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믿음과 신뢰와 사랑과 순종을 전부로 한다. 신앙 플러스 무엇이 있을 수 없다. 신앙으로 전부이지, 신앙 외에 무엇이 필요치 않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생명과, 선(善) 자체이신 우리 아버지 되시는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께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우상 신앙은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일을, 물질을, 행위를 요구한다. 이는 그 우상 자신이 산 하나님과 같이 모든 좋은 것을 사람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며, 사람 자신이 이를 위해 애쓰고 노력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니, 신뢰와 믿음만으로 하나님 앞에 가는 길을 차단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만 쳐다보려는 믿음에서 눈을 팔아 자기 선행을, 사업을, 물질을 쳐다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상 신앙은 우리를 생명과 사랑과 은혜와 선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이간시켜 죄악과 죽음과 파멸의 인간적 세상에 얽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불신과 반역에, 인간적인 자기만족과 교만에 떨어뜨려 우리를 죽음과 파멸로 이끌어간다.
그러면 믿음에는 절대 일이 없는가? 사업이 없는가? 이점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 자신을 믿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이라고 했다(요한 6: 29). 그렇다, 하나님이 예수를 세우시사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게 하셨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일인 것이다(고린도전서 1: 30). 그러므로 베드로와 같이 예수를 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구세주로 믿는 것이 기독교의 일이다(마태 16:6).
바울 선생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의롭게 됨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일’이다(로마 3: 23-24). 루터와 같이 행위가 아니고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다고 믿는 것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전부이다(로마 3: 28).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믿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일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의의 출처인 하나님과 이의 통로인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쳐다보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 신자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나타나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간다고 했다. 이는 믿음에서 시작, 믿음을 통과, 믿음으로 완성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점은 구약의 본질도 마찬가지이다. 예언자 미가는 “내가 무엇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년 된 송아지를 갖고 그 앞에 나아갈까. 하나님께서 천천(千千)의 수양이나 만만(萬萬)의 강수(江水)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위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오직 공의(公義)를 따르고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냐.”라고 했다(6: 6-8).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믿음으로 하는 사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