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형 [崔在亨]1858(철종 9) 함북 경원~ 1920.
독립운동가. 일명 재형(在衡)·도헌(都憲). 러시아 이름은 뻬돌쏘오·최뻬찌카.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러시아령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여 귀화했다. 상업으로 치부하여 노우키예프스크 도헌(都憲)이 되자, 연봉을 은행에 적립하여 그 이자로 동포 자녀 1명씩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 해군소위로 경무관 부속 통역관이 되어 활동하는 한편, 남부소집회감독(南部所集會監督)으로 러시아 군부의 지원하에 동포들을 규합했다. 또한 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 이범윤(李範允)과 결의형제하고 그를 지원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당하여 다수의 군인들이 러시아령으로 넘어오자, 이범윤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고 최병준(崔秉俊)·엄인섭(嚴仁燮) 등을 각지에 파견하여 의병·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이듬해 3월 이위종(李瑋鍾)으로부터 군자금 1만 루블을 지원받고,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과 함께 독립군 600명을 훈련시킨 다음,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함경북도 경원의 신아산(新阿山), 회령 영산(永山)에서 일본수비대를 궤멸시켰다. 이어 노우키예프스크에 박춘근(朴春根)이 이끄는 독립군 본부를 설치하는 한편, 러시아군에 쇠고기 기름 등을 납품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동포 사회의 정착을 지원했다. 엄인섭·김서윤(金瑞允)·이위종 등과 독립운동단체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10년 2월 〈해조신문 海朝新聞〉을 인수하여 〈대동공보 大東共報〉로 개칭·재간행하여 동포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노우키예프스크에 한인중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1911년 신한촌(新韓村)에서 홍범도(洪範圖)·이종호(李鍾浩)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재러한인대표로 2명의 위원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추진했다. 그해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재무청장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했다. 1920년 4월초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해 재러한인독립군부대를 총집결하고 사단장이 되어 러시아 적군과 함께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김이직(金利稷)·황경섭(黃景燮)·엄주필(嚴周珌)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의 일본헌병본부로 압송되는 도중 탈출했으나 니콜스크 시 남쪽 군사경계선 근처에서 일본군추격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최재형 표트르 세묘노비치
연해주 한인사회의 덕망있는 항일지도자 최재형은 1860년 8월 3일(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했다. 1869년 아버지 최흥백, 형 알렉세이와 함께 연해주 남부 진신허 마을로 이주해온 최재형은 1871년 집을 나와 전전하다가 포시에트 선착장에서 러시아 선원들에게 발탁되어, 러시아 함대의 견습수부가 되었다. 그후 그는 1878년부터는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1882년에는 블라디보스톡-라즈돌노예-슬라뱐카-노보키예프스크-크라스노예 셀로를 잇는 전략도로 건설부에서 통역원으로도 일하며 많은 인생 경험을 쌓아나갔다. 1893년 최재형은 얀치헤(연추) 한인 마을의 책임자(읍장)로 선출되었다. 그는 마을에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등, 지역 한인들로부터 높은 신뢰와 덕망을 쌓아나갔으며, 1896년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을사조약 체결로 조선의 국운이 위태롭던 시기, 1906년 최재형은 연해주 남부에서 최초의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그는 의병부대를 직접 지휘하거나, 이범윤 등과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1909년에는 전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1년 5월 21일 57명의 주요 항일인사들로 구성된 블라디보스톡 비밀회의에서 애국단체『권업회』가 조직되었다. 최재형은 권업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한때 일본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나흘 후 방면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최재형의 적극적이고 활발한 항일활동 배후에는 한인들의 아낌없는 지지와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1913년 최재형은 7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고 페트로그라드의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으며, 1914년 1월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한인의 러시아 이주 50주년 기념 행사준비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1915년 슬라뱐카 마을에서 헌병에게 재차 체포되어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로 이송되었다가 여론의 압력으로 11일 후 석방되는 등, 또 한번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17년 최재형은 이번에는 얀치헤 집행위원회 대표로, 1919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재무부 장관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18-1920년 내전시기 동안에는 새로운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백위파를 지원하는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서 최재형은 일제의 주요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20년 4월 5일 새벽 최재형은 일본군에 의해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감행된 학살만행 과정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현재 최재형의 후손들이 모스크바와 알마타 등지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1962년 최재형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연해주일대에서 발생한 1920년 4월 참변 개요
우수리스크에서 노보니콜스크로 향하는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20분 정도 달리면 도로변에 4월참변 희생자 추모비가 나타난다. 이 추모비는 1920년 4월 일본군이 자행한 4월 참변 당시 우수리스크 지역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소련군 병사 170명과 빨치산 70명 등 총240명의 희생자들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바로 그 전투현장에 세워져 있다.
4월 참변이란 1920년 4월4일 밤부터 5일 새벽에 걸쳐 일본군이 연해주일대의 러시아 혁명세력과 한인들을 공격한 만행적 사건을 말한다.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에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되자 일본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열강은 이를 붕괴시키고자 1918년 8월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하는 한편 반(反) 볼셰비키 세력인 러시아 백위파를 지원했다.
하지만 볼셰비키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한 다른 열강 군대가 철병을 단행하자 홀로 남게 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라즈돌리노예, 이만(달네레첸스크) 스파스크, 하바로프스크, 포세트, 스챤 등 연해주 각지에서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연합한 러시아 혁명정부의 공공기관과 러시아 혁명세력을 공격하는 한편, 한인들을 공격하고 대량체포, 방화, 파괴, 학살하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습격해 한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50명을 무장해제하고 한인단체사무소와 가택을 수색해 60여 명을 검거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한민학교와 한인신보사 건물에 불을 질렀으며, 헌병분견대를 주둔시키고 자위대라는 헌병보조기구를 창설했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도 일본군은 한인 76명을 검거하고 4월7일 이들 가운데 한인사회 최고원로인 최재형(崔在亨)을 비롯한 김이직(金理直), 엄주필(嚴柱弼), 황경섭(黃景燮)등 저명한 한인 독립운동지도자 4명을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지금까지도 그들의 시신에 대한 행방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20년 4월 참변 상세 해설 - 반병률 교수
올해는(2007년)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 20만명이 스탈린의 탄압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1937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역만리 중앙아시아로 쫓겨난 러시아 한인들은 사막 벌판을 옥토로 만들며 ‘카레이츠’(고려인)로 우뚝 섰다. 현재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55만명.경향신문은 전문가 기고를 통해 연해주·시베리아에서 중앙아시아로 내몰려야 했던 고려인의 역사성을 되짚어 보는‘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 그 자취를 좇아’를 연재한다.
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3년 겨울 함경도 농민 13호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남부 지신허강 계곡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1869년 대흉년이 들면서 함경도 육진의 농민 6500여명이 6월부터 12월까지 대거 이주하니, 이를 ‘경오도강(庚午渡江)’이라 부른다. 이들의 이주는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중국과 달리 러시아 당국은 그런 한인의 이주를 환영했다. 연해주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고 식민개발이 절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러시아는 ‘러시아인을 위한 러시아’라는 슬로건 아래 극동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러시아인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고 있었다.
연해주 지역에서 러시아인의 정착이 크게 늘어가는 가운데 한인들의 이주도 꾸준히 증가해 1908년께에는 이 지역 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한인사회를 키워나갔다. 당시 연해주 한인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으나, 품삯을 벌기 위해 온 ‘외품자리’라는 떠돌이 임금노동자, 납품업자들도 있었다. 그 중 ‘뽀드라치크’라 불린 납품업자들은 러시아군대와 관청에 쇠고기, 벽돌 등의 납품과 군부대 시설공사를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러내각이 들어설 때,이들 가운데는 공사관 직원이나 군사교관의 통역으로 조선에 들어오거나 조선 정부의 요직에 임명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연해주의 한인들은 러시아 당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난을 겪어야 했다. 한인의 이주를 받아들인 러시아였지만, 러시아가 일본이나 중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한인 이주자들이 ‘적국(敵國)의 광범한 첩보조직’으로 기능할 것을 우려, 경계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물론 연흑룡주 총독 곤닷치 같이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후원하던 이도 있었다.
그는 1912년 신한촌을 직접 방문해“한국을 사랑하지 않는 한인들은 러시아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겨 한인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한인사회의 형성과 함께 연해주 지역은 1910년 망국을 전후해 해외독립운동기지로 발전해 갔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지리적 이점과 북간도 지역에 비해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덜 미치던 연해주 지역은 독립운동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러일전쟁 직후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이곳에서 의병을 이끌었다. 1908년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던 안중근 의병부대의 근거지도 바로 연해주 지역이었다.
한인사회의 지도자 최재형은 이들 의병을 적극 지원하면서 구국의 뜻을 펼쳐 나갔다. 한인사회의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한인학교가 세워지고 한글신문인 ‘해조신문’ ‘대동공보’ ‘대양보’ ‘권업신문’ 등이 발간되면서 계몽운동을 꽃피워 나갔다. 1910년 여름 망국이 임박해진 가운데 의병과 계몽인사들이 힘을 합해 13도의군(十三道義軍)과 성명회를 조직하며 일제의 강제병탄에 맞서 최후까지 항쟁을 벌여 나갔다. 이후에도 이 지역 한인의 독립운동은 꺼질 줄 모르는 불꽃처럼 타올랐다. 1911년 12월에 조직된 권업회는 한인사회의 자치적 대표기관으로서 권업신문 발간, 학교 설립, 러시아 국적 취득 알선, 한인 이주 50주년 기념행사 등을 추진하며 독립운동의 장도적 방도를 모색해 갔다. 그런 가운데 1913년 말 이동휘, 이종호, 이상설, 이동녕 등이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면서 독립운동의 기치를 크게 올렸다.
이는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이해 제2의 러일전쟁이 발발할 것을 기대하고, 그때를 광복의 기회로 삼으려는 전략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러시아와 일제가 동맹관계로 돌변하고,러시아 당국이 한국 독립운동을 탄압하면서 대한광복군정부의 구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17년 러시아의 2월 혁명은 한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2월 혁명을 열렬히 환영하던 한인들은 동년 6월 전로한족대표자회를 개최하며 활동을 재개했고, 대회 결의에 따라 신한촌에서는 ‘한인신보’,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는 ‘청구신문’이 창간되었다. 10월혁명 후 한인사회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족중앙총회,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 등이 만들어지며,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다.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연해주 지역 3·1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러시아 지역, 서북간도, 그리고 국내의 대표들까지 아우른 가운데 대한국민의회로 확대·개편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더불어 해외 임시정부의 쌍두마차를 형성하던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가을 상하이 임시정부와 통합하기에 이른다. 그런가 하면 친볼셰비키적인 이동휘, 김립, 박애, 이한영, 장기영 등이 1918년 5월11일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그렇듯 연해주 지역은 해외 한인사회 가운데 어느 곳보다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이 크게 미치던 곳이었다. 볼셰비키 혁명 전선에서 크게 활약하던 한인들은 혁명을 반대하는 일본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4월에는 시베리아에 침투한 일본군에 의해 대규모의 방화, 파괴, 학살 등의 만행이 저질러졌다.‘4월참변’이라 불리는 이 일로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등 한인지도자들이 학살되는 등 한인사회가 커다란 피해를 입고 말았다.
한국민족운동사에서 '4월참변'이란 1920년 4월 4일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시베리아에 출병 중인 일본군이 연해주 지역 러시아혁명군과 정부, 관공서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지를 대대적으로 공격해 방화, 가택수색, 검거, 학살을 자행한 사건을 말한다.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에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되자 일본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열강은 이를 붕괴시키고자1918년 8월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하는 한편 반(反) 볼셰비키 세력인 러시아 백위파를 지원했다. 하지만 볼셰비키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한 다른 열강 군대가 철병을 단행하자 홀로 남게 된 일본군은 4월참변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스파스크, 이만(달네레첸스크), 포시에트 등지의 주요 도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연해주 지역 거주 한인들은 대거 검거되거나 학살되었으며 주요 지도자는 정식 재판 절차도 없이 학살됐다. 당시 니콜스크-우수리스크라고 일컫던 우수리스크에서는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을 비롯한 한인 지도자가 일본 헌병대에 학살됐으며, 지금까지도 그들의 시신에 대한 행방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22년 말 시베리아 내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체제를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한인사회 역시 급격히 변질되어 갔다.스탈린 정권은 민족적 가치를 철저히 배제하는 가운데 한인의 전통 마을을 집단농장으로 재편해갔다. 민족적 한인들에 대한 체포, 감금, 처형 등 대탄압도 거세졌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공, 1937년 중일전쟁 등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자 연해주 지역의 안보를 우려한 스탈린 정권은 80여년 가까이 이 지역을 개척하며 혁명 전선에 앞장서왔던 한인들을 배신한 채 1937년 가을 무자비하게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감행했다.〈반병률|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일제에 의한 4월참변 희생자 한.러 합동 추모제
2007년 4월 7일! 항상 불어대던 바람도 없고 화창한 봄 날. 우수리스크 ‘꺼지지 않는 불꽃’ 광장에는 한국인, 고려인, 러시아인들이 손에는 꽃을 두 송이씩 들고 모였습니다. 87년 전인 1920년 4월 4일과 5일에 걸친 일본군의 학살에 희생된 조선인과 러시아인을 추모하는 작년에 이어 두번째 개최되는 한국과 러시아의 합동 추모행사입니다.
러시아 국가와 애국가가 울리며 추모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수리스크 부시장, 고려인 단체장 대표, 당시 희생된 최재형선생의 손자, 한국영사관의 총영사 등 많은 사람들이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고난을 함께 한 양국간의 협력 증대 등을 연설하였습니다.
최재형선생의 손자는 이 행사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왔습니다. 연설 중간에는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공연도 있었습니다. 러시아 무용단과 ‘아리랑 가무단’이 춤으로 당시의 아픔을 가슴이 찡하도록 전해 주었습니다.‘아리랑 가무단’은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배경음악으로 공연을 하였습니다. 40분 남짓한 추모 행사는 의장대의 3발의 총성에 이은 헌화로 끝이 났다.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부분 모두 3번 러시아 국가와 애국가가 함께 연주되었습니다. 우수리스크의 광장에서 듣는 애국가는 한국의 행사에서 듣고 부르던 애국가와는 다른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6개 마을에 운영중인 마을센터에서 활동중인 자원활동가들도 모두 행사에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다음날인 8일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행사를 추진한 반병률 교수, 부인 김보희 교수, 최재형선생의 손자와 함께 당시 지도자들이 처형된 곳으로 기록된 장소와 활동공간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반병률 교수의 부인 김보희 교수는 고려인들이 부르던 노래들을 몇 년간에 걸쳐 채록, 채보하여 고려인들의 노래를 통한 정체성을 연구하여 음악인류학 분야 박사를 받고 노래집(‘잊혀진 고려인의 노래)을 펴낸 고려인들의 가까운 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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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난해 최재형선생 기념행사에 동길부회장님이 다녀오셨지요.
정독해서 읽고 갑니다. 좋은하루 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