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晉陽)은 옛 도읍지로 계산승치가 영남의 제일이다.(晉陽古帝都 溪山勝致爲嶺南第一)" 고려의 문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쓴 파한집(破閑集) 첫 머리에 나오는 대목이다. 송나라 서긍(徐兢)이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고려에 서책이 많음을 부러워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고려의 서책 중 어렵게 살아남은 파한집에서 고려의 위치가 확인되고 있다.
이인로는 이 글에서 ‘어떤 사람이 그 곳(晉陽) 그림을 이상국(李相國 之氏)1092-1145)에게 바쳤고, 군부참모 영양(榮陽) 정여령(鄭與齡)이 보았다. 이상국은 이 그림이 그대의 고향이니 시 한 귀를 짓는 것이 어떠한가?’라 했다. 그는 “두어 봉우리 청산(靑山)이 벽호(碧湖)를 베고 있으니, 공(公)은 이것이 진양(晉陽)의 그림이라네. 물가에 초가들이 몇인 줄 알겠는데 그 중에 내 집은 보이지 않네”라 했다.
여기에서 지명을 고찰해 보자. 임금의 옛 도읍터(古帝都)인 진양(晉陽)이라 했으니, 한반도 진주(晉州)일 수는 없다. 산서성 진양이다. 역주에서 확인되듯 영양(榮陽)은 형양(熒陽)이며 정씨(鄭氏)의 관향으로 고려조의 정여령, 정습명, 정지상, 정숙첨 등의 관향으로 되어 있다. 이상국은 ‘그대의 고향이다’라 말하고 있다. 이 내용은 동문선 제19권에서도 확인된다. 영양(형양)은 현재 황하 남부 정주시 바로 서쪽에 있는 지역이며, 진양과는 상근지역임을 볼 때 지리지의 변천과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겠다.
▲ <대청광여도>에 산서성의 성도 태원시에 진양성이라고 명시되어 있다.(붉은 글씨 아래)
정씨(鄭氏)의 관향에 적시된 이들의 행적을 보자. 정여령(鄭與齡)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단, 이지저(李相國 之氏)는 시중 이공수(李公壽)아들로 중신이었으며, 서경 천도론을 극력 반대했던 시기로 보아 인종조의 무인으로 보인다.
정습명(鄭襲明 ?∼1151(의종 5)은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일(迎日), 영일정씨형양공파(迎日鄭氏滎陽公派)의 시조로 호가 형양(滎陽)이다. 1140년 김부식(金富軾), 임원애(任元?, 元厚), 최자(崔滋) 등과 함께 시폐 10조(時弊十條)를 올리기도 했다.
정지상(鄭知常 ?∼1135(인종 13)은 문신으로 고려사에는 서경 출신으로 되어 있고, 초명은 지원(之元), 호는 남호(南湖)이다. 이인로는 영양(榮陽) 정지상이라 썼다. 정지상은 음양비술(陰陽秘術)에도 관심이 많아 묘청(妙淸), 백수한(白壽翰) 등과 함께 삼성(三聖)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노장사상에 심취하였으며, 역학(易學), 불교(佛敎)에도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도 능통하였으며, 고려 12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하였다. 묘청의 난 때 김부식에 의해 참살 당했다.
동명이인 정지상(鄭之祥)이 있다. 생몰년 미상으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하동(河東)으로 되어 있다. 1358년 찰방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왜적을 방어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공민왕 때 사람이다. 1362년 어사중승으로 있으면서 고용보(高龍普),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의 제거에 관여하였다. 관직은 판사에 이르렀다.
정숙첨(鄭叔瞻)의 생몰년은 미상이며,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하동(河東). 형부상서 세유(世猷)의 아들이고, 최우(崔瑀)의 장인이다. 1217년 최충헌 모살사건에 연루되어 원수직에서 파면되고 하동에 유배되었으나, 최우가 구해주었고 뒤에 평장사에 올랐다.
정씨(鄭氏)의 본관이 나뉘어져 있으나, 위의 기록으로 보면 진양 지역인 영양(榮陽 =형양 熒陽)이 이들의 관향이요, 고향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지상(鄭知常)의 경우, 서경 세력으로 몰려 김부식에게 참살 당했다. 인종은 금국을 정벌하여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고자 묘청, 정지상 등과 논의했다. 이를 묘청의 반역이라 하여 무산시킨 문벌 귀족 김부식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면 천도하고자 했던 서경의 위치는 또 어느 곳이 되어야 할까?. 우선 과제로 남기자.
파한집에서 정씨가의 관향을 보듯, 국내 성씨(姓氏)들은 대륙을 본관으로 삼은 문중이 태반이다. 이는 고려가 대륙에 존재했음을 상징적으로 밝혀 주고 있는 대목이다. 이웃한 고려지역으로 이동이 손 쉬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신정권기 홍건적의 난 때 고려의 서울이 한반도로 이동되면서 많은 성씨들이 유입된 것으로 파악되며, 당시 최종 살던 지역을 관향으로 삼게 되므로써 본관이 또 나뉘었을 개연성이 커 보인다.
조선 중기의 문신 최립(崔岦 1539~1612)은 그가 쓴 간이집(簡易集 제7권) 공산록(公山錄) 편에 국어(國語 晉語9)를 인용, “전국 시대 조간자(趙簡子)가 윤탁을 진양 태수(晉陽太守)로 임명하면서, “세금을 많이 걷겠는가, 아니면 백성을 안정시켜 나라의 보장(保障)이 되게 하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보장이 되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는데, 그 뒤 조간자의 아들 조양자(趙襄子) 때에 지백(智伯)이 침입해 오자, 진양으로 피신해서 지백의 군대를 대파(大破)했다는 고사가 있다"고 썼다.
이인로(李仁老)는 누구인가? 무신집정기 때의 문인으로 본관은 경원(慶源)이다.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이다. 무신란 이전 고려 전기의 3대 문벌 경원이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다. 화엄승통(華嚴僧統)인 요일(寥一)이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했다.
1170년(의종 24) 그의 나이 19세 때 정중부(鄭仲夫)가 무신란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 하며 횡행하자, 피신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1180년(명종 10) 29세 때 진사과에 장원급제하여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후일 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저술로는 파한집만 전해 오고, 은대집(銀臺集) 20권, 후집(後集) 4권, 쌍명재집(雙明齋集) 3권은 사라졌다. 고려의 위치는 산서, 하남, 안휘, 절강성 등을 아우르는 대제국이었음을 연구해야 하는 계기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고려를 고증할 은밀한 기록들이 더 있었을 터,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 고려 정씨의 본향과 관계되는 지명들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편집자 주) 정지상과 정숙첨의 본관인 하동(河東)은 말 그대로 황하의 동쪽으로 산서성 남부를 지칭하는 말이다. 하동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하동도는 당태종이 처음으로 세웠으며, 황하 동쪽의 산서성 남부의 오래된 지명으로 산서성 서남부 35개현으로 구성되었고 치소가 영제현(현 운성시의 서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