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홍등가의 여인들은 외국선원들이 드나들어 어지간한 영어 몇 마디는 구사했다. 그래 ‘스리 타임’을 서너 번이나 확인 한 수주는 ‘불도로서 어찌 여자를 품겠는가’라고 한 공초의 말에 화를 내기보다 서운함과 쓸쓸함이 앞섰을 것이다.
교교명월하皎皎明月下에 한강에 배를 띄워놓고 술을 통음하고 밤새 담배를 피우며 한강을 노닐었고, 두주상봉斗酒相逢 수취도須醉倒 한 주우, 시우였는데 라고.
그랬을 것이다. 공초가 은근슬쩍 발뺌을 한건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좀은 겸연쩍어서 일거고, 수주는 겸연쩍어하는 공초보다는 허심탄회하게 밤을 지세고 온 무용담이라도 같이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수주도 1961년 공초보다 두해 앞서 복숭아골 소사 선산에 터를 잡았다.
이제 공초가 떠난 지 46주년이 지났다. 47주년이 되는 해도, 그 다음해도 어김없이 이 땅의 제자와 후배들은 수유리 빨래터 묘지를 찾아 공초를 추모할 것이다.
자연紫煙의 천상에서 담배로 자연을 노래하는 공초와 酒의 천상에서 술을 노래하는 수주는 서로를 마주하며 허허! 수주 왔는가, 공초 왔는가라고 손을 맞잡으며.
참고자료
구상 편저-자유뮨학사, <시인 공초 오상순>
이용상 저-서울신문사, <용금옥시대>
백철 저-민중서관, <신문학사조사>
이동주 저-현대문학, <실명소설로 읽는 현대문학사>
김동인 저-삼중당, <김동인 전집 8권>
시집 上-민중서관, <한국문학전집 34>
<현대의 문학가 9인, 새벽을 기다린 시인> 신구문화사 <신구문구 18>
공초 오상순 연보
1894년 서울 시구문에서 태어남
1901년 효제초등학교 입학(어의동학교)
1906년 경신학교에 입학
1912년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지사대학 종교철학과에 입학
1918년 귀국 후 YMCA에서 번역과 전도사로 활동
1920년 김억, 황석우, 남궁벽, 변영로 등과 동인지 ‘폐허’를 창간하고 에세이 ‘시대고와 그 희생’을 발표하고 이어 ‘신시’를 ‘개벽 6호에 발표하다.
1921년 폐허에 논문 ‘종교와 예술’ ‘힘의 숭배’ ‘힘의 비애’ ‘힘의 동경’ ‘혁 명’ ‘생의 수수께끼’ ‘가위 쇠’ 등을 발표
1923년 ‘동명’ 8호에 ‘방랑의 마음 1’ ‘허무혼의 선언’을 발표. 조선 중앙불 교학림에서 교원, 보성고보에서 교원 역임 후 방랑생활
1924년 ‘폐허이후’ 1호에 ‘허무의 제단’ ‘허무혼의 독백’ ‘폐허 행’ ‘폐허의 낙엽’ 등을 발표
1926년 범어사 입산 후 공초라는 호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
1935년 ‘조선문단’ 8월호에 ‘방랑의 마음 2’를 발표
1940년 대구에 낙향
1946년 해방 후 서울에 와 역경원, 조계사, 선학원에서 생활
1949년 ‘문예’ 12월호에 ‘한잔 술’ 발표
1950년 ‘문예’에 ‘항아리’를 발표. ‘신천지’ 2월호에 ‘나의 시와 담배’를 발표
1953년 ‘문화세계’ 7월호에 ‘一盡’을 발표. ‘신천지’ 12월호에 ‘한 마리 벌레’ 를 발표. 사인첩 청동문학을 만들다
1954년 ‘신천지’ 8월호에 ‘表流와 低流의 交叉點’ 외 1편 발표. ‘현대공론’ 9 월호에 ‘환멸’을 발표
1958년 ‘자유문학’ 11월호에 ‘불나비’ 발표
1961년 조계사를 떠나 정이비인후과에서 생활 시작
1963년 폐렴, 고혈압심장병 등으로 입원. 6월 3일 병세 악화로 적십지병원 에서 사망. 문단장으로 수유리묘소에 묻힘. 제자들의 힘으로 ‘공초 오상순시집’을 자유문학사에서 간행
1982년 한국문학사에서 ‘청동문학노트’-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영혼- 간행
1983년 한국문학사에서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 간행
187년 자유문학사에서 ‘허무혼의 선언’ 간행
첫댓글 공초 이야기도 막을 내렸다. 다음엔 어떤 시인의 이야기를 연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