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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금년 경희대 경제과를 나온, 나의 집회원이자 본지 독자인 P군이 찾아와서 대학 졸업 인사를 하는데, 4년 동안 고학생활 가운데 몇 번이고 공부를 포기하려 했으나 결국 믿음으로 이를 극복하고 졸업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전문 학문 면으로 생애의 코스를 잡으려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더욱 신앙이 절실히 요구되므로, 공부도 공부지만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을 과거와 같이 게을리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피력했다. 그리고 내가 수년 전 군에게 권고한 아담 스미스의 ꡔ국부론ꡕ을 원문으로 여러 번 읽었다고 하며, 최근 군이 번역한 독일 학자 슘페터의 논문 번역본을 두고 갔다.
신앙이나 종교라고 하면 이를 출세나 미국 유학의 길로 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적 치병(治病)이나 떠드는 우리 사회에서 군이 이렇게 신앙을 인생에 대한, 더욱이 고난에 대한 힘으로 체험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지식 계급이 신앙을 미신이나 아편처럼 취급하는 풍토에서, 군이 이를 학문의 추진과 완성을 위해 절대불가결한 것으로 깨달은 것은 더욱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 자신 신앙에 들어온 후 청진기가 더욱 또렷하게 잘 들리게 되었다고 한 일본의 어느 의학도를 알고 있다. 일본의 저명한 사상가요 종교인인 우치무라(內村鑑三)는 유일신 종교 신앙과 과학 문명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했다. 과연 동양 불교나 유교에 과학은 없다. 서양 문명에서 과학 또는 학문은 기독교 신앙과 깊이 관계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감사요, 이의 법칙성과 진리성의 구명이고, 이를 통한 인류에의 신의(神意)의 전달이자 봉사였다. 뉴턴․패러데이․파스칼․제너․에디슨․막스 플랑크 등 모두가 뜨거운 믿음과 진리애로 학문 연구에 종사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오늘날 무신론 국가인 소련에는 왜 그런 굉장한 과학문명이 있느냐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소련의 깊은 의미의 정신적 토대는, 무신론이 아니라, 표트르 대제에 의해 기독교적인 서구 문명에 접하면서 차츰 야만성과 미신성을 벗어난 데 있다고 본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기독교적인 것임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이를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금후 인류사의 결정적인 문제는, 앞으로 과학문명은 전쟁이나 파괴가 아니라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과학자의 도덕성과 깊이 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인데, 이점에서 더욱 종교 신앙이 요청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원래가 도덕과 인격의 정화를 통해, 학문과 진리의 탐구, 인류문제 전반에 대해 기여하는 것을 그 본령으로 삼는다.
<성서연구> 제96호 (1962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