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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재야사학자 홍인희 선생의 저술인 이 책에 대해 출판사인 교보문고는 “그는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역사와 문화를 공부해온 평생학습자로서 고금의 문헌과 기록을 살피고 여러 사연과 의미가 깃든 곳곳의 현장을 직접 밟아 이야기를 모아서 수집한 자료를 재구성해 전달하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그런가 하면 저자는 스스로 책머리에서 “신라 천년사직을 바칠 수밖에 없었던 경순왕의 고뇌, 고려 패망의 참담한 뒤안길, 세종과 정조의 이면적 발자취와 함께 사상과 정파적인 대립각 속에서도 지켜내려고 했던 사대부들의 속 깊은 우정, 오랜 유배생활의 나락에서도 불멸의 족적을 남긴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의 고단한 생애 등 역사 속 다양한 이야기와 어느 도공과 사당패의 질곡한 삶, 민초들의 애환, 자랑스러운 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속의 뭉클한 사연들도 담았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이 화를 낸 횟수를 기록했는데 영조가 151회, 태종이 97회인데 비해 세종은 19회로 재위기간을 비교해도 세종은 2년에 한 번꼴로 다른 왕들과 비교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세종 때 허조(許稠)와 고약해(高若海)라는 두 명의 골치 아픈 신하가 있었는데 허조는 조정에서 중요정책이 거론될 때마다 소수의견을 제시해 임금과 중론에 맞선 인물로 세종으로부터 ‘고집불통’이란 별명까지 얻었지만 정승에 올랐고 그가 임종을 앞두고 남겼다는 소회에서 그의 본심을 드러냈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홀로 부끄러운 것이 없다. 내 나이 일흔이 넘었고, 정승에 이르렀는데 그간 성상의 은총을 만나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었으니 죽어도 유한(遺恨)이 없다.”『세종실록』- 1439년 12월 28일
또 대사헌까지 올랐던 고약해는 한술 더 떠서 고집스럽게 원리원칙을 내세워 임금에게 대들다시피 하다가는 감정에 못 이겨 눈을 부라리거나 휑하니 자리를 뜨기도 했다 한다. 오죽하면 세종이 반기를 드는 신하들을 고약해 같은 놈이라고 했을까? 이는 오늘날 ‘고약하다’는 말의 유래로 전해진다. 하지만 세종이 그의 부음을 듣고 내린 조치를 보면 군신간의 도타운 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루 조회를 파한 후 조의와 부의를 보내시고 시호를 정혜貞惠라 하니 숨기거나 굽힘 없음이 정(貞)이요, 너그럽고 인자한 것이 혜(惠)다. 약해는 성품이 고상하고 흉중이 넓어 사소한 절개를 지키는 것보다 임금에게 충간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는데 때로 직위를 벗어나 말하기도 했다.”『세종실록』- 1443년 1월 7일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당태종의 치세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하는데, 당태종에게는 위징(魏徵)이라는 신하가 있어서 견제와 충언으로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은 아는 사실이다. 당태종의 증손자 현종도 양귀비와의 로맨스만 기억하지만, 재위기간 전반부에는 정관의 치에 견줄 정도로 ‘개원의 치(開元之治)’로 선정을 펼쳤는데 현종 역시 한휴라는 충직한 신하의 간언이 있고 또 이를 중히 여겼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현종이 누적된 피로로 힘들어하자 신하들의 아부가 이어져, 누군가가“즉위하신 이후 과중한 업무로 몹시 수척해지셨습니다. 폐하를 국정에만 내모는 한휴의 탓이니 그를 내치십시오.’라고 간언했다. 이 때 현종의 대답은 간명했다. ‘군주가 여위는 만큼 천하는 살찔 것이다”
세종의 릉은 여주에 있는 영릉이다. 당초부터 여기 있었던 것은 아니고 본래는 지금의 강남구 서초동 헌인릉 일원에 있었으나 1469년 예종 원년 이곳으로 옮겼다. 세종은 재위 시절 여주 신륵사를 3번이나 다녀갔다고 하는데 이는 여주가 어머니 원경왕후의 관향이기도 하고, 사후에 자신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 된 신륵사(神勒寺)에 애정이 있었던 듯하다. 한양에서 육로로 180리가 되는 이곳에 세종의 능침이 자리 잡은 이유를 알만하고 세인들은 세종의 릉이 천하의 명당자리로서 ‘영릉으로 인해 조선왕조의 수명이 100년은 더 늘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벼슬아치들이 귀감으로 삼아야할 명저인 것은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 독립 전쟁 중에도 이 책을 읽으며 다산을 가장 존경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다.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다산’이라는 호는 강진 만덕산에서 비롯되고 다선(茶仙)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평가받는 다산에게도 차가 결코 좋은 기억만은 아닐 것으로 유배되어 있을 때 그를 보살펴 준 정씨에게서 낳은 딸 홍임(弘任)이 때문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경기도 양평 마현의 본가로 모녀를 불렀으나 둘은 다산의 부인을 만난 후에 이내 강진으로 돌아간다. 그 후 매년 차를 보냈는데 다산은 고마움과 그리움, 안타까움을 시로 적어 남겼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었을까?
소식 끊긴 채 잉어가 노니는 천 리 밖에서 (雁斷沈魚千里外)
해마다 오는 소식이라고는 차 한 봉지뿐이로고 (每年消息一封茶)
조선시대 관직에도 나름대로 요직이 있었다고 한다. 관찰사는 평안도, 부윤은 의주, 현감은 과천...‘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지만 벼슬아치들에게 평양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대동강의 승경이 으뜸인데다 색향이라 할 만큼 평양기생이 유명했고 물산 또한 풍부했다. 의주는 중국에 인접해 사신들이 오가던 통로로 밀무역이 성행해 음성적 수입이 많았다. 그렇다면 과천은? 과천 현감은 종5품 수령에 불과했지만 ‘과천에서부터 긴다’는 말처럼 삼남 사람들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입경세(入京稅)징수권을 갖고 있었고, 한양이 가까워 고관대작들과 교분을 넓힐 수도 있었다.
전국 곳곳에 많고 많은 것이 선정비다. 조금 과장하면 조선조 500년간 목민관을 거친 사람치고 선정비 안 세운 벼슬아치가 없을 정도로 대부분 선정비를 세웠다. 선정비는 이름도 다양해 송덕비, 불망비, 영세불망비, 청덕비, 인덕비, 거사비, 유애비 등 다채롭고 휘황하다.
목민관이란 백성을 다스리고 기르는 벼슬자리를 말하는데 관찰사(감사) 예하에 부윤, 목사, 부사, 군수, 현령, 현감 그리고 병사와 절도사를 통칭하는 말이다. 수령이라고도 하는 이들은 사또 또는 원님으로 불렸으며, 수토양민왈수/봉이행지왈령(守土養民曰守/奉而行之曰令)에서 따온 수령은 ‘땅을 지키고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수(守)요, 제왕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령(令)이다’는 말의 줄임이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사람이 제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하더라
泰山雖高是亦山 (태산수고시역산) 登登不已有何難 (등등불이유하난)
世人不肯勞身力 (세인불긍노신력) 只道山高不可攀 (지도산고불가반)
양사언(楊士彦)의 시조 〈태산가〉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초서의 신선이라 불리던 명필가로 함흥·평창·강릉·철원 등 8개 고을의 수령을 지낸 목민관이었다. 평창군수 시절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 고향을 등지고 유리걸식하는 이가 500여 호 1,000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토굴 같은 곳에서 짐승과 다름없이 사는 실상을 보고 상당기간 부역과 공물, 세금을 면제해줄 것을 진언했다. 상소를 읽고 감명한 명종은 ‘이야말로 진정한 애민의식의 발로’라며 강원 감사에게 선처해주도록 명했다 한다. 그의 호 봉래와 이곳 마을 이름인 평촌에서 봉평(蓬平)이란 지명은 그때 탄생했다.
섭씨 1300℃에서 구워 유약을 입힌 것을 도기, 1300∼1500℃에서 구운 것을 자기라고 하는데 잘 알려진 대로 고려청자는 음양각은 물론 금은을 입힌 화려한 형태의 것으로 원조국인 중국인들까지 매료시켰다. 12세기 고려에 왔던 송나라 서긍도의 〈고려도경〉에 “고려인들이 만든 도기의 푸른빛깔을 비색이라 하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들이 도기를 빚어내는 솜씨와 색은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 남규슈 가고시마현에 미야마(美山)라는 도자기 마을이 있다. 정유재란 때 남원 일대에서 끌려간 조선인 70여 명이 집단거주한 곳으로 그들은 살기 위해 도자기를 구웠고 세월이 흐르면서 명성을 얻어 오늘날 일본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가고시마 도자기, 즉 사쓰마야키의 발상지가 되었다. 여기 도자기 마을에 심당길이란 인물이 있었고 그 가계는 400년이 지나도록 조선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다. 당길의 12대 손이 심수관, 그는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관으로 그의 집 대문에는 지금도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고 한다.
치악산 전설 같은 보은에 관한 이야기는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흔하지만 외국의 사례는 많이 접하지 못했다. 영국 런던에서 1시간쯤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도시 코번트리 대성당 앞에는 말을 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체 여인상이 세워져 있는데 성스러운 공간에 나체라니 의아하지만 여기 깃든 사연은 거룩하기까지 하다.
11세기 이 고장을 다스리던 영주 레오프릭 백작에게는 아름답고 독실한 믿음을 가진 ‘고다이바라’라는 열여섯 살 어린 아내가 있었다. 그녀는 평소 사람들이 과중한 세금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수차례 남편에게 백성의 부담을 덜어 달라고 탄원했지만 남편은 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덧붙이기를 “그토록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니 알몸으로 성내를 한 바퀴 돌고 오면 고려해 보겠다.”고 했는데 평소에도 지나칠 정도로 정숙한 아내임을 알기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나 하루를 고민하던 아내가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하고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흰말에 올라 마을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창문을 닫고 커턴을 쳐 보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을 순회하고 오자 남편은 아내의 제안을 수용해 선정을 펼쳤다고 하는데 이후부터 ‘불의에 대항해 고정관념과 관습을 뛰어넘는 역발상’이라는 뜻의 고다이바이즘(Godivaism)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는 말이 있다. 산자수명한 진천은 물·불·바람으로 인한 피해가 별로 없는 삼재불입지처다. 기름진 넓은 평야와 경기도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이고, 용인은 풍수적으로 산수가 잘 어우러져 조선시대 명망 있는 사대부들의 분묘가 210여 기나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도성에서 가까워 중앙에서 벼슬하던 고관대작들이 죽으면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묻히기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용인에는 고려 충신의 대명사 정몽주를 비롯해 세종 때 쓰시마 정벌의 주역 이종무 장군, 중종 때 급진개혁론자인 조광조, 〈홍길동전〉 저자 허균과 조선후기에 삼정승을 거친 정조의 개혁파트너 체제공, 을사늑약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민영환 등 걸출한 사대부들의 묘가 많다. 사당도 서원도 많은데 정몽주를 기리는 영모당,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심곡서원 등이 대표적이다. 심곡서원은 서슬퍼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던 곳이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은 유체이탈이라는 전설에서 유래하지만 이것의 대표적인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달마대사다. 달마대사는 인도의 향지국 왕자이자 중국 선종의 창시자로 받들어지는 것과는 달리 불화 등에서의 형상은 사람의 얼굴이 아닌 듯 기이하다. 여기에는 인간의 육체는 영혼과 분리될 수 있다는 불교의 이원적 사고가 깔려있다.
달마가 중국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려고 선착장에 도착하자 수백 년을 살다 죽은 큰 물고기들이 널브러져 뱃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에 달마는 자신의 육체에서 이탈하여 인근 숲속에 들어가 참선으로 도력을 발휘하여 죽은 물고기를 살려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수려했던 용모는 없어지고 웬 추한 몸뚱이 하나가 누워 있었는데 신통력으로 헤아려 보니 그 지역의 명망 있는 추남인 어떤 선인이 육체를 바꿔입고 간 것이었다. 갈 길 바쁜 달마는 어쩔 수 없이 버려진 그 몸속으로 들어가 중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후계자를 정하고자 제자들을 영취산에 모이게 했고, 깨달음의 진리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는데 이때 참석자 중에서 마하가섭만이 부처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아채고는 자신도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마음을 담아서 미소로 답했다고 한다. 이것을 흔히 연꽃과 깨달음의 미소가 동일하다는 상징적 의미로 염화시중(拈花示衆)이라고 한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 맑고 깨끗한 꽃을 피워내고 인간의 마음도 본래 청정한 본성 그대로(處染常淨), 꽃과 열매가 동시에 생겨나는 것처럼(開花卽果) 모든 중생도 세상에 나올 때부터 불성을 지니고 있기에 얼마든지 성불할 수 있다는 철학을 담고 있다. 또 연꽃의 씨는 천년이 지나도 꽃을 피운다고 하여 중생은 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환생한다는(不生不滅) 윤회사상과도 맞아떨어진다. 그런가 하면 유교에서도 연꽃을 ‘군자의 꽃’이라 하여 성찬하고 있는데 조선초기에 숭유억불의 기틀을 잡았던 정도전도 〈경렴정명후실〉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염계(송나라 성리학자-주희의 스승)의 말씀이 군자의 꽃이라 하셨으며 또 이르기를 ‘연꽃을 나만큼 사랑하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했다... 진실로 연꽃의 군자 됨을 알면 염계의 즐거움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물건을 통해 성현의 낙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라 하겠는가!”
군대에서 그토록 자주 먹던, 맛이 별로였던 도루묵은 어떤 생선일까? 창원의 달천계곡에도 그의 유허비가 있는 허목은 송시열과 더불어 예송논쟁과 경신환국의 주역이었다. 같은 남인 출신인 영의정 허적이 집안에서 잔치를 벌인 날에 비가 내리자 숙종이 기름칠한 용봉차일을 갖다 주도록 명한 적이 있다. 그런데 허적의 추종자들이 이미 차일을 가져간 뒤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남인이 몰락하면서 장희빈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급기야 모반으로 번지게 되어 남인이 퇴출당한 사건이 경신환국이다. 이로 인해 2년 전에 은퇴해 고향 연천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던 허목도 삭탈관직 당하고, 2년 후에는 88세를 일기로 쓸쓸히 종말을 맞았다. 허목은 수년 뒤 무고임이 밝혀져 신원 되기는 하였지만 권력의 무상함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빗대어 세간에서는 ‘말짱 도루묵’이라는 속언이 널리 퍼졌는데, ‘속절없이 애만 썼다’거나 ‘얻은 것 없이 힘만 들었다’는 푸념 어린 표현인 것이다. 그 후에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에서 ‘허적은 산적이 되고, 허목은 도루묵이 되었네’라는 동요를 소개했는데, 산적은 쇠고기 등을 길쭉하게 썰어 양념을 해 대꼬챙이에 꿴 음식이고, 도루묵은 ‘도로 묵어’라는 뜻이니 한때의 영화와 벼슬도 덧없는 일장춘몽이라는 의미다.
도루묵은 임금이 도성을 비우고 피난을 떠나 제대로 먹지 못하던 차에 동해안 어느 백성이 생선을 바치자 이를 먹고는 너무 맛있다고 감탄하며 생선의 이름을 묻고 묵어 또는 목어라고 하자 이름이 촌스럽다며 ‘은어(銀魚)’라고 부르게 했다. 그런데 나중에 도성에 돌아와 피난길에 먹던 생선이 생각나 가져오게 해 먹어보니 이번엔 맛이 영 없었다. 입맛이 달라진 탓이지만 그래서 ‘도로 묵어’라고 하라 했다는 것이다. 그 임금이 선조 또는 인조로 알려져 있으나 기록은 종잡을 수 없다고 한다. 고려·조선을 통틀어 재임 중 몽진을 떠난 임금은 고려의 충렬왕과 공민왕, 조선의 선조와 인조 등 모두 5명인데 동해안으로 간 경우는 아무도 없다. 결국 기록에서 ‘전왕조’라 한 것은 임금이 되기 전에 함경도에서 주로 활동했던 이성계를 가르킨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허목이 죽은 지 7년 뒤 평생 라이벌이자 실록에 그 이름이 3,000번이나 거론되고 전국의 가장 많은 서원에 모셔지기도 한 우암 송시열도 숙종에 의해 제주로 유배를 떠났다가 한양으로 압송되는 중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워낙 거구인데다 건강 체질이라 82세 나이에도 사약 한 사발로는 끄떡없어 세 사발이나 마신 후 절명했다고 한다. 권력이란 무상하고 말짱 도루묵인 것을!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 속지 말자.
일본놈 다시 일어나고 떼 놈들 떼로 몰려온다.
조선 사람이여 또 조심하라.
선화공주는 서방님 몰래 사귀어 두고 밤마다 은밀히 안으러 간다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줄 것인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
밭 있으면 세금 없고, 세금 있으면 밭이 없다.(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말해오던 것과 결과가 같아진다는 뜻이다. ‘자기충족적 예언(self fulfillment prophesy)’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미래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실제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경향성’이라고 정의되는 것으로 ‘플라시보 효과’라 하여 의사가 가짜약을 투여했음에도 환자 자신의 믿음으로 증세가 호전되는 것, 옛날 ‘할머니 손은 약손’이라고 한 말과도 연결된다. 또 어떤 기대와 예측이 이루어지는 것을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하는데 그리스 신화에 키프로스 왕 피그말리온은 여성 혐오자로 많은 여인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뛰어난 조각 솜씨로 여러 조각을 열심히 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갈라테이아’라는 여자조각상을 완성했고 조각에 깊은 사랑을 느끼면서 ‘이런 여인과 꼭 결혼하고 싶다’는 기원을 드리자 이를 지켜보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게 해 주었다. 그리스 신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 듣다 보면 교훈 하나가 생각난다. 연약해 보이는 민초들의 힘이 사실은 가장 강력하다는 것과 바람을 갖고 열심히 하다 보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갈파했다. “대중의 마음이 모이면 능히 성을 쌓을 수 있고 그들의 입이 보태지면 무쇠도 녹일 수 있다. (衆心成城 衆口鍊金)”고.
영화 〈극한직업〉에서 보았던 수원 왕갈비와 통닭 그리고 강릉의 초당순두부에는 그 유래가 있다. 정조가 화성을 축조할 당시 신도시 개발로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고 백성의 힘을 빌리자면 백성을 제대로 먹여야 했기에 농업용으로 금기시되던 소고기를 식용하도록 허용했다. 송아지를 분양해 주고 나중에 어미소가 낳은 송아지를 돌려받는 소위 ‘배내기’방식이 도입되기도 하고 점차 소시장이 번창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지명도를 얻은 것이다. 초당 순두부는 400여 년 전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바닷물 간수로 두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일본의 가고시마현 치란이란 곳에는 ‘특공평화공원’이란 곳이 있다. 거기 있는 회관에 관람객이 들어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 대부분이 눈시울을 붉히거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데 왜일까? 이곳은 1945년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자살특공대원들이 탄 전투기가 발진했던 곳으로, 수천명 꽃다운 청춘들이 ‘천황 폐하와 대일본 제국을 위해!’를 외친 뒤 오키나와 미군 함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끝이었다. 그들을 일본은‘가미카제’라고 한다.
13세기 패권국 몽고와 고려의 여·몽연합군은 대군단을 꾸려 1274년과 1279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정벌에 나섰다. 하지만 때마침 불어온 태풍으로 모두 실패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최초의 외침을 보기 좋게 물리친 결과가 되었다. 이것은 신의 뜻이요, ‘신의 바람’이라는 의미를 담아 가미카제(神風)라고 한다. 특공평화회관 안 벽에 천사가 죽은 병사를 안고 하늘로 오라가는 대형 그림이 걸려있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죽음을 미화한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회관 내부에는 4,000명이 넘는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의 명단과 그들의 유품과 유서, 심지어 출정을 앞두고 미소짓는 사진까지, 죽음의 자료들이 빼곡하다. 대원들 중에는 조선인도 있지만 숫자는 잘 모른다. 생떼 같은 목숨을 태평양 한가운데에다 수장시킨 일본 제국주의 만행을 보고 관람객들은 회한의 눈시울을 붉히는 것일까? 일일이 확인해 볼 수는 없지만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일까?’아니면 ‘만약에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 우리도 선배들처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겠다고 생각한 때문일까?’자못 궁금해진다.
민족의 대표민요 ‘아리랑’은 그 가사 수도 많지만 거기 깃든 사연도 다양하다. 최근에 채록된 기록에 의하면 1만 68수가 되고 ‘정선아리랑’가사만 해도 5천 수가 넘는다니 아마도 2만 수가 넘을지도 모르겠다. 1926년 나운규 선생이 감독·주연·주제가를 맡아서 서울 단성사에서 2년 6개월간 절찬 상영되었던 영화 「아리랑」은 〈경기 아리랑〉을 바탕으로 했다. 〈경기 아리랑〉은 정선·밀양·진도 아리랑보다 훨씬 늦게 나왔음에도 ‘아리랑’의 대표곡으로 애창되고 있고 해외에서도 지명도가 가장 높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와요.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쪽박이 신세가 웬 말이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대다수 아리랑이 그러하듯 〈경기 아리랑〉에도 애닲은 설화가 깃들어 있다. “경기도 어느 곳에 남자 노비 ‘리랑’과 여자 노비 ‘성부’가 살았다. 주인집 김판서가 고리대금 등으로 배를 불리고 있던 중 백성들의 원성을 사 결국 맞아 죽었다. 폭도들 역시 토벌군에 의해 잡혀가고 둘은 가까스로 도망쳐 의정부 수락산에 숨어들어 부부가 되었다. 어느 날 백성들이 다시 봉기하자 리랑은 ‘100일 후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봉기에 가담하러 떠났다. 혼자 남은 성부는 마을의 부자 백가의 집요한 구애에 위협을 느끼지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버티던 중 약속한 100일 되었다. 백가의 성화는 극에 달해 안방을 차지한 채 버티고 있고, 성부는 제사를 끝내고도 리랑이 돌아오지 않으면 청을 들겠다고 하고는 부엌에서 시간을 끌다가 야심한 시각이 되어 제상을 차려 방으로 들어간다. 밤중에 리랑이 돌아와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이 뒤집혀 백가를 죽였다. 그러나 차마 성부까지 죽일 수는 없어 ‘성부야 나는 간다.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고, 성부는 리랑의 이름을 부르며 뒤따라가 산속을 헤매다 죽었다. 성부가 리랑을 목놓아 부르던 이름이 메아리가 되어 ‘아〜리랑, 아〜리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도 동성애가 있었을까?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사례는 《삼국유사》기록으로 ‘신라 혜공왕은 여자처럼 행동하고 여자의 옷 입기를 즐겼는데 남자 몸을 빌려 태어난 왕인 만큼 나라에 불길하다 하여 죽였다’는 기록이고, 고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후 미소년을 끌어들여 변태적 관음증(觀淫症)*과 동성애에 탐닉했다.
*남의 알몸이나 성교하는 장면을 몰래 훔쳐봄으로써 성적 만족을 얻는 증세
홍명희 소설 『임꺽정』에도 머슴들 사이에 남색이 성행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조선왕실을 발칵 뒤집어 놓은 동성애 관련 사건은 세종의 며느리 세자빈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 세종의 큰아들 문종이 자신을 돌보지 않는 데 분개해 7년이나 궁녀들과 동성연애를 하다가 소현왕후에게 발각된 사건 말이다.
“소쌍이 답하기를 ‘빈궁께서 저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는 억지로 자리에 눕게 해 남자와 교합하는 모양으로 회롱했습니다’라고 했고, 봉씨는 ‘소쌍이 항상 단지를 사랑하고 좋아해서 밤마다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낮에도 서로 목을 껴안고 혀를 빨았습니다.’고 실토했다.”『세종실록』- 1436년 10월 26일
일제가 나라꽃 무궁화는 진딧물로 범벅인데다 병을 옮기는 흉한 꽃으로 비하해 말살정책을 펼쳤지만, 무궁화에 대한 예찬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깊다. 《시경》의 ‘유녀동차(有女同車)’라는 시에는 “같은 수레에 탄 여자 얼굴은 어여쁜 무궁화 / 가벼운 걸음걸이에 허리에 찬 패옥 달랑이네 / 강씨네 어여쁜 맏딸은 참으로 아리따워!”라고 했고, 당나라 시선 이태백은 “뜨락 꽃들이 아무리 고와도 연못가의 풀들이 아무리 예뻐도 무궁화의 아름다움을 따르지 못하네, 섬돌 옆 곱디고운 무궁화여!”라며 무궁화가 최고의 꽃임을 예찬했다.
무궁화의 학명은 히비스커스 시라야쿠스인데, 히비스(Hibis)는 이집트의 미의 여신 이름이고, 구약성서에도 ‘나는 사론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이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 ‘사론의 장미’는 무궁화를 지칭하는 것이다. 1910년 한일병탄에 항거해 자결한 매천 황현도 〈절명시〉에서 무궁화를 떠올리고 있고, 만해 한용운은 옥중에서 “달 속에 있는 계수나무를 베어내고 무궁화를 심겠다”고 해 조국의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나타냈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이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정한 배경은 무엇일까? 무궁화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3〜4세기에 쓰인 《산해경》에는 “군자의 나라 한반도에 훈화초(薰華草)가 있는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고 해 그 존재를 알렸고 진晉나라 최표는 여러 명물을 소개한 《고금주》에서 “군자의 나라에 근화가 많다”고 적었다. 신라와 고려의 외교문서 등에도 근화지향(槿花之鄕) 또는 근화향(槿花鄕)이라고 쓰였으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무궁화(無窮花)라고 불렀던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고 부른 애국가 가사가 처음 등장하면서 무궁화가 각인되고, 1928년에는 ‘각 민족마다 자신들을 대표하는 꽃이 있지만, 우리를 대표하는 무궁화 같이 형形으로나 질質로나 적합한 경우는 볼 수 없다’고 해서 무궁화가 나라꽃임을 알렸다. 마지막으로 무궁화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이 꽃은 나라에서 국화로 정한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나라꽃으로 정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20여 년 간 우리나라에서 살았던 영국인 신부 리차드 러트가 1965년에 쓴 《풍류한국》에서 이런 사실을 말해 준다.
“프랑스·영국·중국 등 세계의 모든 나라꽃이 그들의 황실이나 귀족의 상징에서 출발하여 전체 국민의 꽃으로 만들어졌으나, 무궁화만은 유일하게도 황실의 이화(李花-자두나무꽃)가 아닌 백성의 꽃이 국화로 정해진 경우이니 무궁화는 평민의 꽃이다. 이는 민주전통의 한 부분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한 《조선왕조실록》은 그 기록의 정확성, 완전성은 말할 것도 없으나 그것을 보존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가 그것을 말해 준다. 조선초기 실록을 보관한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충주·전주·성주 외사고 3곳이었다. 그러나 임란 중에 3곳이 소실되고 전주사고만 살아남았는데 이 전주본을 필사해서 주적 일본에서 멀리 떨어진 섬과 깊은 산속에 감추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병력을 배치하고, 인근 사찰의 승려로 승군을 조직해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1623년 ‘이괄의 난’때 춘추관 사고는 전소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나머지도 일부가 소실되거나 훼손되었다. 나중까지 남은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 사고 체제가 되지만 일제강점기 오대산 것은 일본도쿄대학으로 가져간 뒤 관동대지진으로 상당부분 유실되었고, 이어 한국전쟁으로 적상산본은 북한으로 반출되었으며, 현재는 정부 관할하에 서울대 규장각과 국가기록원, 고궁박물관 등에 분산 보관되고 있다. 제대로 보존된 것은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 민족의, 아니 세계 기록문화의 꽃이다. 거기에 담긴 6,400만 자에는 그만큼 많은 기쁨, 슬픔, 노여움과 서러움, 즐거움이 담겨있다.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흔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핏줄을 이은 오늘날 우리들 후예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록을 지웠느니 치웠느니 소동이 끊이지 않으니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세종대왕께서 설파하셨다.
“무릇 정치를 잘하려면 반드시 전 시대 치란(治亂)의 자취를 살펴야 한다. 또 그 자취를 보려면 역사의 기록을 바르게 상고해야 할 것이다.”
우리 남평문씨 시조는 ‘문다성’으로 고려 개국 벽상공신이다. 뜬끔 없이 들릴지 모르지만, 1100년 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공신당을 짓고 핵심 유공자 29명을 기리기 위해 초상화를 그려 봉안했는데 이들을 벽상공신이라고 한다. 이들 대부분이 각 성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이중 동주최씨 시조 최준웅은 고려 왕실과 혼인이 허용되고 7명의 정승을 배출하는 등 권문세족으로 자리 잡는다. 시조의 11대 손 최영은 우왕 때 국무총리 격인 문화시중이 되고 임금의 장인이 되어 조정을 좌지우지 한다. 우왕이 신임을 알리는 교지가 있다.
“충성을 다하고 의로움을 떨쳐 임금의 자리를 높이고 안심하게 하니 재상 중 참재상이로다. 경이 혹 죄를 짓고 이것이 아홉 번에 이른다 해도 벌하지 않을 것이요, 열 번에 이르러도 안 할 것이며 자손 또한 그러할 것이니 후대에 임금과 신하들도 내 뜻을 명심하고 전하도록 할지어다.”
최영은 고려말 왜구와 홍건적의 준동이 극심할 때 120여 차례 전투에서 승리한 명장으로 구국의 일념과 공평무사로 나라를 이끈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세워진 신정부는 ‘요동공격죄’라는 것을 씌워 처단했다. 73세였다. 궁벽하게 뒤집어 씌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개경의 백성이 애도했지만 조선조정에 의해 낙인찍힌 반역의 굴레는 오래 지속되었다. 이런 최영을 새롭게 조명한 이는 단재 신채호다. 대한제국 시절 국민의 애국심을 일깨우기 위해 을지문덕·최영·이순신을 민족의 3대 영웅으로 부각시켰고, 1927년 사학자 문일평은 ‘반역죄로 원사(冤死)한 최영장군’이란 글에서 이렇게 썼다.
“세상에 성패로서 인물을 평하지 못할 것은 최영과 태조에 의하야 더욱 그렇다. 성할수록 인격이 도리어 적어지기도 하고, 패할수록 인격이 오히려 커지기도 한다. 최영과 같은 이는 실패한 대인격자이다. 조선역사를 통하야 조선민족이 가진 가장 귀중한 국보의 하나다.”
신라의 마지막 왕은 경순왕이다. 물론 고려 조정이 붙여준 이름이다. 그런데 그의 무덤은 경주에 있지도, 개경에 있지도 못하고 경기도 연천에 있다. 왜일까? 알려진 대로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이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도륙하고 세운 허수아비 왕이다. 견훤의 폭압에 935년 급기야 천년사직을 왕건에게 바친다. 이에 왕건은 그를 사위로 삼고 경주를 통치하게 했다. 그리고 43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그가 죽자 개경에 있던 신라유민들과 경순왕의 신하들이 시신을 끌고 경주로 가기 위해 30리를 나왔다. 그러나 이때 고려조정은 ‘왕릉은 개경에서 100리를 벗어날 수 없다’며 막았다. 경주에 가면 자칫 지역민심이 동요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엥간한 사대부 무덤 정도로 무덤을 짓고, 오랜 세월 존재가 잊혔다가 770년 후, 조선 영조 때 재발견되어 묘비가 세워지는 등 지금의 모습이 됐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것에 대해 역사의 평가는 양분된다. 비겁한 행동이었고 개경으로 가 자신만 호의호식했다는 냉소적 평가와 당시 신라로서는 더이상 버텨봐야 백성만 곤경에 빠뜨릴 뿐이므로 불가피했다는 평가 말이다. 물론 《삼국사기》는 두둔하는 입장이다.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서 더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하지도 또 약하지도 않지만 무고한 백성의 간과 뇌가 땅에 떨어지게 하는 것만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내 시랑 김봉후로 하여금 편지를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도록 했다.”
경순왕과 연결되는 인물이 마의태자다. 《삼국사기》기록에 따르면 ‘왕자는 아버지가 항복의 뜻을 표하자 통곡하면서 하직인사를 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 짓고 삼베옷 걸친 채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고 적고 있어서 일제에 의해 조선은 그렇게 나약한 존재로 세뇌되기도 했지만, 1927년 육당 최남선이 금강산을 둘러보고 난 뒤에 쓴 〈금강예찬〉에는 이와 다르다.
“신라 태자의 유적이라는 것이 전설적 감응을 깊게는 하지만 역사적 진실과는 다르다. 세상만사를 다 끊고 깊은 산골에 들어온 태자라면 성이니 대궐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이는 다 부족국가였던 예국 때의 천제단이요, 그 성역의 표시에 다름 아니다. 결국 금강산에 있다는 마의태자 유적지는 후대에 조작된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근래 연구에서는 마의태자는 금강산에 들어가 통탄만 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던 이들과 ‘신라소국’을 세우고 상당기간 항려운동을 벌이다가 결국 북방으로 이동해 후손이 여진족을 통합해 금나라 기반을 세웠다는 것이다. ‘여진의 추장은 신라에서 온 사람이다’등 중국측 기록은 여럿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