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 시절의 대중음악을 이야기할 때 금지곡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담론이다. 지금도 각 방송국마다 방송금지곡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절의 금지곡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로 숫자가 엄청났고 금지 사유도 황당무계했다.
금지문화를 거론할 때 서장을 장식하는 이름은 김민기다. 그가 작사 작곡했지만 양희은의 목소리로 더 잘 알려진 '늙은 군인의 노래'는 수많은 금지곡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불후의 명곡이다. 방송이나 검열기관이 아닌 국방부장관에 의해 금지된 최초의 대중가요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노래가 수록된 양희은 음반은 대중가요 사상 가장 많은 6가지 이상의 버전이 혼재하는 독특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은 당대의 금지문화와 상업적 환경이 합심해 빚어낸 그 시절 우리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이 음반의 재킷은 흰 바탕에 음각으로 새겨진 양희은의 빨간색 이름도장이 정중앙에 찍힌 예술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1979년 음반번호 'SLK-1041'을 달고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된 총 9곡이 수록된 초반의 뒷면에는 무대에서 노래하는 양희은의 전신 컬러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수량이 적어 매우 희귀한 음반이다. 하지만 뒷면의 사진이 양희은의 상반신 흑백사진으로 교체되어 곧바로 재발매되었다. 여기까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후 수없이 발매된 재발매 음반들은 수록곡은 물론이고 심지어 음반 번호와 발매한 음반사까지 다른 해프닝의 연속이다.
도대체 이 음반에는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모든 사건은 1면 4번째 트랙 '늙은 군인의 노래'로부터 야기되었다. 일단 노래의 탄생부터 살펴보자.
70년대의 전설적 포크가수인 김민기는 1974년 10월 카투사로 입대해 AFKN방송국에 배치받아 나름 편안한 군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1975년 유신 찬반 국민투표 날, 투표 반대 집회에서 그가 만든 노래들이 시위대에 의해 대거 불려질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요주의인물로 낙인찍혔다.
느닷없이 보안부대로 잡혀간 그는 독방 영창생활 후 최전방 보병 제12사단으로 재배치되었다. 그곳에서 만든 노래가 바로 '늙은 군인의 노래'다. 퇴역을 앞둔 늙은 선임상사가 김민기에게 막걸리 두 말을 내놓으며 '자신의 30년 군인인생을 노래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던 것. 1976년 겨울에 만들어진 노병의 애환과 설움을 담은 이 노래는 곧 병영에서 병영으로 구전되어 졸병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1977년 군을 제대한 김민기는 이미 대학가의 유명인사로 둔갑해 있었다. 그 결과, 공식 활동이 불가능해 자신의 이름으로는 그 어떤 노래도 발표할 수 없자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만든 곡 '상록수'와 '늙은 군인의 노래', '식구생각', '밤뱃놀이' 등을 서울대 미대 친구 김아영와 양희은, 한규정 등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당시 '늙은 군인의 노래'는 김민기가 아닌 양희은 작사, 김아영 작곡으로 발표되었다. 사실 이 음반은 무려 8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양희은을 위해 김민기가 졸업 기념으로 만들어준 음반이었다. 1979년 1월에 발표된 이 음반에 수록된 '늙은 군인의 노래'는 전국의 병영으로 퍼져나가는 놀라운 파급력을 발휘했다. '병영에서 괴상한 노래가 돌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국방부장관은 '군기해이', '사기저하'를 이유로 전군에 노래 금지령을 내렸고 문공부 장관에 연락해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국방부 장관 지정 금지곡 1호를 탄생시켰다.
이미 만만치 않은 제작비를 들인 음반을 전량 폐기하기가 부담스러웠던 음반사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금지곡 '늙은 군인의 노래'를 김지하 곡 '금관의 예수'로 교체했던 것. 김지하 또한 부담스러운 이름이었기에 이 노래도 양희은 작사, 작곡으로 표기하고 찬송가인 양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제목을 수정해 음반을 긴급 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4번 트랙에 흰 종이를 붙여 가리는 임시방편을 잠시 썼고 재고가 소진되자 수정된 재킷을 다시 인쇄했다. 이후 이 음반은 금지를 넘어 상업논리까지 개입되며 동일음반에 무려 6가지 이상의 변형버전이 양산되는 초유의 결과를 빚어냈다.
김민기 '늙은 군인의 노래' 1979년 서라벌레코드 下
뒷면에 양희은이 노래하는 사진 수록된 초기 버전이 가장 희귀
1980년 이후 대표적 운동가요로 탈바꿈
<군인>을 투사, 노동자로 바꿔 부르며 뒷면에 양희은이 노래하는 사진 수록된 초기 버전이 가장 희귀
대중가요 사상 유례가 없는 동일음반(늙은 군인의 노래)의 6개가 넘는 버전은 금지로 얼룩진 군사정권 시대가 빚어낸 촌극이다. 이로 인해 김민기라는 이름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금지의 대명사로 각인되며 널리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금지곡이 됐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더욱 큰 파급력을 발휘해 시위현장에서 널리 불려졌다. 찬송가인 양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제목이 변경되어 재발매한 음반에, 양희은 작사 작곡으로 수록된 김지하 작시 '금관의 예수'는 일본 조총련계 단체에서 타이틀로 삼아 음반을 발표했을 정도로 국내외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에 김민기, 김지하는 대표적인 한국의 반체제 인사로 각인되었다.
'늙은 군인의 노래'가 1980년 이후 집회현장에서 군인이 투사, 노동자, 농민, 교사 등으로 바뀌어 불려지면서 대표적인 운동가요가 된 건 시대적 비극의 결과물이었다.
전 편에서 이 음반의 3가지 버전에 대해 언급했다. 서로 다른 3가지 버전이 세상에 나온 시간은 단 3개월이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작사인 서라벌레코드는 발매연도를 초반보다 20일 앞선 1979년 1월 5일로 명기한 새로운 디자인의 음반라벨을 제작했다. 4번째 버전이다. 하지만 이전의 'SLK-1041'의 음반번호는 'SBK-0010'으로 변경되었다. 곧바로 발매연도를 초반과 같게 수정하고 음반라벨 디자인과 음반번호를 또다시 'K-8023'으로 변경한 5번째 버전이 뒤를 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마지막, 그러니까 6번째 버전은 제작사가 서라벌에서 킹레코드로 바뀐 음반이다. 이는 음반사의 상업적 이유였고 제작사의 변경으로 음반 번호는 또다시 'KR-0102'로 교체되는 기막힌 결과를 초래했다.
자신이 소장한 음반이 도대체 몇 번째 버전인지는 앞서 설명한 내용을 잘 따져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모든 버전의 앨범재킷은 동일하지만, 가장 희귀한 버전은 가장 먼저 나온 양희은이 노래하는 전신 칼라사진이 뒷면에 수록된 초반이다.
양희은의 이 앨범은 금지의 멍에를 쓰며 무려 6번 이상 재발매를 거듭했을 정도로 시대적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저주받은 걸작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엄청난 숫자가 팔려나간 히트앨범이란 사실은 진정 아이러니하다. 진정한 명곡은 아무리 금지시키고 죽여도 스스로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가진다는 속설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늙은 군인의 노래'의 주인공은 푸른 옷(군복)을 입고 청춘을 다 보낸 퇴역을 앞둔, 김민기가 복무한 부대의 늙은 군인이었다. 주인공은 군인으로 보낸 꽃다운 청춘을 자랑스럽다고 말하지만, 노래의 전체 분위기는 지나온 세월에 대한 허망함과 자조적인 정서가 짙게 배어있다. 아마도 이 노래에 금지의 철퇴가 내려진 이유일 것이다.
가사에서 늙은 군인은 자식들에게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며 물으며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라고 답한다. 자문자답은 흔히 고백의 다른 표현형식이다. 그런 점에서 늙은 군인이 하고 싶은 말은, 호강하며 살기보다는 나라를 위해 군인으로서 젊음을 다 바쳤지만, 그 결과는 허망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논리를 비약해 보면 군인으로 조국에 몸 바쳤지만 통일이 아닌 분단을 고착시킨 결과를 가져왔음이 아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늙은 군인은 분단이 아닌 통일의 꿈을 노래했지만 그 마음은 당국에 의해 왜곡되는 결과를 빚어냈다. 이 지점에서 군사정권 시절 분단국가에서 평생 직업군인으로 산다는 것은 꽤나 불행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늙은 군인 혼자만의 불행이었겠는가. 지금까지도 대치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한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 전체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푸른 옷은 그 불행과 서러움의 상징이다. 가버린 청춘의 푸름은 분명 누구에게나 되돌릴 수 없는 서러움이다. 하지만 역사의 푸름은 언젠가는 올 것이기에 이 노래는 자조와 동시에 희망의 메시지를 설파한 명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