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린(1878∼1958)은 변방인 함흥의 중인 집안 출신이다.
서당에 다니고 일찍 결혼하여 평범한 가장의 삶을 살던 그는 정국이 요동치던 1895년 무작정 상경하면서 순탄치 않은 인생의 행로를 걷기 시작한다. 최린은 서북 출신 차별에 대한 분노를 개화파 재야인사들과 어울려 '가짜활빈당사건'을 모의하고 일심회를 조직하는 등 반정부운동을 통해 표출했다. 1902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이듬해 고종황제의 특사로 귀국한 그는 외부 주사에 특채되나 불행히도 건강이 악화되어 귀향해야 했다. 이제마의 제자로부터 사상의설을 익혀 건강을 회복한 최린은 1904년 황실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유학을 떠난다. 그의 유학생활은 국권상실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으로 인해 순탄치 못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인을 '야만'시하는 풍조가 급격히 확대되고 있었고, 이런 풍조는 와세다대학 모의국회나 국화인형전시장에서의 조선인 모욕으로 표출되었다. 이에 격분한 최린은 조선유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대학당국에 항의하는 한편, 국화인형전시장은 습격하는 직접행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연배와 통솔력을 인정받은 최린은 각종 유학생 관련 단체의 간부로 활약하면서 1909년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한다.
1910년 국망 직후 최린은 토착신흥종교인 천도교 입교를 결심하고 손병희를 찾아갔다. 손병희는 그에게 보성학교 인수를 둘러싼 분쟁을 수습하라는 중책을 맡긴다. 최린은 분쟁을 일소한 뒤 보성중학교 교감과 교장을 역임하면서 1910년대 교육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활약했다. 1919년 신년 벽두에 손병희는 최린을 불러 독립 선언을 위한 계획 입안을 당부했다. 최린은 분주히 종교계와 교육계 지도자들과 접 촉하면서 3·1운동을 준비했다. 그는 뛰어난 추진력으로 상호갈등을 조정해 가면서 33인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 서명과 발표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 이로서 33인 중 42살로 최연소였던 최린은 일약 민족의 '혜성'으로 부상한다.
변절의 첫 단추 : 자치만이 살길이다.
교도 '100만'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던 천도교는 1922년 손병희의 사망으로 전환기에 직면하게 된다. 최린은 교인의 80퍼센트 이상이 밀집한 서북지방 천도교인의 열렬한 지지와 일본유학파인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일제당국의 비호, 그리고 3·1 운동의 주모자라는 명망을 활용해 비교적 손쉽게 교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최린은 천도교의 '교주'로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전위기관인 '천도교청년당'과 농민대중조직인 '조선농민사'를 기반으로 정치활동에 몰입한다. 문제는 그의 정치노선이었다. 최린은 3·1운동을 주도할 당시부터 이미 즉각적인 조선 독립의 희망과 노력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에서는 일제의 정치적 차별 대우를 철폐하고 자치를 실시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최대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최상의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최린의 자치에 대한 신념은 1926년 몸소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 인사를 상대로 자치운동을 전개할 만큼 확고했다.
1927년 '약소 민족의 현황을 살핀다'는 명목으로 1년여에 걸친 외유를 떠났던 그가 프랑스에서 여류화가 나혜석과 염문을 뿌린 사건은 나혜석의 이혼과 최린에 대한 위자료 소송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도덕성을 시비하는 주요소재로 이용되었다. 1928년 천도교인의 요란한 영접을 받으며 귀국한 최린은 강력한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스스로 천도교 도령 자리에 앉았다.
변절의 극치 : 일본의 臣民으로 사는 영광을!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최린은 자치운동을 접고 내선일체를 추구하는 친일로의 방향전환을 모색한다. 당시 그는 자치운동을 통해 개량적인 속성을 드러내긴 했지만, '고우회'라는 사조직과 활동자금을 제공하는 든든한 후원자를 가진 대표적인 민족지도자로 대접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변절이 미칠 파장은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934년 최린은 연봉 1,800엔의 중추원 참의직을 수락하면서 친일을 공식화했고, 친일단체인 시중회도 결성했다.
그의 친일경력은 화려하다. 창씨명을 가야마 린(佳山麟)으로 한 그는 천도교인을 총동원하여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을 결성하고 선두에서 친일협력대오를 이끌었다. 대외적으로는 1938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사장에 취임하였고, 이를 사임한 뒤에는 조선임전보국단(1941), 조선언론보국회(1945) 등을 결성해 친일의 선봉에 섰다. '루스벨트여, 귀가 있거든 들어보라. 내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속아 천황의 반신(反臣 )노릇을 했다. 이 절치부심할 원수야. 이제는 속지 않는다. 나는 과거를 모두 청산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것을 알라'는 절규에서 알 수 있듯이 최린의 친일은 그야말로 변절의 극치였다. 그는 어느새 '바칠 것 다 바치고 나서 찾아 가질 것을 갖자'며 우리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몰아 그 희생의 대가로 참정권을 확보하려는 내지연장주의자로 변신해 있었다. 해방을 맞아 천도교는 최린을 친일행적의 속죄양으로 삼아 그에게 출교를 종용했다. 최린의 정치적 입지도 협소해졌다. 미군정은 최린을 일개 신흥종교의 교주로 치부할 뿐이었다. 옛 동지들이 집결한 한민당조차 자신들의 친일 컴플렉스로 인해 변절과 친일의 상징적 인물인 최린을 기피했다. 김구 역시 최린과의 협력을 거부했다. 이제 그가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은 '천도교청우당'이었다. 그러나 1946년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 결성되어 독자적인 활동에 들어가면서 그의 영향권을 벗어났다.
최린은 1946년 찬·반탁이 논란되던 정국을 틈타 교권탈환을 시도했으나 북한 천도교대표들의 서울행이 저지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1947년 12월 유엔에서 유엔 감시하 남북한총선거안이 제기되자 최린은 북한지역에서 기득권을 회복할 수 있는 호기라며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북한당국은 유엔한국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했다. 최린의 분노의 화살은 소련과 북한 당국을 향했다. 공산주의를 박멸해야 할 악성전염병인 매독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 만큼 그의 반공의식은 철저했다.
1948년 2월 최린은 북한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밀사를 파견했다. 그는 3월 1일 북한지역 천도교인이 총궐기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국을 환영하는 평화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했다. 소위 '3·1재현운동'이 그것이다. 북한 천도교 지도자들은 최린의 지시를 거부했다. 이러한 사실이 북한 당국에 탐지되면서 상당수의 천도교 지도자들은 감시와 탄압을 피해 월남해야 했다. 최린의 북한정권 전복기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천도교 비밀결사인 '영우회'를 결성하여 인민군의 무기를 탈취하여 유격대를 결성하는 등의 반공투쟁을 전개했다.
1949년 1월 13일 최린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 최린은 자신의 죄상을 추궁하는 판사를 향해 민족을 위해서, 민족 정신의 요람인 천도교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다른 친일파들과는 달리 고분고분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최린의 예견대로 6·25사변이 일어났고 그는 북한당국에 의해 친일파라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 최린은 1958년 12월 말 평북 선천의 요양소에서 여든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최린은 민족의 영도자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내던지고 반역자라는 오명을 감수하면서 변절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는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삶을 왜곡·굴절시켰던 '타협적·종속적' 부르주아지식인의 유형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민중들은 이광수, 최남선과 마찬가지로 최린의 친일행적보다는 그것이 변절이라는 사실에 더욱 분노했다. 해방 후 최린의 정치적 좌절도 그가 변절과 훼절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라는 사실에 연원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