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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다
최근(2018) 장편소설 ‘도깨비와 춤을’(위즈덤하우스)을 발표한 한승원 소설가(1939년생, 팔순)는 죽음을 어떻게 극복하고 승화시킬 것인가 노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를 이야기한다. 이 소설 ‘도깨비와 춤을’은 시간의 불가항력적 흐름에 따라 죽음과 더욱 가까워진 인간이 결국에는 순응하더라도 그 순간까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아름답게 버티기 위해 분투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설 속 자신(장흥의 한승원)의 사회적 분신인 ‘남해의 한승원’은 장흥의 한승원이 발표한 소설, 시, 에세이, 칼럼 등을 모조리 섭렵하고, 특히 본인도 외우지 못하는 시를 외워 줄줄이 낭송하면서 그 삶의 패턴을 거울처럼 모방한다. 외모와 옷차림과 버릇은 물론 도깨비와 계약 동거를 하는 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집에 살면서 그 집을 ‘해산토굴’이라 명명한 점, 집 앞에 삼층 석탑을 세우고 가묘로 삼아 죽음을 가까이 둔 점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은꼴이다. 소설의 주인공에게 도깨비는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고 적막강산을 느끼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홀리듯 이끌어 주는 존재다. 도깨비는 자존심의 한 표상이요, 고독을 이겨내게 해 주는 반항적인 그림자였다. 그것은 그의 정체성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도씨는 주인공을 본떠서 행색이 같지만, 그의 눈에만 보일뿐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존재이다. 물론 목소리도 하얗게 바래고 체취도 없으니 다른 사람은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끔 혼자 말을 중얼거리면 주변의 사람들이 볼멘소리도 한다. 그의 도깨비는 엉뚱한 제안도 했다. 도깨비 나라의 은행에 그의 영혼을 저당하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대출 해다가 토굴에서 바라보이는 바다의 모든 것(바다 너머 육지, 떠오르는 달과 해, 흐르는 구름, 밤하늘의 초롱초롱한 별들, 바다에 끼는 안개, 초혼된 넋처럼 내리는 하얀 눈송이들, 물새들, 검은 대기 두루미, 해오라기, 먹황새, 도요새, 물떼새, 갈대밭에 둥지를 틀고 사는 개개비, 앞산 뒷산에 사는 꿩, 밤에 우는 부엉이.... )을 다 사가지고 주인 노릇을 하며 살다가 죽은 다음에는 도깨비 나라로 그의 영혼을 수습해 간다는 것이며, 이제부터 어떤 것에도 한 눈 팔지 말고 이 토굴 안에서 읽지 못한 책을 읽어내고, 시 쓰는 일에 팍 미치겠다는 조건이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으레 도깨비는 말한다. ‘너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다.’
한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 내건 미끼로 독자에게 하나의 미래 기억을 제시한다. 사람은 과거 기억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고 현재 기억과 미래 기억을 함께 가지고 산다는 것이다. 미래 기억이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성예언(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마음속에서 실제라고 결정해 버리면 결국 그 결과에 있어서 그 상황이 실제가 된다는 주장)이다. 한 작가의 어머님은 “너는 무엇을 하든지 장차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셨다. 그의 미래 기억은 이십 대 초반 양계와 당근 재배의 실패, 중등교사 시험 낙방, 응모한 소설 낙선, 첫사랑의 배신, 군대에서의 모진 기합 등 새까만 어둠으로 장막이 되었는데 어머님의 예언에 따라 그가 빛 속으로 걸어 나가게 되었다. 고초가 닥칠 때마다 그의 도깨비는 말했다. ‘너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다.’
팔순 맞은 한 작가는 소설을 수정하고 가필하는 작업을 오래 하는 동안 구레나룻과 턱수염, 콧수염이 부스스하게 길었다. 희끗희끗한 수염이 추해 보여 아내는 불평하기도 했다. 그를 찾은 남해의 한승원에게 그가 만든 석탑 앞 상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늙은이가 자기 죽어 묻힐 곳이나 화장하여 재로 뿌려질 자리를 미리 마련해 놓고 산다는 것은 현재 살아 있음의 상태에서 죽음을 살고 싶다(죽음의 초월)는 것입니다.” 노인은 건조하게 살다가 막판에 고려장이 되듯 어두운 곳에 유폐됐다가 폐기처분돼야 하고, 다만 죽음을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존재여야 하는가? 한 작가는 건강하게 오래 살되 미완의 삶을 늘그막까지 부단히 완성해내려고 분투하고 그것의 드높은 보편적 가치와 영원성을 획득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 한 작가는 말한다. “제 목표는 소설을 쓰는 한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글을 쓴다는 말을 실천하는 것이에요. 작가적인 생명, 생물학적인 생명은 두 개의 수레바퀴입니다. 자식들이 다 예술의 길을 가고 있는데, 그들에게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름답게 산 삶이 꽃이듯이 자신이 돌아갈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돌아가는 아름다운 죽음도 꽃입니다. 좌우간, 어떤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버티다가 자기 돌아갈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돌아가는 순응의 죽음도 아름다운 꽃일 터입니다.”
팔순인 그에게 또다시 도깨비는 말한다. ‘너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다.’
(2019.3.15.)
도서출판 위즈덤하우스의 서평 ‘도깨비’는 두 한승원에게 “광기의 화신”으로, 광기는 곧 “생명력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장흥의 한승원에게는 “자존심, 저항 의식, 보호 본능, 정체성”을, 아내가 먼저 죽어 절망과 고독 속에 홀로 남은 남해의 한승원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을 일깨우면서 그들의 노화한 혈관에서 열일곱 소년의 뜨거운 피를 각성시킨다. ‘바다’는 “모든 것을 평화롭게 품어서 수많은 해산물로써 육지에 사는 것들을 치유하고 양생하는 화엄의 바다”로, 두 한승원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치유하고 안식하게 해주는 “구원의 원초적 시공” 혹은 “우주적인 자궁”이다. 바다에서 태어난 두 한승원은 그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날마다 해산海山/解産하며” “자유자재의 걸림 없는 산인散人”으로서의 삶을 꿈꾼다. 두 한승원에게 아내는 바다 같은 존재이자 탄생과 죽음을 관장하는 “곡신谷神”으로, 모성성과 여성성을 통해 그들을 거듭나게 해준다.’
한승원 자신의 고향인 장흥, 바다를 배경으로 서민들의 애환과 생명력, 한(恨)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작가.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교사 생활을 하며 작품 활동을 병행하다가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목선」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 뒤 소설가와 시인으로 수많은 작품을 펴내며 한국 문학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했다.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불교문학상, 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 김동리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 한국 문단에 큰 궤적을 남겼다.
한승원 소설집 『앞산도 첩첩하고』 『안개바다』 『미망하는 새』 『폐촌』 『포구의 달』 『내 고향 남쪽바다』 『새터말 사람들』 『해변의 길손』 『희망 사진관』, 장편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 『해일』 『동학제』 『아버지를 위하여』 『까마』 『시인의 잠』 『우리들의 돌탑』 『연꽃바다』 『해산 가는 길』 『꿈』 『사랑』 『화사』 『멍텅구리배』 『초의』 『흑산도 하늘길』 『추사』 『다산』 『원효』 『보리 닷 되』 『피플 붓다』 『항항포포』 『겨울잠, 봄꿈』 『사랑아, 피를 토하라』 『사람의 맨발』, 『달개비꽃 엄마』, 산문집 『허무의 바다에 외로운 등불 하나』 『키 작은 인간의 마을에서』 『푸른 산 흰 구름』 『이 세상을 다녀가는 것 가운데 바람 아닌 것이 있으랴』 『바닷가 학교』 『차 한 잔의 깨달음』 『강은 이야기하며 흐른다』,
한승원 시집 『열애일기』 『사랑은 늘 혼자 깨어있게 하고』 『달 긷는 집』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이별 연습하는 시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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