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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평구전집> 한일회담을 보고
한일회담은 끝내 여야 정치인들의 격돌을 넘어서 학생들의 데모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대체 이런 국가적인 외교문제를 왜 여야가 초당적으로 다루지 못하는가. 우리란 참으로 딱한 민족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정부는 그간 이런 중대 문제에 대해 내각수반의 기자회견 한번 없지 않았는가. 군사정권 운운으로 안팎에서 욕을 먹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또 회담이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인 만큼 전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이를 맡아야 할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일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다.
나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앞으로는 모든 일이 오로지 선의(善意)로 거국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란다. 회담 자체에 대해서는 나는 물론 찬성이다. 지구촌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공간이 축소된 오늘날의 세계에, 핵무기 앞에서 인류의 절대적 평화와 친선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그리고 세계의 모든 진영이 교류하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쇄국주의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해방 후 20년 동안 우리의 이 현실을 사람 사는 세상인 줄로만 알고, 우리도 사람인 줄 알고 살아왔으니 참으로 딱한 백성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세계에서는 1년의 쇄국이 10년, 100년의 민족문화 정체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정치가는 물론 온 국민이 회담을 돈으로만 따지는 것이 못마땅하다. 저자세니 고자세니 하는 것도 결국 이 때문이다. 야당은 요사이 27억인가로 이 박사보다 더 많은 액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 대해 모든 배상과 포로 억류를 포기한 중국의 장개석 총통의 처사를 생각한다. 그 때 그는 동양 평화 내지 세계 평화를 위해 중일 양국은 모든 원한을 풀고 즉시 친선에 들어갈 것을 주장하며 이를 위해 배상과 포로의 억류를 포기한다고 했다.
그는 이에 대한 중국 국민의 극심한 반대에 대해, 중일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중국이 전승국으로서 일본을 괴롭힐 것이 아니라, 중국 자체가 하루 속히 현대 문명의 모든 부문에서 노력하여 일본과 동등선상에 오르는 것만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했다. 국가와 민족 문제에서 내외로 실력의 차이야말로 언제든지 불행의 불씨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대한 발언이다. 당시 세계는 물론 일본 국민들마저도 자신들이 승리했던들 절대 이런 발언을 못했을 것이라고 자인하고, 장개석 씨에 대해 깊은 경의와 감사를 표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오늘날까지도 더럽게 일본에 대한 원한뿐인가. 가만 내버려 둔다면 다들 거기로 도망이라고 하고 말 주제들 아닌가. 대체 일본의 무엇이 그렇게 무섭단 말인가. 왜 그토록 국민정신이 왜소하고 나약하단 말인가. 나는 이것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노예근성이 아니기를 바란다. 아니, 그렇게 무섭다면 20년 동안 왜 아무런 자각적인 행동도 대책도 없이 오늘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 흔했던 미국 원조도 자유당이 다 먹어치웠다고 말하지만, 세계의 눈은 한국 국민 중 자유당원만 도둑놈이고 여타 국민은 다 훌륭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나는 사실 나 자신 속의 이 한국적인 나태․무력․부도덕․죄악에 접해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도 사람이라고, 살고 있는 나 자신이 저주스럽다. 아, 이것이 제발 3천만 국민 중 나 혼자만의 현실이기를. 다른 모든 국민은 모두 하늘의 천사이기를. 그러나 세계사는 결코 이 더럽고 무자각한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요사이 프랑스가 중공을 승인했다고 해서 온 국민의 눈이 뒤통수에 가 붙어 돌아가는 꼴이란 정말 뜬눈으로 볼 수 없다.
돈이 아니다. 정신적․도덕적 자각과 각성이다. 이런 국가 문제에서마저도 여야 정치인의 비협조와 양극적인 격돌이 벌어지는 이유는, 결국 자기 정파의 유불리만으로 일본 돈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닌가. 이래서는 안 된다. 돈을 도외시하고, 아니 돈을 생각 못할 정도로, 온 국민이 정신적인 무장과 자각으로 임해야 한다. 이점 나는 위의 장개석 씨와 같은 의견이다. 타인에 대한 원한이나 불평은 결국 자신의 비자각적인 태도의 표명일 뿐이다. 요사이 함석헌 선생은 38선도 일본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끝이 없다. 만일 38선이 없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남한도 공산화 되었을 것 아닌가.
우치무라(內村)의 제자인 일본 도쿄대학 경제학 교수 에바라(江原萬里) 씨가 근대 동양 특히 한국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사과했을 때, 우리의 신앙 선배 안학수 씨는―그는 의사로서 해방 후 정치의 부패, 국민의 부도덕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북한 공산주의의 남침이 있을 것을 목이 메도록 경고하다가, 결국 6.25로 자신의 예언이 적중함을 보고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오던 시각에 부인과 함께 자결했는데―도리어 근대 개화기에 한국이 동양사에서 제 구실을 못하고 역사의 화근이 된 것을 사과했다.
이것은 과연 피히테적인 높은 애국의 발언이다. 나는 진정 우리의 반성이 여기까지 가야 비로소 우리에게도 정신적인 참된 자각이 이루어질 것으로 본다. 타인에 대한 원한이나 불평은 쓸데없는 일이다. 정말 책임이 타인에게 있다면 일본이 물러간 날부터 우리에게 무슨 서광(曙光)이라도 비쳤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20년을 왜 고스란히 이 모양 이 꼴인가. 그러기에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던들 하고 탄식이나 하며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얼마나 못났기로 주권국가라 하면서도 이도 저도 못하고 이 모양으로 벌벌 떨고만 있는가. 국토의 양분은 차치하고 손바닥만한 땅에서 정치인들의 손발은 왜 이리도 안 맞는가. 아직도 고질적인 더러운 당파근성을 개에게 못 준 때문인가. 아니, 우선은 우리가 돈을 너무나 무서워하고 물질의 노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는 결코 돈으로만 설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종교가들까지도 36년간의 선조의 피 값이 겨우 이것뿐인가 하고 떠들어대니, 그러면 우리의 선조가 후손에게 자신들의 피 값으로 먹고살라고 죽어갔다는 말인가. 언어도단이다. 이야말로 선조에 대한 모욕이다. 절대 아니다. 우리도 정신적․도덕적으로 각성, 다시는 남에게 지배되지 말고 독립적으로 떳떳하게 살라고 죽어간 것 아닌가. 그러나 오늘날도 우리는 동양의, 아니 세계의 암적 존재로서 그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의 분단은 그들의 군국주의에 대한 징계이다. 우리의 분단은 민족의 당파근성, 동족상잔에 대한 징계이다.
요사이 나라가 망한다고 나에게도 데모를 권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나라는 절대 쿠데타나 민중의 봉기로써는 설 수 없다. 도덕적 자각으로 선다. 이것이 없을 때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 아니, 망해야 한다. 도무지 존재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가 니부르(Niebuhr)는 모든 국가와 민족의 패망은 자살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깊은 의미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성서연구> 제119호 (1964년 3월)
첫댓글 노선생님의 글은 <성서연구>에만 실릴 게 아니라 주요 일간지에 실려서 전국민이 다 읽을 수 있었어야 했는데....만약 그랬다면 500호까지 갈 수도 없었을까요?
성서적 입장에서의 사회비판...이게 말하자면 예언정신인데...20세기 한국 현대사에는 김교신-함석헌-노평구 정도가 그 명맥을 이었던 것 같네요. 일간지에서 저런 글을 실어줄 리도 없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