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空)
여기 공은 불교용어로 「공空을 깨닫는 27가지 길」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의 제목이다. 책은 ‘용타(龍陀)’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의 저술인데, 스님의 속명은 알 수 없으나, 광주고와 전남대 동 대학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24세 때 청화선사를 은사로 승려가 된 뒤 10여 년간 교직생활을 했으며 제방선원(諸方禪院)에서 20안거를 성만했고, 올해 속세 나이 78세인데 저서로 「마음 알기 나누기 다루기」, 「10분 해탈」등이 있다.
책은 4×6판으로 119쪽에 불과하지만 심오한 내용은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새겨가면서 읽다보면 뭔가가 남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으로 정독해 볼 생각이다. 용타스님도 책을 펴낸 목적이 “공을 깨닫고 체험하는 것, 그저 한번만 읽고 말 책이 아니다. 거듭거듭 읽고 사유하다 보면 공의 이치에 대해‘아하!’하고 다가오게 될 것”이라며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삶이 이런 것이구나! 걸림 없는 삶이 이런 것이구나! 이런 상태의 삶을 열린 삶이라 하겠구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문에 “자가(自家)에 절체절명의 진리라는 이름을 내걸고 타가(他家)에 걸린 다른 진리를 틀렸다고 시비하는 일이 역사의 곳곳에서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참혹상을 빚어내고 있는가? 인간의 지성은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방편으로 존재하는 것이 진리이다. 자기가 믿는 진리에 충성을 다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내가 지지하지 않는 진리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은 더 아름답다.”고 했다. 참으로 종교에 귀의했다는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근거없이 비방하는 것은 꼴불견이 아닐 수가 없다.
책에는 기승전결, 서론 본론 같은 건 없다. 깨달음의 방편들 27가지를 나열해 하나하나가 바로 본론이고 심득해서 얻어야 하는 진리인 것 같다.
1편 연기고공(緣起故空)에서 27편 영시고공(永時故空)까지를 숙독으로 읽어 보아도 무언가가 깊숙한 곳에 잠겨있는 듯, 그 무엇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일부의 내용을 옮겨보면서 정진해야겠다는 생각만 한다.
01. 연기고공(緣起故空)
모든 존재들은 인연에 의해 존재하므로 공空하다. 천하의 모든 존재가 다른 것들과 인연을 맺음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존재도 존재 그 자체를 실체(實體)라 할 수 없다.
모든 개체는 연기적(緣起的) 존재이므로 비실체(非實體)요, 무실아(無實我)요, 무아(無我)요, 공(空)이다.
다시 말해 존재계(存在界)는 모두가 한 덩어리 유기체로 그 어떤 개체도 연기의 고리를 끊어내고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러한 존재법칙에 대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 此起故彼起 此滅故彼滅)’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존재를 실체로 여길 때는 그것이 분별分別-시비是非-집착執着의 대상이 되지만, 반대로 비실체로 여긴다면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없다.
곧 전자의 경우는 집착으로 인한 괴로움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는 집착할만한 대상이 본래 없으므로 그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사라진다.
어떤가? 이 대목에서 구원과 해탈의 서광이 눈부시게 비쳐오지 않는가! 향기처럼 퍼져오지 않는가! - 25쪽
03. 무한고공(無限故空)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도, 100년을 사는 사람도, 1000년을 사는 소나무도 무한 앞에서는 찰나의 존재다. 무한 앞에서 어떤 개체가 실체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며 뽐낼 수가 있겠는가?”
무한의 차원에서 보면 그 어떤 것도 존재의미를 찾을 수 없으므로 공空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서로 어우러져 관계를 맺을 때 존재할 수 있다. 그 전체가 실체이지 어떤 개체나 부분이 실체일 수 없다. 그러므로 ‘나’라는 개체를 유념하며 실체화(實體化)하고 집착하여 괴로움의 나락(奈落)에 떨어진다면 ‘나’라는 개체 아이덴티티*를 지양하고 전체 혹은 무한 아이덴티티를 취하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다.- 31쪽
*현재 자기가 가진 특성이 언제나 과거의 그것과 같으며 미래에도 이어진다는 생각
27. 영시고공(永時故空)
무한한 시간 차원에서는 존재하는 것들이 다 공하다는 것인데 사람이 존재의 무게를 느끼는 것은 공간적으로 그럴 만 한 거리에 있는 경우이듯 시간적인 거리의 경우에도 또한 그러하다.
“인간은 현재에 집착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현재의 치통은 심각하다. 그러나 1년 후쯤 치통을 앓게 된다고 하면 심각성이 덜하다. 지금 당장 보자 할 때 두렵지 내일 두고 보자 하면 여유가 있다. 나아가 과거에 있었던 치통은 도리어 아롱진 추억담이 된다.
‘세월이 약’이라고 함은 현재의 고통을 시간이 좀 지난 과거로 놓고 볼 때는 덜하다는 뜻이다. 어머니 죽고 도저히 살 수 없었을 줄 알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잘 살아간다. 치열했던 과거의 모든 역사는 그것이 임진왜란이든, 2차 세계대전이든 세월이 많이 지난 시점에서는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다.
현재 내 존재의 무게를, 참기 어려운 고뇌의 현실을 시간적인 거리를 두고 관조(觀照)해 보라. 거대한 우주 공간도 마찬가지다. 그리 먼 미래가 아닌 내일이나 모레쯤이 공겁(空劫)이지 않겠는가? 명상적으로 공겁에 머물러 보라. 무한히 거대하게 여기던 우주가 한 개의 물거품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게 느껴질 것이다. 무한 분의 일이 영零이듯, 무한 분의 억만도 영이다. - 100쪽
이제 공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자. 책에서는 ‘공의 역사적 의미’라고 했다. 불교라는 가르침을 세상에 알린 싯다르타는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소년시절부터 생노병사에 대한 문제의식이 남달랐다고 한다. 그는 태자 자리를 버리고서라도 이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각한 생각으로 노병사(老病死)에 대해 혐오감까지 가졌었다.
아버지인 ‘정반왕’은 아들에게 사람으로서 생노병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므로 더 이상 그 문제를 고민하지 말고 왕위 계승에 관심을 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태자는 단호했다. 그는 특히 늙음(老)과 병(病)듬은 감수할 수 있다 해도 죽음(死)만큼은 절대로 수용하기 힘들었다. 이후 태자의 관심은 오직 인간의 죽음문제에 집약되었다.
‘죽지 않게 해 준다면 부왕의 뜻에 따라 왕이 되겠다.’고 한 확고한 신념에 아버지도 더 이상 아들의 출가를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는 29살 되던 해 그가 살던 왕성(王城)을 떠나 수행자의 길로 나섰다. 왕성을 떠난 후 6년 동안 그는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수행함으로써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이르러 스승들로부터 인가(認可)를 받았다.
그러나 그런 경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화두로 삼은 죽음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상관없음을 인식하고 스승들을 떠나서 과거, 현재, 미래의 어느 수행자도 해낼 수 없는 극한의 고행수행을 했지만 역시 죽음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싯다르타는 외도(外道)와 다른 문화에 의지한 6년간의 수행을 정리하고 스스로를 스승 삼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불성정각불가차좌(不成正覺不起此座)즉,‘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죽으리라’는 결연한 결심을 굳히고 보리수 아래 좌정(坐定)하여 끝판의 결전에 임해 대각(大覺)을 얻게 되었는데 이 대각의 방편(方便)은 사유(思惟), 대각의 내용은 연기(緣起)였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불교에 대해, 다시 말해 원시불교의 대략을 이해한 것이다. 그렇다면 싯다르타가 대각해 얻었다는 그것, 사유와 연기란 무엇인가? 물론 싯다르타가 대각에 이른 과정과 이론에 대해 이견도 있기는 하지만 이 둘을 모르고는 아무것도 안 것이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싯다르타는 수정(修定)의 길이나 고행의 길로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다. 그 새로운 돌파구가 바로 사유의 길이었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다.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이며 그런 길은 없는 것인가?”하는 문제의식에서 수정이나 고행으로는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고는 사유에서 길을 찾은 것이다. 사유는 팔정도(八正道)의 두 번째 덕목인 정사유(正思惟)에 해당하는 것으로 다른 말로는 사색(思索)을 뜻한다. 인류 최초로 사색을 통해서 존재의 원리인 연기의 이치를 깨닫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는데 이것을 대각(大覺)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緣起-인연이 일어남)는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기에 죽음 문제의 해결로 이어지고 그것을 대각이라고 한 것일까?
연기란 천하에 존재하는 유형무형, 유정무정(有情無情)등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세상의 아니,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그 어느 것이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과 공간적, 시간적 관계를 가짐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이치를 모르면 존재하는 것들을 실체시(實體視)하므로 집착과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싯다르타를 비롯하여 연기의 이치를 깨달은 선각자들은 실체라고 구획지어 집착할 것이 본래 없다는 사실을 수긍(首肯)하게 되고, 실체로 집착함으로 인해 일어났던 고뇌에서 벗어난 것이다.
정리하면 실체→집착→고통→연기→무아→해탈로 이어지는 것으로 즉 존재하는 것들을 연기로 파악하여 실체가 아닌 무아(無我), 곧 공(空)으로 수긍하면 집착이 사라져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싯다르타가 ‘나는 죽는다.’와 ‘나는 죽기 싫다.’사이를 오가면서 인간의 절대 한계인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서 어린 시절 그토록 고민하며 살았고, 출가사문이 된 뒤 6년 동안도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결국 어느 문화와 수련을 통해서도, 어느 스승을 통해서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스승삼아 보리수 아래 앉아 깊게 사유하여 연기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 깨달음은 싯다르타에게 부귀영화와 왕위까지 내던지게 했던 죽음의 불안을 단칼에 없애 주었다. 연기의 이치로 무아(無我, 空)임을 수긍하게 되었고 무아(無我)이므로 죽으려 해도 죽을 ‘나’가 본래 없는 이치가 확연해지면서 그때까지 자아(自我)의 죽음 여하에 급급해 하던 불안이 사라지면서 해탈해 버린 것이다. 〈연기→무아→해탈〉이것 이외에 그 어떤 방법이 또 필요하겠는가!
이쯤에서 “연기라는 것을 이해했다면 〈연기→무아→해탈〉언저리에 머물며 스스로를 돌아보라. 본인이 이해한 연기이므로 무아라는 관념이 마음속에 있는 여러 집착들을 떨쳐내는 약재(藥材)로서 효험이 있는가를 느껴 보라. 효험이 없다면 연기를 아직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했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효험이 있다면 그 효험이 보다 확연하도록 명상(瞑想, 正思惟)을 해 보라. 연기·무아의 이치가 보다 선명해지면서 삶에 대한 다양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면 이제 석가모니 부처의 첫 아라한(阿羅漢)이었던 제자 60명과 비교하여 일단 차별이 없다.”라고 용타스님은 말한다. 풀이하면 이를 이해하게 되었다면 불제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부처님 제자 60명의 아라한은 무엇이며 누구인지, ‘나도 그들처럼 될 수 있는지’보도록 하자. 깨달은 이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녹야원으로 갔으며 거기서 수행자시절 도반이었던 다섯 명의 비구를 상대로 전법하였다.(초전법륜) 비구들 모두가 깨달음을 얻자 “이제 세상에는 나를 포함하여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도다.”고 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마을의 부잣집 아들이던 ‘야사(耶舍)’라는 청년이 심리적인 괴로움으로 방황하던 중에 부처님을 만나 부처의 설법을 듣고서 아라한이 되었으며, 야사의 추천으로 그의 친구 54명도 부처의 설법을 듣고 역시 아라한이 되었다.
녹야원에서 설법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60명이 아라한이 배출되었다는 것인데 그 기간에 대해 3개월, 6개월 설 등이 있지만 모두 1년 이내에 일어난 일로 보인다. 여기서 유의해야할 점은 다섯 명의 비구들은 투철한 수행자였기에 부처의 설법을 듣고 쉽게 아라한이 되었다 하더라도 야사와 야사의 친구들은 그냥 시정(市井)의 평범한 이들로 몇 차례 설법을 듣고 바로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 아라한이란 그토록 지난(至難)한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라한의 경지가 해오(解悟)인가, 증오(證悟)인가 한다면 해오 쪽이고, 돈오돈수(頓悟敦壽)의 돈오가 아니라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돈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점차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 된다. 또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60명의 아라한을 깨우칠 때 그 깨우치는 방법에 대한 논의에도 이견이 있으나 여기에서 깨달음을 편 것은 팔정도(八正道)의 정견(正見)이었을 것이다. 정견이란 가짓수가 무수하지만 60명 아라한이 뚫었던 정견은 연기의 이치고 연기가 곧 정견으로 여기서 무아의 이치가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니 무아가 바로 정견, 바르게 본다는 것이다.
좀 난해하지만 읽다보면 나름 이해도 가능하리라 본다. -2020.1.23.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