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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역사와 문화 I
발로아 Valoir왕가(1328-1589)의 성립과 발전
◎백년전쟁((Le guerre de Cent Ans 1337-1453)과 프랑스
영국과 프랑스는 14세기에 이르러 이미 봉건적 주종관계에 따른 질서의 한계를 드러내고 보다 강력한 국왕권을 신장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백년전쟁이 시작될 무렵 프랑스인은 국민적인 공감대가 예술,관습, 언어등에 폭넓게 형성되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영국의 왕실과 상류층도 플랑타주네가가 왕위를 계승한 이래 급속히 프랑스문화에 동화되었다. 영국과의 백년전쟁은 영국의 프랑스지역의 왕위계승문제가 직접적인 것이었다. 샤를르 4세(1322-1328)는 후사없이 죽었다. 3명의 프랑스왕 후보자가 나타낫다. 즉 이사벨라 (프랑스 카페왕조의 필립 4세의 딸)의 아들 영국왕 에드워드 3세(1327-1377), 발로아가의 필립3세의 손자인 필립 드 발로아, 그리고 루이 10세의 사위인 필립 데브르였다.
필립 드 발로아(필립 6세:1328-1350)가 프랑스 태생이었기 때문에 3부회는 그를 왕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카페왕통은 끊기고 프랑스 발로아왕가가 출발하였다. 새로운 프랑스왕은 '주어온 왕'으로 불리면서, 개혁보다는 봉건적 위신을 세워나가는데 주력하였다. 한편 프랑스왕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군비개혁과 전술을 강화한 병력증강을 하여 유럽에서 가장 근대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준비를 완료시켜 놓고 있었던 셈이다.
백년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기사도정신을 모범으로 여기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를 지배하고자하는 욕심에 있었다. 그는 프랑스 필립 6세의 왕위에 대한 정통성을 부인하고 왕위이양을 요구하였다. 또한 보다 실질적인 원인으로 플랑드르지방의 귀속문제가 있었다. 당시 영국의 농업과 플랑드르의 모방직에 관련된 공업은 상호 의존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발로아왕조는 더 이상 프랑스내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을 인정할 수 없었다. 물론 영국도 플랑드르 모직물 무역과 관련된 이권등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자 프랑스는 스콜트란드와 동맹체계를 가동시켜 긴장을 고조시켰다. 플랑드르의 백작 루이 드 네베르는 프랑스왕실과 친분을 유지하였지만, 플랑드르의 도시상인과 시민들은 경제적인 이권 때문에 영국에 보다 우호적이었다. 특히 플랑드르 상인들은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이 개시되면 반역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백년전쟁은 '왕조간의 전쟁, 봉건적인 전쟁, 국민적인 전쟁 그리고 제국주의적 전쟁이었다.'(앙드레 말로: 프랑스사) 영국상인은 특히 통상과 교역을 위한 무대로 플랑드르(양모)와 보르도(포도주)지방의 점령을 원하였기 때문에 국왕에게 양모를 바쳐 이를 군비조달에 사용케하였다.
백년전쟁의 경과
첫단계( 1338-1380)
프랑스 국왕의 무능 (국내적 반란)에 따른 패배와 영국측의 프랑스의 영토획득으로 마감한다. 영국의 해군력은 막강하여 재해권을 장악하여 Sluy 해전에서 대승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스페인과 동맹을 맺자 해군력에서 영국보다 우세를 보이면서 전세가 바뀌었지만, 1346년 Crecy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단은 영국군에 크게 패배하였다. 영국은 귀엔느지역에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고 특히 1만명의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정예군을 상륙시켜 노르망디지역을 크게 유린하여 많은 것을 약탈하였다. 프랑스군은 여세를 몰아 파리까지 입성하려하였다. 필립 6세는 세느강의 다리가 끊고 전열을 겨우 정비하였다. 교황의 주선으로 프랑스는 겨우 휴전협상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필립 6세의 후계자인 Jean 2세(1350-1364)는 선왕처럼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한편 영국은 웨일스의 왕자 Eduard(Black Prince: 흑태자)를 앞세워 총공세를 가하여 랑그독을 점령하고 프와티에지역에서 4배나 병력수가 많았던 프랑스군을 격파시켰다. 결과적으로 쟝 2세는 영국의 포로가 되고 볼모로 다년간 영국에 구금되는 수모를 당한다. 그러자 프랑스 왕세자 샤를르(샤를르 5세: 1364-1380)가 (도팽:Daupin 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던 제 1상속인으로) 섭정을 하였다.
패전의 결과는 왕실의 약화는 물론 프랑스를 사회적 혼란의 악순환에 빠트렸다. 1356년 삼부회가 소집되었지만 제 3신분층은 왕을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는 농민반란과 (1357/1358년) 파리지역 수공업 동업조합등 도시 반란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8년간의 휴전(1347-1355)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지역에는 흑사병 창궐로 인한 인구감소, 노동력 부족, 물가상승등 가혹한 인플레이션현상으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반란은 2만명의 양민이 학살되는 비극을 연출하였다. 영국과 내통한 상인회장을 암실한 시민세력이 왕실과 타협점을 찾자 파리를 탈출한 왕세자는 겨우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프랑스는 영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영국은 프랑스왕권은 포기하였지만, 귀엔느,포와투페,리고르,리무장등의 지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마침내 1364년 왕세자가 샤를르 5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브레타뉴의 강화조약을 수정하는 정책을 추진하기위한 왕권 및 국방력 강화에 노력하였다. 그는 학문을 장려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영국보다 군력이 약세인점을 감안하여 전면전을 회피하고 국지전을 통해 지방의 도시를 하나씩 탈환시켰다.
한편 샤를르 5세의 동생 필립은 부르고뉴공국(수도: Dijon)을 선왕으로부터 상속받았는데, 플랑드르의 상속녀와 결혼하였다. 부르고뉴공의 자녀들이 홀란드를 통치하던 잇텔스바하가문과 결연을 맺으면서, 프랑스의 왕실이 분열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2단계 (1380-1453)
샤를르 6세(1380-1442)가 12세에 즉위하자, 부르고뉴공 필립이 섭정을 하였다. 숙부는 프랑스왕실을 유린하고 국내의 재산을 수탈하였다. 성인이 된 샤를르 6세는 왕권을 회복시키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였다. 그는 결국 정신병자와 다름이 없었다. 결국 부르군드(부르고뉴)공과 오를레앙공이 프랑스 권력을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필립공이 죽자(1404), 아들 쟝이 부르고뉴공이 되었다. 1407년 그는 마침내 종형인 오르레앙공을 암살하였다. 프랑스 국내는 양당을 지원하는 세력으로 구분되고 대립하면서 수 많은 폭동이 유발되었다. 이러한 부르고뉴와 오르레앙 사이의 오랜 투쟁은 영국의 헨리 5세(1413-1422)에게 유리한 국면을 연출케하였다.
1415년 헨리 5세는 에드워드 3세처럼 재차 프랑스왕권을 요구하였다. 그의 요구는 프랑스를 분노케하여 결국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엄격한 규율로 통솔한 헨리 5세는 3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까레를 점령키위해 내륙으로 진격하였다. 프랑스군은 중세사에 가장 비참한 패배로 기록될만큼 1만명의 전사자를 내고 말았다. 1415년 Azincourt의 패배로 노르만디,부레타뉴와 파리등 북 프랑스지역은 부르군드와 동맹을 맺고 영국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는 프랑스 국민을 민족적으로 크게 각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420년 트로야조약은 헨리 5세의 프랑스 섭정과 이후 영국왕의 프랑스왕권을 인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는 샤를르 6세의 왕비 이사보가 부르고뉴당과 내통하고 왕세자를 추방하고 공주를 헨리 5세에 시집보낸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인은 이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1422년 헨리 5세와 샤를르 6세가 사망하자, 헨리 6세는 영국과 프랑스왕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제 프랑스의 왕당파도 2분화되었다. 추방됐던 그리고 왕으로 축성받지 못한 왕세자 샤를르 7세(1422-1461)는 부르제왕으로 호칭되었다. 이러자 선량한 프랑스인은 단결하여 그를 위해 영국과 투쟁할 것을 맹세하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마침내 프랑스를 구출할 해방자 쟌 다르크가 등장하였다. (* 쟌다르크 (J'EANNE d'ARC) 알사스-로렌지방의 동레미에서 태어난 16세 양치기 소녀는 백년전쟁의 와중에서 추방된 세자를 프랑스왕으로 옹립하는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결국 그녀는 프랑스 상비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영국군을 대파하여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노르만세력을 프랑스에서 물리치는 무공을 세웠지만 영국파 귀족세력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되고, 재판에 회부되고 마녀사냥의 희생물이 되었다. 쟌 다르크는 1431년 19세의 나이로 산체로 화형을 당했다. 이후 그녀는 프랑스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국민적 영웅이되었다.)
1429년 쟌 다르크는 왕태자를 알현하고 신의 계시에 따라 오를레앙을 해방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쟌 다르크의 선전등으로 영국군은 패배하고 프랑스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신앙심은 프랑스의 기적을 만들고 있었다. 1435년 부르고뉴공은 프랑스에 항복하고, 1436년 파리도 수복되어 샤를르 7세의 성대한 입성이 이뤄졌다. 1450년 노르망디 수복에 이어 1453년 귀엔느와 보르도, 가스코뉴지역도 탈환하였다. 이로써 영국인은 까레를 제외하고 프랑스에서 모두 축출되었다. 이제 프랑스는 샤를르 7세의 강력한 국왕권을 바탕으로 국민국가의 체제가 확고히 뿌리내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국왕은 국민군을 새로히 조직정비하는 군제개혁을 추진하여 백년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장기간의 전쟁은 농토의 황폐화는 물론 지방영주의 권력약화에 따른 장원제의 쇠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샤를르 7세는 부흥책으로 1438년 부르쥬소칙(Pragmatic Sanction Bourges)을 통해 로마교황으로부터 자율적인 프랑스국왕을 권한을 강화한 국가교회의 기틀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국왕은 프랑스교회의 주교임명권과 교회재정을 관장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당시 프랑스 최대의 갑부였던 Jacues Coeur(1395-1456)의 재정적 도움과 이후 그의 재산을 몰수하여 강력한 상비군 제도를 확립하고 유지하였다. 1439년 샤를르 7세는 삼부회의 결정에 따라 120만 리부르의 항구적인 인두세를 확보하여 국방력강화에 도모할 수 있었다. 이는 지방세력의 약화와 농민세력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당시 농민들의 불만은 농민반란의 성격으로 변모하여 지방영주를 타파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들은 강력한 국왕중심주의의 국민국가를 원하였다. 결국 백년전쟁의 결과는 프랑스의 국민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국왕은 독일, 사보이왕국,헝거리, 이탈리아 베니스등 7개국과 동맹을 맺고 유럽의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프랑스 중세사회와 문화
중세 프랑스의 문화적 생활 (La vie culturelle)은 점진적으로 개화되어 나갔다. 특히 국민문학 분야에서는 기사도와 무훈에 관련된 여러 수준있는 작품이 쓰여졌다. 특히 투르바두르와 투르베르의 운문적인 무훈시와 롤랑의 노래로 알려진 중세 기사의 연애담도 초기 낭만적인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경제적인 변화 (Les transformations economiques)는 12세기이후 괄목한 만한 상업의 발달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상인들과 장인들이 길드를 조직하게 되었고, 부르주아들((당시 Burg에 살고 있던 부를 축적한 신흥세력들)은 도시의 행정에 직접참여할 기회와 상업적인 특권 쟁취를 목표로 지방 영주세력과 대립하였다.
한편 14세기 전반의 경제적 위기는 만성적인 인플레현상의 가중과 극심한 천연재해( 가뭄과 홍수)로 인한 기근과 질병으로 악화상태에 빠지고, 특히 1348/49년 전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프랑스인에게 참혹한 피해를 주어, 급기야 농민반란을 촉진시켰다. 더욱이 백년전쟁의 장기화 과정에서 만성적인 재정적자 현상속에서 농민들은 장원탈출을 함으로써 주종제와 장원제는 점진적으로 붕괴하였다. 그러나 15세기 샤를르 7세의 국왕권의 강화는 사회경제적인 요인이 성장되고 프랑스가 절대왕정체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년전쟁이후의 프랑스의 발전
루이 11세(1461-1483)와 샤를르 8세(1483-1498)와 그의 후계자들은 선왕인 샤를르 7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부르군드, 서부의 앙주백령과 남부의 프로방스, 나폴리등으로의 영토확장에 주력하였다. 또한 발로아 왕가는 비교적 쉽게 국민감정에 호소하여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를 하면서 중앙집권적 권력체계를 강화시켜 나갔다. 루이 11세는 도시의 부르주아 시민세력과 연대하여 전쟁으로 상처입은 봉건 기사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는 '짐이 프랑스이다.'라고 선언하였다. 루이 11세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이면서도 학예분야에도 커다란 관심을 보여 프랑스적인 문화창달에도 앞장섰다. 또한 그는 영국과 1475년 피퀴니조약을 맺고, 백년전쟁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영국에 호의적인 금품공세도 마다치 않았다.
한편 루이 11세는 1477년 부르고뉴와 피카르디의 일부를 영유하게되는 행운을 얻었다. 욕심많은 그는 부르고뉴 전부를 획득할 마음으로 7세의 왕자를 부르고뉴 공주와 결혼시키려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마리공주는 오스트리아 막스밀리안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접경지역인 로트렝지아의 불안에서 어느정도 해방될 수 있었다. 당시 부르고뉴공국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하게되었다. 1482년 부르고뉴의 마리가 낙마로 사망하자, 아들 필립과 공주 마르가레트만 남게되었다. 루이 11세는 왕세자 (샤를르 8세)를 마르가레트와 결혼시켜 지참금으로 프랑쉬공테와 아르토아를 갖고오도록 합의하였다. 1480년 르네왕과 샤를르 앙주가 사망하자 메느와 앙주지역을 프랑스 왕실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부르군드 전쟁
부르고뉴: 부르군드 공국은 필립공(선량공 1419-1467)의 등장으로 저지대의 동프랑스지역을 정복하고 백년전쟁시에는 영국과 영구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후계자인 부르군드의 샤를르 대담공(1467-1477)은 영토확장을 목표로 스위스의 관할지역이었던 알사스-로렝지역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루이 11세는 이에 개입하여 스위스와 동맹을 맺고 부르군드 전쟁(1476-1477)을 승리로 이끌고 샤를르공을 살해하였다. 그러자 후계자가 없던 부르군드공국은 분할되고, 프랑스도 그 일부를 획득하였다. (특히 프랑슈 콩테 Franche Comte는 일시적으로 왕령에 귀속되었다. 또한 샤를르공의 딸 마리는 저지대지역(네덜란드, 벨기에등)을 상속받았다. 그녀은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후에 신성로마황제)과 결혼하였다. 그들의 아들이 유명한 신성로마황제 칼 5세로 프랑스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부르군드의 저지대지역도 스페인령, 독일령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의 영지가 되었다.
루이 11세는 영주세력과 국민 모두에게 가혹한 왕이었다. 과중한 세금정책은 물론 자신을 반대한 세력은 가차없이 처단되었다. 그는 왕실 재정을 도모하기 위해 불평등한 직접세였던 따이유세를 부과시키고 염세등 각종 세금정책을 통해 관료제와 상비군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물론 그는 국민적 통합을 위한 근대적 개혁정치도 꾸준히 수행하였다. 그는 상업을 장려하면서 도량형을 통일시키고 교통과 우편제도를 개량하였다. 루이 13세의 사부였던 보쉬에 (Bossuet 1627-1704)는 그를 '저열하고 왕자답지 않은 인물'이라 평하였지만, 그의 연대기를 쓴 콤미느는 그를 사려깊은 현실주의자로 기록하고 있다. 결국 그는 장단점을 가지고 프랑스를 강성하게 만든 사업가적인 왕이었다. 그가 죽자 프랑스는 대외적으로 플랑드르문제와 이탈리아문제라는 2가지 커다란 과제를 해결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야하였다. 영국,독일,프랑스는 각각 플랑드르지역을 자국의 지배영역에 포함시키고자 노리고 있던 지역이었다. 또한 분열상태에 있던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외국과의 동맹을 통한 군대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제노바,피렌체,밀라노등의 은행지점이 있었고, 프랑스귀족과 이탈리아귀족간의 결혼등 교류가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과거 찬란했던 로마제국을 꿈꾸는 유럽군주의 야심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샤를르 8세(1483-1498)는 13세로 왕위에 올랐다. 샤를르 8세가 양육된 앙보아즈성의 성주 피에르 드 보주의 부인 안느 드 보주가 섭정을 맡게되었다. 안느는 샤를르 8세의 친 누나였다. 섭정기간 오를레앙과 부레타뉴의 귀족적 반란이 진압되면서 국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부레타뉴공 프랑소아 2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안느가 상속인이 되었다. 안느 드 보주는 때를 놓지지 않고 샤를르 8세와 안느공주와의 결혼을 4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로 위협한 끝에 성사시켰다. 누나인 안느는 그 많큼 동생의 프랑스왕권을 지켜주는 커다란 버팀목이었다.
이탈리아 정복전쟁과 독일제국과의 투쟁(1494-1559)
한편 샤를르 8세는 유럽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합스부르크가와 이탈리아 전쟁(1494-1559)을 시작하였다. 이탈리아 5대공국인 로마,베니스,나폴리,밀라노,피렌체는 로디협정에 따라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여러 당파로 분열하여 상호대립을 하였다. 나폴리는 프랑스의 앙쥬가와 교황과 대립된 스페인의 아라곤가(당시 나폴리왕은 아라곤가의 페르디난드)가 왕위을 다투고있었다. 1494년 백년전쟁이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국으로 성장한 프랑스는 샤를르 8세가 직접 3만의 병력(스위스 용병포함)을 인솔하고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군기가 문란했던 원정군은 이탈리아를 닥치는 대로 약탈하면서 미움을 사고 있었다. 로마교황 알렉산드로 6세는 처음에는 샤를르 8세의 원정을지지하였지만 그에게 등을 돌리고 터키왕의 구원을 요청하였다. 1495년 샤를르 8세는 나폴리시민의 환영을 받으면서 나폴리의 해방자가 되었다. 프랑스군에 패배한 페르디난드공은 로마교황, 베니스, 밀라노와 동맹을 맺고 대항하자, 마침내 샤를르 8세는 막대한 전리품을 안고 프랑스로 귀환하였다. 그는 1498년 28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샤를르 8세가 죽자 안느왕비왕의 사이에 후사가 없어 장자상속법에 따라 종형인 36세의 오를레앙가 루이 12세(1498-1515)가 왕권을 계승하였다. 루이 12세는 루이 11세의 공주 쟌느 드 프랑스와 결혼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샤를르 8세의 미망인 안느를 연모하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아들인 체사레 보르지아를 매수하여 쟌느와의 결혼은 루이 11세의 강요로 이루어진 것을 이유로 무효화시키고, 선왕의 왕비와 재혼하게되었다. 이들의 금술은 매우 좋았다고 한다. 루이 12세도 밀라노 공국의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제도시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강력히 대항하면서 프랑스군은 대패하고 정복한 밀라노를 다시 상실하게 되었다. 재기를 노리던 루이 12세는 오스트리아 칼 대공에게 자신의 딸을 주면서 지참금으로 부레타뉴와 부르고뉴의 상속권을 주고자 하였지만 삼부회가 이를 반대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이탈리아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던 루이 12세는 이번에는 스페인과 연합하여 나폴리를 분할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왕은 배신하고 오히려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한편 로마교황 율리우스 2세는 베니스 공화국을 정벌키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베니스 함락을 목적에 두고 교황은 이탈리아 제도시세력을 규합하여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결국 1513년 프랑스는 노바라전투에서 대패하고 이탈리아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조약에 서명하고 말았다. 프랑스는 오랜 이탈리아 전쟁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패배하였지만, 샤를르 7세이후 이룩한 봉건세력의 약화로 이룩된 강력한 국민국가의 터전을 유지할 수 있었다.
1514년 왕비 안느가 공주 2명만 남겨놓고 죽자, 루이 12세는 55세의 나이로 영국 헨리 8세의 17세 여동생과 재혼을 하였지만 이듬해 병사하였다. 프랑소아 앙굴렘이 프랑소아 1세(1515-1547)로 프랑스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루이 12세의 사위이며 조카였고, 모친 루이즈 드 사보아의 교육을 받고 꼬냑과 양보아즈지방에서 성장하였다. 또한 그는 탐미주의적 낙천주의자로 모험심과 권력욕의 소유자였다. 1515년 새로운 국왕은 바야르장군을 사령관으로 2만 6천명의 용병( 6천명으로 구성된 최강의 흑색부대 포함)을 모집하여 200문의 신식 대포로 무장하고 밀라노공국을 정벌하면서 스위스와는 평화동맹을 교황과는 화해하는 재전과를 얻어냈다. 특히 프랑소와 1세는 스위스 용병에게는 연금을 지급하기로하고, 이후 스위스 경비대가 프랑스궁을 경비하게 되었다. 또한 1516년 그는 파리고등법원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메디치가 출신이었던 교황 레오 10세와의 협약을 통해 국왕의 주교임명권과 성직자의 급여를 배정하는 권리와 교황의 서임권과 봉납연수(성직자의 최초 연도의 세입취득권)를 상호 인정하는 타결책을 찾았다. 이 협약은 나폴레옹이 들어설 때까지 프랑스에서 유지되었고, 또한 재정적인 이유로 신교의 종교개혁파가 프랑스에서 패배하는 원인으로 작용되었다.
사실상 프랑소아 1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출신 막스밀리안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싶었다. 당시 황제는 선제후 7명(3명의 대주교,보헤미아왕,작센(섹슨)공작, 팔라티르 백작, 부란덴부르크 변경후)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황제선거는 황제가 죽기전에 궐위을 방지키위해 이루지고 선출된자는 로마왕으로 호칭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왕은 1519년 막스밀리안 황제의 손자이며, 스페인왕 필립의 아들인 샤를르 5세: 칼 5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위를 다투었지만 실패하였다. 이는 호전적인 프랑소아 1세가 샤를르 5세와 이탈리아 전쟁을 하게되는 이유중의 하나가 되었다.
샤를르 5세는 합스부르크의 영지였던 스페인,홀란드, 오스트리아 대공국, 나폴리의 상속자로써 프랑스를 포위할 수 있는 가장 위협스런 존재였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양쪽으로부터 지원을 요청받는 입장이 되었다. 결국 영국은 프랑스를 등지고 샤를르 5세를 선택하였다. 프랑소아 1세는 황제에게 선제공격을 하여 알프스를 넘었지만 파비아에서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샤를르 5세는 그에게 굴욕적인 강화조건을 내걸었다. 즉 영국에게 노르망디와 귀엔느를 반환하고, 스페인에게는 부르고뉴영지를 할양하며, 부르봉 원수에게는 도피느와 프로방스를 양위하라는 조건이었다. 프랑소아 1세는 이를 거절하고 자신은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그의 모친 루이즈 드 사보아의 섭정이 이루어지면서, 프랑스인은 더욱 더 강력한 왕권과 국민적 통합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녀는 헨리 8세를 2백만 파운드에 매수하여 황제와의 동맹을 파기시켰다. 프랑소아 1세는 마침내 부르고뉴를 포기하고 두 아들을 마드리드에 인질로 보내면서 프랑스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소식에 프랑스인은 국왕을 중심으로 더욱 단결하였다. 교황도 스페인세력의 강화된 교회의 역할을 묵인하지 않았다. 이로써 카톨릭의 양대세력은 분열되었다. 프랑소아 1세는 반 합스부르크적인 헝거리, 보헤미아는 물론 터키와 동맹을 맺었다. 로마 교황이 이탈리아를 유린한 스페인세력을 타파시킬 프랑스군대의 파병을 원하였다.
한편 루이즈 드 사보아는 홀란드의 총독부인 마르그리트와 캄브레이 평화조약 (소위 '귀부인의 평화')을 통해 두 왕자를 구출하고 샤를르 5세와 프랑소아 1세는 처남 매부지간이 되었다. 즉 프랑소아 1세는 샤를르의 누님인 포르투갈 왕의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이로써 프랑스는 스페인과 연합하여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또한 이탈리아 개입으로 카톨릭세력은 분열되었다.
프랑소아 1세는 르네상스의 발전을 위해 문예진흥정책에 크게 힘을 기우렸다. 따라서 프랑스의 국민문화의 꽃이 만개되었다. (라블레의 가르깅튀아도 당시 작품중의 하나이다.) 특히 프랑소아 1세 때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 도시상인들은 지리상의 발견에 따른 가격혁명과 스페인으로부터 유입된 막대한 금과 은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화폐가치의 하락과 물가의 변동에 따라 봉건적 지주의 위치도 불안하였고 새로운 도시의 부르주아세력은 투기를 통해 대토지를 소유하게되었다. 이로써 16세기 프랑스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우 심화되었다.
앙리 2세 (1547-1559)는 짧은 재위에도 불구하고 가장 유능한 프랑스왕의 하나였다. 마드리드의 유인생할을 경험한 그는 샤를르 5세에 대한 증오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국왕은 이탈리아 정복을 단몀하면서 북동지역의 국경을 강화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정책목표로 삼았다. 그는 우선적으로 큰아들 프랑소아를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드와 결혼시켜 카톨릭세력을 규합하였다. 또한 샤를르 5세에 반대하는 독일 신교세력과 연합하였다. 독일이 신교제후들은 지원의 대가로 프랑스에게 메츠,툴르,베르덩의 주교영지를 제공하였다. 이로서 프랑스의 북동국경이 강화되고 로렝지방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독일측은 배반하고 메츠에서 앙리 2세를 포위하였다. (당시 메츠를 구출한 프랑소아 드 기스는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한편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위에서 통풍으로 고생하던 샤를르 5세는 황제위를 동생인 오스트리아 페르디난드 대공에게 물려주고 아들 필립 2세에겍는 스페인의 영지를 상속케하였다. 그는 스페인의 작은 수도원에서 여생을 마쳤다. 이로써 앙리 2세는 스페인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프랑소아 드 기스가 계획한 이탈리아 원정을 승인하므로써 불행을 좌초하였다. 프랑스군는 이탈리아 사방에서 포위되고 대패하였다. 스페인 필리페 2세는 여세를 몰아 파리로 진격하였다. 앙리는 파리를 사수하기로 결심하였지만 카레로 후퇴하여 용감히 싸워 승리하였다. 그가 기즈와 함께 파리에 입성하자 프랑스인은 열광적인 환영을 하였다. (이 때 영국은 메리의 후계자로 엘리자베스 1세가 등극하였다. 그녀는 반 스페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1559년 카토 깡브레시 조약으로 스페인과의 강화협상이 타결되어, 프랑스는 메츠,툴르,베르덩의 주교령을 획득하였다. 이로써 앙리 2세의 14세 어린 딸과 필립 2세의 결혼식도 이루어졌다. 앙리 2세는 스페인과 화의를 기념하는 기마경기에 참가하였다가 불의의 사고로 근의대장의 아들 몽고메리의 창에 맞고 9일간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41세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