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제와 번제, 화목제
구약의 제사법에 따르면 속죄제에는 항상 번제와 화목제가 따릅니다(예 레 9:3-4). 속죄제나 속건제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회복하기 위한 제사이고, 번제와 소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희생을 나타내며,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제물을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하나 된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사함 받기 위한 제사이지만 속죄제나 속건제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죄들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에 해당되었습니다. 인신제사를 드리거나, 접신했거나, 무당을 따르거나, 부모를 저주하거나, 간음, 동성애, 수간, 근친상간 등의 범죄는 반드시 죽여야 하는 범죄에 포함되었습니다(레 18:1-21). 동물의 피로 드리는 제사가 완전한 제사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드린 제사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 이외의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제사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는 더 이상 동물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제사법을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법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드린 피의 제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속죄제를 드리고 나서 번제를 드리는 것은 속죄제가 지향하는 바가 하나님께 대한 희생과 헌신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셔서 죄 없다 여기시는 것은 우리의 삶을 드려 주님을 섬기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이해한다면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헌신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아직 그 구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전하는 복음에는 희생과 헌신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희생과 헌신이 없는 복음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종종 복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 지도자의 욕망을 위해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아무런 열매 없는 쭉정이가 될 뿐입니다.
희생과 헌신이 없는 복음은 공허합니다. 전하는 이에게도, 듣는 이에게도 공허할 뿐입니다. 이런 복음은 복음의 능력과 그 권능이 나타나는 길을 차단합니다.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삶의 모범을 통해 희생과 헌신을 보여주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에게서 보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일에서든 희생과 헌신 없이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에서조차 희생과 헌신을 훈련하지 않는 것은 탁월한 삶의 가능성과 기회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을 포함한 모든 탁월한 것은 희생과 헌신을 전제로 합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것은 복음의 일부분이지 전체는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 16:24)’ 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갈라지려고 하는 마음을 추슬러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만 향하도록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여 이런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렘 17:9).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활승천 하신 후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고, 성령은 우리 안에 머무시면서 우리가 하나님 편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계십니다.
화목제는 속죄제와 번제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영광스런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레 7:15). 친밀한 관계가 아니면 함께 먹고 마실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이런 영광을 경험했습니다(출 24:11).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그리 익숙한 주제가 아닙니다. 사람 사이의 친밀함이 그러하듯 하나님과의 친밀함도 함께 보낸 시간에 비례합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 내 말만 하고 일어서는 기도가 아니라 그 말씀을 기다리고 듣고 소통하는 기도가 친밀함의 기초입니다. 의무적으로 시간을 때우는 기도, 두려움으로 자리를 채우는 기도가 아니라, 진실함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가 친밀함으로 가는 길입니다.
상대방을 더 잘 알게 될수록 더 친밀해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갈수록 하나님과 더 친밀해집니다. 일정한 습관으로,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와 말씀에 힘쓴다면 어느덧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친밀함을 통해 나타납니다. 친밀함이 없는 헌신은 자기 만족으로 흐르고, 친밀함이 없는 설교는 허공을 칩니다. 친밀함이 없는 사역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친밀함이 형통함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형통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발적인 헌신은 친밀함에서 나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우정도 친밀함에서 나옵니다. 예수께서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것같이, 예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예수님과 친밀한 사람입니다(요 15:13-14).
주님과 친밀한 사람들은 주님의 아픔과 고통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부여잡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주님이 드러나기를 구합니다. 속죄제, 그것도 자기가 드린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대신 드려주신 속죄제의 제사를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직 복음의 여정을 시작하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이제 번제를 드려야 하고, 화목제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