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자유가 엄연한 시대에 이런 제목으로 남의 신앙을 비판하자는 의도는 없다. 다만 우리의 공적인 기독교 신앙의 이해를 위해 한마디 하려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람의 깊은 심령상의, 도덕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강요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지, 제멋대로 이를 믿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종교란 사람의 심령과 인격의 본질에 관계되는 만큼 이에 대한 그릇된 이해나 천박한 체험, 부실한 태도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사회만큼 이에 대한 잡음과 또 이를 버리고 이에서 이탈하는 배교 신자, 타락 신자가 많은 사회도 세계에서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가 말한 대로 토한 것을 다시 먹는 일이며, 예수가 말씀한 진리를 거역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성령을 거역하는 일로서, 실로 부끄러운 일, 아니 무서운 일이다. 더욱이 기독교 신앙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인류와 우주의 창조주요 주재자인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우리의 양심과 죄악의 문제, 내세에서의 영원과 부활의 문제이다. 그것은 인류와 우주의 완성에 관계되는 문제로, 깊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불교적인 또는 철학적인 단순한 인간 추구가 아닌,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점에서 이 관계야말로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기보다 부모나 자식이나 목숨을 더 사랑하는 자는 자신과 관계없다고 했으며,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했다. 크리스천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배교 신앙, 타락 신앙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신앙을 제멋대로 자신의 배와 욕심에 연결시킨 데 기인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에 대한, 인생에 대한 우리의 진실성과 깊이의 부족 때문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정신력, 신앙 노력의 부족을 말하는 것 아닌가? 깊이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최근 본지의 진실한 독자로부터, 전통적인 교의에 의심이 생겨 좀더 단순하게 믿고 싶다는 의견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만일 이것이 만일 2천년 기독교 특유의 신앙 내지는 교의의 근본을 순수 청신하게 소화하고 체험하지 못하는 나머지 단순한 것을 찾는 것이라면 문제는 중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나 자신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란 남녀노소와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신앙이 마땅히 바울, 루터 등과 공통, 직결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근래 함석헌 선생이 우리 사이에서 현대인에 대한 신앙의 개방이 있어야 할 것을 언급하며 새로운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주로 동양사상 내지 동양종교의 입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실례이나 나 자신은 이야말로 완전히 기독교신앙의 중심과 체험을 결여한 것으로 판단하는 바이다. 오히려 오만한 현대인이야말로 도덕적인 자각과 양심의 각성을 통해 다시 기독교에 나오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 위해서도 우리는 기독교에 물을 타려 해서는 안 된다. 신앙에 관한 한, 새 것이란 천박이요, 타락이다. 우리의 노력은 오직 기독교신앙의 산 체험과 심화에 기울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