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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단양군) 마대산(1,052m)을 가다.
글 쓴 이 旲 熀 高 達 五
5월 22일, 산천(山川)은 짙은 녹색으로 물들어 향기로 넘쳐나고 대지(大地)는 생기로 충만(充滿)하여 활력이 넘쳐남니다. 동명휴게소에서 간단히 조식(朝食)을 하고 의성 안동 영주를 거쳐 단양IC에서 다시 59번국도로 접어드니, 남한강(南漢江)의 푸른 물결을 따라 구~불 구~불 대강(大江)을 거슬러 달리는 기분이 상쾌하고도 장엄합니다.
얼마 만인가? 2004년 7월에 “마대산”을 다녀 온지가 꼭 12년 째 되니~ 그 새 산천도 변하고 도로도 새로 뚫리고 확장되어서 모든 것이 그저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는데, 저만큼 강건너 산비탈에는 “단양~영월”간 도로를 새로 건설중에 있어 강을 가로지르고 터널을 뚫어 거리를 단축 시키면~ 옛 도로의 정취는 사라질 것이다.
오늘날의 “도로문화”가 갈수록 직선화로 바뀌어지니~ 꾸~불 꾸~불 강을 따라 대자연에 순응(順應)하여 길을 달리던 옛 날의 정서(情緖)와는 많은 차이가 있어, 빠르고 편리한 잇점도 있으나 상대적으로 여유로움이 사라지니~ 조급하고 타인(他人)에 대한 배려가 부족함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옛 말에 “지름길이 종종 도는 길이라”하드니... 영춘면의 ‘군간교’를 거쳐 영춘교, 각동교로 해서 하동면(김삿갓면)으로 간다는 것이 너무 신나게 달려 남면(영월)으로 접어드니 새로 난 도로(88번)가 고속도로나 마찬가지라.
도로 옆 이정표에는 “김삿갓면(구 하동면)”이라 개명되어 있고 시원스레 뚫린 국도를 따라 신나게 달리니, 김삿갓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김삿갓유적지, 김삿갓상점, 김삿갓문학관, 김삿갓 벅스벨리 등 마대산 기슭에는 온통 “김삿갓브랜드”뿐이다.
난고(蘭皐)선생의 시에 “아향청산거(我向靑山去) 녹수이하래(綠水爾何來)(나는 청산을 찾아 가는데, 물아 너는 어찌 흘러 오느냐)”라 드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김삿갓계곡을 따라 들어 출발깃점에 도착하니 시계는 11시를 조금 지나있다.
단체로 기념촬영을 마치고 소공원 주위를 잠시 둘러보니 입구에 거대한 암반위에 “영월 향토사학자 김영국선생”의 공적비(功績碑)가 세워져 있고, 몇 걸음을 더 오르니 중간쯤에 아름다운 자연석에 “詩仙 金삿갓 蘭皐先生遺蹟碑”가 진좌(鎭坐)하고 있다.
그 옆으로 삿갓쓴 늙은이가 땅속에 몸을 숨기고 손에 과일(복숭아)을 들고 있으며(還甲詩), 그 앞에는 커다란 자연석에 난고(蘭皐)선생의 사적(事績)이 간단히 새겨져 있다. 조각공원내에는 자영(自咏), 환갑(還甲), 명천(明川), 꼬마신랑, 간음야점(艱飮野店) 등의 시비(詩碑)가 있으며 제일 위쪽에는 일붕 서경보스님의 시비도 보인다.
난고 김병연(蘭皐 金炳淵. 1807~1863)은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명문 안동김씨의 일가로 태어났으며, 그가 다섯 살 때(순조11년, 1811) 평안도 일대에서 홍경래가 주도한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이 때 가산 군수를 지낸 “정시”는 농민군을 상대로 싸우다 전사 했으나,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純)”은 선천의 부사로 있으면서 농민군에게 항복하여 겨우 목숨을 구했다가 관군(官軍)이 득새할 때 농민군의 두목 “김창시”의 목을 1천 냥에 사서 조정에 바쳐 그의 공을 위장하였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참형을 당했으며, 가족들은 멸족의 화를 피해 노복(奴僕) 김성수와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숨어살았다. 이후 김익순의 죄는 고종 정유년(丁酉年)에 신원(伸寃)되고 순종(純宗) 무술년(戊戌年)에 복작(復爵)되어서 그는 광주(廣州), 이천(利川), 가평(加平)을 전전(轉轉)하다가 평창을 거쳐 영월 삼옥(三玉)에 정착하였다.
병연의 어머니는 이를 철저히 숨기고 아들에게 공부를 시켜 20세에 ‘영월도호부 동헌(東軒)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당일 백일장의 시제(詩題)가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정시 가산 군수의 충절을 논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김익순의 죄를 탄식하라)”였는데, 그는 뛰어난 글재주로 “한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번 죽어 마땅하다”고 한껏 저주하였다.
결국 자신이 그토록 비방하였던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게 되었으며, 그는 조상을 욕되게 한 번민과 자책감에 빠져 노모(老母)와 처자식을 영월 어둔(於屯)에 남겨둔 채 삿갓을 쓰고 전국을 떠돌며 방랑(放浪)길에 나섰다.
그는 방랑시인(放浪詩人)으로 민중의 한과 설움을 해학(諧謔)적으로 읊으며 일세를 풍미하였으며, 또한 정형화된 한시(漢詩)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의 시세계를 추구하였고, 파격적인 시작(詩作)활동으로 세계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아울러 1940년대〔김립시집〕을 편찬한 ‘이응수’는 김삿갓을 미국의 시인 ‘휫트먼(Whitman. Walt)’과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다쿠보쿠(石川啄木)’와 함께 19세기 ‘세계시단의3대혁명가’로 높이 평가하였다.
김삿갓은 철종 14년(1863) 3월 29일 전라도 화순에서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역시 아버지를 찾아다니던 둘 째 아들 익균이 3년 후 영월군 김삿갓면(하동면) 와석리 노루목(獐頸)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연(連)하여 그의 묘소가 발견된 것도 1982년 ‘영월향토사학자 박영국’의 노력으로 이루어 졌다고 하며, 이곳의 유적지나 김삿갓문학관도 2003년도에 “강원의 얼 선양사업”에 의해 개장되었다고 한다. 공원내 많은 시비(詩碑) 中에서 “간음야점(艱飮野店:주막에서)”의 시를 간단히 옮겨봅니다.
간음야점(艱飮野店 : 주막에서)
천리행장부일가(千里行裝付一柯)(천리 길 나그네 가진 것 겨우 지팡이 뿐이니)
여전칠엽상운다(餘錢七葉尙云多)(남은 돈 일곱닢 오히려 많다 하겠네)
낭중계이심심재(囊中戒爾深深在)(주머니 속에 깊이깊이 간직하자 다짐했건만)
야점사양견주하(野店斜陽見酒何)(석양에 주막을 만나니 아니 마시고 어쩌리)
노루목(獐頸)의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좌우측으로 소공원과 무덤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어 나머지는 하산길에 답사 하기로 하고 몇걸음을 오르니 산기슭에는 감로수(甘露水)가 철~철~ 흘러 넘친다.
한 바가지의 물을 떠서 목을 축이시니 몸과 마음이 동시에 시원합니다. 그 우측으로 조그마한 닫집에는 금줄이 둘러져 있어 가까이서 보니 자연돌비석에 “獐頸城中詩仙樓, 於屯灘口地神戌”이라 새겨져 있고, 그 아래 “陀聰書, 松亭銘”이라 씌여있다.(노루목 성중의 시선루요, 어둔리 개울입구의 토지신이라. 타총이 쓰고 송정이 새기다.)
여러 회원님들에게 사진촬영을 해 드리고 김삿갓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오르니 산새들은 노래하며 반겨 주시고, 개울물은 졸~졸~졸~ 정겹게 흰 이빨을 드러내고 흐드러지게 웃슴니다.
김병연이 20세에 과장(科場)에 나갈 때 까지 집안내력을 정말 몰랐을까? 필자(筆者)의 생각으론 알고 있었다고 여겨지며, 자라면서 여러 가지 설움과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가며 인내 忍耐 하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등과(登科)를 하게되면 권력과 돈 설움에 쌓이고 쌓인 지난날들의 비운(悲運)을 일시에 보상받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막상 향시(鄕試)에 나가 장원을 하였으나, 되려 조상을 욕되게 하고 지울 수 없는 번뇌와 죄책감이 그의 삶을 더욱 공허하고 힘들게 하였으니, 그는 “일체방하착(一切放下着)”하여 “無所有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실천한 것이라 여겨짐니다.
‘김삿갓주거지’까지는 이정표에 1.4Km라 되어 있으며, 등산로는 넓어서 차도에 가깝고 길 섶에는 여러곳에 쉼터와 난고(蘭皐)선생의 해학(諧謔)적인 시가 걸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를 옮겨 봅니다.
처녀를 희롱하다
毛深內闊(모심내활)(털이 깊고 안이 넓으니)
必過他人(필과타인)(타인이 지나 간 것이 틀림없네)
溪邊楊柳不雨長(계변양유불우장)(시냇가 버들은 비가 안 와도 길게 자라고)
後園黃栗不蜂柝(후원황율불봉탁)(뒤뜰에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저절로 벌어 진다네)
주거지로 가는길 따라 경사진 언덕에는 “오미자”를 재배하는 밭이 여러곳에 보이며, 오래전에 올 때는 그냥 오솔길에 나무숲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차도(車道)를 만들어 호젓한 산골의 아늑함이 사라지고 되려 사람들의 향기가 넘쳐남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진촬영도 해 가며 30여 분을 걸어서 “김삿갓주거지”에 도착하니 선착한 회원님들은 모두들 사진찍기에 분주하시다.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정랑(淨廊)이 소담스럽게 지어져 있고, 자연석 돌축대위에 터를 다져서 초가지붕으로 주거지를 복원해 놓았다.
본채는 그대로 인데 蘭皐선생의 초상화를 모신 “난고당(蘭皐堂)”이 사방 한칸의 초가지붕으로 새로 지어놓았으며, 蘭皐堂 글씨는 묵전학인(默田學人)이 썼고 1982년 김삿갓 주거지를 발견할 당시 이 곳에서 살았던 엄운섭(당시64세)의 증언에 의하면 1972년경 본채의 대들보가 썩어 내려 앉아서 철거하고 바깥채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화전촌(火田村)의 집은 모두가 통나무로 짓는 것이 관례인데, 이 집 본채자리 철거목재는 기둥, 천장보, 도리 등이 도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가 양반댁의 주부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2002년 9월에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한 것이라 한다.
본채는 정면3칸에 측면2칸의 초가지붕으로 지어져 있고 가운데 대청마루를 놓았으며, 뜰에는 생전의 김삿갓 모습을 연상케하는 “나무조각상”과 삿갓, 지팡이까지 갖추어 놓아서 답방객들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노모와 처자를 이곳에 두고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하다가 가끔씩 오고 간 님의 심정을 어찌 다 알겠소 마는, 님을 그리워 하는 후학들이 지어 올린 ‘방랑시인 김삿갓’노래를 1절만 옮겨 봅니다.
방랑시인 김삿갓
김문응 작사, 전오승 작곡, 명국환 노래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삼~천~리
흰구 름~~뜬~~고 개~넘~어~가는~객이누구냐~
열두대 문 문간~방~에 걸식~을~하~며~
술한~잔~에~~시한~ 수~로 떠 나~가 는 김삿~갓~
여러 회원님들에게 단체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필자도 한판 찍슴니다. 모두들 삿갓쓰고 지팡이 짚고 ‘김삿갓 연출’에 신-나 있슴니다. “學高房”의 문은 잠겨있고 주인(관리인)은 출타 중이며 문(門) 상방(上方)에는 좌우로 삿갓쓴 도인의 사진이 걸려있다.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등산을 진행하니 이제부터는 경사가 심하고 산세도 험하다. 얼마를 올랐을까? 간이 쉼터에서 잠시 쉬는데 김은철 회원님이 오늘따라 많이도 힘들어 하신다. “7개월 여 동안 산행도 못하고 전원주택을 짓는데 너무 애를 써서 힘에 부친다”면서~ 간단히 등을 두드려 드리니 그것도 사양하신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한~참을 쉬다가 다시 오르니, 팔십 노장의 서부장님은 잘도 걸으시고 김해진님, 황까페지기님은 오늘도 사진촬영에 바쁘심니다 그려! 가파른 경사를 오르다 쉬고 쉬다 오르기를 반복하면서 1시간 여를 걸어 정상에 도착하니, 선착객들은 군데 군데 모여 앉아 점심을 드신다.
후미에 도착하시는 몇 분들을 차례로 ‘정상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필자도 이원우님의 팀에 합석하여 시장끼를 채웁니다. 5월의 짙은 녹색의 그늘 아래서 도란 도란 모여앉아 점심을 드시니 여기가 선경(仙境)인가 느껴집니다.
주제(主題)없는 얘기들을 나누면서 얼마를 쉬다가 정상표석을 배경으로 단체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잠시 사방을 조망(眺望)합니다. 이 곳 마대산(馬垈山. 1,052m)은 백두대간의 선달산(1236m)부근에서 서북쪽으로 한줄기가 뻗어나와 회암령을 지나 어래산(御來山), 고치령(高峙嶺)을 거쳐 마대산에 이르고, 다시 그 잔여지맥은 수리봉과 삼봉을 거쳐 남한강에 그 맥을 떨구고 있다.
서북쪽으로는 한강(漢江)을 연모(戀慕)해 달리는 산맥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동남쪽으로는 백두대간의 능선이 태백과 소백을 거쳐 장엄하게 이어 달림니다. 처녀봉 가는 길은 능선길이라 걷기도 수월하고 해발 1000고지를 상회하고 있으니 솔바람도 알맞게 불어 5월의 녹향(綠香)이 코에 즈며들어 기분도 상쾌합니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30여 분을 걸어 전망대(展望臺)에 이르니 이정표에 ‘처녀봉680m’라 적혀있다. 벽송님과 함께 전망대에 올라 영월 삿갓면 일대를 조망하며 10여 분을 쉬고 있으니, 후미에 황까페지기님, 김해진님, 서부장님, 안언니 등이 도착하여 다시 처녀봉으로 내려갑니다.
처녀봉에 도착하여 여러 회원님들에게 단체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어떤 연유(緣由)로 “처녀봉”이라 부르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단지 가운데 봉우리가 봉긋이 솟아있어 여인의 젖무덤을 연상케 하며, 그 가운데 두 그루의 크고 작은 소나무가 가지를 벌리고 있어 부쳐진 이름인가?
다만 봉우리를 덮고있는 솔뿌리가 기이하며~ 봉우리 전체의 모습은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짐작키 어렵슴니다. 얼마를 쉬다가 ‘선낙골’로 내려가니 경사가 몹시도 심하고 가팔라서 여간 조심스럽지 않슴니다.
그래도 험한 곳은 철계단을 시설해 놓아서 비교적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어 감사드리며, 1시간여를 걸어 나려서 ‘노루목’ 입구에 돌다리를 건너 “난고정(蘭皐亭)”에 도착하니, 백발의 도사님(김삿갓유적 지킴이)이 객담(客談) 中이시다.
12년의 세월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닌가 봅니다. 도사님이나 저나 늙기는 매한가지여서 서로간에 인정하면서 인사를 드리니 허~허~허~ 웃슴소리가 여여(如如)합니다 그려! 기념촬영을 요청하니 선뜻 응해주셔서 먼저 벽송님과 촬영을 하고 필자(筆者)도 한판 찍슴니다. ‘蘭皐亭’의 현판 글씨는 친필이냐고 여쭈니 대구의 모(謀) 선생의 글씨라 하신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蘭皐 선생의 묘에 이르러 선채로 간단히 예를 드리고 잠시 둘러봅니다. 비문(碑文)은 거대한 자연석에 “詩仙蘭皐金炳淵之墓”라 새겨져 있고 봉분 앞에 상석(床石)도 자연석 그대로다.
입수(入首)는 간좌(艮坐)에 주산(마대산)에서 뻗어내린 끝자락에 청룡(靑龍)은 그만 그만하고, 그 앞으로 개울물이 우에서 좌로 휘감아 흐르며, 그 너머로 백호(白虎)는 부봉(富峰:金星形)으로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어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이만한 길지도 쉽지 않슴니다.
벽송대장님과 박회장(전 두류한묵회장)님께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필자도 사진을 찍고 물러 나오니 봉분(封墳)의 모양이 꼭 삿갓을 엎어 놓은 것 같슴니다.
평생에 썼던 삿갓 죽어서도 쓰고 있구려
생전에는 문전 박대 하드니 사후에는 신선 대접일세
세상 인심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어서
살아서는 비방이요, 죽어서는 입을모아 칭송일세
허허로운 발걸음으로 주차장에 당도하여 준비됀 하산주를 잠시 들고는 남산님들이 휴식을 하실동안 ‘김삿갓문학관’을 건성 건성 답사합니다. 넓은 광장의 한켠으로는 여러개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니... “낙엽 2, 간산(看山), 금강산 8, 허언시(虛言詩), 정담(情談)” 등이 있어 두 개만 옮겨봅니다.
정담(情談)
김삿갓(金笠)
누상상봉시견명(樓上相逢視見明)(다락 위에서 만나보니 눈이 아름답도다)
유정무어사무정(有情無語似無情)(정은 있어도 말이 없으니 정이 없는 것만 같구나)
여인(女人)
화무일어다정밀(花無一語多情蜜)(꽃은 말이 없어도 꿀을 많이 간직하는 법)
월불유장문심방(月不踰墻問深房)(달은 담장을 넘지 않고도 깊은 방을 찾아든다오)
(‘情談’은 어느 서당에서 신세를 지며 달밤에 밖을 나오니 누각에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 비치는 것이 아닌가? 이에 김삿갓이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시 한 수를 읊어 주자 여인이 김삿갓의 시구에 답을 한 시.)
虛言詩(거짓말 노래)
청산영리녹포란(靑山影裡鹿抱卵)(청산 그늘 속에서 사슴이 알을 품고)
유수성중해타미(流水聲中蟹打尾)(흐르는 물소리 속에서는 게가 꼬리를 치네)
석양귀승계삼척(夕陽歸僧髻三尺)(석양에 절로 돌아가는 중의 상투가 석 자나 되고)
기상직녀낭일두(機上織女閬一斗)(베틀 위에서 베 짜는 여인의 불알이 한 말이로다)
또 문학관 옆 잔디밭에는 “김삿갓문학 수상자 시비”가 여러개 세워져 있으니, “별의 생애(이동순), 태(胎:정진규), 새벽은 부엌에서 온다(송수천), 몸이 세상 놓을 때는(홍신선), 허공중에(강희근), 아버지의 빛(신달자)” 등이 있어 하나만 옮겨봅니다.
아버지의 빛
신달자
아버지를 땅에 묻었다
하늘이던 아버지가 땅이 되었다
땅은 나의 아버지
하산 하는 길에
발이 오그라 들었다
신발을 신고 땅을 밟는 일
발톱저리게 황망하다
자갈에 부딪혀도 피가 당긴다
문학관 내부로 들어서니 먼저 죽장(竹杖)에 삿갓쓴 “김삿갓조각상”이 반갑게 맞아 주신다. 그 뒤로 선생의 “친필 시”가 새겨져 전시되어 있고 또 그의 일생과 아울러 그를 사랑하신 “박영국 선생”의 이력서도 걸어 두었다.
특히 박영국 선생은 “영월향토사학자”로서 각고의 노력 끝에 1982년에 난고 선생의 묘와 생가 터를 발견하고 선생의 생애를 부활(復活)시키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 하신분으로서 어쩌면 김삿갓의 분신(分身)인지도 모르겠슴니다.
전시장 내부에는 선생의 유품은 없으나, 그가 주유천하(周遊天下)하면서 읊은 시들을 표구해서 많이도 걸어 두었는데... “교태(嬌態), 증모녀(贈某女), 정담(情談), 가련기시(可憐妓詩), 난피화(難避花)), 운우의 정, 서당욕설 시, 견자(犬子), 개성인축객시(開城人逐客詩) 등 끝이 없으며, 두 어편만 옮겨 봅니다.
욕설모서당(辱說某書堂:서당 욕설시)
서당내조지(書堂來早知)(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왔는데)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방안엔 모두 높은 분들 뿐이고)
생도제미십(生徒諸未十)(학생은 모두 열 명도 안 되는데)
선생내불알(先生來不謁)(선생은 찾아와 보지도 않네)
개성인축객시(開城人逐客詩)
읍호개성하폐문(邑號開城何閉門)(고을 이름이 개성인데 왜 문을 닫나)
산명송악기무신(山名松嶽豈無薪)(산이름이 송악인데 어찌 땔나무가 없으랴)
황혼축객비인사(黃昏逐客非人事)(황혼에 나그네 쫒는 일이 사람도리 아니니)
예의동방자독진(禮義東方子獨秦)(동방예의지국에서 자네 혼자 때놈일세)
이 무딘 필력(筆力)으로 어찌 선생의 시(詩)를 논하리오! 세상의 부귀공명(富貴功名)이 다 부질없슴을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시니... 흔히들 그의 한평생을 “불우한 삶이라”고들 말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론 대자유 대해탈을 하시고 지고한 행복과 복락을 누리다 가신분으로 생각됩니다.
인생(人生)이란? 선택(選擇)이다! 휴(休)~! 휴(休)~~!! 휴(休)~~~!!!
단기 4349년 5월 22일
영월 김삿갓면(구 하동면) 마대산(1,052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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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산님들 그간 강녕하신지요?
산행을 다녀 온지도 벌써 일주일이 되었군요.
차일피일 바쁘다는 핑계로 산행후기를 오늘에야 올렸슴니다.
"마대산" 산행에 동참해 주셨던 모든님들(40명)께 다시한번 깊은 감사를 드리오며~
아울러 당일 진행에 수고하신 구회장님을 비롯하여 벽송대장님, 윤총무님, 김미소총무님,
능선운영위원장님, 윤상복부대장님 등 많은분들의 노고에 감사 감사를 드림니다.
특히 까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시는 김은철님께도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남산까페'의 좋은 프로그램들을 많이 운영해 주실것을 당부드림니다.
모든님들! 이제 5월도 몇일 남지않았군요! 님들 늘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을 기원합니다.
산행후기의 긴 장문을 쓰시느라 많은 수고하셨습니다, 늘건강하시고 가내 평온이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드림니다
마대산의 내력과 난고 김삿갓 선생의 애환이 서린 영월땅 역사적 유래하며
많은 공부하고 갑니다.
벽송님이 다녀가셨군요.
바쁜 일과중에서도 졸문의 글을 읽어주시고 또 댓글까지 달아 주셔서 감사드리며,
아울러 남산의 발전을 위해서 늘 노력하심에 깊은 감사 감사를 드림니다.
늘 건강하시고 귀 가정에 만복이 깃드시길 기원합니다.
고. 고무님 산행후기 집필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어요?덕분에 저희들은 생생한 그날의 기억을 되집어보고 또 기억하네요.정말 남산의 귀감이십니다~늘 건강하시고 가내행복을 기원드립니다^^.
해바라기님 반갑슴니다.
변변찮은 장문의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시니 감사 감사합니다.
님들이 계셔서 남산의 미래가 든든합니다.
인류문화 중에 인간이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고
또 기록으로 인간사를 남길 수 있으니... 가히 보배로다!
해바라기님! 늘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을 기원합니다!
마대산에 얽힌 역사를 알게 되였고
김삿갓님의 생애를 알게 되여 많은 것을 배우고 감니다.
수고 많았어요
감사 함니다.
황까페지기님 강녕하신지요?
언제나 변함없는 격려에 감사드리며~
대자연을 베고누운 조각상이 멋짐니다.
늘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을 기원합니다.
고문님 산행 후기를 접할때마다 느낍니다만 정말 대단하십니다.마대산 김삿갓 선생님에대한 역사공부 한번더 해봅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존경합니다^^
박회장님 반갑슴니다. 그간 강녕하신지요?
장문의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드리며,
문자를 빌어 이렇게라도 후기를 정리해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슴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