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식과 신앙심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
김동수(金東洙, 1916~1982) 선생은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어 무단통치를 받던 1916년 12월 6일 인천(仁川)에서 김우제(金宇濟)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경주로 대대로 강화에 세거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집안은 조선 숙종 때부터 강화 교산에 자리 잡고 살았다. 이곳은 경주 김씨 후손들의 집성촌이었다.
선생의 조부 김상임(金商霖, 1850~1902)은 한학을 수학하여 11세 때 동몽과에 응시하여 1등으로 합격하였다. 20세 때에는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며, 35세 때 다시 강화에 내려와 서당을 차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38세가 되던 1887년에 강화부 승부초시가 되었다. 그러나 과장(科場)이 매관매직으로 부패한 현실에 실망한 그는 관직 등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물러나 있었다. 강화에서 그는 김초시로 불렸다.
1892년 경 김상임은 미국 선교사 존스(G. H. Jones)와의 만남을 계기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김상임 일가족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되자 기독교인이 거의 없던 강화에는 김씨 문중을 중심으로 교인 수가 급격히 늘었다. 한학자로서 지식인들 사이에 신망이 높은 김상임의 기독교 개종은 강화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후 김상임은 신학을 공부하여 전도사가 되었으며 강화 전체를 이끄는 기독교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부친 김우제도 조부 김상임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학을 공부하여 마찬가지로 전도사가 되었다. 그의 주된 활동영역은 강화 잠두교회 및 인천 내리교회였다. 잠두교회 전도사 시절, 당시 강화진위대장으로 있던 이동휘(李東輝)가 기독교야말로 쓰러져가는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김우제 전도사를 방문하여 개종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렇게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민족의식과 기독교의 종교적인 신앙심이 농후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상해에서의 청소년기, 저절로 자라는 애국심
선생은 8세 때인 1923년 보다 자유로운 선교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로 파송되는 부친을 따라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는 당시 아시아 최대의 국제도시였다. 1842년 남경조약의 결과로 형성된 외국 조계는 영국인, 미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유태인, 일본인 등 많을 때는 58개 국가에서 온 사람들로 붐볐다. 상해는 각국 열강의 조계 내 세력 관계를 이용해 활동하던 약소민족 국가의 망명가와 혁명가들의 낙원이기도 하였다.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1910년대 초,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하나 둘씩 상해로 망명해오면서 상해에도 소규모 교민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19년의 3ㆍ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는 교민이 약 1,000명으로 늘어났다. 상해로 건너 간 김우제는 프랑스 조계에 정착하였다. 당시 프랑스 조계 한인 사회는 매우 강한 정치성을 띠고 있었다. 일제는 1921년 당시 프랑스 조계의 한인 약 700명 가운데 200명 가량을 직업적인 독립운동가로 파악할 정도였다. 또 직업적인 독립운동가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지지를 보내거나 동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상해의 반일적인 분위기는 선생의 성장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막 학령기에 접어들었으므로 임시정부 산하 초등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를 다녔다. 인성학교는 독립운동가 2세들의 민족의식을 육성하는 교육기관이자 당시 상해 한인 사회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조국이 강제병탄되고 국외에서 유랑생활을 경험한 한인들은 “교육은 우리 민족의 생명이다”는 신조를 갖고 있었다. 1916년 9월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여 설립된 인성학교의 교육 목표와 내용은 민족 교육을 통해 민족정신과 민족 역량을 배양하고 자활 능력을 양성하여 완전한 민주시민 육성과 신민주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인성학교의 교장을 비롯한 교원들은 대부분 임시정부와 관계 있는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되었다.
선생은 인성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1928년경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昂)의 지도에 의해 조직된 소년 단체 화랑사(花郞社)에 참여하였다. 화랑정신을 통한 소년운동을 전개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화랑사는 상해 한인 소년 23명이 김철(金澈)의 조카 김덕근(金德根)을 책임자로 하여 국권 회복을 표방했던 단체였다. 이 단체는 강령ㆍ규약을 제정하고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여 <화랑보(花郞報)>라는 순간 기관지 30부씩을 발간해 상해 한인들에게 배포하였으며 독립운동을 격려하는 내용의 격문을 인쇄하여 살포 또는 조선 내에 발송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인성학교 졸업한 선생은 공시중학교(公時中學校)를 다녔다. 선생은 학생 신분으로 상해에서 전개된 중국의 항일 구국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례로 선생은 1932년의 이른바 ‘제1차 상해사변’에서 중국군의 항전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1931년 7월 일제는 중국 동북 지방에서 이른바 ‘만보산사건’을 일으키고 한국과 중국 두 민족을 이간시켰다. 그 결과 한국에 대한 중국인의 악감정과 적대적 행동으로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곧이어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1월 28일에는 ‘제1차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이때 선생은 일본의 상해 침략에 항의하는 중국 학생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상해에서 학교를 다니던 한인 학생들은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학생들의 시위운동에 참가하는가 하면 자진하여 적십자군이 되어 들것으로 부상병을 나르고 부상병에게 손수 붕대를 감아주는 등 간호 활동을 펼쳤다. 상해에서 일본군에 대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중국군 제19로군이 이번 전투에서처럼 민중의 성원과 열렬한 학생들의 응원을 받은 전투는 일찍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선생이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든 데에는 인성학교의 민족교육 외에도 상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여러 반일 의거의 영향이 있었다. 즉 1932년 1월 이봉창의 동경의거, 같은 해 4월의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 등은 선생과 같은 청소년의 마음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청소년기의 선생은 일본군의 상해에 대한 노골적인 침략과 그에 대한 중국인의 반일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배양하고 장차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될 소양을 기를 수 있었다.
군관학교에서 시작된 군사훈련
상해에서 인성학교, 공시중학을 졸업한 선생은 아직 채 약관의 나이에도 못 미친 1934년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선생은 독립전쟁의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설치된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낙양분교는 윤봉길 의거 이후 장개석을 면담하고 한인 청년에 대한 군사훈련 실시의 허가를 받은 김구 등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김구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던 선생이 낙양분교에 입교하였던 것은 물론이다.
낙양분교 한인 특별반은 윤봉길 의거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이후 각계에서 원조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1933년 전반기 박찬익(朴贊翊), 중국 측에서 진과부(陳果夫) 양인의 주선으로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이 성사되었다. 이후 김구는 특무공작 계획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으나 장개석은 무관학교 설립을 제시하였다. 이에 낙양분교 한인 특별반 설립이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1934년 2월 28일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한인 훈련생 92명으로 1개 군관생도반을 특설하여 군관 양성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낙양분교 한인 특별반의 교과 내용 및 기타 세칙은 중국군관학교의 교육 내용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교과는 정치 훈련과 전술학, 병기학, 통신학에 치중하였으며 체육, 체조, 무술, 사격 등의 학과도 진행하였다.
선생은 낙양분교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한편 김구의 특무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1935년 1월 김구는 의열 투쟁을 통해 조선을 일본제국의 통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고 그 정치적 독립을 꾀하기 위한 결사로 특무대를 결성하였다. 선생은 안공근(安恭根) 등 약 30명과 함께 남경(南京) 성내 고안리(高安里)에서 거행한 특무대 발대식에 참가함으로써 특무대 대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한편 낙양분교 한인 특별반 운영에는 난관이 닥쳤다. 낙양분교 한인 특별반 훈련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일제 가 중국 당국에 엄중하게 항의하면서 폐교를 강요한 것이다. 내외적인 난관에 봉착한 낙양군관학교 한인 특별반은 1935년 4월 결국 1기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교되고 말았다.
그러나 선생을 비롯한 낙양분교 한인 특별반 출신의 군관들은 이후 관내 지역 독립운동의 기간 요원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만주로 파견되어 적후 공작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며 중국군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8년 창설된 조선의용대 및 이후의 조선의용군, 1940년 임시정부 산하에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기간 요원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중 협동작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다
낙양분교를 졸업한 선생은 1936년 7월 중국 육군 제25사단 견습 사관으로 근무하였다. 선생이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중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남경에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파난 가는 과정에서 선생은 다른 젊은 청년 장교들과 함께 임시정부 대가족을 보호하고 김구 등 요인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선생은 피난 중 젊은 한인 청년들로 구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선생은 1939년 10월 중경에서 나월환(羅月煥), 이하유(李河有), 박기성(朴基成), 이재현(李在賢) 등과 함께 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부대장(副隊長)이 되었다. 이해 11월 서안으로 출발하는 선생 등의 전지공작대가 이들의 장도를 축하하는 김구, 박찬익, 엄항섭 등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남아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1939년 11월 17일에 촬영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환송 기념사진. 1939년 10월 충칭(重慶)에서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전방 지역인 시안(西安)으로 떠나기 전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과 찍은 기념사진으로, 가운뎃줄 왼쪽에서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이 김동수 선생이다.
전지공작대는 중국 정부의 천도와 함께 중경으로 이동한 한인 청년들이 임시정부와 행동을 같이 하던 중, 임시정부의 국군인 광복군이 정식으로 창설되기 전에 조직되었다. 임시정부가 계속되는 이동으로 본격적인 군사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혈기 왕성한 청년 30여 명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터로 나아가 대일항전에 참가하겠다는 열망에서 전지공작대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전지공작대는 1939년 12월 전선과 가까운 섬서성 서안(西安)으로 이동하였다. 서안은 당시 섬서성의 군사 중심지로서, 적 점령지구에 대한 대적선전(對敵宣傳)과 첩보 수집, 초모(招募) 등 전지공작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지역이었다. 선생은 1940년 5월부터 대원들과 함께 일본군 제36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노안(潞安)을 비롯하여 도청선 철로를 중심한 신향(新鄕), 초작(焦作), 수무(修武), 장치(長治) 등지에서 초모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들에 의해 노안에서만도 60여 명의 인원을 불러모으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 인원들은 대원들에 의해 전지공작대 본부가 있는 서안으로 후송되었다. 이로써 1940년 말에 이르면 전지공작대는 1백여 명에 달하는 대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전지공작대는 비록 소규모의 조직으로 출발하였으나, 중국군과 한국 독립운동 진영을 위한 이들의 활약은 실로 의미가 큰 것이었다. 요컨대, 중일전쟁 발발 이후 계속되는 피난으로 임시정부가 한중연합전선을 펴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전지공작대는 한중 양 진영의 협동작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광복군으로 참여해 전개한 독립전쟁
임시정부는 그 소재지를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군사 계획을 구체화시키고 전시체제를 준비하였다. 정부 차원에서 이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김구를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재정비된 1936년 말경부터였다. 그리하여 1937년 중일전쟁 발발 1주일 만에 군무부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군사위원회는 초급장교 양성과 기본 1개 연대 편성을 목표로 잡았다.
1939년 기강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전시체제를 갖추기 위한 부서 개편과 방략 수립에 나섰다. 군무부 외에 군사 계획의 수립을 전담할 기구로 참모부를 증설하였고, 이어서 <독립운동방략>을 결정하였다. 핵심은 국내외 각지의 한민족을 총동원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1939년 11월 군사특파단을 편성하여 서안으로 파견하였다. 임시정부는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화북 지역과 최전선을 이루고 있던 곳인 서안에 군사 거점을 마련하고, 화북 지역에 이주해온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 공작을 전개하여 병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한편 임시정부는 군대 조직에 대한 중국 측의 양해와 재정 지원 약속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교섭하였다. 그 결과 중경에 도착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하였다.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의병, 대한제국군, 독립군의 항일투쟁을 계승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임을 천명하였다.
광복군은 총사령부 산하에 제1, 2, 3, 5지대 등 4개 지대가 있었다. 이 가운데 제5지대는 바로 선생이 소속되어 활동하던 전지공작대를 기본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즉 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의 전신인 셈이다. 광복군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전하기 직전까지, 서안에는 전지공작대 외에도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군사특파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두 세력은 1939년 11월에 중경에서 결성되고, 결성 직후 서안으로 이동하여 화북 지역 한인들을 대상으로 적후 공작을 전개하였다. 군사특파단은 임시정부에 의해, 전지공작대는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들이 주도하면서 각기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지만 그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1941년 1월 1일에 찍은 한국광복군 제5지대 성립 기념사진. 선생은 신설된 광복군 제5지대의 부지대장 겸 제1구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이와 같이 전지공작대가 적 후방에서의 초모 활동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고 있을 무렵, 임시정부에 의해 광복군이 창설되고 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전해 왔다. 서안에 광복군 총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임시정부가 주도하고 있던 군사특파단은 곧바로 총사령부와 합류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제1, 제2, 제3지대가 편성되었다.
이어 전지공작대도 1941년 1월 1일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신년 단배식이 끝난 후, 서안시 이부가(二府街)에 있는 전지공작대 본부의 대예당에서 군무부장 조성환(曺成煥)과 총사령관 대리 황학수(黃學秀)를 비롯한 서안총사령부 간부 전원, 그리고 전지공작대 대원 등 2백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5지대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선생은 신설된 광복군 제5지대의 부지대장 겸 제1구 대장이 되어 서안을 중심으로 장병을 훈련시키는 동시에 초모ㆍ선전ㆍ정보활동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942년 3월 31일 지대장 나월환이 휘하 대원들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지대 구성원 간의 갈등으로 벌어진 이 사건은 창설된 지 얼마되지 않은 광복군으로서는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제5지대는 물론이고 광복군 전체가 커다란 동요를 겪게 되었다. 지대장이 부하에게 피살되는 하극상의 불상사로 말미암아 광복군 주력 부대로 성장해 가던 제5지대는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나월환 살해 혐의로 대원 가운데 20여 명이 중국군 당국에 체포되었고, 이들 가운데 박동운 등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에 본의 아니게 연루되었던 선생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석방되어 다시 광복군 군사 활동에 투신하였다.
나월환 사건과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 등의 결과로 1942년 4월 1일 제5지대를 기존의 제1, 제2지대와 통합시켜 제2지대로, 중경에 잔류하고 있던 조선의용대 대원들로 제1지대를, 김학규의 징모 제6분처를 제3지대로 편성하였다. 새로이 편성된 제2지대 지대장에는 총사령부 참모장인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였다. 광복군의 개편에 의하여 제5지대가 없어지자 선생은 제2지대에 편입되었다. 선생은 제2지대에서 신입 대원들에 대한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즉 중국의 중앙군 전시 간부 훈련단 안에 한국 청년반을 특설하였으며 화북의 전방에서 초모한 한인 청년들에 대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선생은 1945년 4월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토교대(土橋隊)를 중경에 설치함에 따라 제3대 대장을 역임하였다. 토교대의 주요 임무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비 및 고위 요원의 호위, 광복군의 간부 요원 교육과 양성, 그리고 일본군 내의 한국인 사병에 대한 초모 활동 등이었다. 토교대는 광복군 편제상의 조직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보충대 역할을 하는 조직이었다. 토교대가 설치되어 있던 토교는 중경시에서 남쪽으로 20㎞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주로 임시정부와 관련된 인사들의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전한 후 일본군을 탈출한 탈출병과 안휘성의 한국광복군 훈련반 출신들, 그리고 중국군에 포로된 한적사병 등 한인 청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중경으로 집결하는 한인 청년들은 대체로 토교에 집단 수용되었다. 이들은 일정 기간 수용되어 교육과 훈련을 받은 후, 총사령부ㆍ지대ㆍ경위대 등으로 배치되었다.
광복과 귀국
토교대 활동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선생은 1945년 8월 중경에서 일제의 패망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광복 후 선생은 한국독립당 감찰위원, 상해지당부 특파원 등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특히 1946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동북특파원으로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교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주선하였다.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6월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