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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불확실한 시대에 불분명한 문제들과 싸우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삶일지 모른다. 더 이상 얄팍한 처세나 임기웅변으로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철학을 배워서 얻는 가장 큰 소득은‘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깊게 통찰하고 해석하는데 필요한 열쇠를 얻을 수 있다면 하는 것이다.’지적 전투력을 극대화하는 철학적 사고야말로 어쩌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무기가 아닐까?
저자 야마구치 슈(山口周)는 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 최대의 광고회사 덴쓰(電通) 등에서 인재육성, 리더십 분야 전문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현장에서 철학적 사고로 문제를 해결해온 경험을 살려, 미국·일본 등 유수의 비즈니스 스쿨에서 지적인 생산기술과 전략을 가르쳤고, 현재 히토쓰바시 대학의 경영관리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그들은 어떻게 지적 성과를 내는가》,《세계의 리더들은 왜 직감을 단련하는가》,《읽는대로 일이 된다》등이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반복해 온 비극을 우리는 또다시 되풀이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지불 한 비싼 수업료의 값어치를 살려 높은 수준의 지성을 발휘해 이른바 새로운 유형의 인류로 살아갈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과거의 비극을 토대로 얻은 교훈을 얼마만큼 배워서 활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19세기 이후 의학·심리학·뇌과학 등에 그 역할이 넘어가기 전까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누구보다 깊고 날카롭게 고찰한 이들이 바로 철학자들이다. 그들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방약무인(傍若無人)으로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이웃을 보면 ‘왜 이 사람은 이렇게 행동할까?’하고 고민했다. 몸소 문제에 부딪쳐 본 철학자들이 남긴 고찰이 우리에게 유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남긴 생각은 우리가 사람에 관련된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깊은 통찰력을 선사한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즐겁게, 가장 나다운 인생을 살면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에 반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개중에는 ‘아니 나는 행복하지 않아도 좋아 대신 역사에 내 이름을 남기고 싶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 사람도 행복의 정의가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것이니까 결국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적이 ‘즐겁게 나다운 인생을 살면서 행복해지는 데 있다.’라고 한다면 지식이나 기술을 몸에 익히는 일의 의미도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즐겁게 살 수 있는가?’또는‘행복해질 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1부‘무기가 되는 철학’2부‘지적 전투력을 극대화하는 50가지 철학·사상’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앞에서 옮긴 것은 1부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것을 보면 책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겠다 싶다. 저자는 지금까지 철학서는 어렵고 무거워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고 진단하면서 그것은 철학에 접근하는 방법의 문제라고 했다. 예로 인터넷에서 ‘철학 입문’이라고 검색하면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무려 만 권 이상의 책들이 쏟아진다고 한다. 이것은 철학을 대표할 만한 입문서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책들이 유사도서로 결정적인 요소를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저자는 진단했다.
그러면서 저자는 철학이 ‘지적 무기’가 되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쓸모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철학책이든 ‘이 사상만은 꼭 실어야 해’라고 생각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하고, 대표적인 철학자가 데카르트, 칸트, 헤겔이라고 했다. 책은 철학사상 핵심개념을 다루지만 찰학사의 학문적인 중요성은 반영하지 않았다고 했다. 철학과 근대 사상에 익숙한 이들은 칸트, 스피노자, 키르케고르가 빠져 있는 철학 입문서는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러한 비판도 고려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나의 생업인 조직과 인재에 관한 컨설팅과 실생활에서의 문제 해결을 위한 효용성을 토대’로 책을 썼다고 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 중에는 아마 나름대로 철학에 흥미를 느껴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다가 도중에 좌절하거나 포기했던 경험을 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왜 철학에 좌절하는가, 왜 철학은 따분한가 그 이유를 알지 않고는 결국 똑같은 좌절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참 맞는 말인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What)’‘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How)’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는 전형적인 What의 물음에 몰두한 철학자였고, 초인(超人)의 개념을 통해 문제를 풀고자 했던 니체는 전형적인 How의 물음에 주력한 철학자다. 철학자들이 몰두해 온 두 가지 물음 중에서 What의 물음에 대한 대부분의 대답은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질문이 잘못되었거나, 옳을지라도 진부하다. 고대 철학자들이 What의 물음에 대해 내놓은 해답은 자연 과학에 의해 현재는 거의 모두 부정되고 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모든 사물은 불, 물, 흙, 공기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원소라는 존재를 알고 있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잘못된 주장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리스 철학에서 배울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기 전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시대에 아낙시만드로스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당시에는 ‘물이 대지를 받치고 있다’는 생각이 정론이었지만 아낙시만드로스는 이에 의문을 품고 대지가 물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면 그 물을 지지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고, 또 그 물을 지지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 무엇을 지탱하는 또 다른 무언가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듭한 결과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무언가를 지지하는 무언가를 상정하면 무한히 계속되고 끝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지구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지지되고 있지 않으며 허공에 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의 결론은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해서 진부한 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그런 논점을 세워 끈기 있게 규명해 나간 태도만은 우리에게 매우 큰 시사점을 던져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정통 철학 교과서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아웃풋(철학자가 논고의 마지막 부분에서 최종적으로 제안한 해답이나 주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언급할 뿐 나머지는 생략하는 것이 보통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전문가들끼리만 통할 뿐 보통 사람들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것이 초심자로 하여금 철학을 향했던 관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게 하는 요인이 된 것이다.
“이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느닷없이 아웃풋만 알고 싶다거나, 가르쳐주고 싶다는 욕구를 억누르고 오히려 아웃풋을 주장하는 데까지 다다른 사고 과정 혹은 문제에 마주한 태도 등을 이야기식으로 간략히 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저자는 이 책에서 지적 전투력을 극대화한 50가지 철학·사상의 사고 과정과 태도를 간접으로 체험하게 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면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에다 50가지 철학·사상을 모두 옮기거나 소개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몇 가지만을 정리해 독후감으로 삼을까 한다.
영국의 심리학자‘존 볼비(John Bowlby, 1907~1990)’는 ‘유아가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데는 심리적인 안전기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아가 보호자에게 보이는 친근감과 애정, 보호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감정을 애착(attachment)이라고 명명했다.’애착 관계를 맺은 보호자가 아이의 심리적인 안전기지가 되고 이 안전기지가 있기에 아이는 미지의 세계를 마음껏 탐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큰 실패를 해서 낙인찍히면 더 이상 다니던 회사에서 출세할 수 없다는 사고가 지배적인 일본보다 이직과 창업이 활발하고, 혹시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하면 된다는 사고가 지배적인 미국이 안전기지가 더 강고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창조성을 발휘하고 리스크를 무릅쓰고 나아가는 데는 당근도, 채찍도 효과가 없다는 말이다. 다만 자유로운 도전이 허용되는 풍토가 필요할 뿐이다. 자유로운 도전이 허용되는 풍토 속에서 사람이 주저 없이 리스크를 무릅쓰게 되는 것은 당근을 위해서도, 채찍이 두려워서도 아니다는 말이다. 그저 단순히 자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 68쪽 「성과급으로 혁신을 유도할 수 있을까」에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진정한 의미에서 바꾸고 싶다면 설득보다는 이해, 이해보다는 공감이 필요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종종 직장을 옮긴 후에 고전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논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하면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수사학修辭學』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을 설득해 행동을 바꾸게 하기 위해서는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제자로 소크라테스·플라톤과 함께 대표적인 고대철학자로 꼽힌다. 저서들은 형이상학, 윤리학, 논리학은 물론 정치학, 우주론, 천체학, 자연학(물리학), 기상학, 박물지학, 생물학, 사학·연극·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로고스(logos)’는 논리를 뜻하는 말로 논리만으로 사람을 설득하기는 어렵다고 하지만, 논리적이지 않은, 말도 안 되는 기획으로 사람을 설득하기는 더욱 어렵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싶다면 주장이 이치에 맞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논리만으로 사람들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논리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토론에서는 상대를 꺾어 이기면 좋겠지만 실제로 사회에서 이같이 행동하면 꺾인 상대는 겉으로만 따르는 척할 뿐 속으로는 반발심을 품게 되고 전력을 다해 돕지는 않게 된다. 결코 논리만으로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이다.
두 번째 ‘에토스(ethos)’는 윤리를 뜻하는 것으로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이라 해도 말을 하는 화자가 도덕성을 의심받는다면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투입하고 싶어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했다. 마지막의 ‘파토스(pathos)’는 패션, 즉 열정을 말한다. 신념을 갖고 열성을 드러내면서 말해야 비로소 상대가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판, 즉 말로 사람을 움직인다는 사고방식에 강력히 반대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뻘인 ‘테스형’즉 소크라테스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주장한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소크라테스는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을 통해 밝혔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파이드로스』에서 말이 리더십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철저하게 고찰했다.
파이드로스는 플라톤과 같이 소크라테스한테서 수학한 제자로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가 벌이는 가공의 토론을 통해 리더에게 요구되는 ‘말의 힘’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시한 레토릭(rhetoric), 즉 변론에 대치되는 것이 대화(dialogue)인데,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서만 리더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파이드로스』에는 리더에게 레토릭이 필요하다는 파이드로스의 주장을 소크라테스가 비판하면서 ‘진실에 이르는 길은 대화밖에 없다’고 설득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교묘한 말솜씨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나쁜 길로 홀리게 하는 것이라며 레토릭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토론은 결국 파이드로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밀리는 형국으로 끝나지만 중요한 것은 플라톤 역시 레토릭이 ‘사람을 매료시켜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공자가 말한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한 조직의 리더라면 당연히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이끌어 가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면 레토릭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이것을 이용할 것인가? 옳고 그름의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레토릭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에 관해서도 알아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의미에서 스승인 플라톤에게 도전장을 내민 사람이다. 위험하다고 경고한 레토릭에 관해 능숙하게 세 권에 걸친 방법론을 써 내려간 것을 보면 세 사람 다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73쪽, 「사람은 논리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에서
“분업이 표준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각조차 못 한 채 거대한 악행에 가담하고 있기가 쉽다. 수많은 기업에서 행하고 있는 은폐와 위장은 바로 분업에 의해 가능했다. 이러한 행위를 막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체계에 속해 있는지, 자신이 하고 있는 눈앞의 일들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짚어 보고 공간적 혹은 시간적으로 큰 테두리 안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후에 무언가 개혁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용기를 내어 ‘이건 이상하지 않은가? 잘못된 게 아닌가!’라고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 122쪽, 「개인의 양심은 아무 힘이 없다. - 권위에의 복종」에서
‘마키아벨리즘’은 마키아벨리*가 군주로서 갖춰야 할 행동과 사고를 표현한 용어이고, 『군주론』은 그런 마키아벨리의 저서다. 들어보기는 했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뛰어난 리더의 조건」을 통해 알아본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정치 사상가이자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이었던 마키아벨리는 ‘정치는 종교나 도덕과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는 현실주의 정치이론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1494년 피렌체 공화국은 주변 여러 강국으로부터 침략을 받고 있었는데 프랑스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한 것을 시작으로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같은 외국 군대의 침략을 받아 전쟁이 빈번했다. 외교관이던 마키아벨리는 10년 이상 이들 국가들과 접촉해 피렌체 공화국을 지키려고 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탈리아에서 압도적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피렌체 입장에서는 가장 위험한 적이었다. 도덕적이고 인간적이던 피렌체 지도자들이 용기와 지성과 능력, 특히 결과를 위해, 비정한 수단도 불사하는 자세를 배우길 원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집필했다.
『군주론』은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 메디치가의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되었는데, 이것은 세계 최초로 ‘최고 지도자의 인재 요건에 관한 제안서’가 되었다.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할 때는 ‘필요한 개혁을 단번에 과감히 단행하여 날마다 계속해서 원망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 주장은 구조조정 때 초기 단계에 단번에 단행해 버리는 것이 여러 번 조금씩 고통을 주는 것보다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기업 재생 철칙에도 부합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부도덕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냉철한 합리자가 되라고 조언한 것이며 때때로 합리성과 도덕성이 부딪힐 때 합리를 우선으로 할 것을 강조했다.
‘부하에게 사랑받는 리더와 부하가 두려워하는 리더 중 어느 쪽이 뛰어난 리더일까?’마키아벨리는 후자가 되라고 했다.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나폴레옹, 히틀러, 스탕달 등 독재자들은 잠들기 전에는 매일 『군주론』을 읽었다고 하니, 이상 실현을 위해서는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한 독재자에게는 『군주론』이 바이블 같았을지 모른다.
마키아벨리가 이런 지론을 전개한 데는 그 시대라서 가능했던 특수한 배경이 있었다. 어떤 리더십이 올바르고 좋은가 하는 것은 그 시대 고유의 상황과 배경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당시 피렌체의 상황에 딱 맞았던 것이었다. - 130쪽, 「뛰어난 리더의 조건」에서
‘카리스마’라고 하는 말을 처음 사용한 이는 독일의 정치·경제·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다. 국가나 정치단체의 ‘정당한 폭력행사를 지지하는 지배 관계에는 어떤 질서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지배자의 권위에 피지배자가 복종’하는 현상에는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일까? 이 의문에 베버는 다음 세 가지 요소를 꼽았다.
‘정당성’‘카리스마’‘합법성’이 그것이다. 만약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가 조직의 방향을 설정했다면 구동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대가나 벌칙을 정한 규칙이 아니라, 피지배자의 자발적 동기 즉 지배자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리더가 지배하는 조직은 세세하게 규칙까지 정해 둘 필요가 없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면서 그의 말에 귀 기울이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므로 번거로운 규칙 따위는 없는 편이 좋다. 규칙은 오히려 리더 자신이 속박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버가 ‘비정상적인 타고난 자질’이라고 한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는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어느 조직에서나 카리스마 있는 리더에서 카리스마 없는 리더로의 교체가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때 지배의 정당성은 어떻게 보증할 것인가? 베버는 그 정당성은 역사성이나 합법성 중 하나밖에 없다고 했다.
만약 창업가의 피를 이어받은 우수한 인재가 있다면 그 인물에게 맡겨 역사적인 정당성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정당성을 갖춘 리더가 없다면 어떻겠는가? 그런 상황에서는 지배의 정당성은 합법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베버는 말한다. 그것은 상의하달식 의사결정을 규칙화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벌칙을 주는 관료 기구가 지배의 정당성을 보증하도록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 사회의 조직운영 추세와는 전혀 맞지 않는 규정이다.
정리해 보면 주체적으로 지배되도록 하려면 역사적 정당성이나 카리스마가 필요하다는 것이 베버의 주장인데, 안타깝게도 그런 속성을 갖춘 리더는 무척 드물기 때문에 조직의 수, 즉 수요에 비해 공급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지배의 정당성을 보증하려면 합법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합법성이란 권한 규정과 그것을 어겼을 경우 벌칙규정 시스템인 관료적 기구에 지배의 정당성을 의존하는 구조이므로 ‘권한 이양’이라는 큰 흐름의 추세와는 완전히 모순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흔히 저지르는 행동이 지배의 정당성을 ‘날조’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첫머리인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에서 예수에 이르는 계보로 시작된다. 즉 『신약성서』는 예수에 의한 지배의 정당성을 역사적 정당성에서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역사적 정당성과 카리스마를 갖춘 리더가 흔치 않기 때문에 많은 조직들이 역사적 정당성을 날조하는 일이 발생한다. 날조될 정도의 역사적 정당성이 과연 지배의 정당성을 보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남고, 규정과 벌칙에 얽매인 관료 기구가 현대사회의 우수한 인재를 끌여들이는 동기를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 과거를 바꿀 수 없는 이상, 역사적 정당성은 어차피 날조된 것이므로 추구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합법성이 관료 기구에 의한 지배를 전제로 했다면 현재 우수한 인재를 발탁해 동기를 부여하기는 어려우며, 애당초 바람직하지 않은 발상이다. 그러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에 의한 지배밖에 없는데,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는 ‘비일상적인 천부적 자질’을 지닌 인물로 흔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흔치 않은 카리스마 지도자를 인공적으로 키워내는 일에 도전? 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자질을 타고난 인물을 얼마만큼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미 만들어진 시스템을 역으로 추적해 기본적인 설계 개념과 적용기술을 파악하고 재현하는 일)해서 폭넓은 범위에서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하느냐가 핵심인 것이다. - 160쪽, 「권위를 만드는 세 가지 요소」에서
‘소외’는 요즘 말로 왕따와 비슷한 개념이다. 소외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지만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와 오히려 인간을 조종하는 양상을 보인다. ‘서먹서먹해지다’라고 해석되는 이 말이 서먹해지는 것뿐이라면 심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시스템에 인간이 휘둘리는데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남녀관계에서 서먹하다는 것은 마치 타인을 대하듯 거리감이 생긴다는 느낌이지만, 사회에서의 소외는 ‘휘둘리게 된다. 따돌림을 당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 귀결로 네 가지 소외가 발생한다고 했다. 자본주의의 폐단을 이야기한 것으로 그를 공산주의 아버지쯤으로 여기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자본주의의 ‘소외’유형은 첫째,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소외’다. 사냥군은 산에서 곰을 사냥하면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은 공장직원이 마음대로 집에 가져갈 수 없다.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은 회사의 자본이므로 대차대조표에 계상된다. 이것은 회사의 자산으로 주주, 즉 자본가의 소유라는 의미다. 이것이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소외다.
둘째는,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다. 노동자 대부분은 현장에서 고통과 지루함을 느끼고 자유를 억압당하는 상태에 있다. 분업 등으로 인간에게 노동은 ‘지루하고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것’으로 타락했다. 본래 노동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활동이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임금 노동제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을 하는 동안은 자기를 느끼지 못하고 힘든 노동에서 해방되어야 비로소 독립된 자신으로 설 수 있다. 이게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다.
셋째는, 위 두 가지를 통해 다다르는 ‘유적(類的)의 소외’다. 꽤 까다로운 번역인 이 말을 마르크스는 인간을 유적 존재, 다시 말해 어떤 종류에 속해 있어서 그 속에서 건전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생물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임금노동에 의해 건전한 인간관계는 파괴되고 노동자는 자본가가 소유한 회사나 사회의 기계 부품인 기어(톱니바퀴)가 되고 만다. 이것이 유적 소외다.
넷째는, ‘타인으로부터의 소외’다. 이것은 인간다움으로부터의 소외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인 인간의 가치는 사회나 회사의 톱니바퀴로 얼마나 효율성 있게 일하는가 하는 생산성만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관심은 짧은 노동으로 얼마나 빨리, 많은 돈을 벌까에 집중되어 있고, 인간다운 노동이나 증여에서 오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타인에게서 얼마나 빼앗을까, 타인을 어떻게 앞지를까에만 전념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다.
자본시장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누구도 이를 제어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제어는 커녕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채 수 많은 사람들이 휘둘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조직의 실적을 최적화하려는 목적으로 인사평가제도라는 수단이 개발되었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인사평가제도를 시행한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 탓에 당초의 목적이던 조직의 성과를 최적화한다는 관점에서는 거의 평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소외다. 소외는 목적과 시스템 사이의 주종관계를 역전시켜, 시스템이 주가 되고 목적이 종속되게 만들어 버렸다.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시스템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 시스템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문제를 해결하려고 만든 시스템이 원래 있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되레 다른 문제를 더 불거지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경향은 인사 평가제도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규칙이나 시스템으로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려고 하면 거기에는 자연히 소외가 발생한다. 오히려 자발적인 가치관으로 바람직한 행동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 198쪽, 「어떻게 시스템은 인간을 소외시키는가」에서
우리 모두는 공정한 사회를 꿈꾸고 공정한 평가야말로 제대로 된 국가, 사회, 조직을 만든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공정한 것이 정말로 좋은 것인가 하는 물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공정이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라면 조직과 사회 모든 곳에서 공정성이 실현되어야 마땅할 것인데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어떤 가설에 따르면 ‘본심은 누구도 공정 따위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일본도, 우리나라도 에도시대, 조선시대를 거쳐오면서 신분 차별제도를 철폐하고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차별과 격차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공공연히 신분이 나뉘어져 있던 시대보다도 차별과 격차는 음습하고 심각한 문제들이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신분의 차이가 없어지면서 표면적으로 누구에게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졌기에 오히려 차별과 격차가 더 부각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2000년도 더 전에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지적했다. “시기심을 품은 것은 자신과 같거나 같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같은 사람이란 집안이나 혈연관계, 연배, 인격, 세상의 평가, 재산 등의 면에서 같은 사람을 뜻한다.(ⵈ)
모든 사람들이 누구에게 시기심을 품는지도 확실하다. 왜냐하면 다른 문제와 함께 이미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시대와 장소. 연배, 세상의 평가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한 사람에게 질투를 느낀다.”
- 아리스트텔레스 『수사학』
봉건사회에서는 사회적 신분의 차이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때는 하위층에 속한 개인은 상위층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도 열등감도 느끼지 않았다. 애초부터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분 차별이 없어진 지금은 표면적으로 누구나 상위층에 속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자신과 별 다를 바 없는 다른 사람은 그렇게 높은 계층에 있는데 비슷한 환경 속에서 능력을 가진 내가 그런 입장에 설 수 없다는 건 이상하다고 하는 그런 의문이 공평성을 저해함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공평과 공정의 반대 개념인 차별이 이질성에 의해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차별이나 격차는 생각과는 반대로 ‘동질성’이 높기 때문에 발생한다. “인종 차별은 오히려 동질성의 문제다. 나와 깊은 동질성을 지닌 자, 나와 같은 의견을 갖고, 같은 신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발견되는 불화는 설령 작은 일일지라도 참을 수 없다. 그 불일치는 실제 정도보다 훨씬 심각하게 나타난다. 차이를 과장하고, 나는 배신당했다고 느껴 격하게 반발을 일으킨다” - 파리대학 심리학교수 고자카이 도사아키 『사회심리학 강의』
궁극의 이상으로 삼는 ‘공정하고 공평한 평가’는 정말로 바람직한 것일까? 그 이상이 실현되었음에도 ‘당신은 뒤처져 있다’고 평가받는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자기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그러한 조직은 정말로 우리에게 이상적인 것일까? 공정이라는 개념을 절대적인 선善으로 받들기 전에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249쪽, 「공정한 사회일수록 차별에 의한 상처가 깊다」에서
성공한 사람은 성공할 만큼의 노력을 해 왔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무언가 불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런 일을 당할 만한 원인이 당사자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소위‘피해자 비난’(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피해자를 조롱하며 탓하는 행위)이라고 부르는 편견이다. 세상에는 ‘자업자득’‘인과응보’‘남을 저주하면 자신에게 재앙이 돌아온다’‘뿌린 대로 거두리라’등 약자를 비난하는 속담들이 많이 있으며 그런 논리는 항상 단순하다.
세상이 공정하다면 실제로 성실히 노력하는 사람은 언제나 발탁되거나 각광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세계는 그렇지 않다. 남들 모르게 혼자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발탁되거나 각광받지 못한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상은 공정해야만 하는데 우리 조직은 공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은 ‘도의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조직에 원한을 품게 된다. 이것은 테러를 일으킬 심리과정 자체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그러한 세상에서 한층 더 공정한 세상을 목표로 싸워나가는 일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고 의무다. 하지만 남모르는 노력이 언젠가 보상받는다는 사고가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하자. - 263쪽, 「보이지 않는 노력도 언젠가는 보상받는다는 거짓말」에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철학에서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말은 테스형의 ‘너 자신을 알라’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닐까 하는데 데카르트의 이 명제를 인터넷에 찾아보면 ‘생각하지 않는 바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석한 것도 있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이 말은 ‘존재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여기에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의 정신이 있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라는 의미다.
데카르트는 유럽의 종교 전쟁, 유럽 최대의 종교 전쟁 ‘30년 전쟁’이 한창인 때에 활동했다. 30년 전쟁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신앙과 교의의 이상적인 모습에 있어 어느 쪽이 더 진리인지를 두고 싸웠던 전쟁이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서로 자신들의 교의가 진리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엄청난 논쟁을 벌였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자 마침내 유럽을 피로 물들인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 중세 유럽을 지배한 진리는 로마카톨릭교회에 있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이 많은 시간을 들여 축적했던 ‘진리에 관한 고찰’은 이때에 이르러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는데, 800년의 공백을 두고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에 의해 진리가 둘이 된 것이 문제였다. 서로 자신의 진리를 내세우며 싸우는 모습은 상상만해도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결국 지식인들은 ‘어느 쪽이 옳은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인식하기 시작했고, 기독교가 표명하는 진리에 대한 의구심이 터져 나올 듯한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어떤 계기)에 데카르트는 ‘이런 때야말로 전부 없었던 일로 하고 확실한 데서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외침을 꺼냈던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어떤 진리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여행의 출발점은 있었지만 도착점은 없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저서 『방법서설』에서 ‘신의 존재 증명’을 시도했다.
① 생각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
② 생각하고 있는 내 안에 관념도 의심할 수 없다
③ 관념에는 물건, 동물, 인간, 신, 네 가지가 있다
④ 이들을 완전성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면 물건<동물<인간<신이다
⑤ 더 불완전한 것은 더 완전한 것의 원인이 될 수 없다
⑥ ②에서 ‘신의 관념’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으며, 또한 ⑤에서 ‘신의 관념’의 원인은 인간이 될 수 없다
⑦ 따라서 ‘신의 관념’의 원인은 인간보다 완전한 신뿐이다
⑧ 그러므로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
이것을 보고 ‘과연 그렇군!’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치 사기꾼의 ‘증명’같아서 현재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데카르트 자신도 이 증명에 관해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의 존재에 관한 몇 페이지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전편 가운데서 가장 숙련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며 마지막에 출판사에서 독촉받을 때까지도 보완할지 말지 선뜻 결심하지 못했다.”
데카르트는 신이나 교회라는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자는 메시지가 교회로부터 노여움을 살 것을 두려워해 그 방법론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용서받으려 했던 건지 모른다. 하지만 어색한 겉치레 같은 위화감은 당시부터 있었던 모양으로 같은 시대에 살던 파스칼도 ‘데카르트는 가능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음」으로 끝맺고 싶었던 거 아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 285쪽, 「생은 아웃소싱(위탁처리)할 수 없다」에서
확실히 코페니쿠스의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기까지는 그가 죽은 후 1세기 이상의 시간이 걸렸고, 뉴턴의 만유인력도 발표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인정받았다. 역사상 획기적인 발명을 뒤쫓아 가며 학습하고 있는 우리는 그런 발견과 발명을 계기로 세상이 단번에 뒤바뀐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혁신의 보급’이 그 만큼 늦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활판인쇄기법이나 괴혈병, 감염증 예방법 등 획기적인 발명은 보급되기까지 수백 년의 시간이 걸렸다. 오늘날 다양한 영역에서 몇 년 사이에 페러다임(다양한 관념, 질서있게 하는 구조)전환이 거듭된다고들 말하지만, 토마스 쿤(미국의 과학철학자)은 그것은 페러다임이 아니라 의견이나 방법의 전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우리가 100년 단위로 일어나는 페러다임 전환 속에 있다고 한다면, 과연 그 페러다임은 어디서 어디로 옮겨 가고 있는 것일까? 시간축을 길게 잡아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 315쪽, 「조급해하지 마라, 세상은 그렇게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에서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이 책의 50번째 주제는 「사람은 뇌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생각한다」이다. 철학에서 다루는 기본적 문제 중 하나가 사람의 마음과 신체에 관해서다. “플라톤은 이 문제를 영혼과 육체라는 두 가지 항목으로 나눴고, 데카르트는 ‘심신이원론’으로 정리하고는 양자를 독립된 별개로 취급한 반면, 스피노자는 ‘심신평행론’을 내세워 마음과 신체는 하나로써 분리할 수 없다며 데카르트를 비판했다.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은 이 문제는 현재까지도 철학의 영역을 넘어 다뤄지고 있다. 가령 인공지능에서 신체성의 문제는 넓은 의미의 심신 문제로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는 대개 마음과 신체 중 마음이 사령탑이고 신체는 그 사령을 받아 명령을 감행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단순히 마음이 주主고, 신체는 종從인 관계로 볼 수 없다는 여러 연구가 있다. 오늘날 사회는 점점 복잡해져서 논리적으로 의사결정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오직 이지적이고 논리적이고자 한다면, 오히려 판단실수를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포르투칼 출신의 미국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1944∼ )의 ‘신체적 표지(somatic marker)’* 가설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이유다. - 328쪽, 「사람은 뇌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생각한다」에서
*신체적 표지 : 뇌기능 손상으로 의사결정 능력이 결여된 환자가 적시에 적정한 의사결정을 내리는데는 환자의 이성(理性)과 정동(靜動-희노애락 등 일시적이고 급격한 감정의 움직임),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 다마지오의 가설
‘너 자신을 알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리고 어느 것이 스피노자 말이고 어느 것이 데카르트 말인지 헷갈릴지라도 아주 친숙한 말이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일상은 많은 철학자의 말과 신념이 알게 모르게 접하며 살고 있다.
누군가는 ‘양처를 만나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만나면 철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 소크라테스를 떠 올리며 위안을 얻을지도 모르고, 소원을 묻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한 디오니게스를 생각하며 자유와 평안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 역자 후기에서 202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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