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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1961년) 12월 25일 일본의 야나이하라 선생이 승천하셨다. 나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까지 쓰카모토(塚本虎二) 선생의 마루노우치(丸之內) 성서연구회에 출석했기 때문에 선생의 주일 성서집회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선생의 잡지 <가신(嘉信)>과 YWCA 성서강연, 토요학교, 기타 공개강연 등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 선생을 추억하려 하니, 나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고 선생 앞에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더욱이 귀국 후 화재와 전란 등으로 모든 자료가 불에 타버린 나로서는 추억이라 하여도 그저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가 도쿄에 체류하던 시절 처음 선생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어느 잡지 기사를 통해서였다. 신앙 선배 한 사람이 한국에 대한 기사가 있다고 이를 한 부 주었는데, 그것은 선생이 쓰다(津田) 영학숙(英學塾) 졸업생인 한국인 여학생 최보경(崔寶卿) 씨와의 대담을 실은 것이었다. 나는 이를 읽고 한국에 대한, 그리고 모든 민족의 역사에 대한 선생의 기독교적인 뜨거운 동정심을 느꼈다. 아니, 진리로써 관통된 선생의 순수하고 깊은 인격에 접한 것만 같았다.
그 후 선생을 직접 대면한 것은 1938년 무렵이던가, 선생이 극진히 사랑하던 조성진(趙成震) 군이 도쿄에 유학하게 되어, 군의 진학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 내가 선생 댁을 방문했을 때였다. 역시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조 군에 대한 말씀이 끝난 후, 선생은 나의 앞으로의 진학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물으시고 정식으로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면 어떠냐고 하셨다. 그 후 나는 성서공부를 위해 자유로운 길을 택했지만 지금도 선생의 적절했던 충고를 깊이 감사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즈음부터 한 달에 한번씩 열린 선생의 YWCA 성서강연에는 대체로 참가했다. 나는 기독교의 근간인 구약정신과 하나님에 대한 인생 태도, 예언정신 등을 깊이 배웠다. 선생의 강연은 일본의 불의에 대한 비판, 정의와 평화의 주장 등 예언정신으로 일관되었고, 그것은 점점 치열해졌다.
선생은 1차 세계대전 전승국가로서 영국, 프랑스 등의 탐욕과 교만, 그리고 독일, 이탈리아 등 패전국가, 파쇼 국가들의 무자각, 무책임, 증오 등을 통렬히 공격했다. 자국 일본의 전쟁 행위에 대해서는 실로 심장이 찢어지는 듯 정치인과 군부의 죄악을 통렬히 질타했다.
당시 나는 일본 군부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국사관(國士館)에 있었기 때문에 선생의 싸움이 얼마나 대담무쌍한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번은 난징(南京) 함락 후 일본군이 자행한 비인도적인 민중학살을 꾸짖으며 해당 사령관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면서 심하게 공격한 적도 있었다.
얼마 후 나는 국사관 전문부 학생들이 난징에 선무반(宣撫班)으로 갔다가 민간인 학살 작전에 일손이 부족하여 거들고 왔다는 보도에 접하고, 일본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자, 아니 파수꾼으로서의 선생의 풍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이 대학에서 쫓겨난 직접 원인은, 일본과 중국 양국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곧 전쟁행위를 중단해야 한다는 강연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국사관에서 미노다(蓑田胸喜) 등 ‘원리일본(原理日本)’ 일파가 팸플릿 유포를 통해, 대일본제국의 국책인 성전(聖戰)을 반대하는 자는 제국대학의 교직에 둘 수 없다는 책동을 벌이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이 벌인 이 심한 싸움에서 일관되게 나의 심중에 인상 깊게 와 닿은 한 가지 사실은, 선생의 그 심한 언설(言說)이 내 마음 가운데 진리의 적들에 대한 증오나 감정을 촉발하기보다는, 도리어 내 양심 깊숙이 믿음과 정의와 진리의 염(念)으로 불붙게 했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이는 선생의 그 싸움이 오로지 진리에 근거한 인류적인, 애국적인, 공적인 것으로, 아니 그 이상 오직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겸손에서 발로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 민족과 인류를 위한 선생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뜨거운 사랑에서 발로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선생은 이 싸움을 결코 인간적인 정열이나 의지로써 끌고 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닷가 또는 산에서 그때그때 이루어진 선생의 하나님과의 깊은 기도와 교제 가운데서 얻어진 위로부터의 계시와 영감, 능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대학에서 쫓겨난 선생은 ‘토요학교’를 열어 청년들을 가르쳤다. 나도 중도부터이긴 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후반과 <삼위일체론>, 그리고 단테의 <신곡> 등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직장 관계로 언제나 강의 시작 직전에 가까스로 도착했던 나에게 선생은 언젠가 점심시간도 없겠다고 하시며, 전차에서 빵으로 식사를 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진심으로 걱정하시는 것이었다. 이즈음 내가 결혼하게 되어 선생 내외분을 누추한 거처에 모시고 저녁을 대접한 적이 있었다.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한국에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던 선생은 부인께 김치를 설명하면서 부인으로 하여금 매운 김치를 맛보게 하셨다.
<신곡> 강의에서는 연옥 제6곡을 깊은 동정심으로 말씀하신 것이 지금도 머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전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대학에서 쫓겨난 선생의 생활 또한 용이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한겨울에도 강의실에는 화기(火氣)가 없었다. 젊은 제자들이 숯을 모아 선생 발치에 작은 화로를 놓아드리곤 했다. 초대 기독교, 로마의 카타콤을 연상시켰다. 전쟁은 차츰 막바지에 이르러 불똥은 한국에도 튀게 되었다. 종전되던 해 봄, 나는 귀국하여 민족과 더불어 죽을 것을 각오하고 선생께 이를 말씀드리니, 하나님은 일본을 결코 이 정도로 두지 않을 것이니 하루 속히 귀국하라고 말씀하셨다.
선생은 한국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선생은 대학 졸업 시 일본의 식민지 한국에 나와 민간인으로서 봉사할 의향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결국 도쿄대학 식민정책 교수로서, 기독교 전도자로서,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와의 대결로써 우리와 깊이 연결되었다. 1940년에는 총독부의 방해를 무릅쓰고 서울에서 로마서 강의와 각종 강연을 행하셨다. 여행 중 부산에서는 당시 경남의 일본인 지사가 선생께 ‘너’라고 반말을 쓰자 선생 역시 반말을 써서 충돌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함경도 여행에서는 어느 오만한 일본 경찰을 질책하고 구속될 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선생은 특히 태평양전쟁 중 일본 총독부의 언어정책, 기독교탄압, 동화정책(同化政策) 등에 심한 비판을 했다. 선생의 이 싸움 덕분에 단말마적인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 아래 있던 많은 우리 동포들이 격려와 힘을 얻은 것은 물론이다. 언젠가 중국 여행에서 돌아오신 후 선생은 중국민족의 실리주의는 도저히 기독교를 받을 수 없다고 하시며, 기독교에 대한 동양의 희망은 역시 한국과 일본이라고 말씀하셨다.
언젠가는 또 한국은 정치 현실이 일본에 의해 봉쇄된 만큼, 종교, 예술 등의 면에서 일본 이상의 발전이 있을 것이며, 일본은 민족 전체가, 특히 상층부가 아직도 천박하게 정치에 대한 관심에 치우쳐 있어 치명상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한번은 선생의 젊은 제자들이 한국 여행에 오르기 전, 한국에 가면 무엇보다도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상을 봐야만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렇듯 선생은 한국을 아끼고 사랑하고 이에 기대하는 바가 컸다. 그러나 해방 이후로는 한국에 대한 선생의 평론이 거의 없었다. 나는 선생이 한국의 자립과 독립을 십분 존중한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선생은 공생애를 통해 한국이 한국인 품으로 돌아가고, 자유를 되찾게 하고자 생명을 걸고 싸운 분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자유 독립 후 우리의 사태는 과연 어떠한가? 나는 선생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래, 전날 모든 책임을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와 침략에 돌렸던 우리의 손으로 직접 이루어놓은 것이 고작 이것뿐이란 말인가?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불법, 민주당 치하의 방종과 무책임과 무질서, 그리고 현재 겨우 군사정권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라. 과연 더러운 민족이 아닌가? 민주주의를 한다는 것이 한번도 정권 교체를 제대로 못하니, 이는 후진국이 아니라 천치요, 등신 아닌가?
정치는 또 어쩔 수 없다고 하자. 그러면 민족의 상층부에, 지식층에, 대학에, 민족의 생명과 진리가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상층부는 부패로 감옥에나 출입하고 있고, 학자는 정치의 밑을 닦기에 분주하고, 대학은 이념 비판은커녕 현실 앞에 꼼짝달싹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선생이 우리에게 기대했던 기독교에,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 종교와 예술이야말로 국가와 민족에 정신을, 고난과 인내에 기쁨을, 양심에 각성을, 도덕에 실천력을 부여하는 것 아니던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늘날 이것이 개도 안 먹을 정도로 썩어문드러져서, 도리어 민족을 해치는 존재가 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이 상태는 예언자에게,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상태가 아닌가? 나는 선생이 한국 전도에서 돌아오셨을 때 하신 말씀에, 한국에서 로마서강연을 듣던 청중 가운데 눈 먼 여자 한 분이 계셨는데, 이 정경이 마치 한국을 상징하는 듯했다고 해서, 심중에 반감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선생의 말씀이 맞는 것 아닌가? 우리는 언제까지나 소경의 걸음을 걸을 것인가? 각성과 반성, 뉘우침과 싸움이 있어야 하겠다.
선생의 예언대로 2차 세계대전에서 불의하고 교만한 일본이 패망하자, 선생은 신(新)일본의 복음화, 민주화, 평화에 주력하셨다. 선생은 종전 후 다시 도쿄대학에 복귀, 2대와 3대 총장을 연임하며 대학과 학문과 인격을 위해 싸웠다. 신일본의 기초를 놓기 위한 것이었다. 선생은 일본 국회에서 행한 강연에서 대학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논하시면서, 마치 의학자가 페스트균을 연구하는 것과 같이, 대학은 정치인들이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상일지라도 모두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생은 학생들의 과격한 운동과 행동에 대해서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손수 몸으로 대처했다.
선생은 또 총장의 격무 중에서도 최후까지 신앙지 <가신(嘉信)>을 놓지 않으셨다. 아니, 최후의 병석에서 필기자가 선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까지 잡지 원고 작성을 쉬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에게는 복음이야말로 진정한 일본의 민주화와 평화와 자유와 독립의 등골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니, 인생 모든 문제의 해결, 우주 만물의 완성이야말로 이 복음의 진리와 구원에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점에서 선생이야말로 예언자 이상 위대한 그리스도인, 복음의 전달자였다고 보고 싶다. 선생은 실로 하나님이 일본의 복음화, 아니 복음의 황무지 동양을 위해 예언자와 사도직을 한데 지워 보낸 사자(使者)였다. 나는 선생 같이 소명의식과 사명의식에 투철한 그리스도인이 근대 세계역사에서 별로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또 폭넓은 선생의 생애와 활동이 선생의 복음 이해와 파악을 그토록 깊게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우리는 선생의 신앙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세상 온갖 일들과의 조화가 아니라, 복음에 의거한 세상에 대한 비판과 공격과 승리야말로 선생의 신앙이요, 생애였던 것이다.
끝으로 나는 선생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예언자, 복음의 사도, 즉 단순한 진리의 제시자 이상의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선생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어린이 같은 신뢰의 사람, 사랑의 사람, 진실하고 겸손한 평민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선생의 이러한 인격과 신앙의 열쇠를, 언제나 낮은 목소리로 마치 어린이처럼 단순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던 선생의 태도에서 볼 수 있었다. 선생은 이점 일본적인 섬나라 근성을 완전히 벗어버린, 자유롭고 활달한 산 인격이었다. 선생과 친교가 깊었던 김교신 선생은 선생을 가리켜 ‘참 사람’이라고 했다. 선생이야말로 무교회 그리스도인의, 아니 이 동양기독교의 초창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모습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작년에 일본에 갈 기회가 있어 해방 후 처음으로 선생을 대할 수 있었다. 선생은 한국의 항구적인 분단을 걱정하시고, 또 동양에서 함께 민주 국가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한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이 한국을 위해 현명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셨다.
<성서연구> 제94호 (1962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