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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 플라스토프 (Arkady Plastov / 1893~1972)의 경우 러시아 화가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 지금은 없어진 소련 화가라고 해야 맞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젊음 Youth / 170cm x 204cm 벌판이라도 뛰어 온 걸까요? 웃옷을 벗고 풀밭에 누웠습니다. 들판을 건너오는 바람 그리고 거칠게 몰아 쉬는 숨소리가 들려 옵니다. 터질 것 같은 가슴 때문에 뛰어 본 적이 없다면, 그 것이 사랑이든 분노이든 끓어 오르는 신열을 어쩌지 못해 풀 밭에 누워 본 적이 없다면, ---- 그 젊음은 너무 차갑습니다. 다시 몸이 뜨거워졌으면 좋겠는데 요즘은 머리만 뜨겁습니다. 그나저나 같이 뛰어 온 개도 어지간히 힘이 든 모양입니다. 플라스토브는 지금은 울래노브스키라고 불리는 심브르스크의 프리슬리니하라는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는데 대대로 성상(聖像 / 이콘)을 그리는 집안이었습니다. 화가의 유전인자가 그의 몸 속에 있었던 것이죠. 열 살 때 심브르스크의 신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시작하는데 나중에 모스크바 예술학교를 졸업하는 24세까지 그의 공부는 계속 됩니다. 말 목욕 시키기 Horse bathing / 67cm x 100cm / 1937 가득 찬 생명력이 그림 밖으로 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느낌입니다. 말과 나체의 젊은이들이 햇빛이 녹아 든 푸른 강물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말을 씻는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젊은이들의 역동적인 놀이입니다. 왼 쪽 말 등 위에서 서서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이는 ‘고추’ 정도 보여주는 것은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것은 당당함입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건강한 원시성’이기도 합니다. 모스크바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플라스토프는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8년 정도 고향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지만 고향의 자연 풍경을 그리는데 몰두 했다는 것으로 봐서는 붓을 내려 놓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를 졸업 한 10년 뒤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 포스터 제작일과 여러 출판사에서 책의 삽화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명성을 얻은 것은 화가로서였습니다. 소나무 숲에 내리는 가을 햇살 Autumn Sun, Pine Trees / 52cm x 62cm / 1940s 1929년, 플라스토프는 첫 작품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고 풍부한 색감을 가졌던 선배 러시아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31년, 그의 집에서 불이나 집 전체를 태웠는데 이 때 집안에 보관 되어있던 그의 1920년대 작품 대부분이 소실됩니다. 그런 이유로 플라스토브의 초기 작품은 알 수 가 없습니다. 건초 만들기 Haymaking / 31cm x 43.5cm / 1944~1945 서양 화가들의 작품에는 건초 만드는 내용을 묘사한 것이 많습니다. 노동의 고단함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주제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건초 만드는 일이 농촌의 삶을 대표하기 때문이겠지요. 대개 가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많은데, 이 작품 속의 젊은이는 한 여름을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햇빛에 그을린 구리 빛 몸은 튼실하기 보다는 약해 보입니다. 지쳐 보이는 어린 그의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발갛게 표시 된 귀를 보면서 ‘플라스트프 선생님, 참 섬세하셨군요’ 하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건초 만들기 Haymaking / 1945 자작나무 숲 끝에 펼쳐진 풀 밭에 식구들이 모두 나섰습니다. 맨 뒤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순서대로 줄을 서서 풀을 베고 있습니다. 고단한 시골 생활이 한 짐씩 사람들의 어깨에 얹혀 있는데 속절없는 들꽃들은 화려한 모습들로 식구들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차라리 예쁘지나 말지 ---. 추수 Harvest /166cm x 219cm / 1945 황금빛 벌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일까요? 식사라고 차려 온 것을 보니 수프하고 손에 든 감자가 전부인 것 같습니다. 노인이 들고 있는 스푼의 그림자가 수프 위에 고스란히 떠 있습니다. 건더기 없는 맑은 수프이겠지요. 아이들 부모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물끄러미 음식을 바라보는 노인 옆의 개의 표정도 썩 좋지는 않습니다. 오늘도 굶는 건가 ---. 벌판은 누렇게 익어가는데 노인의 얼굴은 상념으로 검게 타 들어가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시골 생활의 모습을 담는 것은 계속 되었습니다. 배급 받는 날 Pay Day / 165cm x 196cm / 1951 아마 집단농장의 식량 배급일인 모양입니다. 가운데 역삼각형의 구도에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배급해야 할 식량을 저울에 다는 남자와 기록을 하는 여자 그리고 자기 몫이 정확하게 기재되고 있는지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는 긴장감이 담겨 있습니다.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의 표정은 느긋합니다. 양곡 마대 위에 올라가서 배를 깔고 해바라기 씨를 먹는 소년은 맨발입니다. 생활이 간단치 않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봄 Spring / 211cm x 123cm / 1954 플라스토프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방금 사우나를 끝 낸 아이의 옷을 입히고 있습니다. 숄을 여며주는 엄마와 안 춥다는 표정의 앙증맞은 아이 얼굴이 내리는 눈송이들 속에서도 따뜻하게 다가 옵니다. 하늘은 잿빛이지만 밝은 색 짚과 여인의 몸이 화면을 밝혔습니다. 이제 긴 겨울이 끝났다는 이야기일까요? 그렇다면 내리는 것은 눈이 아니라 봄의 전령들일 수 도 있습니다. 글쎄요, 감자를 저렇게 캐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마 감자를 땅 속에 저장했다가 다시 담는 것 아닐까요? ‘무는 땅속에 묻지만 감자는 땅 속에다 안 묻거든’ 아내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저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흙 묻은 얼굴과 손등 위로 굵게 튀어 나 온 힘줄을 보면서 고향을 사랑했고 소련 농민들의 삶을 살아 있는 그대로 전하고자 했던 플라스토프에 대한 평가가 떠 올랐습니다. 후대 소련의 휴머니즘 아트 화가들은 가장 존경하는 화가로 플라스토프를 들었는데,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림 속에 ‘사람’이 있거든요. 트랙터 기사의 저녁 식사 Tractor driver's supper / 200cm x 167cm / 1961 석양 빛에 대지가 검붉게 물들었습니다. 지평선부터 갈기 시작한 밭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트랙터를 켜 놓고 잠깐 저녁 식사를 하는 모양인데 다른 음식은 보이지 않고 흰 우유뿐입니다. 두 손으로 잡은 음식 그릇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트랙터 기사의 얼굴도 속에 입고 있는 붉은 셔츠처럼 물들었습니다. 고단하지만 그의 얼굴은 흙과 같이 한 세월 때문이지 흙을 닮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얼굴에서 피곤하지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힘이 보입니다. 잔광이 등에 앉은 남자들의 얼굴과는 달리 소녀의 모습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때문에 소녀만 동떨어져 보이기도 하지만 만약 소녀가 없었다면 작품이 너무 팍팍했을 것 같습니다. 시골 마을 (우유 한 잔) In the village (A mug with milk) / 154cm x 228cm / 1961~1962 우유를 짜는 엄마 무릎이 앉아 있던 아이가 불쑥 컵을 내밀었습니다. 엄마는 능숙한 솜씨로 젖의 방향을 컵으로 향했습니다. 아이가 먹으려는 것일까요, 아니면 고양이에게? 그 것도 아니면 송아지에게? 누구에게 주던 간에 송아지로서는 답답할 노릇입니다. 엄마 젖의 주인은 자기인데도 이러 저리 하는 인간들이 아주 못마땅한 눈초리입니다. 어미 소의 심사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휙 하고 지나가는 소 꼬리의 소리가 들리시는지요? 나무의 죽음 Death of a tree / 270cm x 133cm / 1962 이렇게 그림 속에서 반짝거리는 나뭇잎을 본 적이 없습니다. 떨어지는 햇빛들이 나뭇잎 마다 부서지면서 모두 재잘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밑 둥을 동그랗게 자른 나무를 힘주어 밀자 나무가 넘어 가고 있습니다. 벌써 넘어간 나무 밑 둥에는 도끼가 꽂혀있고 톱을 든 노인의 눈은 나무에 고정되어 있는데, 살짝 벌린 노인의 입에서는 짧은 탄식이 흘러 나오는 것 같습니다. 노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넘어가는 나무 일까요, 아니면 나무와 함께 한 세월일까요? 오십 대 중반의 장님 Blind. The middle fifties / 108cm x 133cm / 1967 러시아어로 된 제목을 영어로 옮긴 것이겠지요. 제 머리로는 저렇게 밖에 읽히지 않습니다. 지팡이를 집고 가로수 그림자가 얼룩덜룩한 길을 따라 우리를 향해 걸어 오는 두 사람 모두 장님일까요? 앞에 선 여인이 장님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 다 앞을 못 본다면 너무 힘들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곁을 지나 고개를 향해 달려가는 자전거 위의 젊은이는 이제까지 그들 곁을 ‘휙’하고 지나갔던 수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입니다. 더 많이 돌아보고, 더 많이 그 들 앞에서 멈춰야 했는데 그냥 많이 지나쳐 왔습니다. 반성할 일입니다. 유월인데요 --- 그래야 할 것 같은 맑은 유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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