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 : 2013.03.04(월)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행코스 : 삼선교역→당고개역→덕릉고개 예비군 훈련장→ 흥국사 →목향원→덕흥대원군 묘
*산행시간 : 약 1시간30분
*날 씨 : 맑음
*여행지 : 덕흥대원군의 묘 설명
덕릉마을 서쪽 언덕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의묘역이 자리해 있다.
덕흥대원군은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8번째 아들로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소생이다.
이름은 이초(李岹)로 1530년에 태어났으며, 겨우 9살에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를 지낸 정세호(鄭
世虎, 해주 정씨)의 딸과 혼인하여 하원군, 하릉군(河陵君, 덕흥군의 형인 금원군<錦原君>의양자
로들어감) 그리고 하성군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다.
하지만 명줄이 지극히 짧아 1559년, 불과 29세의 나이로 평범하게 인생을 마친다.
그의 존재와 무덤은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왕족과 마찬가지로 자칫 잊혀질
존재가 될 뻔 했다. 허나 천운이 그들 부자(父子)에게 있었는지 막내 아들인 하성군 이균(河城君
李均)이 왕이 되면서능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음은 물론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란 상징적인 의미까
지 지니게 되면서일약유명해진다.
덕흥군의 형인 명종(明宗)은 후사도 남기지 못한 채, 1567년 홀연 승하해 버린다. 왕실에서는 마
땅한 적임자를 물색하다가 덕흥군의 막내인 하성군을 왕위로 추대하니 이가 곧 임진왜란으로 허벌
나게 고생을 했던 조선 14대군주 선조(宣祖)이다.
선조는 부친(父親)이 후궁 소생이라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왕족이긴 하지만 엄밀
히따지면 서얼 왕족이라 정통성(正統性)이 크게 떨어진다는 큰 약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약점을 극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부친에 대한 효도의 일환으로 즉위 이듬해인 1568
년 대원군 제도를 시행, 그1호로 부친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追尊)한다.
그래도 성이 차질 않는지 부친의 묘역을 릉(陵)으로 높이려고 했으나 신하들이 법도에 어긋난다며
쌍수들며 반대했다.
그러자 선조는 '과인(寡人)이 임금이 되어 아비의 묘를 마땅히 왕릉으로 높이려고 하는데 그것이
어찌법도에 어긋난다는 거요!' 강하게 불쾌감을 표했으나 역시 어림도 없었다.
상심에 빠져있던 쪼잔한 선조에게 어느 날, 내관이 좋은 방도가 있다며 은근히 아뢰기를
'흥인문(興仁門) 밖 숯포에 사람을 보내 나무와 숯을 지고 온 나뭇꾼들에게 어디서왔는지 물어서
덕릉을 지나왔다고 하면 밥과 술을 대접하고 나무와 숯값을 후하게 쳐주십시요.그러면금세 덕흥
대원군의묘가 아닌 덕릉으로 소문이 날 것입니다'
내시의 건의에 방긋 미소를 띄운 선조는 바로 흥인문(동대문) 밖 숯전에 막대한 돈을 뿌리기 시작
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면 안되는 게 없는지라, 돈을 뿌린 만큼 정비례의 효과가 나타나 선조를
기쁘게 했다. 그야말로 본전 그 이상을 뽑은 셈이다.
나뭇꾼들의 입소문은 불암산, 수락산 부근 나뭇꾼 뿐 아니라 한강이 흘러가는 경기도 서남부 지역,
멀리 강원도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정말 덕흥대원군 묘역이 어딘지도 모르고 근처에 갈 일도 없
는 강원도와 타 지역 나뭇꾼들까지 한몫 챙기고자 뗏목에 나무를 바리바리 싣고 올라와 너도나도
덕릉을 지나왔다고 우기니 순식간에 덕흥대원군의 묘는 '덕릉'으로 자연히높여진 격이 되었으며
'덕릉'은 그 시절 최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그래서 흥국사 아래 마을은 덕릉마을이 되었고, 상계동에서 청학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도 '덕릉
고개'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덕릉의 관리를 위해 1568년 흥덕사(흥국사)를 원찰로 정하고 막대한 재정을지원했다.
이렇게 엄청난 돈을 발라가며 '덕릉'으로 격상시키는데 성공은 하였으나 선조가 세상을 뜬 후에는
'덕흥대원군의 묘'로 명칭이 복귀되었으며 실록(實錄)에도 덕릉 대신 '~묘'로 표기되었다.
덕흥군의 아내 정씨는 인달방(사직공원 부근)에 살면서 조선 왕실의 또 다른원찰인 북한산 화계
사(華溪寺)를 문이 닳도록 찾아가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