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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평구 선생님과의 만남
2009년9월20일 노평구선생 추모기념회 강연/서울여성회관
진익렬 교수(경북대 미생물학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태 7:7-8). 평소 노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인생의 모든 지혜를 성서에서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군복무 중이던 1969년 5월에 내게 작은 우편물이 배달되었다. 시멘트 포대지로 만든 봉투속에 ‘무교회신앙잡지 성서연구’라는 얇은 책자가 배달된 것이다. 당시 [무교회 신앙]이란 제목이 나는 아주 도발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때까지 교회에서 지낸 나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이었으리라. 그래서 처음엔 보내신 분(고 박노훈 선생님)의 성의도 아랑곳 않고 그냥 바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선임으로부터 아무런 잘못도 없이 기압을 심하게 받았던(당시 군에선 선임이 후임을 이렇게 쉽게 학대했다) 어느 날 우연히 이 잡지책을 들고 읽어보게 되었다. 처음 읽어보게 된 권수가 몇 권인지, 어떤 내용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 나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기존 생각을 뒤집기에 충분했다. 그 후로 매번 이 성연지의 배달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군복무 후반 대구소재 2군사령부 지하벙커에서 해병 연락병으로 근무하게 되었을 때, 대구에서도 드디어 무교회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대구 도심지에 댁과 사무실이 있던 신태래 선생님의 사무실에서 1971년 여름부터 고 박노훈 선생님 주도로 몇 분이서 시작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 바로 YMCA로 일요집회장소를 옮겨서 지금까지 일요 예배를 드리고 있다. 1972년(?)부터 2년 가까이 격주로 노 선생님께서 로마서강연을 하시게 되었는데, YMCA 강연장 가득 청중이 모여 열기가 대단했다. 청중으로는 대구지역에선 잘 알려진 목사님,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스님도 청강했다. 아마도 선생님 특유의 저 카리스마가 종교의 벽을 뛰어넘게 했고, 혼신의 힘을 다하시는 명강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로마서강연을 통해서 처음 뵌 선생님에게, 그리고 육성을 통해서 듣는 그의 강연으로 말미암아 내 모든 마음을 당신에게 쏟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언제나 내 마음은 노 선생님을 향해 열려 있었다.
해인사 전국동계집회에 참가했을 때 노 선생님과 송두용 선생님께서 강연 중에 크게 다투시는 걸 목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연장 밖에선 언제 다퉜냐는 듯 서로 다정하게 말씀을 나누셨고, 식사 때는 바로 옆에서 다정하게 웃으시면서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무척 당황하였다. 그때 박노훈 선생님께서 내게 노 선생님은 자주 저렇게 하신다고 하셨다. 그 집회에서 노선생님께선 내게 변소청소를 시키셨다. 그래서 난 정성을 다하여 청소를 하였다. 그래서인지 다른 전국집회에서도 계속 변소청소를 시키셨다. 결국 내 맘 한 구석에선 내게 이런 걸 자꾸 시키시다니 하는 맘도 일어났고, 결국 변소청소가 싫어서 이후 전국집회를 여러 번 불참하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옹졸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음 상태이었고 또한 선생님께 너무도 못난 짓을 했다는 후회를 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하고 그래서 모두가 깨끗한 분위기에서 집회를 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일이 아님을 뉘우쳤기 때문이다. 선생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1985년 3월 23일을 난 결코 잊을 수 없다. 나의 결혼일이기 때문이다. 그해 정월초 전국동계집회를 마친 다음 노 선생님께선 나보고 1월8일 서울 종로 YMCA 커피샾으로 오후 4시에 정한 시간내로 나오라고 말씀하셨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도 매고, 그리고 머리도 말쑥하게 깎고 오라고 하셨다. 당시 난 일본 토쿄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유학중이었는데, 잠시 일시귀국한 김에 전국집회에 참석하였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복장도 얼굴모습도 못마땅하셨던 듯 했다. 외모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편하게 청바지에 장발로 살았던 시기이었다. 그런데 선을 보도록 명을 하셨다. 그에 대한 내 반응도 별로 기다리시지도 않으셨던 듯했다. 선을 본 당일도 반드시 선 본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셨다.
그날 저녁에 선생님에게 결과를 말씀드렸더니, 잘 알았다고 하시면서 일본으로 곧장 건너가서 학업을 계속하라고만 하셨다. 그러나 선을 보자말자 선생님께서 급히 나의 형님과 장인을 대면하게 하셨고 결혼일까지 정하시면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여, 결국 드디어 38세의 노총각이던 나를 결혼하게 하셨다. 3월23일 오후 4시 결혼주례를 하시면서 선생님의 주례내용은 ‘이혼하지 마’이었다. 20분정도 주례말씀이 모두 이로써 채워졌고 결혼도 인간 맘대로 하는 게 아닌 하나님의 뜻인데, 더구나 이혼은 결코 해서는 안되며, 요새 젊은이들은 너무 쉽게 이혼해버리지만 이는 하늘의 뜻에 분명 반한다는 요지이었다. 그날 신부는 너무도 무서워 벌벌 떨었다고 했다. 그 덕택으로 아직 난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잘 살아가고 있다. 주례도중 천둥번개치는 소리로 뒤에서 떠드는 하례객을 향해서 결혼식과 같은 거룩한 자리에서는 조용하라고 일갈하시고는 주례사를 계속하셨다. 선생님, 당신의 그 카리스마가 너무도 그립습니다.
한번은 일본 토쿄의 이마이칸(今井館)에서 열린 특별성서집회에 연사로 오셨다. 강연도중 선생님과 세키네(關根正雄)선생님 사이에 심한 설전이 벌어졌다. 곧 육박전 반보직전까지 갔었다. 일본의 무교회 측의 성서공부를 신앙적이기 보다는 신학적인 접근방법을 하고 있는데 대한 노선생님의 노골적인 비판으로 촉발된 다툼이었는데, 강연이 끝나자 두 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보란 듯이 서로 웃으면서 담소하시는 걸 보고는 아마도 한국이던 일본이던 간에 선생님들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로 인한 언쟁이 항상 있는 걸 쉽게 볼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세상과는 분명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그때 내가 선생님께 용돈을 조금 드렸더니, 이번엔 선생님께서 일본에서 유명한 게요리식당에 가자고 하시면서 토쿄 YWCA 호텔의 식당으로 가셔서 게요리를 사주셨다. 상당한 고가의 게요리를 맛본 셈인데, 선생님께선 늘 이런 식으로 용돈을 드리기만 하면 주변의 여러분에게 뭔가를 대접해 드리는 것 같았다.
내가 유학후 귀국하면서 경북대에 교수직을 얻어 대구에 둥지를 틀자, 선생님께선 대구집회에 오실 때는 자주 나의 아파트에서 주무셨다. 내 아버지와 동갑이셨던 선생님은 내 아내에게는 시아버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아내는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특히 노선생님께선 아침식사로 오트밀 죽을 좋아하신 걸 기억한다. 가끔 내복, 속옷과 양말을 사드렸더니 어린 아이처럼 좋아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기억난다. 또한 당시 서양화 공부에 열중하던 아내에게는 큰 격려로 끝까지 그림을 그리도록 권유하시면서, 끝까지 공부하고 게을리 하지 말라고 당부도 하였다. 아울러 내게는 이를 위한 외조를 당부하셨다. 그 말씀 덕분에 외조를 하게 되었고 지금 아내는 미술과 관련한 심리학 전문가로서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특히 당신의 젊었을 시절 그림에 대한 열정을 말씀해주시면서 그림그리기에 대한 애착을 말씀하시면서, 특히 기독교 화가들의 명화에 대해 설명해주시면서 성서공부를 하지 않았으면 화가가 되셨을 거라고 하셨다.
내게 공부할 때 인생이 괴롭거나 슬플 때는 성서를 읽고 위안을 찾으라고 하셨다. 전공인 생명공학에 대한 문제해결마저도 성서에서 찾으라고 하셨다. 또한 기회있을 때마다 인생의 1/3을 성서어학공부에 매진하여 정년후 신약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라고 격려도 하셨다. 그러나 결코 신통치 못한 제자는 아직도 제대로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 당신의 제자가 이제 정년이 3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럴 어쩌면 되겠습니까, 선생님. 선생님의 각별하신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평소 선생님께선 누군가가 남을 비판하는 걸 듣기 싫어하셨다. 결코 남을 비판말라(마태 7:1-4)고 하셨다. 항상 기회있을 때마다 그렇게 저희들에게 당부하셨다. 당시 무교회내에서 들리는 여러 잡소리에 도무지 귀기울이지 않으시면서 이를 비판말라고 하셨다. 과연 오늘 우리 조선의 무교회안에서 나오는 잡음을 어찌 할 꼬. 누구도 비판할 수 없고 그 비판은 예수만이 해주신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오로지 신앙만을 간구하길 권하셨다. 특히 생전에 선생님께선 홍성 풀무학원의 홍순명 선생님을 그렇게 높이 칭찬하셨다. 조선의 선비처럼 언제나 공부하는 그의 자세와 태도를 높이 평가하셨다. 젊은 무교회인들은 모름지기 홍선생님처럼 소리없이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생전의 전국집회는 대부분 홍선생님이 교장으로 계시던 풀무학원에서 열린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특별히 이웃의 기성 교회의 역할을 칭찬하시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시던 것을 기억한다. 많은 문제점을 가진 것을 인정은 하셨지만 그래도 선생님은 교회의 역할에 상당히 긍정적이셨고, 일부러 배척할 필요가 없다고 했으며, 오히려 큰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고 하셨다. 이러한 선생님의 열린 태도는 현재 우리의 것과 상당한 차이가 나는 걸 볼 수 있다. 우리는 과연 저 교회를 비판할 만한가? 그럴 만큼 기독교도다운가? 자문할 일이다.
최근 대구일요집회에서 공부하여 발표한 '황금율'은 기독교도인 우리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일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인간관계의 기본율이 아닌 가 생각한다. 마태복음서에서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 7:12)’라고 적혀있다. 여타 종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대목을 말하고 있다. 과연 인간관계, 이웃과의 관계란 이래야 하나 보다고 생각된다. 이웃사랑-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서가르침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까마는 성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이웃을 내 상대를 잘 대접하면 나도 그만큼 대접받을 건 자명한 사실인 것을 우린 체험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나만 대접을 받고자 하고 있지는 않는가. 또한 다른 사람의 티끌을 보고 욕하거나 비판하지 말자. 나도 그들과 꼭 같고 다르지 않다는 걸 인정한다면, 결코 그를 욕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그의 장점-누구든 장점이 없는 자 또한 없다 -을 칭찬하고 그를 대접한다면 그 또한 나의 대들보같은 잘못이 있더라도 나를 인정하고 대접해줄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기본율을 나는 예수와의 관계-우리의 신앙에도 적용시켜야 한다고 보고 싶다. 정말이지 나란 존재는 얼마나 결점투성이이고, 믿음이라곤 터럭만큼도 없는 그런 존재아니냐. 이건 내만 알고 있고 하나님만이 아시지만, 남 앞에서는 경건한 척 하지 않느냐!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대접하여서 영접해주시고, 나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하시고,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영생을 얻게 하시니, 과연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접해야 하지 않느냐 말이다. 그가 내게 해주신 것처럼 할 수는 없지만, 나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하지 않느냐. 나의 구세주이니까!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는 말씀하셨지만, 과연 우리에게 이 말이 가능하기나 하냐? 난 도저히 그러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 원수를 죽이고 싶다. 날 대적하는 놈을 한방에 날려버리고 싶다. 그런데 나란 과연 그 원수에게 얼마나 잘난 놈인가를 자문해본다면 결코 쉽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내가 못났으면 상대가 내게는 오히려 원수로 보일까? 내가 그에게 내 몸처럼 대접했더라면 그가 내게 원수로 보였을까? 나 자신의 양심과 신앙으로 살펴볼진대 나란 오히려 그의 원수가 될 만하지 그가 내 원수일 수는 없지 않은가.
아, 노 평구 선생님, 당신이 그립습니다. 당신의 그 카리스마 넘치는 강연을 듣고 싶습니다. 신앙만의 신앙을 힘껏 외치시던 카랑카랑한 당신의 그 목소리, 그 카리스마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훌륭한 스승님을 둔 제자분들이 부럽습니다.
만나실 기회가 곧 오겠죠? ^^
누구를요? 노선생님? 곧??
진익렬 교수님요...장난끼도 많으셔요...^^ (뿜을 뻔했어요..ㅎㅎㅎ)
전 아직도 눈 쌓인 비탈길을 보면 비료푸대가 생각나는 사람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