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7월12일/주일복음말씀묵상/ †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소망 (로마8,18-23절)
로마1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고난은 일시적이고 가벼운 것이라고 한다(2코린4,17). 그런데 장래의 영광은 영원하고 지극히 크고 무거운 것이라고 한다. 이 구절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상속자가 됨을 확신하는 앞 문장의 결론이다.
2코린4,17절은 “우리의 잠시 받는 고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곧 바오로 사도에게 고난은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난의 끝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임박한 종말의 기대가 나타나 있다. 종말에 대한 소망은 믿는 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피조물 전체에 유포된다.
19절에서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느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라고 말한다. 곧 인간 외의 모든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다니엘7,22,27; 12,1-3; 루카22,28-30).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아들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현재 상태를 보면, 그 사실은 자명하지 않으며 베일로 가리워져 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그분은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셨지만 그 영광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과 같다. “나타나는 것이니”는 이전에 덮여 있었거나 감추어져 있던 것이 보이게 되거나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들이지만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가려져 있다. 주님께서 두 번째 오실 때, 곧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고 우리의 몸이 완전히 구속될 때, 가려진 것은 걷힐 것이다. 창조물은 이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나타남, 곧 영광은 우리가 현재 체험하고 있는 나타나는 과정의 완결이다.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때, 믿는 자들은 모두 변하여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아들들로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피조물은 바로 이러한 영광의 계시를 고대하고 있다. “고대하다”는 신약성경에 일곱 번 나오는데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데 사용되었다(1코린1,7; 갈라5,5; 필리3,20; 히브9,28).
20절은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허무”라는 것은 원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 곧 혼돈과 좌절과 부패와 죽음의 상태를 말한다(3,23). 피조물은 인간처럼 스스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간과 함께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 여기서 “굴복케 하시는 이”는 하느님을 가리킨다.
창세3,17절은 이 사실을 진술한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창세5,29절 참조)라고 말한다. 본래 피조 세계는 인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비옥한 땅, 풍요로운 과일, 아름다운 별, 다정한 짐승, 무해한 벌레 등을 인간에게 주신 복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아담의 타락과 함께 이런 복들을 상실했다.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 모든 인간에게 죄와 사망이 온 것처럼(로마5,12-14), 자연 세계에도 썩음과 죽음이 오게 된 것이다. 근래에 와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는 것을 보면 이것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저주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21절은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말한다. 새로운 소망의 시작이 있다. 현재 창조물은 쇠퇴하고 썩은 자연의 법칙 아래 속박을 받고 있다. “그 바라는 것은,” 곧 창조물의 유일한 소망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 썩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에게도 하느님의 자녀들과 함께 죽음과 부패와 소멸의 끝없는 순환에서 해방되어 영광을 누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인간이 저주를 받았을 때 인간의 생활환경도 저주를 받았듯이, 인간의 몸이 부활할 때 피조 세계도 변할 것이다(1코린15,42-50). 이사야는 사막에 꽃이 무성하게 피며(이사35,1),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는(이사11,6), 영광스러운 변화를 예언하였다(묵시록22,1-3).
한마디로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이사65,17; 66,22; 요한묵시록21,1; 2베드3,13). 그러므로 피조물의 장래 운명이 우리 인간에게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성숙되는 것이 늦어진다면 피조물은 우리를 비난하며 우리에게 불평할 것이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여, 너무 천천히 자라고 있다. 우리는 당신들이 성숙할 때를, 당신들이 영광에 들어갈 그때를, 우리가 헛된 것과 썩어짐과 종노릇에서 해방될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피조물에게 신실해야 하며 그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기다리며, 피조물은 다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 곧 가뭄, 지진, 홍수, 전염병, 전쟁과 죽음 등)을 겪고 있다. 이것은 두 단계로 나타날 것이다. 첫째는 주 예수님의 지상 재림과 지상에 메시야 왕국 건설에 관련된 현재 세계의 회복일 것이다(이사11,5-9). 두 번째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일 것이다(묵시21,1; 2베드3,7-13).
22절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말한다.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은 아기를 출산할 때처럼 고난과 고통이라는 예고와 함께 오는 것이다(마태24,8; 마르코13,8).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결정적인 개입은 피조물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울부짖음에 대한 응답이 될 것이다(로마7,24-25).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주적인 대변화에 참여하여, 고난 중에 피조물처럼 탄식하며 우리 몸의 완전한 구속을 소망하고 있다. 2코린5,2절에서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추수의 첫 열매인 성령을 소유한 자들이다.
이것은 추수(완전한 구원)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혜택, 곧 성령의 인도와 아버지와의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이미 누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 사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추수는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연약함과 모순과 비극과 아픔과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
지상의 몸을 입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한,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믿는 이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하느님 앞에서의 영원한 삶을 비롯하여 그들이 누릴 더 많은 복을 미리 맛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탄식하면서 더 큰 축복인 구원의 완성을 대망하는 것이다.
23절은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아들이 될 것 : sonship)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탄식하며 성령의 첫 열매를 누리는 동안 아들의 명분을 기대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아들의 명분은 완전한 아들의 명분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영 안에 아들의 명분이 이미 있지만, 아들의 명분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그 날, 곧 몸의 구속으로 우리는 완전한 아들의 명분을 알 것이다. 완전한 아들의 명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몸의 구속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들의 나타남(8,19)과 하느님 자녀의 영광의 자유(21)라고 부른다.
이것은 교회(바로 믿는 이들이 교회이다)의 휴거 때에 일어날 것이며, 그때 믿는 이들은 올리워져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1코린15,42-54; 2코린5,1-5; 1테살4,13-18). 바오로는 그날을 “구속의 날”(에페4,30)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 영 안에 아들의 명분이 있고, 또한 변화를 통한 우리 혼 안의 아들의 명분이 있을 수 있지만, 아직 변형으로 말미암은 우리 몸 안의 아들의 명분은 없다.
그것은 장차 올 그 날에 우리는 몸 안의 명분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완전한 아들의 명분이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자라야 한다. 우리는 탄식하기 보다는 자라야 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너무 어리고 너무 미숙하다. 우리는 모두 자라야 하며 성숙되어야 한다.
내가 수없이 강조하고 있는 유기적인 구원, 곧 주관적인 체험을 통하여 우리의 혼(생각, 감정, 의지, 기질과 성격)을 처리해야만 한다. 영광스러운 그 날이 올 시간은 우리가 생명 안에서 성장하는 데에 달려 있다. 우리가 빨리 자라면 자랄수록 그만큼 그 날은 앞당겨질 것이다. 유기적 구원을 이해하지 않고는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왜 당신은 춤추러 가고, 도박하고, 술집에 가고, 담배를 피웁니까?’하고 묻는다면, 그들은 거의 ‘그 이유는 이제 나에게는 희망이 없고 무기력하며, 헛됨을 느끼고 슬프고 우울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들도 또한 탄식하고 있지만 그것은 다만 헛된 탄식일 뿐이다. 그 탄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우리의 탄식은 그들과 달리 우리 영 안에 첫 열매인 성령, 곧 하느님 자신을 미리 맛보는 성령이 계신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을 때에도 우리에게는 누림이 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임재를 맛본다. 주님의 임재란 우리의 누림을 위한 첫 열매인 바로 성령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그들은 내적인 누림이 없으므로 죽음으로 달리는 탄식만 있을 뿐이다. 사실 나이 들어서 믿음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다. 교회를 나간다고 해도 영적으로 성장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나이 들어 성경을 읽기란 더 더욱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밖으로는 탄식하지만 안으로는 기뻐한다.
왜 우리는 기뻐하는가?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는 그 영의 첫 열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한 성령은 하느님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를 인도하여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누림을 맛보게 할 것이다. 이것이 아들의 명분에 속한 축복 중에서 가장 큰 축복이다. 형제자매들이여! 기뻐하며 춤추고 싶지 아니한가?
알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