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나 자신은 경향(京鄕)의 지우(誌友) 20명 정도를 예상하고 자리를 마련했습니다만, 이렇게 많은 선배 지우가 멀리 지방에서까지 모여주시고, 신앙의 좋은 말씀과 뜨거운 격려를 주시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잡지로서 월간 간행을 제대로 못한 것이 무엇보다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이는 여러분이 지금 걱정해주신 생활이나 비용 때문이라기보다는, 더욱 나의 불학(不學), 나태, 불신에 기인한 신앙생명과 사상의 빈곤에 있었던 것으로, 이제 나 자신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은 사명을 행하는 자를 절대 굶겨 죽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물질적인 불평은 믿음에서 볼 때 이유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분께서 공적인 면에서 부족한 나의 잡지에 대해 과분한 기대와 격려를 주셨습니다만, 나 자신은 오직 이를 나의 부족한 공부삼아, 일삼아 해온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나의 내심의 문제, 양심 문제, 신앙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를 해온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25년 전입니다. 그 때 나는 당시 청년들을 휩쓴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내 딴에는 힘을 다하여 소위 기독교 정신으로, 서울 마포 어느 토막민(土幕民) 빈민 부락에서 밤낮으로 거의 3백 명 되는 청소년들의 교육과 7, 8백 세대의 생활 향상을 위해 두어 명 우인들과 함께 희생적인 봉사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때 청소년들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선선이 죽을 수 없는 존재임을 느꼈습니다. 내 심중의 죄악의 문제에 봉착한 것입니다. 한편 소위 사회사업에 대해서도 이것이 사회문제, 인생문제의 해결에 최선의 길도 아님을 느끼게 되어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것입니다.
이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교신 선생께서, 정 괴로우면 일본에 가서 우치무라 계통에서 성경을 배우도록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곧 도쿄의 쓰카모토(塚本) 선생 일요 성서연구회에서 부족한대로 10년 동안 참석했습니다. 원래 두 가지를 못하는 성격으로, 부친의 요구이던 의학도, 나의 취미인 역사도, 희망인 미술도 다 포기하고, 실로 배수의 진을 치고 이 모임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10년이 경과한 해방 직전 무렵, 전쟁도 시끄럽고 고향에 돌아가 조용히 공부한다고 귀국하여 결국 이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지금은 불만이 없습니다. 나의 기질에 맞는 정치판에라도 나갔으면 지금쯤은 형무소에 있을 것이며, 역서 공부를 해봤댔자 기번(Gibbon)이 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림을 했어도 피카소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니, 이제 최후로 더욱 열심히 나의 일, 나의 내심의 문제, 영혼의 문제를 위한 성서 공부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나는 지금 인생 50에 더욱 하나님 앞에 죄인의 괴수임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