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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본 임진왜란』 – 김시덕
이 책은 지난 7월에 읽은 「일본인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는 책으로 생각된다. 「일본인 이야기」보다는 일찍 출간되었고 출판사도 다르지만 저자가 김시덕으로 같은 데다 내용도, 또 비슷한 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어서 그런 생각이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었지만 여기서 ‘그들’이라고 한 것은 일본만을 말하지 않고 전쟁에 참여한 명나라와 기타 외국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싶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대부분 그렇겠지만 일본과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 생각만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 그들이 숨기고 있는 것은 없는지? 있다면 그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싶다. 출판사인 〈학고재〉는 “일본인들이 한국인에게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라고 책을 소개하고 있지만, 아마도 책을 다 읽은 뒤에도 의문점들을 모두 알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미리 해 본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에 실려 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한국 독자들에게 당혹감과 거부감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인들이 3백 년 이상 이야기해 왔음은 물론, 일본의 스펙트럼을 통해 동북아시아 역사를 이해해온 서구 학자들이 지닌 임진왜란에 대한 이미지다. 나는 우리 독자들이 임진왜란(임란)에 대해 한국의 관점 말고도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이 전쟁으로부터 다각적으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고자 한다.”고 했다.
임란에 대한 기록들은 우리에게도 이순신의 『난중일기』등이 있듯이 일본에는 어쩌면 우리보다 더 많은 기록이 있을지도 모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라는 책은 임진왜란이 끝남과 동시에 새로운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비서이자 어용학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기록한(156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다. 이 책은 하야시 가문의 권위를 등에 업고 에도시대 내내 널리 읽힌 책으로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동기에 대해 상세히 적고 있다.
임란 동기에 대해 크게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첫 번째 늘그막에 얻은 외동아들 스테마루의 요절이 가져온 슬픔을 잊기 위해, 두 번째는 스스로 명나라의 황제가 되기 위해, 세 번째는 명나라를 침략하는데 선봉에 서달라는 자신의 요구를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요토미의 충실한 주구(走狗)로 임란 당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자로 우리도 잘 아는 장수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다. 이 둘의 행적과 야사들은 상당히 많으며, 이 둘은 조선에 출정하기 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다. 둘은 북규슈에 새로 건설한 나고야성에서 이키섬과 쓰시마섬을 거쳐 부산포에 상륙했다. 육군 9군 및 수군, 나고야성 주둔군 등 모두 16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제1군은 고니시가, 제2군은 가토가 맡았는데, 둘에게 하루씩 번갈아 가며 선봉을 맡도록 히데요시가 지시했다 한다.
고니시는 약장수 출신으로 전투력보다는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되었고, 가토는 전형적인 무사 가문 출신으로 둘은 성장 과정만큼 성정이 서로 달랐다. 누가 먼저 조선으로 건너가 한양에 입성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이 표면화되고 이런 문제는 7년 전쟁 동안은 물론 마침내 1600년에 있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는 서군인 이시다 미쓰나리*편에, 가토는 동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게 되면서 둘 사이 갈등은 극에 달했다. 단 하루 동안 치르진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가 승리함으로써 패자가 되어 에도막부를 세우는 발판을 마련했고 고니시는 죽임을 당했다.
*이시다 미쓰나리 : 6살 때부터 히데요시의 수하로 출중한 재능으로 중용되어 가신 중에 으뜸으로 쳤다. 임란 때는 미시타 나가모리, 오타니 요시쓰구와 함께 일본군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고니시, 심유경 등과 협의해 화의를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도쿠가와, 기요마사 등 강경파와의 대립이 심해져 영지인 사와야마(佐和山)성으로 피신했다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해 처형당했다.
우리는 보통 동래성 전투에 대해 송상현 공의 전사와 양민들의 참전, 양민학살 등 만을 기억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일본측 기록을 보면 맥없이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조선에서는 일본 대군이 쳐들어올 것을 미리 듣고 알았기 때문에 이웅(李雄), 맹명백(孟明伯)을 대장으로 용맹한 병사 2만이 부산포성을 지키고 있었다.(중략) 첫 번째 전투에서 패 한데다가 일본군이 구름처럼 쳐들어왔기 때문에 막지 못하고 부산성에 틀어박혔다.(중략) 성안의 병사들이 서쪽문을 향해 도망치려는 것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7천 명이 달려가 종횡무진으로 공략하니 총병 이웅은 말에 채찍을 가해 웅천을 향해 도망쳤다. 부총병 맹명백은 “국가가 사졸을 기르는 것은 이날을 위해서다. 자신의 몸으로써 나라를 지키는 자가 어찌 어려움을 보고 도망치려 하느냐”며 사졸들을 격려하며 버티고 서서 싸웠다. 고니시의 부하인 갓카와 산타유(吉川三太夫)가 달려가 말 위에서 그를 붙잡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맹명백은 천하장사여서 산타유를 잡아 누르고 목을 베고 일어나던 차에 고니시 요시치로(小西与七郞)가 달려들어 맹명백의 목을 베었다. -「조선정벌기」
동래성의 병사가 2만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전과를 과시하기 위해 병사 수를 과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과 달리 조선은 유사시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도 성안에 들어갈 수 있고 또 관아에서 민간인의 지원을 요청하여 성에 들었던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헤아린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쪽으로 진군하여 그곳의 반란세력인 국경인(鞠景仁)으로부터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건네받고 의기양양해 있을 때 길주에서 가혹한 수탈에 반발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았다. 사실 이것은 정문부(鄭文孚)가 이끄는 의병군이 공격한 것으로 함경도 경성(鏡城)은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이 이끄는 반란군이 지배하고 있었고 이곳을 의병군이 탈환했고 길주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경성을 공격했지만 의병군은 길주 동쪽 장덕산(長德山)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면서 길주를 포위 공격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가토 기요마사 고려진 비망록』(기요마사를 따른 참모가 쓴 기록)에는 “오랑캐들이 맹렬히 길주성을 포위 공격했다”고 기록해 길주성을 공격한 것이 조선 의병이 아니라 오랑캐라고 했는데 여기서 오랑캐는 거란족을 말하는 것이다. 거란족은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하자 ‘순망치한’을 느끼고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 했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기요마사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길주로 진격하게 되는데 진격 과정에 ‘병사들이 흰 눈에 반사된 햇빛 때문에 손발에 화상을 입고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길주로의 진격은 결코 만만히 않았던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기요마사군은 북청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여기서 길주성을 탈출한 부대와 기요마사 본진이 합류하게 된다. 이에 기요마사는 탈출한 부하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주먹밥을 건네자 병사들이 감격했다고 한다.
기요마사는 큰 가마솥을 여러 개 준비해 밥을 짓게 하고는 이를 모두 자기에게 가져오게 했고 직접 주먹밥을 건네며 ‘오마노조 왔는가, 세이베이 왔는가 고생했네’라며 3천 명 병사들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먹밥을 건넸다고 한다. 그러자 3천의 군사와 기요마사가 데려간 1만의 병사들은 “기요마사님이 여기까지 친히 우리를 맞으러 오시다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주군께 목숨을 바치는 것은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라며 모두 기요마사의 인정에 감탄하고 또 탈 없이 재회한 것을 기뻐해 흘린 눈물이 갑옷 소매를 적셨다고 한다.『기요마사 고려진 비망록』
흔히 임란 원인에 대하여 ‘일본이 명을 치르갈테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고 하였으나 조선이 듣지 않자 침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임란은 동북아 여러 나라가 관여한 전쟁으로 멀리 태국까지도 이 전쟁에 참전하려 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섬라(暹羅)라고 불린 ‘태국이 조선을 구원하려 하자 명은 도리어 중국 서쪽에 위치한 섬라가 명을 침략해 올 가능성을 우려 해’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다.
또 북송시대 양산박에서 활동한 호걸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시내암(施耐庵)의 『수호전』과 후편인 진침(陳忱)의 『수호후전』에도 임란을 암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양산박 잔류자들이 이준을 대장군으로 섬라로 건너가 양산박을 재건한다. 섬라를 지배한 양산박의 잔류자들은 일본국 관백의 침략군을 물리치고 고려국과 연합한다는 내용인데 ‘섬라국 간신 공도와 요승 살두타가 일으킨 반란이 실패하자 실두타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관백에게 섬라 구원을 청탁하게 되고, 일본 관백의 군대와 양산박 일행간 전투가 벌어져 양산박 측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에 금나라의 침입을 받은 송나라를 섬라의 양산박이 구원해 주었는데 송나라 국왕은 섬라의 양산박과 고려가 연합해서 일본을 막아줄 것을 부탁했고 고려(조선)왕의 성씨가 이씨이고 섬라를 다스리던 이준도 이씨로 둘은 의형제를 맺기까지 했다’는 그런 내용이다.
임란 초 조선의 지원요청을 받은 명은 조승훈과 사유를 대장으로 구원군을 보냈으나 이들은 1592년 7월 평양성 탈환을 위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고니시군에게 패했다(1차 평양전투). 패배에 충격을 받은 명은 일본과의 화의교섭에 나서는 한편 이여송을 대장으로 대군을 조선에 보낸다. 이때 임란 최대의 문제적 인물 심유경이 등장한다.
심유경은 원래 소인배고 무뢰한으로서 수도 북경을 떠돌다가 의협심이 강한 기녀 진담여(陳澹如)와 밀통했다. 진담여에게는 정사(鄭四)라는 남자 하인이 있었는데 그는 일본인에게 붙잡혀 일본에서 몇 해를 살다 도망쳐 왔기에 일본에 대해 잘 알았다. 심유경은 조선 난리에 공을 세울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어느날 정사에게서 일본 사정을 얻어듣고는 오로지 자신만이 일본을 잘 안다는 듯이 떠벌리고 다녔다. 이때 명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조선 관련 일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우선 일본 사정을 잘 아는 자를 찾고 있었다.
석성의 첩인 문표무(文表茂)가 어느 날 전담여를 만나러 갔다가 거기서심유경을 만났고 심유경의 강개함을 보고는 석성에게 심유경을 추천했다. 석성이 심유경을 만나본 뒤에 ‘큰사람을 얻었다’며 크게 기뻐했다. 『조선정벌기』
이여송이 이끈 명 지원군과 조선군은 연합해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을 위한 ‘2차 평양성전투’를 치른다. 이 전투에 대해 일본측은 “고니시는 20만 적군에 포위되어 새장 속의 새와 같았다. 처음에는 1만 5천 명이던 병사 가운데 일부는 전사하고 일부는 도망쳐서 남은 자는 5천에 못 미쳤다.”『조선정벌기』고 기록하고, 후퇴한 일본군은 한양에 집결해 있었고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서 온 이여송 군대는 1월 말 벽제관(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서 다시 일전을 벌인다. 이때의 전투를 일본은 ‘천하를 가른 전투로 일본인이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자랑한다.
그러면서 이 벽제관 전투를 ‘고려와의 승패를 판가름한 전투, 일본과 고려가 자웅을 가른 전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렇듯 일본은 벽제관 전투와 1597년 울산전투, 1598년 사천전투를 「임란 3대첩」으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1차 진주성전투·한산대첩·행주대첩」을 3대첩으로 보고 있어 차이가 있다. 일본이 벽제관 전투를 얼마만큼 자랑으로 생각했는지 식민지 시대 간행된 조선여행 책자에 한반도 지도와 벽제관 전투 유적지를 표시해 놓고 관광객을 유인하기도 했다.
가십(gossip)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은 어떤 인물일까? 그는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조선의 명산에 쇠말뚝을 박고, 처음 만난 류성룡에게 다짜고짜 손을 내밀어 류성룡이 뇌물을 달라는 것인가 하고 잠시 고민하다 조선지도를 내주자 흐뭇이 웃었다는 이야기 등 내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소설 등을 통해 알려지고 임란전쟁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그는 조선에서 중국에 귀화한 요동총병 이성량(李成樑)의 아들로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였고 이해 말 강화가 진행되면서 명으로 돌아갔다. 이여송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은 『임진록』등 조선후기 필사본 소설과 구비전승에도 찾아볼 수 있는데 기록·전승에는 조선을 무시하다 류성룡·이항복·이덕형 등의 지혜에 굴복했다는 내용이 그려졌다.
이 책 128페이지에는 고향 창녕에 관한 이야기라 더욱 관심이 가는 ‘방문’(榜文-알림 문서) 사진 하나가 있다. ‘영산방문’이라고 한 이것은 정유재란 당시 창녕군 영산면 지역에 내걸었던 일본군의 방문으로 “조선의 관리와 그 가족을 샅샅이 찾아내어 죽이고 그 집을 불 지르게 하며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오지 않는 백성들도 모두 죽이도록 하라는 등”내용을 담고 있다. (1597년 29.9×62㎝, 나고야성박물관 소장) 치가 떨리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명은 일시 주춤했으나 명군의 수는 점점 불어난 데 비해 일본군은 제때 충원되지 못해 점차 수세에 몰렸다. 또 조선 백성이 명군을 믿고 따랐으나 왜군에게는 복종하지 않았다. 왜군은 급기야 본국에 증원군을 요청했고 도요토미는 2만 명을 증원했다. 그러나 명군과는 숫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양성을 점령한 직후만 하더라도 히데요시는 금방 한반도로 건너올 기세였으나, 전황이 불리하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수행이 부족해서 이런 작은 나라에 태어난 바람에 군대가 부족한 것이 원통할 뿐이다. 여러 대장들은 잘 들어라. 이 히데요시가 공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더라도 히데쓰구*를 대장으로 삼아 조선과 명나라로 쳐들어간다면, 나의 혼백 또한 구름을 타고 철 방패를 들고 중국 병사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릴 것이다. 『에혼 다이코기』
*도요토미 히데쓰구(1568∼1595) : 히데요시의 조카로 1591년 히데요시의 첫아들이 죽자 양자가 되어 관백직을 물려받고 내정을 담당했다. 1593년 히데요시 측실 오도기미(淀君)가 아들 히데요리(秀賴수뇌)를 낳은 뒤에는 갈등을 겪다 할복을 명받고, 가족과 가신 모두 처형당해 한데 묻혔다. 이 무덤을 일본은 ‘짐승무덤’이라 한다.
결국 한양 철수를 허가한 히데요시는 한반도 남해안에 거점을 마련하게 하고는 1592년 10월에 있었던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1593년 6월 21일부터 진주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1,2차 진주성 전투’따로 붙임)
임진년에 이어서 정유년에도 일본이 두 번씩이나 조선을 침략한 것은 조선이 원인을 제공했으므로 그 책임이 조선에 있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그렇게 보기 때문이라 보다는 명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어서 그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모른다. 명 문헌에 ‘문란하고 무능한 조선의 정치와 조선국왕 선조의 음란함, 류성룡·이덕형 등 간신들의 발호로 조선이 일본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구해준 것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한다. 이것은 명이 조선을 구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일본과의 강화교섭에서도 철저하게 조선은 배제되었다. 후에 『징비록』등 조선 문헌이 일본에 유입되면서 조선군의 저항과 이순신의 재발견이라는 인식이 전파되었지만 명과 일본은 조선의 무력함 때문이란 담론의 틀을 바꾸지는 않았다.
17세기에 쓰진 일본의 「에혼 다이코기」라는 기록에는 부산에 도착한 가토 기요마사가 발표하였다는 ‘포고문’이 실려 있다. “일본국 가토는 다이코 전하의 명을 받아 지금 다시 조선에 왔다. 조선인은 이 포고문의 내용을 의심하지 말고 두려워 도망치지 말라”고 하고, 이 포고문을 본 조선인들은 “도깨비 장군은 인의가 있으니 도망칠 필요 없겠다”며 모두 안도했다고 적고 있다. 가토가 인정을 베풀어서 조선인들이 감동했다는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데 가토는 조선인들에게 가장 잔인한 일본 장군으로 회자되었음에도 이런 허구적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비단 여기뿐 아니라 임란 관련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이 「에혼 다이코기」에는 거북선과 이순신의 최후에 대해서도 실려 있어서 흥미를 끈다. “이순신은 일찍이 일본군을 막기 위해 귀갑선을 만들었다. 그 제조법은 두껍게 이어붙인 판자로 배의 사면과 상하를 둘러 붙이는 것이니 그 형상이 거북 껍질과 같다.(ⵈⵈ) 일본군은 예상과 다른 적의 기세에 놀라 잠시 주저했다. 와카사카 야스하루는 뱃전에 올라‘적이 탄 배는 우리 일본의 장님배와 동일한 구조다. 무슨 별다른 것이 있겠는가. 올라타서 공훈을 세워라!’고 외쳤다.(ⵈⵈ) 이순신은 분전하여 배 위에 서서 수군을 지휘하던 차에 일본군이 쏜 탄환이 왼쪽 어깨에 박혀 그 피가 팔꿈치까지 흘렀다. 이순신은 이에 개념치 않고 칼로 살을 찢어 탄환을 뽑았는데 칼이 살을 뚫고 약 9㎝나 들어갔다. 이순신은 아파하는 기색도 없이 담소를 나누는 것이 평소와 같았다. 이리하여 하루종일 전투를 하니 일본군은 마침내 패하여 부산의 거제로 배를 돌렸다. 이후 ‘조선인도 얕볼 수 없다’면서 그 후로는 서로 진영을 지키며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17세기 후기에 간행된 일본의 임란 관련 서적들은 『징비록』등 조선 서적과 『양조평양록』등 명측 문헌들이 유입되면서 임란관련 서적들의 수정이 이루어진다. 즉 이전까지는 노량해전의 중심인물은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이고, 이순신은 조선이통제(朝鮮李統制)라 불린 엑스트라 정도로 취급되었으나, 이후에는 조선통제이순신(朝鮮統制李舜臣, 1545~1598)으로 바뀌고 “지금 싸움이 급하니 너희들은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고 한 장렬한 죽음과 “나는 순신이 살아서 나의 위기를 구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이러한 용사를 잃었는가”라며 탄식한 전린의 조사를 소개하는 등 이순신의 영웅다움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임란 관련해서 교훈이랄까, 돌아봐야 할 역사 하나를 짚어보고자 한다. 일본 오키나와는 당초 류큐(琉球)국으로 조선처럼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나라로 세종 때 조선과 교류하기도 했다. 동아시아 중간에 위치해 나름의 문화를 꽃피우던 왕국이었지만 지금은 일본 속국도 아닌, 일본에 흡수된 나라다.
임란이 끝나고 10여 년이 지난 1609년 규슈 사쓰마 시마즈 가문이 독립국가인 류큐 왕국을 정복한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에도막부 창설 초기에 일어난 이 정복은 역사적으로 임란과도 관련성은 물론 많은 점에서 닮아있다. 조선의 무례를 응징하고 명나라 황제가 되기 위해 전쟁을 선언한 히데요시는 류큐에도 서한을 보내 항복을 종용한다. 류큐왕국은 복종을 시사하면서도 명나라에 사절을 보내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알린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에도시대 역사소설 〈에혼 류큐군기(繪本琉球軍記)〉에는 류큐 정복을 정당화하고 있다.
“류큐는 조선의 속국이었지만, 조선이 무지하고 약하며 최근 들어 무도해 짐에 따라 더 이상 조선에 따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류큐는 사쓰마에 매년 상선을 보내 교역함으로써 자국의 부족함을 메우고 있다 하니 우리 두 나라 간의 우의는 두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정이 그러한데 이제까지 단 한 번의 사신도 우리에게 파견하지 않는 것은 혹시 자립하려는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류큐는 작은 나라면서 감히 자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일본과 매년 교역을 하면서도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으니 이는 하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류큐 정복은 시마즈 가문의 사적인 군사행동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대신해 쇼군의 명령을 받아 정당하게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한다. 여기서 조선 속국 운운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또 홍길동이 류큐 국의 전체나 일부를 건설하고 정복했다는 식의 한국 사회 일각의 담론 또한 문헌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다.
류큐 열도에서 발견되는 한반도 계열 여러 고고학적 유물은 두 지역의 문화적 천연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정치적 지배의 중거물로 해석될 여지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무시하고 본다면 소설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내용임에는 틀림이 없다.
역사학에서는 사료에 근거해 임란 사실을 추구하고 있지만, 일본인들이 쓰고 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임란 관련 소설이나 이야기는 사료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도외시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 일본’의 기치를 내건 현대 일본 사회에서는 임란이라는 침략전쟁을 담은 이야기에 대해 검열 또는 무의식적 편견이 작용했다. 그 결과 임란이 진행되던 당시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3백여 년간 인류에게 회자 되어 온 이야기는 적어도 일본사회 표면에서는 사라졌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결코 소멸되지 않고 일본의 우익과 전국시대 역사에서 발작처럼 뷸쑥 불쑥 되살아나곤 한다.
이것은 일본인 자신들도 잊었거나 똑바로 쳐다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일본의 또 다른 일면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인의 눈으로 근세 일본인들이 향유한 임란 이야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임란이 오늘날에 이르는 일본사회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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