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사회
나는 사회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요, 또 사회와 등을 진 존재도 아니다. 내 딴에는 어지간히 사회에 대해 봉사도 한 것으로 자부한다. 소년 시절, 고향이 문화가 뒤진 함경도의 산촌이라 소년 운동에 열중한 때도 있었다. 소학교에서 중학교까지 여러 차례 스트라이크에 참가, 결국 광주학생사건으로 끝내 짧은 감옥살이까지 했다. 출옥 후는 학업이 자연 중단되어 수백 세대의 마포 어느 빈민촌에서 수년 동안 소위 가가와(賀川豊彦) 식의 기독교 사회운동에 열중한 일도 있었다. 팔에 완장을 차고 시내에서 노동자를 인솔하기도 했고, 매일 적지 않은 환자들을 데리고 총독부 병원과 세브란스 병원을 출입하기도 했으며, 아동들의 교육에 열중하기도 했다. 이 무렵 나는 동네 공동변소 청소를 날마다 도맡아 했다.
그러나 사회사업이다 교육이다 하지만, 여자 아이들이 가갸거겨나 일본말 배운 것이 불미(不美)한 직업에 떨어지는 원인이 되고, 수입의 증가가 성인들의 도박과 주벽을 부채질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를 포기하고 말았다. 인간 자체,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내가 세상에 대해 의아하게 느끼는 것은,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자신의 믿음이나 인간은 다 완성된 줄로만 알고, 우선 전체를, 세상을, 사회를 운운하는 것이다. 어린애 티도 안 가신 30도 못 된 애들이 신학을 했다고 교회요 목회요 하고 나서는 것도 이 주제넘은 생각 때문이다. 종교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교육자·학자·정치가·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이 모두 한결같이 정치 운운, 사회 운운 하는 것도 저마다 자기 자신, 인간 자체를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말이나, 나는 실로 나 자신을 아직도 플라톤이 말한 두 발 달린 동물 이상으로 가꾸지 못한 자이다. 예수의 종교의 위대는 저의 제자가 공자의 3천이나 플라톤의 아카데미에 미치지 못한 열한 명에 불과했던 데, 그리고 저의 교훈이 공자의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나 석가의 오도(悟道)나 소크라테스의 자신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실로 인간의 죄와 절망과 죽음을 분명히 한 데 있는 것이다.
사람을 정치적 군집(群集)으로밖에 못 보는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신앙자는 철저히 고독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 사람은 고독에서 선해지고 강해지고 완성될 수 있다. 저는 고독에서 비로소 자신의 죄와 절망과 죽음을 철저히 느끼고, 또한 유일(唯一) 최대의 전능자인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저는 비로소 키에르케고르의 이른바 단독자(單獨者)로, 실로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의미의 고독한 인간을, 전날 소돔에서 찾은 열 사람을,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천 명을, 이사야의 남은 자 즉 렘난트(remnant)를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이다. (성서연구 1964년 10월 제126호)
첫댓글 진정한 신앙자는 철저히 고독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 고 말씀 하신 것 참 무겁고도 어려운 말씀이네요,,
고독에서 선해지고 강해지고 완성 될 수 있다고 하신 것 ...유일한 하나님 앞의 단독자임을 깨달으라는 것
어렵지만, 걸어가야 할 길...무교회주의는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 앞에
책임감 있게 살라는 뜻인것 같습니다.번민하는 것 만큼 발전도 있겠죠.
remnant의 신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