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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평구전집> 기독교의 사회참여에 대하여
얼마 전 기독교 신자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이 어려운 현실에 날마다 방구석에 앉아 성경이나 주무를 것이 아니라 종로 거리에라도 나가 군사정권의 종식을 위한 전단이라도 뿌리고 시위라도 하라는 권유를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나는 기독교란 전단이나 시위로써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천박한 종교는 절대 아니라고 말하며 그를 쫓아냈다.
요즘 식자들 간에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 대한 논의가 많다. 그러나 나는 이들 식자들을 가증스럽게 생각한다. 저들은 평소 기독교를, 아니 종교를 미신 취급하거나 무시하던 자들이다. 또한 저들은 대체로 과거 한때 기독교의 물을 먹었으나 오늘날 이를 저버린 배교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제 와서 정치적 난국 운운하며 기독교의 세력에 빌붙어볼까 하여 종교의 사회참여를 주장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결론부터 말한다면, 기독교는 결코 정치적 방도로써 나라를 구하는 천박하고 안이한 종교가 아니다. 과거 나치 시대 히틀러 정부가 독일 기독교에 협력을 구했을 때 독일 개신교 연맹은, 기독교는 복음으로써 국가와 민족에 봉사하는 것이지 국가사회주의에 협조함으로써 이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다. 그렇다. 기독교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고 양심과 도덕을 바로잡음으로써 사회와 국가와 민족을 구하는 복음적인 종교인 것이다.
그런데 부끄러운 말이지만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란 자발적인 사회참여는커녕 기독교 복음의 본질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국민의 영혼과 도덕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서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이 무기력의 원인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나는 한국 기독교가 너무나 정치적인, 현실적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 기독교는 일제 시 3․1운동 등 살인적인 정치투쟁과 교육․의료 사업, 심지어 농촌진흥․국산장려 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선봉에 서서 정치적 애국과 사회참여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국민의 영혼과 양심의 문제, 도덕 문제를 해결하는 복음적인 구원에서 멀어졌고, 복음 자체의 깊은 소화․체험을 결여한 채 오늘의 무기력에 이른 것이다.
지난날 이승만․김구․여운형 같은 인사들이 모두 기독교인으로 자처했고, 기독교 역시 이들을 큰 자랑으로 생각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저들에게 실컷 이용만 당했고, 정치적 독립이 이루어진 오늘날에 이르러 한낱 길가의 잡초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니, 종교를 팔아 이룬 독립의 결과가 오늘날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라. 해방 후 20년, 국민의 무자각․혼란․죄악을 생각하면 나는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외교입국이나 살인입국 또는 교육입국이 아니라, 종교입국이 되었어야 했다.
나는 오늘날 우리의 이 불우하고 기구한, 더럽고 추잡스러운 사회 현실과 정치현실이 몇몇 정치인들의 죄악이나 정치체제의 미비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렇게 보아버리기에는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 4천년 역사가, 아니 해방 후 내 눈으로 지켜본 우리의 20년 현실이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종교를 정치와 바꿔먹는 ‘에서의 족속’인 우리 국민 전체의 더러운 도덕상태, 그 구린내 나는 양심의 표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인간의 제일의적(第一義的)인 본질 문제인 도덕 문제, 양심 문제는 사람이 스스로, 또는 정치나 경제에 의해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직 인간에게 양심과 도덕을 부여한 분이시자 또한 이로써 인간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산 종교 신앙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가치가 궁극적으로 저의 도덕․양심 상태로써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사회․경제 역시 궁극적으로 그 국가와 국민의 도덕․양심 상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결코 그 역(逆)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민이 주절대곤 하는, 밥만 잘 먹으면 모든 것을 잘 하겠다고 하는 말은 인간 자체를 모르는 철부지의 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의 말이 옳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배가 부른 배우․교수․정치인들이 가장 양심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저들이야말로 국가와 민족을 망치는 집단이 되고 있다. 심한 말이라고 하는가? 그러나 오늘날 교육계의 현실을 보라. 유능했던 교수들이 정계에 진입하여 타락하는 광경을 보라. 요즘 정계의 추잡한 사태를 보라.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의 식자층은 어찌해서 인간의 본질과 영혼과 양심에 관계되는 종교를 현실과 정치의 시궁창으로 끌어내리려고만 하는 것인가? 결국 종교를 이용하려는 심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는 이용할 것이 아니고 각자가 믿어야 할 것이다. 현실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도리어 우리로서는 개인이고 집단이고 간에 종교를 살려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판국에 종교마저 썩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무리 밥에 허기진 4천년 노예 민족이라 할지라도 이 더러운 우중(愚衆)에 아첨하여 종교와 영혼을 정치에, 밥에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 일찍이 칼라일은 투표함에서 좋은 것이 나올 수 없다고 갈파한 바 있다.
식자들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현실적인 싸움을 말하고 근대 종교개혁과 유럽문명의 창조를 말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종교는 국가를 멸망시키는 외세의 침략까지도 오직 자국민의 부도덕과 불신, 죄악에 돌려 이를 신의 심판으로 규정했다. 그들은 자국을 치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군국주의도 신의 징계의 채찍으로 받았다. 16세기 루터의 개혁은 ‘신앙만의 신앙’에 의한 유럽인의 양심의 각성, 심령의 변화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회심(conversion)이었으며 종교상의 개혁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차후 유럽 문명의 최선의 부분이 꽃을 피운 것이다.
우리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사회․정치개혁과 혼동한 농민폭동을 저주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신의 역사 섭리 속에서 군대의 위상이 늘 그러했듯이, 이 말썽 많은 군사정권 역시 자국 군대로써 우리의 부도덕과 무자각을 치는 하나님의 징벌로 파악한다. 외세를 막아야 할 군대가 자국민을 손에 넣은 사실에는 이 외의 뜻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군사정권이여, 이 부패․타락한 철없는 국가와 민족을 앞으로 4년, 아니 10년이고 20년이고 더욱 심하게 때리고 밟으라. 4천년 동안 먹고 마시고 노는 것밖에 모르는 이 더러운 민족을!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대들 역시 이 무서운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더러운 한국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의 기독교는 결코 정치의 시궁창에 떨어져 분열의 비극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하루 속히 민족의 도덕을 위한 전투태세를 갖춰야 한다. 그리고 식자들은 우선 여기 정치의 이념이 될 수 있는 학문과 사상, 철학을 살려내야 한다.
<성서연구> 제112호 (1963년 7월)
첫댓글 오랜만에 노선생님 글을 올립니다. 노선생님 생전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정신이 번쩍드는 글이군요.
선생님의 모든 글들이 다 그렇지 않아요? 직설적인 표현, 최고예요!
"종교를 정치와 바꿔먹는 ‘에서의 족속’인 우리 국민 전체의 더러운 도덕상태, 그 구린내 나는 양심"==> 이런 말 아무나 못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