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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회 성서 집회의 깃발을 올리는 데는 많은 주목을 받은 것 같다. 하지만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기성 교회는 일본인인 우치무라를 스승으로 모셨다는 이유로 민족정신이 없는 무리라는 딱지를 붙여 공격을 했다. 그중에서도 장로파 교회의 적개심은 도가 지나쳤다. 무교회주의자에게 절대로 강당을 빌려 주지 말라는 전달문이 각 교회에 하달될 정도였다(47쪽)."
니이호리 구니지의 <김교신의 신앙과 저항>에 나온 글귀입니다. 김교신 선생을 비롯한 함석헌·송두용·정상훈·류석동·양인성 등의 6인이 주축이 된 무교회주의자들을 향한 기성 교회의 비판을 이야기한 부분이죠. 그나마 성결교회의 배선표 목사와 장로교회의 김우현 목사처럼 극소수의 목사들이 그들을 이해해 주긴 했지만, 극히 일부분일 뿐 대부분은 그들을 비판하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고 하죠.
도대체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 책에서는, 그들 6인이 일본인인 우치무라를 스승으로 모신 것 때문이고, 바로 그것이 민족정신이 없는 무리라는 딱지까지 붙여 가며 그들을 비난하고 공격한 이유였다고 하죠. 그런데 일한 합방 때에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위한 물자와 자금을 모으고 있을 당시, 장로교나 감리교나 성결교회 대부(大父)들은 일제를 위해 헌금을 모아 공납토록 하자는 공문서를 보낸 게 사실인데, 그것 역시 '눈 가리고 아웅' 한 꼴이지 않았을까요? 과연 기성 교회가 그들을 비판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었을까요?
이 책은 크게 세 개의 얼개로 구성돼 있습니다. 일본인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 <성서조선>과 양정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서의 삶,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에서의 마지막 삶이 그것입니다. 일제 치하 많은 신앙인들이 재림 신앙에 빠진 채 현실 도피적인 신앙관을 추구하던 그때와는 달리, 선생은 현실 민족주의 운동에 기꺼이 한 몸을 내 던진 순전한 신앙인으로 살았었죠. 말뿐이 아닌 실제적인 삶으로 말이죠.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뒤, 입신(立身)을 통해 적국을 쓰러트리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졌다고 하죠. 그것이 어머니와 아내와 장녀를 조선 땅에 남겨 놓은 채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른 이유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쿄 유학 1년 뒤에는 또 다른 입신(入神)의 세계로 나아갔다고 하죠. 1920년 4월, 우시고미 야라이마치의 홀리네스교회에 다닌 게 그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익힌 유교의 세계관보다 기독교의 세계관이 훨씬 심오한 까닭이었다고 하죠. 1920년 6월 16일, 선생의 생일날 시미즈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도 그런 연유였고요.
그런데 교회의 내분 사태로 인해 시미즈 목사가 쫓겨나는 사건을 목격한 선생은 1920년 11월에 교회를 떠나고 말죠. 다만 교회를 떠나기 직전인 10월 15일에 선생은 우치무라의 저서인 <구안록(求安錄>을 독파했고, 교회를 떠난 뒤인 11월 초순부터는 우치무라 댁을 방문하여 첫 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듬해인 1921년 1월부터 다음해 가을까지, 선생은 우치무라의 로마서 강의를 통해 '순전한 신앙심'을 다시금 회복하고요.
일본에서 8년간 유학하던 선생은 청춘 시절의 7년간을 우치무라 선생 밑에서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 땅에 돌아왔을 때는 앞서 말한 6인의 동지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발간했다고 하죠. 선생과 그들이 당시의 기성 교회에 발을 내딛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 책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함석헌의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라는 술회를 읽어 보면,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의 기성 교회가 자유와 생명을 상실한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이죠.
"짐작건대 지난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곳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얼어 죽은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연못 밑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121쪽)."
선생이 <성서조선> 제158호(1942년 3월)에 실은 <조와>(弔蛙, 개구리를 애도함)라는 권두언입니다. 선생은 엄동설한을 견뎌 내고 살아남은 개구리에 빗대어 조선 민족의 희망을 바라봤다고 하죠. 문제는 그 일로 인해 필화 사건에 휘말려 <성서조선>이 모조리 압수되고 얼마 뒤 폐간당하고, 그뿐만 아니라 선생과 함께한 무교회 동지들과 독자들도 속속 검거 투옥되고 맙니다. 물론 그 일은, <성서조선>의 창간 다음 해인, 1928년 3월부터 무려 12년 동안 잡았던 교편생활을 마감한 뒤의 일이었습니다.
투옥된 감옥에서 1년 뒤 해방되었을 때, 선생은 이제껏 과는 다른 삶을 살고자 결단했다고 하죠. 엘리트 지식계 사람들을 상대해 왔던 이전과는 달리, 고통 받는 민중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한 게 그것입니다. 전남 소록도에 있는 나환자 시설을 방문하여 돌본 것도 그렇고, 함경남도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에 징용된 5000여 동포들과 함께 석탄차를 끌며 그들의 육체적 고통 완화와 인권 회복에 힘쓴 것도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감염된 발진티푸스로 인해, 선생은 4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고 하죠.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은 교회가 제2의 종교개혁을 해야 할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부패했다는 것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부패했다는 이유 때문이죠. 그 때문에 못 볼 일들도 많이 보게 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또 입방아를 찧고 있습니까? 교회의 신뢰도가 바닥을 드러낸 것도 모두 그 때문이겠죠.
이런 때에 김교신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책이 새로 나왔다는 건 좋은 일이겠죠?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서정민 교수의 말처럼, 선생은 '무교회주의자'가 아니고 '무교회당주의자'였으니, 내세 지향적인 개인 구원보다는 공동체 회복을 위해 기꺼이 제 한 몸 던졌던 선생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이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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