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하느님의 영원한 짝사랑
‘자비의 특별 희년’을 살아가고 있다.
믿는 이들과 믿
는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가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신 얼굴을 바라
보고 그러한 아버지의 자비를 우리 역시 살아가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체험해야
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옛날에 어느 망나니 같은 아들을 둔 홀어머니가 있었다. 마음이 비뚤어진 아들은 어릴 적부터 사고만 치다가 커서는 강도들의 소굴로 들어갔다. 두목은 아들에게 자신들의 무리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몇 가지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모든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아들에게 부과된
마지막 시험은 자기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 달려가던 아들은 중간에 다리가 후들거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어머니 심장으로부터 들려온 한 마디, “얘야 다치지 않았니?”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라는 책 제목이 있듯이, 자식을 향한 대책 없는 부모의
사랑과 헌신이야말로 한 인간이 이 지상에서 신(神)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본능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체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모의 마음은 누군가의 마음과 특성을 닮아 있다. 바로 하느님의 자비이다. “자
비를 베푸시는 것이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입니다. 바로
그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전능이 드러난다.”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말처럼 그분의 자비는 결코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전능하신 당신의 특성이다.
루카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에서 예수님은 당신 생애를 통해 궁극적으로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 주신다.
비록 우리는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데 ‘대상’과 ‘횟수’
에 제한을 두지만(루카 18,21.33 참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한량없다. 무조건적이다. 그분은 당신이 우리로부터 사랑받으셨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비록 사랑받지 못하실 때라도 그분은 ‘언제나’
사랑하신다. 그분 사랑이 ‘하나의 응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의 자비와 용서는 거저 주는 선물이요, 그래서 ‘은총’인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유 없는
사랑’이시다.
‘자비의 특별 희년’에 우리는 자주 자비로우신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며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라고 요청받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편에서 자비하신 그분을 만나려는 구체적인 실천이 요구된다.
가장 좋은 실천과 체험은 “고해성사를 통한 하느님과의
화해”이다.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과 화해할 때, 우리에게 올해는 ‘자비와 해방을 체험하는 특별한 해’(特別 禧
年)가 될 것이다.
송인찬 신부 - 대전가톨릭대학교(신학원 전례담당 겸 전례꽃꽂이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