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잘 것 없는 20쪽 내외의 작은 잡지이지만, 내가 해방 이듬해 이를 시작할 때는, 그래도 3, 4년만 고생하면 38선도 열리고 독자도 적어도 6, 7백 정도는 될 것으로 보고, 이 정도면 밥도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근 20년이 되었는데도 38선은 굳어만 가고 독자라고는 채 300도 못됩니다. 우인(友人) 가운데는 ‘무교회잡지’라는 부제(副題)가 교회인들에게 거슬리는 모양이니 이를 떼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무교회를 무정부주의나 과격사상처럼 무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주의자들은 종교를 의식으로, 제도로, 또는 교리나 신학으로 알고 있으며, 이를 또한 외국으로부터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제도나 모방으로써는 민주주의 제도 하나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종교란 더더욱 양심의 일이고 영혼의 일입니다. 인생의 본질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제도나 모방으로써는 정치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무교회란 결국 기독교 신앙을, 한국 사람으로서, 경전 자체, 진리 자체에 의해 본질적으로, 생명적으로 파악해보려는 노력입니다. 입교(入敎) 백년에 아직도 토대가 못 잡히고 무기력하게 추태와 소란만 떨고 있는 우리의 기독교 현실에서 이는 응당 필요한 노력이 아닐까요? 현대인들은 정치요, 과학이요 하고 떠들지만, 사람이란 도덕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아무도 부모나 자식, 친구를 과학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실로 도덕이야말로 사람을 짐승과 구별하는 것입니다. 짐승에게는 정치도 학문도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 20년 역사가 우리에게 이를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종교야말로 도덕 이상의 것으로, 실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덕이란 칸트가 말한바 하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으로, 하나님에게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모세의 십계명이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 없이 도덕의 실천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과연 민족의 이 도덕적 현실에 대해 도저히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나 경제의 상태가 어떠하든 간에 말입니다. 탕자의 어버이는 도저히 마음 놓고 눈을 감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가 망신을 무릅쓰고 처자(妻子)를 희생하며 자비량(自備糧)으로 반생(半生)을 본지에 매달린 한 가닥 이유라면 이유인 것입니다.
정치와 과학은 인류의 도덕에 대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이의 복잡성과 발전은 오늘날 인류 문명을 오히려 파행상태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 최고의 도덕적 교훈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산상수훈을 상기하는 바입니다. 톨스토이도 간디도 모두 이를 인류 최고의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원자문명, 우주과학의 출현은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아니 인류에 대해 이 산상수훈의 실천을 강요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탄 원리의 발견을 뉘우쳤다고 하지만, 우리는 한걸음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제2의 종교개혁으로 인류의 도덕적인, 아니 영적인 일대 비약과 발전을 기해야 할 때가 온 것으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