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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 이었다.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서 그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五類聖衆)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 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저마다 일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元年)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 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였으며 오대에 나아가 공경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 때, 신문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한사코 돌아가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효명이 사람들의 뜻을 쫓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덕왕(聖德王)이다. 왕이 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개창하니 이곳이 지금의 상원사이다.
고려 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거세어져 불교는 극박한 박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11종(宗)이던 불교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으나 만년에는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또 나아가서는 권근(權近) 에게 명하여 '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에 젖게 하라'고 하였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서의 간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 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국보 제221호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木造文殊童子坐象)과 동자 역시 문수동자를 만났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고는 자취를 감추었다'는 문수동자를 세조가 장인에게 조성하게한 동자상으로, '문수동자상 조성발원문'에는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1442~1477)와 그의 남편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1440~1504)가 지혜로운 아들을 얻기를 바라며,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불·문수보살·보현보살·미륵보살·관음보살·지장보살·16나한·제석천을 조성하여 ‘오대산 문수사’에 봉안한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고양이 석상 오대산에서 불치의 병을 고친 세조는 이듬해 다시 이적의 성지를 찾았다. 상원사에 당도한 세조는 곧바로 법당으로 올라가 예배를 올리고자 하였다. 그때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물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는데 알고 보니 법당 안에 자객이 숨어 들어 있었다 한다. 세조는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에 고양이를 위한 밭[猫田(묘전)]을 하사하고, 한 쌍의 고양이 상[묘상(猫像)]을 석물로 만들어 안치하였다. 그리고 고양이를 죽이지 말고 잘 보호하라는 왕명을 내렸고, 서울 근교에도 여러군데 묘전을 설치하여 고양이를 키웠다는 것이다. 지금도 서울의 봉은사에 있는 밭을 묘전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영산전(靈山殿) 오대산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이며, 1946년 화재시 유일하게 화마를 피한 전각이다. 법당에는 석가모니 삼존상과 십육 나한상을 봉안 하였는데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영산전이라 한다. 또한 1899년 해인사의 고려장경 4부를 인출(印出)하여 삼보사찰에 각기 1부씩 모시고 1부는 전국의 유명 사찰에 나누어 모셨는데, 그 중 일부인 39함(函)이 영산전에 모셔져 있었다. 현재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옮겨 보존되고 있다. 영산전 석가삼존ㆍ십육나한상 및 권속 (靈山殿 釋迦三尊ㆍ十六羅漢像 및 眷屬)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이 불상들은 조각수법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제작연대(1711년) 및 작자를 명확히 알려주는 복장유물을 동반하고 있고, 개성 있고 다양한 모습의 특징 있는 형태들로 당대 16나한상 연구에 중요시 되어야 할 작품이다.
상원사 동종(上院寺 銅鍾) - 국보 제36호 경주 성덕대왕 신종(국보 제29호),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 제1167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현존하는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종으로, 정상에는 약동하는 용이 있고 그 옆에는 연꽃이 조각된 음통이 붙어 있다. 용뉴 좌우에는 70자에 달하는 명문이 해서체로 음각되었는데 첫머리에 '개원 십삼 년 을축 3월 8일 종성기지(開元 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鍾成記之)'라고 되어 있어,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4개의 연곽에는 각 9개의 연뢰가 있으며, 종복(鐘復)에는 당좌(撞座)와 교대로 있는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의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나 또 공후(箜篌)와 생(笙)을 연주하는 손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종은 안동 근처의 어느 사찰에 봉안되어 있다가 태종이 불교를 박해할 때 안동 문루로 옮겨졌다고 한다. 세조 때 상원사에 봉안할 종을 팔도에서 찾고 있던 중 안동에 있던 이 종이 선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세조가 승하한 직후인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도달했다고 한다. 종을 안동에서부터 상원사로 옮겨오던 중에 3,379근(斤)이나 되는 큰 종이 장차 죽령(竹嶺)을 넘으려 하는데 노상에서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종 꼭지를 하나 떼어서 안동으로 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설을 입증하듯 네개의 연곽중 하나에 연뢰 하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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