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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3월경 카톨릭의 윤형중 신부(당시 한국순교복지수녀원 신부)와 권순영 판사(당시 서울지법소년부지원장)간에 시작된 사형폐지 논쟁에 강원용 목사(경동교회, 2006년 작고)가 참여해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을 밝힌 글입니다. 윤형중 신부가 <동아춘추(東亞春秋)>라는 잡지 1962년 12월호에 사형제도를 존속시켜야한다는 글을 발표한 후, 강원용 목사가 같은 잡지 1963년 4월호에 <교수대의 밧줄과 신앙 - 목사로서 윤신부에게 대신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윤신부의 견해를 반박하는 글을 기고한 것입니다. 이 논쟁은 사형제도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개적인 논쟁으로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고 합니다.
"...첫째, 살인범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보복하는 것이 자연법이 요구하는 응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윤신부가 말하는 자연법이란 기독교의 자연법일 텐데, 가독교의 자연법이란 하나님의 신적인 창조의 명제(命題)를 의미한다. 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불의하게 죽이는 것은 정의를 파손하는 행위'라는 윤신부의 말에는 동감이지만 살인자를 죽여서 보복함으로써 정의가 성취된다는 견해에는 동조할 수 없다. 보복의 감정은 자연스러운 감정이긴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의(義)는 아니다.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 정당한 보복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반항한 인간의 타락한 본능이며, 칼 바르트의 말대로 인간으로서의 겸손을 잃어버린 결과다. 사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불완전한 인간의 판단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둘째, 고의적 살인범을 그대로 살려두는 것은 국가가 위탁받은 복수를 실행치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복수가 국가가 위탁받은 것이란 말인가? 또 복수를 위탁받았다 해도 그 복수가 사형까지 의미한다는 말인가?
나는 이런 전제로부터 받아들일 수가 없다. 윤신부의 말에 따른다면 오늘날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있는 많은 선진국가들은 국가가 할 일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말인가?
나는 국가가 근본적으로 위탁받은 것은 복수나 사형같은 것이 아니라 국가공동체의 성원 모두를 보호해주고 잘 살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행형의 목적도 복수나 처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형자의 교육과 치료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형의 경우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국가가 절대적으로 선하고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사상처럼 무서운 사상은 없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국가사상이야말로 하나님 이외 모든 것의 비절대화를 얘기하고 있는 기독교정신에 어긋나는 반기독교적인 것이다. 살인죄까지 포함해서 모든 악은 '비교적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재판도 유한하고 상대적인 인간이 하는 것이기에 오판이 있을 수 있다. 오판으로 사형이 집행되었을 경우, 후일 그 사실이 밝혀져도 회복할 길이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셋째, 윤신부는 살인죄인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살인죄를 예방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나, 이는 이미 역사를 통해서 실증적으로 허구임이 드러나 버렸다. 역사를 살펴 보면 사형이 있다고 해서 살인죄가 줄어들지도 않았고 사형이 폐지되었다고 해서 사형에 해당했던 죄가 늘어나지도 않았음을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다. 따라서 사형을 존속한다고 해서 살인죄가 예방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넷째, 살인범을 사형에 처하지 않고 살려두는 일이 국가의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권판사의 말처럼 한마디로 인간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가공할 사고방식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윤신부는 '아마 생명의 존엄성을 너무나 높이 평가해서 이런 논리가 나오는지도 모른다. 남의 존엄한 생명을 고의로 박탈한 죄악의 생명이 국민의 세금으로.....'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보다 자세히 밝혔으나 이같은 생각 역시 나는 동조할 수가 없다.
윤신부는 너무나 높이 평가되는 '존엄한 생명'과 명대로 살 이유가 없는 '죄악의 생명'을 명확하게 갈라놓고 있는데, 성서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기준으로 할 때 그렇게 존엄하고 순수한 생명 속에 들어갈 사람도 없고 반대로 명대로 살아서는 안될 죄악의 생명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의 증언일 뿐 아니라 윤신부와 내가 함께 존경하는 성 어거스틴의 사상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의로운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살인죄까지 포함해 인간의 모든 악은 '비교적,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 단독적인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심판은 절대자이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상대적이고 유한한 인간 존재가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서 사형에 처해지지 않았던가? 나는 죄인인 삭개오와 막달라 마리아의 집을 찾아 가시고 살인범 바라바가 죽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은 그리스도만을 똑바로 보고 모든 문제를 그 빛에 비추어 판단하려는 것이다."
이 글이 발표된 이후 아무런 반박이나 지지 의사의 공개적인 표명이 잇따르지 않아 우리나라 최초의 사형폐지 논쟁은 이 글을 마지막으로 종결.
첫댓글 가톨릭 신앙의 취약성을 온몸으로 증거하신 분...^^
X맨이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