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0.10.1 처음으로 38선을 넘어, 10월에는 평양과 함흥을 점령하고 압록강 국경을 향해 북진을 강행한다. 맥아더 총사령관은 병사들에게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맞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그때 대규모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이었다. 맥아더의 오판? 중국 참전하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한국전쟁 70주년기획 오늘 세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무려 5000분의 1 확률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기사회생한 국군과 유엔군이 북으로 북으로 전진을 하고 있습니다.
박상영/작가: 이게 사실 국군이 38선을 돌파한게 얼마나 기념비적인 사건이냐면 그날이었던 10월 1일이 무슨 날인지 여러분 아시나요?
최원정: 국군의 날이요.
박상영: 맞습니다. 국군의 날로 지정을 할 정도로 굉장히 기념비적인 날이었는데요. 저쪽에 사진을 보면, 당신은 지금 육군 3사단에 의해서 돌파된 38선을 통과하고 있다 라는 의미라고 하네요.
최원정: 저희가 중학생 때만 해도 국군의 날은 법정 공휴일 이었어요. 달력에 빨간 날이었어요. 굉장히 기쁜날이잖아요.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진짜 기적인 것 같애요. 9월까지만 해도 낙동강까지 밀려났는데 인천상륙작전 한 달만에 평양을 거의 다 점령하니까 (1950.10.19), 정말 믿겨지지가 않아요.
허진모/작가: 그야말로 진격의 유엔군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보름만에 38선과 빼앗겼던 땅 대부분을 수복했고 한 달도 안돼서 10월말에는 압록강까지 도달했습니다. 참, 한마디로 파죽지세였죠.
정병준/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당시 분위기로 보아서는 통일은 임박했다 따놓은 당상이었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정부가 1950.11.20에 국토통일기념우표를 3종 세트를 발매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 우표입니다. (국토통일기념우표, 4283, 100원 대한민국 Korea).
이시원: 백두산에 태극기가 딱 꾲혀 있네요.
정병준: 그당시 3종이었는데 백두산 천지우표 100원이었구요. 이승만 대통령 얼굴이 들어간 우표 100원이었구요. 그 다음에 유엔기와 태극기가 들어간 우표는 200원이었습니다.
박상영: 상당히 미국거라 쳐주었네요~
정병준: 유엔을 쳐준 거죠~
이시원: 근데 이게 조금 샴페인을 빨리 터뜨린 거 아닌가요? VCR 보니까 중국군이 압록강 주변에 쫙 깔려 있던데~
정병준: 네, 사실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김칫국을 너무 빨리 마셨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10.15 이후에 중국인민지원군이 세방향으로 도강을 하기 시작했구요.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지휘부와 병사들은 모두 다 이제 전쟁은 끝났다. 크리스마스는 집에 가서 보낼 것이다 라고 맥아더 장군도 얘기했고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최원정: 그야말로 통일이 바로 눈 앞에 있었는데~ 중국의 개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중국군 하면 우리가 人海戰術로 유명하잖아요.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서 무시무시한 파워를 자랑하는 ~그렇죠?
이시원: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면, 중공군들이 떼로 몰려오는데 진짜 어마어마하잖아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세명당 한자루 총밖에 안주었다고 그런말도 있었구요.
박상영: 그리고 고수 주연의 영화 고지전 기억나시죠? 되게 인상적인 장면이 밤에 전투를 하는데 번개가 한번씩 칠 때 마다 중국군들이 좀비 떼처럼 밀려들어와서~
----------------------영화에서 어둠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중국군--------병사: 우리가 가진 총알보다 중국군 숫자가 더 많다는 거 아세요?-------------------
다니엘: 한번은 이렇게 묘사했더라구요. “달빛 아래 중국군이 밀려오는 모습은 마치 밤바다에 새하얀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라고,
최원정: 하얀 파도, 해일이라고~
허진모: 상대방 군대를 이런식으로 표현을 하고 휴먼웨이브 Human Wave, 인해 人海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다는 것 자체부터가 그쪽의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어갔다는 증거입니다.
최원정: 중국군은 과연 어떻게 해서 인해전술의 대명사가 되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당시 한국전쟁 중국군의 전술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오늘도 이분들을 모셨습니다.
---------------한국전쟁의 비화를 들여드리기 위해 다시 뭉친 이광용, 박금수입니다---------------
이광용: 인해전술, 이게 무기로는 상대가 안되기 때문에 사람 숫자와 총알 숫자를 맞바꾸는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전술입니다 (인해전술(人海戰術)-우수한 화기 대신 다수의 병력을 투입, 적을 압도하는 전술), 人海戰術, 사람 人 바다 海, 이건 물반 사람반도 아니고 사람이 바다처럼 보인다. 대체 병력규모가 어느 정도였기에 이런 표현이 나온 거죠?
박금수: 북진 싯점을 기준으로 중국군과 북한군의 병력은 46만명이었구요. 국군과 유엔군의 병력은 53만명이었습니다. 숫적으로는 중국군이 열세였던 것이죠.
이광용: 이상하네, 그런데, 왜 중국군이 인해전술을 쓴다고 생각을 한 거죠?
박금수: 중국군은 최고의 무기가 박격포, 이 정도로 화력면 또한 유엔군보다 열세였어요. 그래서 병력을 어느 한 곳에 집중시켜서 총공세를 하는 집중공세전략을 취했던 것이죠. 전쟁의 神 나폴레옹이 접전지역에서 늘 기동성을 이용해서 적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해서 우위를 확보하고 승기를 쟁취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했던 중공군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최원정: 참전했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중공군 완전군장 군인등장, 니하오? 워시쭝 허시빙, 일단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연세는 묻지 마십시오, 왜 이렇게 잘 생겼어? 총이 있구요 필수품이죠, 수류탄도 보입니다, 그리고 군장 안에는 이불이 있네요, 그리고 뭘 매달아 놨는데~ 내 밥~
박금수: 이게 바로 미수가루이예요. 미수가루는 한국전쟁 당시에 중국군의 주요 식량이었던 거죠.
최원정: 곡식을 갈아서~
이광용: 식량이었던 거고, 사실 군대에서는 10월만 되도 춥지않습니까 그런데 한국전쟁 당시에 국군은 10월에도 여름군복을 입었다고 해요. 그런데 중국군은 (혹한에 대비한) 누빔군복이에요.
박금수: 그런데 여기서 돌발퀴즈 하나~ 중국군의 군복을 보면은 겉에는 누런색이죠. 누런색입니다. 근데 안은 흰색이에요. 이게 왜 그럴까요?
이시원: 너무 안빨았나보다, 하얀색이었는데 때가 타서 겉은 누런색이 아니에요?
박상영: 그러니까 땅색깔이랑 비슷한 거 같애요.
박금수: 겨울엔 뭐가 오죠? 비가 오나요? 눈이 오죠~ 눈이 오면 사방이 하예지죠, 뒤집어 입는 거예요. 뒤집어 입으면 하얀색이니까 하늘에서 미정찰기가 떠다녀도 중공군의 존재를 인지할 수 없었던 거죠.
박상영: 양면군복이었네요.
박금수: 그리고 군대에서 가장 많이 하는게 훈련도 많이 하지만 삽질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중국군은 야전삽을 가지고 열심히 땅굴을 팠던 거죠. 땅굴을 파서 낮에는 땅속에 숨어있다가 밤에는 이동 및 공격을 개시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위장술을 쓰니까 미군, 유엔군도 중공군이 한반도에 이렇게 많이 들어와 있는지를 눈치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광용: (꽹가리를 가리키며) 저는 이게 왜 여기 있을까? 이거 꽹가리에요. 꽹가리~ 이게 왜 달려 있는 거에요? (중공군에게) 혹시 풍물패 출신이세요?
중공군: 아니오!
박금수: 이 꽹가리는 언제 쓰느냐, 바로 중국군이 공격을 개시할 때 꽹가리를 막 쳤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격을 꽝~꽝~꽝~꽝~ 이 소리에 공포감이 있었겠네요.
이시원: 매드맥스 보면은 전자기타 막 치면서 돌진하잖아요. 무섭잖아요. 매드맥스의 한국전쟁판 이었군요.
박금수: 이런 소리를 들으면 중국군은 더 기세가 등등헤져요. 반대로 우리 아군 쪽에서는 소리가 계속 시야에서 메아리치고 진동을 하니까 실제로 보는 것보다 더 많은 병력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이런 공포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광용: 준비를 아주 철저히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금수: 그렇습니다. 중국군은 아주 강인한 군대였습니다. 항일내전과 국공내전으로 인해서 아주 풍부한 전쟁경험을 가지고 있었구요. 두 다리, 튼튼한 두 다리로 하루에 30 킬로미터씩 이동하는 뛰어난 기동력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동력, 이러한 장점을 극대화시킨 전술이 바로 口袋戰法입니다.
이광용: 구대전법? 그 七대 八대 다음가는 그 전법이라는 九대전법?
박금수: 그 九자가 아니예요~ 口 입구자예요. 袋자는 부대 대자 입구가 넓은 포대, 우리말로는 자루, 그래서 자루전법이라고도 부릅니다. (口袋戰法-적이 깊숙히 들어올 때까지 매복해 있다가 퇴로를 차단하고, 겹겹이 포위해 섬멸하는 전술), 적이 깊숙히 들어올 때까지 (이게 국군과 유엔군) 빠르게 퇴로를 차단해서 고립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겹겹이 포위를 해서 섬멸하는 전법이 바로 구대전법이 되겠습니다.
이광용: 매복을 통해서 할 수도 있겠지만, 곳곳에서 이런 전술을 사용하려면 이동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야 되겠는데~
박금수: 그렇습니다. 하루에 30킬로미터, 이건 어마어마한 행군속도인데요. 실제로 유엔군은 중국군의 이런 진격 속도를 예측하지 못하고 포위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건 어딜가나 중공군이 막 나오는 거에요. 사실은 이동해서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너무 많아 보이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바다 중국군의 바다 人海戰術에 당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박상영: 심리전에서 이미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이광용: 병력도 무기도 장비도 열세였던 중공군이 치밀한 준비를 통해서 전술을 통해서 심리전까지 동원해서 국군과 유엔군을 혼란과 위기로 몰고 갔다는 그런 숨은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저희가 여기까지 일까요. 잠시 후에 돌아옵니다. See you soon.
최원정: 사실 중국의 인해전술을 무시했었거든요. 멋도 모르고 우루루 나온 줄 알았는데 굉장히 사전에 준비를 많이 하고 정신무장까지 갖추고 온 거예요.
허진모: 숫자가 아니고 심리전입니다. 심리전!
정병준: 김일성도 중국이 도와 주지 않는다고 하면 만주에 가서 다시 빨치산을 해야되지 않느냐고 생각해서 낙담해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유엔군이 만세를 부르면서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중국인민지원군이 등장해서 사실 밤에는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친 거예요. 유엔군측에서 굉장히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귀신이 있나? 그렇게 되고~ (이게 또 뭐야? 밤에 중공군이 떼거리로 총을 들고 밀려나옴).
박상영: 잘 몰랐던 소리니까?
이시원: 낯설었겠다~
박상영: 우리한테는 꽹과리 소리가 익숙하지만~
정병준: 여기 교통로를 가는데 산을 돌아서 매복해서 배후를 공격하니까 혼비백산이지요~
다니엘: 그쪽은 심리적으로도 매우 강했어요. 생각해 보면 하루에 30킬로를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미수가루만 먹으면서 하루에 30킬로 걷고 그리고 가서 또 싸워야 되잖아요~
최원정: 중국군은 왜 참전한 건가요?
정병준: (편지를 공개하면서) 중국군이 참전한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이게 김일성과 박헌영이 연명으로 마오쩌둥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시원: 김일성의 친필이에요?
정병준: 네, 네, 똑 같은 편지가 이건 10월1일자로 쓴 편지구요. 9월 29일자로 스탈린한테도 편지를 썼습니다. 사실은 편지를 쓰는 데도 위아래가 있는 거죠! 먼저 스탈린(9.29) 형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 다음에 마오쩌둥(10.1)에게 도움을 청한 편지를 쓴 것입니다.
이시원: 김일성 하면 필체가 우락부락한 느낌이 들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간소한 느낌이 있어서~
허진모: 공손하게 써야할 상황이기 때문에
최원정: 스탈린이나 모택동이는 이 편지를 못읽잖아요~
박상영: 공손한 티가 나니까~
이시원: 우리의 자체 힘으로써는 이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의 특별한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즉 적군이 38도선 이북을 침공하게 될 때에는 약속한 바와 같이 중국인민군의 직접 출동이 절대로 필요하게 됩니다.
박상영: 여기 편지 쓴 날자가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 김일성 박헌영 1950.10.1일로 나오잖아요. 아까 말씀드렸죠. 국군이 38선을 돌파한 그날이 이거 거든요. 그날 이 편지를 쓰게 된 건가요?
정병준: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확하게 얘기하면 날짜는 10.1일로 되어있지만 아마 편지는 서울이 한국군에게 완전히 수복되는 9월 28일 이전에 썼다고 저는 생각됩니다. 왜냐면 편지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면 서울이 다시 점령되게 되면 반드시 적군들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할 것입니다.
이시원: 급하게 SOS를 친거네요~
정병준: 모택동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그러니까 북한이 무너지면 중국도 당연히 위태롭게 된다. 상황을 복기해 보면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군이 양쯔강을 건넜는데 미군이 참전하지 않았어요. 중국이 공산혁명을 성공했는데 그때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이 반드시 개입할 것이다. 중국이 개입할 가능성이 큰데 그런 지역이 서너군데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번째는 한반도, 두번째는 대만, 세번째는 베트남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미국하고는 언젠가는 한판 붙어야 되는데, 가장 좋은 곳은 어디?
일동: 한반도!
최원정: 만만한 곳~
이시원: 양쪽에서 방패막이 같은 그 위치에 처해있다 보니까 하필 우리나라가 여기에 휘말리게 되네요.
다니엘: 갑자기 생각나는데 옛날에 국제관계가 서툴렀을 때도 중국은 북한이 바퍼존(buffer zone)으로 계속 이용되었거든요. 미국이나 자유세계에 밀어부칠 수 있는 필요한 완충지대로 생각하는데~ 사실 임진왜란 때도 같은 상황이었어요. 그때 명나라가 참전했잖아요. 히데요시가 조선을 공격했지만 목표는 명나라 중국 본토였잖아요.
-------------영화 임진왜란 中 히데요시: 명나라까지 내 발아래 두어야하지않겠느냐?-----------
다니엘: 명나라가 조선에서 일본과 싸워서 대륙침략을 막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것같애요.
박상영: 역사저널 그날 임진왜란 편을 보시면은 알 수 있습니다.
허진모: 사실 역사적으로 항상 그런 일이 벌어져 왔었어요. 대륙세력도 마찬가지고 일본세력도 마찬가지고, 항상 한반도는 그 안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했구요. 서로의 방어선에 우리를 최종전선으로 선택을 했었습니다. 사실 중국은 당시 49년도에 국공내전을 완성했기 때문에 일단 자기네 사정이 남의 나라 분쟁에 참전할 사정은 아니었습니다. 정치 경제 민생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었기 때문에 정말 겨를이 없었을텐데 그래도 이렇게 대규모로 참전을 합니다. 그러니까 마오쩌둥이 이 한국전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거죠.
최원정: 이 전쟁의 중국정부 공식명칭이 항미원조 전쟁이라면서요.
정병준: 왜 그러냐 하면 사실은 한국전쟁으로 중국이 미해방지구를 완전히 평정을 했구요. 내부의 반혁명-반당분자를 숙청을 했구요. 토지혁명을 완수해서 지주계급을 타도하고 농민들의 지지를 획득했구요. 또 하나는 항미(抗美)원조전쟁에 대한 지원, 선전선동으로 중국이 총단결하게 됩니다.
최원정: 항미란 단어가 우리는 단순히 북한군을 돕기 위해서 가는게 아니라 진짜 미국과 싸우기 위해서 가는거야 하고 내부단결, 결속을 했다는 거잖아요.
이시원: 근데 너무 아시워요. 만약에 그때 중국이 참전을 안했으면 우리나라가 그냥 통일된 국가로서 있을 수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마오가 침공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순간 또다시 싸움이 시작된 거잖아요.
정병준: 실은 역설적으로 얘기하자면 마오쩌둥이 중국에서 그렇게 추앙을 받을 수 있는 지도자, 전략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라고 하는 점이 여기서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정말 무서운 전략이다!
박상영: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는데요. 지금 화면을 보시면은 뭔가 닮은 거 같지 않은가요. 차남도 삼남도 아닌 장남, 마오쩌둥과 마오안잉 父子의 사진이라고 해요. 자신의 장남을 한국전쟁에 내보낸거죠. 이때 당시에 나이가 29살, 심지어는 신혼 1년차였다고 해요. 근데 참전한지 한달만에 소이탄에 맞아 죽습니다.
이시원: 모택동도 충격이 컸겠네요.
박상영: 마오쩌둥 같은 경우도 이 소식을 정확히 두달뒤에 접하게 되었다고 해요.
최원정: 아버지 입장에서는 격분했어야죠.
박상영: 아들의 전사소식에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중국인의 의리의 표본이다. 아들의 시신을 조선 반도에 그냥 두라고 했다고 해요.
최원정: 북한에 묻혀 있어요?
정병준: 네, 있어요. 그래서 중국의 고위특사가 오거나 신임대사가 오면 반드시 여기에 참배하도록 되어 있어요.
허진모: 그러니까 마오가 뛰어난 정치인인 거죠. 아들의 죽음에 참 마음이 아픈데 정치력을 끝까지 발휘하자.
최원정: 모택동 한테 지금 몇번째 놀라는지 몰라요.
박상영: 진짜, 보통 사람이 아니야.
최원정: 그런데 하여튼 중국은 이렇게 미국을 견제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 미국은 이런 눈치를 못챈거에요?
허진모: 중국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 계속 진격을 하면 개입하겠다는 경고를 계속했었습니다. 하~~ 그런데 맥아더는 이것을 무시했죠. 저것은 정치적인 수사다. 정치적인 위협이라고 굉장히 자신에 넘쳤었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고 그리고 순식간에 남한을 수복하고 그 다음에 북진통일이 거의 가시화되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판단과 다른 정보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트루먼은 생각이 좀 달랐죠. 만약에 우려대로 중국군이 참전을 하면 3차 세계대전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생각해서 굉장히 불안했었죠. 그래서 궁금도 하고 불안도 하고해서 맥아더와 만납니다. 그 만나는 곳이 어디냐 하면 웨이크섬이라고 해서 서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하와이 하고 필리핀의 한 중간쯤 돼요. 그러니까 맥아더 보다 트루먼이 날아와야 할 거리가 훨씬 더 먼데 그런데 직접 가서 맥아더를 만납니다.
최원정: 웨이크섬에서는 무슨 얘기를 나누게 되나요?
다니엘: 그거는 저희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최원정: 두분 다 그럴 듯 해요, 허진모/해리 트루먼 대통령役, 다니엘/더글러스 맥아더 총사령관役--------------------
트루먼: 장군,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귀관의 의견은 어떠하오?
맥아더: 대통령님, 우리가 중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트루먼: 그렇게 자신하는 이유는 뭡니까?
맥아더: 중국군에는 공군이 없거든요. 중국군이 만일 평양으로 밀고 내려온다고 해도 미국공군의 압도적인 힘으로 중국군을 다 싹 쓸어버리겠습니다.
트루먼: Really? -------------------------(연기 끝)--------------------------
최원정: 그런데, 맥아더 장군님, 지금 중국군이 수십만이 내려오고 있는 상황에서 왜 자신만만 하신 거예요?
이시원: 인천상룩작전이 5000 분의 1의 확률로 성공을 했잖아요. 지금 한참 어깨에 뻥이 들어가 있잖아요.
다니엘: 김일성도 맨 처음에는 유엔군이 개입안할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맥아더가 북한에 갔을 때는 중국군이 안들어올거라는 그런 확신이 있었는데~ 사실 쌤씽이죠.
정병준: 맥아더한테 이건 데자뷔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단언한바 있구요. 그 다음에 한국전쟁 이전에도 북한군이 침공하지 못할 것이다 라는 오판도 있었고 또 웨이크 섬에서도 대통령이 중국군의 참전할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다 참전해도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2~3만명도 안된다고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10월 15일에 마오쩌둥의 결정 이후에 약25~30만명이 이미 한반도에 들어와 있었구요. 맥아더의 전황판단은 사실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최원정: 오판이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정병준: 오판이죠, 이외에 또 하나는 뭐였냐면 참전 하더라도 공군력으로 중국의 병력을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니엘: 그런데 중국은 정말 공군이 없었잖아요?
정병준: 네, 중국은 공군이 없지만 중국에는 소련이 있었습니다. 마오쩌둥이 참전을 결정하고 난다음에 공군지원이 어렵다, 몇 개원 뒤에 가능하다고 하던 소련이 즉각적으로 공군력을 지원하게 됩니다. 소련에서 연인원 12개 비행사단, 그리고 4개 고사포사단이 참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참가했습니다.
박상영: 바로 전까지만 해도 지원 못해준다던 소련이 갑자기 그렇게 태도를 바꾼 이유가 뭔가요?
정병준: 사실 스탈린은 한국전쟁에서 북한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보다는 마오쩌둥이 자신에게 충성하는지 모스크바의 노선에 얼마나 잘 추종하는지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스탈린이 정해놓은 노선으로 들어오게 되자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을 하게 되는 거죠.
박상영: 한번 테스트를 해보고 그 다음에 통과했다 라는 그런 징표로 보내준 거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허진모: 사실 소련에 의해서 지원된 전투기가 50년 11월 1일에 압록강 상공에 갑자기 나타납니다. 그래서 난데 없이 나타난 소련 전투기가 미군 전투기를 공격을 합니다. 바로 이 전투기인데 미그-15입니다.
이시원: 혹시 이게 오데로 갔나 오데로 갔나 오데가 오데가~ 땅굴 파고 토껬나 미그기 타고 날랐나~ 했는데 그 미그기가 이 미그기 인가요?
허진모: 네, 옛날 노래인데~ 그만큼 미그기 타고 나를 정도로 빠른 전투기였죠. 이 전투기 때문에 미군은 많은 피해를 입습니다. 특히 B-20 폭격기 같은 경우는 공격을 많이 받아요.
다니엘: 탑건 영화를 보면, 톰 크루즈가 항상 미국과 함께 싸우잖아요. 반대편 전투기 이름이 항상 미기예요.
정병준: 사실상 이 전투기가 무시무시했던 것은 미군의 전투기들은 기관총을 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그-15기는 3개의 회전 기관포를 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화력이 어마어마했던 거죠.
허진모: 그런데 소련은 자신이 참전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이 전투기에 표시를 달리합니다. 전투기에 이렇게 표시를 달리하는 것을 라운델(Roundel) 이라고 하거든요. 이 라운델을 인민군이나 중국군 표시를 했구요. 그리고 파일럿트 복장을 중국군 복장으로 하였고 말도 중국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박상영: 왜 그렇게 했어요?
이시원: 숨길려고~ 소련이 참전 안한 걸로 하려고~
최원정: 조종사는 소련 사람이었던 거죠?
허진모: 네, 사실 트루먼이 확전을 경계한 만큼이나 스탈린은 정말 확전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알면서도 서로 쉬쉬했던 거죠. 그런데 이 전투기의 등장으로 인해서 맥아더가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던 미국의 공군력, 제공권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비행기들은 동네 마실 다니듯이 돌아다녔어도 돌아오는데 크게 문제는 없었어요. 대공화기에 의해서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그런데 인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미그기의 성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미국도 새로운 전투기를 투입합니다. 전투기까지 공중에서 벌이는 공중전을 dog fight 라고 합니다.
최원정: dog fighting 개 싸움?
허진모: 그때 미국이 부랴부랴 투입했던 공군기가 뭐였냐면 F-86 세이버~
이시원: 모양이 아까봤던 미그기랑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데요~
박상영: 그림만 다르게 그려놨지 구조가 거의 똑 같다고 봐도 될 것 같애요.
다니엘: 그 답이 저한테 있어요. 제가 만들었다는 것 아니고, 그게 뭐냐하면은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처음으로 제트기를 만들다가 패전했잖아요. 그걸 또 누가 만들었냐 하면 우리 할아버지가 같이 만드셨거든요.
최원정: 다니엘의 할아버지가요?
허진모: 할아버지 전범설~?
다니엘: 우리 할아버지가 24년생이셔서 당시는 거의 고등학생쯤 이었잖아요. 그러니까 강제로 시킨거죠. 강제로 시킨건데 전범은 아니고요~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렸을 적 초등학생일 때를 저한테 말씀하셨어요. 자기는 사실 그당시 독일의 첫번째 제트기를 같이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독일이 패전했잖아요. 독일패망 이후 소련과 미국이 각자 제트기 설계도를 가지고 F-86 그리고 미그-15를 만들었다는 거죠.
이시원: 미그-15와 F-86의 원조가 되는 모델을 독일의 다니엘 할아버지가 만드셨는데 참여를 하셨고 그걸 이제 소련과 미국이 갔다 발전시켜서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네요.
최원정: 얘네들이 그러니까 같은 거네요~ (2차 세계대전 당시 같은 편이었던 미국과 소련-한국전쟁에서 적으로 만나다). (미국 VS 소련 세계 최초의 제트기 대결이 한반도에서 벌어지다).
이시원: 한국전쟁이 이상하고 흥미로운 건 중국군이나 소련군이나 참전을 했으면서도 참전 안한척할려는 노력을 했다는게 참 특이한 것 같애요.
정병준: 한국전쟁 이라고 하는게 냉전을 대표하는 가장 대표적인 전쟁인데, 냉전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세계와 자유세계를 대표하는 두 진영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군사적 충돌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말 그대로 cold war 차거운 전쟁을 하는 것이죠.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5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2차 대전으로 수천만이 죽고 모든 국토와 산업시설이 붕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도 사실은 한국전쟁의 지상군의 대부분을 파병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쟁이 더 확전되어서 중국과 전면전이 벌어지고 소련이 참전하게 된다. 그럼 미국은 예비 병력이 없습니다. 당시에 가용한 예비병력은 미국에 있던 한 개 사단 밖에 없었습니다. 수백만의 소련군과 중국군이 참전하게 된다. 미국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소련도 2차 대전에 참혹했던 파괴를 복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핵의 공포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하게되면 공멸이 될지 모른다 라고 하는 우려가 컸습니다. 그렇지만 한반도에서는 정말 끔찍한 총력전, 전면전이 전개되고 있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원정: 중국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에는 공군이 없다 라는 맥아더의 오판으로 인해서 이 전쟁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계속 보겠습니다.
------------------------중국군의 대규모 참전을 알지 못했던 미군은 또 북진했다. 11월에는 개마고원 부근에 까지 다달았다. 그 무렵 한 중국군 병사가 포로로 잡혀왔다. 중국군 포로: 우리는 10월에 압록강을 넘었다. 산을 타고 곳곳으로 전진했다. 너희는 모두 포위됐다. 곧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이틀후 아무도 듣지 않았던 포로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중국군이 사방에서 미군을 기습공격한 것이다. 장진호 전투의 시작이었다 (미해병대 장진호 부근에서 함정에 빠져 Marine Unit trapped at Chosin reservoir).
최원정: 드디어 미국과 중국이 정면으로 붙었습니다.
이시원: 근데 왜 VCR 보면 중국군 포로가 10월말에 넘어왔다. 너희들은 이미 포위됐다 라고 정보를 알려주었잖아요. 그런데 왜 이걸 흘려듣고 당한 걸까요, 아~ 진짜 답답하네요.
정병준: 사실은 중국군 포로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면 말단의 포로들이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역와전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도 할 수 있구요. 그래서 사실은 포로를 잡고 며칠 뒤 개마고원 부근에 장진호에서 중국과 미국이 제대로 붙는다, 아마 미군 참전사에서 유래가 없는 참혹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바로 장진호 전투입니다. (장진호 전투(1950.11.26~12.13)-개마고원 부근 장진호에서 중국과 미국이 맞붙은 전투, 미전쟁사에서 가장 고전한 전투로 기록),
박상영: 저는 장진호 라 그래서 사람 이름인줄 알았어요~ 제 친구 중에 진호가 있거든요.
허진모: 장진호는 함경남도에 있는 인공호수입니다. 장진강을 막아서 장진호가 됐죠. 소양강을 막아서 송양호가 되었듯이~ 그렇게 만든 겁니다. 이 호수는 1934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었습니다. 목적은 흥남의 대규모 질소비료공장을 만들 계획을 했었습니다. 거기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일종의 인프라로 만들었던 거죠.
다니엘: 그런데 장진호 그 호수 쪽에는 산악지형이잖아요. 그러면 중국군에게 훨씬 더 유리했던게 아닌가요.
정병준: 싸움은 붙어봐야 하는 거죠. 사실은 장진호에서 붙은 미군은 해병 1사단입니다. 해병1사단은 태평양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유명한 과달카날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입니다. 무적의 불패의 해병정신의 언제나 충성 이라고 하는 해병불패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 부대구요. 거기에 맞서고 있던 중국은 제9병단이었습니다. 쑹스룬(1899~1991) 이라고 알려져 있던 40대의 젊은 장군입니다. 황포군관학교를 나왔고요. 17살때부터 산전수전 공중전을 치른 유격의 神, 기습의 명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미군이 자랑하고 있는 해병1사단과 중국군의 9병단이 맞붙게 된 거죠.
이시원: 각국의 최강끼리 한마디로 붙은거죠.
정병준: 그렇죠, 병력은 사실 중국군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최원정: 호랑이와 사자의 싸움 정도로~ 로저 페더러냐 라파엘 나달이냐~ 거의 세기의 대결 같은 느낌~
정병준: 중공군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미군은 화력이 세서 포병이나 항공기의 지원을 받을 뿐이지 실제로 퇴로가 차단되고 백병전이 벌어지게 되면 전부 다 꼬리를 내리고 도망갈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최원정: 같은 에이스끼리 맞붙은 장진호 전투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이광용: 장진호에 다다른 미해병대는 크리스마스 총공세 작전 선봉에 서서 공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금수: 미해병대는 보시는 것처럼, 4천명은 하갈우리에, 그리고 8천명은 유담리에 공격선봉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12만명의 중국군에게 삽시간에 포위를 당하였구요. 그리고 양쪽에서 내려오는 중공군들에게 하갈우리 보급로 그리고 고토리까지 순식간에 차단당하였습니다.
이광용: 그러니까 아까 저희가 살펴보았던 부대전술(자루전술)이 바로 이거 아니겠습니까. 중공군의 참전 사실을 모른채 미해병대는 중국군이 기다리고 있는 장진호까지 제발로 걸어들어갔던 거구요. 사방이 중국군으로 둘러쌓인 채 독 안에든 쥐처럼 막혀있는 이런 상황이면 전멸 아니면 전원 포로? 사실상 끝난 것 아닙니까?
박금수: 네, 그렇습니다. 독도 그냥 독이 아니에요. 중간에 장진호가 있어요. 얼어붙어 있죠. 부대들 끼리 서로 협력작전을 펼치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서 포위를 당한 거죠. 그런데 전설의 미해병대, US Marines,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좁은 산길을 따라 하갈우리-고토리, 그리고 흥남까지 무려 100킬로에 이르는 구간을 중공군과 싸우며 퇴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광용: 지도상으로 봐도 좁아요. 길이 이거 하나 뿐인 거잖아요. 게다가 험준한 산악지역 곳곳에 어디에 중공군이 매복해 있을지 모르는 상황~ 제가 당시 미해병대원 마이클 이었으면 이런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마이클: 장군님! 지금 우리 후퇴하는 것입니까?
장군: 어허, 무슨 소리,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야, 약간 다른 방향으로 공격을 하는 거야
마이클: 홧??
박금수: 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니고요, 당시 미해병대를 이끌었던 스미스 장군이 직접 한 말이었습니다. 보세요! 겹겹이 중공군에 쌓여있는 지역을 계속 싸우면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흥남까지 도착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퇴각하면서 싸우면서 이런 작전이 사실 성공하기 쉽지 않은 작전이에요.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공중지원, 그리고 포격지원도 있어야 되고, 부상병후송 등등이 시간에 맞추어 딱딱 진행이 되어야 성공할 수 있는 작전입니다.
이광용: 그런데 이런 부분들이 딱딱 맞아 떨어졌습니까?
박금수: 거의 완벽하게 진행이 되었는데요. 한번은 아주 아주 황당한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이광용에게) 자, 자루 받아 들이고, 더 이상 투시롤이 없어! 어서 빨리 투시롤을 보내라 오버!
이광용: Really 진짜? 투시롤 SOS?
박금수: Absolutely
이광용: 이상하네, 투시롤이 왜 필요하지~ 자, 옛다 투시롤~
박금수: 투시롤 my pleasure, 그건 좀 작다, 왜 작지? 봉투가~
이광용: That’s 투시롤!
박금수: 오~ 마이 갓, 자, 이건 실제상황이예요. 꽁트같죠. 당시 무전병이 요청했던 것은 초코렛이 아니에요, 이 투시롤은 60밀리 박격포의 포탄이었던 것이죠. 비슷하게 생겼죠.
이광용: 비슷하지는 않는데~
박금수: 포탄이 떨어지니까 무전 내용이 중공군에게 노출될 까봐 미해병대의 은어로 포탄 요청을 했던 것인데, 눈치없는 무전병이 진짜 투시롤을 보내준 거죠. 다행이도 이 투시롤이 놀라운 위력을 발휘합니다. 장진호 전투는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총17일간 치러졌습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추위였습니다. 너무 추웠던 거죠. 전투로 사망한 병사보다 凍傷, 얼어죽은 병사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해요. 영하 30도입니다. 영하 30, 영하 30이 되면 상처에서 피가 나잖아요. 그냥 얼어붙어요. 그래서 자동지혈이 된데요. 이러한 맹추위에 가장 중요한 거는 전투식량, 전투식량도 꽁꽁 얼어붙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미군에게 중공군에게는 없는 저 투시롤(Tootsie Roll), 투시롤이 바로 있었던 것이죠.
이광용: 투시롤,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한번 먹어볼까요, 음~ 불끈~ 이런 효과~
박금수: 눈빛이 달라지죠,
최원정: give me 투시롤, 우리도 주세요
이시원: 저도 지금 먹어봤는데요. 카라멜하고 쵸코렛, 쵸코 맛도 조금 나고요, 부드럽고 입에 넣자마자 삭 녹아요.
최원정: 힘이 솟는데요~
박금수: 결국 미해병대는 17일간의 사투 끝에 목표지점이었던 흥남에 도착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투 장진호 전투를 전해드린 박금수, 이광용이었습니다.
최원정: 전쟁이 이렇게 혹독한 추위와 만났을 때 참혹한 결과를 보여주는게 바로 이 장진호 전투입니다.
다니엘: 동계전투 얘기할 때는 주로 스탈린그라드 얘기 많이 하잖아요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8.21~1943.2.2)-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된 독일과 소련의 전투, 6개월만에 200만명의 사상자를 냄), 사실 스탈린그라드 다큐멘터리는 독일에서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 방영이 되거든요. 티브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모스크바전투, 그리고 장진호 전투는 사실 세계 3대 동계전투로 뽑히더라구요.
이시원: 보기 보다 장진호 지역이 훨씬 더 춥다구, 장진호 평균기온이 영하 30도?
박상영: 심지어는 50년만에 찾아온 기록적인 맹추위였다고 해요.
허진모: 연구에 따라서 좀 차이가 있는데요. 해병전략연구서에 나오는 논문에는 최하 영하 45도까지 내려갔다고 합니다(1950년). 적설량은 60센치가 넘었다고 합니다.
이시원: 사진을 한번 본 적이 있어요. 시체의 사진이었는데요. 그게 얼어가지고 땅에 축 늘어져있는게 아니구 그냥 빳빳하게 얼어서 굳어있더라구요. 사진을 보고 진짜 참혹하다고 했거든요. 그런 일화도 있다고 해요.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받고 싶니? 그랬더니 “우리에게 내일이나 달라.”~
최원정: 장진호 전투 참가에 얼마만큼 손실이 있었나요?
허진모: 미해병 1사단은 전사가 718명, 후송후 사망이 98명, 실종이 192명, 부상이 3504명이었구, 비전투손실이 3659명이었는데 대부분 동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전사보다 동사가 훨씬 많은 전투였습니다.
이시원: 전설의 미해병대 피해가 큰데, 중국군은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나요?
정병준: 중국군은 굶주림에 추위에 언감자를 먹다가 많이 동사했습니다. 미숫가루는 사실 개전 초기에 보급된 것이고요. 전쟁이 전개되면서는 거의 식량 보급을 못받았습니다. 그래서 3~4일 혹은 1주일에 언감자 몇 개씩 먹었다고 합니다. 장진호에서 4만이 죽었고 그중에서 3만이 동사했다 라고 보고 있습니다.
박상영: 대부분이 동사했다 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정병준: 그러니까 중국측도 막대한 피해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전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허진모: 이 9병단이 거의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일어나는 공세를 성공적으로 거두지 못하거든요. 만약에 이 9병단이 원래의 목적대로 작전이 성공했었더라면 아마 과장해서 한반도는 포기를 했을 그런 상황에 몰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해병사단의 장진호 전투는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정병준: 한국군 1군단과 미10군단의 병력이 타격은 입었지만 무사하게 흥남철수해서 전투력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부분적인 전투에선 실패했지만 큰 대국에서는 큰 손해를 입지않은 전투가 되었지요. 그렇지만 심리적인 충격이나 타격은 굉장히 큰 전투였습니다.
최원정: 이제 미군과 유엔군이 천신만고 끝에 흥남에 도착을 하는데 여기서 지상 최대의 철수작전이 펼쳐집니다.
------------미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10만 병력 철수가 한창인 흥남부두--------이곳에 몰려든 피란민 20만명----------------철수작전에 없었던 피란민을 태우기로 결정한 유엔군----------------배를 타기 위한 피란민들의 처절한 사투----------흥남부두 폭파를 마지막으로 그들은 남쪽으로 향한다.--------------
흥남철수작전을 지금 보셨는데 스케일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컸던 것 같애요. 실제로 영화 이상일 거예요.
이시원: 그러니까 다들 전쟁을 피해서 살려고 배를 타기 위해서 달리고 있는 장면인데~
최원정: 거기에 나오는 대표적인 노래가 있잖아요, 이시원씨?
이시원: 네, 굳세어라 금순아~ 라고
최원정: 눈보라가 휘날리는~
이시원: 바람찬 흥남부두에~ 이 노래가 흥남철수 작전의 배경이 된 노래잖아요 (굳세어라 금순아(1950)-흥남철수후 부산에 정착한 피란민이 흥남에 남겨진 금순이를 그리워 한 노래).
박상영: 참 구슬픈 노래예요. 그 뒤에 가사를 보면, 목을 놓아 불어봤다 찾아를 보았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이게 사실은 되게 자신의 가족을 잃고 헤매는~ 그런 슬픈 장면을 다루고 있는 가사입니다.
이시원: 그 속에 다 못탄 사람도 있었을 테니까 남겨진 가족도 있고 구출되는 과정에서 서로 헤어지고 못찾고 이런 일들이 많았을 것 같애요.
다니엘: 황정민씨 영화 국제시장에서 자기 여동생 이랑 헤어지게 된 그 순간이랑 찾게 되잖아요.
최원정: 교수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제가 마치 이 노래 교수님이 불러주셨으면~ 하고
정병준: 아까 본 장진호 퇴각에서 철수한 미제10군단과 한국군 1군단 병력이 10만명 정도 있었습니다. 차량이 1만7천대, 군수품이 약35만톤 철수시킨게 방금 보신 흥남 대철수작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미해병대가 흥남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주로 함흥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주민들이 약20만 정도 흥남 부두에 접근하게 됩니다. 굉장한 대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그건 정말 한국판 덩케르크인 것 같은데~(덩케르크(1940.5)-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약40만명의 영국군과 연합군 해상구출작전).
이시원: 얼마 전에 영화도 개봉했잖아요.
허진모: 이게 바로 메러디스 빅토리아 호입니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피란민을 구출한 메러디스 빅토리아 Meredith Victory), 여기 승선인원 60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최원정: 화물선이니까
허진모: 그렇죠, 화물선이니까 전부 다 화물을 싣는 공간이죠. 그래서 화물을 다 없애고 사람으로 채웁니다. 피란민 1만 4천명을 여기에 태우고 3일 동안 항해를 해서 거제도에 닿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구조 라고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데~(the greatest rescue operation ever by a single ship 단일선박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구조작전을 수행한 배), 좀 더 드라마틱한 것은 거제도에 도착한 날이 크리스마스입니다 (9.28 서울 수복후 맥아더의 예언이 이루어지다-신비하다)
박상영: 누가 짠 것 처럼 그날 도착했네요. 또 하나의 드라마틱한 일이 있는데요. 아까 말씀하신대로 승선한 인원이 1만4천명이었는데 크리스마스에 내릴 때는 1만4천5명이었다고 해요. 바로 새생명이 태어났던 거죠. 피란을 오던 와중에 5명이 아이가 태어나서 선장이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김치5 라고 별명을 부쳐주었다고 하네요.
이시원: 전쟁통에도 애는 태어나는구나~ 왜 그렇게 많은 피란민들이 몰렸던 건가요.
정병준: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유엔군에게 협조한 주민들은 보복이 두려워서 떠난다는 것이고요, 미군과 유엔군이 원자폭탄을 쓸지도 모른다는 풍문이 돌았구요, 또 하나는 한국정부가 수송용 배를 보냈다 라는 풍문이 떠돌았습니다. 또 이게 사람전쟁이었기 때문에 북한에 청-장년을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 한국군이 일부 남자들을 징발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모두 다 겹쳐서 사실은 흥남으로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사실 미군으로서는 전쟁수행에 민간인은 방해가 되는 존재죠. 그러니까 민간인 속에 북한군의 스파이나 유격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 피란민들이 사실은 전선을 넘어서 흥남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사람의 바다, 인해가 여기서도 벌어지게 되는 거죠.
최원정: 교수님, 한반도에 당시 원자폭탄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이게 사실인가요? 아니면 진짜 말씀하신대로 풍문에 그친건가요?
정병준: 미국 1급비밀 문서를 본다면 중국군이 개입하고 난 다음부터 최소한 6차례 이상 핵무기 사용이 검토된 것으로 지금 알려져 있습니다 (1950.11~1951.12-최소 6차례 핵무기 사용검토), 예를 들어서 일본 오키나와나 요코타 기지에 40킬로톤의 원자폭탄 120발을 배치할 것을 검토했습니다. 이 원자폭탄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2배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최원정: 리틀보이(히로시마)와 팻맨(나가사키)에 투하한 것보다 더 큰~?
정병준: 네, 네,
다니엘: 히로시마의 두배라고 하면은 그거는 최소한 20만명이 즉사하는 건데, 그건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얼마나~?
허진모: 맥아더 회고록에 중국 만주의 숨통을 따라서 30~50발까지 원자폭탄을 투하해야 했다. 그리고 동해에서 서해까지 50년 내지 120년 효력의 방사성 코발트를 뿌렸어야 했다. 이렇게 강하게 써놓았습니다. 맥아더는 극렬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최원정: 그렇게 되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못태어났을 것 아녜요.
다니엘: 그런데 이해가 안가는게 맥아더도 일본의 상황을 봤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다고 하는 거는 너무 무책임한 건 아닌가요?
정병준: 맥아더 장군은 사실 확전을 요구했습니다. 전선에서 밀리게 되자 만주 중국 본토에 대한 폭격을 강화하고 그 다음에 대만에 있는 장개석 군대를 투입해서 모자란 병력을 전개를 하자 확전하는 것이 전쟁 승리의 길이다, 그리고 원자폭탄을 사용하자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은 미국으로 하여금 빠져나올 수 없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때 영국 수상이던 애틀리가 깜짝 놀라서 워싱턴으로 날아가서 회견을 하게 됩니다. 사실은 전황 자체를 보거나 심리적인 충격을 보자면 미국이 중국의 공세를 억제하기 위해서 원자폭탄을 쓸 가능성, 개연성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결국은 3차 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 라는 우려 때문에 결국은 미국 트루먼이 1951.4.11 맥아더를 해임하게 되면서 원자폭탄의 사용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시원: 천만다행이네요.
최원정: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 진짜로~
정병준: 소련의 수뇌부들도 한반도에서 핵사용에 관한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습니다(1949년 핵개발에 성공한 소련도 한반도에 핵사용 고려), 로디온 말리노프스키 장군 주장에 따르자면 한반도에서 12개 이상의 핵폭탄을 쓴다면 전장을 정리할 수 있다 이렇게 판단하고 있었으니까 사실은 미국이 핵을 쓰겠다고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면 소련도 핵을 썼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을 수 있습니다.
박상영: 들어보면 이게 꼭 한반도 뿐만이 아니라 제3차 대전 핵전쟁으로 안번진 것도 정말 다행인 것 같애요.
최원정: 핵폭탄 얘기까지 나왔다는 것은 이게 수많은 나라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켜 있어서 일방의 의지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그런 전쟁의 양상으로 계속 발전해 가고 있는 거예요.
다니엘: 결국은 서로 과소평가 하면서 김일성도 남한을 과소평가 하고, 맥아더도 중국을 과소평가 하고 서로 다시 공격하고 겸손하지 못하고 끝까지 갈려고 했던 점도 하나의 큰 비극인데 그냥 숫자만 보면 군인 3천명이 죽었다고 숫자로 와닿지 않는데 이제 한명씩 한명씩 희생자를 절대 잊으면 안될 것 같애요.
허진모: 우리나라는 20세기 이후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로 요시기까지 단 한번도 우리의 운명을 우리 손으로 결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이어져온 역사 중에 한국전쟁은 가장 큰 메세지를 주는 사건이었죠. 그러니까 역사는 항상 같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정신 차려라 그리고 힘을 길러라.
최원정: 우리가 한국전쟁 중요 국면마다 지도자 지휘관들의 오판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사실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우리 인류의 오판인 것 같애요.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면서 오늘 시간 마무리 하겠습니다. 전쟁이 막바지로 가고 있는데요. 다음 회에서도 많은 시청 바랍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65회에서 정리).
①1950.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0.10.1 처음으로 38선을 넘어, 10월에는 평양과 함흥을 점령하고 압록강 국경을 향해 북진을 강행한다. 맥아더 총사령관은 병사들에게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맞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그때 대규모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이었다. 맥아더의 오판? 중국 참전하다. 9월까지만 해도 낙동강까지 밀려났는데 인천상륙작전 한 달만에 평양을 거의 다 점령하니까 (1950.10.19), 그야말로 진격의 유엔군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보름만에 38선과 빼앗겼던 땅 대부분을 수복했고 한 달도 안돼서 10월말에는 압록강까지 도달했습니다. 참, 한마디로 파죽지세였다.
② 10.15 이후에 중국인민지원군은 세방향으로 도강을 하기 시작했는데도 한국군과 유엔군의 지휘부는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야말로 통일이 바로 눈 앞에 있었는데,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중국군 하면 人海戰術로 유명, 중국군은 낮에는 땅속에 숨어있다가 밤에는 이동 및 공격을 개시했다. 위장술로 한반도에 많이 들어와 있는 중공군을 미군과 유엔군은 눈치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중국군은 아주 강인한 군대였다. 항일내전과 국공내전으로 인해서 아주 풍부한 전쟁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에 30 킬로미터씩 이동하는 뛰어난 기동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기동력, 이러한 장점을 극대화시킨 전술이 바로 口袋戰法이다.
③ 중공군은 하루에 30킬로미터 라는 어마어마한 행군속도로 유엔군을 비일비재하게 포위했는데미군은 중공군의 이런 진격 속도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다. 사실은 먼저 이동해서 나오는 건데 어딜가나 중공군이 막 나오니까 중공군이 너무 많아 보이니까 우리는 인간의 바다, 중국군의 바다 人海戰術에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중공군은 정신무장과 심리전에서 이미 승리를 거두었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를 많이 한게 드러났다.
④ 임진왜란 때도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쳐들어간다고 서울을 침략하였을 때 그때 명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것처럼 이번 한국전쟁에서도 북한이 위기에 몰리니까 중국은 49년도에 국공내전을 완성했기 때문에 자기네 사정이 남의 나라 분쟁에 참전할 사정은 아니었다. 정말 겨를이 없었을텐데 마오쩌둥이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르면서 대규모로 참전을 한 걸 보면 이 한국전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 중국은 한국전쟁으로 미해방지구를 완전히 평정했고, 내부의 반혁명-반당분자를 숙청했고, 지주계급을 타도하고 토지혁명을 완수해서 농민들의 지지를 획득했다. 또 하나는 항미(抗美)원조전쟁에 대한 지원, 선전선동으로 총단결하게 되었다.
⑤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한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그는 장남을 한국전쟁에 내보냈는데 당시 나이 29살, 신혼 1년차, 근데 참전한지 한달만에 죽는다. 그가 중국에서 추앙 받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게 여기서 드러났다. 그는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정확히 두달뒤에 접하게 된다. 아들의 전사소식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국인의 의리의 표본이다. 아들의 시신을 조선 반도에 그냥 두라. 그래서 북한에 묻혀 있다. 중국의 고위특사가 오거나 신임대사가 오면 반드시 여기에 참배하도록 되어 있다고, 마오가 뛰어난 정치인인 게 여기에 있다.
⑥ 중국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 계속 진격하면 개입하겠다는 경고를 계속했었다. 그런데 맥아더는 이것을 무시했죠. 저것은 정치적인 수사다. 정치적인 위협이라고 자신에 넘쳤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순식간에 남한을 수복하고 북진통일이 거의 가시화되고 있었으니까 다른 정보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통령 트루먼은 생각이 달랐다. 만약에 중공군이 참전하면 3차 세계대전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서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를 만납니다.
⑦ 김일성도 맨 처음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는다고 확신했고, 맥아더도 북한에 갔을 때 중공군이 참전하지 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10월 15일 약25~30만명의 중공군은 이미 북한에 들어와 있었다. 맥아더의 전황판단은 잘못되었다. 맥아더한테 데자뷔가 있었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한바 있고, 한국전쟁 이전에도 북한군이 침공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오판이 있었고, 웨이크 섬에서도 대통령에게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다. 참전해도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2~3만명도 안된다고 과소평가했다.
⑧ 맥아더의 또 다른 오판은 중국은 공군이 없으므로 미군은 공군력으로 중국의 병력을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중국은 공군은 없지만 소련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참전을 결정하고 난다음에 소련이 즉각적으로 공군력을 지원하였다. 소련에서 연인원 12개 비행사단, 그리고 4개 고사포 사단이 참가하였다. 어마어마한 참가했다. 소련이 지원 못한다고 했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건 마오쩌둥이 스탈린이 정해놓은 노선으로 들어오자 공군을 지원하게 되었다. 사실 소련 전투기가 50년 11월 1일에 압록강 상공에 갑자기 나타나서 미군 전투기를 공격한다. 그게 바로 미그-15이다. 이 전투기 때문에 미군은 많은 피해를 입는다. 특히 B-20 폭격기는 공격을 많이 받았다. 미그-15의 등장으로 미공군의 제공권에 문제가 생겼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비행기들은 하늘에서 크게 문제는 없었다, 인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미그기의 성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미국도 새로운 전투기 F-86 세이버를 투입해서 공중전을 벌인다,
⑨ 맥아더의 오판으로 인해서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을 알지 못했던 미군은 또 북진했다. 11월에는 개마고원 부근에 까지 다달았다. 그 무렵 한 중공군 병사가 포로로 잡혀왔다. 중국군 포로가 우리는 10월에 압록강을 넘었다. 산을 타고 곳곳으로 전진했다. 너희는 모두 포위됐다. 곧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이틀후 포로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중공군이 사방에서 미군을 기습공격한 것이다. 장진호 전투의 시작이다. 장진호는 함경남도에 있는 인공호수이다. 이 호수는 1934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었다. 장진호에서 붙은 미해병1사단은 태평양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유명한 과달카날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적의 불패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 부대였다. 중국은 제9병단이었다. 40대의 쑹스룬(1899~1991) 장군은 황포군관학교를 나왔고, 17살때부터 산전수전 공중전을 치른 유격의 神, 기습의 명수였다, 여기서 미군이 자랑하는 해병1사단과 중국군의 9병단이 맞붙었다.
⑩ 장진호에 다다른 미해병대는 4천명은 하갈우리에, 8천명은 유담리에 공격선봉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12만명의 중공군에게 삽시간에 포위를 당하였다. 그리고 양쪽에서 내려오는 중공군들에게 하갈우리 보급로 그리고 고토리까지 순식간에 차단당하였다. 그러니까 부대전술(자루전술)에 걸려들었다. 중공군의 참전 사실을 모른 채 미해병대는 중공군이 기다리고 있는 장진호까지 제발로 걸어들어갔다. 독 안에든 쥐처럼 막혀있는 이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좁은 산길을 따라 하갈우리-고토리, 그리고 흥남까지 무려 100킬로에 이르는 구간을 중공군과 싸우며 퇴각을 했다. 이렇게 퇴각하면서 싸우면서 이런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공중지원, 포격지원, 부상병후송 등이 시간에 맞추어 딱딱 진행이 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
⑪ 장진호 전투는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총17일간 치러졌는데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추위였다. 너무 추웠다. 전투로 사망한 병사보다 凍傷, 얼어죽은 병사의 수가 더 많았다. 영하 30~40도, 영하 30이 되면 상처에서 피가 나오자 그냥 얼어붙는다. 자동지혈이 된다. 이러한 맹추위에 가장 중요한 거는 전투식량, 전투식량도 꽁꽁 얼어붙었다. 그런데 당시 미군에게는 중공군에게 없는 투시롤(Tootsie Roll)이란 사탕이 있었다 결국 미해병대는 17일간의 사투 끝에 목표지점이었던 흥남에 도착했다.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혹독한 추위와 만났던 바로 이 장진호 전투, 세계 3대 동계전투 얘기할 때는 스탈린그라드(1942.8.21~1943.2.2)전투 독일과 소련의 전투, 6개월만에 200만명의 사상자를 냄, 모스크바전투, 그리고 장진호 전투가 뽑힌다.
⑫ 장진호 전투에서 전설의 미해병 1사단은 전사가 718명, 후송후 사망이 98명, 실종이 192명, 부상이 3504명이었고, 비전투손실이 3659명이었는데 대부분 동상이었다. 한마디로 전사보다 동사가 훨씬 많은 전투였다. 중공군 피해는 중공군은 굶주림에 추위에 4만이 죽었고 그중에서 3만이 동사했다. 중국측도 막대한 피해를 받은 전투였다. 이 9병단이 거의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일어나는 공세를 성공적으로 거두지 못하였다. 만약에 이 9병단이 원래의 목적대로 작전이 성공했었더라면 아마 과장해서 한반도는 포기를 했을 상황에 몰리게 되었을 것이다. 미해병사단의 장진호 전투는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⑬ 한국군 1군단과 미10군단은 타격은 입었지만 흥남을 철수해 전투력을 보존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부분적인 전투에선 실패했지만 큰 대국에서 큰 손해를 입지않았다. 그렇지만 심리적인 충격이나 타격은 굉장히 컸다. 이제 미군과 유엔군은 천신만고 끝에 흥남에 도착하는데 여기서 지상 최대의 철수작전이 펼쳐진다. 미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10만 철수병력에다, 피란민 20만명이 몰려들었다, 피란민을 태우기로 결정한 유엔군, 흥남부두 폭파를 마지막으로 그들은 남쪽으로 향한다. 흥남철수작전(1950년)의 배경이 된 노래-굳세어라 금순아~ 흥남철수후 부산에 정착한 피란민이 흥남에 남겨진 금순이를 그리워 한 노래.
⑭ 한국판 덩케르크(1940.5) 구출작전, 메러디스 빅토리아(Meredith Victory)는 화물을 다 없애고 피란민 1만 4천명을 태우고 3일 동안 항해해 거제도에 도달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구조 라고 한다. 거제도에 도착한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였다. (10월에 평양과 함흥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면서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맞을 것이라는 맥아더의 호언장담이 생각난다-신비하다). 누가 짠 것도 아닌데~그날 도착했다. 또 하나 드라마틱한 일은 바로 5명의 새생명이 배에서 태어났다는 것, 결론과 교훈: 한국은 20세기 이후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로 6.25 한국전쟁시까지 단 한번도 우리의 운명을 우리 손으로 결정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이어져온 역사 중에 한국전쟁은 가장 큰 메세지를 던져 주는 사건이다. 역사는 항상 같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해주고 있었다. 정신 차려라 그리고 힘을 길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