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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젼의 시편 28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에서도 “다윗의 시”라고 하는 머리말은 너무도 일반적인 것이어서 이 시의 작시 동기에 대한 단서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이 시의 위치는 의도적으로 27편에 이어 배치된 듯하다. 왜냐하면 이 시가 27편과 짝을 이루어 그 후편으로 이어지는 것이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다윗의 시들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위 “밤의 노래들” 중 하나이다. 고대의 자연주의자들은 이르기를, 나이팅게일의 가슴에 박힌 가시가 그 새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다윗의 슬픔이 그로 하여금 탁월한 성가를 부르도록 만들었다. 이 시편이 주로 탄원하는 내용은 탄원자가 행악하는 자들로 인해 좌절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표현한다. 따라서 이 시는 사람들의 오해와 중상으로 인해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당하여 하나님의 법정에서 바로 서기를 갈망하는 모든 성도들의 간절한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 여기서는 주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의 대표자로서 간청하고 계시다고 볼 수도 있다.
구성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2절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들어주시기를 간절히 탄원함.
3-5절 사악한 자의 운명을 묘사하고 비난함.
6-8절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함.
9절모든 전투적인 신자들을 위한 일반적인 탄원.
[강 해]
1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1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부르짖음은 슬픔을 나타내는 자연스러운 표현이며, 다른 모든 호소 방식들이 수포로 돌아갈 때 적절히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부르짖음은 오로지 여호와께만 향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부르짖는 것은 마치 허공에다 대고 간청하듯이 소모적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기꺼이 들으시며 또한 도와주실 능력을 갖고 계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께 즉시 모든 간구 사항을 호소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발견할 것이며, 본문에 나오는 바와 같이 확고한 결의에 찬 어투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변하시는 여호와는 우리의 반석이시며, 환난의 때에 우리의 모든 소망과 피난처를 위한 부동의 기초가 되신다. 우리는 모든 위험한 시간에 우리의 요새이신 그분께로 도피할 결심을 마음에 새긴다. 심판의 날에 반석들을 의지해 보았자 헛될 것이나, 우리의 반석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신다.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단순한 형식주의자들은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해도 만족해 할 것이지만, 진실한 탄원자들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릇된 의지를 억제하는 것과 같은, 기도 그 자체의 결과로 만족해 하지 않는다. 그들은 더 나아가 하늘로부터 임하는 실제적인 응답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쉴 수가 없다. 또한 그들은 가능하다면 그러한 응답을 즉시로 받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조금만 침묵하셔도 그들은 두려워한다. 종종 하나님의 음성은 광야를 뒤흔들 정도로 무섭다. 하지만 간절한 탄원자에게 있어서는 그분의 침묵 역시 아주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이 그 귀를 닫으신 듯이 보일 때, 우리가 입을 닫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더욱 진지하게 부르짖어야 한다. 왜냐하면 간절함과 슬픔을 표현하는 우리의 간구가 더욱 격렬해질 때, 그분이 오래도록 우리에게 귀를 가리우고 계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 기도에 대해 영원히 침묵하신다면, 그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겠는가! 다윗에게도 이런 생각이 떠올랐으며, 그러자 그는 그 생각을 탄원으로 전환시켰다. 이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호소하며 자신의 의사를 피력한다는 점을 가르친다.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인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덤에 있는 죽은 자보다 더 가련한 처지에 놓인 셈이며, 지옥에 떨어진 자들과 같은 비참한 수준으로 이내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기도 응답을 받아야 한다. 이는 다급하게 필요한 일이다. 분명 여호와께서는 불안해 하는 우리 마음에 평안을 말씀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택하심 받은 자가 멸망당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2절.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이는 1절과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며, 다만 그 탄원 내용이 현재적일 뿐만 아니라 미래적이기도 하다. 내 말을 들으소서! 내 말을 들으소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이것은 두 절 모두의 요지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을 거부당한 채 물러설 수는 없다. 우리는 노력하고, 끈기를 발휘하며, 또한 응답이 주어지기까지 고뇌에 찬 탄원을 올린다. 원문상 복수 형태인 "간구"라는 말은 의인의 기도의 횟수, 지속성, 그리고 그 다양성을 나타내는 반면, "소리를 들으소서"라는 표현은 내적인 의미나 마음의 소리를 암시하는 듯하다. 영적인 사람들은 외적이고 가청적인 말보다도 이러한 마음의 소리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 침묵의 기도는, 고함을 질러 바알을 깨우고자 했던 이교적 제사장들의 부르짖음보다 훨씬 더 큰 음성일 수 있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성소란 우리 주 예수를 예표하는 모형이었다. 만일 우리가 주께 받아들여진 바 되려면, 항상 우리는 피뿌려진 그분의 속죄소에로 향해야 한다. 손을 드는 것은 헌신을 나타내는 자세들 중 하나이며,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열정을 그리고 축복을 받고자 하는 마음의 자발성과 간절함을 나타낸다. 우리는 빈손을 펼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간청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손을 드는 것은, 하늘에 속한 도움을 간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의 속죄소를 향해 손을 든다. 이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처럼 헌신적인 자세를 취할 때마다,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3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4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5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3절. "악인과……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형틀에 매여 타이번(고대 런던의 사형집행장-역자 주)으로 끌려가는 고대의 중죄인들처럼, 불 속에 던져지는 통나무들처럼, 그리고 오븐에다 튀기는 페거트(간 요리의 일종-역자 주)처럼,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다윗은 그들과 함께 묶여 그들과 같은 운명으로 전락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한 두려움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악인들과 동행하는 것은 위험하며, 그들 대부분은 영원과 관련된 무서운 결과에로 이를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과 함께 비참한 곤경 가운데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그들이 몰두하는 쾌락을 피해야 한다.
"행악하는 자와 함께." 이들은 분명 죄악되며, 그들에게 임할 심판은 자명하다. 여호와여,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잔을 마시지 않게 하소서. 의인에게 결여된 활동성이 악인에게서 발견되고 있다. 우리는 여호와를 위해 "활동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그들은 자신이 이르게 될 장소가 어떤 곳인지를 알고 있다. 거짓말쟁이들의 운명이 바로 그들에게 영원히 주어질 몫이며, 그들이 도중에 줄곧 나누는 대화는 거짓말 일색이다. 가식적인 사랑으로 위장된 부드러운 말들은 거짓 된 지옥의 올가미에 불과하다. 사탄은 그 올가미 안에다 귀중한 생명을 붙들어 둔다. 그의 수많은 자녀들은 그의 혐오스러운 계교를 배우며, 그 아비의 올가미로 먹이를 잡되 거의 그 아비만큼이나 간교하게 잡는다. 혀와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그만큼 천박스럽다는 표시이다. 기만적인 사람들은 야수보다 더 두려운 존재이다. 거짓말쟁이와 함께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뱀구덩이에 갇히는 것이 더 낫다. "화평"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크게 외치는 자는, 자신의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경우에는 그 화평을 팔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술이 좋으면 간판이 필요 없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그토록 평화적이라면 그는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국 그의 말은 거짓임에 분명하다.
4절.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우리가 악인을 단지 그처럼 여기고 우리의 동료들처럼 여기지 않는다면, 죄에 대한 우리의 의분은 우리로 하여금 악을 징벌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사들을 따르도록 인도하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공의가 두려움을 야기시켜 잔혹하고 불의한 자들을 제지하기를 바라도록 인도한다. 한편 본절에서 표현된 소원은 기독교적 정신과는 쉽게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후자는 죄인들에 대한 징벌보다는 오히려 개혁을 추구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구절을 어떤 사실에 대한 예언적인 선포로 혹은 미래 시제로 본다면, 우리는 아마도 본문의 참된 의미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불경건한 자들을 그들의 공과에 따라 다루실 때, 그들이 실제로 행한 일에 따라서뿐만 아니라 기회만 주어지면 행했을 일에 따라서 그들에게 진노를 발하실 때, 과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우리의 "행위"들은 엄연한 사실로서 받아들여진다. 하나님은 그 행위를 야기시킨 의지를 감찰하사 거기에 따라 징벌 혹은 상급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대적자들의 목전에 보응하시며 그들에게 죄의 삯을 지불하시되, 이생에서가 아니라 분명 내세에서 그렇게 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모르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되, 그들의 알랑거리는 말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악한 행실의 정도에 따라서 그리하실 것이다.
5절.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은 피조물 안에서 활동하신다. 자연은 그분의 지혜와 선하심에 대한 증거들로 충만하다. 그러나 우둔한 무신론자들은 그분을 뵙기를 거부한다. 그는 섭리 가운데 활동하시며, 다스리고 지배하신다. 또한 그분의 손길은 인류 역사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지만, 불신자는 그분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은혜 안에서 활동하시며 도처에서 회심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불경건한 자들은 여호와의 역사하심을 보기를 거부한다. 천사들이 경탄하는 것을 육욕적인 사람들은 멸시한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낮추사 가르침을 베푸시지만, 사람은 배우기를 거부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그가 그들로 하여금 "목격하고 놀라며 그리고 멸망당하게" 하실 것이다. 만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임한 심판의 손길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들 자신이 그것을 직접 당하게 될 것이다.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의 저주는 적극적이며 또한 소극적이다. 그분의 칼은 양날이며, 오른쪽과 왼쪽을 함께 자른다. 불경건한 자들은 악의 유산으로 말미암아 좋은 것을 전혀 얻지 못한다. 그들의 에바는 진노로 가득하여 단 한 알의 소망도 담을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들은 마치 낡고 썩고 쇠락하여 주인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목재 가옥처럼 되었으며, 온갖 종류의 악을 품고 있다. 따라서 위대한 건축자께서 그들을 완전히 멸하실 것이다. 교정불가 상태인 범법자들에게는 신속한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고치지 않는 자들은 무가치한 존재로서 내버림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함으로써 그분의 진노를 당하는 운명에 처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담긴 모든 교훈들에 각별히 유의하자.
6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7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8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6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성도들은 축복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복받은 사람들이며 축복을 끼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최선의 감사를, 곧 살진 희생 제물을 영광스러운 주님께 드린다. 본시의 내용은 지금까지 기도였으며, 이제는 찬양으로 바뀐다. 기도를 잘하는 사람들은 찬양도 잘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은 영혼의 두 입술이며, 하나님의 귀에 만족스럽고 감미로운 음률을 울리는 두 개의 종이다. 또한 야곱의 사닥다리를 오르는 두 천사들이며, 향을 올리는 두 제단들이며, 또한 달콤한 향기를 품은 몰약을 떨어뜨리는 솔로몬의 백합화 두 송이이다. 그것들은 몰약 산과 유향 언덕에서 노니는 두 마리 쌍태 노루 새끼들이다.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진정한 찬양은 충분한 그리고 확고부동한 이유들을 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무분별한 감정 표현이 아니며, 순수한 샘처럼 깊은 체험으로부터 일어난다. 응답받은 기도에 대해서는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의무를 망각하지 않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신실하게 기억하여 반드시 자신의 혀로 그것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격려가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자비는 너무도 크고 귀하므로, 감사를 드리지 않고는 감히 그것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배은망덕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매일 감사하며 사랑하는 천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7절.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여기서 다윗은 믿음을 선언하고 고백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경험에 입각한 증언과 결부되어 있다.
"여호와는 나의 힘." 여호와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힘을 사용하시며, 더욱이 연약한 상태에 처한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신다. 시인은 적절한 믿음의 행위를 통해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취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비가시적인 하나님께 의지하면, 영혼의 위대한 자립을 가능케 하며, 단순히 인간적인 신념 이상의 놀라운 확신을 고무시킨다.
"나의 방패시니."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하나님 안에서 칼과 방패 모두를 발견했다. 여호와께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난들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며, 하나님 뒤로 피하는 그리스도인 전사는 청동이나 삼중의 강철로 만든 방패로 무장한 용사보다도 훨씬 더 안전하다.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마음으로 행하는 일이 확실한 일이다. 마음으로 의지하면 결코 실망을 경험하지 않는다. 도움을 얻기 전에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도움은 결코 오래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 신자는 매일 "도움을 얻었도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매순간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파멸당할 수밖에 없다. 보다 확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다만 믿음을 고무시켜야 한다. 그리하면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자신의 믿음과 기쁨의 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음"이 두 차례 언급되었다. "크게"라는 부사에 주목해 보라. 우리는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할 때 아무리 기뻐해도 부족할 것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 안에서 크게 기뻐하자. 노래는 영혼이 그 행복을 표출하는 가장 적절한 방식이다. 우리는 울부짖는 갈가마귀보다는 노래하는 종다리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입술이 침묵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실 때, 우리는 온 마음으로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8절.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한 신자의 신령한 체험은 모든 이들의 삶의 귀감이 된다. 여호와는 당신의 종 다윗에게 대하신 것과 꼭같이, 전투적인 교회 모두에게, 예외없이 대하신다. "그들 중 가장 작은 자도 다윗 정도는 될 것이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도움이 필요하며, 그들은 그것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일한 사랑으로 사랑을 받으며, 동일한 생명책에 기록되며, 또한 기름 부음받아 머리 되신 분의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그 기름 부음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여기서 다윗은 우리 주 예수, 우리에게 주어진 언약의 머리, 기름 부음받으신 우리의 왕, 그리고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시는 분을 예표하는 인물로 소개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온전한 구원을 얻으셨고, 우리는 그분께로부터 말미암는 구원의 능력을 사모하며, 또한 우리는 그분께 그토록 풍부하게 주어진 기름 부음을 공유함으로써 그분의 구원에 동참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그분은 당신의 독생자 안에서 은혜의 능력을 크게 드러내셨으며, 그 독생자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 백성의 왕과 구주가 되게 하셨다.
9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9절.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이는 전투적인 교회를 위한 기도이며, 짧은 내용이지만 무게 있는 의미로 가득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그들을 대적들로부터 구원하시며, 그들의 죄로부터 보호하시고, 곤경에 처한 그들을 구원하시고, 시험에 직면한 그들을 구출하시며, 그들을 모든 재난으로부터 보호하소서. "주의 백성"이라는 표현 속에는 일종의 탄원이 숨겨져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의 소유인 교회에 대한 그분의 관심이 그로 하여금 그들을 멸망으로부터 지키시게끔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적극적인 축복들, 평안, 풍요로움, 번영, 행복 등을 주소서. 귀하게 얻은, 소중한 주의 모든 유업으로 하여금 주의 영에 의해 위안을 받게 하소서. 주의 교회를 부흥시키고, 새롭게 하며, 확장시키고, 또한 거룩하게 하소서.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주의 양떼의 목자가 되시며, 그들에게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충분히 공급되게 하소서. 주의 말씀과 규례들을 통해, 주의 손에 맡겨진 양들을 인도하고 다스리고 보존시키며 또한 만족게 하소서.
"영원토록 드십소서." 땅에서 그들을 주의 팔로 안으시고, 하늘에서는 주의 가슴에 품으소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고무시키시고, 그들의 성향을 신령한 방향으로 이끌며, 또한 그들을 거룩하게, 그리스도를 닮게,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만드소서. 오 여호와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러한 간구에 응답하소서.
[주해와 설명들]
1절.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우리에게 자신의 생각을 고정시킬 분명한 대상이 있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사람은 최상의 시기에는 추상적 개념들을 잘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슬픈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때 그는 무기력하며, 가능한 모든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만일 그의 마음이 공허함 가운데서 방황한다면, 그 마음은 이내 지치고 탈진한 나머지 가라앉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되지 않게끔 은혜롭게 돌봐 오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으로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셨으므로, 고통 가운데 있는 자는 자신의 마음의 눈을 믿음과 소망과 기도의 분명한 대상이신 그분께 고정시킬 수 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시인이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기도를 통한 의지 대상이신 하나님의 존재가 분명하다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이 문제와 관련된 그리스도인의 특권은 특히 위대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예수께 고정시킬 수 있다. 그는 상상을 크게 확장시키지 않고서도, 거룩하신 분이 그를 내려다보고 계시며, 귀를 기울이시고, 그를 체휼하시며, 또한 그에게 응답할 준비를 하고 계심을 묘사할 수 있다.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이 곤경에 처한 때에, 마치 당신의 시야를 고정시킬 누군가를 찾고 있듯이 그리고 마음의 결핍 상태와 슬픔을 토로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 있듯이 방황하지 말며, 공허한 한숨을 내뱉지 말며, 또한 번민에 빠지지 말라. 시인처럼 당신의 마음을 고정시키고서,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라고 말하라. 오! 곤경이 닥칠 때를 느끼며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얼마나 행복한가! 그는 그 곤경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그 타격으로 말미암아 당황하거나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슬픔에 사로잡히겠지만, 헤쳐나갈 방책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알고 또한 이용할 것이다. 그가 아는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긍휼에 관한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인격적이며 감수성을 지니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다. 그는 시인과 더불어,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라고 말한다. -필립 베넷 파워.
1절. "나의 반석." 영국의 경건한 목회자인 윌리엄 에반스 목사의 한 여자 친구가 어느 날 그를 방문하여, 그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인즉 이러했다. "나는 연약함 그 자체이지만 반석 위에 있다. 어떤 이들이 죽음과 관련하여 표현한 바 있는 황홀한 체험을 내가 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한다. 나의 신앙은 여기서 시작되고 여기서 끝난다."
1절. "나의 반석." 런던 소호가의 크라운 지구의 존 리스 목사가 임종을 맞았을 때 존 레이프차일드 목사가 그를 방문했다. 레이프차일드 목사는 그의 마음 상태가 어떠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이러한 물음은 그의 영예로운 신앙을 고무시켰으며, 꺼져가는 그의 등불을 새로이 일으켰다. 그래서 그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신중하고 힘있는 그리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랑과 힘은 나의 안식처요 반석이라네."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베개에 얹으며) "이제 사망이여, 나를 치라!" -아빈.
1절.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이제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바라는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라는 말 속에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우리가 기도를 올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를 위해 임하시며 또한 그가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기를 바라는가? 우리는 그가 우리 기도를 들으심을 우리로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 우리는 자신이 그분께 고한 것을 느끼듯이 그분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도 분명히 듣기를 원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한 바로 그 주제에 관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었음을 알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셨음을 우리가 확실히 느낄 때, 우리는 가장 깊은 확신 가운데 자신이 기도해 온 모든 문제를 그분의 손에 맡길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오랫동안 응답이 없을 수도 있다. 더욱이 어떤 일들은 정반대로 진행되는 듯이 보일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으실 수도 있다. 그래도 믿음은 굳건하며 강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 문제와 관련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또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이 위안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사실상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따라서 나는 평안하다." 하나님이 어쩌면 우리에게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말씀하신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조금만 말씀하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그분으로 하여금 더 많은 말씀을 하시게 하기 위해 애를 쓰지 말자. 어떤 때에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최선의 응답은 단지 "그가 들으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우리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응답하심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며 북돋우신다. 러더퍼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요청에 대해 주님이 지체하신 사실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되어 있을 뿐, 그가 한 마디도 듣지 않으셨다고 되어 있지는 않다. 이 둘은 현저하게 다르다. 종종 그리스도께서는 대답을 하지 않으나 듣고는 계신다. 그분의 무응답 자체가 응답이며, 침묵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기도하라, 계속해서 부르짖으라.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당신의 문을 단단히 잠가두신 것은 여러분을 배제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여러분으로 하여금 두드리고 또 두드리게 하여 그 문이 열려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필립 베넷 파워.
1절.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위대하신 하나님, 나의 서글픈 상황을 살피소서. 내게 있어서는, 당신을 섬기는 지복 이외에 위대하거나 바람직한 것이 이 땅에 하나도 없나이다. 나의 비참한 운명과 내 신분에 걸맞는 책무가 나로 하여금 경건한 모든 것을 책망거리나 조롱거리로 여기는 사람들과 더불어 관계를 맺도록 이끄나이다. 나는 남모르는 두려움 가운데서 당신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은총을 모독하는 소리를, 그리고 경건한 자의 믿음과 열정을 우둔하다고 조롱하는 소리를 날마다 듣고 있나이다. 그와 같은 불경스러움에 노출된 상태에서,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 고뇌의 부르짖음이 당신의 보좌 앞에 상달되게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비록 당분간은 이러한 신성모독적 망언들이 내 영혼 속에 두려움과 슬픔만을 일깨울 뿐이지만, 마침내 그것들이 나를 약하게 만들어 당신의 영광에 걸맞지 않는 그리고 감사하는 심정에 걸맞지 않는 왜곡된 경로로 나아가게 될까봐 나는 심히 두렵나이다. 또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겁쟁이가 되어 당신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은 감동을 거부하는 죄인이 되거나, 죄에 대항하는 증언을 철회하는 배신자가 되거나, 혹은 신중함을 핑계로 소심하게 행동하는 자기 기만자가 되거나 하는 것 등입니다. 이미 나는 이러한 독소가 내 마음속에 침투하고 있음을 자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에워싼 악인의 행실을 닮지 않으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여나 그들을 노엽게 할까봐 너무도 조마조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을 본받으려 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성나게 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부패한 세상과 거룩하신 하나님을 동시에 기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지만, 나는 이러한 진리를 망각하였고, 그로 인해 결단력이 강화되기는커녕 도리어 변명할 수 없는 우유부단함 가운데 빠지게 되었나이다. 당신의 도움을 간청하는 것 외에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겠나이까! 오 여호와여, 당신의 영광에 그토록 누를 끼치는 그리고 당신의 신실하심에 그토록 해가 되는 이 타락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강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힘주시며 격려하시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주소서. 만일 당신의 은혜의 음성이 내 영혼 속에 울려 나의 연약한 믿음에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지 않는다면, 나와 절망 사이는 한 걸음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위기에 처해 있으며, 나를 붙들고서 구덩이 속으로 추락하고자 하는 자들과 함께 있나이다. -장 밥티스트 마시용(1663-1742, C. H. S.에 의해 자유롭게 번역됨).
2절.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성소를 "데비르"(rybd)라고 칭한 것은, 하나님이 거기서 말씀하셨고 또한 응답하셨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인) 이곳을 향하여, 다윗은 손을 들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마치 그의 기도를 하늘로 올라가게 만드는 사닥다리와 같은 역할을 했다. -존 트랩.
3절. "악인과······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경건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위선적으로 대하는 것을 혐오스럽게 여긴다. 그 마음의 생각과 혀는 일치하며, 그는 아첨하면서 동시에 미워하지 못하며, 칭찬하면서 동시에 비난하지 못한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롬 12:9). 위선적인 사랑은 미움보다 더 나쁘다. 위장된 우정은 거짓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시 78:36).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런 것처럼 꾸미기 때문이다. 요압 같은 사람들이 많다. 그는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 입을 맞추려는 체하면서 칼로 그 배를 찔러 죽였다. 스페인의 어느 강에는 금빛을 띤 것처럼 보이는 물고기가 서식하는데, 그것을 물 밖으로 끄집어내면 다른 물고기처럼 보인다. 반짝인다고 해서 다 금은 아니다. 대단히 친절한 척하지만 마치 피가 거의 메말라버린 커다란 혈관과 같은 사람들도 있다. 만일 당신이 그들에게 기대면, 그들은 마치 다리가 탈골된 사람 같을 것이다. 내가 생각건대, 자기 친구에게 아첨하며 거짓말하려는 자가 과연 하나님께 대해 진실한지 대단히 의심스럽다. "미워함을 감추는 자는 거짓의 입술을 가진 자요 참소하는 자는 미련한 자니라"(잠 10:18). -토머스 왓슨.
3절.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내가 생각건대, 이는 목자가 양떼로부터 특정한 놈을 골라내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나를 동류로 여기지 마소서." -사무엘 리(Samuel Lee).
3절.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티메쉬케니"(ynkvmtla)는 "마샤크"(^vm)에서 변화된 형태로서, 끈다는 말과 파악한다는 말을 모두 의미한다. 여기서는, 마치 누군가를 처형시키기 위해 끌고 가듯이 '나를 붙들지 말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헨리 해먼드.
4절.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여기서 또다시 보복을 위한 기도에 관한 난해한 물음이 제기된다. 그러나 나는 몇 마디 말로써 이를 설명해낼 수 있다. 먼저 분명한 사실은, 만일 육신이 우리로 하여금 복수를 추구하도록 부추긴다면, 그러한 바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침해에 대한 보복으로서 대적들에게 화가 있으라고 빌지 못하도록 금하실 뿐만 아니라, 증오심에서 비롯되는 모든 바람들도 금하심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다윗의 사례가 복수를 추구하는 과격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위한 증거로 인용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거룩한 선지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슬픔에 빠진 나머지 자기 대적들의 파멸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육신의 소욕을 제쳐두고서, 그 문제 자체와 관련하여 심판을 구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악인에 대해 복수를 선언할 수 있기 전에, 먼저 그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모든 부적절한 감정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둘째로, 우리에게 해를 가하는 악인들의 흉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과격한 감정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신중히 대처해야 한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제자들마저 그러한 감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주님을 영접하지 않으려 했던 자들을 태워버리기를 바랐던 것이다(눅 9:54). 사실 그들은 엘리야의 본을 따라 행동하는 척했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셨고, 그들의 행동이 어떤 정신 상태에 의해 유발되었는지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셨다. 특히, 우리는 인류 전체의 복리를 진심으로 바라며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일반적인 원칙에 유의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도록 물러서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완고하게 자멸로 치닫는 듯이 보이는 자들의 회심을 바라게 될 것이다. 요컨대, 여기서 다윗은 모든 악한 감정에서 벗어나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지고서 자신의 입장보다는 하나님의 입장에 근거하여 탄원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 비록 악인이 당분간은 아무런 징벌도 당하지 않고 온갖 종류의 악행을 자유롭게 저지를 수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자신과 신실한 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존 칼빈.
4절.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당신은 애초부터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만 몰두해 오셨으므로, 분명 영원한 저주로써 이 불법의 자녀들을 치실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스스로 버려짐을 당하며 다른 이들을 멸하기 위해 태어난 듯이 보이나이다. 인류를 향한 당신의 자비로우심 자체가 사회 내의 저렇듯 타락한 자들에게 천둥을 발하시도록 권유하나이다. 당신이 우리 인생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실수록, 당신의 공의의 엄격성은 인류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은혜를 훼방하는 일에만 골몰하는 야비한 자들을 멸하심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계시될 것입니다. 오 하나님, 저들은 사람들을 당신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역으로 당신은 그들을 영원히 당신께로부터 분리시키실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동료들로 하여금 당신의 대적이 되게 하는 것을 큰 이득으로 여기며, 영원토록 그런 일을 하는 존재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으로써 필사적인 위안을 삼을 것입니다. 당신의 경외로운 위엄을 온 마음으로 대적하고자 하는 비열한 자들에 대한 징벌로는, 영원토록 당신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섬뜩한 상태에 처한 그들의 사악한 본성 자체를 멸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징벌이 없을 것입니다. -장 밥티스트 마시용(C. H. S.에 의해 자유롭게 번역됨).
4절. "저희의 행사와······대로 갚으시며." 애굽인들이 히브리인 남자 아이들을 죽이자,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들을 치셨다. 자신의 철 병거들로써 이스라엘을 멸했다고 생각한 '시스라'는 자기 장막의 쇠말뚝으로 살해당했다. 사사기 1:5-7에 수록된 '아도니 베섹'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기드온'은 숙곳의 장로들 사십 명을 멸하였고, 그의 아들들은 아비멜렉에 의해 살해당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아들들 칠십 명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며, 그 자신의 머리는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부숴졌다. '삼손'은 '안목의 정욕'으로 인해 타락했고, 죽음을 당하기 전에 블레셋인들에 의해 그의 두 눈을 뽑혔다. 사무엘상 20:33의 '아각'의 경우를 보라. '사울'은 기브온인들을 학살하였고, 그의 일곱 아들들은 여호와 앞에서 나무에 달려 처형되었다(삼하 21:1-9).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살인을 저지른 '아합'에 대한 예언은(왕상 21:19) 열왕기하 9:24-26에서 성취되었다. 제단을 향해 뻗은 '여로보암'의 손이 말라버렸다(왕상 13:1-6). 아브넬, 아마사, 그리고 압살롬을 죽였던 '요압'은 솔로몬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다니엘을 중상했던 자들'은 다니엘이 던져졌던 바로 그 사자굴에 던져졌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세워진 교수대에 달렸다. '유다'는 피밭을 구입하고 나서 스스로 그곳으로 가서 목매달아 자살했다. 후대의 역사를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바자제트'(Bajazet)는 타메를란(Tamerlane)을 싣고 가려 했던 쇠로 만든 우리에 자신이 실려 갔다. '마젠티우스'(Mazentius)는 콘스탄틴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다리를 만들었으나, 도리어 자신이 바로 그곳에 내던져졌다. '알렉산더 6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준비한 독극물에 의해 자신이 해를 당했다. '찰스 9세'는 파리 거리를 개신교도들의 피로 얼룩지게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온 몸에 피땀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렸다. 추기경 '비턴'은 조지 위샤트에게 사형 언도를 내렸으나, 얼마 안 있어 그 자신이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는 침상에서 살해되었고, 그의 시신은 위샤트의 처형 장면을 내다보던 바로 그 창문에서 입관되었다. -보즈, Illustrative Gatherings.
4절.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하나님의 의에 관해 묵상해 보라. 죄를 징벌하는 것은 그분의 뜻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성품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파멸시킬 것임에 분명하다. 죄가 파멸시킬 가능성 혹은 가망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죄가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분명 그러하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죄를 징벌하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가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성품을 뒷전으로 미루지는 않으신다. -크리스토퍼 파울러(Christopher Fowler, Morning Exercises, 1676).
4절.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그가 대적들의 파멸을 위해 기도한 것은, 어떤 개인적인 보복심에서가 아니라 전혀 오류가 없는 예언의 영에 의해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대적들을, 그리고 모든 시대에 걸쳐 나타날 그 백성의 대적들을 보았다. -데이비드 딕슨.
4, 5절. 대부분의 저주성 구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구절들에서도, 명령형과 미래형이 뒤섞여 있다. "갚으시며······보응하소서······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그러므로 만일 그러한 모든 구절들에서 그 동사들이 한결같이 "미래형"으로 번역된다면, 성경상의 저주들에 대한 모든 반대 입장이 일시에 사라질 것이며, 그 본래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 본래의 의미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예언들이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실행되어 왔으며 여호와(그리고 그분의 그리스도)의 모든 대적들에 대해서도 실행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창조의 "일"이나 구속의 일 등 그 무엇을 본다고 하더라도 회개에 이르지 못한다. -조지 혼.
6절. "들으심이로다." 기도는 역경 상태에서 최선의 구제책이다. 사실 이는 진정한 만병통치약, 곧 모든 병폐들을 위한 총체적인 치유책이다. 때로는 약효가 있고 대부분의 경우는 약효를 발휘하지 못하는, 경험에 의존하는 만병통치약과 같은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와 부단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전 점검을 거친 것이다. 이러한 처방을 내리는 의사이신 그분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바 가장 지혜롭고, 학식 많고, 정직하며, 또한 가장 기술이 좋은 의사이시다. 아울러 그는 우리가 견뎌야 할 바를 어떻게 견뎌낼 것인지를, 그리고 이제껏 견뎌온 부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치유하며 도울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윌리엄 구지.
7절. "여호와는 나의 힘." 오! 그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만일 어떤 사람에게 짐이 하나 지워진다면, 하지만 만일 그에게 힘이 추가된다면, 만일 그 짐이 배가된다면, 하지만 만일 그의 힘이 세 배로 증가된다면, 그 짐은 더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감당할 때보다 더 가벼워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설령 우리의 곤경이 가중되어 "오,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 짐을 질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그것을 감당할 수 없겠는가?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감당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면, 어찌하여 우리가 그것을 감당하려 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은 과연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 믿음을 통해 바로 그러한 힘이 우리에게 임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종종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그 영광의 힘을 좇아"(시 28:7; 43:2; 118:14 사 12:2 합 3:19 골 1:11). 따라서, 그리스도의 힘이 우리 것이며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 어떤 짐이 부가되더라도 능히 그것을 질 수 있다. -아이작 암브로스.
7절. "여호와는 나의 힘과"(내적으로) "나의 방패시니"(외적으로). 믿음은 여호와 안에서 이 두 가지 모두를 발견하며, 이 둘은 항상 함께 존재한다. 왜냐하면 힘이 없고 방패만 있거나 방패는 없고 힘만 있다면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앞 문장에 담긴 개념이 여기서 확대되고 있다. 즉, 외적인 도움이 내적 확신을 수반하였다. -윌슨.
7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믿음은 아직 볼 수 없는 것들을 증거해 준다. 혹자는 이르기를, 믿음은 시제를 변경시키며, 여기서와 같이 미래 시제를 현재 시제로 바뀌게 한다. -존 트랩.
8절.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나만의 힘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힘이시기도 하다. 성도들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위안뿐만 아니라 자기 친구들에게 주어지는 위안도 기뻐한다. 이는 우리가 태양 빛으로부터 충분한 혜택을 받듯이, 하나님의 얼굴 빛으로부터도 충분한 혜택을 누리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 빛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그 빛이 모든 사람들 각자를 위해 충분하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교류하며, 하나님은 그들의 힘이시자 우리의 힘이 되신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주님이시자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고전 1:2). 그는 그들의 힘이시며, 온 이스라엘의 힘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름 부음받은 자"의 구원의 힘이시기 때문이다. "그 기름 부음받은 자"란 누구일까? (1) 그는 원형적인 의미에서 다윗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며 그들을 위해 싸워 온 나라를 강국으로 일으켜 세웠던 다윗을 강하게 해주셨다. 그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기름 부음받은 자라고 부른 이유는, 그로 하여금 대적들의 부러움을 사도록 만들고 따라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한 것이 바로 그 기름 부음이었기 때문이다. (2) 그는 원형에 의해 표상되는 대형적인 의미에서 그의 기름 부음받은 분이자 그의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힘"이셨으며, 그로 하여금 사역을 위한 자격을 갖추게 하시고 그것을 능히 감당케 하셨다. -매튜 헨리.
9절. "드십소서." 여기 사용된 단어는 '보존하다' 혹은 '뒷받침하다'는 뜻을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데리고 가다'는 의미가 더욱 적절하다. 이러한 의미는, 연약하고 병약한 새끼 양을 품에 안고 가는 모습, 혹은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양을 그가 일으켜 세워주는 모습에 의해 가장 잘 표현될 것이다. -알버트 반스.
[설교힌트]
1절 상반절. 낙담의 시점에 죄인이 내려야 할 지혜로운 결단.
1절. 성도는 불경건한 자와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될까봐 두려워함.
1절. 하나님의 침묵. 거기 내포된 두려운 일은 무엇일까?
1절 하반절. 하나님이 그 얼굴을 숨기실 때 우리 영혼은 어느 정도나 추락할까?
1, 2절. 기도. (1) 그 성격-“부르짖으오니.” ① 생명의 토로. ② 고통의 표현. ③ 결핍 상태에 대한 탄원. ④ 진지한 음성. (2) 그 대상-“여호와여······내 반석이여.” 하나님은 우리의 기초, 피난처, 그리고 변치 않는 친구이시다. (3) 그 목표-“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들으소서.” 우리는 응답을, 분명하고도 확실한 응답을, 신속한 응답을, 적절한 응답을, 그리고 효과적인 응답을 기대한다. (4) 그 매개물-“주의 성소를 향하여.” 우리 주 예수는 진정한 속죄소가 되신다.
3절. 피해야 할 성향들, 두려워해야 할 운명, 그리고 우리를 이 둘로부터 지켜주는 은혜.
4절. 보복, 혹은 응분의 징벌.
4절. 단순한 죄의 결과보다는 그 죄를 처치하는 문제까지 거론됨. 사람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죄를 범하기도 함.
5절. 부단히 지속되며, 수많은 축복을 상실케 하고, 또한 무서운 정죄를 수반하는 죄악된 태만 상태.
6절. 응답받은 기도들, 그것들을 회고하고 노래함.
7절.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그분을 경모함. (1) 신자에게 있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2)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시미언.
8절.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능력.
9절. “전투적 교회를 위한 기도.” 강해를 보라(“Spurgeon’s Sermons,” No. 7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