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화를 위해 희생을 치르며 손문을 도운 야마다(山田) 형제
중국의 손문(孫文,孫中山)의 혁명운동을 도운 인물로서 미야자키 토우텐(宮崎 滔天, 1871-1922, Click!)이 유명하다. 그러나 미야자키(宮崎)와 함께 손문이 가장 신뢰를 했던 일본인이 있었다. 그의 자서전에서 「혁명을 위해 분주히, 그리고 끝가지 게으름 피우지 않는 사람은 야마다(山田) 형제」라고 술회한 이들은 야마다 요시마사(山田 良政), 야마다 쥰사부로우(山田 純三郞)의 형제이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므로, 아시아 인민의 독립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을 계기로 청국으로부터 2, 3만명의 유학생이 일본으로 건너 왔으며, 손문은 미야자키 토우텐(宮崎滔天) 등의 지원을 받아, 동경에서 「중국 혁명 동맹회」를 결성했다.
형 야마다 요시마사(山田 良政, 1868-1900) 동생 야마다 쥰사부로우(山田 純三郞, 1877-1960)
야마다 형제(山田)의 형 야마다 요시마사(山田良政)는 1869년, 동생 쥰사부로우(純三郞)는 1878년 아오모리현 히로마에(靑森縣 弘前)에서 태어났다. 요시마사(山田 良政)는 수산학교를 졸업하고 해산물 회사에 들어가, 당시 일본인이 거의 살지 않고 있던 상하이에서 약 5년간에 걸쳐, 중국 사정의 연구와 중국어 공부에 정열을 쏟았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 일본에 있던 손문과 만나서 혁명운동을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1900년 현지의 손문 군대는 처음에는 우세했으나, 무기 보충의 지속이 안 되어 차츰 고립해 갔다. 이때에 손문으로부터 「지금은 군을 해산하여 피신하도록.」라고 하는 전언을 휴대하고, 혜주(惠州)의 현지 사령관에게 전달한 사람이 요시마사(山田 良政)였다. 요시마사(山田良政)의 임무는 전언을 전해주는 것뿐이 였으나, 패군을 그대로 만 보고 떠날 수 없어, 혁명군들과 최후까지 싸우다 숨졌다.
1924년11월25일 코우베(神戶) 오리엔탈 호텔에서 손문과 토우야마 미치루(頭山 滿, Click!)의 회담. 오른쪽 첫 번째 토우야마 미치루(頭山 滿), 오른쪽 두 번째가 손문, 왼쪽 뒷줄 첫 번째가 야마다 요시마사(山田良政).
당시 일본에서는 내각 교체가 있었다. 새로 정권을 이은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 Click!) 내각은 서양 열강과의 협조 방침으로 중국의 내정간섭에서는 불간섭 정책으로 일관해, 손문의 무기 공급과 일본군에 의한 혁명군 지원을 금지했다. 이 정책으로 혁명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며, 봉기 계속불능으로 해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요시마사(山田良政)는 혁명군에게 혁명 중지이유를 설명했다. 원래 그가 주선하여 손문의 혁명이 사실상 시작하게 되었으며, 쯔가루 무가(津輕武家)에서 태어나, 가난한 친구를 위해 대신 퇴학까지 당한, 그의 의협심. 이러한 경위로 요시마사(山田良政)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
손문과 요시마사(山田 良政)의 만남은 겨우 2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손문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1912년 신해혁명의 직후 일본을 방문한 손문은, 요시마사(山田良政)의 부친을 만나 「요시마사씨가 중국혁명을 위해, 외국인으로서 처음 희생되어 준 일에 대해, 전 중국국민을 대표하여 사의를 드립니다.」라고 정중히 인사했다.
홍콩으로 향하던 선상에서 였다. 「야마다 군, 오랫동안 일본을 떠나 있으면 부모님들이 걱정하실 테니 함깨 사진을 찍어 보내드려라.」고 하여, 갑판에서 동지일행과 찍은 사진. 덴버 호였다.
형 요시마사(山田良政)의 뒤를 이어 손문을 섬기게 된 것이 동생 야마다 쥰사부로우(山田純三郞)였다. 쥰사부로우(山田純三郞)는 신해혁명 이후, 손문과 그의 호의적인 일본인 유력자들 사이의 연락 계로서 일하면서, 쫓기는 몸인 손문과 그의 부하들을 은폐시키는 등 헌신적인 원조를 했다.
신해혁명 뒤, 실권을 원세개(袁世凱)에게 뺏기고, 제2차 혁명에도 실패한 손문을 시작으로 하는 혁명파는, 당시 다음 봉기를 위해 폭탄을 제조하고 있었다. 쥰사부로우(山田純三郞)는 이 폭탄을 상해의 자택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경찰의 수색이 있을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여, 폭탄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자로는 사람의 눈에 띄기 쉬우므로 운반에는 자기의 아내를 시켜, 유모차에 폭탄을 감추어 운반했다.
야마다 쥰사부로우(山田 純三郞)와 손문
1916년5월, 쥰사부로우(山田純三郞)의 집에 손문의 측근인 진기미(陳其美)가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에 아직 어린 쥰사부로우(山田 純三郞)의 장녀가 이 사건에 휘말려 커다란 부상을 입었다. 장녀를 안고 있던 가정부가 유탄을 맞아, 어린 장녀를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일로 장녀는 정신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었다. 또 사건이 쥰사부로우(山田純三郞)의 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를 의심하는 혁명가도 있었으나, 그는 참고 견디며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녀의 다음에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누나는 우리 집의 보물이다. 일본과 중국의 우호의 증거이므로, 잘 기억해라.」라고 가르쳤다.
19세 당시의 손문 만년의 손문
손문도 이러한 쥰사부로우(山田純三郞)의 가족에 많은 신경을 썼으며, 장녀 다음에 태어난 장남을 특별히 귀여워 했다. 병이 점점 심해 갈 무렵 손문 앞으로 보낸 장남으로부터 위문 전보에 대해, 손문은 「학문을 닦아, 성장한 뒤에는 東亞를 위해 최선을 다해라.」라고 회답했다. 쥰사부로우(山田純三郞)는 손문의 임종 때, 측근으로서 지켜본 유일한 일본인이었다.
1921년2월27일 손문의 야마다 요시마사(山田良政) 추도문. 야마다 요시마사(山田良政)의 비문
손문의 추도문으로 새긴, 야마다 요시마사(山田良政)의 비문, 1919년
貞昌寺(테이쇼우지) 貞昌寺(테이쇼우지) 정원 ?036-8214 靑森縣 弘前市新寺町108
山田家의 보리사(菩提寺)는, 아오모리현 히로마에(靑森縣 弘前)의 貞昌寺에 손문과 장개석의 직필로 야마다(山田)형제의 비가 각각 건립되어 있다.
孫文 記念館(孫中山 記念館, 일본 兵庫縣 神戶市 垂水區, 舞子公園 博物館) 1915년 건축의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콘크리트 건조물로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손문의 연설 장면
대만 대북시의 中山國 父紀念館
중국 광주시의 中山 國父紀念館
중국 남경시의 中山國父 紀念館
中山이라고 하는 이름의 유래는, 손문이 일본 망명 시절에 살고 있었던 곳 근처에, 「中山」(나카야마)라고 하는 저택이 있어, 이 글씨가 마음에 들어, 「孫 中山」이라고 호를 붙였다. 「中山」(나카야마) 저택은 유서 있는 가문으로 메이지 천황의 어머니의 생가이다. 현재 중국과 대만에 「中山대학」, 「국립 中山대학 」, 「中山공원」, 「中山路」 등의 「中山」이란 글자가 붙는 것은 "손문의 호"에서 유래한다.
야마다 요시마사(山田 良政), 일본인 지사(志士) 요시마사(良政)는 1869년1월1일, 쯔가루 항시(津輕 藩士)의 장남으로 아오모리현 히로사키(靑森縣 弘前)에서 태어났다. 아오모리 사범학교에서 배우고 있었으나, 식사에 불만을 품고 기숙사 소동의 주모자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사실은 주모자는 친구였으나, 그의 집은 가난하여 퇴학을 받으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신이 대신 희생하기로 했다. 무사의 무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에 그는 동행 출신의 유명한 언론인을 의지하여 동경으로 갔다. 그로부터 「일본으로서는, 지금 중요한 것은 청국(淸國)의 연구이다.」라고 조언을 받고, 중국어를 배워, "北海道 昆布會社"란 중국회사에 취직하여 상해지점 근무로 발령을 받아 대륙을 건너갔다.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군의 통역관으로서 종군한다. 이 무렵 그의 중국어는 완벽하게 중국어를 구사하게 되었으며, 우수한 중국통이 되었다. 전쟁후에는 해군에 소속해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열강의 중국에 대한 이권을 노리는 움직임을 찾고 있었다.
북경에서 야마다 요시마사(山田良政)는, 조정의 압정과 열강의 수탈에 고통받고 있는 민중을 눈앞에 보면서, 첩보활동을 계속하면서 청나라 왕조 개혁파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들은 조정을 구하기 위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교훈으로 위에서부터 개혁을 단행하려고 했다. 1898년6월 光緖帝를 옹립하여 근대국가 건설을 착수해, 신식육군을 창설하여 민간의 상공업, 농업진흥 등 새로운 신헌법을 포고했다. 그러나 光緖帝의 숙모 西太后를 추종하는 구수 파들이 무력으로 진압, 동지 6명은 잡혀 사형당했다.
이 사건을 「戊戌 사변」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당국으로부터 쫓기고 있던 왕조(王照, 황제의 교수)를 천진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경비함 오오시마(大島)에 감추어 었다. 잠시 뒤에 청조의 관리가 범인 인도를 요구해 왔으나, 함장 아라카와(荒川) 중령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후 왕조(王照)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야마다 요시마사(山田良政)는 일약 유명해졌다. 1899년 손문은 야마다 요시마사(山田良政)를 처음 그의 집으로 방문했다. 야마다는 이미 청의 왕조가 개혁만으로는 청국을 구제할 수 없다고 통감하고 있었으며, 손문의 혁명사상을 듣고, 동지로서 지원을 약속했다.
야마다 쥰사부로우(山田 純三郞)는 형의 유지를 이었다. 그도 오랫동안 손문을 따라 그의 혁명운동을 도왔다. 신해혁명 성공 뒤에, 손문은 중화민국 초대총통에 취임하기는 했으나, 북방 군벌 최고봉인 원세개(袁世凱)와 타협하여 총통 직을 넘겨줬다. 그러나 원세개는 "제정부활(帝政復活)"을 노리고 있었으며, 이것에 반대하는 손문은 제2혁명을 기획한다. 이후 중국혁명 운동은 각지의 군벌과 공산주의 세력, 더욱이 열강과 일본까지 가세하여 복잡한 전개가 이루어진다.
손문은 불굴의 혁명가 생애를 1925년3월12일로 마감했다. 간장암이 악화하여 병상에 누운 이래로, 쥰사부로우(山田純三郞)는 머리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했다. 「혁멱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유서에는 임종에 입회한 많은 동지가 서명을 했으나, 쥰사부로우(山田純三郞)는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사양했다. 쥰사부로우(山田 純三郞)는 이 뒤로도 오랫동안 상해에 살면서 혁명의 추이를 바라보며, 장개석이나 일본 정부에 조언을 해왔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50여 년 정들어 살아온 대륙을 철수하여, 1960년 83세로 영면했다. 1976년, 고향 히로사키(弘前)의 貞昌寺의 비명에는, 형 요시마사(山田 良政)의 기념비와 함께 장개석의 친필로 「영회풍의」(永懷風儀, 영원히 그대의 정의를 잊지 않고)라는 비명이 새겨졌다.
장개석의 대만 중화민국 정부가 1924년4월26일 발행한 쥰사부로우(純三郞)의 총통부 출입증.
손문의 혁명이 시작한지 이미 100여 년이 지났다. 이 시점에서 야마다 요시마사(山田 良政), 야마다 쥰사부로우(山田 純三郞)의 형제의 의거는, 소박한 일본 무사도의 발로(發露)였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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