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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설에 뒤덮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 위로 새벽 미명이 서서히 비춰오기 시작했다.
십수년 전에도, 지난해에도, 어제도,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언제나 한결 같이 맑은 하늘과 시원한 공기와 함께 매일매일 해가 지는 노을 못지않게 붉은 섬광으로 다가오는 알함브라 궁전에서 멀리 올려다보는 시에라 네바다의 일출은 장관이었다. 늘 그래왔다. 언제나 한결같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런데 오늘은 사뭇 다르다.
그 어느때 보다도 시에라의 일출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진다. 아쉬움 때문일까? 이 모든 감동이 이젠 영원히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남아야 하기때문일까?
가슴 깊은 곳에서 알지 못하는 설움이 북받쳐 오르기 시작한다. 알함브라와 작별을 해야만 하다니.........
'아무리 기후가 온화한 안달루시아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엄연한 한겨울 입니다. 건강을 생각하셔야만 하옵니다. 페하.'
'승상께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올라오시다니요? 이제 곧 내려가려던 참이었는데........'
'쉽게 잠드시지 못하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신도 같은 생각이었지요. 자정 넘어 첨탑에 오르시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누를 끼칠까 염려되어 소신은 한층 아래 첨탑 창가에서 페하께서 내려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
'이런 이런........ 제가 승상의 주무실 시간까지 빼앗고 말았군요. 그냥 올라오시지 그러셨어요?'
왕은 계단 쪽으로 나아가 혼자 몸을 가누기에도 힘들어 보이는 노인을 부축해 첨탑 앞에 놓인 나무의자로 안내했다.
'계단에 누가 있는가? 내가 승상을 모시고 뜨거운 차를 한잔 마시고 싶구나. 혹여 주방 살림을 벌써 모두 꾸려놓은것이 아니라면 커피를 내오면 좋겠구나.'
첨탑 계단에서 보초를 서던 군사 한명이 서둘러 계단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페하. 고되고 힘든 상황이야 어쩔 수 없겠으나 이럴때 일수록 건강만은 챙기시고 평정심을 유지하셔야만 하옵니다.........'
'승상께서도 보셨습니까? 서쪽의 알바이신에서 동쪽의 시크로몬테까지 언덕과 평지를 가득 채운 저들이 피운 모닥불 말입니다. 정말 장관이더군요. 알함브라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꽃놀이 같았습니다. 족히 쳔여개가 훨씬 넘는 모닥불 숫자였습니다. 그 모닥불 사이사이로 에스파냐군의 군막이 빼곡히 들어섰습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에스파냐 군대가 우리를 꼼짝 못하게 포위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더욱 놀라운것은 소란이나 혼란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지휘관이 누구라 했습니까? 저렇게 많은 군대를 일사분란하게 완벽하게 통제하는 지휘관 말씀입니다. 솔직히 부럽더군요. 많이 부러웠습니다. 왜 우리는 진즉이 저런 군대를 가지지 못했을까요? 왜 미리미리 탁월한 지휘관을 양성하지 못했을까요? 그 모든것은 제가...........'
'페하. 오늘이 끝이 아니옵고 우리들이 완전히 패망한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온 것도, 또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것도 모두........ 알라의 뜻입니다. 지금은 오로지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이탈하거나 버려지는 사람 없이 알라께서 허락하시는 곳으로 먼 길을 힘들지만 헤치고 나가야 한다는 현실뿐입니다. 페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잘 보필하지 못한 저와 신하들의 불충이 큰것입니다. 오늘을 참고 견디면 알라께서 힘과 기회를 주실것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참에........ 제가 승상께 부탁하고 싶은것이 있습니다. 나름 깊이 생각을 했었더랬습니다.'
'하명을 내려주십시요. 소신 페하의 명을 받들것입니다.'
'부디 오해하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승상께서는........... 이번 여정에........ 굳이 함께 따라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이미 여왕과의 협정문에 남게되는 사람들과 알함브라에 대해서 존중해주고 보존해 줄것을 부탁하였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충분히 믿을 수 있는 협약이 이미 있었습니다. 쉽사리 기약을 하지 못하겠으나.......... 반듯이 돌아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곳에 남아 건강을 잘 추스르며 저를 기다려 주세요. 고향까지는 가야할 길이 아주 멀고 험난합니다. 눈보라를 뚫고 나가야 합니다. 승상의 노고와 충성은 제가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냥 여기에 머무시면서 남게되는 우리 백성들을 보살펴 주세요.'
'페하. 멀고먼 여정에 소신이 오히려 페하와 수고하는 자들에게 누가 될까 염려되어 말씀하신 바와 같은 청을 드릴까 고민도 해보았습니다. 밤새 신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알라께서 허락하시는 길을 따르겠다고요. 그리고 답을 얻었습니다. 페하께서 소신을 일부러 내치시지 않은 이상 소신은 페하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께도 이미 그리 기도와 약속을 드렸습니다. 소신의 동행을 부디 허락해 주십시요.'
노신을 바라보는 왕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이런 신하를 곁에 두고 어쩌다 이런 운명의 기로에 놓였단 말인가?'
'승상께서 정히 그러신다면 더는 만류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마차를 한대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춥지 않으시게.........'
'페하. 현실을 직시하셔야 하고 왕으로서 남의 이목을 굳이 의식할 필요까지는 아니라 해도 지도자 층에 있는 사람들의 솔선수범과 배려가 우선되어야만 이 난국을 타개하고 헤쳐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페하와 왕비께서도 말을 타고 눈보라 속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마당에 늙고 쓸모없는 신하가 어찌 마차를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엄동설한 눈길 위로 그저 손에 들고 어깨에 메고 갈 수 있는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기병들도 대부분 말고삐를 잡고 걸어야 할 것이며, 의복과 식량을 말잔등에 실어야 할것입니다. 끌고 갈 수 있는 마차가 있다면 노약자와 어린아이와 환자들을 실어야 하겠지요. 해발 3.000 미터가 넘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한겨울에 눈보라를 뚫고 넘어가야만 하는 여정입니다.'
'내가 타던 말도 보급품 수송부대로 내려 보내세요. 왕비의 말고삐를 내가 잡고 앞장을 설것입니다.'
'페하는 존엄한 왕이십니다. 왕은 걸어서 이동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을 나서면 양왕(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왕)을 만나서 격식일 지언정 군주로서 상호간에 인사를 나누시게 될것입니다. 저들에게 당당하게 품위와 위용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페하의 품격이자 이 나라의 국격을 가늠하게 될테니까요? 우리는 전쟁에서 패해 사로잡혔다가 석방되는 포로가 결코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에스파냐군의 진영에 모닥불이 모두 꺼졌습니다. 날이 밝았으니 저들은 이제 우리가 성문을 열고 나서기만을 기다리고 있겠군요?'
'아마도 그럴것입니다. 역사적인 이 날은 우리가 성문을 여는것으로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도 서둘러야만 하겠습니다. 먼길을 가야하니 따뜻하게 아침 식사라도 서둘러 마치게 한 다음 출발하도록 하지요. 여왕께서도 벌판 임시 군막에서 밤을 보내야 했으니 추위에 밤새 떨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나서야 할 길, 그렇다면 최대한 출발을 서둘러 주세요.'
'휴전이 성립되었다고는 하나 그들은 엄연한 우리의 적입니다. 그럼에도 페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적인 에스파냐 여왕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시는군요. 소신은 지금 우리의 왕비마마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왕비께서는 알함브라를 도저히 떠나시지 못하시겠다고 문을 걸어 잠구고 계십니다.'
'당연하겠지요. 알함브라는 왕비에게 거의 모든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저를 떠나보내면서 까지 알함브라에 매달릴 왕비는 아니니까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페스에 여기 알함브라 보다 더 아름다운 궁전을 지어주겠다고 약속을 하면 따라 나설 것입니다. 우리가 좀 서두르기로 하시지요."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멧이 후계자 구도를 정하지 못한 채 갑자기 사망하게 된 이후, 이슬람의 절대적 권력을 쟁취한 수니파는 혈통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정통성을 주장하는 시야파를 향해 처절하고도 줄기차게 소탕전을 벌인다. 마침내 이맘 알리와 이맘 후세인의 혈육을 모두 살해 함으로써 이제 지구상에 마호멧의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하지만 영적인 정통성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시야파들은 살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북아프리카 쪽으로 도망쳤다.
이들이 튀니지 모로코 지역으로 지중해를 따라 이동하면서 북아프리카를 거점으로 살아가던 원주민인 베르베르인들과 융화되고 카프타고인들과 페니키아인들과도 원만하게 교류하면서 북아프리카 곳곳에 이슬람 국가(왕조)를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하는 그 이슬람부족 중에 일련의 군대를 이끌던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있었다. 이미 지중해의 주요 거점들을 차지한 이슬람 동족간의 대결을 피하고 싶었던 지야드는 마침내 미지의 세계인 지중해 건너 유럽의 영토로 눈을 돌리게 된다. 당시 리베리아 반도는 게르만족의 일부인 서고트족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심한 갈등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던 시기였다.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안달루시아 남부에 도착했다.(711년) 풍요로운 지상 낙원이 그의 시야 앞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지야드는 급성장해서 더욱 막강해진 군대를 이끌고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불과 5년 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스페인 영토의 2/3를 차지하게 된다. 지야드는 유럽 영토에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를 세우고 스스로 초대 왕에 등극한다. 이슬람 국가의 탄생이었다. 로마의 카톨릭의 지원으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이 시작되고 비록 쇠퇴해가고 있다곤 쳐도 서고트족의 반격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이슬람이 왕조의 안정을 꾀하면 꾀할 수록 레콩키스타의 저항도 점점 거세어져 갔다.
우마이야 왕조가 이슬람 국가를 세우고 스페인 영토를 지배한 지 40여년이 지나 스페인의 저항은 극에 달했고, 반면 우마이야 이슬람 왕조는 위기에 봉착했다. 다급해진 왕은 시리아 지역의 이슬람 왕국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지원군이 도착했다. 그런데 이 지원군의 지휘관은 애초부터 우마이야 왕조를 지원할 생각이 없었다. 후방에 도착한 지원군들은 전방에서 수세에 몰려 허덕이는 같은 이슬람인 우마이야 왕조의 배후를 공격했다. 삽시간에 우마이야 왕조는 몰락했다. 그리고 나서 새롭게 세력을 규합한 시리아에서 온 지원군이 중심으로 후기 우마이야 왕조를 세우고 지휘관이 왕에 등극한다.(역사는 이렇게 늘 반복된다)
이렇게 정권을 찬탈한 후기 우마이야 왕조는 이후 300년 가까이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후기 우마이야 왕조는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고 메스키타와 알카사르를 건설했다. 코르도바는 세비야와 그라나다를 위성 도시로 건설하면서 이슬람에 의한 리베리아 반도의 통치를 보다 확고하게 실현해 나갔다. 하지만 이들의 그토록 눈부신 번영은 왕위 계승 문제와 부족간의 갈등과 마찰로 분열과 해체를 거듭하면서 제국으로서의 위용을 점차 잃어가기 시작한다.
스페인 사람들에 의한 레콩키스타(카톨릭 국토회복운동)가 체계적이고 대대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스페인 전체가 통일운동에 하나가 되어 뛰어들게 된 것이다. 반면 후기 우마이야 왕조는 분열을 거듭한 끝에 작은 부족국가 연합으로 급격하게 쇠락하였다. 결과는 엄청난 현실로 드러났다.
코르도바가 레콩키스탄 군대에 탈환된 것이다.
코르도바에서 퇴각하면서 후기 우마이야 왕조는 결국 파산해 버리고 만다.
사분 오열된 이슬람 세력을 그나마 수습하여 1248년까지 약 12년 동안 세비야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왕국이 건재했었다.
그러나 이미 승기를 잡은 레콩키스타 군대가 이쯤에서 뒤로 물러설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세비야를 상대로 대대적인 스페인군의 공격이 이어졌다.
세비야의 함락을 눈 앞에 둔 이슬람은 허겁지겁 모로코의 이슬람 왕국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다.
모로코 나스르 왕조의 모하메드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왔다. 그 다음은............. (뻔) 할 (뻔)자였다.
세비야 이슬람 왕조를 뒤엎은 모하메드 왕은 남은 이슬람 세력들을 규합해 그라나다로 물러 선 다음에 새로운 나스르 왕조를 스페인 땅에 건설하고 스스로 그라나다 이슬람 왕위에 오른다. 새로운 왕조가 그라나다에 탄생하면서부터 모하메드 1세. 유세프 1세. 모하메드 5세에 걸쳐서 바로 (알함브라 궁전)을 왕조의 왕궁으로 건축하게 되는 것이다.
카톨릭과 이슬람의 대결은 끊임없이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펼쳐진다.
이슬람 나스르 왕조는 스페인의 재정복을 거듭거듭 추진한다. 스페인은 리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완전하게 몰아낼 때 까지 레콩키스타를 멈추지 않는다.
이 와중에 스페인에 하늘의 도움이 뚝 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거꾸로 이슬람의 재앙이기도 했다.
1469년 카스티아&레온의 이사벨 여왕이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왕과 결혼이 성사된 것이다. 이 결혼을 시작으로 레콩키스타 운동은 대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포루투갈과 그라나다를 제외한 리베리아 반도의 모든 영토가 하나로 통일된 것이다.
마침내 스페인의 최강 군사력 전체가 그라나다를 철통 같이 에워싸고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가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1492년 1월로 막 접어든 시기였다.
이사벨 여왕은 알함브라만을 차지하고 있던 보아브딜 아랍왕에게 사신을 보냈다. 언제나 여왕의 말고삐를 잡고 최측근에서서 여왕을 호위하는 분신 '곤살로 페르난데스'였다.
여왕의 친필 서신은 간단 명료했다.
'이제 곧 알함브라를 상대로 공선전이 펼쳐질것 이라는 것. 성 안에 거주하는 도망쳐 들어 온 상당수의 이슬람 민간인들의 피해와 살상은 피할 수 없다는 점.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너무도 아끼지만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석포 공격과 화공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기에 부득이 알함브라의 안위를 더는 살필 수 없다는 점' 등을 피력했다.
아울러 '백성은 물론 왕족과 귀족의 안전과 모로코로의 퇴각로 보장과....... 알함브라의 보존을 위해서라면 명예롭게 항복하라.'는 최후 통첩이었다.
이사벨 여왕의 공세는 정확했다.
보아브딜 아랍왕은 냉철하고 치밀한 정치가 스타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그는 '만약 왕이 아니었으면 세상을 유랑하면서 시를 짖고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해왔다. 그는 아주 감성적이고 온순하며 정이 많고 예술이나 아름다운 건축물을 너무도 끔찍히 아끼는 로맨티스트였던 것이다.
자신을 믿고 의지해 성 안으로 피신해 온 백성들의 학살을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으며, 이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이 전쟁으로 파괴되고 사라진다는 것은 백번을 죽었다 다시 살아난다 하여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싸워서 파괴되고 사라지는 것 보담은 차라리 적에게 념겨서라도 온전하게 남겨두고 싶었다.
전쟁터에서 한 나라의 왕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그 나머지 상황이나 결과는 더 따져서 무엇하겠는가?
곤살로는 여왕에게 보아브빌의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이사벨 여왕의 친서와 협정문이 든 서류를 들고 곤살로와 스페인의 궁정책임자 대사가 다시 알함브라 궁전을 찾았다.
그들은 알함브라의 나스르 궁전으로 안내 되었다.
코마레스 궁에 있는 후대에 길이 명성을 남기는 그 유명한 대사의 방에서 마침내 보아브딜 아랍왕은 스페인 대사가 가져온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리베리아 반도에 수놓았던 이슬람의 역사가 끝나고, 동시에 스페인의 레콩키스트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무려 781년의 세월이 지나고 난 후였다.
1492년 1월, 알함브라에서 맞은 보아브딜의 마지막 밤은 이렇게 모두 지나고 아침이 시작된 것이다.
'어진 군주 보아브딜 왕이시여. 당신의 현명한 선택은 두고두고 감동으로 회자될 것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무운을 빕니다.'
페르디난도 아라곤 왕은 말투는 온전하고 사려깊은척 하고 있었으나 누가 보아도 그는 은근슬쩍 상대를 비아냥거리는 듯한 표정과 행동거지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지금 승리자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에스파냐의 최고 통치자인 양왕 중의 한명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좀 더 일찍 현명한 판단을 했더라면 양국의 군사는 물론 백성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테니 말씀입니다. 선뜻 제안을 해주셔서 그나마 양측의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던 사실에 다소 위안을 느낄뿐입니다.'
페르디난도는 쳐다 볼 수록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솟아나는 그런 부류였다. 어쩌면 평소 그렇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 승전국의 통치자라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저렇게 은근히 남을 깔보는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문을 열고 알함브라가 저만치 올려다 보이는 벌판에 설치된 스페인군 지휘통제소 군막 근처(현재 그라나다 이사벨 여왕 광장)까지 내려오기가 몹시 힘에 겨웠었지만, 막상 적군의 심장부에서 호위병 몇십명만 대동하고 찾아온 처지이면서도 오히려 이제는 심신이 담대해져 있었다.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가야할 길이 멀고 험해서 우리는 이제.........'
보아브딜 왕은 작별을 통보했다. 두렵거나 위축되기 보담은 이 짜증나는 사람에게서 먼저 벗어나고 싶었다. 그의 눈빛과 승리에 취한 표정이 꼴보기도 싫었다. 말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보아브딜은 페르디난도 왕의 뒷편에 쳐져있는 이사벨 여왕을 향해 가볍게 목례로 예의를 갖추었다. 온갖 전설같은 소문과 이야기로 수도없이 많이 접해왔던 여왕을 실제로 마주대하기는 처음이었다. 깊은 침묵으로 어느 정도의 도도함과 기품을 대신하고는 있으나 그렇다고 별반 다른 여인들에 비해 특별히 달라보이거나 차갑고 집요하고 잔혹해 보이지도 않았다.
보아브딜 아랍왕이 말의 방향을 바꾸어 앞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그의 등 뒤에서 낭랑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시에라 네바다의 눈보라를 뚫고 가시는 길은 대단히 험난할 것입니다. 지브롤터까지 무사히 도달하시도록 저의 개인 근위대 50명이 멀리 떨어져 호위해 드릴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대로 조처해 드릴것입니다. 지브롤터에 도착하셔서 바다에 나가실때 까지 혹시나 모를 모든 상황에대비해서 근위대가 대처해 드릴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감시가 아님을 유념해 주세요. 먼 여정에 더는 이 땅에서 어떤 불상사도 겪게 해드리고 싶지 않은 저의 마음입니다.'
'여왕께서 베풀어주시는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부탁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미 여왕께서는 위대한 군주가 되셨습니다. 이제 스페인 영토에서 더 이상의 전쟁이 없다면......... 부디 선정을 베푸는 군주가 되십시요. 알함브라 궁전을 비롯해 저희 이슬람의 손때가 묻은 아름답고 위대한 건축물을 지켜주십시요. 아울러 이런저런 이유로 이곳에 남아야 하는 유민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말씀하신 바대로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두 분. 부부왕의 무운을 빕니다.'
'아랍 왕을 위해서도 기도하겠습니다. 혹여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아벤세라헤스 가문과의 은원이 아직 남아있는것으로 압니다. 그들로 인하여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신다면......... 어떤 면으로든 적극 나서서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순간 아찔한 전률이 아랍왕의 페부를 날카로운 비수가 찔러오듯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찰라같은 순간의 일이었다. 세상에 이 여자가 정말..........
귀신이 까무라치고 기절초풍 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왕은 세상의 어디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일까? 에스파냐가 승리했고 아랍이 패망했다 손 쳐도, 아직 그 주변의 모든 연관관계들이 말끔하게 정리가 된 것이 아닌 지금에........ 벌써 자신의 존재를 정점으로 미래에 혹 벌어지거나 닥치게 될......... 멀리 아프리카 땅 모로코에서 있을지도 모를 일까지 계산에 넣고 있는것이 아닌가? 새삼 여왕이 앞세운 거대한 장벽이 얼마나 철옹성이고 그 위력이 무서울 정도로 엄청나나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왜 스페인이 그녀를 앞세우고 저토록 당당해 하는지를 이제 비로소 알것만 같았다.
왜 자신들이 전쟁에서 패했고 이렇게 쫓겨가야 하는지 이제는 확실하게 그 이유를 알것만 같았다.
보아브딜 왕은 다시 한번 여왕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 옆에서 묘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아라곤의 왕이 보였다.
'참 멍청한 녀석. 여왕의 치마 폭 뒤에 숨어서 어설프게 왕 노릇이나 하고 있는 주제에......... 그렇다 쳐도 넌 도대체 어떤 재주를 가지고 있는거냐? 어떤 재주를 부렷기에 저렇게 훌륭한 여자를 차지할 수 있었느냔 말이다. 저런 여자를 차지하고도 겨우 남을 비아냥 거리기나 하다니........ 꼬락서니 하고는......... 아라곤의 왕이라고? 네 팔자는 평생 꾹두각시야............ 여왕은 정말 무서운 여자다. 저런 여자를 상대해야 했다니...........'
자격지심이었을까?
보아브딜 아랍왕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자 과오가 있었다. 바로 왕비의 문제였다.
아랍왕은 지극 정성으로 왕비를 사랑했다. 왕비는 그에게 어쩌면 왕국 이상이었다. 하지만 왕비에게 아랍왕은 전부가 아니었다.
왕비는 알함브라 궁전이 좋았고, 그곳에서 누리는 향락과 어느 정도의 사치와 모든 아랍인들이 자신을 떠받들어 모신다는 그 지위가 주는 기쁨의 재미를 일찍부터 알아챘다. 그러다가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세비야 왕조가 스페인에 밀려 모로코 왕조에 구원을 요청하였을 때, 고향인 모로코엔 두 개의 세력이 엄연히 존재했다. 모하메드 1세가 군주로 있는 나스르 왕조와 왕권에 도전은 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모로코의 주변을 드넓게 차지하고 있는 아벤세라헤스 부족의 양대세력이었다. 세비야의 요청으로 지중해를 건넌 모하메드 1세는 처음부터 안달루시아 내지는 스페인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터전인 모로코를 잃고 싶지도 않았다. 하여 모하메드는 스페인으로 건너오기 전에 먼저 변방에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아벤세라헤스를 압박했다. 충성 서약을 받고 그들의 군사적 역량을 제한시키고 부족의 일부를 인질로 데리고 스페인으로 왔다.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한 나르스 왕조의 지배력은 모로코를 변함없이 통치하고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아벤세라헤스 부족의 영향력 또한 만만치가 않게되었던 것이다.
보아브딜 왕의 대에 이르러 기어코 사단이 나고야 말았다.
인질로 끌려와 있는 아벤세라헤스 지도자 아들이 그만 아랍왕의 왕비와 눈이 맞아버린 것이다.
여러 정황상 아벨세라헤스 아들과 왕비 사이에 남모를 연정이 생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왕비는 사사로운 부정을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끝내 부인했다. 경천동지 할 이 사태에 대해서 아벤세라헤스의 아들은 이렇다 저렇다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라나다 왕국 전체에 온갖 추측과 소문이 난무했다. 왕은 숨어서 활동하는 자신의 최측근들을 모두 풀었다.
드러난 결론을 왕비는 부정했다. 왕은 믿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드러나는 정황은 있어선 안될 심각한 지경의 불륜이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비만은 끝내 불륜을 부인했다.
도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타개해야만 하는가?
보아브딜 왕은 결정했다. 아벤세라헤스의 아들과 대사를 포함해 그라나다에 인질이다시피 볼모로 잡혀있는 36명의 남자들을 나수르 궁전의 라이온 궁으로 불러 들였다. 12마리 사자의 분수대가 있는 곳으로 이곳은 왕족 개인만의 공간으로(하렘 같은) 왕비와 후궁들이 주로 기거하여 왕과 유년의 왕자를 제외하고는 남자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곳이다. 이 금단의 지역에서 아랍왕은 36명의 치정에 얽힌 정적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무자비하게 참수해 버렸다.
아들과 일가 친척을 잃은 아벤세라헤스 부족은 세력을 규합하고 이를 갈면서 복수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망할대로 망한 아랍왕이 살아남은 백성과 가족을 이끌고 패장이 되어서 고향으로 쫓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태의 원인이 되었던 왕비를 모시고 여전히 무한한 사랑을 받치고 구애를 펼치면서 말이다.
그런 아랍왕의 심정에서 지금 이 위대한 이사벨 여왕을 직접 마주하게 되었으니 과연 어떤 감회가 사무쳤을까?
혹시라도 바꿀 수만 있다면.......... ㅎㅎ
깨몽!!!!
보아브딜 아랍왕의 바램도 어디까지나 그때까지 뿐이었다.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은 아랍왕이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레벨 수준의 군주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통치권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양왕이었고, 남편인 페르디난도 아라곤 왕이 전면에 나서서 국정을 손수 주관하는것처럼 보이기는 하였으나, 기실 스페인의 모든 국정은 뒷편에서 이사벨 여왕의 손으로 운영되었다. 아녀자의 처지로 남편을 추켜 세우긴 하였으나 서슬시퍼런 통치자의 절대권력은 오로지 여왕의 차지이자 당연한 몫이였다.
그런 내막이 바로 같은 해에 온 조정과 남편 왕이 절대 반대하는 속에서도 유일하게 여왕 단독의 권한으로 콜럼버스를 신대륙으로 보내는 결정을 단독으로 내리게 된다. 이사벨은 전무후무한 단독 절대군주였던 것이다.
그런 정치 9단 이사벨 여왕이 순진무구한 보아브딜 아랍왕을 어르고 달래서 시에나 네바다 산맥을 넘어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쟁의 종착점에서 상호간에 이루어진 평화 협정문은 패자에게는 꼭 기대고 의지하고 싶은 간절한 희망이다. 하지만 승자에게는 그간의 과오나 추잡함을 가려줄 대외선전용 귀찮은 요식행위일 뿐이다. 패자는 그 완벽한 이행을 간절함으로 바라지만, 승자에게는 그저 휴지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보아브딜 아랍왕이 탄 배가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가 지중해로 향하는 순간......... 이사벨 여왕의 냉철하고 처절한 명령이 떨어졌다.
'알함브라 궁전에 있는 모든 이방인을 성밖으로 내쫓는다. 궁전에 훼손을 최소화 하는 대신에 이슬람 이교도가 설치한 장식물을 모두 제거한다. 스스로 남은 모든 이슬람인들에게 72시간 안에 그라나다를 떠날것을 명령한다. 72시간 이후에는 종교 재판을 통해 이교도에 대한 법률과 간첩죄를 들어 예외없이 모두 처형할 것이다.'
모로코에 당도한 아랍왕에게 떠나온 그라나다에서 전해 온 첫소식은 무참하게 살륙되어 내던져진 아랍인들의 처형소식이었다.
그는 통한의 눈물을 쏟으며 멀리 페스까지 이동해 갔다.
다음으로는 유대인과 그리이스 정교회 교인들이 종교재판정으로 끌려나갔다. 그들은 마녀 사냥식 종교재판을 받았고 무참하게 처형되었다.
카톨릭 신자가 아니고서는 스페인 영토에 살 자격도 이유도 명분도 없는 더없이 신성한 세상이 생겨난 것이다. 위대한 여왕에게 신께서 부여해주신 과업의 수행과정에서 이 모든 광란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게 신의 가르침대로 철저하게 따랐으니....... 이제 스페인은 진정한 지상낙원이자 에덴동산이 되었어야만 한다. 여왕은 가장 위대한 성인의 반열에 올랐어야 당연할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꼭 1백년 후. 이 시기에서 꼭 1백년이 흐른 뒤에 스페인은 이날 아프리카로 쫓겨가던 아랍왕의 신세를 자신들도 제대로 경험하게 된다.
이사벨 여왕이 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꼭 1백년 뒤에 대서양 건너 영국에 또 한명의 위대한 여성 군주가 마침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사벨 여왕에 비하면 영국여왕은 그다지 숭고하고 신성한 신의 계시나 유업을 하달받지 못한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든면에 있어서 1백년 전의 이사벨 여왕을 서너배쯤 엎그레이드 한것 같은 위대한 독재 군주 끝판왕이 새롭게 이번엔 영국땅에 등장한 것이다. 영국여왕은 이사벨의 운명처럼 절대적으로 카톨릭만을 위한 사명을 타고나지도 못했다. 당시 영국은 신교 구교의 대립 못지않게 성공회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이사벨 여왕이 신화처럼 창조해 놓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새로운 세계 최강자로 부상했다. 스페인의 처절한 불행은 이때 시작되었다. 1980년대 가까이까지 호된 댓가를 치뤄야만 했다. 스페인은 그들이 비참하게 쫓아냈던 아랍왕의 처지를 스스로 체험하고 실감하게 된다. 유럽 사회에서 아주 오랜 세월동안 제대로 철저하게 쪽박을 차게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은 이사벨 여왕이 이룩해 놓은 스페인의 영광을 아주 처참하게 몰락 시키고 모두 빼앗아 버린다.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등장한 것이다. 직전까지 세상을 호령하던 스페인의 모든것을 빼앗으면 빼앗을 수록 새로 등장한 대영제국의 번영과 미래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해야할까?
역사는 돌고 돈다.
론다에서 그라나다까지는 2시간 반이 소요된다. 버스나 기차가 별차이 없이 대동소이하다.
우리는 기차를 선택했다.
결과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체험하게 된다.
기차표를 구매할 때, 기차에서 버스로 중간에 한번 환승이 있다는 안내는 받았다. 기차여행중 중간에 환승이라는 것은 철도 노선 어딘가를 심하게 수리해야만 할때...... 가령 기찻길 다리 노선이 부서졌다거나...... 그래서 버스로 잠시 이동해서 반대편 다른 기차에 타는것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론다를 떠나 전형적인 안달루시아의 평원 풍경을 즐기며 한시간쯤 달렸을까?
기차가 멈춰섰고 짐을 가지고 내려서 대기하던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자동차 도로를 쌩쌩 달렸다.
얼씨구?
나머지 한시간 반을 버스로 그냥 쌩쌩 달리더니....... 마침내 저멀리 창문 밖으로 눈 덮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헐.
그라나다에 도착한 것이다.
아무리 운영사가 다르다지만........ 이게 기차노선이야? 아님 버스노선이야?
거기다가 버스를 타면 당연히 버스 터미널로 향하는데......... 기차노선의 환승 버스는 우리를 그라나다 기차터미널에 데려다 내려준다.
또 헐. 이런 어처구니가........ ㅎㅎ. 암튼 우리는 그라나다에 무사히 도착했다.
배낭과 캐리어를 가지고 우리는 또 걷는다.
왕실 병원을 향해서....... 일단 무조건 콜럼버스를 만나기 위해서.........
인제 원통 최북단 포병 상황병으로 복무한 경험은 지도를 판별하는데 귀신이 되게끔 나를 만들어 주었다. 왕실 병원만 찾으면 이제 그라나다는 내 손바닦 안에 접수한다. 15분쯤 걸었을까? 딱 보니 알겠다. 왕실 병원이라는 것을........
스페인에서는 '레알'이 붙으면 뭔가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 한마디로 격(등급)이 달라진다. 함부로 아무데나 붙일 수 있는게 아니다.
마침내 '그라나다 왕실 병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라나다 입성!!!
콜럼버스가 있고 푸쉬킨이 있고 돈 후안이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그라나다 최고의 교통 중심지다. 그라나다 여행이나 공항이나 인근 주변도시의 모든 교통편은 왕실병원 로터리를 모두 경유한다.
그래서 바로 인근은 호스텔을 론다에서 고르고 골라 선택 예약을 했다. 결과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푸쉬킨 광장에 있는 동상과 거의 흡사해서 놀랐다. 푸쉬킨이 이곳을 다녀갔나?
그라나다를 찾는 여행자의 대부분은 알함브라 궁전으로 시작해서 알함브라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는 산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알함브라의 일몰로 여행을 마치게 된다. 결국 그라나다는 알함브라가 전부라는 이야기가 된다.
굳이 그란 비아나 누에바 광장, 시크로 몬테를 꼽거나 찾아가보지 않는다 쳐도 그라나다 여행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그리 큰 문제가 될것 같지는 않다.
설혹 다양성이 문제가 될 듯 싶으면 적당히 대성당에 왕실 예배당 정도를 끼워 넣게되면 나름 훌륭한 '그라나다 여행'이 완성 될 수도 있어 보이기는 한다.
과연 그럴까?
사실은 내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정도면 어느정도 충분한 그라나다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그라다나에 도착해서 받은 첫 느낌은 전혀 다른것이었다.
그라나다 기차역에 내려서 지도를 펼쳐들고 숙소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사전 지식으로는 그라나다 인근에서는 어디에서나 눈 덮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보이고, 그라나다 시내 어디에서나 (우리나라 서울 남산처럼) 알함브라 궁전이 올려다 보인다는 사실에다가, 왕실 병원과 대성당 사이의 지역에 숙소를 정하게 되면 도보 여행과 교통편 운영에 대단히 편할것이라는 예측이 거의 전부였다.
'허리 수술을 해서 이번엔 내가 어쩔 수 없이 캐리어를 끌고 오기는 했다만, 다음부터 내가 죽어도 캐리어 끄나 봐라. 아이고야........ 배낭 메고 올껄.........'
사무치는 배낭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챠밍여사를 달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20분 정도를 전형적인 유럽의 포장도로를 걷는다.(아는 사람만 앎)
'스페인 왕실 병원.'
얕은 언덕에 자리한 실로 어마무시한 잘 가꾸어진 웅장한 건물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흡사 잘 가꾸어진 수도원이나 역사 가득한 대학 캠퍼스 같은 분위기가 흘러 나온다. 잘 가꾸어진 정원 사이로 여기저기 수도없이 분수가 솓구쳐 오르고 물이 좔좔 흘러내린다.
'레알(real)'은 영어 문화권의 '로얄(royal)'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말 그대로 스페셜 중에서도 아주아주 스페셜 하다는 뜻이다.
스페인에서 '레알'은 돗떼기 시장에 여기저기 아무데나 함부로 가져다 붙이거나 쓸 수 있는 단어가 절대 아니다. 새로운 가치와 품격과 존경과 순종의 의미를 담고 있다.
'Real Hospital in Granada'
레알이란 단어가 붙을 수 있는 병원이 비교적 스페인의 한쪽 구석이자 변방인 그라나다에 있다. 당연히 마드리드 왕실 궁전 인근에 있어야 하지 않은가?
도대체 이건 뭐지?
왕실 병원 도로를 따라 길게 조성된 공원에서 콜럼버스와 반갑게 조우한 후에 대성당쪽으로 난 골목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불과 5분 거리 골목 안쪽에 우리의 숙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작은 골목길을 따라 오랜 역사를 겉으로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는 웅장한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는 것이었다. 이 작은 골목이 과거에 그라나다의 핵심적인 중앙부로서 마차와 전동차(트램)가 다니던 중심이었다는 것을 뒤에 깨닫게 되었다.
카페, 여행사. 기념품점. 식료품점....... 여타 도시의 번화가와 비슷한 골목길 저편에 현대식 웅장한 건물이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연실 지체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비교적 사회 최하층민으로 보이는 현지인들이 끊임없이 그 건물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다. 택시를 타고 연실 도착하는 목발이나 휠체어를 탄 사람들과 속속 도착하는 엠블런스에서도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내린다. 우리나라 대학병원 비슷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성 라파엘 요양병원'이다.
주로 지적 장애자와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지속적인 물리치료를 담당하는 병원이다. 또한 교회를 통하여 서민층을 위한 무료 급식 봉사를 하고 있다.
선뜻 어떤 감흥이 잔잔하게 여운처럼 페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나오기 시작한다.
현대식 라파엘 병원과 이웃하여 천년 가까운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미 책자를 통해 내게는 익숙한 '성 요한 성당'이 나타났다.
이 성당에서 모신 '성 요한'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명인 '사도 요한'이 아니다. 그렇다고 '세례자 요한'도 아니다. 그는 포루투갈에서 태어난 지극히 평범하다면 평범했던 '사회 봉사자 성 요한'을 뜻한다. 이 사회 봉사자 요한이 바로 여기 그라나다의 수호 성인이다. 또한 왕실 병원과 깊은 연관관계를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사회 봉사자 성 요한'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성 요한 성당(basilica juan de dios granada)'은 아주아주 크고 어마무시한 하나이자 두 개로 나뉜, 별개이자 또 한 몸체인....... 좀 특별한 공간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 요한 성당'과 '성 요한 병원'은 하나의 몸체이자 두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천 년전의 시대에 이렇게 크고 체계를 갖춘 병원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골목을 따라 100m 쯤 내려가면 '제로니모 수도원'이 나온다.
수도원을 통한 사회 복지가 널리 실현되었다고 한다. 또한 리스본에서 처럼 '제로니모'가 붙는 수도원들은 어찌나 웅장하고 조각들이 섬세한지.......
그 뿐이 아니다. 좌측 아래쪽으로 400m 정도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인공으로 조성한 멋진 공원과 함께 '그라나다 의과 대학교'가 있다. 학교에서 열심히 배우고 근처의 병원에서 봉사와 경험을 축적한 후에 스페인 전역으로 퍼져나간다고 한다. 혹 스페인 의학의 메카가 그라나다가 아닐까?
하긴 과거 중세 시대에 지구상에서 가장 선진문물을 가진 민족이 바로 이슬람 이었으니까 결코 허황된 추측만도 아닐것이다. 십자군 전쟁당시 온 유럽인들은 이슬람의 의학 천문학 지리학에 얼마나 크게 놀라고 감명을 받았었느냔 말이다. 그 이슬람이 가장 마지막까지 꽃을 피우며 남아있던 곳이 바로 여기 그라나다였으니 그럴만도 하지 않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내가 그라나다에 도착해서 30분 만에 느끼게 된 가장 큰 감동은........... 결코 알함브라 궁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피부로 느껴지는 '스페인의 사회복지'였다.
배낭메고 여행이랍시고 사방으로 싸돌아다니는 처지로 갑자기 웬 '사회 복지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뜬금 없는 씨츄에이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내 가슴에 강렬하게 파고들어와 닿는 느낌은 '선진형 사회복지의 모습' 이었다.
그라나다는 신체가 불편하고 스스로 제어나 통제가 원활하지 못한 장애인들을 위한 도시였다. 나에게는 그렇게 보이고 받아들여 졌다.
암함브라 궁전이 아니더라도........ 그라나다는 나에게 충분히 아름다웠고 소중했다.
알. 럽. 그. 라. 나. 다.
--- 성 라파엘 병원 건물 옆으로 나란히 성 요한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 성 요한 성당의 정면 파사드
-- 근세 시대의 성 요한 성당과 전동차가 지나가는 풍경 사진.
-- 성 요한 병원 입구의 옛 모습.
'성 요한 성당(basilica juan de dios granada)'은 다양한 행사를 통해 '성 요한 수도회'의 취지와 활동을 널리 홍보하고 성금을 모아서 사회봉사 활동에 활용하는 이벤트를 수시로 벌이기도 한다.
두 개의 첨탑과 녹색의 선명한 띠가 유독 아름다운 돔을 가진 성 요한 성당이다.
하지만, 정작 이 성당이 더욱 유명한 것은 극한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내부장식이다. 성 요한 성당의 내부는 온통 눈부신 황금색이다. 스페인을 통털어 이렇게 화려한 내부를 가진 성당이 또 있을까 싶다. 마치 몰타섬의 요한기사단(에수의 열두 제자중 사도 요한을 기리는 성당) 성당을 방불케 한다.
그라나다에는 결코 알함브라 궁전이나 대성당만이 있는것이 아니다.
성 요한 성당이나 인근의 제로니모 수도원의 경우만 하더라도....... 여타 다른 도시의 대성당이나 메스키타 등과 견주어 하나도 손색이 없는 위대한 걸작들이었다. 다만...... 다만....... 알함브라와 같은 지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덜 알려지고 중요성이나 가치가 폄하되고 있다고 할 밖에는......
'성 요한 병원'은 상당이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
예 모습은 그런대로 보존되고 있었지만, 당장 보수를 필요로 하는 많이 망가진 모습이었다. 안전망을 쳐서 최소한의 보존을 위한 방책을 시행하고자 하는 지역은 사용이나 접근이 통제되고 있었다. 하지만 안쪽 건물이나 2층의 경우는 다소 상태가 양호해....... 최소한의 용도로 현재도 사용을 하고 있었다.
성 요한 성당에서 아래쪽으로 조그만(약 100m) 내려가면 웅장한 '제로니모 수도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포루투갈 리스본의 제르니모 수도원과 같은 의미의...... 성인 제로니모에게 헌정된 수도원이다.
그라나다의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진정한 스페인의 통일을 이룩한 카톨릭왕 부부(이사벨 여왕과 페리디난도 왕)이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504년에 건축을 시작했다. 인근의 '그라나다 대성당'이 이슬람사원(모스크)를 개축한 건축물이라면, 제로니모 수도원은 처음부터 유럽 특유의 고딕 양식을 추구하면서 만든 통일 스페인의 자부심이 담긴 건축물이다. 그만큼 정성과 공을 들여 세운 장엄한 건축물임에도 대성당의 위용에 눌려 뒷전에 놓여 있다고 치면........ 이슬람의 건축술이 한수(안달루시아의 대부분의 건축미나 가치에서 이슬람적인 요소를 빼버리게 된다면 과연........) 위였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그리고 또 한가지....... '성 제로니모'만 들어가면........ 유럽 어디에서나 제로니모 수도원의 내부는 좀 색다른 특색이 단번에 느껴진다.
외부적인 웅장함 보다는 내부를 거대한 신전처럼 꾸미고, 비교적 장식이 단촐하면서도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의 육중한 볼륨감에 많은 비중을 두고, 또 거기에 대단히 정교하면서도 조각의 화려함을 현란하리만치 능수능란하게 살려 놓았다. 넒고 높은 내부에 오로지 기둥에만 집중된듯한 건축의 결과로 생겨나는 어떤 경건하면서도 한없는 중압감으로 내리 눌려지는 듯한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성스러움........ 암튼 제로니모에는 어떤 독특함이 있다.
스페인을 포함한 서방 카톨릭의 4대 교부에 한 분인 제로니모.........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그는 성서 학자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이 만들어기기까지 아주 크게 공헌한.........
그라나다의 제로미노 수도원은 리스본의 제로니모 수도원에 비해서 어느 정도 스페인 풍의 화려함을 입었다. 왜냐면 건축 시기가 신대륙 발견으로 황금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였으며, 대성당에 비해 손색이 없는 정통 카톨릭 성당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카톨릭 부부와의 필생 역작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뭐랄까?
솔직히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내 소견임을 전제로 아주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그라나다 제로니모 수도원'의 전체적 외부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그라나다 대성당'을 슬쩍 베낀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내친김에 조금더 솔직해 지자면.......... '그라나다 제로니모 수도원'은 '세고비아 대성당'의 짝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솔직한 나의 느낌이다.
그만큼 당시에는 이슬람 건축이 스페인 뿐만이 아니라 온 유럽 건축가들의 정신과 가치까지도 지배했던 것은 아닐까............?
이 시대를 살고있는 모든 세상사람들에게 물었다.
지금의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를 떠나 더 좋은곳으로 갈 수 있다면 어느 나라에서 살고 싶으냐고? 그게 위에 나타난 지표이다.
48위의 한국은 놀랍게도 마이너스다.
대한민국을 떠나 어디론가 떠나겠다는 사람이 한국에 와서 살고 싶다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뜻이다. 마이너스 8%라고 하지만 인구가 거의 오천만에 가깝다고 치면, 적어도 수백만명이 떠나고 싶어 한다는 뜻이된다.
이민 선호 국가 다섯번째 단계에 (스페인)인 버젓이 랭크되어 있다. 국가별 순위로 따진다면 8번째쯤 된다고 보겠다.
한 마디로 위 지표는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그것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우선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있고 두번째로 생활환경이 좋은 나라들이 뽑혔다고 보야야겠다.
하긴 누구인들 그런 나라에 가서 살고 싶지 않겠는가?
한국은 왜 한참 뒤의 순위에다 마이너스로 평가되었을까?
한국의 이민 정책은 오래된 관습이나 고정관념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외길이다.
60~70년대 부터 한국을 떠난 이민자들은 타국에서 과정이야 어떻든 커다란 부를 이루었고 당당하게 고국에 돌아와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하나의 교본이다. 모두가 떠나고 싶어 한다. 떠난다는 것은 기회이며 신분 상승과 부의 축적의 아주 기본적 단계이다 라고 생각한다. 또한 정치적 문제가 많고 경제적 번영은 있으나 꾸준한 계획경제가 아닌 정치에 휩쓸리는 불안정한 경제정책 탓에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그럼 이민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떠한가? 여하간 무조건 반대라는게 우리의 가치판단 기준이다. 근자의 제주도 난민들의 경우에서 드러났듯이, 유민으로 오는 사람들은 우리의 경제를 축내고 세금을 더 내게만들며 치안을 불안하게 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반대다. 그런가하면 돈이 많거나 능력이 있는 이민자에 대해서는 혹시 내 일자리를 빼앗고 나 보다 위에 군림하는 자가 될까 경외시하면서 일단 내치고 본다. (순순하고 고결한 우리 백의민족은 어찌되었든 우리끼리 살아야 한다는게 불변의 진리다. 하지만 여성이 부족한 세태에 우리보다 못한 나라에서 주로 여성들이 결혼을 전제로 이주해 오는것에 대해서는 이제 어느정도 무감각해지는 수준이라고 보겠다.) 암튼 뭔가 앞뒤가 개운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은 어쩌면 한국인의 애미모호한 태도와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스페인.
세계에서 적어도 여덟번째로 사람들이 가서 살고 싶은 나라이다.
하지만 유럽에서 이미 그리이스는 산산조각이 났고, 그 다음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파산이 날것이라고 경제학자들과 금융계가 우려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여전히 이 순간에도 유럽국가 중에서는 이류 국가이고, 또한 앞날이 매우 불안전한 국가이다.
왜 그럴까?
문제의 핵심은 '과도한 복지비용의 투자' 때문이다. 그리이스의 선례 또한 무리한 사회복지에의 끊임없는 투자가 결국 국가 경제의 발목을 잡은 경우였다.
챠밍여사로 인해 코르도바에서 적십자 병원의 신세를 졌었고, 지금 그라나다에 도착하면서 느끼는 스페인의 사회복지 정책은 참으로 부럽다. 최첨단 선진국형 사회복지 정책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복지 정책 중에서 점점 필요성이 증대대고 또한 천문학적 비용이 증가하는 분야가 바로 의료분야(건강 보험)이다. 지금 지구상에 시행되는 의료 사회복지 정책은 대략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지는데........ 대한민국의 경우는 소득과 생활 수준에 따라 의료비(건강보험료)를 차등 징수하고, 점차 범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지만 베풀어지는 의료 혜택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여러가지 정책 중에서 우리나라는 중간쯤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경우는 국가가 의료 비용을 세금에 포함해서 일괄 징수한다. 그리고 베풀어 지는 의료 혜택은 무한대까지 추진하고 있다. 어떤 병이든 어떤 치료든 얼마만큼의 비용이 들던 국가가 무한의 책임을 진다는........ 논리로 따지면 가장 이상적인 선진국형 의료 복지 정책을 택하고 있다. 어찌 부럽지 않겠는가? 지상낙원. 에덴 동산이 바로 스페인이아니겠는가? 마르크스 레닌의 프로레탈리아 사회주의 혁명에서도 이론만 논의되었지 실현되지 못했던 인간중심 생명존중의 사회복지의 끝판왕이 스페인에서 시험대에 올랐던 것이다. 어떤 경우이던 아픈데 돈이 없거나 모자라서 병원을 못가거나 치료를 못받는 경우는 절대 없다. 어떤 경우이든지 모두 국가가 책임 진다.
스페인의 국가 경제가 급성장을 하고 있을 때는 좀 무리가 있어보여도 결코 이런 복지 정책이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장기간 침체되고 스페인의 무역 수지가 휘청거리는 마당에서는 점차 천문학적인 금액이 지속적으로 더 투자되어야만 하는 이런 과도한 복지의료정책은 언제부터인가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끝내 여러분야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과도한(완벽한) 복지 혜택이 한 국가의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미 그 첫 실험은 그리이스에서 결과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여기저기 스페인 전역에서 '복지에 투자되는 비용'을 줄이자고 연이어 데모가 일어 났다.
그런가 하면 스페인 경제의 상당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까탈루냐 지역(바르셀로나 중심)에서 독립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몇몇 카탈루냐 지역의 경제 수입으로 스페인 복지 비용의 상당부분을 겨우 커버하고 있다는 데에서 생겨난 경제적 독립에 오랜 역사적 배경까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영토의 1/4 정도를 차지하는 카탈루냐 독립 충원 지역의 경제가 거의 스페인 경제의 2/3를 차지하고 있다면 이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듯 암울한 미래와 엄청난 걱정거리를 안고 있는 것이 지금 스페인의 현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드러나 보이는 대로....... 난 그런 선진국형 사회 복지가 마냥 부럽다.
하여간 성 요한 할아버지는 우리 시대에 어쩌자고 '사회복지'라는 이런 어려운 숙제를 만들어주셨단 말인가?
'성인이시여? 민주주의에서 젤 어려운게 복지 아닌가요? 참정. 평등. 평화요? 배 부르고 등 따습고 아픈데 없어야 민주주의지요. 배고프고 아픈데는 민주고 평화고 배려고 충성이고 나발이고 쥐뿔도 하나 없어요? 이 쉬운 진리를 무지렁이(민초들)들도 죄 다 아는데..... 어떻게 위정자와 정치가들만 모를까요? 그게 민주주의의 치명적 약점이자 아이러니 아니겠어요?'
혹 이러다 누가 생각하기에 내가 건강보험과 상관이 있나 하겠다. ㅎ
자유여행을 하면서 여러나라의 현지인 생활모습을 자주 유심히 살피다 보면 이것저것 우리의 현실과 자주 비교되고, 때론 은근한 자부심이 생겨날 때도 있고, 때론 빠른 뉴스 때문에 얼굴 붉어지거나 좀 창피할 때도 있답니다. 대개 전자는 한국 경제. 스포츠. 등의 분야이고, 후자의 경우는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가 한국의 정치판 때문이라 할 수 있겠지요. 솔직한 개인 소견으로 '여의도'와 '파란 기와집 식구들'만 정신 제대로 챙겨서 유엔 가입국 수의 중간 정도만 해주어도 행복하겠습니다. 이거야 원........ 아프리카나 개발 도상국들과 비슷한 레벨에서 취급받는 책임을 이 땅의 정치가들은.........이럴때면 아무 상황에서나 또 면책특권 카드?....... 하여간 노는 수준이란게............
포장마차의 쥐포도 가만히 살펴보면 낯짝이란게 있는데........ 이 양반들은 그 마저도 없다. 쓸개가 없는 것은 쥐포나 이 양반들이나 마찬가지..........
쥐포는 수출이나 하지?
아무튼 지금 여기는........ '그라나다(Granada)'.
스페인의 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그라나다의 장인이다. 그는 지척에 두고도 천상의 알함브라 궁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알함브라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말은 다소 어깃장으로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육중하면서도 우아한 이 건축물을 본 사람들은 이 말뜻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알함브라는 자그마한 산자락 하나를 통째로 궁전으로 만든 곳이다.
초기 그라나다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은 세개의 산자락 중에서 그라나다 평원을 내려굽어 살필 수 있는 가운데 산자락의 끝에 웅장한 성채를 하나 지었다. 그것이 지금의 알카사라(이슬람 성채) 이다. 당시엔 이 지역을 방어하는 하나의 요새였을 뿐이었는데........ 코르도바와 세비야를 중심으로 활개치던 이슬람 세력이 강력한 스페인 카톨릭의 저항에 부딪쳐 물러나고 물러나다가 최후에 이곳 그라나다까지 후퇴하게 되자, 리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였던 나스르 왕조는 이곳 그라나다의 알카사르 성채에 이어 붙여서 궁전을 지었던 것이다.
마치 사전에 한번 쯤 예행 연습이라도 했던 것처럼, 알함브라 궁전은 이전까지 이슬람의 거점이자 절대 성지였던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보다도 훨씬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건물 하나하나의 배치에까지 기품과 기교가 차고 넘친다. 유럽 지역의 대다수 궁전들이 평면의 대지 위에 인공적인 직선 위주의 정원을 조성(베르사이유 궁전의 경우 처럼)한데 반하여, 알함브라 궁전은 산비탈의 지형을 그대로 살리고, 더하여 울창한 숲까지도 인공 조성이 아닌 자연의 미를 그대로 살려 냈다. 그 자연적 지형 위에 알게 모르게 물길이 생기로 끊임없이 맑은 샘물이 흘러내리고 곳곳에 분수가 솟아오른다. 더하여 이 산자락에 들어선 이슬람식 궁전은 높은 곳에 놓여 있어서 주변 조망 또한 아주아주 뛰어나다.
뛰어난 건축술을 가지고 있던 이슬람 건축가들은 코르도바에서의 경험을 되살려서 외성과 내성으로 둘러쌓여 있던 성채에 이미 있어 왔던 알카사르를 있던 그대로 더욱 견고하게 쌓아 올리는 한편, 성채의 중앙에 왕궁을 지었다. 그리고 나서 산자락 위에 왕의 행궁이자 여름 별장이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정원이 중심이 된 작은 왕궁을 덧붙였으니 그것이 바로 헤네랄리페 이다. 이렇게 초기 알함브라는 알카사르 성채. 궁전. 헬네랄리페 이렇게 세곳의 장소로 구분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들어 카톨릭에 의하여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을 차지하게 된 카를로스 5세(신성로마제국 카를 1세)는 이 빼어난 알함브라 궁전의 매력이 모두 이슬람 건축가들에게 의해서 생겨났다는 점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궁전의 바로 옆에 유럽의 정통 건축양식을 빌은 웅장하면서도 장엄한 건물을 지어서 스페인 카톨릭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하여 생겨난 건물이 바로 카를로스 5세 궁전이다.
이슬람 건축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카를로스 5세 궁전이 알합브라 궁전 지역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쌩뚱맞은 부조화의 전형이라고 하지만, 유구한 세월이 지나다보니 이제는 그저 그런 알함브라의 일부처럼 느껴질 뿐이다. 조화롭고 조화롭지 못한것을 떠나서....... 지금은 카를로스 5세 궁전이 없는 알함브라도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 또한 충분하리만치 매력적으로 다가오니까.........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알함브라 궁전을 찾아나서 볼까?
알함브라 궁전 방문은 하루 이상 사전 예약이 필수다.
누에바 광장에서 좁은 골목길을 걸어올라 20분이면 알함브라에 닿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누에바 광장이나 이사벨 광장에서 빨간 미니 버스를 탄다. 옛 중세 도시의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는 그라나다의 세 언덕, 알바이신. 알함브라. 사크로몬테 지역은 골목이 좁고 꾸불꾸불하여 커다란 대형버스들이 오갈수가 없다. 하여 이 세 언덕에는 빨간 미니 버스가 대신 운행을 하고 있다. 빨간 미니 버스가 아니면 택시, 그것도 아니면 걷는 방법 뿐이다.
누에바 광장을 시작으로 30번은 알함브라 궁전 전용 노선, 31번은 알바이신 전용 노선, 그리고 32번은 알바이신과 알합브라를 모두 왕복 운행 한다. 그런가 하면 뜸 하게 있는 34번 버스는 알바이신과 알함브라를 경유하여 사크로몬테까지 모두 연결하여 운행 한다.
이 차량 번호의 차이를 유념해 두면 알합브라나 아님 그라나다를 여행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럼 이제 슬슬 알함브라 궁전을 찾아나서 보기로 할까?
이시벨 광장에서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를 만나 본 후에 갑자기 나타난 32번 빨간 버스에 올라 탄다.
그래피티가 사방에 그려져 있는 아주아주 좁고 가파르고 꾸불꾸불한 언덕길을 숨가쁘게 오르노라면, 온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이색적인 느낌을 전달해 주기에 충분한 밝은 암갈색의 성문이 나타난다. 알함브라 궁전의 출입구라고 할 그라나다 문이다.
그 문을 지나 좀 더 언덕길을 오르고 나면 이윽고 너른 광장에 흔하게......... 우리나라 유명 관광지의 매표소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장소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내리면....... 이제 알함브라 궁전 여행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Palacio de la Alhambra)'.
알함브라 궁전으로 향하는 빨간 32번 미니버스 안에서 우연히 50줄의 한국인 여행객 예닐곱명을 만났다.
단체 여행객들로 지난밤과 아침에 자유시간을 보내고 이제 알함브라 궁전 입구에서 가이드랑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중 한사람은 이전에 스페인 여행을 다녀간 유경험자였다.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일행에게 이런저런 사전 지식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러다 조금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에게.......
'알함브라 입장권은 예매 하셨나요?' 물어왔다.
'아뇨. 미처 예매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 일정이 바뀌다 보니 스케줄이 대부분변했고...... 어제 오후에 그라나다에 도착했거든요.'
'그럼, 두 분이서 단독으로 완전 자유여행을 하시는 것인가요? 와! 놀랍네요. 하지만 예매하지 않으셨으면 입장하지 못할 수도 있을텐데요..........'
'걱정해주셔서 고맙네요. 시간제한. 인원제한이 있는것 알고 왔어요. 실은 그라나다에서 며칠 묵을것이거든요. 아침 산책 겸 예매하려고 왔어요.'
'그러시면 다행이시고요....... 즐거운 여행 하세요.'
'여행 잘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하세요.'
대답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결코 그게 아니었다.
우리는 오늘, 이 아침에 기어코 알함브라를 보고야 말겠다는 사명감으로 나선 발걸음 이었다. 그라나다의 시작을 알함브라에서 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매?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연 처럼....... 또는 어떤 긍정적 징크스 처럼........ 날씨에서 극적인 상황까지........ 늘 행운이 따라다녔다는 그 우연한 열망을 우리는 항상 철썩 같이 믿고 있다.(실제로 우리의 여행에는 늘 알 수 없는 커다란 행운이 늘 따라다닌다)
매표소에는 이미 여행자로 가득하다.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나는 예매 창구가 아닌 당일 입장권을 파는 줄의 뒷쪽에 섰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마침내 우리 차례가 왔다. 입장권은 오전 오후 야간 입장권이 있는데 나는 지금 당장 입장할 티켓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전 입장권이 이미 바닥이 나고 없었다. 어쩌나? 오후 입장권을 사야 하나? 야간 입장권을 사야 하나?
망설이면서 매표소 여자 직원에게 이런저런 상담을 하면서.......... 내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후는 다른 스케줄이 있고......... 야간은 좀 무리다 싶고......... 아무래도 내일 다시 와야 할것 같네요. 내일 입장권을 사려면 다시 저쪽 예매표 창구로 가서 줄을 서야 하나요?'
'아니예요. 이 자리에서 예매 해 드릴 수 있어요. 원하시는 시간은요?'
'아침 일찍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이면 상관 없겠어요. 개관 시간으로 주셔도 되겠어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구요......... 한국분이시군요? 배낭 보구 알았어요. 우리 창구 직원중에 k-pop에 푹 빠진 친구 때문에 한국을 많이 알게 되었지요. 저기 저 끝에 친구요........'
'아! 차오!!!!! 반갑고 감사합니다.' 까만 머리에 까만 눈동자를 가진 집시 분위기를 풍기는 저쪽 아가씨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다.
그때........ 오 마이 갓.
'혹시....... 지금 입장 할 수 있는 티켓을 드린다면 바로 사용하시겠어요?'
'네?....... 그럼요. 당장..........'
'지금 알함브라 궁전에 입장 할 수 있는 티켓 두장을 드릴 수 있겠네요. 다만, 지금 궁전을 들어갈 수 있다 손 쳐도 나스르 궁전을 관람할 수 있는 인원 시간 제한은 별도로 제재를 받게된답니다. 지금 가능한 티켓은 낮 12시반에 나스르 입장을 할 수 있는 티켓뿐이네요. 오전 오후 입장의 제한 시간과 맞물려서 나스르 궁전에 머물 시간적 여유가 제법 빠듯할 것입니다. 또 아직 나스르 입장시간까지 텀이 많이 길어지구요. 제가 지금 구해드릴 수 있는 티켓은 이것뿐이네요. 어떻하시겠어요?'
'무조건 감사해요. 배려해주시는 기회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넉넉하게 쉬면서 알함브라를 즐기다가 마지막에 나스르 궁전으로 가면 되겠지요?'
'높은곳에 계신분께 땡큐 입니다. 땡큐. 우리 징크스가 어디 가겠어?'
여행중에 이런 행운이 빈번하게 자주 있다보니........ '에이. 우리 일인데......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여유와 믿음까지 생겨날 정도이다.
돌아서면서 눈에 들어 오는 모든 창구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보낸다.
'ㅎㅎㅎㅎ. 내가 이 맛에 여행을 계속한다. 나?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할아버지여. 태리 할아버지.'
매표 창구 옆에서 티켓 검표가 끝나면, 숲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서 '심판의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카를로스 5세 궁전'이 나타나면서 부터 알함브라 궁전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들었다.
통상적 입구가 바뀐것인지 모르겠으나........ 입장은 했고...... 알함브라의 핵심이랄 수 있는 '나스르 궁전' 입장 시간까지는 널널하고...... 우리는 가장 외곽부터 천천히 하나하나 돌아보기로 작정하고 첫목적지를 헤네랄리페 정원으로 잡았는데......... 어쭈?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거기다 가이드가 인솔하는 단체 팀들도 계속 이어진다. 입구가 바뀌었나?
암튼, 우린 지금 알함브라 궁전 안쪽에 체류중이다.
'헤네랄리페(Generalife)'는 흔히들 '천국의 정원'이라고 말하는데 기실은 '건축가의 정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비야에서 밀려나와 3대에 걸친 왕들이 알함브라 궁전을 지었고, 시간이 좀 지나서 그와 별도로 비교적 한적했던 산자락에 이어 붙여서 나스르 왕조의 5대 왕이었던 이스마엘 1세가 '술탄의 중정'과 '아세키야 중정'이 있는 별궁을 짓고 그 주위를 이슬람식 정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빗자루 모양과 아치형으로 다듬어 만들어 숲을 이루게하였고 군데군데 미로를 조성해 놓기도 하였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길게 도열하듯 늘어선 사이에 만들어진 수로에는 파란 하늘이 그대로 투영되어 넘실거리고 흐드러지게 핀 장미와 온갖 꽃들이 피어나 서로 아름다움을 뽐낸다. 다른 곳들과 다르게 여기 헤네랄리페의 분수들은 힘차게 하늘을 향해 치솟는 것이 아니라 작고 앙증맞은 곡선을 그리면서 떨어진다. 깊은 숲속 옹달샘이 흘러내리듯이 재잘재잘거리는 물소리는 작고 소박한 이슬람 여인들의 섬세함을 대하는것만 같다. 이 물줄기가 보일 듯 말듯 정원의 사방 곳곳으로 흐른다,
아랍인들의 물에 대한 소중함과 물에 대한 숭배가 저절로 느껴진다.
이름모를 나무들과 흐드러지게 피어난 이름모르는 꽃들.......... 인공과 자연이 오묘하면서도 조화롭게 융화된 천상의 정원을 거닐다 뜨거운 한낮의 열기를 느끼게 되면 등나무 그늘아래 설치된 벤치에 주저앉아 망중한의 여유를 즐겨본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답고 이처럼 평화로운 공간이 또 어디에 있을까?
문득 시선을 들어보니 여전히 저 멀리 눈 덮힌 시에라 네바다 산이 시야에 가득 들어 온다.
시에라네바다의 눈보라를 뚫고 넘어가면서 보아브딜 아랍왕이 눈물흘리며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고 하니........ '이 순간...... 이 늙어가는 못나고 부족하고 지극히 평범한 내 인생도 그리 허망하거나 아쉬운것만은 아니로구나. 내 어찌 이런날을 상상이나 했으련가? 이 순간만은 어떤 왕도 부럽지 않다.'
'나. 지금 음악 한 곡 듣고 싶어.'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어 쉬고 있던 챠밍여사가 이 나른한 여유로움을 차마 다 견디지 못하겠는지 음악을 신청햇다. 부랴부랴 핸디폰에 저장된 음악을 찾아 본다. 도대체 이럴 때 어떤 노래를 들려주어야 분위기가 빵빵 튀듯이 일어날까? 저장된 270곡 정도의 노래 제목들을 게속 넘겨보다가 문득 시야 가득히 쏟아져 들어오는 노래가 하나 있다. 순간 처럼 시에라네바다를 넘어가던 보아브딜 아랍왕의 모습과 함께 말이다. '그래 이 노래야. 결정했어.'
'Limmensita(눈물속에 피는 꽃)'
알함브라 궁전에서 듣든 '밀바' 버젼의 (눈물속에 피는 꽃)은 이루말할 수 없는 잔잔한 감동으로 우리 가슴에 와 닿았다.
지나가는 여행자들이 힐끗힐끗 우리를 돌아다보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프란체스카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잔잔한 기타 연주를 기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에게 지금 타레가는 전혀 관심이 없다. 또 실은........ 내 핸디폰에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저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넬리멘시타.........' 마지막 여운이 아쉽게 사그라질 때까지 우리는 숨소리르 죽여가며 노래에 집중했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세계적 칸소네 가수 '밀바'가 우리만을 위해서 공연을 펼쳐주다니...........
'분위기 정말 저~~~~엉마알~~~~~ 짱이다. 완벽해......... 하나만 더 들을 수 있을까? 뭐냐....... 당신 인생의....... 아니 당신 여행의 백 그라운드 뮤직 이라고 하는 노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이야기 해줄 때 들려준.............'
'Natasha Dance .'
'그래. 그 노래....... 공연 실황 말고 잔잔하고 애절하게 오리지널 버젼으로 듣고 싶어.........'
왜 이런 느낌의 노래가 알함브라 궁전에서는 더 애잔하고 페부 깊숙한 곳에서 진한 울림으로 들려오는 것일까?
헤네랄리페 정원을 내려오면 '소녀의 탑' 아래로 난 통로를 통하여 이제 본격적으로 알함브라에 들어서게 된다.
어디를 가나 헤네랄리페 정원 못지않은 잘 가꾸어진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궁전의 안쪽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우선 왼쪽으로 '아벤세라헤스의 탑'이 보인다.
이 궁전에 마지막으로 살았던 보아브딜 아랍왕의 연적이었으며 비극을 간직하고 있는 아벤세라헤스의 이야기가 알함브라 궁전의 곳곳에 이렇게 남아있고 전해내려오는 것을 사실은 조금 납득하기가 쉽지않다. 승자인 스페인의 입장에서 쫓아 낸 패장 아랍왕의 치부를 이렇게 두고두고 드러냄으로써 망신을 주고, 이슬람을 폄하하기 위함인가? 승자인 카톨릭의 전통과 위엄을 세우고자 하였다면, 아픔이었던 이슬람 시대의 모든 기억들을 지워내야만 하지 않았을까?
아벤세라헤스의 탑을 지나 발걸음을 옮기면 이제부터 '카를로스 5세 궁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파르탈 정원'의 영역이 된다.
하지만 파르탈 정원은 가운데로 얕은 성벽과 들어서 잇는 건물들에 의해서 내부 파르탈 정원과 외부 파르탈 정원으로 구분되어 진다. 아마도 처음 궁전이 지어졌을 당시는 이 정원이 하나로 연결되어 트여져 있었을 것이다.
이 가로막은 얕은 성벽과 건물에 멋진 파라도르가 들어서 있다.
파라도르란 스페인이나 혹은 스페인 문화권에 들어서 있는, 옛 궁전이나 고성을 개조하여 현대적 시설을 갖춘 최고급 호텔로 스페인 정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곳이다. 유명 관광지 마다 매우 독특하고 아름다운 파라도르들이 있다. 그라나다가 자랑하는 파라도르가 바로 여기 알함브라 궁전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Parador de Granada San Francis)가 그곳이다. 파라도르는 우선 모두가 대단히 고급스럽고 고풍스럼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곳에서 하루쯤 묵었다면 하는 아쉬움 속에 파라도르에서 운영하는 아주 작은 카페에서 가볍게 점심을 해결한다.
살짝..... 양해를 구하고 2층 볻도까지를 구경했는데....... 현대적 시설로 개축하였다고는 해도,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전제때문인지 그렇게 깨끗하고 쾌적한 느낌은 별반 들지가 않았다. 카페도 그저 고만고만 했다. 하지만 위치와 분위기만은 짱이었다.
파라도르를 나서면 코 앞이 바로 '카를로스 5세 궁전' 이다.
'카를로스 5세 궁전(Palacio de Carlos 5).
알함브라 궁전의 영역에서 참으로 쌩뚱맞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이 바로 카를로스 5세 궁전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작은 벽돌이나 라임스톤을 자르고 다듬어서 아기자기하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이슬람식으로 지은것에 반하여, 어마무시한 돌덩이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중압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전형적인 유럽의 르네상스 약식 건물인것이다. 웅장한 정사각형의 건물에 들어서면 외부에서 가졌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벌어진다. 커다란 원형의 중정을 배치한 아주 독특한 건물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반지하의 기둥은 도리아 식으로 만들어 졌고, 1층의 기둥은 이오니아 식, 2층의 기둥은 코린트 식으로 치장되어 있다. 그리스 건축의 백미를 한자리에서 경험할 수가 있다.
스페인 건축의 특징 중에는 '파티오(실내 정원)'라는 것이 있는데, 이 중정 또한 큰 의미에서는 파티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가 하면 내가 '카를로스 5세 궁전' 내부에 첫 발을 들여놓는 순간 떠올린 풍경은 바로 '톨레도 알카사르의 중정'이었다. 기둥의 양식이 조금 다르고 뚫려있는 천장이 이곳과는 다르게 정사각형이라는 점 빼고는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 톨레도 알카사르 중정.
카를로스 왕이 신혼 여행때 이곳을 다며가면서 부터 이미 지금의 궁전을 계획했었다고 치면........ 첫 그의 구상은 이미 톨레도에서 시험되었던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톨레도 알카사르의 중정을 지금의 모습으로 개축한 사람 역시 같은 '카를로스 5세'였기 때문이다. 톨레도 중정의 중앙엔 카를 왕의 동상이 멋지게 서있기까지 한다. '그라나다 카를 왕의 궁전은 톨레도 알카사르 중정의 개정 증보판'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중세 유럽의 건축가들이 가진 아랍 건축기술에 대한 컴플렉스를 있는 그대로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곳에서 각종 연회와 투우 경기가 열렸다고 한다.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문화를 잘 보주었던 것이다.
현재는 매년 여름 그라나다 국제 음악 축제가 열리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카를로스 5세 궁전 내에는 2개의 미술관이 있는데, 하나가 바로 1층에 위치한 스페인-이슬람 국립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에는 알함브라 궁전 내에서 발굴한 유물을 비롯해 그라나다 시내의 저택들을 허물면서 발견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유물들 중에는 기둥, 타일, 도자기, 아랍 양식의 저택 천장과 창문 등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관람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높이 1.36m, 원둘레 2.25m에 달하는 14세기 알함브라 항아리이다.
또 하나의 미술관은 베야스 미술관으로 이 미술관에는 주로 그라나다파로 불리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고, 스페인 정물화의 대표화가인 산체스 코탄을 비롯하여 화가, 조각가 및 건축가를 겸했던 아론소 카노 등의 작품이 있다.
그런데 정말로 아쉽게도 이 미술관들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아주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입구에 나의 시전을 아주 강렬하게 잡아끄는 미술 작품이 있었는데 그 정면이 바로 감시 관리인 자리였다. 사전 양해를 구하고 본 미술 작품 촬영은 금지었지만 제작과정의 사진을 두장 찍었는데 아쉽게도 서둘렀음인지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 여기저기 인터넷을 통해 다각적으로 그 작품을 찾아보았지만....... 이적 찾지 못하고 있다.
'이 흉물스럽다고 평가받는 카를로스 5세 궁전을 굳이 여기다 이렇게 까지 세워야 했던 카를 왕은 도대체 누구인가?'
톨레도 알카사르의 중정을 만든 사람이다.
그리고, 세비야 메스키타(대성당) 안에 카톨릭 예배당을 세운 사람이다. 아니지. 세웠다기 보다는 멋 모르고 개축을 허락했던 사람이다.
세비야 대성당을 후에 방문하고는 '세상 어디에나 있는 흔한것 하나를 위해, 세상 어디에도 다시없는 하나를 훼손한 멍텅구리들'이라고 탄식한 왕이다.
그리고....... 로마의 바티칸을 점령했던 사람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하길 조상님이나 부모님의 음덕을 많이 받고 태어난 사람을 '금수저'라고 한다.
속된 표현으로 '세상에 날 때부터 이미 팔짜가 길게 늘어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뉴스를 통해 긍정 보다는 부정적 의미로 우리는 '금수저'니 '흑수저'니 하는 이야기를 곧 잘 접하곤 한다.
그렇다면 어느정도여야 금수저일까? 금수저의 최고봉은 어느 정도이며 과연 누구일까?
이 쯤에서 나는 내가 알고있는 금수저를 한 명 소개해 볼까 한다. 인류 역사에 이 정도 가진 금수저가 얼마나 될까? 가히 초특급 금수저라고나 할까?
할아버지에게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성지인 오스트리아 영토와 재산을 통째로 물려 받았다.
할머니에게서 폴랑드르와 부르고뉴(벨기에. 네덜란드.룩셈부르크.독일 일부에 이르는 지역)을 물려 받았다.
외할아버지에게서 아라곤. 발렌시아.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 사르데냐를 물려 받았다.
외할머니에게서 카스티야. 레온. 나바라를 물려 받았다.
장가를 잘들어서 아내 덕분에 포루투갈이 저절로 굴러들어오게 되어서 이후 60년 동안 포루투갈을 차지하게 된다.
이 정도 되다보니 부모님에게 더 특별히 물려받은것은 별로 없다.
거기에 더하여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보호자이자 선생님이자 인생의 멘토까지 조상님 음덕으로 물려 받았다.(그가 이룬 모든것은 고모님 덕분이라 하겠다)
팔자가 이 정도는 되어야 '금수저'라고 할 만하지 않겠는가?
종국에 그는 베네치아르 비롯한 이탈리아 중부와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유럽을 차지하게 된다.
이 금수저를 우리는 '카를로스 5세'라 부른다.
'카를로스 5세'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계보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스페인 지역이나 시칠리아에서는 '카를로스 1세'라 칭한다.
폴랑드르 오스트리아에서는 '카럴 1세'라 칭한다.
그런가하면 부르고뉴에서는 '샤를 2세'라 칭한다.
카를 왕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바로 스페인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이슬람을 완전히 몰아낸 부부왕(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왕)이다.
친할아버지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스밀리안 1세다. 친할머니가 폴랑드르. 부르고뉴의 여왕 마리 드 부르고뉴 였다.
막말로 양손에 금수저를 쥐고 태어났다. 어디 보통 금수저인가.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사파이어 루비가 빼곡히 박힌 슈슈슈슈슈퍼 금수저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손에 금수저가 쥐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이십세 청년이 되어서야 이 모든 금수저를 자신의 것으로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배경엔 위대한 고모님 마가레타가 있었다.
양가로 위대한 조부 조모님을 둔 카를 왕은........ 참으로 묘하게 결코 위대하지 못한 부모님을 두었다.(참으로 묘한게 역사다)
카알이 2살 때, 외할머니 이사벨 여왕이 사망했다. 부르고뉴 공작 부인으로 살아오던 어머니 후아나는 친정어머니의 재산과 권위를 상속받기 위하여 스페인(세비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 정치적 야망에 사로잡힌 부친 펠리페가 함께 스페인으로 간다. 후아나는 지병(?)이 있어 허약했으므로 2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장도에 오르는데 문제가 있었다. 결국 펠리페와 후아나는 카알을 부루고뉴에 남겨두고 떠날 수 밖에 없게되었다. 펠리페는 여동생 마가레타에게 부르고뉴 공작의 지위를 넘겨주고자 하면서 아들 카알의 양육을 부탁했다. 마가레타는 공작의 지위를 거절했고, 그 지위를 2살배기 조카에게 부여하면서 고모로서 카알을 책임지고 돌보겠다고 약속한다.
후아나와 펠리페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공동 왕으로 등극하고 통치한다. 결코 순탄치 않은 정치판이었다. 파란만장한 사연이 쌓여갔다.
스페인에 도착한 뒤, 다음해에 아들을 하나 더 낳으니 바로 페르딘난도 1세가 된다.
시간은 흘러갔고....... 스페인 정치판에서 정쟁에 시달리는 동안에 펠리페와 후아나는 부르고뉴에 남겨둔 카알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다.
스페인 궁전에서도 카알이라는 존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영특한 페르디난도가 외아들이며 후계자로 여겨졌다.
부모에게서 조차 잊혀진 불운한 아들 카알......... 하지만 그에게는 위대한 고모가 있었다.
사실 고모는 지지리도 남자복이 없었다.
막시밀리안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외동딸 신분에 지성과 미모를 갖춘 그녀에게 온 세상의 남자들이 구애는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와 스페인 왕가는 종국에 겹사돈을 맺게 된다.
신랑을 직접 나서서 자신이 골랐던 후아나와 펠리페 부부가 탄생했고, 후아나의 오빠와 펠리페의 동생 마가레타가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식도 없던 처지에 후아나의 오빠가 갑자기 사망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후아나가 과부가 되기를 열망햇던 것일까? 결국 후아나는 재혼을 하였지만 그 남자도 곧 사망한다. 그리고 세번째 결혼을 해 보지만....... 무슨 팔자인지....... 세번째 남편도 사망하여 또 과부가 된다.
여전히 세상 남자들의 구애는 쏟아져 들어왔지만........ 마가레타는 결혼생활을 스스로 포기하기에 이른다.
대신........ 어린 조카를 잘돌보아서 스페인을 강력하게 이끌 훌륭한 왕이 되게 만들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다.
카알에게 고모는 보호자였으며 스승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궁궐에서 벌어지는 왕족들의 격식과 예절은 물론 5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만들었다.(그런데 이상하게 유독 스페인어 능력이 심하게 뒤쳐졌다)
에라스무스 등의 대학자들을 꾸준히 가정교사로 모셔와 그리이스 플라톤 철학에서 부터 사회 정치....... 한마디로 제왕학을 습득시켰다.
기마술과 검술과 병법까지 공부하게 했다. 마가렛이 가지고 태어난 신성로마제국의 공주 신분을 이용하여 전 유럽사회에 카알의 인맥 형성을 주도했다.
카알의 나이 스물.
아버지 펠리페가 스페인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정적들이 어머니 후아나의 지병을 핑계로 수도원에 강제 유페 시켰다.
사방에서 스페인 왕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다. 소수 계파들은 페르디난도 왕자를 왕위에 오르게 하고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카알. 이제 때가 된거야. 이제껏 힘들게 공부한 것을 가지고 너의 시대를 만들어 갈 운명이 지금 너에게 손짓을 보내고 있는거야. 스페인으로 떠나렴.'
마가렛은 카알을 스페인으로 떠나 보냈다.
스페인의 그 누구도 카알을 알아보지 못햇다. 심지어 두 살 터울 페르디난도 조차도 형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했다. 스페인 정치판의 대다수가 페르디난도를 지지했다. 카알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고모가 있었다.
스페인에서 카알은 잘 몰라본다지만, 사망한 펠리페 왕의 친동생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외동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고모가 다방면으로 이미 손을 써 놓은 상태였다. 또한 전면에 나선 카알의 언변과 행동은 제왕이 가져야 하는 기본기를 이미 충분하게 습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알은 정치가들에게 타협을 허락하지 않았다.
친가와 외가의 어마무시한 권력기반 속에서 장자로서의 당위성을 앞세워 '자신이 가져야 하는 왕으로서의 권위와 군대와 영토와 재산에 대해서 모두 복종하고 따르라'고 명령했다. 그의 당당함에 마침내 스페인이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동생 페르디난도를 앞세운 반란의 기미가 연일 계속되었다.
왕권 수호를 위해서라도 동생 페르디난도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스므살이 되어서야 처음 만난 동생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졌떤 카알은 모든 상소를 물리친다. 형제애에 대한 확신이 설 즈음에 페르디난도에게 자신의 영지였던 독일을 때어주고 동생을 독일 왕에 봉한다.
카알은 이탈리아를 직접 원정하는 등 평생동안 전쟁터를 누비고 다닌다. 카알이 전쟁을 떠나면 동생 페르디난도가 스페인으로 돌아와 형을 대신해 제국을 다스리면서 형의 군대를 후방에서 적극 지원한다. 이 조합이 그야말로 환상적인 결과를 낳는다.
만년에 카알은 정치에서 은퇴하면서 아들에게는 스페인 영토만을 상속시키고, 독일 왕인 동생 페르디난도에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를 비롯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물려준다.(권력의 속성을 과감히 때려부순 것이다)
형의 은혜를 잊지않은 페르디난도 황제는 자신의 후계자인 황태자를 조카인 형의 외동딸(친4촌간)과 결혼 시킨다.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왕가가 비극적 종말을 맞게되는 근친 결혼이 시작되는 것이다. 권력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합스부르크 왕가는 근친에 근친 결혼을 집요하게 추구한다. 주걱턱으로 유명한 이 가문의 유전인자는 곧 유전학적으로 치명적 결함이 드러나면서 종국에 종말을 고하고 만다. 마구 죽어나가더니 결국 핏줄이 끊기고 만다.
그랬음에도....... 고모 마가레타의 헌신은 너무도 유명한 하나의 전설로 이어져 내려온다.
마가레타는 카알을 받아들인 이후로 끝내 부르고뉴를 떠나본 적이 없다.
조카가 제국의 황제가 되고 초대를 했음에도 그녀는 끝내 부르고뉴에 남아서 소박하게 서민적인 삶을 살았다.
조카가 고난을 격을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항상 막후에서 최선을 다해 지원을 해주었다.
특히 카알이 전쟁을 나서면 막후에서 막강한 외교적 역량을 동원해 지원해 주었고, 특히 서유럽의 은행권과 아주아주 막역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이들을 통해 항상 조카의 자금줄을 관리 지원해 주었다.
여행 버킷 리스트 목록에 올라있는 프로방스를 찾는 기회가 온다면 부르고뉴를 찾아가 마가레타 무덤에 꽃 한다발 바치고 싶다.
--- 카를로스 5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 카알 황제의 고모. 부르고뉴의 마가레타.
이제 서서히 발걸음을 이 알함브라 언덕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건물로 옮겨보려 한다.
그리고 아무리 줄여보고 줄여보려 하지만........ 아무래도 그라나다는 볼게 너무 많아서인지 적어도 3부 이상으로 나누어야만 할것 같다.
--- 다음 여행기는 알함브라 궁전의 알카사바에서 시작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대해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