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더운 여름날, 어떤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다. 그의 눈에 반대쪽에서 또 다른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자전거를 짊어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자전거를 타면 더 빨리 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그는 자전거를 지고
오는 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저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데요…”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우화(寓
話)는 현대인의 신앙생활 특히 고해성사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생길을 더 편하고 더 신나게 달리라고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자전거를 선물하셨다. 처음에는 자전거 타는 법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동네 여기저기를 신나게 쏘다닌다. 그러다 언제부터인지 신앙이라는
자전거는 우리 관심에서 멀어져 마당 한구석에서 차츰 먼지만 쌓여간다.
우리네 신앙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싶다. 처음에
세례를 받고 성당에 나올 때는 좋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순간 기쁨은 사라지고 세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강한 관성이 생길 때쯤이면 이미 신앙은 녹슨 자전거가
되기 쉽다. 더욱이 고해성사라는 소중한 자전거는 이미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해성사라는 자전거가 이미 녹슨 듯한 이 시대에 고해성사에 대한 참 의미와 필요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이면서 공통된 욕구 중
하나는 속죄(paenitentia)를 통해 신(神) 혹은 다른 사람과의 일그러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종교들은 이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일정한 예식을 통해 표현해 왔는데, 유다인들의 경우, ‘참회의 날’이면 자신들의 죄
목록을 멘 속죄양을 사막으로 보냄으로써 하느님께 용서
받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요구하신 것은 ‘속죄’가 아니라 ‘화
해’(reconciliatio)이다. 즉 ‘아버지와 다시 하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화해가 참되게 이루어지면 늘 ‘기쁨의 축제’가 따른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집으로 돌아오
는 작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 어떤 문책이나 추궁도 없이 아들을 껴안고 잔치를 벌인다.(루카 15장 참조)
이처럼 고해성사는 한 죄인이 하느님과 공동체와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기쁨의 잔치’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그
분을 멀리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속죄 행위가 선행
될 필요는 없다. 자캐오의 경우처럼 참다운 화해가 이루어지면 선행은 자연스레 따라오기 마련이다.(마태 19,8)
우리는 그저 두 팔 벌려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감사히 응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의 이 응답은 무엇보다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리게 된다.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
송인찬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성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