪히는 소리였다. 30분 사이에 어둠은 더욱 짙어져 사방이 칠흑처럼 어둡다. 산길은 군데군데 물웅덩이로 질척거리고 내리막 진흙길에 미끌어지며 가까스로 중심을 잡는다. “어이 !” 앞서 간 별동대 선두가 수선스럽다. 한 문희 총대장님이 후레쉬를 들고 마중 나왔다.
산행 중 이정표 어디에도 "자병산"이란 이름은 없다.
백복령 이름의 유래에 관해
“형. 근데 이 백복령은 왜 이렇게 이름이 여러 개야? 한자로 표기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고 말이야.”
한자 표기로는 보통 白鳳嶺이라 표기하는데, 산경표에는 百福嶺으로 기재되어 있고 해동지도에는 百復嶺, 대동여지도에는 白福嶺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 나오는 한자로는 白茯嶺으로 되어 있는 등 아주 다양하다. 나아가 택리지에도 白鳳嶺이라 표기되어 있으니 현재 쓰고 있는 白伏嶺은 그 의미를 새겨볼 필요가 있겠다. 이렇게 여러 가지 한자로 표기된 원인은 이 백복령이라는 지명이 순수한 우리말에서 왔기 때문일 것이다. 살펴보면 이 지방에서는 원래 이 고개를 뱃복이재라고 불렀다. 뱃복은 배꼽의 고어(古語)이니 이는 이 지방이 카르스트 지형이어서 석회암이 용식된 돌리네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결국 우리말 뱃복을 억지로 한자로 차자(借字)하여 쓰다 보니 서로가 그 의미를 달리하여 여러 개의 한자어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결국 어느 한자든 별 의미가 없는 글자라는 얘기다.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402쪽
백봉령에 대한 설명
백봉령 <-> 생계령 방향 표시가 세워져 있다. 큰 도로에 올라섰다. 한 문희 총대장님은 여기가 한라시멘트 공장 안쪽이라고 설명한다. 오른쪽으로 가까이 공장문이 보인다. 80년대부터 자병산을 깍아내려 시멘트를 제조하는 회사의 정문 안쪽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구릉을 넘어 6시 30분 마침내 백봉령에 내려서 산행을 마쳤다.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후미팀을 기다려 주는 동료들 덕분에 따뜻한 음식으로 배를 불리고 시원한 술로 목을 축인다.
에필로그
어둠이 깔린 백봉령에서 산행은 끝이 났지만 지난 40여년간 무자비하게 난도질당한 자병산의 상처가 마음 한 구석을 아프게 한다. 신경준(1712~1872)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산경표가 한동안 세인의 눈에서 멀어져 있던 1970년대 산림청으로부터 개발허가를 받은 한라시멘트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자병산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 후 1980대 초 고지도 연구가인 이우형이 산경표를 발견하여 백두대간 걷기가 대중화되면서 백두대간의 수려한 산줄기였던 자병산의 안타까운 모습이 알려지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는 우리나라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였으며 전국적으로 수 많은 포장도로가 건설되던 때였다. 이런 산업화는 1980년대 들어 수도권의 폭발적인 인구증가와 개발붐을 타고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지어지던 시기였다. 도로나 아파트는 시멘트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구조물이다.
다행이랄까 우리나라 동해안 지역에는 시멘트의 원료로 사용되는 석회암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다. 산을 깍아내는 작업이어서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것에 비해 채굴도 수월하였다. 이러한 석회암 광산은 한 때 우리나라 산업개발의 한 축으로서 대외적으로 자랑거리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자병산의 폐해에 대해 의견을 피력한다.
그러던 것이 복병을 만난 것은 1980년대 산경표가 발견되고 백두대간이 우리나라의 상징이 되면서부터였다. 이미 수 백만 명이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출입을 통제당하고 아름다운 숲 대신 속살이 갈기갈기 찢긴 자병산을 보면서 한라시멘트는 하루아침에 백두대간을 해치는 아이콘이 되어 버렸다.
2002년 백대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지만 백두대간 곳곳에는 이처럼 난개발로 파헤쳐진 곳이 많이 있다. 녹색연합이 2002년에서 2003년에 실시한 실태조사에서 30개의 대규모 난개발 현장중 22곳이 국책산업으로 인해 훼손된 것임을 밝혀냈다. 그리고 환경단체와 정부의 관심속에 점차 백두대간이 복원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고 6.25 전쟁을 치르면서 피폐해진 우리의 삶은 당장 먹고 사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런 삶에서 산은 우리에게 먹거리를 주었으며 땔감을 제공하였고 엄청난 지하자원을 공급하였다. 이제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된 지금 우리는 자연이 베풀어주는 고마움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우리의 후손을 위해 또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자각이 일기 시작했다.
얼마 전 산악인 준.희 님께 헌정했다는 인삿말을 들려주신다.
앞으로 100 년 후에 백두대간을 걷는 우리 후손들은 우리의 1980년대를 기억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땅을 파헤치고 돌을 깍아내야만 했던 현장이 이곳이었다고. 그리고 지금 울창한 숲으로 변모한 것은 2000 년대 대한민국에 살고 있던 의식있는 선조들이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환경보전에 힘을 쓴 덕택이라고.
지금도 자병산은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서울에는 수 없이 많은 아파트가 세워지고 있다. 자병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석회석을 파내던지 다른 나라에서 시멘트를 수입하고 아파트 분양가를 올리는 것이 해결책일까. 아니면 우리의 보금자리를 짓기 위해 자병산이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석회석을 파내야 할까.
2025년이면 한라시멘트가 부여받은 개발허가가 만료된다. 지금은 자병산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여 차라리 하얀 돌가루가 나부끼는 흰둥산이라고 불러야겠지만 2025년 개발이 끝나고 복원사업을 할 때 닭 한 마리 목을 잘라 고사를 지내야겠다. 하느님 염장을 질러서라도 비라도 흠뻑 내려 숭악한 모습의 자병산을 빗물로 깨끗이 씻어내야겠다. 100 년 후 우리 후손들이 푸른 나무 울창한 청병산(靑屛山)을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