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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22일 일요일 백두대간 50 회차 황장산 (귀네미 마을 ~ 댓재)
자유인 산악회
백두대간 50 회차 : 귀네미마을 – 큰재 – 황장산 – 댓재
댓재 하산 후 진부령으로 이동하여 인증사진을 찍고 다시 용대리로 가서 저녁식사와 대간 종주패 수여식을 갖는다. 이후 약 2시간 여흥시간을 가진 후 8시에 출발하였다.
산행거리 : 약 8 km 산행시간 : 약 3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836075
거리 8.6 km
소요 시간 3h 34m 33s
이동 시간 2h 39m 18s
휴식 시간 55m 15s
평균 속도 3.2 km/h
최고점 1,089 m
총 획득고도 197 m
난이도 쉬움
백두대간 (白頭大幹) 50 – 황장산
백두대간을 마치며
양산박
지리산에서 이어온
길고 긴 산줄기
오늘 여기 진부령에서 멈춘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길
바위처럼 우뚝 선 채
희뿌연 겨울 하늘을 본다
저 산 너머에는 향로봉
그 너머에는 금강산
그리고 줄기줄기 백두산까지
언제나 가 보려나
갈 수는 있는 걸까
저 너머 그 곳 북녘땅 산마루 길
진부령 자그마한 식당가
날씨 : 흐림, 미세먼지 나쁨, 기온 온화,
옷차림 : 세 겹 옷에 땀 배인다..
프로로그
백두대간 남한 구간을 종주하는 날이다. 2018년 3월 11일 일요일 전라남도 남원시 노치마을에서 시작하여 1년 10개월 동안 격주로 총 50회로 나누어 산길을 걸었다. 늙은 느티나무가 있고 옛날부터 동네 사람들이 물을 길어 마셨다는 노치샘이 솟는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그 마을 뒤에는 억센 잔디가 잘 가꿔진 넓은 마당 뒷편으로 수 백년은 됨직한 낙락장송 여러 그루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노치마을의 정자나무 ( 느티나무 )
마을 뒷산의 오래된 소나무
백두대간이 무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산은 물을 건너지 않으며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 (山自分水領)’이라는 어렴풋한 개념만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지리산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에는 어느 산으로 뻗는 거지? 설악산 진부령에서 끝을 맺는다는데 그 산줄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사전 공부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었다.
“여러분 걱정 마세요. 지가 요만큼도 안빼먹고 백두대간 전 구간을 다 걸을 수 있도록 안내하겄습니다” 이제까지 스무 번 이상 백두대간을 걸었다는 한 문희 총대장님이 산행을 시작할 때 버스에서 했던 말씀이다. ‘기왕 하려면 당연히 한 구간도 빼먹으면 안되지’ 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에 벌어질 여러가지 상황으로 인해 실제로 완벽하게 전 구간을 걷는 것이 녹록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그 때는 미처 몰랐었다.
지루한 산행이었다. 진달래 나무가 우거진 산길은 꽃이 피기 전에 걸었다. 늦서리가 내려 망가진 진달래꽃을 보며 우리는 참 운이 지지리도 없구나 하고 투덜거렸다. 발 밑에 노랑제비꽃이 만발해 있어도 바쁜 발길에 눈만 흘기며 지나가야 했다. 대간길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무덤가에 할미꽃이 핀 것을 보고 횡재라도 한 듯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렇게 계절이 일곱 번이나 바뀌었다.
봉화산 대간길 양지쪽 무덤위에 예쁘게 핀 할미꽃
처음으로 무박산행을 하던 날 빼재(秀領)를 출발하여 걸으면서 회의감도 들었다. 주변 경치는 모두 어둠속에 잠기고 보이는 건 헤드랜턴에 비친 잔 나무 줄기뿐이고 들리는 건 앞 뒷사람 몰아쉬는 숨소리뿐이었다. 발자국 소리에 놀란 새들이 잠에서 깨어 잠투정을 부리고 먼 곳에서 푸른 새벽이 밀려올 때야 비로소 무박산행의 참맛을 조금 알게 되었다.
빼재에서 덕유산 오르는 길 대봉에서 만난 새벽 - 멀리 덕유산 줄기가 보인다.
짙은 안개 속에서도 멋진 조망이 터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걸어도 끝까지 오리무중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백운산 구간에서도 진분홍 진달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에 위안을 받았다. 비가 오면 비옷을 입고 뜨거운 햇볕에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걸었다. 궂은 날씨는 걸음을 느리게 할 수는 있어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백운산 산행중 만난 진달래 - 안개로 인해 조망이 없으나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에 위안을 받았다.
꼭 한 번 2018년 여름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 때 심한 장대비가 장시간 퍼부으면서 국립공원 관리소에서 출입을 통제하였다. 로타리 대피소에서 비가 그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기다린 보람도 없이 계속 퍼붓는 빗줄기를 맞으며 하산해야 했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2019년 1월 1일 천왕봉에 올라 찬란한 일출을 보았다.
2018년 8월 26일 억수같이 쏱아붓는 비로 인해 지리산 천왕봉 산행을 접고 로타리 산장에서 발을 돌려야 했다.
그렇게 한 구간 두 구간 백두대간을 이어가면서 정말로 산줄기가 물을 가르는 분수령(分水嶺)인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중간중간 도로나 밭으로 끊어진 일부구간을 제외하고 정말 신기할 정도로 산줄기가 이어지는 것을 보았다. 일제시대 일본인 지질학자인 고토 분지로가 산맥(山脈)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산줄기 체계를 흐트려 놓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산 줄기는 산맥이 아니라 백두대간이 그 기본이라는 것을 알았다.
2019년 1월 1일 지리산 천왕봉에서 일출을 맞았다.
발길에 채이는 풀 한 포기 척박한 바위 위에 자라는 나무 한 그루도 정확하게 계절을 읽고 자신의 소명에 따라 꽃이 피고 지고 또 잎이 피었다가 떨어진다는 자연의 이치를 몸소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백두대간 숲길에서는 대자연 속 나무와 풀들이 끊임없이 경쟁하며 햇볕을 차지하기 위해 생존경쟁의 치열한 싸움을 이어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걷는 우리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저 꽃이나 나무와 마찬가지로 이 아름다운 세상에 한 번 초대되어 짧은 순간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숲속의 소리없는 전쟁 - 미역줄나무 줄기가 낙엽송을 타고 올라가 마침내 나무를 쓰러트린다.
백두대간을 경계로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의 현장도 긴 세월속에 하나의 전설로 녹아 솔가지 스치는 바람으로 남는다는 교훈도 얻었다. 그러고 보니 백두대간 산행에서 얻은 것이 참 많은 것 같다. 저 멀리 삼한 시대부터 백제 신라 고구려가 땅 넓히기 게임을 하던 삼국시대를 지나 동학 농민운동 그리고 최근의 한국전쟁까지 수 없이 많은 전쟁을 지켜보면서도 산은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으면서 철천지 원수들이 어떻게 화해하고 다시 가까운 동무가 되어 가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싸움터였던 아막산성
이제 지리산에서 시작하여 금강산 진부령에서 멈춘 한반도 남쪽 지역의 백두대간 긴 산줄기 산행을 오늘로써 마치게 된다. 마치 퍼즐을 끼워 맞추듯 위로 아래로 남쪽으로 또는 북쪽으로 뛰어다니던 발걸음이 오늘 삼척시 귀네미마을에서 댓재까지의 짧은 구간을 끝으로 그림이 완성된다.
산행기
마지막이라는 말의 위력이 큰가보다. 한 동안 삼분지 이정도 차던 버스가 모처럼 만원이다. 아니 더 올 사람이 있는데도 인원이 다 차서 조기마감하였다. 짧지 않은 기간동안 함께 했던 대원들의 얼굴에는 성취감과 함께 작은 허무함이 엿보인다. 큰 일을 이루었다는 기분 한 편으로 벌써 다 한건가 하는 허전함이 깃들어 있다.
거의 두 달만에 다시 찾은 귀네미 마을은 스산하다. 10월 말 버스 옆에서 라면을 끓여먹던 마을 어귀에 버스가 정차하고 각자 산행 채비를 갖춘다.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짙게 끼어 눈이라도 날릴 태세다. 정말 눈이라도 펑펑 쏱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올 겨울은 겨울답지 않다고 이구동성 볼멘소리를 한다.
그 동안 산길을 인솔했던 한 문희 총대장님은 짧은 산행구간임에도 불구하고 바쁜 일정을 차질없이 진행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내비친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불러 모아 준비해온 플래카드를 펼치고 인증사진을 찍는다.
불굴의 정신으로 이 시대를 이겨낸 영웅들
자유인 22기 백두대간 종주를 축하합니다.
어쩌면 저렇게 날짜도 딱 맞을까. 22기라서 22일날 졸업식을 하게 되었으니.
2019년 12월 22일 귀네미 마을에서 마지막 구간 산행을 시작한다.
지난 번 잡초로 푸르던 채소밭이 황톳빛으로 누렇게 변했다. 굵은 자갈이 뒤덮인 채소밭을 가로질러 지난 번 끝맺었던 파란 물통이 서 있는 지점에서 대간길을 잇는다. 오늘 산행 거리는 8 키로 남짓 큰 오르내림도 없는 쉬운 코스라 한다. 하지만 누구도 만만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다. 이제까지 경험으로 비춰보더라도 쉽다고 생각했다가 마지막에 고생한 적이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다. 산을 걸을 때는 늘 겸손한 마음으로 신중해야 하는 법이다.
귀네미 마을은 변신중이다. 산등성에는 하얀 풍차가 세워지고 헐벗었던 산비탈에는 푸른 분비나무가 자라고 있다. 임도 끝에는 이미 풀 한 포기 없이 파헤져진 1089봉이 전장의 폐허처럼 펼쳐져 있다. 그 뒤쪽에는 커다란 물탱크를 돌을 쌓아 가려놓았다. 나무가 없으니 조망은 시원하게 펼져진다. 지난 구간 걸었던 덕항산과 지각산 산줄기가 짙은 미세먼지 속에도 제법 선명하게 보인다. 귀네미마을은 지도상에 군립공원이라 표시되어 있다. 아마도 삼척시에서 이처럼 파헤쳐진 대간길 주변에 나무를 심어 복원사업을 추진하는 모양이다. 풍력발전으로 생겨난 소득을 농민들에게 보상해주고 마을 전체를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한다면 앞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올 수 있겠다는 소소한 생각을 해본다.
고랭지 채소밭에 분비나무를 심어 가꾼다. 10년 후에 다시 이곳에 오면 완전히 다른 모습의 마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큰재 (980 m)
길가에는 지난 가을 화려하게 피었던 각시취 마른 꽃이 즐비하게 도열해 있다. 개화기에는 주변 조망과 함께 아름다운 산행이 될 것 같다. 임도 출입을 막는 차단막을 지나자 그늘 길에 눈이 제법 쌓여 있다. 2주 전쯤에 내린 눈이 녹았다 얼기를 반복하며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다.
완만하게 펼쳐진 임도와 헤어져 조금 진행하자 큰재다. 주변은 일본잎갈나무 (낙엽송)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다. 산길은 완만하고 또 거리가 짧으니 마음의 여유도 생겨난다. 느린 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걷는다. 오른쪽은 경사가 급한 낭떨어지이며 왼쪽은 완만하다. 가끔 큰 소나무가 나 있지만 대체적으로 신갈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큰재를 지나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 햇볕 드는 길 가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물탱크가 있는 1060 봉
1060봉에서 바라본 덕항산과 지각산 그리고 발 아래 귀네미 마을 고랭지 채소밭
대간길 음지에는 2주 전쯤에 내린 눈이 아직 남아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큰재에서 별동대
준경묘 갈림길
양지에는 눈이 다 녹았고 음지에는 아직 발에 밟힐 만큼 눈이 남아 있다. 이정표에 ‘준경묘’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삼척시쪽으로 갈라져 4.8 km 내려가면 준경묘가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 성계의 5 대조 할아버지 즉 이 안사의 아버지 무덤이라고 한다. 이안사는 전주 이씨로 전주에서 벼슬을 하다가 권력에서 밀려나 그를 따르는 1,000 여명의 가솔을 거느리고 이 곳 삼척으로 옮겨왔다가 다시 함경도 영흥으로 이사하여 원나라의 관직을 받았다. 이후 명이 일어서고 원이 약화되면서 고려 공민왕의 국토회복 운동에 동참하였다. 그에 대한 공로로 이안사는 고려에 다시 편입되었으며 이후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는데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목조 이안사가 아직 삼척에 머물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 이양무가 세상을 떠나자 산소자리를 찾아 주변 산을 뒤지며 다니다가 어느 소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주변이 조용한데 갑자가 늙은 도사가 어린 행자를 데리고 나타나서 서로 얘기를 주고받는데, 이 자리가 천하의 명당자리라서 이 곳에 묘를 쓰면 5대에 이르러 왕이 나올 것이라 했다. 묘를 쓰려면 개토(開土)제를 지낼 때 소를 백 마리 (百牛) 잡고 황금으로 관을 짜서 (金棺) 예를 드려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이런 건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된다고 행자에게 다짐을 받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점심에는 라면이 최고다.
준경묘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의 묘이다.
소나무 아래에서 누운 채 이런 비밀을 알게 된 이안사는 집으로 돌아가 궁리를 해 보았다. 누추한 살림에 어디서 소를 백 마리나 구할 것이며 또 관을 만들만큼 많은 황금을 어찌 마련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 그는 퍼뜩 떠오르는 기묘한 생각에 무릎을 쳤다. 마침 처가에 흰 색이 있는 얼룩소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그 소를 몰래 끌고 도사가 점지해준 명당자리를 찾아가 소를 잡아 제사를 올렸다. 백우(百牛) 대신 발음이 똑 같은 백우(白牛)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황금 관 대신 똑같이 노란 빛이 나는 귀리짚으로 관을 만들어 아버지 시신을 안치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이양무의 5대손인 이성계가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묘가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의 무덤이라는 소문은 일찍부터 있었으나 제대로 검증을 할 수 없어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고종(1899년)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경준묘라는 묘호를 받고 정식으로 왕릉으로 인정받았다 한다.
황장산(黃腸山 1059 m)
준경묘 갈림길에서 작은 오르내림이 이어지고 여전히 양지에는 이른 봄날씨처럼 햇볕이 내려앉고 음지에는 잔설이 남아 있다. 오른쪽은 가파른 낭떨어지로 안전로프가 쳐져 있다. 신갈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가끔 우람한 소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다.
이 산이 황장산이라서 저렇게 큰 금강소나무가 자라는 거지요.
산길에서 가끔 마주치는 큰 금강소나무
하지만 이제까지 지나온 백두대간길에서 보았던 여느 코스에 비해 이 곳 소나무가 특별히 많다거나 크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황장산은 황장봉산(黃腸封山)을 줄여서 부르는 지명이다. 궁궐을 짓는 등 조정에서 필요한 산림자원을 공급하기 위해 산지기를 두고 철저하게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던 산이었다. 당연한 결과로 이러한 황장산에는 큰 소나무가 많아야 하는데 얼핏 보기에는 오히려 그 이름 값을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
저 아래 준경묘 부근에는 우람한 금강송 숲이 펼쳐져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황장봉산은 그 곳을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얼마전 남대문이 불에 타서 복원할 때에도 이 준경묘 근처에서 자라는 금강송을 사용했다고 한다.
오후 1시 50분 백두대간 졸업하는 마지막 날 마지막 산봉우리가 쉽게 그리고 갑자기 우리앞에 다가섰다. 여느때와 같이 뒤에서 걷는다. 우리 뒤에는 더덕을 캐느라 뒤쳐진 회장님과 함께 오는 몇몇 우정산행팀이고 나머지는 황장산을 다녀서 내려가고 있었다.
황장산 정상에서 선두팀
그리고 별동대
23기에서 졸업축하한다고 동행해준 금가 님이 몇몇분과 남아서 우리 회원들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새삼 마지막이라는 개념이 조금은 진지하게 와 닿는다. 이 봉우리만 내려가면 더 이상 대간길에서 오르지 않은 산이 없다. 제대로 된 정상석도 없는 황장산 정상에서 별동대 단체 사진을 찍고 또 개인별로 인증사진을 남긴다.
모든 사람들 인증사진을 찍어주는 금가 님.
댓재 (810 m)
바쁜 행사일정으로 늦어도 오후 2시에는 하산해야 한다는 한문희 총대장님의 당부말씀에도 산행속도는 좀처럼 빨라지지 않는다. 평상시 습관화된 산행패턴은 갑자기 바꿔지지 않는다. 황장산에서 댓재까지는 고작 600 미터 내리막 길이니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다. 눈이 쌓인 급한 경사를 조심조심 내딛는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는 병장 말년의 마음가짐으로 걷는다.
내리막 길에서 나무 사이로 지난 여름에 올랐던 두타산 청옥산이 보인다. 가랑비를 맞으면서 안개속에 걸었던 산이다. 이제 낮게 자란 조릿대 숲을 2시 15분에 날머리인 댓재에 도착했다. 대나무 모양을 딴 글자체로 갈겨쓴 듯 댓재 백두대간 기념비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는 또 서둘러 버스에 오른다.
이 황장산을 다녀간 산악회가 어디 이 뿐이랴 - 자유인 백두대간 정맥 지맥전문 사관학교라 쓴 시그널도 보인다.
나무 사이로 두타산과 청옥산이 보인다.
날머리인 댓재가 가까와지면서 조릿대가 더욱 많이 자라고 있다.
댓재는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산 146-1번지다. 풍수지리적으로 이 곳은 늙지도 않고(未老) 기운차게 살 수 있는(活耆) 곳이라 한다. 꼬부랑 내리막길을 버스로 내려오며 마치 미로처럼 길이 얽혀 있어서 미로면인가보다고 농담을 주고받는다.
삼척(三陟 석 삼 오를 척)은 신라에 편입되기 전 실직(悉直 모두 실 곧을 직)이라고 불렀다. 이는 삼척 시로 흘러드는 세 개의 직곡(오십천, 진천북천, 마읍천)을 이르는 말이라 한다.
댓재 백두대간 기념비 앞에서 단체 인증을 남긴다.
다시 찾은 진부령
버스는 삼척에서 동해고속도로를 따라 강릉, 양양 그리고 속초를 지난다. 울산바위 너머로 장엄하게 떨어지는 저녁 노을을 차창으로 바라보며 미시령 터널을 지나 2시간 걸려서 진부령에 닿았다. 진부령은 백두대간의 남측 구간의 끝이다. 북쪽으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백두대간 끝으로서의 상징성을 갖고 있는 장소다. 우리는 진부령 백두대간 기념비 앞에서 또 인증사진을 찍고 서둘러 식당으로 이동한다. 모든 일정이 바쁘게 진행된다.
짧은 겨울 해가 다 넘어가고 진부령에도 어둠과 함께 찬 바람이 불어온다. 또 올 수 있을까? 언젠가 향로봉에 오를 일이 있을까?
백두대간은 사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한 여성회원님들
봉평 막국수집에서 해단식을 갖다
오후 5시 어둑해진 진부령을 떠나 10분 거리인 인제 봉평막국수집으로 이동한다. 한방닭백숙 요리가 테이블에 세팅되어 있고 대간종주 기념공연을 위해 별도 차량으로 온 한명우 회원님이 공연준비를 하고 있다. 벽쪽으로 한같지게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돼지 머리가 한 가운데 자리하고 채소 몇 접시와 알밤, 대추 그리고 곶감이 각 한 접시씩 놓여 있다.
무사히 산행을 마치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산신령님이 좋아하는 음식만 차려 놓았다.
엄격한 식순에 따라 국기에 맹세하고 순국선열과 산행 사고로 숨진 영령들을 위해 기도하고 대간 종주자들에게 증서를 수여한다. 22기는 개근자6명에 종주자 19명으로 총 25명이 증서를 받았다. 개근자라 함은 전 구간을 빠지지 않고 참석한 회원들이고 종주자라 함은 전체 50회 중에서 8번 이상 빠지지 않고 참석한 회원들이다. 처음에 약 40 여명이 함께 시작하여 약 반 정도가 종주를 마쳤으니 대단한 사람들이다. 약 2년 동안 격주로 주말 산행을 하다 보면 집안 경조사나 회사 일 등으로 부득이 빠져야 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인데 그런 희생을 감내하면서 종주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체력이나 의지가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불굴의 정신으로 이겨낸 이 시대의 영웅
마지막으로 우리가 무사하게 대간산행을 마칠 수 있게 된 공을 산신령님에게 돌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를 올린다. 총대장님이 먼저 절하고 이어서 대장들이 절하고 그 뒤를 이어 각자 절을 하면서 이제까지의 무사함과 앞으로의 안녕을 기원한다.
하늘비 사진작가님의 깜짝 선물을 받고 감격해 하는 박 영묵 회원님.
공식 행사를 마치고 한 문희 총대장님이 자유인 22기 백두대간 종주팀의 해단을 선언한다. 이로써 대간팀은 해산되고 뜻있는 회원들이 모여 ‘드림22’ 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이어가기로 했다. 8시까지 한 시간 넘게 이어진 음주가무를 마치고 귀경길에 올랐다.
끝나도 끝이 아니다. 버스 안에서 백두대간 종주에 대한 소회가 이어진다. 모두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앞으로도 산행을 계속할 것이다. 정맥을 타든 100대 명산을 찾아 다니든 각자 취향에 맞는 산행을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어디를 가든 오며 가며 옷깃을 스친 인연을 이어갈 것이다. 푸른 산 골짜기 높은 암릉이나 들꽃 만발한 산길을 걸으며 2년간 함께 걸었던 추억을 떠 올릴 것이다. 혹여 산길을 걷다가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며 먼 산줄기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보이거든 우리 함께 걸었던 사람들을 기억하리라.
산에서 우연히 만나 나에게 백두대간을 소개해준 민기님이 졸산을 축하한다며 곷다발을 선사한다. 아직도 코끝에 향기가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