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띠를 바르게 잘 둘 것 같으면
보는 힘이 좋기 때문에 대상이 잘 보입니다.
통찰하는 힘이 좋고,
이해하는 힘이 좋기 때문에 그런 법들이 잘 드러나서 잘 보이게 됩니다.
대상이 없어서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대상은 지극히 많습니다.
8만 4천가지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잘 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보일 때마다 보일 때마다 잘 보입니다.
잘 보는 사람에게 잘 보입니다.
바르게 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잘 보이는 법입니다.
대상들이 엄청 많은데도 못봐서 문제입니다.
안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못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 보인다고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못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겁니다.
안 보인다고 해서 안 보는 게 아니라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볼 줄 모르고 알지 못하는 것이,
보는 것을 갖다가 모하로 보기 때문입니다.
빤냣띠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실재를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알아차림과 지혜가 없는 것이 가장 원인입니다.
아사띠(Asati)로 살아갈 때
아주 많이 곤란하고 어렵고 괴롭습니다.
그렇다면 뭘로 봐야 하지요?
알아차림, 지혜 있시 봐야 합니다.
지혜는 보는 것을 갖다가 법으로 보기 때문에
법으로 보입니다.
법으로 보면 법이 대상이 됩니다.
모하로 보게 되면 번뇌가 대상으로서 일하게 됩니다.
번뇌가 대상이면서 또 아상, 자아를 키우고 세우면서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줄 모릅니다.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면 모하가 끌어가 버립니다.
한번 볼 때마다 나고 죽고 나고 죽습니다.
순식간의 일입니다. 길지 않습니다. 아주 짧습니다.
찌따누빳사나에서 케마왐사 스님은 이러한 문제들이
매 순간 벌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두 가지 문제.
관념적 진리와 궁극적 진리.
동시에 괴롭힌다.
매 순간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는다.
병듦, 늙어감, 죽음으로부터..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
지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분명하게 보여질 것입니다.
너무도 뚜렷하고 명징하게
교훈으로 삼아서 배우고 그래서 바르게 보도록
바른 마음가짐&바른 견해로서 볼 줄 알도록
그래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나쁜 업은 짓지 않고
선업공덕으로 살아가도록
그래서 볼 때마다 알 때마다
“있는 사띠”로 보고 지혜를 써 줘야 됩니다.
그럴려면
보는 마음/아는 마음 두 마음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아는 마음이 대상과 함께 사라지기 때문에 더욱 편안합니다.
괴롭지 않습니다.
바르게 보는 법에 괴로운 법이 붙지 않습니다.
여기 그런 이치가 『있는 사띠+지혜』 안에 들어있습니다.
일어나는 대상을 바르게 사띠하면
거기서 바르게 볼 줄 아는 이치가 있습니다.
있기 때문에 보라는 겁니다.
드러나 보이기 때문에 이해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볼 줄 모르는 사람,
수행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법문을 해줘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에 드시면서까지도
“잊지 말거라, 사띠를..” 하신 까닭입니다.
*
_(2023년 1월 27일 새해 설 연휴 집중수행의 회향법문 중에서 사사나 스님)_
첫댓글 고맙습니다
사두ㅡ사두ㅡ사두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