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와 술과 차가 있는 중국 인문기행2
저자 송재소(宋載邵)는 경북성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문학과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다산문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한문학회 회장으로, 성균관대 한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퇴직했다. 1943년생으로 올해나이가 76살인데 이 나이에 이 방대한 중국인문기행서를 집필했다는 것이 존경스럽다. 책이 두껍기도(457쪽)한데다 글자도 작고 많아서 읽는데 꽤나 힘이 든다. 하지만 저자를 생각하면서 읽고 있다.
절강성 소홍(紹興)은 소홍주로 유명한 곳인데 이곳을 여행하며 ‘기묘한 돌기둥 운골’에 대하여 쓴 것을 옮겨 본다. “불상 동쪽에 기묘하게 생긴 운골(雲骨)이라는 바위가 있다. 높이 30m나 되는 이 바위기둥은 원뿔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아 위쪽이 넓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져 맨 아래 부분은 1m에 불과하다. 이런 형태로 넘어지지 않고 오랜 세월 버티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보이는데, 남쪽에서 보면 조롱박 같고, 북쪽에서 보면 버섯 같고, 서쪽에서 보면 하늘 높이 솟아 불타는 횃불과 같다. 그래서 이 바위를 일명 노주청연(露柱晴煙)이라고 부른다. ‘기둥모양의 화로에서 피어나는 맑은 연기’라는 뜻이다. 바위 앞면에 쓰인 일주촉천(一炷燭天-하나의 심지(촛불)가 하늘을 밝힌다) 네 글자는 이를 말한 것이다.
바위 위쪽에는 ‘雲骨’ 두 글자가 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글자 크기가 사람 키만 하다. 청나라 때 새긴 것이라 하는데 그 당시 이 높은 곳에 올라가 글자를 어떻게 새겼을까하는 의심이 생긴다. 바위 꼭대기에는 늙은 측백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데 조사에 의하면 수령 천년이 넘었다고 한다. 평소 기석(奇石)을 좋아했던 북송의 서예가 미불(米芾)이 이 운골을 보고 ‘미칠 것 같아서’ 바위 주위를 돌면서 며칠을 여기 머물다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예서체(隸書體) : 전서(篆書)를 간략화한 것으로 좌서라고도 한다. 진(秦)시황제(始皇帝)때 옥리였던 정막이 종사자들의 문서가 번잡하여 이를 줄이기 위해 전서를 개선하여 만들었다. 한대(漢代)에 전서를 대신해 공식문자로 통용되었고, 조선 말 완당 김정희와 이광사의 예서가 대표적 글씨다.
운골을 여행하고 난 다음날 일행은 서시고리(西施古里)를 둘러보았다고 했는데 서시고리는 춘추전국시대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던 ‘서시가 살던 동네’로 서시에 이야기를 따로 적었으므로(첨부) 여기서는 서시 그 후의, 아니 서시가 오나라를 멸하는 목적을 달성한 다음 행적에 대해 살펴보자.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를 낳은 오왕 부차(吳王 夫差)와 월왕 구천(越王 句踐)의 싸움은 서시의 미인계를 이용한 구천의 승리로 끝난다. 그렇다면 오나라에 인질 아닌 인질로 갔던 서시는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고향인 제기(諸曁)로 돌아와 살다가 물가에서 발을 헛디뎌 익사했다는 설, 구천이 서시를 후궁으로 삼으려는 뜻을 알아채고 부인이 서시의 몸에 돌을 매달아 강에 빠뜨려 죽였다는 설도 있는데, 두 번째 설이 좀더 유력하다. 오나라가 멸망한 때가 기원전 473년, 이 때부터 기원전 376년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묵자(墨子)와 그의 제자들이 쓴 ‘친사(親士)편’ 에 이런 기록이 있다.
“이런 까닭으로 비간(比干-은나라 충신)의 죽음은 그 강직함 때문이고, 맹분(孟賁-전국시대 역사)의 죽음은 그 용맹함 때문이며, 서시가 강물에 빠짐은 그 미모 때문이다.” 이로 보아 당시대 사람들은 서시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믿었던 듯하다.
오나라가 망한 후 범려와 함께 제나라로 가 장사를 해 거부가 되었다는 설 등은 후대에 만들어진 설이다. 원래 범려와 서시는 연인 사이였기에 사람들은 부차가 죽은 후 서시가 범려의 품으로 돌아갔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을 둘러싼 전설 같은 이야기가 수없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중 또 다른 이야기는 두 사람이 배를 타고 태호(太湖)북단 무석(無錫) 오호리에서 사람들과 물고기를 기르고 도자기를 만들며 살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태호 서쪽에 위치한 의흥(宜興)지방에서는 범려와 서시가 그곳에 정착하여 도자기를 빚어 의흥자사기(紫砂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서(史書)에는 범려에게는 이미 부인과 아들 셋이 있었다고 했으며 그 부인이 서시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했다.

서시고리 서시 사당내 초상
저자 일행이 서시고리를 보고 소흥으로 돌아가는 길에 난정(蘭亭)이란 곳에 들렀는데, 난정은 월왕 구천이 난초를 심었고, 한나라 때는 이곳에 역정(驛亭)을 설치하여 지명이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곳 난정출신으로 유명한 인물은 천하명필로 알려진 왕희지(王羲之)*가 있다. 왕희지와 아들 왕헌지(王獻之)에 관한 일화 하나.
*왕희지(303∼361)자는 일소(逸少), 호는 설원(雪園), 산둥성 임기(臨沂) 출신으로 13,4세 때 난정으로 이사와 23세 때쯤 벼슬길에 나섰으나 41세 때쯤 사직하고 칩거하다가 46세 때 우군장군(右軍將軍) 및 회계내사(會稽內史)로 임명되어 소흥지역을 다스리는 일을 했다. 회계내사로 부임한 이듬해(353년)난정계회(蘭亭禊會)를 열어 유명한「난정집서」(蘭亭集序)를 썼다.
어느 날 아들 왕헌지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글씨를 잘 쓰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왕희지는 마당에 있는 18개의 항아리를 가르키며 말했다.
“저 항아리 속 물을 다 써서 연습하고 나면 그 비결을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왕헌지는 항아리 속의 물로 먹을 갈아 부지런히 연습했는데 3개 항아리의 물을 다 쓴 후 ‘이쯤이면 되었겠지’라는 교만한 마음이 생겨 몇 글자 써서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이를 본 왕희지는 글자 중 ‘大’자를 골라 점 하나를 찍어 ‘太’자를 만들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어머니에게 보여드려라”
이를 본 어머니의 반응 왈,
“우리 아들이 3개의 항아리 물을 써서 연습을 하더니 오직 점 하나만 아버지를 닮았구나.”
이 말을 들은 왕헌지는 크게 뉘우치고 18개 항아리의 물이 다하도록 부지런히 연습하여 후일 대가를 이루었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왕희지를 서성(書聖)이라 부르고 왕헌지를 소서성(小書聖)이라 부른다. 또한 이 두 사람을 이왕(二王)으로 병칭하기도 한다고.
난정(蘭亭)에는 경치가 아름다운 ‘난정8경’이란게 있는데, 그 중제5경은 어비정(御碑亭)이란 정자다. 정자라기보다 비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정자 안에는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친필로 쓴「난정집서」비가 있다. 높이 6.86m 넓이 2.64m (광개토태왕릉비가 6.39×2m로 이 보다 크다)나 되는 큰 비다. 이 정자(비각) 옆에는 ‘太’자가 새겨진 돌이 하나 있고 그 옆으로 18개의 항아리와 좌대가 놓인 조형물이 있는데 왕희지와 아들 왕헌지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왕희지가 짓고 썼다는「난정집서」(蘭亭集序)를 비롯한 그의 글씨는 당나라 태종이 너무 좋아해 신하를 시켜 몰래 훔쳐오게 하고 아들 고종이 그것들을 모두 아버지 무덤에 넣었으므로 현존하는 왕희지 글씨는 하나도 없다느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가짜라느니 하는 가설이 무성한 가운데, 왕희지의「난정집서」그 글씨는 제쳐두고라도 내용이 어떤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영화(永和) 9년 계축년(353년) 늦은 봄 초순에 회계 산음현 난정에서 모이니 계사(禊事-화를 물리고 복을 구하는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여러 어진 분이 모두 이르고 젊은이와 어른이 모두 모였다. 이곳은 높은 산, 큰 고개와 무성한 숲, 긴 대나무가 있고 또 세차게 흐르는 맑은 여울물이 좌우를 비추며 띠처럼 둘러 있어 그 물을 끌어다 유상곡수(流觴曲水-흐르는 물에 잔을 띠움 -포석정)를 만들고 차례대로 벌여 앉으니 비록 관악과 현악의 성대함은 없으나 술 한 잔 들고 시 한수 읊는 것이 그윽한 정서를 펴기에는 충분하였다.
이날은 하늘이 밝고 공기가 맑았으며 바람이 따뜻하여 화창하였다. 광대한 우주를 우러러 보고 성대한 삼라만상을 굽어 살피며 눈을 들어 마음껏 회포를 풀고 눈과 귀의 즐거움을 극진히 하기에 충분하니 참으로 즐길 만했다.
사람이 서로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러는 품은 생각을 더러 내어 한 방 안에서 서로 대화하기도 하고, 더러는 처한 상황에 따라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노닐기도 한다. 그래서 비록 나아가고 물러남이 만 가지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같지 않으나, 그 만나는 바를 기뻐하며 잠시 자기 마음에 상쾌하게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며 장차 늙음이 이르는 줄을 모른다.
그러다가 흥취에 권태를 느끼게 되고 감정이 그 일에 따라 옮겨가서 감개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고개를 숙였다가 드는 한 순간에, 조금 전에 기뻐하던 것이 이미 옛 자취가 되어버리니 더더욱 이 때문에 감회가 일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장수하거나 단명하거나 간에 자연의 조화를 따라 끝내는 다 없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 또한 큰 문제이다’하였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옛사람들이 감회를 일으킨 이유를 살펴보면 마치 부절(符節-돌이나 대나무 따위로 만들어 신표로 삼던 물건)을 하나 맞춘 듯하여 옛사람들의 글을 대하여 서글퍼하고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으면서도 이것을 마음속에 깨우칠 수가 없었다. 진실로 죽고 사는 것이 하나라고 한 것은 허망한 말이요. 팽조(彭祖-莊子 이야기에 나오며 700년을 넘게 살았다는 전설 속 인물)와 20세 전에 요절한 사람을 똑 같다 한 것은 함부로 지어낸 말임을 알겠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보는 것 또한 지금 우리가 옛사람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슬프도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로 쓰고 그들이 지은 시를 기록한다. 비록 세대가 다르고 일이 다르나, 감회를 일으킨 그 이치는 마찬가지이니 후세에 이것을 보는 사람도 이 글에 장차 감회가 있을 것이다.”
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於會稽山陰之蘭亭, 修계事也.
영화구년, 세재계축, 모춘지초, 회어회계산음지난정, 수계사야.
群賢畢至, 少長咸集. 此地有崇山俊嶺, 茂林修竹;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군현필지, 소장함집. 차지유숭산준령, 무림수죽; 우유청류격단, 영대좌우.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雖無絲竹管弦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
인이위류상곡수, 열좌기차; 수무사죽관현지성, 일상일영, 역족이창서유정.
是日也, 天朗氣淸,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시일야, 천랑기청, 혜풍화창; 앙관우주지대,
俯察品類之盛; 所以游目騁懷, 足以極視之娛, 信可樂也.
부찰품류지성; 소이유목빙회, 족이극시지오, 신가락야.
夫人之相與, 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부인지상여, 부앙일세, 혹취제회포, 오언일실지내; 혹인기소탁, 방랑형해지외.
雖趣舍萬殊, 靜躁不同;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足, 不知老之將至.
수취사만수, 정조부동; 당기흔어소우, 잠득어기, 쾌연자족, 부지노지장지.
及其所之旣倦, 情隨事遷, 感慨係之矣. 向之所欣, 면仰之間, 以爲陳迹,
급기소지기권, 정수사천, 감개계지의. 향지소흔, 면양지간, 이위진적,
猶不能不以之興懷; 況修短隨化, 終期於盡. 古人云: "死生亦大矣. " 豈不痛哉!
유불능불이지흠회; 황수단수화, 종기어진. 고인운: "사생역대의." 개불통재!
每覽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매람석인흥감지유, 약합일계; 미상불림문차도, 불능유지어회.
固知一死生爲虛誕, 齊彭상爲妄作. 後之視今, 亦由今之視昔, 悲夫!
고지일사생위허탄, 제팽상위망작. 후지시금, 역유금지시석, 비부!
故列敍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고열서시인, 록기소술, 수세수사이, 소이흥회, 기치일야.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후지람자, 역장유감어사문.

난정집서 - 모사본

왕희지 平安帖 일부
지금 읽어봐도 참으로 가슴에 와 닿은 그런 글이 아닐 수 없다.(8.25)
침어서시.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