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리스크>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톡에서 110㎞ 떨어진 곳이나 1시간30분이면 닿는 곳이다. 우수리스크로 가는 차창 밖에는 능처럼 솟은 같은 키의 긴 산들 앞에 펼쳐진 초원의 연속이었다. 却坪� 빛깔은 모든 생명체의 발원을 받아들일만큼 찬란했다. 우수리스크는 축축히 젖은 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발해 때는 솔빈부(率賓府)로 명마의 고장이었다.(발해는 영토를 5경(京)·15부(府)·62주(州)를 설치하였는데 솔빈부는 15부 중의 하나). 일망무제의 초원은 차장 프레임에 단절될 뿐 비슷한 모습을 계속 낳으며 풍경을 이어갔다.
우수리스크에는 보재 이상설(1870~1917) 유허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의 거주지, 고려인문화센터, 4월참변 추모비 등의 독립운동 사적이 있다.
■이상설 유허비
지난달 20일 탐방단을 태운 버스가 러시아 우수리스크시 라즈돌리노예 강가의 비포장 도로에 멈췄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시간30여분을 달린 뒤였다. 성벽처럼 낮은 산 앞으로 펼쳐진 초원의 한편에는 아직도 발해 성터 흔적이 남아 있다. 탐방단이 찾은 곳은 보재 이상설(1870~1917)의 유허비. 인가는 물론 논밭 뙈기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묘지도, 기념비도 아닌 유허비가 세워진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서려 있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 3인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이상설은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특사 파견에 앞서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서전서숙을 열고 청년교육운동에 헌신했다. 1908년 러시아로 망명한 뒤에는 의병군을 창설하고 권업회 등 독립운동단체를 지도했다. 그러나 병마로 우수리스크에서 숨지기 전 그는 “독립된 조국이 아니면 시신도 가지 않겠다”며 모든 것을 강가에 뿌려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유허비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이상설의 뜻을 기리는 유일한 표지다. 탐방단은 먼저 횃불 문양에 이상설 선생의 약력이 새겨진 유허비 앞에 묵념했다. 안내와 해설을 맡은 김도형 독립기념관 해외사적지 팀장이 무선 마이크를 잡았다. “보재 선생은 대한제국 시절 의정부 참찬(장관급)까지 오른, 독립운동가 중 가장 고위직이었고 해외 독립운동의 최고 원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이그 특사단의 대표였을 뿐 아니라 만주·연해주 지역 무장독립운동의 대부이기도 했지요.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고지도자가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역만리를 누비며 독립에 헌신한 지도자의 자취는 유허비만큼이나 외롭고 쓸쓸했다. 비문의 첫 줄에 선생의 호 ‘보재’가 ‘보제’로 잘못 새겨져 있었다. 유허비 주변에는 사람 키만 한 잡초들이 무성했다. 그 사이에 쇠똥과 러시아 음주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즐비했다. 러시아 극동대학의 한인들이 관리를 하고 있다지만, 우리 정부의 관리와 관심이 절실해 보였다. (경향신문 2015년 7월11일 쓸쓸한 ‘독립운동 성지’… 우린 언제 이 빚을 다 갚을까'
‘4월 참변 추모비’는 우수리스크 북쪽 외곽에 자리했다. 1920년 4월 참변때 우수리스크 일대에서 일본에 희생된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4월참변 때 최재형 선생도 일본군에 총살을 당했다한다. 최재형(1858~1920)선생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다. 그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임됐다. 그만큼 거부였다. 11세때 가출한 뒤 러시아인 선장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장사를 통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신허 지역 땅을 사들여 농장을 운영했고,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으로 군납 사업을 하며 재산을 형성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재형은 1908년 이범윤, 이위종, 안중근과 함께 의병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해 총장으로 추대됐고, 의병 활동자금으로 거금을 내놓았다. 1911년에는 홍범도 이상설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해 ‘권업신문’을 창간했다. 권업회의 초대회장은 최재형, 부회장은 홍범도였고, 그 목표는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독립군 양성과 정부 수립이었다. 1914년에는 마침내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제와 제휴한 러시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다.
독립기념관 김도형 팀장은 “권업회는 최초의 해외 한인회의 중앙단체로 향후 최초의 임시정부인 국민의회의 뿌리”라고 그 의의를 설명했다.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거주지는 말년에 살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일본군에 끌려갔다. 형태는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최대의 한인사회였던 연해주에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선생의 이름을 처음 듣는 것이 부끄러웠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나의 지식도 부박하게 느껴졌다. 선생이 없었다면 안중근의 거사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의 거사자금 또한 최재형 선생이 마련한 것이고 후원자였다. 최 선생은 안의사를 거사 후 러시아 법정에 세워 유리한 재판을 받도록 노력한 인물이기도 하다.
점심 전에 들른 고려인역사관은 우리 민족의 연해주 이주부터 독립운동,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그 이후의 고려인의 재이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전시해놨다. 이곳은 2009년 러시아 한인이주 140년을 기념하기 서립된 곳으로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을 비롯해 다목적 공연장과 한국어와 컴퓨터를 배울 수 있는 교육문화센터 등의 시설을 갖췄다.
전로한족중앙총회 2차 회의 장소도 들렀다. 이곳은 지금 한 실업학교로 사용되고 있었다. 전로한종중앙총회는 임시정부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구였다. 1차대전 당시 위축됐던 연해주 독립운동은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연해주 한인사회는 전로한족대표자회의를 열고 중앙총회를 결성하면서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했다. 당시 러시아 지역은 최고의 독립운동기지였기 때문에 전로한족중앙총회는 그 뿌리가 이어져 1919년 3월17일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국민의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상해 임정과는 10월 통합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시간 정도 걸리는 크라스키노는 과거에 노우키에프스크로 불렸다. 한자로는 연추(煙秋)다. 현재 명칭은 1936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영웅적으로 전사한 크라스킨 중위를 기념하기 위해 붙인 것이라고 한다. 크라스키노는 중국 훈춘 및 한반도 북부를 연결시켜 주던 군항 포시에트와도 가까운 곳으로 러시아 최초의 한인마을인 지신허(地新墟)와 함께 남부 연해주지역의 대표적인 한인마을이었다. 이곳은 1908년 이후 의병운동이 퇴조하고 교육문화운동이 중시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이 한인사회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는 20세기 초반까지 러시아 한인사회의 행정·문화적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최재형과 이범윤 안중근 등을 중심으로 의병단체인 동의회(同義會)가 조직됐다. 크라스키노로 가는 중간에 바라바시의 한 휴게소에 정차했다. 바라바시는 13도의군의 결집지로 여기서 유인석 선생이 도총재로 추대된 곳이라 한다. 이들의 목표는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공해 일제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13도의군은 산하에 창의군과 장의군 등 2개부대를 두었고, 장의군 총재는 이범윤, 장의군 총재는 이남기가 맡았다.
■지신허마을 유적지와 향토박물관
오후 4시30분쯤 한인 최초의 거주지인 지신허 마을을 멀리서 볼 수 있는 도로가에 버스를 세웠다. 지신허 마을에는 가수 서태지가 헌정한 탑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군사지역으로 출입이 불가능했다. 홍범도 장군에 대한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탐방원은 “지금도 저곳에 가보면 벼와 피가 있다. 이는 사람이 살았던 증거로, 한인마을의 존재를 알리는 증거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지금은 사람들이 밥먹고 잠자던 마을의 흔적을 이름모를 풀들이 뒤덮고 있음이 느껴졌다. 군 통제지역이 아닌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한인의 흔적을 쉽게 찾지 못하는 것하지만 멀리 지평선까지 이어진 들판은 군 통제지역이란 장애가 하나 더 덮여 벼가 자란 흔적만이 그 때를 희미하게 보여줄 뿐이었다. 포시에트시 향토박물관에는 당시 맷돌과 절구 등 당시 한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과 사진이 많이 전시돼 있지만 일요일이라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사진만 아쉽게 찍었다. 이 박물관은 러시아인이 유물 등을 수집하며 개관한 곳인데, 최근 통일교 관련 단체에서 매입하기로 했다고 한다.
(※사진 설명 등에 붙어 있는 지명 포스에트는 '포시에트'의 오자입니다)
이곳에서 하산전투기념비(장고봉전투 기념비)를 지나는 버스안에서 본 포시에트 항구는 드넓은 바다가 포근히 감싼 곳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원산이나 청진 등에서 배를 타고 포시에트항에서 내려 이곳부터 말을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고 한다.
■하산전투기념비 버스가 갑자기 경사진 비포장 산길을 탱크처럼 굉음을 내며 올라갔다. 하산전투기념비(장고봉전투 기념비)에 다다른 시간은 오후 6시쯤이었다. 이곳에서는 포시에트 항구는 물론 발해성터와 연추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고지에 위치해 있었다. 다가오는 밤을 덮으려는 듯 안개가 일기 시작했다. 바람은 거셌지만 날카롭지 않았다.
김 팀장은 이곳을 처음 봤다며 감격해했다. 독립운동사나 동아시아사에서 요충지였음을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드넓게 펼쳐진 광경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만약 이곳에서 일본이 이겼다면 만주보다는 시베리아쪽으로 진출했을 것이라는 게 김 팀장의 추정이었다. 실제로 이곳은 주변 지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었다. 땅보다 높은 고지의 바람은 거셌다. 조국 독립의 꿈을 안고 원산 등에서 배를 타고 포스에트항에 내린 뒤 말을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달려가던 독립운동가들의 동선을 거세게 바람을 따라 ‘전설’처럼 그려볼 뿐이었다. 군항 포시에트에도 한눈에 내려다보이지만 지신허마을에 이어 두번찌로 형성된 한인마을인 연추마을도 가늠할 수 있었다. 1937년 한인 강제이주 후에는 추카노프카로도 불렸다. 지신허 마을과 함께 18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한인마을로 얀치허 강을 따라 남북으로 4~5km에 걸쳐 하·중·상연추 3개 마을이 연이어 있었다고 한다. 1900년도에 들어오면서 최재형과 이범윤 안중근 등이 동의회를 조직하고 국내로 진격하는 등 연해주 의병운동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
3일차 마지막 행선지는 안중근의사 단지동맹 기념비였다. 단지동맹(斷指同盟)이랑 안중근과 11명의 동지들이 1909년 3월초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이라 쓰며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 일을 말한다. 2001년 추카노프카 마을 강변에 세워졌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해 남양알로에 제1농장 입구인 현재 이곳에 옮겨졌다.
김 박사는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안중근 의사가 영산전투에서 대패한 뒤 실의에 빠져있을 때 미래를 도모하는 계기가 됐던 사건”이라며 “이러한 결의가 이어져 하얼빈 거사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이날 여정은 오리온호텔에서 풀었다. 가이드 말로는 이곳에서 가장 현대식 호텔이라고 했지만, 워낙 관광객이 적어서 인지, 군사시설 주변이어서인지 시설 자체는 노후됐다. 다음날 국경을 지나 중국 땅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