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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철학 이야기 100선
“이 책에는 불교의 철리(哲理)가 담긴 고사(故事) 100편이 실려 있다. 여기 실린 이야기들은 전형적이고 대표성을 띠고 있으며 불교사상의 정수(精髓)를 집약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속에 담긴 철리와 지혜를 터득한다면 불교의 역사, 인물, 사상을 대략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생활 속에서 이 지혜를 활용한다면 여러 가지 문제를 타당하게 처리할 수 있고 참된 인생을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불교를 더 깊이 이해하고 인생의 깨달음과 철학적 계시를 얻는데 도움 되기를 바란다.” - 서문 중에서 -
책에 담긴 고전 이야기들은 이야기 자체가 최선이고 다시없을 귀중한 것처럼 소개하고 있는데 최선만 제시하고 차선까지는 제시하지는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생에 최선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보다는 ‘최선을 다하되 최선에 이를 수 없다면 차선이라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책에서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게도 된다. 그리고 책에는 불교철학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종교적 색깔을 담은, 붓다의 일생을 통해 지혜를 찾도록 하는 것 같은 이야기도 있는 것 같다.
“붓다는‘깨달은 사람’또는‘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처를 말한다. 붓다에 대한 불교의 이해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정각(正覺)으로 우주의 모든 사물에 대해 더하거나 덜지 않고 여실히 잘 이해하고 감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 등각(等覺) 또는 편각(偏覺)으로서 자신이 깨달을 뿐 아니라 누구나 평등하게 다 깨닫도록 한다는 뜻이다. 셋째, 원각(圓覺) 또는 무상각(無上覺)으로 자신의 깨달음과 타인의 깨달음을 모두 가장 높고 완벽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다. 싯다르타는 이러한 각오(覺悟)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성불한 것이다.”(돈오성불頓悟成佛-단번에 깨닫고 성불하다)
“사리(舍利)는 산스크리트어 Sarira 를 음역한 것으로 좁은 의미에서는 부처님, 석가모니의 유체, 유골을 가리킨다. 석가모니 시대에 인도에서는 화장이 성행했다. 당나라 초기 법림(法琳)의 파사론(破邪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붓다가 세상을 뜬 뒤 제자들은 향나무로 유체를 태웠다. 영골(靈骨)이 분리되고 부서지면서 크고 작은 구슬이 되었는데 빛깔은 홍백색이고 쳐도 깨지지 않고 불에도 타지 않으며 영험한 빛을 뿌렸다.’
‘법림’에 사리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뼈로 이루어진 사리로 빛깔이 희다. 또 하나는 머리로 이루어진 사리로 빛깔은 검다. 마지막은 살로 이루어진 사리는 빛깔이 붉다. 사리는 진신사리와 쇄신사리로 나뉘는데 후세 사람들은 넓은 의미에서 덕행이 높은 고승이 세상을 뜬 뒤 화장하고 나서 생기는 딱딱한 결정체 구슬도 사리라고 부른다. 사리는 계(戒), 정(定), 혜(慧)의 무염공덕(無染功德)을 갈고 닦아 이루어진 것으로 수행이 일정한 정도에 이르렀다는 증험이 되기도 한다.
중국 섬서성 부봉현 법문사에 있는 불지사리(佛指舍利)는 석가모니의 가운뎃손가락 뼈 사리로 세계에서 유일한 것으로 전 세계 불교신도들이 신앙하는 성스러운 물건 중 하나다. 불전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여든 살에 열반하자 제자들은 당시의 풍속에 따라 화장을 하였다. 화장을 한 뒤 제자들이 재에서 정수리 뼈 하나, 견갑골 두 개, 가운뎃손가락 뼈마디와 이빨 네 개 그리고 구슬모양을 한 많은 사리와 골화(骨化)를 골라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세 가지 독(毒), 삼독(三毒)으로부터 해탈하라고 말하는데 삼독이란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의 근본은 심념표부(心念飄浮-마음과 생각이 바람처럼 떠돈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승려 나사달은 수라바드티 성에 사는 장로 비구였다. 그는 누이동생이 아들을 낳을 때 그 아이에게 자신과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아이가 훗날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어느 날 이 젊은 비구가 한 마을의 정사(精舍-수행자가 머무는 곳)에 머물 때 누군가가 그에게 가사 두 벌을 공양하였다. 그는 가사 한 벌을 삼촌에게 공양하기로 마음먹었다.
젊은 비구는 장로 비구를 찾아가 가사를 드렸지만 장로 비구는 자신은 가사가 넉넉하기에 필요 없다며 거절하였다. 젊은 비구는 여러 번 간청했지만 장로 비구는 한사코 거절하였다. 이 일로 마음이 상한 젊은 비구는 삼촌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였고, 심지어 삼촌이 사소한 생활필수품조차 함께 쓰기를 꺼려하니 자신은 그만 속세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젊은 비구는 마음이 흐트러지고 어지러운 생각에 빠져들었다. ‘환속하면 가사를 팔아서 어미 양을 산 다음에 새끼를 쳐야지. 그렇게 수입이 생기면 장가를 가고 자식을 낳아 처자를 거느리고 수레를 타고 삼촌을 방문하리라.’그런 그의 상상은 점점 더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삼촌을 만나러 가는 길에 아내에게 아이는 자신이 돌보겠으니 수레를 몰라고 하고 억지로 아이를 뺏으려다 아이를 떨어뜨려 아이가 그만 수레바퀴에 깔리게 되고 이로 인해 화가 나서 몽둥이로 아내를 때리는’상상까지.
또한 그는 ‘삼촌의 땀을 식혀주려고 부채질을 해주다가 그만 실수로 장로 삼촌의 머리를 치는’상상도 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장로 비구는 젊은 비구의 속마음을 읽고 일깨워주었다.
“자네는 아내를 때릴 수 없으니 이 삼촌을 때리나?”
그 말에 깜짝 놀란 젊은 비구는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여 빨리 정사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장로 비구는 그를 데리고 붓다를 찾아갔다.
붓다는 일의 경위를 듣고 나서 젊은 비구를 바라보며 인자하게 일깨워주었다. “마음이 들떠 있으면 먼 곳에 있는 물건이라도 마음을 흐트러뜨릴 수 있기에 사람은 반드시 탐욕(貪), 성냄(嗔), 어리석음(痴)의 삼독에서 해달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했다.
빛깔도, 형체도 없이 어지럽게 오고 공허하게 떠도는 마음과 생각은 식(識)의 기초이다. 그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사람만이 악마의 장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해탈(解脫)이다.」
다음은 범지오도(梵志悟道) ‘도를 깨닫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날 붓다가 기원정사에서 여러 비구들에게 설법을 행할 때 바라문 한 사람이 허둥지둥 달려오더니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절을 하고 말했다.
“붓다님 저는 지금 가장 고민스러운 두 가지 일에 봉착해 있으니 근심을 풀어주실 수 있습니까?”
“바라문! 무슨 일로 이처럼 근심하는가? 내가 풀어 줄 테니 말해보게”
“붓다여! 저에게는 열다섯 살 된 예쁘고 착한 딸이 있었습니다. 남들도 귀여워하고 제가 가장 사랑하는 딸인데 갑자기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또 밭에 심은 밀이 잘 여물어 추수를 하려고 가보니 그만 불이나 다 타버렸습니다. 저의 심혈과 노력이 이렇게 며칠 사이에 깨지고 날아가 버렸으니 어찌 미치도록 괴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정신이 아득하여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있을 때 어떤 이가 알려주기를 붓다께서 인생의 모든 번뇌를 풀어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원을 청합니다.”
붓다는 불쌍히 여기며 말했다.
“바라문! 너무 슬퍼하지 말게. 이것은 정업(定業-삶과 죽음 등 해소하기 어려운 업력)으로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생멸하지. 세상에는 끝나지 않는 연회緣廻란 없네. 그리고 지지 않는 꽃이 없고, 떨어지지 않는 나뭇잎도 없다네. 자연계의 현상이 그렇고 인생의 모든 것이 마찬가지인데 부질없이 슬퍼할 필요가 있겠나. 세상에는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네. 첫째,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 둘째, 부자도 가난해 질 수 있다는 것. 셋째, 만나면 결국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것. 넷째,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노쇠하고 병들어 죽는 다는 것이라네.”
가만히 듣고 있던 바라문은 붓다의 말을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고나서 말했다.
“붓다여! 세상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믿을 수 없다면 진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리의 법성(法性)이라네.”
이 단순한 말에서 끊임없는 변화의 원리를 체험한 바라문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철저한 이해 속에서 진실한 인식을 얻었고 그것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라문(구원에 뜻을 둔, 재가나 외도를 불문하고 출가한 사람을 말함)의 마음에 불지(佛智)의 빛이 비추자 번뇌와 고통의 구름과 안개는 삽시간에 사라졌다. 이에 바라문은 삭발을 하고 붓다를 따라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바라문은 번뇌에서 해탈되어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하기로 굳게 맹세했다.」
불교에는 나한(羅漢)과 아라한(阿羅漢)이 있고 절에 가면 나한전이 있다. 나한과 아라한은 같은 의미이다. 나한은 날아다니거나 변신할 수 있고, 광겁(曠劫-지극히 오랜 세월)의 수명을 누리며 천지를 움직이거나 멈출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아라한은 소승불교에서 궁극의 경지를 가리키는 명칭인데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번뇌를 쳐부수고 없애버린다는 의미. 둘째, 사람과 하늘의 공양을 받는다는 의미. 셋째, 영원히 열반에 들어 더 이상 생사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는 뜻도 가진다. 다음은 아라한에 관한 이야기다.
「고대 인도 고살라 국에 한 젊은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숲속에 살면서 어느 부자와 교분을 맺고 있었는데 부자의 아내는 미모가 출중했다. 수행자가 자주 부자의 집에 드나들었기 때문에 부자의 아내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다. 소문을 듣게 된 수행자는 답답하고 화가 치밀었다.
‘내 품행이 순결한데도 추한 소문이 나돌고 있으니 한스럽구나.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으니 자살로 결백을 밝혀야겠다.’
그는 자살하려고 밀림 속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숲의 신령이 그를 보게 되었고 신령은 ‘정말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인데 여기서 죽는다니 너무 아깝군. 그를 일깨워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부자의 아내로 변신하여 수행자 앞에 나타나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두 사람에 대해 밖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데 소문에 휘말려 이렇게 목숨을 버린다면 너무 무의미하지 않겠어요? 우리 둘이 아예 여기서 함께 살아요.”
“그럴 수는 없지요. 이런 소문이 난 이상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고 죽음으로 내 순결을 보여줘야겠소.”수행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부자의 아내로 변신했던 숲의 신령은 본래 모습을 드러내고는 게(偈) 한 수를 읊었다.
‘이름을 더럽혔다 하더라도 고행자는 참아야 하나니, 스스로 고통을 만들지도 말고 괴로움을 만들지도 말라. 숲 속의 짐승들은 소리만 듣고도 겁을 낸다. 이는 경솔한 사람의 작품과 같으니 수행자는 그러지 말아야 하느니. 악랄한 풍문이 들려오더라도 굳은 의지에 뿌리를 박고 굳게 인내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출가자가 지켜야할 법도니라. 누가 너를 강도라고 해도 그건 남들의 입방아일 뿐이고 자네가 깨달아 아라한이 됐다고 해도 남들의 찬사일 뿐이니 자네 마음에 부끄럼이 없고 지조가 청백하다면 여러 부처와 보살의 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수행자는 숲의 신령으로부터 게시를 듣고 나서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자살하려던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그는 진심전력을 다해 도를 추구하여 마침내 번뇌를 지우고 ‘아라한’이 되었다.」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남이 시키는 대로 덮어놓고 따르는 것’을 ‘맹종(盲從)’이라고 한다. 맹종하는 태도는 결코 좋지도, 옳지도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맹종에 관한 이야기다.
「옛날 파차리 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는 본래 새가 살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새를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나라 사람이 까마귀 한 마리를 가지고 왔다. 사람들은 까마귀를 보고 아주 신기하게 생각했다. 몸은 새까맣고 커다란 입은 툭 튀어나오고 게다가 하늘을 나는 것을 보고는 그야말로 진귀하고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울음소리는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신이 내린 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곡식과 과일을 주어 공양했다.
까마귀는 이곳에서 신선처럼 귀한 대접을 받고 즐거운 생활을 누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파차리 국에서 까마귀를 특별 대우한다는 소문이 퍼져 사방의 까마귀들이 모두 이곳으로 날아왔다. 그렇게 얼마 후에는 나무, 지붕, 하늘과 땅은 새까만 까마귀들로 뒤덮였다. 까마귀들은 소리 지르고, 제멋대로 고함치면서 날아다녔다. 어디를 가나 까마귀 천지였고 까마귀 천국이었다.
하지만 파차리 사람들은 까마귀를 신성한 새라고 생각했기에 털끝만한 소홀함도 없이 까마귀를 공양하였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뒤 한 상인이 나른 나라에서 공작새 세 마리를 가지고 왔다. 파치리국 사람들은 공작새의 곱고 다채로운 깃털을 보고는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공작새는 걷는 자태마저 우아하여 마치 점잖은 귀부인 같았다. 그에 비해 까마귀는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폼이 마치 어릿광대 같았으며 또한 공작새는 우는 소리도 부드러워 선녀가 노래를 부르는 듯했지만 까마귀의 쉰 목소리는 마치 깨진 꽹과리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공작새를 구경하면서 각양각색의 음식을 공양했고 이제는 까마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신세가 일락천장(一樂天仗신망(信望)이나 위신(威信) 따위가 동시(同時)에 여지없이 떨어짐)이 된 까마귀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찾을 수 없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파차리 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어떤 사물이든 서로 비교 해보아야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는 것과 맹목적으로 한 가지 물건을 숭배한다면 손해를 보고 꾐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가 불자를 부를 때 보통 ‘보살’이라 하는데 보살은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보리살타’의 준말이다.‘보리’는‘깨달음’이란 뜻을 가졌고‘살타’는‘정이 있다’는 뜻으로 생명을 지닌 중생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보리살타’는‘깨달은 중생’을 의미한다.
안될 줄 알면서도 행하는 순도(殉道-정의나 도를 위해 목숨을 바침)의 결심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다. 모두가 생명을 바쳐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불도(佛道)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다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놀란 사람의 이야기다.
「옛날에 부모를 일찍 여윈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가난하지만 고생스럽게 일하고 싶지 않아서 늘 이웃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서 먹을 것을 사 굶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점차 빚이 많아져 빚쟁이들을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빚쟁이들을 피해 들판으로 도망가던 그는 풀숲에서 나무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몰래 나무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를 여는 순간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에 눈이 부셨다. 상자 안에는 진귀한 진주와 보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만 땅에 주저앉아 두 눈을 꼭 감았다. 떨리는 손으로 보물들을 어루만져보며 희열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뜻밖의 재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시 상자를 열어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상자의 뚜껑 안쪽에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그가 보물을 들어내고 거울을 보았을 때 거울 속에는 귀신같이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너무 놀라서 그만 눈을 감았다. 그는 놀라고 당황하여 거울 속의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댁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나 도망쳤다. 그 뒤 그는 여전히 예전처럼 빈궁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위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불교적 지혜를 덧붙였다.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하기 위해 많은 불자들이 불법을 배우고 닦는다. 그들은 여러 가지 공덕을 이루어 마치 보물 상자를 얻은 것 같지만, 흔히 말하는 신견(身見-신체가 가지고 있는 그릇된 견해)과 아집(我執-실체가 있다고 믿는 집착)에 미혹되어 무상무아(無常無我) 속에서 망령되게 유아(有我)에 집착한다. 신견과 아집은 마치 거울 속의 얼굴처럼 실존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에 선정도품(禪定道品-선정과 지혜로 열반의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방법)과 같은 무루(無漏-번뇌가 없음) 공덕의 도과(道果)를 수련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보물을 얻고도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불교에 삼귀의(三歸依)라는 말이 있다. 이말은 ‘부처에 귀의하고, 불법에 귀의하고, 승려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에 귀의한다.’는 것은 자신을 구제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두 가지 장애(二障-해탈을 방해하는 것)’를 철저히 버리고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한다. 부처에 귀의하는 데는 두 가지 대상이 있다.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이 그것이다. 법신은 부처의 뜻을 가진 몸으로 법을 만들고 성불하는 길에서 얻은 지혜의 자량(資糧-식량)을 말하고, 색신은 부처가 갖고 있는 실제 형체로서 법을 만든 사람이 번민을 구제하거나 보시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얻은 복덕(福德)의 자량을 말한다. 이 둘을 일러서 ‘부처에게 귀의하는 것’이라고 한다.
‘불법에 귀의하는 것’은 붓다의 교의(敎義-진리의 가르침)와 현자(賢者) 대덕(大德-덕 높은 승려)들이 남긴 사상에 귀의하는 것을 말하고, ‘승려에 귀의하는 것’은 승단에 귀의하는 것으로 사존(四尊) 부처(석가모니,아미타,지장,미륵불)께 귀의하거나 성과를 이룬 성인(聖人)에게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불교의 이치와 개념은 인도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중국사상과도 차이가 컸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질 때 중국의 학자들은 불교의 명언(名言)이나 이치를 접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해하기 어려웠고 오리무중에 빠져 그 뜻을 잘 알지 못했다.
동진시대(317∼420년) 혜원(慧遠)이란 학자가 불교를 접하고는 불교에 심취하여 “천하에 여러 가지 학문이 있지만 불교에 비하면 모두 쭉정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불교를 널리 전파하고 다녔다. 혜원의 성은 가(賈)씨로 안문(雁門) 누항(樓杭)출신이었다. 그는 출가하기 전에 삼촌을 따라 낙양에서 육경(六經)과 「장자(莊子)」를 배웠다. 그러나 진나라 말 전쟁으로 학문의 뜻을 접고 고승 도안(道安)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했다. 혜원은 도안의 제자였지만 불경을 설하는 방법은 도안과 많이 달랐다. 사람들은 도안보다 혜원의 강의가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것을 알고 도안의 제자들도 모두 혜원의 강의에 몰려들어 오히려 스승이 푸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위진남북조시대 현학(玄學-노장학문)이 성행하던 시기에 생소한 불교가 침투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에 혜원은 「장자」를 통해 불경을 해석하니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와 잘 알고 있는 전고(典故-전례고사)에 힘입어 듣기도 편하고 알기도 쉬운 불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노자」「장자」와 함께 불교를 삼현(三玄)이라 통칭했으니 불교가 얼마나 현학에 의지했는지 알게 한다. 불교와 현학의 합류는 불교의 중국 전래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스물네 살 때 이미 대덕의 지위에 오른 혜원의 강의와 설교가 중국불교가 흥성하도록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황금은 하나지만 그것으로 금귀걸이를 만들 수도 있고 금반지, 혹은 금팔찌를 만들 수도 있다. 이렇듯 금으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 수 있지만 실체는 금이라는 하나의 물건이다. 이 도리를 안다면 심(心)과 성(性)이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실상은 둘 다 우리의 본체임을 알 수 있다. 조금 어렵게 들리지만 심즉시불(心卽是佛)‘마음이 바로 부처’에 관한 고사를 보도록 하자.
「중국에 한 학승이 있었다. 그는 남양에 사는 혜충국사 참선이 수준이 높고 깊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 배우게 되었다. 두 사람이 불당에서 좌선할 때 학승이 물었다.
“선(禪)은 심(心)의 별명이지만 심은 불교에서 더해지지 않고 속세에서 멀어지지 않는 진여실성(眞如實性)이지요. 선종의 조사들은 이 심을 성이라고 고쳤는데 법사님께서는 이 심과 성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알고 계시지요?”
혜충은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미혹되었을 때는 차별이 있지만 깨달았을 때는 차별이 없네.”
학승은 한걸음 더 나아가 다시 물었다.
“불경에 이르기를 ‘불성은 변화하지 않지만 마음은 변한다.’했으니 어찌 차별이 없다고 하시는지요?”
혜충국사는 차분하게 예를 들면서 설명하였다.
“자네는 말에만 기대고 뜻에 기대지 않아서 그렇다네. 이를테면 추울 때 물이 얼어 얼음이 되고 따뜻할 때는 얼음이 녹아 물이 되지 않나. 미혹되면 성(性)이 얼어 심(心)이 되고, 깨달으면 심이 녹아 성이 되는 거라네. 심과 성은 본디 같은 뿌리를 두고 있지만 미혹되었느냐, 깨달았느냐에 따라 차별이 생기는 것이네.”
붓다는 모든 현상(諸法)을 공(空)한 것이라 하면서도 순수한 공은 공이 아니라고 했고, 모든 차별상을 있는 것(有)이라고 하면서도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 것은 허깨비(幻)라고 하면서도 허깨비도 참이라고 했다. 공을 참이라고 하면서도 공은 허깨비라고 했고, 모든 유위법(有爲法-인연과 합하여 생기는 모든 사물)이 꿈이고 물거품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선법(善法)을 수행하면 정등정각(正等正覺-진정으로 평등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였다.
금방 유위(有爲)라고 했는데 또 무위라고 하고, 출세해야 한다고 하고는 또 입세(入世)해야 한다고 하고, 설법을 49년간 했다고 해놓고 한 글자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고, 법문(法門)은 무한하다고 하고 또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실(實)하지도 않고 허(虛)하지도 않으며 그러기도 하고 옳기도 하니 불법의 도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붓다는 사람마다 불성을 가졌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부처는 속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다. 몽매한 마음으로 보면 쓸모 있는 게 하나도 없지만 마음을 닦고 보면 쓸모없는 것이 없다. 크게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불교의 우주관)로부터 작게는 티끌에도 부처가 있다. 부처는 있는 곳이 없지만 없는 곳이 없고, 하는 일이 없지만 또 하지 않는 일이 없다. 허공 속에서도 모든 현상을 보며 갖지 않을 수 없지만 또한 미혹(迷惑-무엇에 현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함)을 가져서는 안 된다.
불교는 사람의 심성(心性)을 본래면목(本來面目), 여래장(如來藏), 법신(法身), 실상(實相), 자성(自性), 진여(眞如), 본체(本體), 진심(眞心), 반야(般若), 선(禪)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이것들은 틀림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가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미혹과 깨달음은 차별이 없지만 본성은 다르지 않다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의 유명 사찰에 가면 만나는 특히 요즘 들어 우리나라 절에서 꼭 만나는 ‘주머니 스님(包袋和尙)’은 어떤 스님일까?
“중국에 후량(後粱)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개평 연간(907∼911년)에 사명봉화(四明奉化-지금의 절강성)땅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스님 한분이 왔다. 이마를 찡그리고 불룩한 배를 내밀고 어깨에 커다란 주머니를 매고 다니면서 구걸하고 다녔는데 구걸한 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스님이 매도 다니는 주머니는 마술주머니나 되는 듯 아무리 많이 넣어도 차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 스님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에게는 신비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행히 봉화땅의 민심이 순박하여 그가 구걸하기만 하면 내주었다. 그래서 이상한 스님은 봉화에 눌러 살게 되었다. 이름도 모르지만 주머니를 메고 다니는 그를 사람들은 ‘주머니 스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스님에 대해 어느 날 아이들이 장난기가 발동해 종일 스님을 쫓아다녔다. 아이들은 주머니 속에 무슨 보물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주머니 스님은 짓궂게 쫓아오는 아이들을 당할 수가 없어 거리에서 주머니 속의 물건을 다 쏟아놓았다. 그 속에는 바리때와 나무로 만든 신발, 여러 가지 음식들과 기와조작, 돌덩이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아이들은 크게 실망하였지만 주머니 스님은 신이 났다. 스님은 땅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하나 주우면서 입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이것이 무엇고 바리때로구나, 이것은 무엇고 사발이지, 이것은 뭐더라 그래 기와조각이야, 이것은 벽돌...”
땅에 있는 물건들을 다 주워 넣고 나서야 중얼거림도 끝났다. 그리고 한참 후에는 어디서 주워왔는지 똥 덩어리를 종이에 싸면서 말했다.
“어 이건 미륵내원(彌勒內院)에 있는 물건이 아니야? 왜 여기 있지?”
하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그만 놀라 모두 도망을 갔다.
주머니 스님은 도대체 누구인가? 절에 가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큼직한 배를 내밀고 두 다리를 교차하고 앉은 불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바로 미륵불로서 사람들은 미륵의 화신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이런 대구(對句-짝을 맞춘 시구)를 썼다.
배는 커서 세상에 용납하기 힘든 일도 용납하고
벌어진 입은 항상 웃으니 천하에 가소로운 사람을 보고 웃더라.
미륵은 범어 Maitreya 를 음역한 것으로 자씨(慈氏)성이라는 뜻이며 이름은 아이다(阿夷多)라고 한다. 미륵보살은 붓다의 제자로 육욕천(六欲天)의 도솔천궁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불경을 설했다. 석가모니불은 그가 도솔천에서 수명을 다하고는 인간 세상에 환생하여 부처를 계승할 것이라고 예측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이라고 한다. 붓다가 열반한 56억 6천만년 뒤에 반드시 성불한 보살을 대신하다는 말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미륵불彌勒佛’이라고도 부른다.
지난 열흘 동안 생소하지만 감명을 주는 불교 이야기를 읽고 느꼈다. 이 책을 번역한 송춘남 선생이 “책을 번역하면서 또 한 번 인생수업을 한 셈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이나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깨달음과 무위의 경지 근처라도 가보려고 결심해 본다. ‘결심’이란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마음이 스스로 진 빚이기에 갚지 않음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지만 나는 다 갚으려고 애쓰며 살고 싶다.”고 한 것처럼 나는 나의 길을 스스로 가고 있는지 돌아본다.
(20191101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