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교회 조직인 한국 지방부 서울 지부 조직 [1956.6.3, 서울 고등학교]
파우엘/데 튼/유영준/오희영/이택희/정 윤/최정은/이성해 박종우/이계묵/이인순/최상흡/이태범 배응현/권익현/오계희/현건섭/홍병식/이호남/김호직/정흠주/양종환/김광호/이경자 지경덕/이영범/정영주/신채원/심복인/배양자/김정자 이동수/홍용우/김정숙/최명희/김영숙/지순자/홍금자/신동필/유경옥
정부가 서울로 환도함에 따라 부산에 피난왔던 회원들이 차차 서울로 돌아 오게
되었고 미8군 예배당의 LDS 예배 시간에 얼굴을 찾아 볼 수 있게 도었다.
1954년 9월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이신 헤롤드 비 리 장로께서 주한 미군 몰몬을
격려하려 내한하셨고 1959년 8월 5일 여름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이신 조셉 필딩
스미스 장로께서 한국을 선교지역으로 헌납하기 위하여 내한하셔서 남산의 장충
단 공원쪽 비탈(현재의 영빈관 구내)에서 헌납 기도를 드렸다. 이 때로 부터 미군
인과 함께 예배보던 한국인 성도들은 선교사의 내한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헌납하던 서울 장충단 부근의 숲
옥인동 소재 옥인교회(종로구 옥인동 18의 1)에서 예배를 보기도하고 해무청
(종로구 적선동 51번지, 현재 조달청 관리국) 자리 한방을 빌려 예배보기로 하였다.
드디어 당시 문교부 차관이던 고 김호직 장로님께서 일보누재 선교사의 내한에 필
요한 수속을 서두르시게 되었다.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선교사의 내한
을 꺼리는 종파 사람들의 은근한 압력으로 선교사의 입국이 방해 되었으나 김 장
로님의 사회적 지위와 신앙의 힘을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이것이 가능하였다.
1956년 4월 어느 화창한 날 신문로 파출소 길목 어귀가 떠들석 하였다. 선교사의 숙소로 전세낸 집(서대문구 신문로 2가 1-183)을 청소하러 가는 젊은
한국 몰몬 개척자들의 희망에 찬 웃음 소리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반기는 대화
소리였다. (당시 집회는 서울 중학교에서 봄).]
자매들은 유리창을 닦고 걸레질 하며 형제들은 마당을 비질하며 거미줄을 치웠다
언제나 리더격은 홍병식(洪炳植) 형제, 세치의 혀로 일을 다 헤치우는 인간 최상
흡 형제, 체구는 작아도 남보다 앞장서는 현건섭(玄健燮) 형제, 청소하며 장난치기
에 여념이 없는 정영주, 김광호 형제, 불편한 몸이지만 뒤지기 싫어하는 이인순 형
제, 남이야 떠들거나 자기 일 만하는 이영범, 이호남, 신채원 형제, 모두들 과연 어
떻게 생긴 선교사가 오게 될까 궁굼해 하면서도 목자 없는 양떼를 이끌어 줄, 양
을 위해 목숨을 바쳐줄 목자를 고대하였다.
예배보던 해무청 자리
신문로 선교사 집
1956년 안드루스 북극동 선교부장과 파우엘 처음 선교사
파우엘 장로, 뎃튼 장로,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온화한 표정 그 뒤에는
한국에 제일착으로 온 몰몬 선교사다운 결의와 간증을 엿볼 수 있었다.
1956년 6월 3일, 서울 고등학교에서 북극동 선교부 한국지방부 서울지부가 조직
되었다. 그 때의 회원 중 반수 가까이는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하고 있고,
아직도 활동적인 분은 이호남 선교부장 제2보좌와 신채원 성북지부 주일학교 회
장, 정 윤 청운 지부장, 김정숙 지방부 상호부조회 제1보좌 제씨밖에 계시지 않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당시의 회원에 의하여 한국 몰몬(말일성도)
의 전통이 세워지고 훌륭한 신앙의 토대가 잡힌 것이므로 개척자였던 이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같은 해 7월과 8월에 선교사의 보강이 있었다. 지금은 곤충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
아 하와이 대학에 재직중인 엔더슨 장로, 영화배우 타이론 파워 처럼 생긴 옴 장
로, 동냥 얻으러 온 사람을 붙들고 함께 우는 인정 많은 킴볼 장로, 한국에 오려고
금식 기도를 여러번 하다가 드디어 한국으로 파견되어 훗일에는 제1대 한국 선교
부장이 된 게일 이 카 장로, 후레쳐 장로, 이들 선교사는 일본에 있다가 오신 분들
이므로 일어를 잘했었다.
그래서 구도자 중 나이가 드신 분은 이본어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영어로 복음 공
부를 하였고 열심있는 성도는 영어를 모르는 구도자를 위해 수시로 통역을 맡아
주었다. 매시간 매일 똑같은 공과를 통역하다보니 선교사가 이야기 하기도 전에
통역을 해 버리기가 일쑤였고 그래서 복음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간증을 얻을 수
있었고 모르는 교리, 성경 구절이 없었다. 또 자연히 복음에 충실할 때 많은 사람
이 매우고져 하는 영어 회화에도 능통하게 되는 축복도 얻을 수가 있었다. 1956년 12월 김호직 박사님과 선교사들
이영범 형제와 같은 분은 새벽 5시 반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매일 같이 가르쳐
주느라 무척 애를 썼고 드디어는 한국인으로서 제1착으로 선교사의 부름을 받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신문로에 드나든 몰몬 개척자 만큼 복음을 사랑
하고 선교사를 사랑하고 정말 형제 자매로서 어울려 다닌 사람도 없었을 것 같다.
비록 서울 고등학교 3층에서 소수의 무리가 모여 예배를 보았지만 성도들의 간증
은 굳건했고 구도자들은 진지하게 복음을 파고 들었었다.
우리말로 된 찬송가가 없어서 영어로 부르고 성찬 축복도 영어로 하였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이호남 제사의 낭랑한 베이스의 축복, 많은 사람이 축복의 내용보
다는 이호남 형제의 음성에 매혹되곤 했었다.
서울 지부는 비약적으로 발전, 매월 10명 가까운 구도자 -- 3.4개월 동안 일주일
에 두 번씩 공부한 --가 회원이 되었다.
이영범(내주를 가까이), 최명희(주 예수의 군병들), 홍병식 등 여러분이 찬송가를
번역하여 정영주, 김광호 형제가 줄판에 악보를 그려 6곡을 프린트 하여 집회에서
사용하였다. 악절과 가사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으나 그런대로 의미를 살려 부
르는 기쁨은 어려운 영어로 부를 때 보다 훨씬 더 영감적이었다. 피터슨 사도님과 안드루스 북극동 선교부장 부처와 상호부조회 회원 [1959. 6]
11월에 유락동 산 12의 24, 2층집을 구입하여 카 장로, 뉴먼 장로가 집을 지켰다. 요리사도 없고 하우스 보이도 없었다. 그 당시 선교사는 9시 4시의 두끼로 하루
해를 보냈었다. 그러기에 복음 공부가 3시를 지나기까지 계속 되면 -- 공부 시간
은 으례이 2시간 이상이었으니까 -- 공부를 가르치면서 요리를 하곤 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자 크리스마스 케롤이라는 책을 정대판 형제가 만들어 냈
다. 성도들은 이 책으로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낼 수가 있었고 올갠도 없이 예배
를 보는 안타까움을 안 미군 형제들이 올갠을 사주었다. 지금 삼청 지부에 쳐박혀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홍병식 형제와 이정순 자매의 결혼식이 유락동에서 거행되었다. 모든 성도들은 두
분을 성심껏 축복하여 주었다. 많은 형제 자매가 주님안에서 처음으로 결혼하는
두 분을 위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협력하여 주었다. 크리스마스 케롤집의 뒤
를 이어 여러 곡의 찬송가가 우리말로 번역 프린트 되어 나왔다.
대부분을 홍병식 형제가 해 주었고, 장세천 형제(MIA 우리 MIA, 성탄의 종이 울
린다), 권익현 형제(즐거웁게 예배하세) 등이 번역해 주었고, 정대판 형제가 악곡
에 맞춰 가사를 고치고 악보를 원지에 그리고 프린트 제본하였다. 아직 구도자 때
의 일이었다. 요셉 스미스의 간증, 어느 교회가 옳은가 등의 팜프렛도 회원들의 봉
사로 번역 출판 되었다.
1957년 3월 한국 지방부 번역실이 창설되었다. 스텝은 번역사 장세천, 타이피스
트 이정순, 인쇄 제본 정대판 세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만든 책이 그리스도의 생
애, 보이는 글보다 보이지 않은 대목이 더 많은 인쇄가 엉망인 책이었다.
서울 지부 형제 자매가 피크닉을 갔다. 장소는 백운장, 지금의 선교부다. 관리장로
였던 카 장로가 장차 선교본부를 점 찍게된 계기가 되었다.
가을 지방 대회 때 숙명여고 강당에서의 연극 [1960년]
1957년 늦가을 서울 지부가 동부와 삼청 둘로 나뉘게 되어 지방부 사무실도 삼창
동으로 옯겨갔다. 선교사도 많이 보강되었다. 글자 그대로 강인하게 생긴 스타우
트 장로, 휘파람 잘 부는 보먼 장로 등.
1959년 마크 이 피터슨 장로가 서울 상고에서 모인 지방대회에 참석해 주셔서 훌
륭한 신앙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1958년 중앙지부에서 서부지부가 갈려 나갔고 동부지부는 동대문과 동부 둘로 나
뉘어 한건물에서 각기 시간을 달리해서 모임을 가졌다.
1959년 8월 31일, 우리의 신앙의 기둥이셨고 우리의 참된 목자이시던 김호직 장
로님이 저 세상으로 떠나 가셨다. 성도들은 애통하였고, 교회의 장래를 염려하였
다. 지방부장의 자리는 관리장로 이던 브라운 장로가 계승하였고, 제1보좌 홍병
식, 제2보좌 이호남 형제가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휘문 고등학교에서 지방대회의 힝클리 사도님과 안드루스 선교부장 [1961]
1960년 여름 홍병식 형제가 몰몬경 번역에 착수하였고, 1967년 2월 20일 한인
상 형제에 의해서 번역 출판이 완성되었다.
대망하던 한국 선교부의 조직이 교회 본부에서 발간되는 "교회 뉴스"에 실린지 얼
마 후 카 선교부장 부처의 내한으로 비약적인 발전이 약속받게 되었다. (필자: 당
시 신촌지역장) [자료원: 성도의 벗(리아호나), 19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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