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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 중심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건너편에 위치한 사무실에 들어서자 반갑게 맞는 모습이 영락없이 ‘영국 노신사’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 단정한 외모, 사태를 관철하는 듯한 깊숙한 눈빛을 지녔다. 그는 단어를 하나하나씩 생각해 가며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답변하는 노인의 신중함도 그대로 보여줬다.
조지 슈왑 미국 NCAFP(미국외교정책협의회) 회장(George Schwab·74). CFR(미국외교협회)와 더불어 뉴욕의 대표적인 외교정책 전문 싱크탱크인 NCAFP를 이끌고 있는 그는 뉴욕에서 평생을 보낸 뉴요커다.
슈왑 회장은 뉴욕시립대학교(CUNY)에서 학사,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는 등 뉴욕에서 공부하며 자랐다. 이후 컬럼비아대학과 뉴욕시립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다가, 1968년부터 2000년까지 오랫동안 모교인 뉴욕시립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 1974년에 고인이 된 한스 모겐소(Morgenthau)와 함께 초당파적 외교정책연구소인 NCAFP를 공동설립했다. 이후 수석부회장으로 일하다가 1993년부터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슈왑 회장은 원래 유럽 전문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외향에서 영국 신사의 풍모가 보이는 것도 그래서인가 보다. 하지만 아시아 문제에도 많은 연구를 했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에 미국과 중국, 대만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아시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1년부터는 전 세계 외무장관과 대사, 국제기구 간부와 외교정책 전문가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고 있다. 물론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의 외교 전문가도 그 대상이다.
슈왑 회장은 한국 언론의 취재 대상이기도 하다. NCAFP가 북한 측 고위 관리들과 깊은 끈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소의 동북아 프로젝트 담당자인 도널드 자고리아 뉴욕 헌터대 교수는 유명한 북한 문제 전문가이다. 슈왑 회장은 자고리아 교수와 함께 북한 고위 관리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고, 미국 전문가들과 토론할 기회를 주선한다. 특히 북한 고위 관리들은 뉴욕을 방문할 때마다 예외 없이 NCAFP에 가서 하고 싶은 말을 털어놓는다. 물론 이 발언은 그대로 미국 백악관과 국무부에 보고된다. 미국 백악관과 국무부 관리들이 세미나에 참석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전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NCAFP가 북한 관리들과 접촉하는 현장에는 슈왑 회장과 자고리아 교수가 항상 같이 나타난다. 세미나에도, 기자회견장에도 그들은 같이 와서 함께 발표를 한다. 이쯤 되면 유럽 전문가인 그도 한반도 전문가 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슈왑 회장은 지난 3월 초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미국과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해 뉴욕을 방문했을 때에도 한·미 관계 비영리단체인 코리아 소사이어티와 함께 초청 강연회를 열었다. 미·북 협상이 열리기 직전에 빅터 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등 미국과 북한의 전·현직 관리, 학자 등을 초청해 행사를 개최했다. 행사 전에 점심식사에도 초대해 식사도 대접하고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보라고 김 부상에게 권했다. 즐겁고 코믹한 내용이 많은 ‘맘마미아’를 보는 것이 좋겠다고 추천했으나 표가 매진돼 ‘더 프로듀서스’로 낙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슈왑 회장을 만나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다. 하지만 북한 고위관리들과 나눈 이야기는 모두 ‘오프 더 레코드’로 하기로 서약을 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발설할 수 없다고 했다. 향후 북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도록 하려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 부상이 ‘비밀유지’를 전제로 발언한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에 대한 감정과 향후 정책 방향을 알아 보기 위해 우회적인 질문들을 던져 보았다. 바로 김 부상과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의 미국·북한 협상이 열린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맞은편의 고딕양식 건물 8층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다.
- 뉴욕에서 개최된 미국과 북한 간의 관계정상화 협의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는가.
“양자 모임은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본다. 미국과 북한은 예전보다 훨씬 상호이해와 문제해결에 적극적이었다. 물론 핵심은 북핵 문제 해결이다.”
- 미·북 간 양자 회의에 대한 전망은.
“나는 매우 낙관적이다. 이번에 북한 사람을 만나고 양자 논의가 진행된 상황을 보니 양측이 서로 이 문제 해결에 매우 관심이 있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 미국과 북한 간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나기 위해서는 양측이 어떤 조치를 이행해야 하나.
“양측 모두 합의사항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성공의 관건은 ‘핵 프로그램에 대한 공격적인 사찰’에 달려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철저한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북한이 미국의 이러한 공격적이고 철저한 사찰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협상은 결렬될 것이다.”
- 미·북 정상회담은 언제쯤 실현된다고 보는가.
“협의의 종국점인 정상회담은 좀 더 논의가 진행되어 보아야 성사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상회담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당장 60일 내 조치부터 이행되어야 한다.”
미국은 원래 북한과 양자협의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으나 최근 입장을 180도로 바꾸었다. 왜 그랬을까. 이 의문에 대한 그의 답은 이렇다.
“첫째, 워싱턴에서 현실파가 승리했다. 미국이 대화를 통해 북한 문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접근법이 채택된 것이다.
둘째, 1년 반쯤 뒤에 있을 미국의 대선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임기를 1년 반쯤 남겨둔 상태에서 자신의 유산(legacy)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리비아의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 핵문제 해결에 성공하면 부시 대통령에게는 아주 멋진 일이 될 것이다.”
- 그렇다면 북한은 진정으로 미국과 외교관계 정상화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북한 사람들이 그렇다고 했다. 북한 경제는 지금 매우 빈곤한 상태이다. 북한은 또한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가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둘러싸고 광범위한 합의를 도출하는 것을 지켜봤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나온 것이다. 경제문제에 쫓긴 북한은 핵 포기의 대가로 여러 가지 지원을 받을 것이다.”
슈왑 회장은 미국·북한 간 협상이 진행되면 곧 북한이 경수로 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협상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한반도 비핵화도 달성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그리고 한반도에 다자안보 체제가 정착되면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된다고 전망한다. 하지만 사전에 단서가 달려 있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정상화 협상이 첫 출발은 좋았지만, 관건인 핵 사찰 문제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결렬될 수 있습니다.”
슈왑 회장은 핵 문제가 걷히면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에서 보다 사실적인 일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예컨대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이다. 그는 “이미 역사적 문서에 다 기록이 되어 있는 사실을 일본이 부인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망언을 비판하기도 했다.
슈왑 회장은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나는 아직 북한에 가본 적이 없지만 북한 측에서 벌써 두 차례나 초청을 받았다”며 “자고리아 교수와 함께 조만간 북한을 방문할 것 같다”고 했다.
/ 뉴욕= 김기훈 조선일보 특파원(kh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