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소프라노 신영옥은 새카만 눈이 빛났고, 절정으로 치닫는 고음은 금방 혼(魂)을 빼놓을 듯했다. 무대 위에서는 그녀를 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려오니 그녀는 미혼의 48세로 돌아왔다. "저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일 뿐, 정말 인생살이를 몰라요. 아기예요. 저만의 꿈속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요" 하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의 화려한 면만 봅니다. 공연이 끝난 뒤 어떨 땐 귀찮아서 화장도 안 지우고 그냥 뻗어 자요. 입 벌리고 자는 걸 상상하겠어요. '프리마돈나'이니까 당연히 양식을 좋아하는 줄 알죠. 돼지 김치찌개와 보쌈, 제육볶음을 내가 찾아 먹는다면 이상하게 봐요."
―당신의 노래에 대해 난 언급할 자격이 없고 세속적 관심에 대해서만 묻겠습니다. 당신은 일년에 열달쯤 공연을 떠나 있는데, 수입과 지출은 어떻게 됩니까?
"세금을 내고, 매니지먼트 회사와 일정 부분 나누고, 또 레슨 비용도 들죠. 아버지는 '레슨비가 너무 비싸다. 학생도 아닌데 아직도 레슨을 받느냐'고 잔소리하세요. 이런 관리를 78세의 아버지와 언니가 해요. 얼마 전까지 1000원짜리 영수증까지 모두 챙겨드렸어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아직 내 도장이 없어요."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이 나이까지 개인 레슨을 받나요?
"하루 한두 차례 외국어 발성을 위해 받아요. 다른 유명 성악가들도 다 마찬가지예요. 레슨받을 때마다 꼭 녹음해요. 뉴욕의 내 아파트에는 그런 테이프가 수백개가 넘어요. 레슨 코치도 이렇게 많은 걸 보면 '넌 정상(正常)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밤에 혼자 있을 때마다 이걸 들으며 연습해요."
―당신은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라몬 바르가스 등 세계 유명 성악가들과 같이 공연했지요. 이 중 누가 가장 기억납니까?
"1993년 일본에서 파바로티와 '사랑의 묘약' 공연을 했지요. 워낙 육중한 몸이라 거동하기 힘들어 우린 그가 묵는 호텔 객실에서 리허설을 했지요. 그때 파바로티를 처음 만났죠. 그런데 나를 향해 꽥 소리 질렀어요. '왜 날 쳐다봐. 관중들이 네 엉덩이를 쳐다보기 위해 500불 입장료를 내는 줄 알아.' 성악가는 늘 관객을 쳐다보며 노래 불러야 한다고 그는 믿고 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상대 역(役)을 비스듬히 바라보며 노래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하지만 그때 저는 막 데뷔한 직후라 그저 너무 놀라 울먹였어요.
그가 육중한 몸을 내게 기댄 채 아리아 '몰래 흘리는 눈물'을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거의 스테레오를 옆에 둔 기분이었지요. 노래가 쩌렁쩌렁 울리면서 쫙 뻗어나가요. 그는 커튼콜을 받고 인사할 때 장난스럽게 쪽쪽거리며 내게 10번이나 키스했어요. 그 뒤로 7번을 더 함께 공연했지요. 내가 만난 가장 위대한 성악가예요."
- ▲ 신영옥씨는“말하면서 윙크 하는 버릇이 있어 남성들이 오해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동안 윙크한 적은 없었다. 서울 광장동 W호텔 안에서./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아요. 오직 저 자신에게 집중하죠.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무척 떨죠. 루치아노 파바로티도 무대 뒤편에서는 벌벌 떨어요.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해 왔다 갔다 해요. 하지만 무대에 서는 순간 눈에서 불이 나죠."
―그런 공연을 하려면 일단 체력이 좋아야 할 것 같군요.
"공연할 때는 3시간 전쯤 밥을 먹어둬요. 양식으로는 안 돼요. 공연을 갈 때마다 전기밥통을 꼭 챙겨 갑니다. 파리에 갔을 때는 한국 수퍼에서 장을 본 뒤 객실 안에서 밥을 지어 먹었어요. 당시 공주 역(役)이었는데, 상대 성악가가 '공주가 마늘 냄새가 난다'고 인상을 써요. 내가 '이건 한국 향수다. 너희들 겨드랑이 냄새는 더 심하다'고 깔깔거렸어요.
칠레에서 '진주 조개잡이' 공연 리허설을 할 때도 혼자 근처 한식당에서 먹고 왔죠. 객실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 위해 보온병에 끓는 물도 담고서. 그런데 상대 가수가 제게 키스하는 장면에서 고개를 돌려요. 다음 날 점심 때 그를 한식당에 데려가니 좋아했어요. 내가 성격이 털털하고 장난기도 많아요."
그건 세월의 힘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난 생각했다.
―나이 드는 게 좋습니까, 젊었을 때가 좋습니까?
"젊었을 때는 하루가 지옥 같았어요. 창문에서 내려다보면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까, 내가 높은 데서 떨어지면 안 다치고 죽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엄마한테 '죽고 싶다'는 편지도 썼어요. 위출혈이 심해 제대로 앉아 밥도 못 먹었습니다."
―왜 그리 힘들었지요?
"줄리아드 음대를 들어간 뒤로 그 경쟁에서 지쳤던 것 같아요. 여기에 올 때는 모두들 '영옥이는 위대하게 될 거야' 하고 기대했는데…. 내 능력이 이 정도인가, 심지어 외모가 이상하다니, 입이 어떻다니 하는 말에도 상처를 받았어요. 많이 울고 늘 우울했어요."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엄마의 끊임없는 성화였죠. 뉴욕과 서울은 시간이 정반대인데도, 엄마는 하루도 안 거르고 항상 학원에 가는 시간과 귀가하는 시간에 맞추어 전화를 걸었어요. 제때 안 받으면 나중에 고함을 질렀어요. 전화벨이 울리면 지레 가슴이 콩닥거렸어요.
심지어 '화장이 진하다' '학교에서 대체 뭘 하나' '왜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느냐'는 등 가족 전체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를 부쳐오기도 했어요. 방학 때 서울에 와서 침대에서 자다가 눈을 딱 떴는데 엄마가 내려다보고 있어 소스라치게 놀란 적도 있어요.
엄마는 나름대로 제가 기대에 못 미치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겠지요. '남들은 노래를 하고 싶어도 재능이 없어, 경제적 후원이 없어 못하는데, 엄마가 다 해주는데도 너는 게을러서 못하느냐'는 것이었지요."
―어릴 때부터 엄마에 의해 음악을 하도록 키워져 온 셈인데, 당신이 만약 자식을 키운다면 이런 엄마가 될 건가요?
"전 못할 것 같아요. 한때는 엄마가 미웠지만, 세월이 지나니 그리워요. 엄마는 정말 훌륭한 분이었어요. 제 자질을 알아보고 길을 열어준 거죠. 선견지명이 있었죠.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 엄마는 꼭 남대문 시장에 가서 알록달록한 바지를 사 입었어요. 떡에 곰팡이가 슬면 훌훌 털어버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쪄서 먹어요. 그 장면을 떠올리면, 저는 팬들이 준 꽃의 리본도 아까워 안 버려요. 무엇을 담아온 비닐이나 상자도 그냥 버리는 일이 없어요."
그녀는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한 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에 도전해 두해 연속 떨어지고, 세번 만에 붙었다.
"처음 떨어졌을 때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악착같이 꼭 이루겠다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그때서야 엄마도 '그냥 들어와 시집가라'고 했어요. 내 자존심보다 그런 엄마를 볼 면목이 없어, 다시 도전했던 것이죠."
콩쿠르에 우승한 뒤 무대에 설 기회가 온 것은 1991년 겨울이었다. 베르디의 '리골레토' 공연 때 그녀는 공연장의 '대타(代打)석'에 앉아 있었다. 이날 여주인공 '질다' 역은 홍혜경씨였다. 하지만 홍씨가 감기에 걸려 공연 중간에 빠지게 됐다.
"연출진에서 대타석에 앉아 있던 내게 분장실로 빨리 따라오라고 했어요. 하늘이 노랬어요. 화장실도 급했어요. 가발은 크고…. 제게 주어진 첫 장면은 맨발로 '아버지!' 하며 뛰어나가는 겁니다. 관객들이 개미알처럼 보였습니다. 그 뒤로 이 오페라 공연의 배역 명단에 제가 들어갔지요."
무대에서 그녀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1993년 간암으로 숨졌다. 임종 직전까지도 딸의 공연에 지장을 줄까 봐 알리는 것을 막았다. 그녀는 닷새 뒤에 알았다. 그녀는 여행용 트렁크에 부적(符籍)처럼 어머니의 내복, 낡은 옷가지를 넣어 다닌다고 했다.
"늘 가족이 그리워요. 아버지가 저를 보고 싶어해 한국 공연을 자주 하려고 해요. 여기 오면 늘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합니다. 지금도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아버진 저를 '이쁜이'라고 불러요. 내심 제가 결혼하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아요."
―그럴 리가…. 독립할 나이가 벌써 지났잖아요?
"지금도 아버지가 뭐라 하면 그대로 따라요. 홀로 계시는 게 안 됐잖아요."
―그 나이 되도록 연애를 못했다면 거짓일 테고 어떤 남자가 매력 있나요?
"안 했을 리가 없죠.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남자는 도망가고…. 중매가 들어오는데, 저는 변호사 의사 같은 '사' 자는 별로예요. 결혼하고 싶지만 혼자서도 잘해요. 집 안에서 전구 갈고, 못 박고, 액자 걸고, 막힌 욕조 뚫는 걸 직접 다 합니다. 그런 일이 재미있어요. 망치가 종류별로 있고, 다른 용구들도 거의 다 갖추고 있어요. 제가 10년 된 분장용 눈썹을 보여주면 친구들이 기절해요. 오페라단에서 유일하게 저는 직접 분장해요. 면도칼, 핀, 족집게 등을 트렁크에 늘 넣어 다녀요. 그러니 제 짐이 항상 많아요."
그녀는 지금껏 베르디의 '리골레토'(질다), '가면무도회'(오스카),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루치아), 구노의 '로메오와 줄리에트'(줄리에트),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수잔나) 역을 맡았다.
―당신은 비련(悲戀)의 여주인공 역으로 많이 기억됩니다.
"어둡고 슬픈 역을 많이 맡았죠. 특히 루치아 역(役)에는 내가 남편을 죽이는 장면에서 광란(狂亂)의 아리아가 있어요. 이 공연을 할 때면, 불편한 꿈을 꾸고 근육이 아팠어요. 남들은 비련의 여주인공이 내게 더 어울린다고 하지만, 난 밝은 배역이 좋아요. 무대에서 뛰고 활기차게 노래하는…. '피가로의 결혼'에서 수잔나 역을 맡을 때면 실제 생활에서도 에너지가 넘치죠."
―클래식 마니아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당신보다 조수미씨가 더 알려져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사람들은 누가 더 낫다느니 따지는 걸 재미있어 해요. 가수마다 소리가 다 달라요. 수미는 높은 걸 잘하고, 혜경 언니는 서정적으로 잘해요. 특히 수미는 활달하고 머리도 좋아 인기가 많지요. 전 매스컴에 홍보하는 게 마치 '아첨'하는 것 같았어요."
인터뷰가 끝난 뒤 그녀는 아버지에게로 갔다.
4세 때 KBS 합창단… 프로 무대 출발은 늦은 편
신영옥은 1961년 서울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이북 출신으로 사업을 했다고 한다. 일찍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엄마의 손에 이끌려 4세 때 KBS 오디션을 보고 합창단 활동을 했다. 초등학교 때는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해외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그녀는 선화예술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9년 뉴욕으로 가 줄리아드 음대를 다녔다.
1990년 세계 3대 오페라단으로 꼽히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서 입상했다. 프로 무대에서는 늦은 출발이었다. 그녀의 재능은 일찌감치 주변의 기대를 받았지만, 실제 콩쿠르 등에서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 오페라단에서 2006년까지 전속으로 일했다. 그러면서 영국의 로열오페라 하우스, 프랑스의 바스티유 오페라, 독일의 쾰른 오페라, 이탈리아의 레지오 극장 등 유명 오페라단에서도 공연했다. 지금은 프리랜서다. 뉴욕의 매니저가 그녀의 공연 스케줄을 관리한다. 그녀는 "향후 7년쯤 더 현역 활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천사의 목소리' '깃털같이 보드라운 은빛 목소리' '아름답고 감미로운 음색' '재능만큼이나 풍부한 영혼을 담아 노래하는 성악가' '숨을 멎게 하는 소프라노' 같은 평(評)이 있다. 그녀의 음악 역정을 다룬 '꿈꾼 후에'라는 책이 최근에 출간됐다.