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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의 문'을 지나 빨간 미니버스가 언덕을 올라온다.
알함브라와 알바이신과 사크로몬테의 좁고 꾸불꾸불한 골목길을 다니기 위해서 특별히 고안된 교통수단이다.
다소 힘에 겨운듯 천천히 올라오고 있는 미니버스의 번호는...........?
32번 이다.
누에바 광장을 기점으로 알함브라 궁전과 알바이신 지역을 순회하는 미니버스가 바로 32번 버스인데, 그 운행 노선까지는 알지 못한다.
'32번 버스가 먼저 오면 어떻하기로 했었지?'
뭘 어쩌겠어? 일단은 우선 타고 봐야지. 앞서서 타야 잠시일 망정 좌석을 차지할 수 있잖아. 골목길이 얼마나 꾸불꾸불하다고.......
올라올 때 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미니버스가 좁은 언덕길을 날쌔게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라나다의 문'이 휙하고 지나간다. '그라나다 문'의 다른 이름은 '석류의 문'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그라나다엔 유독 석류나무가 많다. 길가 가로수의 일부도 석류나무이고 공원이고 정원이고 온통 석류나무 일색이다. 처음 유럽에 왔을 때, 로마던 시칠리아던 간에 지중해 연안은 온통 샛노란 오렌진 가로수 투성이라 놀랬었는데, 그라나다의 석류나무 가로수 또한 엄청 매력적이다.
석류는 '그라나다의 상징'이다.
스페인 어의 '그라나다'가 바로 '석류'란 뜻이다.
그런가 하면 그라나다의 어원을 무어인(이슬람 아랍인)들이 점령했을 당시의 언어인 '카르나타'에 두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여기에서 '카르나타'란 '이방인들의 언덕'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단어에 기원을 두던 '그라나다'란 참 묘한 매력을 간직한 매우 사랑스런 도시라는덴 변함이 없다.
그런가 하면 스페인 내전과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석류가 신병기인 슈류탄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전투에 나가는 군인들끼리 '슈류탄 서너발씩 꼭 챙기도록 해'라는 표현을 농담처럼 비유를 통해 나타냈다고 한다.
'그라나다(석류) 몇 톨씩은 배낭에 챙겨넣었겠지?'
석류의 문을 통과한 미니버스는 멋진 그래피티가 빼곡한 골목길을 사정없이 내리 달려간다.
도대체 어디로 해서 알바이신 지역으로 다시 올라간단 말인가?
그런데 어렵쇼?
아주 낯익은 풍경들이 휙 휙 차창을 스쳐지나가는것이 아닌가?
에게게? 이거 아침에 올라갔던 길을 그대로 다시 내려오는것이 아닌가? 미니버스는 아주 잠간 사이에 어느새 누에바 광장에 도착했다.
챠밍여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광장 노천가페에서 늦은 점심식사부터 하자고 이야기하는 중에......... 아뿔싸. 어느새 미니버스가 출발해 버렸다.
광장 뒤로 나 있는 실개천(이게 그라나다의 젖줄인 타로 강이란다. 헐!)을 따라 또 다시 아슬아슬 꾸불꾸불 좁고 복잡한 골목길을 헤집고 올라간다.
알바이신 지역의 산 니콜라스 전망대로 향하는 길이다.
우리는 산 니콜라스 전망대로 갔다. 점심을 그곳 노천가페에서 먹었다.
그리고는 골목길 투어를 하면서 일단 숙소로 돌아갔다.
------ 그런데 지금은 알바이신 니톨라스 전망대 이야기를 일단 접고 통과하기로 한다. 왜냐면 알함브라 붉은 노을 때문에 이틀 뒤 해거름에 다시 찾아오게 되기 때문이다. 이곳의 이야기는 그때 한꺼번에 하기로 미루어 두고.........
그렇게 열심히 죽어라 걸어다니면서도 전혀 지칠줄을 모르는 우리는 예쁜 태리의 할매 할애비다.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지 뭐......... ㅎㅎㅎ
다시 씩씩한 발걸음으로 숙소를 나선다.
'그라나다 하면 알함브라, 알함브라 하면 그라나다'라고 생각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편견을 싹 쓸어버릴 요량으로 또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라나다는 문화와 예술의 보물창고와도 같다.
알함브라 궁전 보다도 귀하고 알찬 인류의 문화유산이 여기저기서 손짓을 보내오고 있다.
알함브라는 한번 보았으니 족하고....... 다음에 혹시 그라나다에 와서 정말 시간이 없다면 나는 알함브라 궁전 보다는 궁전을 제외한 그 밖의 그라나다를 찾을 것이다. 그만큼 그라나다에는 알함브라 궁전 못지 않거나, 혹은 그 이상의 귀하고 아름다운 유산이 많이 있다.
우리는 지금 그것들을 만나러 (그라나다 올드 시티)로 향한다.
흔히들 그라나다 여행의 기점이 '누에바 광장'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비브 람블라 광장'이야말로 그라나다 여행의 중심이자 핵심이다.
누에바 광장은 알함브라 행 교통 수단의 기점이기 때문일 뿐이고, 다른 그라나다 여행은 모든것은 비브 람블라 광장 주변에 모두 놓여있다. 거기에다 여행자 뿐만이 아니라, 현지인들의 삶이 그곳에 그대로 드러나고 이루어지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숙소를 나선 우리는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간다.
'산 후안 교회'와 '산 후안 병원'을 다시 힐끔거리며 들여다 보고 '제르니모 수도원도' 잠시 들러서 기도 시간을 가져보기도 한다.
재활치료를 위해 꾸준히 복지시설을 찾는 사람들을 여럿 보면서 '스페인의 복지'에 부러움도 가져보지만, 오랜 세월동안 위대한 소명을 다 해오던 산 후안 병원의 낡고 훼손된 내부 풍경은 다소 가슴을 알싸하게 만들어준다.
의과대학 건물에서 친절한 대학생들과 잠시 대화도 나누고 붙어있는 식물공원에서 청소작업중인 분들과 서로 인사도 나눈다.
다음으로는 어디를 들여다 볼까?
정해진 목표도 없고 오라는 곳은 없어도 그렇다고 우리가 못 가볼 곳도 없다.
이 골목 저 골목, 이 집 저 집, 이 가계 저 가계 마구마구 기웃거려 본다.
트리니다드 광장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며 바라본 현지인들 모습은....... 어딘가 여유롭다. 호화롭다기 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여유로와 보인다. 스페인은 유럽 여러나라 중에서 가장 심각하게 경제난을 격고있고, 우리나라와 비교해 절대 소득 수준이 높지도 않은것이 현실인데 저 넉넉해 보임과 여유는 뭐지?
그런 의구심을 가지고 좀 더 세세하게 현지인들 삶을 진지하게 관찰해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몇걸음 옮기지 않아서 마침내 넵튠 분수대가 있는 '비브 람블라 광장'에 도착했다.
거리의 악사가 노래하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판토마임과 마술 공연이 벌어진다. 그리고 여기저기 한무리씩의 여행자들이 모여있다.
여행사 직원과 가이드들이 여행자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체크하고 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라나다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역시, 그라나다 여행의 중심은 비브 람블라 광장'이라는 나의 생각이 그대로 들어 맞았다.
그라나다의 행정 기관과 중심 상업지역이 모두 이 부근에 있다. 그 주변으로 현대적 주택가가 들어서 있다. 알함브라 궁전을 제외한 여행자들이 열망하는 모든 유명 건축물과 예술품들이 대부분 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르네상스 양식에 더하여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된 아름다운 교회들과 수녀원들과 병원과 옛 궁전과 귀족이나 왕족들의 대저택이 사방에 산재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색이 있는 대리석과 벽옥으로 치장된 웅장한 대성당은 대주교가 직접 관할하는 스페인 카톨릭의 대단히 중요한 교구인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건축가이자 화가인 알론소 카노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중심에 '비브 람블라 광장'이 있다.
'비브 람블라 광장(Plaza de Bib Rambla)'이 유명한 것은 여행의 중심지로써 뿐만이 아니라 파자. 파스타. 빠에야 등 스페인의 모든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그라나다 최고의 먹거리 광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 중에는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먹거리 전문점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Gran Cafe Bib-Rambla)는 100년 전통의 추로스 전문점으로 대단히 명성이 높다. 그래서 첫날은 이곳에서 추로스를 먹어 보았다. 그리고 다음날은 이웃 가계에서 커피와 해산물 요리를 먹었다.
혹, 그라나다 람블라 광장을 찾게되는 여행자에게 팁을 하나 선사한다면......... 내가 처음 람블라 광장에 막 도착했을 때는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게 필요하던 시점이었다. 어느 카페에 자리를 잡을 지 결정도 안한 상태에서 노천 카페에 써비스 중인 웨이터를 붙잡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바로 아래 사진의 비브 람블라 카페와 우측 호텔 사이에 계단을 가르쳐 주었다. 계단을 오르니 2층 우편은 바로 람블라 카페의 주방이었다. 안에서 요리하느라 매우 분주한 모습들이었고, 복도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요리사도 있었다. 100년 전통의 추로스가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 지고 있었다. 그 주방 바로 옆으로 넓고 잘 정돈된 화장실이 갖춰져 있었다. 완전 자유로운 공짜 화장실 말이다. 아무도 제재하지 않는.......
유럽에서는 공짜 화장실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있다고 해도 일부러 찾아다니기가 결코 예사스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니 그라나다에서는........
그러고 나서 광장을 벗어나 우연히 길에서 만난 문제의 요 아재.
가업으로 물려받은 스페인의 명물 하몽 공장 사장님이시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이렇게 직접 거래처에 납품을 다니신단다.
내 배낭의 태극기를 보고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2년 전에 아내분과 아주아주 인상적인 한국 여행을 했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참 친절했고 부산 여행이 아주 특별히 인상적이었고, 남대문 시장의 먹거리 장터는 결코 잊지를 못하겠다고 한다. 잠시 길에 선 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요런게 여행의 묘미 아닐까?
짧은 만남이었지만 아주 인상적이었고 오래오래 기억될 추억으로 남게 되겠지만....... 정작 그 다음이 결정타였다.
내가 그를 가리키며......... ' 나는 이 세상에서 하몽공장 사장하고 와인 공장 사장이 젤 부럽다'고 했더니만........ 다짜고짜.........
'그냥 이 길로 우리 공장에 가자'고 한다. 하몽 공장에 특별케이스로 취직 시켜주고 스페인 여행 실컷 시켜 주겠단다.
거기다가......... 배달하던 하몽 뒷다리 하나 줄터이니 메고 다니면서 그때 그때 져미듯 잘라서 배터지게 먹고 귀국하란다. 선물이란다.
컥.
헐.
지내놓고 생각하니 그때 못이기는 척 하몽 다리 하나 받아들고 메고 다니면서 질리도록 먹어 볼 껄!!!!!
명함 받아 놓은것도 있겠다......... 확 스페인으로 취직갈까?
(와인 + 하몽) = The End !!!!!!!!!! 적어도 나 한테는 끝판인디............. 열 고심........
'알카세이라 거리(Alcaiceria)'는 그라나다의 중심인 대성당 인근에서도 왕실 예배당에 거의 걸쳐져 있다고 햘 수 있는 핫 플레이스 중의 한곳이다.
이슬람의 지배시절 이곳은 동양에서 온 비단과 도자기가 주로 거래되던 최고급 시장이었던 셈이다.
국토회복 운동 후에 아랍인과 유대인들이 모두 쫓겨나고 오랜 세월동안 시장의 기능을 상실했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여행이 보편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이 일대에 예쁜 그림엽서와 소품과 각종 기념품에서부터 화려한 유리제품과 도자기류는 물론 현란한 귀금속에 이르기까지 관광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새로운 명소로 자리잡았다. 대성당과 왕실예배당으로 가다보면 이 시장을 경유하게 되고, 혹은 대성당과 왕실 예배당을 둘러보고 난 후 이곳에서 기념품을 고르는 여행자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충분히 쇼핑의 재미를 맘껏 누려볼 수 있을 것이다.
'쇼핑' 이라는 한미디에 챠밍여사가 벌써 저만치 골목을 돌아 사라진다.
헐. 자고로 여자들이란.......... 할머니씩 되어가지고는.........
대성당 인근의 좁은 골목길을 나이 지긋하신 유럽의 노인들을 포함한 수십명의 여행자들이 가이드를 따라 졸졸 몰려들어가고 있다. 한 팀이 다가 아니었다. 연실 꼬리를 물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는것을 보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뒤를 따라 골목길 안으로 접어들었다.
마치 알함브라 궁전의 성문 하나를 연상시킬만큼 멋진 이슬람 양식의 건물이 좁은 골목 안에 있었다.
보존 상태가 아주 훌륭했다. 알함브라를 제외하고는 혹 성당으로 개축되었으면 모를까, 옛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이 온전히 보존된것이 드문것이다. 카톨릭은 이 땅에서 치욕의 유산인 이슬람의 문화와 유적들을 철저하게 지우고자 했던 것이다.
아름다웠다.
'코랄 델 카본(Corral del Carbon)'.
슬쩍 엿듣게된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그라나다의 작은 광청'이라 한다. 아마도 그라나다 시청의 한 출장소라 하는 편이 이해가 쉽겠다.
부연 설명으로는........ 인터넷으로 알함브라 궁전 티켓을 사게되면 이곳에 들려서 실제 입장권과 교환을 해야하는 장소로 영행자들이 찾게되는 아주 중요한 장소라는 설명이었다.
출입문 옆으로 그런 내용을 담은 안내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작은 관청'이라는 여기 '코랄 델 카본'이라는 건물의 진면목이었다.
'이게 뭐였드라?'
'이런걸 어디서 봤드라?"
명확하게 해답이 드러나지 않는 의문이 내 머릿속을 강하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마치 '파티오(실내 정원)를 둘러싸고 있는 빌라'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분명 나는 이 느낌을 이전에 한 두번이 아닌 여러번 보고 느낀적이 있다.
이런 느낌이 뭐였지?
그때...... 가이드의 설명에서 툭 튀어나와 내 귓전에 날아드는 한마디.......... '카라반세라이'!!!!!!!!!
'그래. 바로 그거였어. 카라반 세라이............'
암튼 이날 숙소로 돌아와서는 와이파이를 이용해 죽어라 '카라반세라이'를 찾아보았다.
내 생각이 꼭 들어 맞았다.
코랄 델 카본은 작은 관정이기 이전에 이슬람 시대에 '카라반세라이'였던 것이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코랄 델 카본을 찾았다. 그리고 챠밍여사에게 근사하게 지난 역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카라반세라이는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쉬어가던 여관이다.'
<<공지>> : 카라반세라이를 소개하기 위하여 아래의 관계 사진들은 구글 이미지 사이트를 이용해 퍼 왔음을 알립니다. 상업적 용도가 아닌 여행기의 부연 설명을 위해서임을 밝혀두며, 혹 저작권을 가지신분의 사진일 경우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피안재.
'코랄 델 카본'에서 볼 수 있듯이, '카라반 세라이'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들의 숙소이자 하나의 시장이자 요새였다.
건물은 마당 가운데의 분수나 우물을 중심으로 사각형이나 다각형 또는 원형의 성채처럼 삥 둘러쌓인 형태로 건설되었다. 분수나 우물은 사람들의 식수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동물(말. 낙타. 당나귀)들에게 물을 먹이는 장소이기도 했다. 요새나 빌라처럼 생긴 이 건물의 1층은 주로 동물들을 관리하는 축사로 이용되었다. 2층은 대상(무역상)들의 숙소와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쓰였고, 3층은 주로 대상들이 가지고 온 귀한 교역물품(비단. 도자기. 향신료. 보석)들을 보간하는 개인 금고나 창고로 쓰였다.
이런 숙소(카라반세라이)들이 동서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중간 중간에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흔히 말하길 '실크로드'라고하면 '동서양의 교역로'라고들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너무나 포괄적이면서도 막연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카라반세라이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이를 좀 더 세분화해 볼 필요가 있겠다.
동서양의 교역로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카라반 로드' 외에도 스텝지대를 지나는 '초원길'과 인도양을 통하는 '바닷길'도 교역로에 포함된다. 그 여정중에서 가장 거칠고 힘든 험준한 산맥과 사막과 오아시스를 거치는 '카라반 로드' 부분만을 일컬어 '실크로드'라 사용했던 것이다. 비단을 마차에 실어 초원을 지나고, 야크에 실어 험준한 산맥을 넘고, 다시 낙타에 실어서 머나면 사막을 건너고, 해안에 도착해 배에다 싣고 유럽으로 향한다 해서 모두 실크로드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물론 훗날 일부사람들은 이 모든 전 과정을 통털어 실크로드나 부르기도 했지만 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실크로드는 카라반 로드이다. 대상들이 낙타에 비단과 도자기를 싣고 사막과 오아시스를 지나던 구역을 말한다.
그렇게볼때 실크로드의 시작은 당나라 장안이었으며, 끝은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었다.
이들 카라반 대상들의 교역은 가히 천문학적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수십마리의 낙타 등에 사진에 실려있는 물품만큼의 금괴를 실었다고 가정해 보자. 거다란 상단 하나의 거래 규모는 거의 일개 봉건 국가의 경제와 맞먹을 정도였다. 대개 중소 규모의 카라반이 주류를 이루었고 개중에는 소부족이나 가족단위의 카라반도 많았다.
왜 이렇게 카라반에 목숨을 걸었느냐?
그만큼 매우 커다란 이익을 남겨주는 노다지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물자가 차고 넘치는 유럽이었지만 그들에겐 비단이 없었다. 화려한 비단은 금이나 은이나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아름다움을 창조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온 유럽이 금은과 보석을 싸들고 다니며 비단을 구입하기에 혈안이었던 것이다. 한번만 동방으로 가서 비단을 사다가 서방에 무사히 가져다 팔 수 있다면, 그 순간 그의 팔자는 한순간에 활짝 펼쳐지던 시대였다.
중국에서 생산된 비단이 마차에 실려 장안에 모여들기 까지는 비교적 아주 순탄한 길이다.
이제 돈황을 지나면서 사막에 접어들게 되고 마차나 말은 제 값어치를 하지 못하게 된다. 사막이 시작되자 마자 만년설에 뒤덥힌 천산산맥과 파미르 고원이 길을 가로막아선다. 이쯤에서는 산악지역에 자생하던 야크가 한 몫을 단단히 하게되고....... 겨우 산맥을 통과하게 되면 나타나는 타클라마칸 사막은 인간이 가진 인내의 한계를 몽창스럽게 짓밝고 말았다. 카라반들은 남쪽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냈는데, 이 천산남로의 경우 먼저 이곳에 이주해 살던 원주민조차도 물 부족과 빠르게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정착지를 떠나게되고 말았다. 카라반들은 다시 천산산맥을 관통하는 천산북로를 개척하게되었는데, 과거 한나라가 흉노족을 서역으로 몰아낼 때 사용한 길이었으며 후에 당나라가 거점으로 차지하고 들어선 지역이었다. 이는 후대에 칭기스칸의 아들 주치와 손자 바투가 호라즘을 정벌할 때 이용한 길이기도 했다. 몽고는 이 정복로의 중간 중간에 길게 띠를 세우듯이 역참을 설치했다. 역참이 설치된 곳들이 모두 중요 거점이지 도시들이 된것이다. 그리고 이 역참을 따라서 카라반들이 머물 수 있는 전용 숙소가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카라반 세라이다.
실크로드 무역상들의 경유지로서 여럿의 카라반세라이가 들어섰다가 후에 커다란 대도시로 성장한 대표적인 곳이 바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이다.
카라반들은 늘 작열하는 태양과 물 부족과 밤이면 영하로 떨어지는 극심한 추위와 싸워야 했다.
가끔씩 불쑥 찾아드는 모래폭풍은 그야말로 그들이 가진 모든것을 삽시간에 모래속에 삼켜버리기 일쑤였다.
굶주린 야생동물들로 부터 낙타를 지켜내야만 했고......... 그들이 가진 값비싼 비단과 보물을 노리는 마적이나 주변에 늘어선 적대국가들과 피말리는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카라반세라이가 없는 지역을 통과할 때는 여러 카라반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면서 밤에는 모닥불을 주위로 둥굴게 방어진지를 펴고 주변 경계를 철저하게 했다. 전재산과 생사가 걸린 중대사였기에 최고로 위험한 이런 지역은 서로 협동하며 서둘러 통과해야만 했다.
그런 카라반들에게 카라반세라이는 그야말로 오아시스이자 천국이었다. 이 튼튼한 성채에서 그들은 휴식을 취하고, 교역로의 새로운 정보를 나누고, 오가는 상단들끼리 거래를 텄다. 한 상단이 굳이 장안까지 갔다가 다시 콘스탄티노플까지 되돌아 갈 필요가 없어지게된 것이다. 아무때고 물폼과 조건만 맞으면 거래가 성사되었다. 그만큼 시간과 위험부담을 덜 수 있었던것이다. 시간 절약이 곧 위험부담의 절약이 되고..... 그럼에도 큰 이익은 보장되고도 남았다.
하여, 이렇게 실크로드의 무역상들에게 안전과 휴식을 제공하고 때론 시장의 역활을 대신해 주던 '카라반세라이'는 다양한 지역에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카라반의 여관이었던 카라반세라이는 무역시장이자 작은 도시이며 요새였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에 분명하게 기반을 둔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였기에 그동안 나는 그것들이 중국의 장안에서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사막지역에만 설치되어 있는 매우 독특한 유적으로만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곳 리베리아반도의 스페인 그라나다에도 분명하게 카라반세라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이곳까지를 '실크로드'에 포함시킬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왜 뚱단지처럼 그라나다에 불쑥 카라반세라이인가?
아마도 여기 그라나다 뿐만이 아니라 '카라반세라이'는 스페인의 여러 많은 지역에도 설치되어졌을 것이다.(좀 더 공부를 해봐야 하겠지만)
왜?
동로마시대(비잔틴제국)에 동양으로부터 들어 온 비단과 도자기와 인도의 향신료들은 주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나폴리)들에 의해 지중해를 통해 전유럽으로 공급되었다. 이탈리아 상단의 전성기였다.
십자군 전쟁이 터졌고, 이어서 오스만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소아시아지역에서 급속하게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오스만은 비잔틴을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해 버렸다. 천년을 이어내려온 유럽 경제의 핵심이 오스만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동서양의 교역로와 지중해 상권이 오스만의 손에 들어갔다.
유럽은 비단과 향신료가 바닦이 났다.
오스만을 통하지 않고, 동방의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새로운 교통로와 무역로가 절실하게 필요해 졌다. 그것이 바로 '대항해 시대'의 시작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역사상 최고의 무역거점을 오스만이 차지하게 되자, 같은 이슬람 국가들인 북아프카의 아랍인들과 스페인을 점령한 아랍인(무어인)들은 훨씬 원활하게 동방의 물자를 들여올 수 있게 되었다. 북아프리카의 사막을 통하지 않고서도 지중해를 통해 원활하게 들여 온 동양의 비단. 도자기. 향신료들이 그라나다를 포함한 안달루시아의 도시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직접 실크로드를 오가며 무역을 하던 카라반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실크로드의 교역중에서 '카라반세라이'가 가지고 있는 독특하면서도 중요한 역활에 대해서 다시금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스페인의 대도시마다 카라반세라이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카라반세라이는 곧 동방에서 온 귀중품을 취급하는 최고급 시장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급성장을 했다.
그라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식 여관중 하나였을 라 코랄라 델 카본(La Corrala Del Carbon)은 알함브라 궁전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그라나다에서 최고의 중심가였을 것이다. 이는 옛 사진에서 그옛날의 영화를 엿볼 수가 있다.(1.300년대)
다로강이 흘러가는 그라나다의 중심에 커다란 아치형의 다리를 건너면 마치 왕궁을 방불케 하는 멋진 카라반을 위한 여관(숙소)가 나타난다. 뒤에 우뚝 솟아있는 모스크의 첨탑 마저도 카라반세라이의 배경처럼 여겨질만큼 웅장하고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그림에는 분명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역사속의 다로강은 누에바 공원에서 볼 수 있지만, 상류인 사크로몬테 쪽으로 올려다봄에 있어서 그나마 겨우 명맥을 잇고있는 실개천일 뿐이다. 하지만 700년 전에는 분명 뱃놀이를 즐기고 온갖 물품을 가득실은 거룻배들이 오르내리고 강물이 흘러 넘쳤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옛 영화였을 뿐, 지금의 다로강은 복개천이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누에바 광장에서 시작하는 그란비아 거리를 따라 이사벨 카톨리카 광장을 지나 대성당 지역과 비브 람블라 광장을 스쳐지나면서, 바로 '라 코랄라 델 카본(La Corrala Del Carbon)의 정문 앞을 흘러내려 푸에르타 레알을 지나 '로마다리' 인근에서 다른 지류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렀던 것이다. 그라나다의 가장 중심거리와 인근 숲이 우거진 공원은 모두 다로 강을 복개하여 만든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금 그라나다의 어느곳에서든지 다로 강의 옛 모습이나 자취를 찾아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누에바 광장의 위쪽 실개천이 거의 전부이다. 역사속의 다로강은 모두 복개되어 도시 중심가의 도로 아래 감추어져 있다.
이사벨 영왕 주도의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 이후 '코랄라 델 카본(La Corrala Del Carbon)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부서진 채로 방치되었다. 뒷 배경처럼 서있던 이슬람 모스크 조차도 철저하게 파괴한 후에, 약 200년에 걸쳐서 카톨릭 성당으로 재건축 되었다. 이렇게 등장하게 된 '그라나다 대성당'이지만 아직까지도 탑은 미완성인채로 남아 있다.
근대에 들어서 그라나다 도시 재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낡은 건물들을 철거하고 현대식 아파트를 짖고자 하는 과정에서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카라반세라이'의 가치가 재평가되자 시당국은 보수와 복원작업에 나섰다. 옛 모습을 회복한 카라반세라이는 처음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극장으로 쓰여지다가 석탄산업 관계자들의 조합 건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안달루시아를 찾는 여행자들이 늘어가고 관심이 쏟아지자 시당국은 역사적 건축물로서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고 보존에 힘쓰게 되었으며, 비로소 '라 코랄라 델 카본(La Corrala Del Carbon)'이라는 명칭하에 '작은 관청'으로서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알함브라 궁전 티켓을 인터넷으로 구매한 사람들은 반드시 이곳에 들려 표를 교환수령하여야만 한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있어서 이곳은 참으로 반갑고 소중한 장소였다.
나에게 있어서 이곳은 (코랄라 델 카본) 아니라 영원히 (카라반세라이)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곤........... 슬며시......... 내 여행 버킷 리스토에서 (실크로드)를 두 계단쯤 위로 올려 놓는다. 그게 언제쯤이 될까?
젊었던 나의 지난 시절중에서....... 일본 NHK 방송국이 제작한 (실크로드)를 보면서 얼마나 전률에 떨었었던가? 그 진한 감동은 가장 깊은 가슴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잔잔하고 아련하게 흐르던 배경음악하며.......... 내가 태어난 후 처음 시작부터 영원한 로망으로 삼았던 첫사랑 같은 도시 (이스탄불)이 바로 그 실크로드의 최종 목적지라는 사실은........ 아마도 언제고 서안에서 시작해 이스탄블까지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새 나이를 너무 먹어버렸다.
--- 다로 강변에 들어선 멋진 모습의 '카라반세라이(코랄라 델 카본(Corrala Del Carbon)'
--- 카톨릭이 아랍인들을 몰아 낸 다음에 카라반세라이는 파괴되었다.
--- 부서진 카라반세라이는 부랑자들이 드나드는 빈민가로 전락했다.
'그라나다 대성당(Cateral)'의 위용은 사뭇 엄청나다.
알카세이라 골목을 기웃거리며 쇼핑의 재미에 빠져 시간이 바삐 흘러가는 줄을 잠시 잊고있던 어느 순간에 느닷없이 좁은 골목길을 꽉 틀어막고 있는듯이 아주아주 거대한 석조건물이 시야에 가득 몰려들어오기 때문이다.
대성당의 주변 골목을 모두 삥 돌아보면서 다양한 형태의 벽과 기등과 별도의 여러 출입문들을 환히와 감탄속에 절로 탄성을 쏟아내면서 올려다 보는 재미도 재미이지만, 사방으로 미로처럼 서로 얽혀있는 좁은 골목들 사이에 태산처럼 우뚝 솟아있는 대성당이 주는 웅장함은 감탄을 넘어 어떤 중압감처럼 다가온다. 대성당 정문의 광장이 매우 협소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광장의 아주 끝까지 물러나지 않는다면 카메라 앵글에 성당의 정면 파사드 조차도 제대로 담아내기가 어렵다. 정문 파사드 하나가 이럴진대...... 대성당의 전체모습은 하늘에 드론이라도 띄우기 전에는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여행 책자에서 그라나다 대성당의 전체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문득 어느 다른 도시의 건축물을 떠올렸었다. 아주 흡사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라나다에 와서 실제로 옆모습을 멀리서 보았을 때, 역시나 너무도 닮았기에 또 한번 놀랐다.
그 대상은 바로 '톨레도 대성당' 이었다.
실제로 그라나다 대성당은 처음 건축이 시작되었을 때, 톨레도 대성당을 닮은 교회를 지으려고 시작했었다고 한다. 어쩐지...... 그럼 그렇지..........
그렇게 그라나다 시내투어를 하다가 우연처럼 어느 골목을 빠져나가면서 마주친 '그라나다 대성당' 앞 광장에서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대성당의 파사드 쪽으로 임시 설치된 무대에서는 다섯명의 아가씨들이 올라 연주와 노래를 선사하고 있었다.
작은 음악회라고나 할까?
그런데 좀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우리 같은 여행자들도 많이 몰려 있었으나, 음악회 치고는 참여하고 있는 현지인들의 행색이 좀 유별나 보이지 않는가? 그냥 보통의 작은 음악회 분위기인데 대부분의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이 제법 옷차림에 신경을 쓴 정장차림들이 많이 눈에 띈다. 뭐지?
무대위의 다섯 아가씨들의 열창은 이어졌고,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이 이어졌고 앵콜이 쏟아져 나온다. 보컬을 맡은 한 아가씨의 미모가 유독 문에 들어오는데 70년대의 섹시스타였던 '파라 포셋 메이저스'랑 상당이 비슷한 느낌이다.
우리는 대성당 투어는 둘째고 우선 관객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뜻밖의 음악회를 그냥 즐기기로 했다.
5월의 스페인은 어디를 가나 축제 아니겠어?
-- 르네상스 양식을 기반으로 한 그라나다 대성당은 톨레도 대성당을 닮았다. 종탑의 상부는 지금도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그라나다 대성당은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처음 이 교회가 지어질 당시(1505년)는 분명히 고딕양식에 따른 교회를 완성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180여년 이상의 건설기간과 책임 건축가가 여럿 바뀌면서 처음과는 달리 확장 증축이 추가되고 종국엔 애초의 고딕양식에서 르네상스 양식으로 바뀌어 버렸다. 흡사 톨레도 대성당의 외형을 그대로 빼박았다.
중북부 유럽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고딕양식에 대해서는......... 십자군 전쟁의 시기에 템플 기사단에 얽힌 우화도 있고, 고대 에디오피아 기독교의 설화도 거론되다가......... 암튼 프랑스 사르트르 노틀담 성당의 북쪽 종탑에서부터 새로운 양식이 등장되었다고 하겠는데....... 이런 부분들은 다음 기회에 템플 기사단의 못다한 이야기를 거론할 때 다시 한번 소개하기로 하고 미루어야만 하겠다.
길이 115미터 너비 67미터 높이 57미터의 대성당은 장엄한 위용을 뽐내기에 충분해 보이지만 실은 아직은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있다. 사각형의 건물 위에 높이 80미터의 종탑을 지을 설계도에 따르자면 분명 아직은 미완성인 형태의 건물이다.
레콩키스타를 통해 리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완전하게 몰아 낸 이사벨 여왕은 거대한 이슬람 사원(메스키타. 모스크)이 있던 자리에 이슬람의 흔적을 완전하게 지우고 스페인 카톨릭의 자부심을 담은 교회를 짓도록 했다. 하지만 그 교회가 지금의 '그라나다 대성당'은 아니다. 이사벨 여왕이 세운 교회는 인근의 '산 제로니모 수도원'이다. 하지만 여왕의 손자대에 이르러 비로소 '그라나다 이슬람 사원(메스키타)'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대성당이 만들어지게 된다. 리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였던 나스르 왕조가 직전까지 통치거점으로 삼고 머물던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를 보면 그라나다로 쫓겨온 그들이 세웠을 '그라나다의 메스키타' 또한 엄청난 위용에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가득찼었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을것만 같다. 하지만 이사벨 여왕과 스페인의 카톨릭은 그 흔적까지도 철저하게 지워버리고자 했다. 여왕이 주로 머무는 코르도바의 알카사르와 차마 훼손하지 못한 알함브라 궁전이면 눈 감아줄 수 밖에 없는 이슬람의 흔적으로는 이미 너무도 충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라나다 메스키타는 기초석만 남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리고 훗날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 카알 5세는 당대 스페인의 최고 건축가였던 엔리케에 가스 (Enrique Egas)로 하여 파괴된 이슬람 사원 자리에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설계하도록 했으며 건축을 감독하도록 했다.
1529 년 Egas가 사망함에따라 Burgos 태생의 조각가이자 건축가 인 Siloam의 Diego로 대체되었는데, 그는 1517 년 나폴리 여행을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Siloam이 사망 한 후 Juan de Maena, Juan de Orea 및 Ambrosio de Vico를 비롯한 유명한 건축가가 르네상스 대성당에서 일하면서 여러차례 수정과 설계변경이 뒤따랐으나 그래도 처음 시작할 당시의 고딕적 독창성은 이미 건물에 남아있었다.
이 시기에 실로암은 대단히 파격적인 시도로 본래의 건물에 현재의 '왕실 예배당'을 포함하는 다섯개의 독창적인 공간(Capilla)을 새롭게 만들어 붙였다.
또한 이 시기에 이사벨 여왕은 실로암으로 하여금 인근에 '제르니모 수도원'을 함께 건설하도록 했다.
첫 삽을 뜬 지 130여년이 지나는 동안에 여러 건축가가 바뀌고 설계가 변경되곤 했다.
당시의 그라나다에는 아주 악명이 높은 부랑자 청년이 한명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그는 이미 그라나다를 넘어 스페인에서 정평이 나 있는 화가이자 건축가였다. 그는 분명 천재였으나 사고뭉치였으며 마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천재 카라바조를 연상 시켰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스페인의 필립 4 세 (Philip IV)는 이 악명높은 천재 사고뭉치 알론조 카노 (Alonso Cano)를 대성당 수석건축가로 임명했던 것이다.
지금의 '그라나다 대성당'이 있게만든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바로 이 사고뭉치 알론조 카노이다.
르네상스 양식 건축이라 평하지만, 알론조 카노에 의해서 비로소 바로코 양식을 도입한 대성당의 웅장한 외관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는 진정한 르네상스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예술가이자 장인이었다. 대성당 정면의 파사드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정면의 파사드 뿐만이 아니라 대성당의 부속건물이기는 하나, 하나하나마다 매우 독창적이면서도 독립성을 가진 다섯개의 캐필라로 연결되는 톨로나, 외부로 통하는 개별적 문 주위의 치장만을 살펴보아도 그의 천재성과 다양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삼위 일체 예배당 (Triinity Chapel)' 이나 '왕실 예베당( Chapel Rear)'에서 우리는 카노의 놀라운 그림과 조각들도 만나 볼 수가 있다. 카노는 매우 거칠고 난폭한 성격이었으며 누구도 그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대성당 건축기간 동안에도 성상을 일부 파괴하는 등 숱한 기행을 일삼았다. 그는 중죄로 처형될 수 있었으나....... 그의 놀라운 천재성은 이를 비켜갈 수 있게 만들었다.
그라나다 대성당은 충분한 자연빛의 채광으로 실내가 밝고 온화한 것이 특징이다.
흰대리석. 사암. 화강암을 적재적소에 골고루 사용한 내부는 높고 웅장하다.
한마디로 대성당은 멋지고 웅장한 정면의출입구와 정교하면서도 몹시 아름다운 파사드로 유명하다. 또한 내부는 르네상스 양식의 전형답게 화려함의 극치를 여실히 잘 드러내고 있다.
살펴보면 살펴 볼 수록 알론조 카노가 얼마나 뛰어난 천재인지, 화가이지 조각가이면서 건축가였는지를 잘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하였음에도........ 레콩키스타의 성공과 카톨릭의 자부심과 영광을 위해서 인근에 '제로니모 수도원'을 지은 여왕이었다면.......
이슬람 양식의 '그라나다 메스키타'를 그대로 두었더라면 안되는 일이었을까?
사라진 메스키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왕실 예배당(Capilla Rear)'.
그라나다 여행에서 알함브라 궁전만큼이나 유명한 곳이 바로 (왕실 예배당)이다.
그런데 왕실 예배당은 별도의 건물이 아니라 분명하게도 '그라나다 대성당'에 속한 부속건물 중의 하나이다.
'이슬람을 몰아내고 스페인을 통일한 이사벨 여왕의 명에 의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영광과 기쁨을 모두 성모 마리아에게 받치고 카톨릭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세워졌다.'라고 대부분의 여행 안내서와 가이드들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렇게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따지자면, 위의 설명은 상당히 애매모호하고 더러는 그릇된 이야기가 된다.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 대성당 자체를 알지 못한 채 사망했다.
(왕실 예배당)을 설명하자면 (그라나다 대성당)과 (산 제로니모 수도원)을 비교하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책자마다 내용과 연도까지 서로 다르게 표기된 것이 대부분이다.
하여, 짧게나마 내가 공부하고 알고 있고 실제로 살펴 본 결과에 근거해서 (왕실 예배당)과 (대성당)에 대하여 분명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1504년 9월 13일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의 메디나 델 캄포에서 왕실의 칙령이 담긴 증명서가 발표되었다.
내용은 그라나다의 한복판에 있는 이슬람 사원(메스키타)를 완전히 헐어내고 그 자리에 왕족을 위한 무덤을 만든다는 칙령이었다. 이는 곧 언제가 죽음을 맞게 될 이사벨 여왕이 남편과 함께 묻힐 무덤을 사전에 건축하고자 한다는 뜻이었다.
이전까지 그라나다는 스페인 영토에 남아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술탄국의 수도였다. 1492년 마지막 아랍 왕이었던 보아브딜로 부터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스페인은 이사벨 여왕(양왕)의 헌신적인 구국투쟁 덕분에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였던 것이다. 마지막 격전지였다는 역사적 의미에다가 자신들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그 역사적인 장소에 자신들이 영예롭게 묻히기를 원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특히 이사벨 여왕의 알함브라 궁전에 대한 간절하면서도 영원한 사랑이 담겨 있기도 했다. 그녀는 레콩키스타의 중심이었던 코르도바가 아니라 이곳 그라나다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1505년 왕실의 칙령에 따라 이슬람 사원을 허물고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무덤은 건축가 엔리케 에가스에 의해서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왜냐면 이사벨 여왕은 평생동안 이상하게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덤은 1517년 완공되었으며, 세례 요한과 신약성서의 저자 요한에게 헌정되었다. 이것이 바로 (Chapel Rear) 이다.
하지만 이사벨 여왕은 무덤이 완공되기 전에 죽었다. 하여 다른 수도원에 임시로 모셔져 있다가 무덤이 완공되기 직전인 1516년 남편 페르디난도가 죽자, 그때 함께 지금의 왕실 예배당에 묻혔다.
(왕실 예배당)은 이사벨 여왕의 무덤으로 완공이 되었으나, 이때까지도 대성당의 흔적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왕실의 칙령으로 왕실 예배당 건설을 명령한 뒤, 이사벨 여왕은 역사적 성지 그라나다에 승리한 카톨릭의 영광을 기리기 위한 교회 건립을 또한 명령했는데, 이때 이사벨 여왕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는 바로 (산 제로니모 수도원)이다. 이사벨 여왕과 대성당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제로니모 수도원의 위용에 비해서 왕살 예배당의 규모나 위용이 너무도 초라해 보였음일까?
여왕의 외손자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알 5세)가 왕실 예배당의 바로 옆에 당시로서 최고 최대의 교회를 짓도록 명령했다.
왕실 예배당을 건설한 엔리케 에가스가 대역사의 책임을 맡아 '그라나다 대성당' 건축이 시작되었으니 1523년의 일이었다. 카알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등극(1519년)한지 몇년 지나서의 일이었다.
이렇게 카알 5세에 의해서 시작된 교회는 장장 180년이 지나서야 종탑의 상층부만을 남겨놓은 채 완공되었다.
그 건축의 중간쯤에서 건축가 실로암은 이 (왕실 예배당)을 기존의 대성당에 이어 붙여서 하나의 부속건물로 만들었다. 다른 네개의 채플을 더하여 다섯개의 부속건물이 대성당에 속하게 된것이다.
왕실 예배당에는 이사벨 여왕 부부 외에도 딸 후아나와 사위 펠리페와 함께 증손자인 미겔 타 파스 무덤이 함께 있다.
뿐만 아니라 여왕이 사용했거나 소장했던 유품과 미술품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가치로 따지자면 오히려 본건물인 대성당 보다도 더욱 귀중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 그라나다를 통치한 마지막 아랍 왕 (보아브딜). 이사벨 여왕에게 항복하고 모로코로 건너갔다.
--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를 성공시킨 스페인의 위대한 군주 (이사벨 여왕의 죽음)
그라나다는 워낙 아름답고 볼 것들이 많다.
여행자로서는 충분히 그라나다와 사랑에 빠져볼만 하다고 말하겠다. 가능하다면 여러 날 머물러 보시라 권하고 싶다.
우리가 머문 나흘간의 시간은 행복했지만...... 아쉬움속에 떠나와야만 했다.
다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본다...........
--- 다음이야기에서 그라나다의 다른 모습과 이야기를 올려드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